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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대상은 역주행을 했거나 혹은 역주행 그 자체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음 대상은 언젠가 다시 돌아옵니다.
물론 왼쪽처럼 와도 좆같은 경우가 있으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한국의 인간흉기
냉병기 해전 사이비 테러 드럼통
척준경 이성계 이순신 이만희 할카스 찢재명
첩보전 고자샷 발터 나이프 글록 정의봉
모전구렴야 상하이 조 재규어 지라툴 제너럴 조 박기서
盧래 K2소총 쌍권총 백린탄 야구빠따
MC무현 임 레이너 코서인 김상옥 박정인 死호성

조선 초대 국왕
태조 | 太祖
묘호 태조(太祖)
시호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이성계 → 이단(李旦)
부왕∙모비 아버지: (추존)환조 어머니: (추존)의혜왕후
왕후 원비: 신의왕후 계비: 신덕왕후
왕가 전주 이씨

벗 암 어 크립.... 암 인 위화도... 왓 더 헬 암 회군 데어..

—이성계 (1335~1408)

"아들아..이게 무슨짓이냐!!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조사의의 난

이방원의 아빠, SeJong the Great의 할아부지 그리고 이유의 증조부

성계야!!! 어째서 내 후손들을 멸하였느냐!!!! - 왕건

조선을 건국한 조선 왕조의 창업주이자 청나라 황족의 정신적 지주인 동아시아 역사상 레전드 인물

개요[편집]

원나라의 장군이었다. 고려시대 전주에 살던 이성계의 조상이 관청의 관노를 사랑해서 수령한테 죽을 위기에 처했었는데,그때 이성계의 조상이 그를 따르는 농민들을 데리고 동쪽 끝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조상이 데리고 온 가구수가 1000호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이를 불안하게 여긴 몽골이 항복을 요구하자 걍 항복해서 만주 몽골왕의 가신집안이 되었다. 얘네 가문은대대로 천호장이란 고위직을 세습하는 몽골 명문 귀족집안이 된다.

ㄴ 심양왕이 아니라 만주를 지배하던 옷치킨 家를 말하는거임

만주지역은 고구려 멸망 이후와 청나라 대두 이전까지 여러 민족의 나라가 몇세기 단위로 교체되던 혼돈의 카오스였기에, 어지간한 군사적 역량으론 지배할 수 없는 곳이었다.

칭기즈칸 시대 이래로 늘 몽골의 정예군이 주둔하였기에, 군사기술력이 제국 내에서 가장 선진화되어 있는 지역이었으며

그런 이곳에서 단련된 이성계의 능력치는 본 서버 오픈도 전에 만랩 상태가 되었다.

천호장인 할아버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 빠엔 티무르: 이춘), 아버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우르스 불카: 이자춘)의 아들이다.

--만주인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건 없고, 국적은 몽골인으로 후에 귀화하며 이씨족보를 구매한 것으로 보인다.[1] 근데 하필 사 놓은 족보가 무신정권 때 난리치던 이의방 꺼... 족보 브로커한테 존나 통수맞은 듯.--

ㄴ이분들은 역사를 정사가 아니라 자기 머리속에서 만들어서 쓰시네 정사대로 하자면 조선왕조실록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태조 1권 총서 1번째 기사에서는 계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일단 실존이 확인되는 인물은 고려 중기 무렵에 나타난 무신정권의 집권자 중 한명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李璘)이다.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과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별로 내키지 않았는지, 과거 전주 이씨의 족보에는 이린의 한자가 다르게 되어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 총서의 기록에서도 李璘이 아니라, 李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전주 이씨의 문중에서도 확실히 인정하고 있다.

하여간에 이린은 이의방이 끔살당할때 죽지 않고 몸을 피한 듯하다. 이때 이린은 시중(侍中)이었던 문극겸(文克謙)의 사위였는데, 장인 어른이 조금 도와주었을 수도 있다. 문극겸은 이의방이 죽은 후에도 비교적 꾸준하게 활약하였다.

이린이 문극겸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이양무(李陽茂)다. 이양무의 아들이 이안사(李安社)이고, 나중에 추존되어 목조(穆祖)가 된 사람으로, 다시 이때부터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가 전주 이씨인만큼, 당연히 본래 이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과는 전혀 다른 동북면 쪽이 이성계의 근거지가 된 것은 조금 곡절이 있었던 까닭이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보면 이안사는 그 지역의 관리와 관청에 딸린 기생의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다고 한다. 여자 문제 가지고 트러블이 생겼는지 재산 관련 문제인지는 여하간에 알 수 없으나, 하여간에 사이가 더럽게 된 모양으로 문제가 생긴 관리는 윗선에 연락하고 심지어 군사까지 동원해서 이안사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안사는 그 말을 듣고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이주했다. 이때,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170여 가(家)나 된다고 하는데, 이를 볼때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전주에서 꽤 끗발이 날리던 가문으로 보인다.

삼척으로 옮겨간 이안사 집단은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농사도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그들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안사 집단은 이때도 왜구에 대비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 이현우)

그래서 의주도병마사로 임명되었지만 이후 정세변화속에 원나라에 귀부한다.

하여간에 그렇게 기반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원나라의 야고(也古)라는 인물이 쳐들어올때는 몸을 피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대략 그 무렵에 새로운 지방관이 이 지역으로 오게 되었는데, 하필 전날에 문제가 생겼던 그 관리였다

얼른 자리 털고 뜨는게 나을 것으로 보였던 이안사는 동북면의 의주(宜州)로 이동했다. 이때도 170여 가가 따라 나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과장을 고려한다고 쳐도, 이안사가 상당한 수의 유이민 집단을 통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렇게 이주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해서, 그렇게 된 바에야 원나라 군사를 막으라고 시켰지만, 산길대왕(散吉大王)이라는 원나라 장수가 두차례 항복을 권유하자, 싸워봐야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 편이 떡고물이 많을것이라고 여겼는지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항복한 후 이안사는 같은 집안 사람을 산길에게 혼인시켜 서로 연줄을 만들어 놓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더 북쪽으로 가서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정착하였다. 알동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두만강 하류지역으로 보인다.

