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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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나치의 패전 이후 일본, 독일 등의 추축국과 그들이 점령한 오스트리아, 폴란드, 베트남 등의 문제에 관해서 연합국 최강자 미국, 영국, 소련이 모여서 벌인 회담.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진행되었다.
포츠담은 베를린 근처에 있는 도시다. 독일판 성남시 느낌
참여자[편집]
- 미국 - 해리 S. 트루먼
- 영국 - 윈스턴 처칠->클레멘트 애틀리: 포츠담으로 갔을 때는 처칠이 총리였으나, 도착하자마자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처칠은 실각했고, 처칠의 대타로 새 총리 애틀리가 대신 포츠담에 와서 대부분의 회담을 진행했다.
- 소련 - 이오시프 스탈린
내용[편집]
일본 제국의 항복 요구[편집]
포츠담 회담이 열리던 7월,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미 항복한 상태였고 일본만이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와 외로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소련 대신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들어와서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면서 일본에게 무조건적으로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렸으나, 육군, 해군, 군부, 내각, 천황 모두의 이해관계가 얽혀서 항복 한 마디를 못 하던 일본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다들 알겠지만
독일과 베를린의 분할통치[편집]
교과서에 나오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독일을 4분할 통치하는 것이 이때 결정된 것이다. 독일의 정신적 조상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센 왕국이 시작된 프로이센, 산업 시대의 자원 매장지 슐레지엔도 독일에서 분리해서 폴란드에 귀속시켰다. 이 때 오늘날의 독일 국경선이 결정된 것이다.
자를란트(자르)는 특별히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독일과 분리되었으나 1957년 1월 1일 서독에 반환되었다.
베를린도 4분할되었다.
1949년에 연합군의 독일 통치가 끝나고 미국-영국-프랑스의 영역은 서독과 서베를린이 되었고, 소련의 영역은 동독과 동베를린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빈의 분할통치[편집]
오스트리아 또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빈도 베를린처럼 4분할해서 통치했다.
1955년 7월 27일 조약을 체결해 분할통치는 끝났고, 점령지가 서독과 동독으로 분열된 독일과 다르게, 오스트리아의 소련 점령지는 정상적으로 오스트리아에 반환되어 분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독일과의 통합(대독일주의)을 영구적으로 금지시켰으며 생화학무기의 생산이 금지되었다. 10월 26일에는 영세중립국을 선포하면서 오늘날까지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외[편집]
폴란드에서 자유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행되지 않았다. 베트남은 중화민국과 영국이 진주하기로 결정했으나 이후 원래 지배자였던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군사력을 앞세워 회담 내용을 노골적으로 위반한 소련의 태도는 냉전을 촉발할 수밖에 없었다.
포츠담 선언[편집]
소련 대신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끼어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