에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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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 |||
선사 | 죠몬 시대(縄文時代) 야요이 시대(弥生時代) 고훈 시대(古墳時代) | ||
고대 |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나라 시대(奈良時代)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 ||
중세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安土桃山時代) | ||
근세 | 에도 시대(江戸時代) 세키가하라 전투 | ||
근대 | 일본 제국(大日本帝国) 메이지 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
메이지 시대 (明治時代) 다이쇼 시대 (大正時代) 쇼와 시대 (昭和時代) | |
현대 | 현대 일본(日本国) 군정기 |
쇼와 시대 (昭和時代) 헤이세이 시대 (平成時代) 레이와 시대 (令和時代) |
일본의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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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日本國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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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쿄토(조정) 에도(막부) |
국가 | 일본 |
대륙 | 아시아 |
인구 | 33,000,000(1868) |
추가 정보 | |
지도자 | 도쿠가와 이에야스(1대) 도쿠가와 요시노부(15대) |
건국 | 1603년(막부 수립) |
언어 | 일본어 |
민족 | 일본인, 아이누, 류큐 |
종교 | 유교(성리학), 대승불교, 신토, |
에도 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뒤진 후인 1600년 10월 21일에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일본 궁상 열도의 패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지금의 도쿄)를 본거지로 수립한 막부가 일본을 통치하던 시대를 일컫는 일본사 용어이다.
일본 3대 막부 중 그나마 가장 정상적이고 중앙집권적 이었으며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고 임진왜란 시절 조선과 비슷했던 인구를 두배 격차로 따돌리며 크게 발전 했으나 쿠로후네 사건 이후 권위가 실추하여 몰락하고 만다. 사실 쿠로후네 사건은 방아쇠였고 더 근본적인 몰락 이유는 존왕양이 사상이었지만...
아는 놈들은 알겠지만 가마쿠라 막부는 아예 쇼군이 허수아비였고 무로마치 막부는 남북조 시대와 전국시대를 빼면 남는 게 몇십년 뿐이었는데 에도 시대에 들어서서 쇼군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가 제대로 형성되었다.
정치[편집]
명목상으로는 쿄토의 천황(=일본발음으로는 '덴노')이 일본의 통치자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에는 그래도 보여주기식으로나마 장군(=일본발음으로는 '쇼군')이 쿄토 인근까지 상경하여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1] 임명을 받는 코스프레라도 했으나 3대 쇼군부터는 그냥 에도에 앉아서 조정이 보낸 임명장을 받는 형태로 극-간소화되었다.
따라서 에도 시대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는 쇼군이었다.[2] 쇼군의 아래에는 막부의 최고위보좌기관인 로주(老中)가 있었는데, 이는 센고쿠시대부터 관습적으로 존재해왔던 집단이 법제조직화된 것이다. 로주는 막부에 우호적인 후다이 다이묘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로주의 우두머리는 다이로(大老)이다. 다이로는 로주들 중 가장 명망있는 자가 되는 것이 관습으로 굳어졌다.
초창기 로주는 쇼군의 자문역을 위해 설치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막부의 중대사안, 심지어 쇼군 선출문제에도 개입하는 등 사실상의 막후실세로 떠오르게 된다. 일례로 9대 쇼군으로 선출된 도쿠가와 이에시게는 장애우였다. 이는 쇼군의 권력이 소위 말하는 '동양적인 전제군주'의 그것과는 달랐음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초기에는 쇼군 보좌하던 틀딱들이 중기쯤 가면 쇼군도 덴노랑 같이 바지사장으로 만들고 지들끼리 해처 먹었다. 물론 형식적으론 쇼군한테 복종했다.
그 이외 로주를 보좌하는 고위 역인으로 와카도시요리(若年寄り)가 있었으며, 그 이외 다이묘 관련 사무와 에도 성내 사무를 관장하는 오메츠케(大目付), 직속가신의 감독을 관장하는 메츠케(目付)가 존재하였으며, 막부직할령에는 부교(奉行)가 파견되어 영지를 관리,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제도[편집]
기본적으로 중앙에 쇼군이 있고 지방에 다이묘가 있는 봉건정치였다. 쇼군가는 다이묘들을 억누르기 위해 산킨코타이(参勤交代) 제도를 실시했다.
지방 영주들 처자식을 에도에 인질 겸해서 데려다 놓고 영주는 자기 영지하고 쇼군이 있는 에도를 주기적으로 오가며 돈지랄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이묘들의 식솔들이 에도에 인질로 잡혀있는 한편, 다이묘들이 산킨코타이를 위해 막대한 재정낭비를 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당연히 지방세력 견제가 될 수 밖에 없다.
막번제도[편집]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전한 도쿠가와 가문이지만 패전한 서군 떨거지(도요토미 파)들을 비교적 온건하게 처리하였다.
그 이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모두 척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쿠가와는 오사카의 서쪽지역에 행사할 수 있는 군사적인 역량이 거의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 괜히 자기에게 반대한 다이묘들 다 족치겠다고 달려들어봤자 역효과만 일어날 공산이 컸음은 두말할 것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도쿠가와로서도 패전한 다이묘들의 세력을 원 상태 그대로 놔두는건 껄끄러울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도쿠가와는 패전한 다이묘들에게 감봉 및 전봉이라는 채찍책과 더불어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당근책을 병행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견제함과 동시에 회유하였다.
반면 자신을 지지한 다이묘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을 견고히 해 나갔다.
에도시대 다이묘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 신판 다이묘 (親藩大名)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본가와 혈연적인 관계가 있는 도쿠가와 일족 다이묘를 칭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모든 도쿠가와 혈통이 신판 다이묘인건 아니다. 이들은 에도 막부의 직할지인 에도, 나고야, 오사카, 나가사키 지척의 요지 혹은 그 지역 자체를 관장하였다.
- 후다이 다이묘 (譜代大名)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도쿠가와를 지지한 다이묘들, 혹은 도쿠가와 일족이지만 종가와의 혈연관계가 먼 다이묘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소규모의 교통 요충지를 통치하였다.
- 준후다이 다이묘 (準譜代大名)
원래는 도자마 다이묘였으나, 조정에 탄원을 하여 후다이 다이묘에 준하는 취급을 받은 다이묘를 일컫는다. 보통 후다이 다이묘의 혈통인 사람이 도자마 다이묘의 가문을 이어받아 막각(幕閣)[3]에서 오랫동안 공적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경우에야 이정도 취급을 해주었다. 이들은 알아서 승격되지 않았고 직접 탄원을 해서 허락을 받아야 했으므로 願譜代라고도 했다. 준후다이 다이묘란 칭호는 후대에 역사학계에서 편의상 구분한 것이지 에도 시대에는 준후다이 다이묘란 칭호는 없었다.
- 도자마 다이묘 (外様大名)
도자마(外様)는 주가(主家)–이 경우에는 도쿠가와가(徳川家)–와 허술한 주종 관계를 가진 가신을 가리키는 말로 막부의 요직에 등용되지 않고 군사 동원 등에만 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쉽게 말하면 세키가하라 전쟁 당시 도요토미를 지지한 잠재적 적군들을 의미한다. 도자마 다이묘들은 주로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통치했다. 원래 이들 중에는 대령(大領)[4] 을 다스리는 다이묘들도 많았는데, 이는 도자마 다이묘들은 후다이 다이묘와는 다르게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는 도쿠가와 가문하고 동급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에도 막부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동군측에 참전한 다이묘들에 대해서는 은상으로 가증을 하면서 원래 그 지역에 있었던 –서군측에 참전한– 다이묘들은 먼 곳으로 전봉을 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에도에서 먼 곳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렇기에 에도 초기에는 사소한 이유로도 개역을 당하는 도자마 다이묘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도자마 다이묘의 영지가 분단되도록 신판·후다이 다이묘의 영지가 놓여져 있어, 이들의 동향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훗날 쿠로후네의 내항 이후 이들이 중앙의 막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막부를 전복시켰다.
일반적으로 도자마 다이묘는 로슈(老中)등 막각의 요직에 임명될 수는 없었으나, 쓰시마국의 소씨(宗氏)처럼 전통적으로 조선과의 외교에 주력을 두었고, 후기에는 마쓰마에씨(松前氏)같이 요직에 오르는 다이묘도 등장했다. 또한 같은 도자마 다이묘라도 예전부터 도쿠가와씨와 사이가 좋았던 다이묘들에게는 대우가 달랐다는 설도 있다.
신분제도[편집]
일본은 다이카개신 이후 중국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사회 신분제도인 양천제(良賤制)를 도입한 바 있으나, 이는 10세기경에 자연소멸되고 대신 일본화된 신분제도가 자리잡아 에도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에도 시대 일본의 신분구조는 다음과 같다 :
- 지배층
- 공가/신관/승려(인구의 1.5%) : 공가는 천황을 보필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진 조정귀족이며, 신관과 승려는 각각 일본의 사상적 기반인 신토와 불교계를 유지하는 집단이다.(다만 권력의 바깥고리에 있는 하급 신관 및 승려, 이를테면 이누지닌(犬神人)은 되려 천민취급을 받았다.)
