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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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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아악 올라갔다 했다가 화아악 내려갔다 했다가..
코리아(KOREA)의 계보
고구려
(Koguryŏ)
고려
(Koryŏ)
고려
(Koryŏ)
코리아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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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구려
高麗, 高句麗 / Goryeo, Goguryeo
기본 정보
수도 국내성→평양
대륙 동북아시아
추가 정보
지도자 태왕(太王)
언어 고대 고구려어(서북 방언)
종교 불교,샤머니즘,도교

[1]

한국사의 시대구분
청동기시대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주호 · 우산
원삼국 시대
부여 · 옥저 · 동예 · 고구려 · 주호 · 우산· 낙랑군
마한 · 변한 · 진한
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 탐라 · 우산
두막루
남북국시대
발해 · 신라 · 탐라 · 소고구려 · 소백제 · 보덕국

후삼국시대
신라 · 발해
태봉 · 후백제 (반란세력)
통일왕조 시대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광복군 정부 ·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정기
미군정 · 소련군정
분단시대
대한민국 · (자유조선)
북괴 (반란세력)

개요[편집]

영명 7년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북위)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

-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대충 국력은 육조 시기 제나라(남조)보다 조금 못하거나 같다.

한반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다른나라를 약탈하고 조공을 받는등 이미지가 좋다.

ㄴ좀 더 넓게 치자면 발해나 고조선도 있지만 이들은 지네 정보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않아 정확하지 않으니 다른 나라한테 응디 취급 및 형님 소리를 듣는건 고구려가 유일하긴 하다.

현대 미디어에서 미화하는 것과 달리 백제와 신라를 걸핏하면 침략하여 약탈하고 파괴해가는 악의 나라였다.

사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조선이 보는 후금 이미지가 딱 고구려다.

고구려 고대 유골 분석 결과가 나오면 매우 흥미로울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저 먼 옛날 기원 전부터 기원 후 668년까지 존재한 만주와 한반도의 고대 왕조.

부여에서 탈출한 주몽과 일족이 압록강 산골짜기에서 나라를 일으켜 주변 소국들을 잠식하며 한나라에 대항해 만주와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고구려를 제외한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모두 짱개새끼가 정색하고 노려보면 깨갱하면서 눈깔고 엎드렸지만 고구려는 유일하게 고개 빳빳히 들고 깝치던 국가였다.(고려는 그래도 요나라한테는 선방했고 금나라와도 형식적 조공관계지만 거의 대등한 관계를 맺었다. 원나라한테 영혼까지 털려서 그렇지, 그래도 존재 자체가 대자연의 재앙이었던 몽골이니 넘어가주자.)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광개토대왕,장수왕 때도 조공기록이 존나게 많이 나오고 연개소문도 여자 2명 바쳐가면서 후장 핥았다.

아 물론 고구려 전성기때는 중국이 다 쪼개진 상태라 깝치고도 버틸 수 있었는데 중국이 통일되자 한세기도 안되서 지도위에서 사라져버렸다. 국뽕 위키에서는 중국이 전력으로 대항하던 국가니 하면서 딸딸이 치는데 아가리로만 사방에 어그로 끌다 고구려 치고 망한 수나라는 몰라도 당나라는 실제로 사방에서 조오나 깝치느라 고구려에 전력을 다할 수 없던 상황인 걸 국사만 배워서 모르나 보다. X발, 생각해 보니 동아시아사 배우는 외국인 입장에서 들으면 어이없을 듯

ㄴ고수전쟁과 고당전쟁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동원병력을 보면 전력을 다한게 맞다

위에 놈은 병신인가보다. 당나라 건국하고 돌궐을 빵셔틀로 만들고 나선, 수십년 후에 가르친링이 준동하기 전까지 당나라를 시비털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니까 온 국력을 다해서 고구려를 조지려고 나섰지. 이세민은 수양제와는 다르게 전술쪽으로 좀 더 발달했는지 수양제가 수백만을 끌고가도 흠집하나 내기 힘들었던 요동성을 며칠만에 무너뜨린다. 그러다가 왠 쥐오줌만한 안시성에 발목잡혀서 원정실패... 그래서 당나라는 전략을 바꿔서 수십만이 아닌 1~2만의 병력으로 고구려 국경선에서 깔짝대기시작한다. 이게 효과가 존나있는게 안그래도 수나라에 이어서 당나라랑 캐삭빵뜨던 고구려라 존나힘들었는데 좀 쉬어서 체력보충하려고하니까 자꾸 깔작대니까 짜증이 존나 날수밖에없던거다. 그러다가 연개소문 아들들이 서로 ㅄ짓하는바람에 내부로도 무너져서 그대로 시밤쾅.(물론 돌궐, 백제의 동맹국이 이미 황천길 건너서 도움 요청할만한 세력이 없던것도 있다) 오히려 역학관계로 따지면 당나라는 고구려원정에 수십년간 국력을 소모해서 가르친링이 준동하는걸 두눈뜨고 지켜볼수밖에없었다. 신라도 먹으려다 털린것도 마찬가지. 기껏 차지한 만주땅도 무주공산으로 내버려두다가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로 부활하는것도 통제못했다.

ㄴ 그 당나라도 신라의 도움 덕에 그나마 고구려를 칠 수 있었다. 후방에 신라가 있었기 때문에.

참고로 수나라가 멸망한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 외에도 대운하던지 궁궐 증축이라던지 기타 요인도 있지만 수나라가 존나 쓸데없는 전쟁으로 국력 소모한 것도 컸다. 이전 문서의 설명과 다르게 수나라 직접적 멸망 원인은 당연히 군사 반란이다.

ㄴ고수전쟁에서 처참하게 패한 수나라의 황제가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치지말라고 했으니 당나라는 그 말을 안들었다

안시성 양만춘이 당태종 눈깔을 날려버리고 당태종이 그 부위에 세균감염으로 죽어서 중국 황제를 죽인 유일한 한민족 사람으로 등극했다.

단 당태종 애꾸설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거의 천년 뒤인 고려 말기의 목은 이색의 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실제 당태종 눈깔은 멀쩡했다. 눈깔에 화살 맞으면 암만 맷집 좋은 놈이라도 그 자리에서 뒤진다.

하후돈: ???

ㄴ눈알이라는게 뇌랑 직결된 신경이 존나 극도로 밀집되어 있는 장기라서 화살로 저격당하면 쇼크사한다. 외과용 칼로 조심스럽게 도려내는 것도 아니고 화살같은 무지막지한 운동력으로 뚫어버리면 신경다발이랑 뇌가 씹창나서 버틸 수가 없음 그래서 정사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하후돈이 눈 한쪽 잃은건 화살 정면으로 맞아서라기보다는 화살이나 잡다한 파편에 스쳤거나 풍토병 감염 때문일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다고 함.

그리고 당태종 눈깔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중국 고서에 보면 당태종이 이질로 죽었다,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 등 병으로 죽었다는걸로 미화했는데 이는 일개 변방국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걸 감추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반대로 우리나라측에서 미화했을 수도 있고.

이는 국뽕들이 주장하는 소리이며 사서를 보면 멀쩡하게 잘만 돌아다닌다 하후돈도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나 눈깔에 정타로 화살을 맞았지, 실제 정사에서는 화살에 스쳐서 눈알 터졌다. 하후돈도 진짜 맞았으면 뒤졌을 듯

사실 양만춘 자체가 좀 불분명한 인물이라 그새끼가 화살을 쏘았는가 자체도 썰에 불과하다.

ㄴ 이름이 불분명한거지 존재가 불분명하냐? 안시성전투는 당태종의 자신과의 싸움이냐? 눈깔화살은 야담이나 마찬가지니 일단 거르고

어느 정도로 불분명하냐면 이름이 양만춘이 맞는지조차 학자들이 확언을 못할 정도다. 게다가 안시성 전투 이전에는 뭘 했는지, 안시성 전투 이후에는 뭘 했는지도 전혀 기록이 없다. 설사 화살에 맞았어도 큰 상처는 아니었을꺼다. 당태종은 그 이후 죽기 직전까지도 다시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었다.