이안사는 산길의 주선으로 인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가 이안사를 위해 세워지고 이안사 본인은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 이안사의 집은 알동에 있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안사가 자신의 집단 유지를 위해 여러곳을 왕래하면서 노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안사의 집단이 여진 거주지역에 살면서 순수 농민적 성격에서 여진족과 같은 생활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안사가 사망한 뒤, 아들 이행리(李行里)가 그 기반을 이어 받았다. 이행리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도 참여하여, 충렬왕을 뵙고 자기가 몽고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충렬왕은 "그대 행동을 보니 마음을 알겠다"라면서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이행리의 세력이 확대되고 위상도 제법 커지자, 근처에 있던 여진 천호(千戶)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

“이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9번째기사

이행리는 우연히 그 과정을 알게 되고 가족들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뒤를 보니 적이 무려 3백여명이나 되어 추격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건너는 곳의 강이 물이 열려 자신들은 돌파하고, 다시 강이 물이 막혀 적이 추격해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은 과장이 있겠지만, 여하간에 다시 기반을 날리고 도망친 이행리는 여러 섬에서 조금 지내다가, 의주로 와서 그곳에서 다시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1300년, 쌍성 근처의 고려인들을 관리하는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행리가 죽고 아들인 이춘(李椿)이 이를 이어받았다. 이춘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함주(咸州)로 옮겼는데, 목축하는데 편리해서 그랬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이씨 집안의 세력권 아래, 유목 성향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 이미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춘은 쌍성 총관(雙城摠管)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로 볼때 해당지역에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은 세력으로 보인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알동에서 이씨 집안을 따라 이곳까지 이주한 사람들을 본래 자리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춘은 직접 원 조정에 글까지 올려 사정을 설명하고 이를 막아내었다. 이런 면으로 볼때, 이춘에게 있어서 그 주민들은 경제적 기반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춘이 사망하고 난 뒤에는 후계자를 놓고 내흥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이춘의 큰아들인 탑사불화(塔思不花)(몽골식 이름. 고려식으론 이자흥(李子興))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곧 죽고 말았다. 탑사불화의 아들이었던 교주(咬住)는 나이가 어렸는데, 이춘의 부인 중 박씨의 아들이었던 탑사불화, 이자춘의 세력에 대해, 조씨의 아들이었던 완자불화(完者不花), 나해(那海)와 누가 해먹을 것인가를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이자춘은 직접 개원로(開元路)로 나가 사정을 설명했고, 원나라 쪽에서 박씨 쪽에 손을 들어줌에 따라 이자춘이 어린 이교주 대신에 임시로 이씨 집안의 대빵이 되었다. 그 후 이자춘은 나해를 때려잡았다. 일단 기록으로는 이교주가 나이가 차자, 이자춘은 자리를 다시 넘겨주려고 했다는데, 교주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지……

그리고 이 이자춘의 아들이 이성계이다

다만 전주 이씨 유전자 검사 밝혀진 이성계 모달 O3a2c1b-CTS2272는 중국에선 발견이 안되고 일본에서 조금 나오며 한국에는 김씨, 박씨, 방씨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온다. 원조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

ㄴ? 조선 왕조 후손 검사 해봤냐? 우리나라 성씨 족보 개족보라 왕조 후손이 아니면 신뢰성이 별로 없는데 http://blog.koreadaily.com/view/myhome.html?fod_style=B&med_usrid=Dosa&cid=883381&fod_no=1

ㄴㄴ에휴 그럼 어디 굴러다니는 이씨 했겠냐 최소 종친회 인물이겠지

따까리로는 퉁두란이란 여진족 추장이 있는데, 건주여진족 수장의 측근가신이자 친척으로 누루하치의 조상이다.

건주여진족의 수장 오도리 퉁밍거 티무르(동맹가 첩목아: 童猛哥帖木兒: 퉁밍거 티무르: 몽케 티무르: 猛哥帖木兒)는 이성계 사후 전 에는 한양까지 기어와서 이성계의 아랫도리 앞 뒤를 핥고 빨았으나,

이성계 사 후 바로 이탈하여 세력 불리기 시작

훗날 그의 손자의 손자인 누루하치의 아들에 의해 이때 개같이 굴려졌던 조상님의 굴욕을 이자까지 쳐 붙여서 청산해준다.

ㄴ 그러고보니 조선 중기때 여진족들이 세력을 불리고 만주,조선, 그리고 심지어 몽골까지 먹었던 짓거리를 한게 꼭! 고려 말,조선 초기때 이성계가 살아 생전때 하던 짓거리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던데 그만큼 이성계의 영향력은 이 새끼들한텐 피할수 없었을지도


만주의 대부분의 여진족을 손에 쥔 권력자였지만, 그가 조선에 귀화하면서 통제하의 힘좀쓰는 여진족들이 이탈한다.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근세 조선을 만든 장본인이다.

자신의 군주였던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과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신돈의 핏줄로 몰아 붙여 죽였고,

이어서 자기가 옹립한 공양왕도 얼마 뒤에 폐위 시킨 다음 그 나라를 그대로 차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인지 굉장히 미화되어 있다.

전투력[편집]

한국사 최강의 보우마스터. 존나 쎄다. 존나쌔.

마운틴킹과 팔라딘, 아크&블러드메이지 같은 힘,지능 캐릭만 있는 휴먼의 민첩을 담당한다.

조선에서 수군 원탑이 이순신이라면 육군 원탑은 이성계다.

그는 기병을 잘 다루기로 소문났는데, 그의 여진족 친위대인 '가별초'를 잘 써먹었다.

나하추가 이끄는 몽골족 기병을 평지가 아닌 내리막길에서 기병 차징으로 박살냈으며,

언덕에 진을 치고 농성하고 있는 왜구를 기병으로 몰아 붙였다.


그 뒤에 이성계가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끈을 활로 쏴서 투구를 떨어뜨린 다음 부관 이지란이 쏴서 죽였다.

또한 1차 요동정벌때 오녀산성에서 짱박혀있던 원나라군에게 70발의 활을 쏘았는데 모두 얼굴에 명중했다. 존나 잘 쏜다.

중국의 홍건적이 좀비떼를 이끌고 개성에 쳐들어왔을 때,

수라같이 싸워 좀비들을 모랄빵 시켰다.

몽골족, 쪽바리, 족, 중원에 파병도 다녀온 명장 최영, 고려왕 등을 다 때려잡은 한민족 역사상 최강의 장군. 근데 아들 새끼에겐 쪽도 못 썼다.

이방원이 이런 기백을 이어받아 애비와 애비를 세운 공신들에게서 권력을 빼앗는다.

이 할아버지가 세운 무공은 솔직히 한민족 역사를 통틀어도 빨아줄 만 하다. 고려 말은 오랑캐 새끼들과 왜구가 반도 사방을 다 탈어먹으면서 약탈 방화 학살 강간을 종합 선물 셋트로다가 때려박고 있는 상황. 망해가던 나라답게 헬조선스러웠다. 왕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성계 할부지는 그 때 튀어나와서 적이란 적은 다 때려부수고 가는 곳마다 시산혈해를 만들어놨다. 그러니까 적어도 좆선 국토를 이 모양으로나마 유지시킨 데에 성계찡의 공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 양반 없었으면 쪽국하고 뙈놈들한테 남김없이 털려서 소말리아 상황까지 나왔을 수도 있다.