- 무사(7%) : 혈연으로 이어지는 세습신분층으로 에도시대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계층이다. 그러나 이는 무사 중에서도 최소 철수저 이상의 사무라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일 뿐, 대다수의 고기방패 하급 사무라이들은 리즈시절에도 상급 병졸 정도의 지위였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아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심지어 이들은 죠닌 계층에게조차도 결혼기피대상이 될 정도로 에도 시대 중기에는 그 처지가 안습해진다.
- 피지배층
- 죠닌(6%) : 일본의 막부와 각 지방충들의 정치/경제거점인 죠카마치(城下村)에 집단거주하는 상공인계층이다. 에도시대 중기부터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해져서 후기에는 이들이 메이지유신의 숨은 주역이 된다.
- 농민(84%) : 일본의 주력산업인 농업을 책임지는 서민층이었다. 하지만 법제적으로 혹은-사회규범적으로 서양의 농노와 같은 상태이다.
- 피차별집단(1.5%) : 사실상의 불가촉천민 집단으로, 에타(穢多)와 히닌(非人)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타와 히닌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대체로 에타는 불교의 도에 거스르는 등의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직종(도축업자 등)에 종사하는 자들을 일컫는 용어이며, 히닌은 인륜에 거스르는 행위를 행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히닌은 대체로 걸식자, 노숙자였으나 중질의 범법자, 현관합체자 등도 이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사회적 압력에 의해 '부락'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마을에 집단거류하였기 때문에 부라쿠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히닌의 경우 치안,미풍양속 유지를 위한 공적인 차원에서 수용구역을 설정하여 히닌 무리의 대장인 히닌가시라의 통제를 받게끔 하여 공권력의 지배 하에 놓았다. 피차별 신분은 1871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폐지된 이후에도 관습적으로 여전히 잔존하여 현대에도 약간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회신분은 경직된 구조가 아니었고,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통해 사회이동이 가능했다.
- 귀농/죠닌화 (무사계층에서 피지배층으로 이동) : 말 그대로 무사가 무사계급을 포기하고 생산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회신분 이동이다.
- 요닌에 의한 등용 (피지배층에서 무사계층으로 이동) : 요닌(用人)은 에도시대 사무를 관장하던 일종의 공무원을 의미한다. 이 요닌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등용되는 방법으로 신분이동이 가능했다.
- 고케닌 카부 매입 (피지배층에서 무사계층으로 이동) : 상술했듯 에도시대에는 사무라이의 몰락현상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할 정도로 심각했다. 이러한 몰락 사무라이의 카부(족보)를 매입하는 방법으로 신분이동이 가능했다. 동시기 몰락한 양반가문의 족보를 매입해서 양반으로 상승한 조선의 상민부자들을 떠올리면 된다.
- 입양과 결혼 (피지배층에서 무사계층으로 이동) : 무사계급과 결혼하거나 혹은 서민의 자제를 무사가에서 입양하는 방법으로 신분이동이 가능했다. 에도시대에는 중하급 사무라이와 서민 간의 결혼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고, 이러한 방법으로 신분이동이 이루어졌다.
기타[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려고 실시한 징병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다른 다이묘들을 무장해제 시키려고 폐지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이 병력을 함부로 양성하지 못하게 병역을 모병제로 바꿔버렸다.
세력구조[편집]
중앙[편집]
일본의 세력별 토지점유 | |||||||||||
세력 | 석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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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세력 | 천황 | 3만 석 | |||||||||
황족 및 공가 | 7만 석 | ||||||||||
막부세력 | 막부직할지 | 400만 석 | |||||||||
지교지 | 300만 석 | ||||||||||
사원 | 40만 석 | ||||||||||
다이묘 | 2250만 석 | ||||||||||
일본 전체 | 3000만 석 |
에도 막부는 역대 그 어느 막부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데 이는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능가할 수준의 세력을 거느린 일본 최대세력가였기 때문이다. 막부 세력은 일본 전체 영지의 약 1/4을 점유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세력을 척결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지를 탈취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직속가신들이자 군사기반인 고케닌(御家)과 하타모토(旗本)들에게 일본의 좋은 영지를 지교지로 하사하여 이들의 충성을 받아냈다.
전국의 주요도시들인 에도, 오사카, 나고야, 나가사키 등은 에도 막부의 직할령으로 지정되었다. 이들 도시는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막부는 일본 내에서 상업 통제력과 정보력에 있어서도 다른 세력들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사실상 막부세력은 나머지 세력의 절반이 연합해온다 할지라도 막부 단독세력만으로 이들과 맞설 수 있는 수준의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 영지의 3/4를 점하고 있는 다이묘는 토자마 다이묘 뿐만 아니라 도쿠가와의 분가세력인 신판 다이묘, 연합세력인 후다이 다이묘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에도시대에 도쿠가와에 반감을 가진 세력들이 존재했다한들 이들이 막부에 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이같은 권력구조는 에도시대 장기평화의 시금석이 된다.
지방[편집]
에도시대 일본은 약 300개의 번(藩)으로 구성되어 있는 봉건제 국가였다. 번의 개수는 번의 신설,합병,폐지 등으로 인해 조오오금씩 변하긴 했으나, 250~300개 사이의 갯수를 유지했다.
번 이외에 고대시대 율령반포를 통해 정비된 행정구역명인 국(國)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으나 에도 시대엔 실질 행정구역으로서의 의미는 없었다. 국의 숫자는 68개로 번의 숫자보다 적었다. 에도시대에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는 츠시마 국, 이키 국의 2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66개 국 중 1개 이상의 국을 통치하는 번의 다이묘를 국주(國主)라는 클라스있는 타이틀로 부르기도 하였다. 에도시대 최대 번인 카가 번은 3개의 국을 통치했으며, 사츠마 국은 2개의 국을 통치하였다.
에도시대 일본 10대 번 1863년 기준 | |||||||||||
순위 | 번명 | 지배가문 | 석고[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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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카가 번 | 마에다 | 1,200,000 | ||||||||
2 | 사츠마 번 | 시마즈 | 728,000 | ||||||||
3 | 센다이 번 | 다테 | 620,000 | ||||||||
4 | 나고야 번 | 도쿠가와[6] | 619,000 | ||||||||
5 | 와카야마 번 | 도쿠가와[7] | 550,000 | ||||||||
6 | 쿠마모토 번 | 호소카와 | 540,000 | ||||||||
7 | 후쿠오카 번 | 쿠로다 | 473,000 | ||||||||
8 | 히로시마 번 | 아사노 | 426,000 | ||||||||
9 | 쵸슈 번 | 모리 | 360,000 | ||||||||
10 | 사가 번 | 나베시마 | 357,000 |
초기 에도 막부는 중앙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지방의 다이묘들에 대해 제재를 가했다.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1615년에 모든 다이묘들로 하여금 한개의 성(城)만을 보유할 것을 의무화하였고, 기타 잔여 성들에 대해서는 파괴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공포하여 다이묘와 기타 사무라이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본 법률을 제정하였다. 또한 문제를 일으킨 지방 다이묘들을 상대로 트집을 잡아 감봉시켜버리거나 혹은 자신의 토착기반과 관계없는 멀리 떨어진 땅으로 전봉시켜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감전봉은 주로 에도 막부 초기에 일본의 중부, 동부지방에서 많이 일어난 편이나, 서부지방에도 그 예가 없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대표 번 중 하나인 쿠마모토 번은 원래 가토 가문이 통치했던 지역이지만 2대(代)만에 개역대상이 되어버려 지배가문이 호소카와 가문으로 바뀌어 이 가문의 통치가 막말까지 이어진 바가 있다. 결국 막강한 권력을 가진 중앙의 통제로 인해 그 이전 시대에는 빈번히 일어났던 다이묘들 간의 대결이 에도시대에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고, 이는 250년 장기평화의 시금석이 된다.
반면 훗날 메이지 유신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되는 사츠마 번의 시마즈 가문이나 쵸슈 번의 모리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 측으로 참전, 즉 도요토미 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반지역의 통치를 에도시대에도 지속해 나가 결국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시마즈 세력은 아무런 제재를 당하지 않아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도 시마즈 세력을 그대로 온존시킨 것에 대해 뒷통수가 좀 땡겼는지 죽을 때 사츠마 쪽으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미래에 현실화되었다.)
에도시대에 번은 사실상 하나의 소왕국과 다를 바가 없었고 번들은 막부가 하지마라고 빼애액거린 바 있는 일부 중대행위(ex:화폐 주조, 다른 영주와 전쟁)만 거르면 거의 대부분의 정치활동을 행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
각 제번들은 죠카마치(成下村)이라 불리는 성시(市)를 건설하여 그곳을 행정의 중심지로 삼았다. 죠카마치에는 죠닌(城人)이라고 불리는 도시 상공인들과 사무라이들이 거주하였고, 인구비는 대개 5:5였으나, 3:7, 7:3인 성시도 있었다. 사무라이 거주구역과 죠닌 거주구역은 엄격히 분리되었으며 사무라이와 죠닌 내에서도 신분과 직업에 따라 또 거주구역이 분리되었다. 죠카마치는 중요한 소비시장으로서 에도시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외교관계[편집]
유럽[편집]
일본에 최초로 당도한 유럽인은 포르투갈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당시 전국시대였던 일본에 화승총을 전래하여 군사력의 강화가 절실했던 일본 각지의 다이묘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으나, 수십수백의 지방충들이 난립하는 막장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일본 본토 통일이 가시화되자 그들이 조총, 중국에서 들고온 교역품과 함께 가져온 카톨릭교가 문제시되면서 일본에서의 입지가 축소된다.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 선교사를 일본에서 전원 추방시킨 바가 있었고, 도요토미 가문을 몰락시킨 도쿠가와 정권도 카톨릭 교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요토미의 종교정책을 계승하였다.