요동 지역의 첫번째 패권자로 군림하였으며, 멸망 이후 후계국 발해,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만주(청), 일본제국이 차례대로 바톤터치를 하게 된다.


쉴 틈도 없이 좆중국하고 존나 전쟁하는데 나중에 나오는 모 씹새끼들이 좆중국 후장 존나 빠는것 보다는 낫다.

명칭[편집]

사실 한국이 의외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점이 있는데 바로 한국의 영어 이름인 "Korea"다.

고구려·고려·구려·고리·구리 등으로 부르던 명칭을 장수왕(기존 설) 또는 광개토대왕(새로운 설)이 '고려'라고 바꾸어 고정시켰고

고구려 중심지였던 패서(浿西)지역 호족 출신인 왕건이 세운 고려는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기 때문에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지은 것이다. 이게 서역으로 전해져 '코리아'가 된 것.


5세기 초반에 국호를 고려로 바꿨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고려라 해야겠지만 현대에는 왕건이 세운 고려를 비롯한 기타 고려들(소고구려, 후고구려, 고려연방 등등)과 구분하기 위해 원래 이름인 고구려라고 계속 부른다.

돌궐, 비잔틴 등지에서 고구려를 부른 명칭이 전해지고 있다. '묵쿨리'라고 불렀다는데 '맥고려'를 뜻한다는 주장이 신빙성 있다.


누군가는 고구려의 '려'자가 사실 당시에는 '리'로 발음했다고 우긴다. 고려의 '려'자를 나라이름으로 할 때는 '리'라고 하는게 맞다는 주장.

즉 고구려, 고려는 각각 고구리, 고리로 해야 정상이라는데 교과서에서는 이 내용이 없다. 물론 교과서는 절대적 근거가 될 수 없다.

근데 지금의 고구려란 발음도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현대 한국식 발음이고 고구리, 고리가 맞다는 주장 또한 진짜 그 시대 발음이란 증거는 없다.

상징[편집]

이런 문양들은 고구려 '해뚫음무늬 금동장식'에 있는 삼족오 문양을 베이스로 한다. 반대로 벽화 그림을 베이스로 해서 금동장식을 조각한걸수도 있다.

상징은 발 3개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다. 고구려 고분 유적과 고구려 유물 등 고구려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여겨진 것이 관찰된다. 쌍영총, 각저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 고분 벽화에 삼족오가 그려져 있다.

동아시아 전설에서 나오는 상상의 동물인데 주로 태양을 상징하는 원(員) 안에 삼족오가 그려져 있다. 까마귀는 양(陽)을 의미하는 태양에서 살고 있으므로 발의 갯수도 양의 숫자인 3개로 설정한 것이라고 고고학자들은 설명한다.

'까마귀=태양'이라는 설정은 사람이 죽으면 까마귀가 그 영혼을 하늘나라로 데려간다는 신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조장 풍습과 비슷한가?


사실 엄밀히 따지면 고구려가 삼족오를 자국 대표 상징으로 여겼다는 기록이나 근거는 없다. 벽화 속 삼족오들도 그냥 태양을 그리면서 태양에서 사는 새니까 같이 그려놓았을 뿐인걸로 추정된다. 마치 달에다 달토끼 그려놓는 것 처럼.

하지만 고구려는 하늘의 황제인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유화부인과 주몽을 낳았고 그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하늘의 자손, 즉 천손사상을 갖고있던 나라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도 천제지자(天帝之子)라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하늘=태양=삼족오'라고 연결지어 해석하면 나름 고구려와 잘 어울린다. 금동장식 유물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만의 독창적인 삼족오 문양 디자인도 ㅆㅅㅌㅊ이기도 하고.

조상이 물려준 문화를 후손이 재해석해서 조상 찬양하는데 쓰겠다는데 광개토대왕도 저승에서 흐뭇해하지 않을까?


여담으로 중국과 일본의 삼족오와 달리 한국의 삼족오는 머리에 볏이 있다고 한다.


또 하나 특이한 상징 문양이 있는데 광개토대왕을 제사지낼 때 사용한 걸로 보이는 '호우총 청동그릇'을 보면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있다.

근데 이런 문양이 삼국시대 토기 유물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백제, 신라, 가야 유적에서도 나오지만 특히 고구려와 관련한 곳에서 자주 보인다.

아직도 이게 무엇을 상징하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광개토대왕과 '#'의 비밀(PDF)] [제왕의 문]

국력[편집]

군사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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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군사력은 고려시대 윤관 때 싸우던 완안부와 가장 비슷하다.

실제로 기병이 주류이고 약탈에 능하다는 점에서 백제, 신라와 다르고 완안부와 비슷하다.

특히 기병 중에서도 개마무사라고 카타프락토이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의 (중)기병은 오늘날의 전차 탱크이다.

그래서 백제, 신라가 고구려한테 침략받을 때 느꼈던 심리는 조선이 후금한테 침략받을 때 심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광개토대왕에게 반쯤 멸망당하고 영원한 내시가 되겠다고 빌빌기었고 인조는 알다시피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3번 찍었다.

살수대첩에서 수나라와 싸울 때도 강력한 기마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30만을 수장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 밑에서 딱갈하던 유목민족들 보면 답 나온다. 말갈, 거란, 실위(몽골) 등 유목 어벤저스 수준이다.

다만 유목 기병과는 달리 중기병과 경기병이 적절한 비중으로 있었으며 유효한 수준의 보병 부대(사실 한반도쪽은 산악지형이라 당연하지만)를 함께 보유하였다.

수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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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지역을 떠나 이곳으로 왔겠지만 어차피 안 될 놈은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평양평야

수도는 초기엔 졸본이었는데 주몽이 건국 핵심세력인 졸본의 덕망을 얻기위한 임시수도였으며 이후 국내성으로 욺겼으나 기후가 척박하고 농사짓기에 알맞지않아 오늘날의 한반도의 평안도 지역 평양으로 수도를 욺겼다.

사실 평양 천도를 주도한 사람이 장수왕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마무리를 한 것이고

평양 천도를 계획하고 시작한 사람은 광개토태왕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일찍이 평양 지역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평양을 크게 중시하였다.

393년에는 9개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409년에는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으며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또한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고구려가 유목과 농경을 겸한 것도 바로 평양 천도 이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 주변의 평양평야는 약 1,000km2 한반도 네번째 규모로 대동강이 사이에 흘러 농사짓기에도 알맞은 곳이었다.

장수왕 시기 지어진 안학궁은 성벽 둘레가 2,488m에 면적이 380,000m2에 이르러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웅장하다. 마치 당나라 수도 장안의 대명궁같다.

조선 왕조등이 중국왕조에 대한 모화사상과 눈치사대주의로 왕궁의 크기가 겸소해진 것과 달리 고구려의 정전인 안학궁 중궁은 조공국을 거느린 강국 답게 그 크기가 매우 웅장하다. 경복궁 근정전과 안학궁 중궁을 비교해봐도 중궁이 근정전보다 더 넓고 웅장하다.

근대 이전의 왕국들의 왕궁은 왕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규모에 따라서 그 나라의 국력이나 자주성이 가장 잘 드러난다. 보통 자주성이 강하거나 국력이 강할수록 왕궁의 처마길이가 길고 규모가 크며 반대로 자주성이 약한 국가들의 왕궁은 처마가 좁고 규모가 작다

안학궁은 현재 북한 수도 평양에 고대로 터가 남아있다. 위치는 대한민국 기준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학사리이며

김정일 위원장 집권시절에 장성택을 시켜서 고구려 건축에 대한 연구도 다 안된 상태에서 테마공원으로 예토전생을 시켰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후에 철거했다. 그래서 원래 터만 남아있던거에 옆에 또다른 황량한 터만 남아서 더 황량해졌다.