ㄴ 실제로 절령 전투도 고려 때는 존나 유명한 패전이었다. 전투나 그후 결과에 대해서 추측이 많으나 북방 주요 지역 여덟 곳이 걍 몰살된다. 근데 패전이라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아서 이때의 학살에 대한 썰은 야사에 많다.(근데 내용이 졸라 참혹하다.)

이 공로 덕분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조선의 왕까지 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초의 지지없이는 정권 못 잡는다.

평가[편집]

군사는 귀신 정치는 미숙

예를 들어, 당시 왜구도 북조가 남조 개쳐바르면서 그새끼들이 일본 최강 군대였고 짱깨도 홍건적 최강은 진우량 같은 다른 새끼(당시 주원장은 10만 대군으로 탑5 나중에 10만 명 줍줍해서 탑3됨.)들이었음. 몽골도 나하추보다 강한 최강군은 따로 있음. 근데 그새끼들은 지들 싸움에 바빠서 딱히 고려하고 안 싸움. 일본만 해도 고려에서 시발새끼들아. 왜구들 좀 어떻게 하라고 시발하고 편지 보내니까 좆까! 시발. 우리도 존나 바쁨. 수고거리고 몽골은 진우량, 장사성, 주원장 등과 함께 게이레슬링하느라 고려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나하추도 나름 만주의 패자이긴 했는데, 허언증 걸린 새끼라 좀 그럼.

반대로 그냥 뛰어난 장수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왕이 되어 후손들이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졸라 띄워준 면도 있다.

사실 고려의 전역사를 살펴보면 이성계 정도의 공적을 세운 장수는 꽤 많다.

1. 왕건을 따라 후삼한통일전쟁을 종군하며 전투에 나서기만 하면 이긴 유금필

2. 여요전쟁 당시 강조의 병신짓으로 고려 정규군이 홀라당 줘 털린 상황에서 5천도 안되는 패잔병들로 요나라 성종의 40만 대군을 능욕한 양규, 김숙흥

3. 귀주대첩에서 요나라 최정예를 전부 벌집피자로 만들어 버린 강감찬

4. 단 한명의 활약으로 불리한 전세를 몇번이나 역전시킨 척준경, 이놈은 동양 뮈라 그 자체다.

5. 최씨정권에게 찍혀서 비참하게 살해당했지만 귀주성 전투에서 몽고군을 막아내고 단 30명의 군사로 기세를 올리던 반란을 진압한 김경손

6. 원나라 간섭기라는 불운한 시대를 만나서 잘 알려지지 않은 김방경

대략 간추려도 이정도의 장수들이 나오는데 유독 이성계의 공적이 화려하고 자세히 기록된 이유는 당연히 그가 조선의 태조라서...

ㄴ유금필, 강감찬 뺀 나머지 장수들이 어디 이성계 전공에 비벼지긴 하냐? 양규, 김숙흥, 김경손같은 인물들은 공적 자체는 뛰어나지만 그 공적이 하나의 전쟁에서 단기간에 세운 것이고 전쟁 자체의 향방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양규, 김숙흥이야 반론의 여지는 있다만 어쨌든. 이성계는 굵직굵직한 전공만 뽑아내도 십수개는 우습게 나오고 이중 2차 홍건적 침입은 아예 개경이 함락당하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근본부터 흔들어버린 사건, 최유의 난같은 경우는 공민왕의 정통성 문제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상당한 국가적 위기였고 승천부전투는 왜구한테 개경이 함락당할 뻔한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이성계가 빠른 지원으로 개박살내면서 개경도 지키고 이후 왜구한테 장악당한 서해지역 해상권 회복의 교두보를 만든 매우 의미가 큰 전투다. 황산대첩은 뭐 설명할 필요가 있나? 나하추 침입도 나하추가 요동지역 최대의 군벌이고 명나라에 항복할 당시 휘하인력이 10만 단위, 실제 동북면 침입했을 때도 기록상 병력이 수만이나 됐던 걸 생각해보면 이걸 회전으로 처바른 이성계는 유금필보다도 전공이 컸으면 컸지 이성계정도의 공적 세운 장수가 많다는 식의 말이 나올 수준이 아니다. 거기다가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압록강 건너서 요동지역 정벌한게 이성계인데, 이때도 전략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정작 전투는 다 이겼다. 그것도 공성전인데. 이성계가 함락시킨 오녀산성 사진을 보면 시발 이걸 어떻게 공략하냐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지형이 괴랄하다.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가 오녀산성을 함락시키자 주변 수십개 성이 항복해왔고 이 때 귀부한 백성 수가 1만 호에 달했다고 나와있다. 몇 달 뒤엔 요동성도 공격해서 함락하지만 군량창고 태워먹고 유지할 여력도 안돼서 철군.

ㄴ 니 예시중에 누구 한 명도 이성계에 못비비는데?

ㄴ 척준경은 싸움 잘해. 그래서 이성계보다 낫다. 솔까 고대 전투에서 싸움 잘한다는 건 그만큼 큰 거다. 적이 그 얼굴만 보고 쫄거든.

ㄴ척준경은 돌격대장 스타일인 용장이지 군 사령관 감은 못되는데 이성계보다 낫다는 소리가 나오네 ㅋㅋㅋ

ㄴ 응 이성계도 싸움 잘해서 여진족한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왜구들이 이성계 이름만 듣고도 피해다님. 유금필도 북방 이민족들한테 추장 소리 들으면서 공포의 대상이었음.

ㄴ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분명 반도 톱클래스가 맞다. 근데 개인 전투력도 최강이었는지는 미묘함. 고려 무인들 중엔 이성계 말고도 삼국지를 찍었던 괴수들이 많았다. 심지어 문인들도 존나 강했다. 양규, 척준경은 무인이 아니라 문신이었다. 다만 척준경은 글 공부한 문신이 아니라 하급 호족 출신이라 문반 벼슬을 받은 케이스라서 실질적으로 무신에 가까웠다.

ㄴ 그래서 어쩌라는건지? 게임하냐? 이성계는 군 사령관이다. 사령관이면 지휘를 잘하면 되지 개인의 전투력을 왜 따지고 앉았냐 ㅉㅉ... 척준경 같은 케이스는 돌격대장 스타일인거고, 지휘력이 그 이상 능력은 못보여줬다. 물론 대단한건 대단한거지만 '장수'로서는 이성계랑 절대 못비빈다.