도쿠가와가 에도 막부를 수립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에 신흥강국인 네덜란드의 선단이 일본에 입갤하여 통교를 개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지 얼마되지 않은 스페인의 적대국가였고,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동군연합왕국으로 묶여있었다. 이미 일본에는 포르투갈인들을 따라 스페인인들도 많이 입갤해 있는 상태였다. 노련한 장사꾼들인 네덜란드인들은 에도 막부의 윗대가리들이 카톨릭을 경계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자신들은 카톨릭과는 다른 신교도인임을 어필한 다음 카톨릭 뒷담화를 까는 방법으로 일본의 반카톨릭화를 부추겼다.
이로 인해 1613년 금교령이 통과되어 일본에서 크리스트교가 금지되었고, 1639년에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내 입항이 전면금지되면서 이들은 일본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 후 포르투갈의 사절단이 일본과의 재통교를 위해 교섭을 시도한 바가 있으나 사절단들은 전원 참수되어 리스본으로 보내졌다.
포르투갈과 함께 같은 카톨릭 세력인 스페인 또한 일본에서 추방되었고, 개신교 세력인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밀려 자진해서 상관을 폐쇄하고 퇴갤함으로써 네덜란드는 일본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유럽세력이 된다.
네덜란드인들은 거의 200년동안 유럽 문물을 일본에 전파하고, 역으로 일본 문물을 유럽으로 전파하는 파이프 역할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인들이 전파한 유럽 문물들은 막부의 겐세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정의 붐을 일으켜 난학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는 일본인들이 유럽 문명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일본 사회 내에서 서구 세력 위협론이 부상하게 된다. 이를 감지한 네덜란드 왕국이 일본의 전면적인 개항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으나 아직 일본 사회는 쇄국체제 포기를 운운할 정도로 기존 체제가 위협을 받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는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항한 미국 페리제독의 쿠로후네의 압박으로 인해 일본은 개항의 길을 걷게되고, 유럽세력들과 불평등한 위치에서 수교를 맺게 된다.
일본에서의 외국세력 입김이 강해지자 취약해져 있던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뒤에서 통수를 치기위해 칼을 갈고있던 지방충들이 이때다하고 천황을 앞세워 들고 일어나 막부와 대결하게 된다. 유럽의 양대강국 중 하나인 영국은 원래 막부를 지지하였으나, 살영전쟁을 겪고 지방충들의 포텐을 알아챈 후 지방충 선회노선으로 돌아서서 이들을 지원하였고, 영국안티인 프랑스는 막부를 지원하였다. 이 무진전쟁에서 지방충들이 승리함에 따라 에도막부 이후에 등판한 일본 제국은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중국[편집]
일본과 명나라 간의 관계는 무로막치 막부 시절부터 매우 좋지 않았다. 이와 같은 냉기류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동아시아의 중화질서에 도전까지 한 바람에 양국간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도요토미 정권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정권은 중국과의 관계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사신단을 꾸렸으나 명나라의 황제인 만력제에게 퇴짜만 맞았다. 이 사건으로부터 10년이 지난후 명나라가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이번엔 명나라측에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정상화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명나라 사신을 퇴짜놓았다. 도쿠가와 막부로서는 명나라로부터 엿을 먹은 이후의 그간의 10년 사이에 각기 다른 수단을 이용하여 관계를 터놓은 류큐와 조선이라는 채널을 활용하여 중국과의 간접교류를 할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굳이 제후국을 자처하면서까지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과 중국간 관계는 근대시대까지 영구히 단절되었으며 이와 같은 관계단절 상태는 중국의 정권이 청나라로 넘어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민간분야에서의 대중국 교류는 에도 시대에 활기를 띄게 되는데, 이는 청나라가 발전을 이루어 인물이 번창하여 화폐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세계구급 귀금속 산지인 일본과의 무역수요가 중국 내에서 대두함에 그 원인이 있다. 흔히 나가사키 데지마 때문에 일본의 대외무역 주 거래처는 네덜란드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청나라가 에도시대 일본 제일의 무역대상국이었다.[8]
조선[편집]
임진왜란 당시 군주였던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조선의 선조가 퇴갤한 이후 새로이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와 조선의 광해군이었고 그들 모두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쇼군직에 취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국내에서 자신의 위엄을 뽐내기 위해 외국사절단을 게스트로 초빙하고싶어했고, 조선의 광해군 정권은 북쪽에서 그 세력이 막강해지는 여진족에 대비해 남방의 위협을 제거할겸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과 통교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성의 인식과는 별개로 사절단을 누가 먼저 보내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간 신경전이 계속되었는데, 이는 1598년 일본 군대가 반도에서 철군한 이후에도 양국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적대관계였던 탓에 먼저 관계개선 사절단을 보낸 쪽이 GG쳤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양국간의 불편한 관계지속이 가장 불편한 세력이 존재했는데, 바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있는 츠시마였다. 츠시마는 작은 섬을 본토로 하는 세력으로 그 농업기반이 협소하였고 따라서 일본과 조선의 중간에서 양국간 교역에 자국의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따라서 일본과 조선 간 무역이 단절된 상태에서 츠시마가 만성적인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음은 두 말할 것 없을 것이다.
따라서 츠시마는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했었던 짓과 같은 국서 주작을 획책하였고, 그들의 계략은 성공하였다. 츠시마는 막부의 국서와 조선 왕조의 국서를 중간에 개작하여 각자 상대편의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채워 보냈고, 이로 인해 일본과 조선간 관계는 재개되었으며 조선은 비정기적으로 에도 막부에 조선통신사를 보내게 되었다.
비록 양국간 관계는 재개되었지만, 주작질로 인해 재개된 관계인만큼 속은 그만큼 뒤틀려있었다. 양국은 공식적으로는 대등관계를 표방했지만, 일본 측은 대내적으로 조선통신사를 속국의 조공사절단으로 선전하였으며, 조선 측은 일본을 하등국가로 치부하곤 했다.
일본의 조선과의 관계는 18세기 중반에 들어 시들시들해졌으며, 1811년 마지막 통신사가 츠시마에서 간략하게 업무를 보고 조선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제도는 폐기된다.
동남아[편집]
일본과 동남아간의 상호관계는 거의 대부분이 민간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시대 수많은 일본인들이 교역과 용역팔이를 위해 동남아 각지에 진출해 있었고, 이와 같은 활발한 진출로 인해 동남아 각지에 재팬타운이 우후죽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해외에 일본인이 나가는걸 금지함과 동시에 나간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금지하여 통수를 얻어맞은 재외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팬타운에 눌러앉아있다 현지화되었다.
동남아에서 일본인들은 상업과 함께 용병업에서 그 두각을 드러냈다. 전국시대 실직무사들 중 동남아로 건너간 일본인들이 많았고, 이들이 동남아의 군주들에게 고용되어 현지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유타야 왕국의 친위대 장군 직에 오른 야마다 나가마사가 있었다.
대외 확장[편집]
류큐[편집]
류큐 왕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 성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양강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류큐 왕국은 명나라의 조공국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에도 조공 사절을 보내 관계개선을 꾀한 바 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실상 강요한 조선 침공에 극히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류큐와 일본 간 관계는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류큐를 통치하고 있던 쇼네이 왕은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으로부터 새로이 수립된 에도 막부에 복속될 것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인 1602년에 류큐의 선박이 센다이에 표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류큐 선원들을 이듬해인 1603년에 류큐로 돌려보냈고, 사츠마는 이를 계기로 류큐 측에 선원들을 송환한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를 보낼것을 요구하였으나 쇼네이 왕은 이를 묵살하였다.
일본 국내상황이 정리되자 막부는 사츠마를 통해 류큐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이 정보를 입수한 시마즈 측은 다시금 류큐를 에도에 복속시키기 위해 물밑작업을 벌였으나 나하의 쇼네이 왕과 류큐의 삼사관들로부터 조롱만 당하고 말았다. 결국 막부로부터 류큐를 정벌하라는 명이 사츠마 번에 떨어졌고, 사츠마는 류큐 정벌에 착수하여 개전 한달만에 류큐 왕국의 수도인 나하를 장악하였고, 류큐 왕국은 사츠마 번에 항복하고 만다. 쇼네이 왕은 에도로 압송되어 쇼군을 알현한 뒤 사츠마 번의 수도인 카고시마에서 시마즈에 복속될 것을 서약하였으며, 사츠마에 아마미 섬을 할양하였다.
이로 인해 류큐는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류큐는 중국의 속국이기도 하였으며,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와도 속국 관계를 맺었다. 일본은 류큐의 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여 중국 문물의 수입경로 중 하나로 삼았다.