평양성의 성문이었던 보통문 칠성문 대동문등은 북한의 국보로서 원본이 보존되어 있다.

속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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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신 새끼들은 지능은 있는데 행동이 원시인 이하라서 인간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쌍병신들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새끼들을 본다면 운지천을 먹이고 자연속으로 보내줍시다.
왈왈~ 크아앙~ 어흥~ 으르릉... 컹! 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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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속국은 대부분 광개토태왕~장수왕 시기를 거쳐서 생겼다. 한반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다른나라에게 책봉을 행하고 조공을 받던 지역 종주국이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국왕은 광개토태왕때부터 태왕(太王)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광개토태왕릉비,중원고구려비) 세종의 경우는 일개 평범한 왕(王)이었지만 한글 창제등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세들이 대왕이라고 부르는 경우라 고구려와 큰 차이점이 있다.

ㄴ 세종은 조선시대 당대부터 세종대왕이라 불렀는데? 조선왕조실록부터 뒤져보고 와라.

또한 독자연호인 영락(永樂)을 사용하였다. 광개토태왕 임기 1년은 영락 1년이다. 좆본의 헤이세이 1년 명나라 만력 1년 같은거다. 조선은 참고로 명나라 연호썼다.

유목민족들은 대부분 고구려인 휘하에 전쟁에 동원되었고 일부 중,소형국가(북연,신라)등은 속국으로서 왕위를 계승할때도 고구려 의견을 물어야하는등 상당한 내정간섭을 받았다.

학계에서 인정받은 관점에서의 고구려의 조공국 혹은 속국들.

1.북연(北燕, 407년 ~ 436년)

[[4]]

선비족이 세운 중국 왕조 전연의 후신이던 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희가 폭군으로서 민심을 잃자 한족인 풍발이 당시 후연에 귀화했던 고구려인 출신 모용운(고운)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이름만 바꾼 중국 왕조이다. 모용운은 제1대 혜의황제에 오른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과 친화정책을 하면서 점차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

모용운의 측근인 이반,도인이 권력에 눈이멀어 모용운을 암살하자 한족인 풍발은 이를 진압하고 본인 스스로 문성황제자리에 올랐다. 풍발의 즉위후 고구려의 상당한 내정간섭이 있었으며 조공은 물론 황제가 바뀌면 제일 먼저 고구려에 보고해야만 했다.

풍발이 죽자 풍홍은 소성황제로 3대 황제가 되었는데 당시 북위가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연은 고구려가 북위를 압박하는 전략적 속국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내정간섭은 더 심해저서 풍홍은 435년에 사실상 종주국(宗主國)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연이 망하면 고구려로 망명하겠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망명하였다.

2.말갈

연해주와 북만주 유역에 살다가 고구려가 세워지고 고구려 밑으로 편입되었다. 고구려가 전쟁을 일으킬 때 이이제이로 쓰던 졸병들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백신말갈의 부족장 걸사비우와 속말말갈의 부족장 대중상(걸걸중상)과 대조영등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일본으로 조공보낼 때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으로 사신을 보냈다.

이들 중 흑수말갈은 발해 멸망후 팽창하여 여진족으로 금나라를 세우고 나중에는 급기야 청나라를 세우며 중국을 정복한다.

3.실위

한국사와의 연관성으로는 고구려 북쪽에 접경하여 철을 고구려에 의지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황두실위의 경우에는 고구려가 도독을 두어 통제하였다.즉 고구려에게 경제적,정치적으로 복속된 속국이었다. (李玟洙, 「高句麗 遺民 李他仁의 族源과 柵城 褥薩 授與 배경에 대한 고찰」『大丘史學』,2017)

후에 실위의 일파인 몽올실위가 카마그 몽골로 이어지고 징키스칸이 태어나 전 세계를 정복한다.

4.거란

고구려의 제2중심지였던 요동지역에 살던 부족들로 이들의 부속 부족인 비려족은 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에 의해 정복당하고 조공이나 바치는 속국이 되었다. 말갈족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대외전쟁에 자주 동원되었다.

후에 거란은 야율아보기를 중심으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건국하며 중원 패권국이 된다.

5.신라

신라왕이 백제와 가야+왜의 연합공격을 받자 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구원을 요청하였다. 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가야,왜를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며 고구려는 향후 20년간 신라를 내정간섭하는 속국으로 만들어버린다. 심지어 신라의 제18대 실성 마립간은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있었으며 고구려의 상당한 입김이 들어가 즉위한 왕이다.

신라는 이 시기 왕이 직접 고구려에 와서 조공을 바치는 등 굴욕적인 외교를 보였다.

6.백제

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이 신라 구원을 명분으로 침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이때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병자호란이 데쟈뷰되는 항복을 받았다.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았다. 장수왕때도 또 다시 백제를 침략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수도인 위례성을 함락시켰다. 한마디로 부자가 백제 왕을 하나씩 죽이고 백제의 중심지를 다 없애버렸다.

이때 백제 국민들이 고구려의 침략이 무서워 일본으로 많이 이민갔다. 이를 유즈키노키미(弓月君, ゆづきのきみ)라고 한다.

7.동부여

킹갓제네럴광개토태왕이 동부여를 완전 멸망시키기 전까지 고구려의 속국으로 잔존하였다.

중국 왕조와 전쟁[편집]

한반도 역사상 중국 왕조와 일대일 맞짱이 가능했던 나라였다. 총 4번의 맞짱이 있었으며 4개 나라 모두 중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거나 강력한 나라로 분류된다.

1.신나라-고구려 전쟁

왕망이란 자가 나타나 한나라를 무너트리고 신나라라는 사이비국가를 세웠다. 이때 고구려는 아직 초기라 힘이 약하여 왕망이 오랑캐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라고하자 고분고분 군사를 보냈다 그러나 오히려 징발된 고구려군인들이 왕망의 통수를 쳐서 현도군을 습격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왕망은 이를 명분삼아 고구려를 쳤다. 결국 왕망은 고구려군에게 승리하여 승리에 심취한 나머지 고구려왕을 깎아 하구려후라고 비하하였다.

2차전쟁때는 태조 주몽 동명성왕의 개국공신 오이,마리가 2만의 군사로 신나라의 현도군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몰아내었다


2.위나라-고구려 전쟁(曹魏与高句丽的战争)

고구려 동천왕때 일로 우리가 아는 조조 맹덕의 위나라와 요동반도를 놓고 전쟁을 붙었다.

공손찬의 후손 공손연이 죽자 요동반도가 비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위나라사마의를 요동정벌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선비족을 동원하였다.

十六年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16년(242) 왕께서 장수를 보내시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16년(242)

강심장 고구려답게 먼저 선빵을 때려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이에 조조는 유주 자사였던 관구검을 고구려에 보냈다.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 정시 중 관구검이 고구려(高句驪)가 수차례 침범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지휘해 현도(玄菟)를 나가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정사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당시 고구려 왕 동천왕은 전쟁 초기 관구검에게 대승을 거두며 승리에 도취해 방심하다 전사자 1만 8천명을 내고 대패해버렸다. 관구검은 쭉쭉밀고 들어가 환도성까지 털어버리는 등 의기양양하였다.

246년에 고구려는 겨우 전열을 재정비하여 위나라 추격부대를 털어버리고 마침내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 전쟁이 일어난지 불과 3년후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위나라를 먹어버렸다.


3.수나라-고구려 전쟁(隋与高句丽的战争)

한국사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쟁이면서 전근대 동아시아사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쟁이다.

위의 신나라,위나라 전쟁은 고구려가 지고 이기고 엎치락 뒤치락이었으나 이 전쟁은 말그대로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였다. 수문제는 분열되었던 중국을 수습하고 통일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문제 당시 수나라는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백성들의 삶 만족도 또한 매우 높았다.