ㄴㅇㅈ 니들이 삼국지를 너무 쳐해서 현실과 구별 못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니들이 강감찬도 문신인였던건 알고하는 소리냐?

ㄴ이순신의 개인 무력은 인간흉기였다. 녹둔도 보고도 모르냐? 꼴랑 이경록만 데리고 그많은 여진족들을 벌집핏자 만들어놓은 무력이 이순신인데 이순신 무력이 평범하긴 개뿔. 국사시간에 쳐 졸아서 이순신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말고는 아는 게 없지? 이순신은 사격 솜씨만 평범하지 칼싸움은 겁나 잘했다. 사격 솜씨만으로 무력을 판가름하면 황충이 삼국지 전체최강자냐?

ㄴ이순신 무력이 평범하다는 개소리 한 새끼 성씨가 혹시 용인 이씨 아냐? 지 조상 미화하려고 이순신을 까내리는 그 성씨 말이다.

되려 무력이 평범한 장수는 이일이었다. 이일이 왜 그 높은 관직에 있었냐고? 당연하지! 신립빽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일 뿐이다. 이일은 무력이 평범해서 맨날 도망만 다니던 그런 잡장이다.

ㄴ당연한 게 이일이 상주에서 한 짓거리는 누가 봐도 적전도주다. 딴 장수들 같으면 이일의 목을 100% 베었지만 신립은 이일의 목을 베지 않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일은 원래 신립 라인이기 때문에 이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늙어서 치매가 걸렸는지 둘째 마누라 치맛바람에 좆도 모르는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

그러다가 왕자의 난이라는 참변을 맞고 뒷방 퇴물이 되어 분노에 불타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몰빵한 최후의 도박인 조사의의 난마저 실패 한 후엔 그냥 죽기만을 기다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

활질과 칼질을 조오오오오오온나 잘했다. 스나이퍼로 전직 해도 될정도로 미친새끼가 활에 유도탄을 달았는지 장거리 저격쯤은 밥먹다가 젓가락을 집어서 쏴도 머가리미간에 꽂아주는 실력이였다고한다.

칼질도 미친몽골새끼의 핏줄의 의심되는 클라스인데 생긴건 어쌔신크리드면서 하는짓은 진삼국무쌍으로 지혼자 말박이새끼들 목을 수집하고 다녔다. 평생을 변발새끼들이랑 말타고 다니면서 칼맞고 칼꽂고 했는데 사지 멀쩡히 살아있는걸 보면 가히 칼질에 미친새끼란걸 짐작해볼수있다.

행적을 보아 3색의 패기를 모두 다룰수있는것으로 보인다. 심심하면 쳐들어왔던 오랑캐새끼들을 손수 즉결참수시키며 한번 노려보면 선조마냥 질질싸면서 뒤져갔는데 이는필시 패왕색을 쓰고다녔음을 알수있다. 그애비에 그아들이라고 아들래미도 패왕색을 뿌리고 다녔는데 쓰는 상대가 달랐을뿐 둘다 한번 빡돌면 사람 모가지 몇개는 우습게 날아가는 존나 쎈새끼들이다.

성리학에 미친 정도전과 손잡은걸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써놓은 급식충이 있었는데(정도전이 성리학에 미쳤다는건 무슨 개소리인지..혁명파 사대부는 성리학을 개혁의 도구로 이용한거지 유교적으로 맹신하게 아니다.뭐 별개로 정도전이 성리학에 정통했던건 사실이다.) 정도전이 정말로 성리학에 미쳤었던가는 둘째치더라도 그럼 누구랑 손 잡아야 했는데? 이미 척을 진 최영이나 고려만 외치고 있는 정몽주랑 잡을까? 병신 급식충들은 성리학 단 하나만 보고 당시 이성계의 선택을 까는데 그때 정도전은 이성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실제 정도전 능력도 출중했고.

사실 조선 초기는 이성계의 후원을 받는 정도전이 국가 기틀 잡아놓고 중앙집권체제 갖춰서 그전까지 한반도 역사상 유례없는 ㅆㅅㅌㅊ국가였다

ㄴ 사실 송나라 카피한거임 양천제와 과거제도를 통한 관료세력 키우는 것. 어찌됐든, 명나라나 조선이나 이 당시 개국초에는 자영농민들 키우는 이상적인 농본국가를 만들어 놨기에 명은 그전까지 자기들 노예로 부려먹던 몽골 조지고 조선은 대마도와 여진족 털 수 있었다. 반은 실패지만

그러다 세조 씹색기가 개국공신 다 숙청하고 지방 사림새끼들 대거 등용하면서 엣헴거리는 씨발 유교 탈레반국가 싹이 자라나기 시작. <=지랄하네 급식충새끼가. 개국공신은 태종때에 싹물갈이 됐다. 세조가 썰어버린건 사육신으로 대변되는 충신들이지. 그리고 세조의 왕위찬탈에 일조한 양아치새끼들이 관학파에 유입되서 훈구파로 전락하는거다.

ㄴㄴ 지방 사림 새끼들 등용한 건 성종인데? 세조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의 공신, 즉 훈구라 부르는 새끼들이 성종 대까지 너무 설치고 다니니까 그거 견제하려고 사림 등용한거임. 그리고 그 사림 유교충들이 공자 왈 맹자 왈만 외우다가 임진왜란이라는 헬게이트를 만나게 되지. 이 시발 유교가 이렇게 해롭습니다 여러분

썩어서 폐단많은 불교 밀어내고나서 들여온게 하필이면 하필이면 "유교"

어떤 병신들은 성리학이 문제지 유교가 문제는 아니다 이 지랄을 하는데 유교 자체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이념으로써는 쓰레기같은 이념이 맞다.

유교의 전통 중시 체제는 근대화를 억제할 수밖에 없고 아무리 전근대라지만 중국과 한국은 유교에 입각해 정치를 해버렸기에 근대화의 기회를 스스로 날린 셈이고 유교가 뿌리를 박지 못한 일본은 에도 시대에 쇄국 정책 속에서도 몰래 네덜란드로부터 서양 문물을 조금씩 들여오며 근대화의 발판을 닦았다.

그리고 후손들은 이방원부터 수양대군외에 다른 자신의 후손을 키우지 못한것도 있었다.

집안[편집]

만일 니가 전주 이씨 본가에 가서 '이성계는 몽골놈이었다지? 엣헴!' 했다간 오는길에 영구차를 타고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찢어진 눈과 광대뼈에 사각형 턱을 가진 몽골리안 한국인이 대체 왜 본가인 몽골인을 오랑캐라 멸시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ㄴ이새끼 왜자꾸 음모론임 여러분 역알못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ㄴ이새끼는 '음모론'이 뭔 뜻인지도 모르는듯. 이성계가 만주인일수도 있다는 '설'이 어떻게 '음모'가 됨? 음모 한자 뜻 모름?