류큐 왕국은 에도 시대 일본의 주요 설탕 공급지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일본 본토의 상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설탕 수요가 증가하였고 류큐는 일본의 세력권 하에 있는 지역들 중 설탕 재배에 가장 좋은 자연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류큐의 농토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탈바꿈되어 현지민들은 혹독한 설탕생산노역(서인도제도의 그것과 비슷한)에 시달리게 된다.
대만[편집]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만 섬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조선 및 중국과 더불어 정벌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여파로 중국과의 무역이 단절되었고 이는 일본의 경제와 금수저들의 취미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에도 막부는 이와 같은 현상을 타개하고자 하였고 같은 맥락에서 당시 막부의 위정자들은 대만이라는 섬에 주목하였다.
대만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멀티를 건설한 유럽 세력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상의 요지였기 때문에 무역기지로서의 포텐셜이 있는 땅이었던데다 당시 대만엔 중국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당시 중국은 명 말기로, 본진 지키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막부는 1609년 아리마 하루노부를 대장으로 하는 대만 탐험대를 꾸렸다. 이 탐험대는 대만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긴 하였으나 대만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귀환하였다.
1616년, 막부는 4000명의 병력과 13척의 대형 선박으로 구성된 정벌대를 편성하였고 같은 해에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출항하여 대만을 향하였다. 막부는 이들을 통해 대만의 상륙가능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입수하고 무역전초기지를 설립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치명적인 손실을 입어 궤멸되었다. 13척의 선박 중 겨우 1척의 선박만이 대만의 해안에 당도하였고, 이들마저도 대만 원주민들의 공격을 버틸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회항하였다.
결국 막부의 대만 개척시도는 충격적인 실패로 귀결되었고, 이를 계기로 에도 막부는 대만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된다.
에조치(홋카이도)[편집]
에도시대 에조치(蝦夷地)는 일본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외부 세계'였다. '에조'는 아이누를 가리키는 멸칭이다.
아이누 들은 홋카이도의 남서부에 밀집해 있는 일본인 집단정착지역(和人地)에 자신들의 토산품을 들고와 일본인들이 생산한 물품으로 바꿔가곤 하였다. 당시 일본의 행정력은 에조치의 일부 지역에만 미쳤지만, 에도 막부는 에조치를 일본의 종속지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바꿔 말해 에도 시대 에조치는 류큐와 거의 같은 포지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이양선들이 에조치 부근에 출몰, 특히 러시아인들이 아이누를 포섭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본 사회 내에서 제기되자 막부는 홋카이도는 물론, 인접 지역인 사할린(일본명 카라후토)과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열도)에까지 탐험대를 보내 이 지역들의 일본 귀속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에도시대 중기까지 북방의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의 거의 대부분 지역들을 접수하였고 협소한 해협을 두고 일본 세력과 러시아 세력이 마주하게 되어, 러시아인들이 사할린이나 쿠릴에 접근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막부 측은 관군을 출동시켜 로스케들을 쫓아내는 등의 강경대응을 하였고 북방영토 각지에 일본영토라는 표식을 세웠다.
에도 막부 하의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분쟁은 1855년에 체결된 시모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사할린 섬은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었고, 반대급부로 일본은 쿠릴 열도 전역을 영유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정확히 50년 후인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사할린 섬 남부의 영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갔으나 또 그로부터 정확히 40년 후인 1945년에 소련이 사할린과 쿠릴 열도 전역을 다쳐묵하였다.
경제[편집]
인구가 증가하고 잉여생산물은 그 이상으로 증가함에 따라 경제가 전례없이 활성화되었다.
학자마다 추정치가 다르지만 대개 17세기의 100년간 일본의 인구가 배증에 가까운 증가를 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00년경 일본의 인구는 약 2500~2800만명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열도는 전국(戰國)상태를 해소하고 통일되어 평화를 되찾았고, 이로 인해 지방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의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에도를 중심축으로 하는 다섯개의 대형도로인 오가도(五街道 고카이도)를 건설하였다. 고카이도는 일본의 양대 중심지인 칸사이 지방과 칸토 지방을 연결하였고 이로 인해 지역간 교역이 보다 더 활발해졌다.
오사카는 도요토미 가문의 본거지였고, 도쿠가와 세력에 저항한 최후의 기지였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상업중심지로 부상한 오사카를 홀대할 수는 없었는지 이를 막부직할령으로 삼고 오사카 상인들의 일본에서의 지배적인 지위를 용인, 오히려 후원함으로써 이를 막부 재정수입의 주요 기반 중 하나로 삼았다.
일본 전국의 물산이 오사카로 집결되었고, 집결된 물품들은 오사카 상인들에 의해 관리, 중개되어 실수요지로 재판매되었다.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제도라고도 불리는 쌀 거래나 현대 주식시장에서도 쓰이는 봉 챠트 등은 에도시대 오사카 상인들에 의해 개발된 기법들이다.
오사카가 에도시대 상업의 중심지였지만 비단 오사카만이 이 시기에 수혜를 입은 도시는 아니었다. 막부의 수도 에도는 17세기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소비형 도시였고, 그 이후로도 이 기본적인 특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18세기 들어 인구 100만 이상이 거주하는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에도 자체의 상업기능도 대폭 확장되었다. 에도 막부의 산킨코타이 제도로 인해 주기적으로 각 지방의 번주와 수행인원, 그리고 제번의 역인들이 에도로 집결하였고 이들이 에도에서 소비를 행함에 따라 에도 상업성장의 기반을 마련된 것이었다.
일례로 일본 제국시대 3대재벌 중 하나였던 미츠이(三井)는 에도에서 백화점업을 선도적으로 꾸려 부를 모은 상인가문이 근대기업화된 것이다.
에도시대 일본의 소비위주경제는 상업의 활성화라는 긍정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비효율성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엄연히 존재했다. 앵거스 매디슨의 추계에 따르면, 에도시대 일본 GDP의 약 25%가 생산활동을 하지않는 사무라이 계층의 소비로 이루어졌다. 뭐 지금도 히키코모리나 니트가 있기는 하지만.
화폐경제[편집]
상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화폐보급도 증가하였다. 금화와 은화, 동전 등이 막부에 의해 주조되어 유통되었다. 에도 시대 가장 대표적인 금화는 코반(小判)으로 불리는 금전이었다. 코반은 에도 시대 화폐단위인 1냥(両 료)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화폐경제의 기준점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코반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화폐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코반보다 더 큰 거대금화인 10냥짜리 오반(大判), 코반의 1/4 크기인 이치부반(一分判), 그리고 정은이나 은화 및 동전 등도 화폐로 유통되었다. 금화나 은화의 경우 귀금속 산출상황에 따라 금 함유량이 변동되곤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화폐의 금 함유량은 낮아졌다. 19세기에는 막부의 재정문제로 인해 대규모 증쇄가 이루어진 탓에 악화가 화폐시장에 대거 유통되어 전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화폐발행 및 유통은 막부만 한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인 번(藩)들에 의해서도 행해졌는데, 번이 발행한 번찰(藩札 한사츠)의 유통이 그것이다. 번찰은 막부의 화폐와는 달리 종이쪼가리로 일종의 수표 내지는 지폐 역할을 하였다. 번찰은 실질가치를 가진 막부의 금속화폐와는 달리 발행한 번 내에서만 유효가치를 가진 화폐였다. 그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귀금속 화폐에 비해 가치가 저평가되었다.
화폐경제의 성장에 힘입어 도시 경제에서는 화폐거래가 지배적인 거래방식으로 자리잡았으나 농촌 지역에서는 현물거래가 여전히 주된 거래형태로 남아 있었다. 19세기경에도 여전히 농촌 지역의 상거래는 절반 가량이 현물거래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산업[편집]
농업[편집]
농업은 에도시대 일본의 기간산업이었으며, 막부와 제번들도 이의 중요성을 인지하였고 적극적으로 육성에 나섰다.
일본의 주 생산작물인 쌀은 농업용수가 풍부히 공급되는 수전(水田)에서 그 생산량이 배가된다는 특성이 있는데, 수전은 자연적인 강수량만으로는 유지가 불가능하였고 따라서 농업인프라가 충분히 확충되지 못했던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일본 농경지의 수전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들어 막부와 각 번들이 농업용수로 확충에 주력하여 평지의 논들이 수전으로 변모해갔으며, 언덕에 지어진 경사전 또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측량에 노오오력을 기울이면서 점차 농업용수가 공급되는 수전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토지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질적인 측면 이외에도 양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도 이루어졌는데, 신전(新田)개발이 바로 그것이다. 신전개발은 난세가 수습된 17세기와 막부 말기에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600년경에 약 160만 정보였던 경지면적은 1720년경에 이르면 300만 정보로 확대된다. 평지를 개간하는것 이외에도 만성적으로 부족한 일본 열도의 평지를 늘리기 위한 간척사업도 병행되었다. 일본의 간척사업은 야마토 시대부터 존재해 왔지만 에도시대에 이르러 각 정치체들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해졌다. 가장 괄목할만한 간척사업은 큐슈 서쪽의 아리아케 만에서 이루어진 간척으로, 에도시대 주요 번 중 하나인 사가 번은 이 해역에서의 간척사업으로 6300정보의 수전을 새로이 간척한 바 있다.
이러한 경제발전에 힘입어 식생활수준의 개선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7세기에 1인당 평균 쌀 소비량이 연 1석[9]을 넘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메이지 초년에 이르면 1.3석으로 증가한다.