고구려의 평원왕은 와 다르게 수나라가 건국되자마자 첩보할동을하여 동태를 살피고 예의주시하였다. 또한 간첩들을 보내서 수나라의 무기기술을 훔쳐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전쟁준비를 철저히 하던 평원왕은 죽고 영양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수문제는 영양왕이 줄곧 자신들에 대한 조공과 책봉을 거부하는 듯한 늬앙스를 보이자 수륙군 30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정작 선빵을 때린 것은 역시나 고구려였다. 영양왕은 속국인 거란과 말갈의 군사들을 모아 수나라의 요서지역 조양을 공격하였다.

이에 화난 수문제가 마침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1차 고구려-수 전쟁이었다. 그러나 장마와 태풍등 요동 지역의 척박한 자연지리로 수나라의 군대는 전쟁을 하기도 전에 궤멸위기에 빠져 다행히 전면전 없이 전쟁은 종료되었다.

또한 영양왕은 30만대군이 직접 정벌을 오자 갑자기 쫄았는지 수양제에게 수나라의 요동지역 신하임을 인정한다며 수문제 똥꼬를 빨았다. 수문제는 이에 전쟁 의욕을 잃어버리고 군사를 물렀다.

수문제가 죽자 아들 수양제가 수나라의 황제로 즉위했다. 수양제는 만리장성을 영장하고 운하를 만들고 토욕혼,돌궐,베트남등 변방 국경지대의 세력을 정벌하고 속국으로 삼아 안정시켰다. 이렇게 수나라가 당대 초강대국으로서 위세를 떨치자 고구려 영양왕은 바짝 쫄았다고 한다.

수양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에 탁군(요서)로 가겠다고 통첩을 날렸는데 이는 조만간 고구려를 조지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총 병력은) 113만 3800명이고, 200만이라 (과장해) 불렀으며, 식량 운반자는 그 배였다.

-《수서》 권4, 제기, 제4, 양제하편

마침내 양제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초대군을 고구려 옆 요서 탁군에 총집합시켰다.

수 양제는 총 24군으로 나뉘어 진격하게 했으며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평양이었다.

좌 12군: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
우 12군: 점선(黏蟬)수군, 함자(含資)수군, 혼미(渾彌)수군, 임둔(臨屯)수군,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

이렇게 많은 군사를 데리고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결국 고구려 어느 사기캐의 30만명을 즉석으로 강물에 수장시키는 대활약과 고구려의 막강한 공성 방어능력과 야전투력으로 수나라는 국가의 근본이 흔들릴만한 손실을 입고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후에 수나라는 얼마안가 고구려전쟁의 휴유증과 내분으로 멸망해버렸다.


4.당나라-고구려 전쟁(唐与高句丽的战争)

영양왕이 죽은 뒤 고구려는 찐따끼가 있는 영류왕이 들어섰다. 영류왕은 영양왕때까지 거의 하지않던 중국왕조에 대한 조공과 사대등을 다시 부활시켜 어떤 나라마냥 전쟁을 피하고 비굴하게 평화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이에 이를 못마땅하던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평화파를 모두 적폐로 몰고 숙청시켜버렸다. 그 결과 연개소문은 수나라에 이어 들어선 당나라에 대한 조공 사대를 모두 철폐해버리고 조까를 시전한다.

당시 정관의 치라고 불릴정도로 수문제 이후 아시아 역사상 초강대국을 완성한 당태종 이세민은 이러한 연개소문의 도발에 빡처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였으나 개국공신이자 대승상인 장손무기가 만류하면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한편 연개소문은 여전히 조까라는 늬앙스로 백제와 손잡고 당나라에 조공 책봉하던 속국 신라를 연합공격한다.

이에 신라는 사대국인 당나라에 김춘추를 보내 당태종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고구려 정벌을 애원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앞서 위징은 고구려 기세가 만만치않고 깔볼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였다.

고구려는 다시 연개소문의 지휘로 당나라의 선빵을 처서 영주를 공격하는등 도발을 일삼았다. 당태종은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장손무기등 그야말로 중화 어벤저스를 구성하여 고구려 정벌에 친히 나서게 되었다.

알다시피 초반 당나라는 수나라가 뚫지못했던 요동의 핵심 요동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등등하였으나 또 다른 사기캐가 안시성에 나타나 7인용 입구막기마냥 우주방어로 당태종의 군대를 막아냈다.

이후 당태종은 요동지역의 척박한 기후등으로 몸에 이상이 생겨 군대를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태종은 얼마못가 고구려와의 전쟁중 생긴 질병으로 죽게되는데 다시는 요하를 건너지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 당고조 이치는 아버지 인조 복수한다고 북벌하겠다는 효종마냥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게 되었다. 첫 전쟁과 달리 연개소문이 죽고 연개소문 자식들이 트롤짓을 하면서 당나라가 별 힘안쓰고 고구려를 결국 멸망시키게 되었다.

세계인이 보는 고구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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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요하를 넘지 말라

- <자치통감> 당태종 이세민의 유언


"고려는 만리의 나라이다. 일찍이 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이다."

- <고려사절요 원종순효대왕 편> 쿠빌라이 칸

(당태종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 것은) 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왕안석 송신종과의 대화중 

경극 살사문(殺四門) : 1970년대 중국에서 공연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의 이름.

칼을 5자루 찬 연개소문당태종 이세민을 죽이려 쫒자 설인귀가 나와 당태종 이세민을 구하는 내용.


강소성 염성시 건호현 소재 몽롱탑(朦朧塔)은 16.7미터 높이에 8각형 누각형식으로 된 3층탑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세민이 군대를 거느리고 염성 일대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달빛이 몽롱한 어느 늦은 밤 이세민이 단기필마로 적진을 정탐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조심하지 않아 늪에 이르게 됐다.

마침 순찰 중이던 적군에게 발각돼 연개소문이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쫓아오니 이세민은 황급히 말을 재촉하여 달아나다가 말이 길을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말에서 뛰어 내린 이세민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다가 문득 마른 우물을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추격하던 연개소문이 우물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은 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안에는 거미줄이 가지런하게 걸려있어 사람이 그 안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 연개소문은 말을 돌려 자기 군영으로 돌아갔다.

훗날 이세민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거미줄의 은공을 잊지 못해 우물이 있는 자리에 탑을 세웠다. 어둡고 어려움(蒙)에 처했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자신을 보호해줘 목숨을 건진데서 ‘몽롱(朦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으며 이 탑을 ‘몽롱보탑(朦朧寶塔)’이라 불렀다. 아울러 ‘정혜사’라는 큰 절도 세웠다. 현재 탑의 동북방에 세니하(洗泥河)가 있는데 당 태종이 말과 함께 늪에 빠졌다가 위험에서 벗어난 후 말을 씻었던 곳이라고 한다.[2][3]

당 태종은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용맹한 장수와 병사들이 견고한 성을 넘지 못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연개소문이 영웅이었는데도 이미 망해버린 나라인양 간주함이 지나쳤던 것이다. 고종 때는 개소문이 죽었으니 이적 한 사람만으로도 취하기에 충분했다. 이적의 재주가 어찌 태종을 능가했겠는가? 상대방의 때가 달랐던 것이다

- 소동파의 4학사 제자 장뢰

전해지는 말에 대당에는 위징이 있고, 고려에는 개금(蓋金), 백제에는 선중(善仲), 신라에는 짐순(鴆淳)이 있다.-이들은 각자 일방을 맡아 이름을 만리에 떨쳤으니 이들은 모두 당세의 준걸로 지략이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 등씨가전(藤氏家伝 )에서 덴지 덴노

지난날 선제께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고구려에 빈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당나라 시어사 668년 2월> 가언충


2월17일 정오에 왕씨 성과 송씨 성의 아찰어사 두 대인이 나를 예빈관에서 대접하고는 묻기를, "당신들 나라는 무슨 장기가 있어서 능히 수나라,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으므로, 병졸 된 사람들은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고 장상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고구려는 한 작은 나라로서도 오히려 천하의 백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쳤습니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은 많고 땅은 크며,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성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 로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 <표해록> 명나라 최부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 선조실록 39권, 선조 26(1593)년 명나라 사신 유원외


귀국의 강한 군대는 본디부터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隋)ㆍ(唐) 때는 어째서 그리 굉장했으며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난에는 어째서 그리 심히 겁을 내었습니까?