ㄴ음모가 시벌 그거 아니냐?? 가랑이에 있는 고것.

송나라 사람 서긍도 고려도경에서 '고려롬들은 문화는 한족문화인데 면상은 씹어먹을 북적새끼 쌍판을 달고 있다'라고 한 바 있다.

전주 이씨의 핵심인물

조선 모든 왕족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이고 친자검사하면 아닐 수도 있다.다 뒤졌는데 어케 친자검사를 하냐 무덤에서 꺼내놓고 유전자 검사 해야지 특히 영조)

이순신 (무의)의 9대조 할아버지

이경록의 9대조 할아버지. 이경록은 이순신이 과거에 처음 급제했을 당시 녹둔도에서 같이 여진족을 무찔렀다. 이일에게 모함도 같이 당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될때 이경록은 제주목사가 되었다.

이승만의 18대조 할아버지

이호성도 전주이씨라고 한다.

이경규, 이휘재, 이수만, 이상은(가수, 발레리나 둘 다), 이지은도 전주이씨이다.

의혹[편집]

북한김일성에 대한 날조와 미화를 보건대 이성계 이놈도 사실 조선왕조의 날조와 미화로 점철된 경력으로 도배된 게 아닐지 생각된다. 왜냐면 이 인간 일화를 보면 과연 가능한 지 의문인 일화가 꽤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호족출신의 정치군인으로서 싸움 좆도 못하는데 최충헌처럼 시기 잘타서 권력잡아 그대로 쿠데타에 성공하고 지금의 북한처럼 철저한 세뇌와 통제를 통해 구라를 진실이라고 믿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성계의 공적이 주변국 사료를 통해 교차검증이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 잡은 놈들(그나마 유명한 나하추 새끼도 강남 전투에서 지고 고향에 돌아가 조용히 살겠다고 목숨 구걸하더니 살려 주니까 통수 친 다음에 막상 다시 제압하러 오니까 바로 항복하는 개찌질이다. 도대체 통수를 친 이유도 모르겠다.)이 일군이 아니고 좋게 봐야 이군 정도이기에 관심이 별로 없어 발생한 일이다.

하지만 이성계 능력이 좆도 없었다면 권력을 잡기는 커녕 쿠테타가 쏟아지는 신라 말기 꼴이 됐을 확률이 더 높다는 점에서 이 설은 신빙성이 없다. 아니, 당장 무신정권만 하더라도 최충헌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죽창이 난무했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더구나 몽골계 군벌 나하추 격퇴한거랑 홍건적 이긴거는 중국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데 당시 홍무제도 고려군이 명 쳐들어올까봐 전전긍긍했다. ㄴ이건 당시 명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지네 정보부 정탐력이 개판이라서 생긴 헤프닝이다. 그리고 우리 조상님들이 지금처럼 광고에 재능이 있어서 실제로 약할 때도 다들 센 줄 알고 있었다.

비록 징집병이지만 오랑캐 짱깨 쪽바리랑 싸우면서 실전경혐 쌓은 전투의 프로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여진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물론 추측에 불과하고 고대라 확인할 방법이 거의 없지만 이성계 여진족 설에서 나오는 지적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의문점들이 매우 크다. 예를 들어서 태조실록에서는 이안사(李安社)가 본래 전주 출신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 있었을 때의 기록이 거의 없다. 전주에서 이주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전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기록은 없는 편이다. 문헌에 따르면 이주할 당시 세력이 170여 가(家)에 달한다고 했으니, 이는 이성계 집안이 처음부터 상당한 세력기반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1가(家)는 오늘의 대가족보다도 훨씬 더 큰 개념이었다. 그것은 가족 외에, 경제활동에 동원되는 종복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단순히 호적상의 개념에 그친 게 아니라 일종의 세력 개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170여 가가 이성계 집안을 따라 이주했다는 것은, 이성계 집안이 처음부터 상당한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애초에 머지않은 미래에 신출내기던 이성계에게 적지 않은 병력을 경험으로 삼으라고 주기까지 한다.~~ 솔직히 그런 세력이었다면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서 무언가의 발자취가 있어야 정상인데 태조실록에는 이성계 집안이 전주에서 남긴 발자취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냥 전주에서 막강한 세력을 이끌고 옮겨갔다는 식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성계의 가계(家系)에 관한 태조실록의 기록이 이성계 집안이 정말로 전주 출신인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수십 혹은 수백 가구가 세력가를 따라 이동하는 것은 농경사회보다는 유목사회의 모습에 가깝고 농경 지역 출신인 인물이 여진족 거주지에 가서 금세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까놓고 이성계 집안이 농업이 아닌 유목민들에 가까운 집안 경영을 했다는 증거들은 사료에서 의외로 나오며 다른 농경 지역의 지도자들과 비교해도 매우 이질적인 면들이 많다. 태조실록의 '총서' 편에서는 "목조(이안사)가 석성을 쌓고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고 했으며 '총서'의 또 다른 부분에서는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이 지금의 함흥 근처인 함주로 진출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목축에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농경만 해야한다는 법은 없지만 농경 지역에서 유목민처럼 행동하며 세력을 얻은 것은 지리적인 면에서도 특이한 일이고 이성계 집안의 장수들은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는데, 예로부터 특별한 이유로 엮인 것도 아님에도 농경 출신 지도자인 이성계 집안을 따랐다는 점은 역시 납득하기 힘든 점이다. 세종 19년 8월 7일자(1437년 9월 6일) 세종실록 등을 보면 여진족 이지란은 최소 500호 이상의 여진족 가구를 거느린 세력가이며 주매·금고시첩목아·허난두·최야오내 등을 비롯한 많은 여진족 세력가들이 이성계 집안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성계 집안을 유목민들과 관련이 없는 농경민 세력가로 가정하면 정말 괴이하고 뜬금없게도 상당한 여진족 세력을 얻은 것이다.