농업생산성의 증가는 잉여생산물의 전례없는 급증으로 귀결되었고 이는 상품작물의 생산이라는 농업의 새로운 트렌드로 이어졌는데, 주로 목면과 생사, 차 등이 주요 상품작물로 생산되었다. 쌀 또한 주요 상품작물 중 하나가 되었다.
17세기에는 이러한 농지개발 산업이 지나치게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중앙의 막부가 어느정도 규제를 넣기도 했지만, 18세기에 들어 신전개발활동이 침체국면을 맞게되자 교호개혁 당시 막부가 '감정신전십분지일법'이라는 농지 개척자의 이익을 보전해주는 법을 제정하여 신전개발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한 바가 있다. 그 이외 막부는 농민의 유랑화나 영세화도 방지하고자 하였다.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전답영대매매금지령(田畑永代売買禁止令)을 내려 농민이 자신의 논과 밭을 매매하는것을 금지하였고,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츠나는 전답의 분할상속에도 제재를 가했다.
어업[편집]
에도시대 중기인 18세기에 일본 열도의 광물이 거의 고갈되자 이를 대체할 대중국 수출품으로 해산물 상품이 급부상하였는데, 이를 타와라모노(俵物)라고 불렀다.
타와라모노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모든 해산물 상품들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그 중 해삼류, 전복 건어물, 상어 지느러미의 3종이 중국에서 가장 호평을 받아 수출의 효자노릇을 하여 이 아이템들을 '타와라모노 3품'이라고 불렀다.
광업&제련업[편집]
전국시대 일본은 이미 유럽에 귀금속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16세기 전기에 조선 혹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광석 제련기술인 회취법(灰吹法 하이후키호)를 전수받은 하카타의 상인 일행들이 이와미 은산(石見銀山)개발에 성공하였다. 이와미 은산은 당시 전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담당하였고, 이는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의 두둑한 돈줄이 되었다.
이와미 은산 이외에도 여러 중소규모의 금광,은광들이 일본 각지에 산포되어 있었고, 이들은 전국시대 일본 영주들의 주요 군자금 출처가 되었다. 막강한 세력을 보유한 다이묘들은 최소 하나 이상의 은,금광은 보유하고 있었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와미 은산 관리를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기도 하였다.
이와미 은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막부직할령으로 지정되었다. 초기 에도 막부는 이와미 은산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양의 은을 주요 교역품으로 삼아서 대외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해나갔다. 17세기 초중엽 일본은 전 세계의 은 산출량의 30~40%를 점해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인 누에바 에스파냐에 비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일본의 귀금속은 대부분이 이웃해 있는 귀금속 블랙홀인 중국에 수출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말기에 이르러 일본 내 귀금속의 부존량이 바닥을 찍게 되면서 일본의 광업은 귀금속 광업 중심에서 구리 광업 중심으로 무게추가 옮겨가게 되었다.
구리 광업이 활발해지면서 막부의 후원을 받는 오사카의 구리제련업 나카마(仲間 / 일종의 길드)가 일본에서 콧방귀 좀 뀌고 다니게 된다. 당시 오사카의 구리제련업자들은 유럽으로부터 전래된 고급기술인 남만취법(南蠻吹法 난반부키호)을 독점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는 한편, 나카마 결성을 통해 외부로의 기술유출을 철통같이 방어하였다.
이로 인해 당분간 일본 각지에서 회취법을 이용하여 생산된 황동(荒銅)이 오사카로 운송되어 이곳에서 정동(精銅)으로 제련되었고, 이 정동이 다시 일본 각지의 소비시장과 해외에 수출하기 위해 나가사키 항으로 반출되었다.
황동을 정동으로 제련하는 과정에서 황동에 함유되어 있는 소량의 금이나 은을 추가로 획득할 수 있다. 나카마는 이 제련과정에서 추출되는 귀금속을 추가로 횡령하여 부수적인 수입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본 내 구리생산량이 감소가 오사카의 구리제련업 수요 위축을 불러일으키자 나카마 사이에서 내분현상이 발생하였고, 결국 일부 오사카의 구리제련업자들이 이를 타개하기 위한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구리생산지로 이동함에 따라 19세기 초엽에 오사카의 구리제련업 독점은 무너지게 되었다.
광산업은 막부 직할령 및 각 제번의 상업에도 파급효과를 미쳤다. 새로 개발된 광산에는 일본 전역에서 한 밑천 챙기려는 제련업자들과 날품팔이꾼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이 모여 광산촌이 형성되었다. 광산촌은 일반 농촌에 비해 소득수준이 높아 구매력이 상당했고 큰 광산촌의 경우 인구가 만 단위를 넘기기도 하는등 규모도 컸기 때문에 이들의 상업적 수요를 맞추기 위해 소매상인이나 이발사, 매춘부 등 서비스업자들도 광산촌에 가세하였다. 막부나 제번은 광산촌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통관세를 매겨 짭짤한 조세수익을 올렸다.
공업[편집]
에도시대에 들어 잉여농산물 생산이 폭증하여 상거래가 전례없이 활발해졌고 이는 공예품 수요증가로 직결되어 공업활동도 활발해졌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자기(磁器)생산기술을 보유한 지역은 중국, 조선, 베트남이 유삼무사했고 일본은 자기수입국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납치한 조선인 도공들을 통해 자기생산기술이 일본에 보급되었고, 17세기 초중엽 정치적 혼란을 피해 탈지나한 중국 출신 도공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함에 따라 일본 또한 세계 주요 자기생산/수출국으로 발전한다.
일본의 자기생산 및 수출량은 17세기에 그 정점을 찍었다. 기존의 주요 자기수출국가인 중국이 막장상태가 되면서 일본이 세계에서 경쟁상대가 없는 최대 자기수출국가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안정을 되찾고 주요 자기수입지역인 유럽이 18세기부터 자체적으로 자기생산이 가능해지자 일본의 자기수출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일본의 자기들 중 가장 유명한 자기는 바로 이마리 자기이다. 이마리 자기는 아리타라는 도공도시에서 생산되는 자기이지만, 이마리라는 이름의 항구에서 수출되어 나가사키에 집적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마리 자기의 카키에몬 양식과 킨란 양식은 유럽의 자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에도시대 경제가 전례없이 번창하면서 사치품 수요가 크게 증가한 바 있다. 당시 에도 막부는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던 사치풍조를 막기 위해 노오오력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사치품 중 하나는 바로 비단이었고 쿄토의 니시진(西陣) 비단이 최고의 명품으로 꼽혔다. 니시진은 그 기원이 헤이안 시대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쿄토의 견직공 거주구역에서 생산되는 상품으로 에도 시대 내내 높은 수요로 인해 번창하였다.
에도시대 말기에 일본에 이식된 산업으로는 유리공예가 있다. 나가사키를 통해 수입된 서구의 유리는 일본의 사치품 애호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였고 일본 내에서도 유리공예가 새로이 신산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납이 첨가된 크리스탈 유리를 깎아만든 일본 전통 유리공예품을 키리코(切子)라고 부르는데, 에도 시대에 키리코 공예가 발달한 양대 지역은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와, 오늘날의 카고시마 현인 사츠마 지역으로, 막부의 쇼군과 사츠마 번 다이묘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성장하였다. 원래 에도의 키리코는 투명함과 무색 세공을 가한것이 주 특징이었고, 사츠마 키리코의 특징은 유리를 여러장 겹쳐서 만들었기 때문에 투명함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과 색상 공예를 가한 것이었지만, 현대시대인 지금은 양 지역간 기술교류로 인해 디자인이 비슷비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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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리 자기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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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리 자기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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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진 비단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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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진 비단원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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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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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키리코
신분사회[편집]
무사[편집]
무사들은 여전히 지배계급이었으나, 과거처럼 지나가는 평민을 마음대로 일본도로 베어 죽이는 만화에나 나올법한 행동은 죽고싶은게 아닌이상 못 했다. 사실 전국시대에도 이러지는 못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여종들을 마음껏 따먹었을 거란 것과 같은 수준의 루머이고 망상
이는 평화기에 접어들어 과거 전국시대에 비해 무사의 사회적 필요성은 줄어든 반면, 생산계층의 사회적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증대된 사회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에도시대의 법전인 공서방어정서(公事方御定書 쿠지카타오사다메가키)에 의하면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 / 무사가 무례한 자를 베는행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키리스테고멘의 대상이 된 평민이 무사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한 정황이 입증되어야 했다. 그러나 대개 평민을 벤 무사는 할복형에 쳐해졌는데 이는 이를 입증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시 무사사회에서는 칼을 함부러 쓰는 행위 자체를 일종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민에게 조롱을 당한것 그 자체도 무사들 사이에서는 수치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던 미친놈에게 욕을 얻어먹은것만으로도 할복을 한 무사들도 가끔 있었을 정도이다.
이렇다보니 에도시대에는 오히려 지배층인 무사들이 평민을 피해다니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었다.