- <금계일기> 5월 20일자 기록


"중원(中原) 본토인(本土人) 여응주(呂應周)란 자가 글로 써서 보이기를 ‘가정(嘉靖) 연간에 왜적이 소주·항주를 함락했었으나 그뒤에 방비를 잘했기 때문에 지금은 걱 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소매를 잡고 ‘이런 넓은 소매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 갓을 가리키면서 ‘이런 싸맨 머리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시를 지어 보이기를,

<시부는 진나라의 유풍이요, 병서에 대해 온 나라가 모른다. 높다란 관이 무인의 고깔이요, 넓은 소매 옷의 군복일세. 무딘 창은 섶나무와 같이 썩고, 성을 쌓은 높이는 어깨와 가지런하네. 왜구가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자, 팔도가 조각 구름처럼 흩어졌네.> 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김명원(金命元)과 같이 앉아 있을 때 신들의 갓과 소매를 가리키고 웃으면서 ‘이렇게 하고서 왜적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35권, 선조 26(1593)년 2월 20일 乙巳 2번째기사


수나라당나라 때에는 일찍이 강국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어찌 이토록 나약한가. 당신들은 마땅히 돌아가 당신 나라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고 自强에 힘써 나라를 보존하도록 하라

-遼東巡撫 李化龍의 발언

출처 : [5]

후대의평가[편집]

고려[편집]

신성 고구려 제국

고려 왕건은 나라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개경에 이어서 평양을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만드는 등 고구려 계승의지를 강력히 밝혔다.

또한 건국내내 왕건의 의지를 후대의 왕들이 잘 받아 끈임없이 북벌과 요동 정벌을 하려했으며 공민왕 때는 잠시 요동을 점거하기도 하였다.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을 만들어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한국사를 정립하였고 그 덕분에 오늘날 삼국역사를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묘청이란 땡중은 고구려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고구려를 부활시키겠다고 평양으로 수도를 욺기려 하였다가 김부식한테 처단당했다.

조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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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는 이와는 전~~~~~~혀 다른 내용임이 틀림없으니 믿지 마시길 바랍니다.

조선은 사실 고구려가 자기들 역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배척했다.

ㄴ 개소리임 당시 조선 사람들도 고구려부심 있었고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제일 쎘다는거도 알고 있었다

조선 건국 초기만 해도 조선은 고구려를 자국 역사로 인식했다. 이는 조준이 명나라 사신에게 살수대첩의 일화를 이야기해 농락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갈수록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이 심해지고 중국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조선 스스로가 고구려를 역사에서 제외하기 시작하였다.

ㄴ 개소리라니까 병신임?

사실 주병이 보병인 조선과 다르게 고구려는 기마병이 주류였기 때문에 조선이 보는 고구려는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냥 조선 눈에는 고구려나 여진이나 비슷한 존재였던 것이다. 발해를 포함해 모든 북방 한반도사를 북적의 역사로 취급했다. 한편으론 중화왕조의 문명을 가장 잘 배꼈다는 자부심이 높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항했던 고구려를 좋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광개토대왕릉비를 여진족 비석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ㄴ 시진핑 책상 밑에서 검거

이러한 영향으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쪽 서북인들을 500년내내 차별하였다. 서북인-기호인 관계 기호인에 해당하는 조선왕조가 서북인을 평가한 기질은 이렇다. '이들은 용맹하고 굳세나 거칠어서 남쪽과 정서가 다르다'라는 식이다. 여기에 빡쳐서 일어난게 홍경래의 난이다.

이런 조선이 고구려를 자기들 역사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에서 두들겨맞고 유득공같은 실학자들이 나오면서다. 당시 조선은 민중의 낮아진 애국심을 다시 회생시킬 필요가 있었다.

유득공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뒤늦게 조선역사로 재합류시키며 조선이 지금은 청나라 빵셔틀이어도 예전엔 고구려처럼 쌘캐였다는 식의 정신승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엔 임경업전과 같이 청나라에 개발린 패배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정신승리식 프로파간다가 조선에서 유행하던 중이었다.

ㄴ 개쌉소리만 써놨네 고려 때 부터 떠받들어온 고조선을 애초에 더 강조해서 떠받든게 조선인데 뭐? 뒤늦게 합류시켜? 조선이라는 국호만 봐도 알텐데 빡대가린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조선이 중국문화에 미쳐서 훼손시켰던 한국사를 다시 오늘날의 고조선→부여, 마한, 변한, 진한→고구려, 백제, 신라→신라, 발해→고려→조선 순서로 복구하였다. 신채호는 동명성왕,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연개소문, 왕건, 묘청 등의 인물들을 재조명하여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로 다루었다.

ㄴ 이건 뭔 뇌피셜이냐. 동국통감, 삼국사절요는 어디다 팔아먹음? 발해는 몰라도 고구려는 조선시대에도 한국사로 봤는데?


위 글쓴새끼는 좆짱깨새낀가 보다.

개쳐맞고 있으니 지우지 말고 조롱하자

남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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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오 유겐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에 들어서면서 평양을 수도로하는 북한과 반대되어 수도인 서울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좋든싫든 역사적으로 조선 왕조와 신라 왕조를 많이 강조하였고 이와 관련된 미디어 매체가 많이 나왔다. 덕분에 고구려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임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한동안 그렇게 조명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이들 국가들의 외교가 솔직히 너무 굴욕적이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 진정한 역사 취급을 받지 못하였고 자주국방 자주독립 좋아하는 노란그분 정부들어 때마침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서 고구려 역사를 국민들에게 재조명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왕조와 일대일로 맞짱뜨고, 맨날 조공바치고 책봉받던 나라의 역사만 배우다가 남에게 조공,책봉시키는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니 국민들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열망, 카타르시스가 매우 높아졌다.

덕분에 한반도판 넷우익 극우단체라고 할수있는 환빠들이 엄청나게 생겨나는 부작용도 일어났다. 물론 국민들에게 도전적이고 강인한 정신을 고취시키는 선영향도 있었다. 실제로 정치판에서도 이게 일부 영향을 끼쳐 미국 안보에 무조건 기대자는 의식이 강했던 예전과 달리 자주국방 자주독립등을 외치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특히 노란그분정부들어 고구려 관련 드라마와 미디어물이 쏟아져나왔다. <MBC>주몽,<KBS>대조영,<SBS>연개소문 3개 모두 그분 정부 시절 나온 작품들이다.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홍보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창립 역시 그분의 임기시절이던 2006년 9월에 이뤄졌다.

삼국 중에서 가장 강력했고,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는 점 때문에 삼국 중에서 고구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아보인다. 다만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과대포장하거나 심지어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무리 고구려가 좋다고 하더라도 왜곡은 나쁜 짓이다.

그리고 짱깨들의 동북공정 때문에 더더욱 이런 현상이 강해지기도 했다.

딱봐도 살기 좆같은 곳만 입지선정한 반 유목민족 국가인데 왜이렇게 빨아대는지 모르겠다. 만주벌판 하면 듣기는 좋지만 ㅅㅂ 존나 동토잖아.

ㄴ 그래서 장수왕이 한강일대 눈여겨보고 남진하였다.