ㄴ지금이야 거의 전국토가 개간되어서 농사 하면 그냥 원래 있는 논밭에 씨 뿌리고 일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과거의 농사는 근세까지도 나대지나 삼림, 늪지에 대한 대대적인 개척과 개간작업이 요구되었다. 전주 인근 호남평야의 개척이 산기슭에서 평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 고려시대의 일이며, 특히 호남평야는 면적에 비해 하천의 유량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저수지 축조 등의 토목관개사업이 수반되어야 했다. (괜히 강가나 산지가 먼저 개간되는 게 아니다. 산 근처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농사지을 수 있지만, 평지는 그런거 없다.)그렇기 때문에 이런 대대적인 개척사업을 진두지휘할 지방 유력호족의 지위가 이후 시기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것이며, 다량의 노동력과 그 노동력을 통솔하는 유력자가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개개인의 황무지 개간이라는 매우 고된 작업을 의미했다. 교과서에서 왜 선사시대 쌀농사 연대를 중요하게 다루는가? 바로 초기 쌀농사가 대량의 노동력을 요구하며 이런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체제, 정치체제의 등장 시기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지의 개간률과 이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높아지면서 향리의 권력이 축소된 조선시대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이 호족들은 사병을 통해 치안까지 제공했고, 지도자가 도망친 상황에서 이안사와 싸우던 안렴사나 별장이 남은 이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지역민들도 그와 함께 이동할 동인은 충분했다. 이에 반해 유목민은 끊임없이 물과 풀을 찾아서 돌아다녀야 하니 오히려 흩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여기에서 바로 장자들을 빨리 독립시켜 내보내고자 말자상속이라는 특유의 상속시스템이 나온 것이다. 이들은 거주를 집단으로 할 지언정 생업 목적의 이동을 대집단으로 하지는 않는다(물과 풀이 빨리 고갈되니까). 지도자를 따라 집단으로 이주하는 것이 모두 유목민이라면, 후한 말에 유비를 따라 피난간 형주인 10만은 사실 남중국에 살던 흉노족들이었단 말인가? 게다가 동만주의 여진족들은 반농반목민들이지 유목민이 아니다.

총서 원 내용도 斡東東南三十餘里, 有海島曰者考羅, 北連於陸。 穆祖築石城, 以放牛馬。 알동의 동남쪽 30여리에 자고라라는 해도(섬)가 있는데 북쪽으로 육지에 닿았다. 목조가 석성을 쌓아 우마를 놓아 먹였다.

으로 즉 알동 본토에서 목축을 한 것도 아니고 따로 떨어진 섬을 목장으로 삼은 것이며,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유구한 전통이었다. 만약 이안사가 정말 반농반목의 여진족이라면 바닷가 섬에 뚝 떨어진 목장을 만들 게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터전 가까이에서 말을 기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않겠는가? 동아시아 농업의 알파요 오메가인 소야 말 할 것도 없고, 말은 농경민족에게도 이동수단 혹은 군사자원으로서 매우 중요했다. 전술했듯이 13세기의 유력자들은 사병을 보유하여 집단의 안전을 도모했는데 전근대에 말은 군사력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가축이었다. 도조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천호직이라는 게 중앙집권국가의 지방관처럼 안정된 영역을 가진 지위가 아니라 다른 천호 및 부족들과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꽤 고달픈 신세라 충분한 기병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함흥 이북의 동북면은 미개척된 산림지대로 맹수가 우글거리는데다가 기후 문제로 토지의 생산성이 낮아 농업과 수렵을 병행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고, 같은 환경에 속한 여진족들과 생활양식이 겹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또한 이후 도조가 알동에서 쫓겨나 재기할 때는 등주(안변) 호장 최기열에게 장가를 들어 영업전을 경작하면서 알동에서 남하하여 합류한 주민들을 모아 함주로 북상한 것인데 이것만 봐도 농업보다 목축이 위주였다는 주장은 별 근거가 없다. 지역 호족 쯤 되는 사람이 (고려인 입장에서는)농사도 지을 줄 모르는 여진족놈에게 딸을 후처로 주어 경작을 맡긴다니, 집안 말아먹을 일 있는가?

마지막으로 여진족 세력에 관해서는

여진족 데리고 다닌다고 다 여진족이라는 논리대로면 고려시대의 유금필도 여진족들에게 대추장으로 추대되었고 이징옥은 여진족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시도했으니 여진족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야인들은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룩한 역사와 경험이 일천한 탓에 일신의 무력에 경도되어 굴복하는 경향이 컸을 뿐이며, 이성계 개인의 무력은 충분히 여진 부족장들을 압도할 수준이었다. 어차피 사료상으로도 여진족들이 전주 이씨 일가를 동류로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는 다구리까지 놓은데다가 그렇게 도망간 이춘을 알동 사람들이 따라 내려왔다는 대목으로 간단히 반박된다. 정작 그 여진족들 중에 이성계를 따라 개경 가서 정착한 것은 이지란 하나였다.


사실 5000호 천 회장(千戶長)과 다루가치의 지위를 원나라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농경민족이면 당시에 이런 고위직을 이민 왔다고 존나 뜬금없이 받은 거다. 농경민족 출신으로 받은 새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성계 집안은 군공 등이 없었다는 점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ㄴ다스리는 영지와 영민이 많은 세력가이자 실력자라서 그 영민들을 관리하라고 천호장 지위를 받는건데 농경이고 유목이고가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이 역시 사료의 서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는데, 이안사는 삼척 시절부터 무리를 이끌고 왜구와 몽골의 침략을 막은 공적으로 고려 조정에서도 의주병마사 직함을 내릴 정도로 의주(원산)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해 원에게서 줄기찬 러브콜을 받아 귀부하여 천호장과 다루가치직을 받은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덜컥 항복하고 천호장이 된 것이 아니다. 한양 조씨 집안은 아예 귀부하고 쌍성총관 자리를 먹었는데, 이런 논리면 한양 조씨도 여진족 집안이란 말인가? 어차피 정복자인 몽골의 입장에서는 고려인이건 여진족이건 한인이건 색목인이건 간에 자기들보다 아래인 것은 매한가지이며 그저 각자의 능력과 세력이 더 중요한 고려요소였을 뿐이다. 반면 터줏대감인 여진족들은 이 굴러온 뜨내기에 대해 분명히 보복을 가해 내쫓기까지 했다.