평화시대에 이르러 사무라이들의 본 스킬인 싸움질은 사실상 무쓸모가 되었고, 재능충 사무라이들은 붓을 들고 막부나 번에서 공무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사무라이 인구 수에 비하면 공직의 수는 적었기에 대다수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쥐꼬리만한 연공으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무사들은 무사도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에게 있어서 싸움은 일상이었지만, 이 시대 사무라이들은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 때문에 칼질이 일종의 로망이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정립된 오리지널 사무라이와는 별 관계없는 무사도는 현대시대에도 사무라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평민[편집]
도시민[편집]
도시산업인 상업과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신흥상공인들인 죠닌(城人)계층이 성장하였고, 이들이 문화적 취향에 눈뜨게 됨에 따라 서민문화가 탄생하기도 하였는데, 우키요에, 카부키, 조루리(인형극) 등이 대표적인 그것이다. 에도시대 초기인 17세기까지만 해도 죠닌들은 사무라이 계층과 엄격히 분리된 생활을 영유하였고, 정치적인 권한은 전혀 없었다. 도시의 시민들은 기본적인 자치권마저도 보장받지 못하였다. 죠닌이 축적한 재산은 언제든지 막부나 다이묘 등에 의해 몰수될 수가 있었기에 죠닌들은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오오오력해야만 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문치주의가 확립되면서 서민들에 대한 지배계층의 일방적인 태도는 전례없이 누그러졌다. 이 시기부터 죠닌들이 사무라이와 함께 겸상하며 담화를 나누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학문을 중시하는 풍조가 자리잡았고 따라서 아무리 사무라이라고 할 지언정 학식있는 죠닌들을 업신여기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죠닌들은 여전히 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지는 못하였으나, 막부의 고위인사와의 친목질과 로비 등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통로를 얻게 되었다.
반면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도 증가했다. 농촌에서 수전(水田)이 보급되고 이앙법이 확산됨에 따라 일손수요가 줄어들었고, 이에 잉여인간이 된 농촌의 청년들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1700년경 일본의 도시화율은 약 12%로, 이웃해 있는 중국에 비해 3배, 조선에 비해 5배 높은 수치를 보였다. 당시 도시로 유입된 독신청년들은 3일만 날품을 팔아도 한 달 먹고사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청년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됨에 따라 일본의 도시들은 남초현상이 심각해졌다. 이로 인해 욕구불만에 사로잡힌 청년들이 대거 양산되었고, 이는 선비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분출되어 일본의 풍속업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본의 어지간한 도시들은 모두 유곽과 목욕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의 유곽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7세기 초 막부가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에도의 매춘부들을 수용한 매춘지구인 요시와라(吉原)이다. 에도는 거대도시인만큼 요시와라는 그 규모에 있어서 최대였다. 한때 요시와라에는 일본 전국에서 모인 3000명에 이르는 매춘부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곽들은 고위관료로부터 도시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욕구를 해소해 주는 통로가 되었다.
촌민[편집]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카타나가리(刀狩 "칼 사냥")를 시행하여 농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무기를 몰수하였고, 도쿠가와 가문 또한 이 정책을 계승하여 농민과 무사를 철저히 분리하였다. 막부는 농민에 대한 통제를 보다 더 원활히 하기 위해 고닌구미(五人組)에 편성하였고, 농촌의 대장인 햐쿠쇼다이(百姓代)로 하여금 이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고닌구미는 막번에 의해 설치된 일종의 계층 내 분열용 장치였다. 고닌구미는 일종의 운명공동체로, 연대의무, 연대책임을 졌고 구성원의 실책에 대한 처벌들을 함께 받았기 때문에 고닌구미에 배치된 이들은 늘 다른 소속원들을 서로 감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본 특유의 민폐끼치기를 꺼리는 문화(迷惑 메이와쿠)도 이 고닌구미의 전통에서 파생된 사회문화이다. 다만 고닌구미 제도는 농촌사회에 결속력 강화라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잇키(一揆)[편집]
초기 막부의 폭정은 농민계층의 불만을 사 잇키(一揆)라는 집단무장봉기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막부는 쿠죠 잇키와 조쿄 소동으로 홍역을 치른 바 있으며, 기독교 탄압으로 일어난 잇키인 시마바라의 난은 네덜란드 선단의 화포지원까지 받아서 겨우 진압하였다. 문치기 막부의 위정자들은 이에 대해 보다 더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고 백성들의 직소를 받아들이기 위해 메야스바코(目安箱)라는 투서함을 설치하는 한편, 양생소(養生所)를 설립하여 구빈활동과 빈민 직업훈련 등을 실시하는 등 문리적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잇키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19세기에 이르면 이의 건수는 이전 시대에 비해 증가한다. 잇키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에도시대 초기의 잇키는 주로 먹고살기 힘들어서 일어나는 생계형 잇키였으나, 후기의 잇키는 지배층에 대항해 평민들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형태의 잇키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즉, 막부는 평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했을 뿐 평민들의 권리신장욕구에 대해서는 여전히 압제로 일관함으로써 이들의 잇키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막부에 대한 지지조차 잃어버렸고, 이는 막부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잇키는 막부 멸망 후 메이지 시대에 민권운동으로 진보하였다.
식문화[편집]
에도 시대 에도를 비롯한 대도시들은 빠른 발전을 거듭하였고 이들 도시에는 대규모 공사가 매일같이 진행되는 등 한밑천 잡아낼 건덕지가 많았기 때문에 전국에서 청년들이 꿈을 가지고 상경하였고 한편으로는 독신생활을 하고 있는 하급 사무라이들도 대도시에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에도 시대 대도시에는 독신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패스트푸드 등 요식업이 전례없이 발전하였는데, 17세기 에도에서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전문점이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에도 시대 일본의 대도시들은 노점 음식의 천국이기도 하였다. 노점에서는 텐푸라, 장어꼬치, 스시, 오뎅, 우동, 소바, 모치, 단고, 오징어구이 등을 취급하였다. 이 중 텐푸라는 노점에서만 먹을 수 있었는데, 이는 에도 막부가 화재 예방책의 일환으로 텐푸라를 실내에서 튀기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노점의 음식은 대개 정규 음식점의 음식에 비해 질적 수준이 낮았지만 이러한 특권(?)도 있었다는 것.
현재 일식의 얼굴마담인 스시도 에도 시대에 현재와 비슷한 꼴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에도 시대 일본에서 즐겨먹던 스시는 오늘날의 스시와는 모양새나 만드는 방식이 다른 육면체의 하코즈시(箱寿司)였다.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스시'는 니기리즈시인데, 니기리즈시는 에도 시대 막부실세 저택 앞에 한 스시 명인이 점포를 차려 가장 맛있는 생선부위를 활용해 만든 고급 스시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시가 대중들의 식탁에 올라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자 어업과 어패류 교역업도 활기를 띄었는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수산물시장인 츠키지 시장은 이 시기에 에도에서 형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는 것이다.
다도 또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 더 발전하였고, 류큐를 통해 설탕이 대규모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다도의 필수요소인 화과자(和菓子 와가시)도 오늘날의 그것과 가까운 형태로 진보하였다.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특히 유럽과의 교역으로 새로운 요리기법들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포르투갈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빵 문화가 들어왔으며, 오늘날 동아시아권에 잘 알려진 빵인 카스테라(カステラ)는 이 때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빵이다. 상기에 언급한 텐푸라도 유럽식 튀김법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이다.
학문과 사상[편집]
유학[편집]
본디 일본의 유학은 불교와 융합되어 있었고 이전시대에는 대개 승려들이 유교를 연구하였었으나 에도 시대 초기부터 불교와 유교가 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에도 시대 신유학의 창시자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였다. 승려이자 유학자인 그는 조선통신사로서 일본에 온 허성과 대면하면서 성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에서 긁어온 성리학 서적들과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유학자 강항을 통해 성리학을 깨우치게 되었다. 특히 그는 퇴계 이황의 '퇴계전서'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일본 성리학이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수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막부의 공인 유학자가 되었고, 그 이후에도 하야시 가문은 대를 이어 막부의 공인 유학자를 전임하게 됨으로 인해 종국적으로 후지와라의 사상이 일본 정치사상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유교는 조선 유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조선 유교와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일본 유학자들은 성리학 교리의 실현을 통해 사회의 안정을 찾고자 하였고, 이가 그들의 주 관심사였다. 본래 퇴계 이황은 천리(天理)라는 개념을 매우 중요시하였으나, 일본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유교의 신성 논쟁은 관심 밖의 일이었고, 오히려 이들은 '인간의 천리로의 복귀'라는 덕목을 일축하였다. 일본 유교는 일본 불교와 마찬가지로 외래 문명으로부터의 수용 과정에서 본래 특성인 영원불멸성, 절대성 등이 거세되었고, 이로 인해 탄력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일본 유학의 이러한 특성은 유학의 다른 학파인 양명학과 고학(古學)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일례로 양명학자나 고학자들은 아예 천리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고학자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는 성리학의 교리를 '억측에 근거한 헛소리'로 폄하했다. 정통 성리학은 천리를 중시한 나머지 인간의 본연적인 욕망을 무시하고 폄하하곤 하였으나, 일본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자고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사실 이와 같은 운동은 중국이나 조선의 유학계에서도 일각에 의해 일어나긴 했으나 그들은 천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 유학과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다만 양명학이나 고학 등이 일본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이들의 주장이 막부의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주류는 성리학이었다.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초기 막부의 무단통치의 막을 내리고 인문, 문화통치의 새 막을 열었는데, 에도 시대의 문화통치는 일본 성리학자들의 작품이다. 이들은 검약과 농민 부담의 경감 등을 추진하였고, 강압적인 통치를 비판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한편으로 유교는 일본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유학에는 중화사상이 함유되어 있고, 이 중화사상은 일본에서도 일본 맞춤버전으로 나타나게 된다. 에도 시대 일본 유학자들은 일본을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하였으며,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민족인 류큐와 아이누는 일본의 문명권에 포섭된 존재로 여겼고, 그 이외의 민족들은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국학(國學)[편집]
반면 에도 시대에는 기존의 주류학문들에 대한 반발심리로 국학이라는 새로운 학파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국학은 일종의 국뽕학문으로, 중국 등 외래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유학이나 불학 등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대신 일본의 고유가치와 고대의 역사 등을 숭상/연구하였고, '고사기'와 같은 고전들을 근세 일본어로 번역하는 등 상당한 역사학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국학자들은 일본의 가치가 그 어느 오랑캐들의 가치보다 우수한 것으로 여겼고 일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국(神國)이라고 주장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유학자나 다른 일반인들도 국뽕을 빠는 경향이 있었지만 국학자들에 비하면 약과 수준이었다.