ㄴ 고고학 연구로 보면 부여는 말기에 반 유목민족 나라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고구려는 반 유목민족 국가는 아니었음.

ㄴ 반 유목민족 맞는데 병신아 근대까지 만주에 농경국가가 들어선 적이 한번도 없다.

ㄴ 병신은 너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같은 기록을 봐라. 부여도 초기에 엄연히 농경 국가였다. 물론 요즘에는 말기에 반 유목화되었을 거라는 설이 있지만. 고구려는 엄연히 농경 국가였고 경제의 대부분을 농업이 차지했다. 반 유목은 반 정도가 유목화되어야 하는데 고구려 휘하에 유목 집단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ㄴ 유목이 메인인 나라에서 진대법이 나왔을리가 ㅋㅋ

ㄴ 고구려는 농경국가 맞다. 농경국가 베이스에 유목민족 문화가 곁다리로 들어있는 느낌이라 보면됨

아마 지금 헬조선의 땅이 좆같이 좁아서 그런지도.

겨울에는 -20도 찍고, 여름은 또 대륙이라서 덥고 더워도 봄가을이 금방 추워져서 농사가 제대로 되는 것도 아닌 땅을 넓이만 보고 뽕에 취한다. 더구나 당시 농사기술로는 ㄹㅇ 헬. 모내기도 없고 소마저도 제대로 못 쓰고 쌀농사도 힘들어서 조, 보리가 주식이었으며 감자, 옥수수는 없었다. 그러니 말 타고 전쟁이나 했지.

ㄴ 그런데 당대에는 기후가 더 따뜻했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물론 남부에 비해 생산성이 더 떨어진다는 것은 인정이지만. 그리고 고구려 영역을 보면 일단 산이 많아서 방어하기 좋고 산이 많아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평야 자체도 나름 꽤 많았고. 게다가 서쪽으로는 요하가 천연 방패 역할을 해주기도 했고.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기 때문에 고구려가 엄청나게 넓은 대제국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까진 아니었다. 그냥 보통 흔한 제국정도였다. ㄴ 이마저도 어디냐

세계지도 펴놓고 고구려 땅 측정해보면 느낌상 고구려 라는 글씨가 영토내에 완전히 들어가는 수준 그정도였다.

요즘은 잘 안 그러지만,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드립 치며 전쟁 좋아하던 고구려를 민족 역사에서 제외시키던 시절도 있었다.

ㄴ 물론 그렇다고 철통방어도 못했다.

경기도 구리시서울특별시 광진구가 서로 고구려의 도시라며 싸웠다. 두 지역의 공통점은 아차산을 끼고 있다는 것인데 이 아차산에 고구려의 보루 유적들이 있고 고구려의 장수 온달 싸웠다는 아차산성이 있다. 구리시는 토평동에 광개토 대왕비를 축소 제작, 광개토 대왕상을 제작하는 등 "고구려의 기상, 구리시"를 밀다가 현재는 "태극기의 도시"로 거듭났다.

북한[편집]

경고! 뤼 문서뤠서 설명하른 대상른 북괴롬덜과 밀접한 관계가 맀습레다!

"귀국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해주면) 고구려와 같은 나라가 될 수 있다"[4]

 
—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실제로 한 말


"나의 목표는 단순히 '조국통일'이 아니다.

나의 목표는 '조국통일'을 뛰어 넘어 '대 고구려'를 찾는 것이다."[5]

 

ㄴ 정으니 이새끼 하다하다 제국주의자 커밍아웃까지 하노? 그러니 북괴같은 공산제국주의 침략분자들은 우리 주적일 수밖에 없지 ㅇㅇ

고구려의 중심지가 광개토태왕때부터 지금의 북한 평안도 평양 일대로 욺겨졌고 당연히 황궁인 평양성과 안학궁 동명왕릉등도 평양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한에서 고구려에 대한 위상과 이미지는 한국사람들과 같이 단순히 좋아하는 역사중 하나인 것이 아니라 아예 자신들의 직계 조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평양성의 성문인 대동문 보통문등 대부분의 성문들이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있으며 2004년 7월 북한은 동명성왕의 릉인 동명왕릉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특히 북한 국민들은 고구려 역사를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며 자신들의 조상으로서 여기고 있다.

한편으론 미국에 맞서 굴하지않는 자신들의 국가를 고구려에 투영하여 보기도 한다. 특히 북한 국민들이 뽑은 가장 존경받는 역사인물은 연개소문,동명성왕,을지문덕,광개토대왕등이며 이외에 장수왕,안시성주등도 있다.

특히 연개소문의 위상이 대단한데 이는 북한정권의 특성이 연개소문의 행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에서 조선은 "리조"라고 사실상 한반도를 불법점령한 괴뢰정부마냥 가르친다. 신라와 함께 비굴하고 힘없는 찐따국가의 대표격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한이 정통으로 보는 역사관은

고조선(수도:평양) →고구려(수도:평양) →고려(수도:개성) →북한(수도:평양)이다.

그래서 북한의 항공사이름은 고려항공이고 북한의 전통의학은 고려의학,통신사이름은 고려링크 약학대학이름은 고려약학대학이다.

이밖에 평양의 럭셔리호텔 고려호텔등 김일성대학과 함께 북한의 3대대학으로 뽑히는 개성에 위치한 고려성균관이라는 곳도 있다.

북한 기관마다 "고려"란 이름이 붙는 이름들이 많다. 국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북한측에선 조선이 고조선에서 따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김정은 역시 고구려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즐겨 사용하는 말중에 우리나라 패가망신에 해당되는 고구려망신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한다. 고구려 후손으로서 고구려를 망신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렇게 각종 똥꼬쑈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북한 자체가 남한보다 건국 정통성이 존나게 떨어지기 때문에 옛 고구려와 현 북한의 지역이 겹친다는 점만 빼면 단지 주체사상같은 어설픈 정신승리 정도밖에 못 된다.

왜 정통성이 떨어지냐면 남한은 고려출신 이성계가 고조선을 이어받아 건국한 조선에서 왕이었던 고종이 다시 직접 고구려, 백제, 신라 삼한(三韓)을 이어받아 한국(대한제국)을 건국한걸 그대로 물려받은 나라다.

거기다 국기인 태극기만 해도 최소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한민족 고유의 전통문양을 대한제국 때부터 국기로 만들어 써온걸 계승하는 근-본 국기인데다 (심지어 북한 지들도 초반까지 태극기 썻다) 국화인 무궁화도 무려 춘추전국시대 기록에서 고조선과 관련하여 등장할 정도로 역사와 근본 그 자체다. (이 역시 북한 초반까지 무궁화 썻다) 이거 말고도 근거가 더 있지만 일일히 쓰기엔 많아서 생략함

그런 반면에 북한은? 다들 알다시피 정통성이란 좆도 없고 자국민 약탈하며 방구석 여포짓이나 해대니 괜히 한반도 북부를 불법으로 '무단 점거'했다고 표현하는게 아니다.

고구려가 700년이나 존속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군사력만 키워서 될 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기술, 외교 골고루 발전했으니 가능했던거다. 그런데 북한은 그나마 있는 군사력 빼면 진짜 좆도 없다. 6.25 직후 지들보다 못살던 남한 발전할동안 뭐했냐? 한류 드라마 봤다고 처형시키는 병신새끼들은 고구려 들먹일 자격 없다.

만약 저승에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남고구려 북고구려로 나뉘어 싸우고있는 후손들을 본다면 어느 쪽을 더 기특하게 여기겠음? 북한이 불법 점령한 북부영토 때문에 한반도 국가의 성장 가능성은 반토막났고 동북공정도 사실상 남한 혼자 캐리하고 있으니 북한은 존재 자체가 고구려망신이다.


북한이 복원한 고구려의 정릉사이다. 국보 제184호다. 철저한 고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고구려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기와나 처마 등 한옥 구조가 조선 건축양식과는 많이 다르다.