대충 의혹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기록에서 의혹이 심함.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은 「태조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단이며, 자는 군평이고 옛 이름은 성계이며 호는 송헌이다. 전주의 대성이다(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姓李氏、諱旦、字君晋、古諱成桂、號松軒、全州大姓也)라고 되어 있어 본관이 전주 이씨인 것, 신라의 사공 이한을 시조로 하여 이하 21대를 거쳐 이성계에 이른다고 하나, 제16대까지는 거의 이름만이 알려져 있고, 제17대(이성계의 4대조)부터 전기가 있는데 왕실에서 전주 이씨 중 불분명한 인간들은 유독 희한하게도 선조로서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1, 9페이지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는데 (初三海陽(今吉州)達魯花赤金方卦、娶度祖女、生三善三介、於太祖、為外兄弟也。生長女真、膂力過人、善騎射、聚悪少、横行北邊、畏太祖、不敢肆) '처음에 삼해양(함경도의 길주) 다루가치 김방괘(여진족이라고 여겨진다)가 도조(몽골명 부얀테무르, 3페이지 하, 이자춘의 아버지)의 딸에게 장가들어 삼선삼개를 낳으니, 태조에게 외종형제(성이 다른 형제)가 되었다. 그는 여진 땅에서 나서 자랐는데(여진의 족장이 되었다) 팔의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불량한 젊은이를 모아서 북쪽 변방에 꺼리낌없이 돌아다녔으나,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하였다.'라는 내용으로 이에 의하면, 태조도 여진족일 가능성이 높음. 왜냐하면, 유목민과 수렵민은 족외혼제를 취해, 성이 다른 집단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 관습임. 여진족의 족장인 삼선삼개가 태조 이성계의 외종형제라면, 태조 자신도 여진족일 가능성이 상당함.

2. 이씨 일족은 여진족 부하를 다수 두어 이씨 일쪽이 두각을 나타낸 데에서는 그들의 도움이 컸으며, 출신지인 함경도는 당시에도 여진족의 근거지 중 하나이거나 최소한 그들이 활동하던 영역임.

3. 다루가치 직은 고위직으로 몽골인들이 다수, 다른 민족들도 공을 세우면 임명되는 일이 있었지만 뜬금없이 등장해 별 관련도 없는 고려인이 임명되는 것은 심히 부자연스러움. 천호로서 여진족을 통치한 것도 수상함. 은근 당시 그 지역의 나름 유목민 유력자들 중에 이씨 일족의 친구들이나 부하들이 있었음. 반면에 고려인들은 음..? 고려에 살았을 때도 나름 유력 가문이라고는 하는데... 유독 고려인들은...

4. 선조가 원 왕조의 신하로 원의 개원로 출신인 것은 확인되고 몽골어로 쓰여진 가계도에서, 이씨 일족의 여진 이름은 완전히 기재되어 있으나 조선식 이름은 불완전함.

마지막 무신정권?[편집]

무신정권의 번외편으로 이성계도 무신집정으로 꼽기도 한다.

사실 이성계의 권력은 수 많은 무신집정들 보다도 훨씬 강했는데 위화도 회군 이후 공양왕에게 선양 받기 직전 이성계의 권력과 동급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고려 역사 500년 가운데 단 한사람. 바로 최충헌 뿐이다.

한편으로는 최충헌의 권력이 얼마나 거대하고 비정상적인지 알수 있기도 한데 고려를 멸망시키고 선양을 받아 국왕이 된 자와 권세가 동급일 정도였으니...

이성계의 권력이 이렇게 강해질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국가 시스템이 돌아가던 무신정권, 최씨정권 시절과는 달리 당시 고려는 그냥 껍질만 남아있을 뿐이었고 고려 정규군 또한 없던 상황에서 이성계는 본인을 중심으로 한 사병집단이 있었으며 그 사병집단의 전투력은 당시 고려군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가문들의 사병들 가운데서도 최강을 자랑했다.

또한 이성계의 사병집단은 단순히 전투력 뿐만 아니라 그 규모도 엄청났는데 공민왕 시절 홍건적에게 개경이 털리자 개경 탈환 전투가 벌어졌고 여기서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 2천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이 2천의 규모가 당연히 이성계가 가진 사병의 전부가 아니었으므로 최소 2천이라는 말인데 훗날 조사의의 난에 동원된 반란군 1만의 군세 대부분이 이성계의 사병이라는 점에서 최대 1만이라고 추정도 가능하다. 이는 최씨정권의 정점에 있던 최충헌, 최우 부자가 즉각 동원 가능한 병력인 도방과 삼별초의 병력을 뛰어 넘는 수준이다.

이는 무신정권까지만 해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고려군 자체가 붕괴한 탓으로 원나라 간섭기를 지나면서 고려군 유지에 별다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고려정부가 정규군을 거의 방치해 버렸고 이 상태로 80년이 지나고 보니 남아있는 거라곤 간신히 개경을 방어할 만할 병력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홍건적, 왜구전쟁이 발발하자 급한 불이라도 잡자는 식으로 고려정부는 각 지방의 유력 가문들에게 이런저런 벼슬을 주며 이들이 보유하던 사병들을 동원해 이에 대응했는데 이는 한발만 삐끗해도 바로 후삼국시대의 재판이 될 수도 있던 상황이었으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고려정부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나라가 쪼개지는 것은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이기니 자연히 이성계 자신의 인지도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올라갔으며 이성계 본인 또한 정치적으로 완전히 쑥맥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향처인 한씨를 동북면에 놔두고 개경의 유력 가문 출신인 강씨를 부인으로 삼은 것과 당대의 거물 정치가였던 경복흥과의 친분을 유지한 걸 보면 사극에서 나오는대로 신진사대부가 시키는대로 한 정치와는 무관한 군인이 아닌 정치군인의 성향이 짙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잘 나가는 정치군인 이성계였다면 우왕이인임 정권을 실각시키기 위해 최영과 이성계를 동원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를 최영과 이성계의 신군부 집권이라고 정의가 가능한데 문제는 최영의 그늘 아래 있긴 했지만 이성계 또한 전공에서는 최영보다 더 앞서는 전쟁영웅이었고 그 자신 또한 어느정도의 야심이 있는데다가 정도전을 위시한 엘리트 집단들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 판 같은 정국의 안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최영이 비록 나이가 많아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긴 했으나 그래도 어쨌거나 신군부의 수장이었고 이런상황에서 우왕최영의 딸과 혼인을 하여 두 사람이 사돈관계가 되어버리자 당연히 이성계는 차츰 소외되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명나라에서 땅 내놓으라고 지랄을 하자 바로 우왕은 풀발기 하여 요동정벌을 구상했고 그 결과가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의 무신정권이 출범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후 최영을 죽이고 우왕도 폐한데다가 이성계의 무신정권의 또다른 한축인 조민수도 나가리 시켜버리고 보너스로 창왕까지 날려버린다.

최충헌못지 않게 고려국왕을 자기 맘대로 휙휙 날려댄 것인데 하지만 결국 그는 역사의 승리자인데다가 그 주변에는 정도전을 위시한, 새 왕조 개창을 바라는 신진사대부가 있었던 관계로 고려 무신집정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로 불리지.