에도 시대 중기에 이르러 국학은 경세론(經世論) 및 해방론(海防論)과 연결되어 확장주의적인 정치적 성향을 띄게 되었고, 이는 대외확장론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들은 홋카이도나 대만, 더 나아가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나 만주를 정벌하자는 정만론(征滿論)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비록 에도 시대 이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무시할만한 수준이었으나, 그들의 사상은 훗날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토대 중 하나가 되었다.
막부 말기~메이지 유신 시기에 국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다수 활약했다. 에도 말기부터 개국을 주장한 국학자 사쿠마 쇼잔은 가쓰 가이슈나 사카모토 료마 등의 스승이였고 친막파여서 그의 아들은 신센구미에 들어갔다. 쇼잔의 제자 요시다 쇼인은 막부에 저항하는 존왕양이를 주장하여 또 그 영향을 받은 제자(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고고로, 타카스기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가 사카모토 료마 등과 함께 유신을 주도했다. 쇼인은 현재까지도 정계에 영향을 끼치는 일본 우파들과 죠슈벌의 선조이다.
난학[편집]
한편으로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서양 학문이 일본으로 유입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경로로 유입된 서양 학문을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의미인 난학(蘭学 란가쿠)이라고 불렀다. 서양 서적의 일본 반입은 1640년에 쇄국 정책에 의해 금지되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무네 정권의 개혁에 의해 일부 해금되어 난학이 융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도시 인구가 많았던데다가, 문자를 이해할 수 있는 인구의 비중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대규모의 도서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에 반입된 서양 서적들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대도시의 서점에서 팔려나갔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서양의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 그리고 서양인들이 얻어낸 세계의 지식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10]
난학은 단순히 학문에만 그치지 않고, 창조기술로 응용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기술을 모방하여 괄목할 만한 것은 아니나 상징성은 있는 아이템들을 만들어냈는데, 서양의 기계식 시계를 모방한 일본식 기계식 시계, 망원경, 카라쿠리(기계인형) 등이 그것이다.
교육[편집]
교육(敎育)이라는 단어는 에도 시대 일본에서 최초로 쓰이기 시작한 단어이다.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이나 전통적인 중화권에서는 교화(敎化)가 education에 대응되는 단어였으나, 현재 교화는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일본은 전근대사회 중 유별나게 교육이 활성화된 국가였다. 에도 시대 일본의 문자해독률은 40%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며 남성의 50%, 여성의 20%가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도 시대의 초등 서민교육은 테라코야(寺子屋)에 의해 수행되었다. 중세 사원의 교육원에 유래를 두고 있는 테라코야는 입학생들에게 문자의 해독과 쓰기, 계산 등 간단한 산수, 도덕, 그리고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 등을 가르쳤다. 테라코야의 교사는 주로 학식있는 평민들이었고, 전체 교사의 10% 가량이 여성이었다. 테라코야는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는데 10명 가량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부터 100명 이상의 학생이 수학하는 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테라코야는 남녀공학이었다.
상위 학교로는 번교(藩校)와 사숙(私塾)이 있었다. 학교는 서민용 교육기관이었으며, 사숙은 민간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 번교는 각 번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일반적인 번교는 재지 사무라이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나, 개중에는 서민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도 있으며 일반적인 사족학교들 중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수가 일반 평민에게도 입학을 허용하는 모양새를 취하였다. 생도들은 번교에 대개 7~8세에 입학하여 교육적 성취도에 따라 13세에서 2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에 졸업하였다.
대부분의 번교는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의 교육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으나 소수의 일부는 국학이나 난학, 의학 등을 메인으로 삼기도 하였다. 번교는 사무라이 학교인만큼 검술과 궁술 등의 무예도 중시하였으며, 번교생들은 각종 기예에 대한 수행도 겸하였다.
유교 이외의 학문을 중히 여기는 학교의 비중은 번교보다 사숙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사숙으로는 일본 개화기를 주도한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쇼카손쥬쿠(松下村塾)를 들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사숙에는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입학할 수 있었고, 유교 위주의 번교 교육에 염증을 느낀 학구열이 높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번교에서 이탈하여 사숙에 몸을 담기도 하였다.
군대[편집]
19세기 막부군의 모습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을 통일하면서, 에도막부 시대를 열게되며 막부군이 양성된다.
1854년 개항 이전까지, 유일한 서양 교류국인 네덜란드와 제한적으로 맞담하면서
몇몇 서양식 무기, 전술교범등을 자잘히 전수받아
일찍부터 플린트락 총기, 불랑기 포 같은 서구의 선진적인 무기체계를 터득하기 시작한다.
19세기 들어서면서 머스킷 소총, 서구식 청동제 대포를 자체적으로 제조하여 써먹기도 한다.
1841년. 포술가 다카시마 슈한이라는 아재가
네덜란드 군사교범을 입수하여, 그것을 토대로 서양식 전열보병 사격, 포병 사격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 개항 전후로, 외국상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여러 전장식 라이플들을 대량으로 쏟아냈다.
1855년에는 네덜란드에게서 증기선을 도입하였으며, 호오마루 라는 서양식 범선을 자체적으로 건조하기도 하였다.
막부는, 근대적 해군 양성을 위해 나가사키에 해군교습소를 개설한다.
지속적으로 네덜란드와 군사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하면서 군함을 많이 사들였다.
막부해군 기함 카이요 마루
그 결과, 1860년대 되면 막부해군은 군함 60여척 이상의 아시아 최고의 근대적 해군으로 거듭나게 된다.
최후.
샤스포 볼트액션 소총 (막부는 약 2000여정 보유하고 있었다.)
1868년 보신전쟁 직전, 에도막부군은 양적으로 일본 최대의 서양식 군대로 거듭나 있었다. (병력수 2만 4천명 이상)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면서, 강선 라이플로 무장하고, 최신형 샤스포 소총도 갖추고 있었다.
분큐개혁, 게이오개혁으로 막부군은 프랑스식 근대적 군대로 변모하고 있었다.
또한, 막부의 최정예인 '전습대'는 프랑스 장교단이 훈련시킨 일본 최강의 부대였다.
그러나, 보신전쟁 발발하고 에도막부 지휘부는 희대의 병신짓을 저질러
도바 - 후시미 전투 등지에서 양적으로 한줌도 안된 막부타도 세력 삿초동맹군에게 개쳐발린다. (사쓰마, 조슈 동맹)
막부가 그동안 노력해서 사들인 신식무기들도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
전력을 비교하자면
삿초동맹군은 스펜서, 스나이더 라이플로 무장하였는데
막부측도 미니에, 엔필드 라이플로 무장하여 대중들은 이둘의 가슴웅장한 대결을 기대하고 있었다.
군사수는 에도막부가 압살 (15000 vs 3000)
그런데, 막부 지휘부의 엘랑스런 판단과 막부군 애들이 단체로 중2병 걸려서, 상대를 만만하다고 총도 장전안하면서 깔보다가 삿초군 암스트롱 후장포 500배 맞고 단체로 착해진다.
누가 이기는지 팝콘까며 중립기어 박고 존버타던 다른 가문들도
이때다 싶어 죄다 삿초도비 코인타서 막부운지해라!!! 외치고
기껏 키운 신식군 갈려나가고 민심까지 나락가서 똥줄탄 막부정권은
가망이 없다 판단, 허무하게 gg치고
수장 요시노부가 덴노에게 정권을 넘겨, 덴노의 삿초동맹군에게 에도성 보쌈당하고
정권을 넘긴 막부체제는 소멸하면서, 막부군 또한.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삿초동맹 주도의 천황이 다스리는 신정부 일본제국이 탄생한다.
살아남은 잔당들은 이제 반란군 도적때 취급받으며 신정부군의 금어기를 보면서 북방 끝자락까지 도망치면서 싸워야 했다고
막부해군 또한,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최종적으로 하코다테 전쟁으로 운명한다.
엘랑스 이태리와 더불어 3대 오물이 틀림없다.
재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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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편집]
화재는 에도의 불꽃놀이로 불렸다.