한민족과의 관계[편집]

역사적 입증[편집]

틀: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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췐궈 쭈이따더 메이뉘 루오리아오 지에다이쫑씬 썅씨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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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역사왜곡의 제왕인 일본극우 새끼들, 중국나관중, 빨갱이 새끼들, 벨기에높으신 분들같이 까야 할 놈의 빠돌이가 왜곡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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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들이나 위에서 서술한 중국 학자의 발표, 세계 사학계에서 고구려를 한국사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고구려는 한국사에 포함된다. 다만 발해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도 애매해서 중국에서도 고구려는 한국사로 인정해도 발해는 인정못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측에선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는 근거로 속지주의를 많이 내세우고 있다. 이른바 그 역사적 나라가 현대 자기땅에 존재하기만 했었으면 자기역사라는 논리다. 중국위키를 찾아가보면 애매모호하게 한국사라고 규정짓지않고 중국사 반 한국사 반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1. 고구려가 태생된 부여의 영토가 현재 중국 영토에 있으므로 고구려는 중국사이다.

2. 고구려의 영토 일부가 중국에 있었으니 고구려는 중국사이다.

3. 고구려가 한국사라고 하더라도 북한 역사지 남한 역사가 아니다.

4. 고구려는 금나라와 청나라의 만주족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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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를 읽을 때는 안심하셔도 되니 편안한 자세로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간단하게 논파시킬 수 있다.

1. 평양 천도후 장수왕은 국명을 고려로 바꾸었다. 이를 계승하여 왕건이 고려를 국명으로 정하고 현대의 코리아(KOREA)로 전해졌다.

2. 광개토대왕 때부터 중심지를 평양으로 욺겼으므로 광개토대왕 이전의 역사는 중국사라고 우길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이후의 역사는 완벽한 한국사이다.

3. 남북한은 분단국가인 것이지 다른민족인 것이 아님. 강원도 및 경기도 구리에 아차산성등 고구려 유적이 있어 고구려가 남한에 영향이 없는 것도 아님.

4. 금나라와 청나라의 조상인 말갈족들은 고구려에게 지배를 받았지 고구려를 세운 것이 아니다. 예네들 논리대로라면 일본제국은 한국 역사가 된다.

또한 2번 논리를 더 보충하면 중국 측 논리에 모순이 있다. 중국이 자기들 역사라고 주장하는 당나라,수나라의 경우 지도층이 위로가면 결국 선비족이다. 선비족은 오늘날 내몽골 및 몽골영토에서 시작되어 중원으로 남하해 하북일대를 중심지로 삼고 스스로 한족을 자청해 동화되었다.

그 후손들이 중국 최고의 한족 전성기라고 하는 당나라,수나라를 세웠는데 중국 논리면 이들 조상인 선비족이 몽골땅에서 시작됬으므로 중국사가 아니라 당나라 수나라는 몽골사가 된다. 한마디로 개소리다.

진지빨고 위위에 3번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새끼들은 한국인 행세하는 짱개거나 검머외(혹은 방구석 국경선도 못 넘는 명예황국신민헬무새)새끼들이니 보일때마다 잘근잘근 씹어주자

한국측 반박 2번 보충은 밑에 문서를 보자

유전적 입증[편집]

대한민국의 승리!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펄럭-

부여족 인골과 가장 가까운 집단은 한국인 by 번동아제

북표 라마동 부여족 인골과 가장 가까운 집단은 한국인

[6]

兵者國之大事, 不可不察也


■ 요서 라마동 거주민이 부여족이라는 폭탄 발언 지난 2010년 4월30일 길림대의 주홍 교수가 경남 김해에서 열린 제16회 가야사 세미나에서 이상한 발언을 했다.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의 족속문제에 대한 생물고고학적인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이 부여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삼연은 전연(前燕 337~370)과 후연 (後燕 384~409), 북연 (北燕 409~438)을 지칭한다. 삼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비족이 주체가 되어서 생긴 국가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 고고학자들이 간헐적으로 라마동 삼연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부여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계속 언급해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는데, 중국 형질인류학의 대가인 주홍 교수가 직접 우리나라에 와서 아예 라마동 삼연 문화 주민이 부여족이라고 폭탄성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주홍은 삼연이 부여족이라거나, 선비족=부여족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선비족계 전연이 여러차례 부여를 공격해 대량으로 포로를 잡아왔고, 이들 부여 포로들이 선비족 정권 내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고분을 조성한 지역이 라마동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지배층 중 일부가 당나라에서 고위 장수를 지냈듯이 선비족에게 포로로 잡혀간 부여족들도 모두 노예처럼 거주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밀집 고분을 조성할 정도로 삼연(특히 전연) 지배층 외곽에 자리잡은 집단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삼연에 부여계 관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연 산기시랑 여울 등의 사례가 이미 문헌에서도 확인된 사례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주홍 교수의 발언을 "폭탄성 발언"이라고 표현했을까. 사실 라마동 유적 자체가 선비족이 주체가 된 유적이 아니라 종족적으로 부여계 집단의 유적이라는 것 그 자체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라마동 유적이 동아시아 한/중/일 고대 갑옷, 마구 역사와 계보에서 차지하는 압도적이고 선도적인 위상을 이해한다면 라마동 유적이 부여계 유적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충격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주홍 교수의 발언을 "폭탄성 발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특정한 지역에서 출토된 대량의 인골을 두고 중국 학계, 특히 형질인류학 전공자들이 부여족이란 구체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폭탄성 발언"이란 이야기를 한 것이다.

사실 형질인류학적으로 부여족 혹은 고구려족, 혹은 부여인, 고구려인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한 영역이었다. 부여-고구려계 고분에서 형질인류학적인 연구기법을 적용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의 인골이 대량 출토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동안 모호했던 부여-고구려계 집단의 형질인류학적 특징 다만 현대 만주족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토대로 볼 때 그 중간지역에서 거주하던 집단인 부여-고구려계 집단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의 유전적 관계 2008.1.29" [7]")는 점은 이미 예전부터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이같은 나의 정황론을 뒷받침할만한 형질인류학적 증거는 지금까지 없었다. 특히 고구려나 부여하기 존재하기 이전 단계인 기원전 10~기원전 4세기 중국 길림성 서단산 유적의 인골이나 기원전 16~11세기의 요령성 본계 유적의 인골은 현대 한국인과 비교하기 애매한 특성이 많아 논란이 되었다. 북한 사회과학원 "조선사람의 기원" 150쪽의 표를 보면 서단산 유적의 인골은 머리뼈 높이가 평균 132.0mm에 불과했다. 이는 북한 학계에서 산출해낸 이른바 "조선 옛 유형 사람"의 머리뼈 높이 평균 140.3mm보다 두드러지게 낮아서, 과연 서단산 인골을 "조선 옛 유형 사람의 한 지방유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지 망설이게 만들었다.

■ 라마동 유적을 놓고 중국학계가 부여족이란 이야기를 한 이유 사실 중국 학계에서 라마동 유적을 순수한 선비계 유적이 아니라 부여계 유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었던 출발점은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유물 양상이 전형적인 선비족 무덤의 그것과는 달랐다는 점 때문이다. 동시에 라마동의 유물이 송화강 유역의 부여권 유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에서 먼저 부여계라고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고고학자도 아니고 형질인류학 전공자들까지 굳이 "부여족"이란 표현을 직접적으로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중국 길림대에서 2010년에 공개한 박사 논문(라마동 삼연문화 거주민의 인골연구 2009)을 보고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왜 부여 본거지도 아닌 요서 지역 내 부여 포로 집단의 무덤을 놓고 중국 형질인류학계가 굳이 부여계로 못박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말이다.