다만 실권만 가져가고 그래도 허수아비로나마 왕으로 살려준 무신정권들과 비교하면 전주이씨 이성계통수의 세기는 뒷통수가 더 알알하도록 셌다고 할 수 있겠다.

여담으로 이성계의 정치적 재산이었던 이성계의 사병들은 이성계 최후의 전투이자 최초의 패전인 조사의의 난이방원이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궤멸된다.

그것도 태종 편성한 진압군은 다름아닌 정도전과 자신이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군대였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창하는데 기반이 된 자신의 사병들이 국왕이 된 자신의 아들이 지휘한, 자기가 만든 나라의 군대에게 패해 궤멸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다.

천적?[편집]

주의!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존나 미스터리합니다.
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내가 누구냐고? 알 필요 없다.
이 문서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나 알 필요 없는 것에 대해 다룹니다.
이 비밀을 함부로 까발리다간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은 그만!

30년 넘게 전쟁터에 있으면서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던 불패의 맹장이었으나 단 한번 조사의의 난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패전의 치욕을 경험한다.

그것도 자신의 모든것을 전부 몰빵한 전투에서 아군 궤멸이라는 비참한 패전으로.

당시 진압군의 총 지휘관은 당연히 평양까지 올라온 태종에게 있었지만 청천강에서 진압군을 이끌고 이성계의 군대와 싸운 이는 당연히 태종이 아니다.

태종은 어디까지나 전시행정 목적으로 진압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평양까지만 올라온 것이었지 청천강에서 이성계의 군대와 싸운 진압군의 장수는 따로 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수가 없단 말이지...그 이유야 당연하게 조선사관들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누락시켰기 때문이고. (칼방원의 평소 행태로 볼 때 능력만 빨리고 소리소문없이 제거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여하튼 이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5만의 진압군과 1만의 반란군, 양군이 청천강에서 맞붙었고 그 결과 1만의 반란군이 완전히 궤멸되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진압군이 반란군을 포위한채 일방적으로 팼다고 보는것이 맞다.

반란군은 제대로 퇴각 조차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줘 털렸는데 이때 고려말 최강군이었던 이성계의 사병들 또한 그 명줄을 다했다.

이성계의 사병들이 씹창이 날 정도로 털렸다는 걸 보면 이성계가 반란군을 지휘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전투 현장에는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병들이 몽땅 줘 털렸다는 걸 보면 이성계도 이때 진압군에게 체포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공식적인 기록은 이성계는 난이 진압된 후 한양을 돌아온 것이지만

여하튼 아무리 진압군이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훈련된 정예병이고 그 수가 5만에 달한다고 하더라도 이성계의 군대 또한 정예병력임은 확실했고 이성계가 쪽수에서 밀린다고 그대로 털릴 정도로 평범한 장수는 절대 아니라는 점에서 이때 이성계의 군대를 털어먹은 진압군의 장수는 이성계 입장에선 늘그막에 뜬금없이 튀어나온 천적이라고 봐도 무방할것이다.

ㄴ물론 태종이 지 애비인 이성계의 원래 직속 병력과 신하들을 꽤나 가져간 것도 있어서 완전 천적은 아니다. 더구나 이때는 이성계한테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던 베테랑들도 늙었거나 뒤졌다.

죽음[편집]

파일:건원릉.JPG

조사의의 난이 좆망하고 이성계는 그 해 12월 개경으로 돌아와 아들과 화해하고, 그 뒤 절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그로부터 6년 뒤인 1408년에 생을 마감한다.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이방원이다. 절친 정몽주정도전, 그리고 자식들 중 유달리 똑똑해서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을 포함 아들을 둘이나 죽인이고 자기한테 칼을 들이대고 반란을 일으켜서 포로로 잡아끌고 온 역사에 남을 막장패륜아 아들. 살아있는 원수인 그 이방원이다.(+이방원이 반대파 살해나 왕씨학살같은 각종 인간백정짓을 이성계 세력이라는 자기 간판 밑에서 벌여대고 이성계한테 뒤집어씌워서 자기가 다 욕처먹게 한 것은 덤ㅋ) 기분 정말 좆같았을거다... 죽기 직전에 이성계는 담이 심해서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태종이 청심원을 직접 먹이려했지만 이를 삼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심히 먹였는지, 아니면 먹이는 듯 그만 가시라고 숨구멍을 막아대었는지는 모르겠고ㅋ.

아무튼 실록에서는 '눈을 들어 태종을 두 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드라마[편집]

아니 이런 오글거리는 내용은 드라마 문서에 집어 쳐 넣어라


과거 이성계는 고려를 치려는 조소생을 막으라는 아버지 이자춘의 지시를 받았다. 이성계는 동조하지 못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소생을 배신했다. 조소생은 죽어가면서 이성계에게

네 놈의 씨들이 초주지가(礁主之家)[2] 의 자식들이었구나"

 
— 극중 조소생


내 울타리 사람을 잘못 건드렸소. 거래를 하려면 활을 들고 오지 않았겠지. 나는 초주지가 개새끼가 아니라, 새끼 잃은 호랑이라오. 내가 명예롭지 않으면 내 사람을 지킬 수 없소

 
— 극중 이성계

ㄴ 또 날조 시작한다.. 초주지가이면서 자기합리화 하는 건가??

ㄴ 근데 이거 드라마 제목 뭐냐?

ㄴ 육룡이 나르샤.

드라마 [정도전]에선 정말 멋있고 피안도 사투리를 쓴다. 함깅도 사투리는 지라이가 씀

게임[편집]

이 문서는 잘생기고 매력적이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에 대해 다룹니다.
순간 설레서 동인녀가 될 지도 모르니 열람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징기즈칸 4에 고려 무장으로 등장한다. 무력 80 넘기 때문에 상당히 요긴하며 스텟 총합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동일한 231이다. (스텟이 지력, 무력, 정치 이렇게 3개다.)

그런데 얼굴이 심하게 곱상하게 생겨서 여자가 남장한 것처럼 생겼다. 원작고증으로 명사수 판정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성계이 비하면 듣보잡 그 자체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나부랭이보다 못하게 나온 건 확실히 고증무시다. 원나라, 여진족, 송나라, 일본 얘네들과 싸워 모두 이긴 이성계라서 당연히 요시츠네 나부랭이따위보다 무력이 높아야 정상이다.

각주

  1. (전근대 시대에 성씨는 그 가문의 봉토를 의미하는, 귀족의 증거인지라, 성씨를 가진 고려인이 몽골에 귀화하면 반드시 자신의 성씨는 남겨놓는다. <ex 이첩목아, 박불화, 김첩목아 등> 때문에 그의 조상은 100% 한반도인은 아니었다.)
  2. 주인을 문 개의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