특히 일본의 건축물은 목조건축이 주를 이뤘고, 일본 대도시들의 인구밀집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제곱킬로미터당 인구가 2만에 이르거나 혹은 넘었기 때문에 화재는 종종 대규모 참사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1657년에 일어난 메이레키 화재는 에도 시가지의 70%를 날려 버렸고 10만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냈다. 막대한 타격을 입은 막부 당국은 시가지를 재건 및 재편하는 한편, 상설소방대를 창설하였고 운하망을 강화하여 이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책을 강구해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후의 대화재들은 메이레키 당시의 화재보다는 피해 수준이 훨씬 떨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와 같은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전근대 일본 도시사회에서 화재는 고질적인 재앙 중 하나로 남았다.
기근[편집]
18세기 기상이변의 여파로 일어난 텐메이 대기근(天明の大飢饉)은 에도 시대 최악의 재앙으로 꼽히며 에도시대 4대 기근(혹은 3대 기근) 중에서도 그 피해 수준이 독보적이었는데, 이는 토호쿠 지방의 피해가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텐메이 대기근으로 인해 일본의 호적상 인구가 100만명 증발했다. 호적상의 인구는 인구의 사망 이외에도 유랑으로도 줄어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텐메이 대기근으로 인해 20~50만명 정도의 인명피해가 난 것으로 추산하며 이는 당시 일본 인구의 1~2%에 달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신전개발이 한계점에 달한 이후에 일부 번이나 농민들에 의해 무리하게 진행된 추가 경지개척으로 인한 기존 농지들의 생산성 저하에 그 원인이 있기도 하다.
몰락[편집]
1808년 영국 해군의 HMS Phaeton함이 나가사키에서 깽판을 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프랑스 제국의 위성국가인 바타비아 공화국의 통치 하에 있었고, 영국은 대나폴레옹 동맹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페이톤 함은 네덜란드 상관원들을 납치하고 데지마에서 수색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는 한편 일본 나가사키 봉행측에게 물과 식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를 이행치 않을경우 일본 선박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나가사키 봉행이었던 마츠다이라 야스히데는 페이톤 함을 불태워버리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에 실패하고 결국 페이톤 함의 요구조건들을 수락했으며 본인은 이의 책임을 지고 할복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양이선에 대한 불안감이 일본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해 고래기름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일본 근해에 서양 선박이 출몰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일본의 태평양 연안은 고래가 많이 출몰하는 해역이기 때문이다. 1824년 영국의 포경선이 막부의 앞마당인 미토 번에 출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825년 막부는 이양선 출몰로 인한 사회적 불안감을 억제하기 위해 일본 근해에 출몰한 이국선을 무력으로 쫓아내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국선타불령(異国船打払令)을 제정하게 된다. 이 법에 따라 일본 전국에 다이바(台場)라고 불리는 연안포대가 축조되었고 해방론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러나 1839년 영국 동인도회사 함대에 의한 아편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양선에 대한 공포감은 한 층 더 격화되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당사자인 중국이나 중화세계의 제1모범생 조선은 아편전쟁에 대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반면 유독 일본이 이에 대한 경계태세를 보였다. 일본인들은 일본 근해에 접근한 이국선을 공격한다고 해서 그들을 정말로 격퇴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1842년 미국 상선을 영국 군함으로 오폭하는 사건을 계기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이국선타불령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네덜란드 이외의 다른 서양세력에 대한 쇄국체제는 한 동안 유지되었고, 일본은 내부단속에 더 열을 올리게 되었다.
1853년, 막부는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미국의 페리 함선이 미국 동해안을 출발하여 동아시아 방면으로 향하고 있고 그 함대가 일본을 목적지로 할 공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러나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건강상태가 안 좋은데다가 쓸데없는 이국선내항정보를 기정사실화했다간 사회 혼란만 부추길수 있다는 이유로 막부의 고위지도자들은 이를 쉬쉬해 버렸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8일, 진짜로 미국의 페리 제독이 증기선 4척을 이끌고 에도의 지척에 위치한 우라가 항에 갑툭튀하여 개항을 강요하는 내용이 담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당시 막부측은 이에 당황한데다 쇼군이 오늘내일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개항결정을 미루고 페리 제독 측에 다음번에 확답하겠다고 응답하였다. 당시 막부 측은 에도의 다이바를 확충하는 한편, 다이묘로부터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대응책에 대한 자문을 구하며 이 상황을 타개코자 했다. 그러나 1854년 겨울에 페리가 더 큰 규모의 선대를 이끌고 내항하자 결국 막부 측은 반강제적으로 개항에 동의하였고 이에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역사상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미국이 일본과 수교하자 다른 서구 열강들도 앞다투어 일본과 수교를 맺고 근대적인 무역관계를 확립하였다.
이에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일본의 존황양이파는 격분하였고, 이들은 과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일본 정치계에서 아싸집단으로 자리매김한 서부의 토자마 세력권에서 결집하였다.
존황양이파의 막부에 대한 투쟁은 10여년간 지속되었으나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을 계기로 존황양이파는 기존의 양이사상을 버리고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존황양이파는 존황파, 혹은 토막(討幕)파로 진화 내지는 태세전환하여 막부 빠돌이 그룹인 좌막(佐幕)파와 대립하게 된다.
토막파의 대표주자가 된 사츠마 번과 쵸슈 번은 원래 대립관계였으나 같은 정치노선을 공유하게 되어 양 세력간 제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에 따라 동맹관계를 형성되게 되는데, 이를 삿쵸동맹이라고 한다.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환생으로 일컬어졌던 막부의 마지막 희망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대세가 천황 쪽으로 기울었음을 감지하고 대정봉환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대정봉환이란 막부가 천황 밑으로 기어들어가 막부의 권력을 천황에게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대정봉환이 이루어지게 되면 막부는 더 이상 일본 권력의 정점은 아니게 되지만, 대신 막부가 기존에 거느린 막강한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천황으로부터 정통성까지 인정받은 일본 제2의 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가 실현되면 토막파는 그 명분을 잃을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똥줄이 탄 삿쵸동맹 내 토막파들은 대정봉환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공작을 벌였다. 결정적으로 에도에서 파괴공작을 감행하는 어그로가 잘 먹혔고, 이는 좌막파들의 분노를 사서 좌막파들에게 진정할 것을 요구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조차 과격 좌막파들의 삿쵸타도주장을 받아들였다.
대정봉환을 준비하기 위해 오사카 성에 체재하고 있던 요시노부의 막부군은 '천황을 삿쵸동맹의 마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쿄토로 진군하였다. 당시 쿄토의 신정부에서는 구 막부군의 진군을 신정부에의 도전인지, 아니면 그냥 삿쵸와 막부간의 사전(私戰)인지를 두고 의견충돌이 벌어졌으나 삿쵸동맹 지지자인 의정 이와쿠라 토모미의 도쿠가와 막부 타도 결정으로 인해 신정부군은 막부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쿄토의 인근에 위치해 있는 토바, 후시미에서 막부군과 삿쵸군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막부군은 그 규모에서 삿쵸군을 압도하였고 막부군에는 프랑스식 훈련을 받은 근대식 정예군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삿쵸군에게 충격적으로 패배해버렸고, 이에 막부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토바, 후시미에서 승기를 잡은 신정부군은 진군을 거듭하여 막부의 수도인 에도를 장악하였다.
1868년, 에도를 접수한 신정부측은 막부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 (입헌)군주국가가 된다.
역대 쇼군 목록[편집]
- 1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603 ~ 1616
-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616 ~ 1632
- 3대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1632 ~ 1651
- 4대 도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 1651 ~ 1680
- 5대 도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 1680 ~ 1709
- 6대 도쿠가와 이에노부(徳川家宣) 1709 ~ 1712
- 7대 도쿠가와 이에츠구(徳川家継) 1713 ~ 1716
-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1716 ~ 1745
- 9대 도쿠가와 이에시게(徳川家重) 1745 ~ 1760
- 10대 도쿠가와 이에하루(徳川家治) 1760 ~ 1786
- 11대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 1786 ~ 1841
- 12대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 1841 ~ 1853
- 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 1853 ~ 1858
- 14대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 1858 ~ 1866
-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1866 ~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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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쇼군의 풀네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 ↑ 이 때문에 조선의 대일외교문서에는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천황은 皇으로 기록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외교문서에서는 쇼군을 황제로 기록하기도 했다.
- ↑ 막부의 최고 수뇌부를 의미한다.
- ↑ 한자 그대로 거느리는 땅. 거대한 땅을 의미한다. 大領国라고도 한다.
- ↑ 연간 쌀환산 산출량, 경제력의 척도. 단, 어디까지나 명목적인 지표로 실질 경제력을 정확히 반영하는 지표는 아니다.
- ↑ 오와리 도쿠가와
- ↑ 키슈 도쿠가와
- ↑ 에도막부가 청나라와 네덜란드에 할당한 공무역량은 각기 6,000관과 3,000관으로 2배 차이였다. 하지만 할당제도가 엄격히 지켜진 건 아니기 때문에 실제 무역량은 해마다 변동되었다.
- ↑ 약 180리터
- ↑ 일본인의 이와 같은 서양에 대한 이해가 메이지 유신을 통한 성공적인 근대화의 토양이 되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