아래 표를 보자. 표:<<원문출처에 가서 보도록>>

위 표는 동북아시아 제 집단과 라마동 유적 인골의 주요 측정치와 지표 총 19개를 Morant 기법을 이용해 비교한 것이다. 표에서 화북조는 1920~30년대 측정 자료에 기반한 중국 북방 한족, 조선조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형질인류학계가 측정한 식민치하의 한국인을 지칭한다. 기타 몽고조는 몽골족, 애사기마조는 에스키모족, 통고사조는 퉁구스족, 나내조는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을 의미한다. 보는 바와 같이 비교 집단 중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한국인이다. 그 다음 가까운 것이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이고, 그 다음이 북방 한족, 몽골족이고, 퉁구스족은 가장 멀다.

1920~30년대 화북조 다시 말해 북방 한족의 측정치는 현대 이후 중국 학계의 측정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장경이 짧은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비교 데이터를 다른 것으로 사용했다면 부여족과 북방 한족의 거리는 더 멀어질 가능성도 있다. 남부 퉁구스계 만주족이 형질인류학적으로 한국인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위 표에서 한국인 다음으로 남부 퉁구스계 나나이족이 라마동 부여족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표:<<원문출처에 가서 보도록>>

위 표는 같은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지표를 유클리드 거리로 계산한 것이다. 역시 라마동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가장 가까운 집단으로 나온다.


표:<<원문출처에 가서 보도록>>

위의 계산결과 수지형 표로 그리면 당연하게도 라마동 부여족과 현대 한국인이 한 그룹으로 묶인다. 에스키모와 나나이족이 한 그룹으로 묶이고 한 단계를 건너 뛰어 북방 한족과 연결된다. 퉁구스족과 몽골족이 그와 구별되는 그룹으로 묶인다.

다시 말해 중국 길림대 형질인류학 연구팀은 자신들의 분석 기법상 요서 북표 라마동에서 나온 인골이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 유적의 종족적 주체를 부여족이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논문은 부여족(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인 고구려족 내지 고구려인)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점을 사실상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막연하게 부여-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생각하는 역사 인식론 내지 역사 계승의식 차원을 넘어서서 형질인류학적으로도 부여-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의 연관관계를 한 차원 더 진전된 상태(최종 결론은 아니다)에서 논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것에 이 논문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상되는 질문과 지적에 대한 Q&A

➀ 부여-고구려계와 현대 한국인이 동일 계통의 집단이었음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나? 증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측정한 인골 개체수는 426건에 이르고, 이중 성별이 명백한 404개의 예를 연구에 이용했다. 그 중에서도 두장폭 지수등 형질인류학적 주요 측정치와 지표를 비교하는데 사용한 남성 성인 인골의 수는 대략 40~73개체에 이른다. 이 정도 많은 고인골을 이용한 연구는 흔하지 않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워낙 인골 보존 상태가 좋았다. 다만 머리높이가 136mm라는 점은 한국 학계나 북한 학계에서 공개한 한국인 인골 머리 높이 평균치(140mm 내외)와 비교해 다소 낮은 것이다. 물론 서단산보다 높지만 현대 한국인과 비교해서는 눈에 띄는 점이다. 이것이 순수 부여족의 인골이 아니라 당시(3~5세기) 선비족 내에 포로로 끌려 왔던 부여계 집단과 현지 주민과의 어느 정도 혼혈이 된 집단이라면 상대적으로 낮은 머리 높이는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중국 학자들이 개별 데이터들의 측정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고동북유형과 고화북유형 운운하는 것을 봐선 현저히 다른 특성을 지닌 인골이 혼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치로 봐서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란 결과가 나온 것을 볼 때 부여-고구려계 집단과 현대 한국인 사이에 연결고리가 존재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여-고구려계와 현대 한국인이 동일 계통의 집단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기 힘들지 몰라도 모종의 강한 연결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모종의 강한 연결관계라는 것은 결국 문헌 사학계에서 말하는 "한국인의 3원적 구성설, 즉 고대 예-맥-한 3개 종족의 결합체가 현대 한국인의 뿌리"라는 주장과 "고대 삼한은 북방의 예맥족(부여-고구려의 주류 종족)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지역화한 종족으로 본질적으로 예맥족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 집단"이라는 주장을 의미한다.


➁ 동일 계통의 집단이라고 단정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오늘날 유전자 인류학이 발달한 상태에서 고전적인 형질인류학적 측정치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라마동 유적의 mtDNA를 분석해 제 집단과의 상호거리를 분석한 연구결과는 이미 일부 공개가 되고 있지만 각 하플로그룹을 특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데이터는 아직 부분적으로만 공개되고 있어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리고 애당초 현대 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은 형질인류학적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두 집단을 두고 동일 종족, 내지 동일 민족이라고 표현을 사용하는 연구자나 학자는 전혀 없다. 양 집단의 언어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계통론 내지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와 모종의 연결고리가 존재하지만 고구려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집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주장이 엇갈린다. 퉁구스-한국-일본을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안에 고구려어를 포함시키는 학자도 있고, 한국-일본어를 한 그룹으로 묶으면서 고구려어는 상대적으로 일본어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반대로 고구려어와 몽골어나 퉁구스어와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 학계 일부와 북한 학계에서는 고구려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는 한국어라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와 신라어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언어적인 관점에서 고구려어의 위상과 정체에 대한 연구는 현재 진행형 내지 좀처럼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다만 부여-고구려계 집단이 현대 한국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했고, 아마도 유전자 인류학으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앞으로 고구려인내지 고구려족과 고대 한국인(삼한)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집단이라는 점 정도는 증명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확한 용어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고구려인과 백제인, 신라인은 형제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연구가 진척될 가능성은 있다.


➂ 형질인류학은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고학 전공인 S대의 L교수도 과거에 이런 연구에 대해 혹평하지 않았나? 형질인류학에서 사용하는 각종 측정치와 지표들이 유전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생활환경에 의해서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형질인류학이 완전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도 동의하기 힘들다. 지난 2008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과에서 나온 학회지에도 한반도 고인골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이 게재됐다. 우리나라는 형질인류학을 상대적으로 박하게 평가했던 영미권 학계의 영향을 받아 유전자 인류학은 인정하면서 형질인류학은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강한데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본다. 지난 2008년 이후 동래성 해자 발굴 때도 칼에 부서진 인골들의 국적을 확인할 때 결국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지표를 동원해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인 인골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았나. 무용하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막상 고인골을 손에 들었을 때 형질인류학적 연구방법론을 무시하기는 힘들다.그리고 중국 학계에서 동일 지역에서 비슷한 생활환경을 가지고 있는 만주족과 한족 대학생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비교 연구한 결과를 보면 종족별로 형질인류학적인 차이가 분명히 식별된다. 다시 말해 생활환경이 형질인류학적 측정치를 변화시킨다할지라도 유전적 영향을 완전 배제할수는 없다. 서구권보다 형질인류학적 연구자료가 많이 축적된 러시아와 중국의 각종 통계자료를 보면 동북아 지역의 제 종족집단의 상호관계를 비교할 때 형질인류학적 연구결과는 유전자 인류학의 연구결과와 상반된다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요서지역의 인골이 형질인류학적으로 고동북유형이 고화북유형으로 교체되거나 고몽고고원유형으로 교체될 때 유전자 인류학적 관점에서도 하플로그룹의 비율과 구성에 급격한 변동을 일으키는 현상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 형질인류학적 연구가 다른 연구와 연계해서 보조적인 참고 자료로 이용되는 한 무용하다고 비판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➃ 우리 학계의 형질인류학적 연구결과, 특히 국편위의 한국사 시리즈를 비롯해 여러 중요한 개설서와 논문집에 실린 P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신석기, 청동기, 철기, 고려, 조선시대 각 인골의 형질인류학적 측정치와 주요 지표들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현상이 있다. 막상 한국인 내지 그 조상임이 분명한 인골에도 이처럼 지표가 요동치는데 이런걸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측정에 사용한 인골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다. 이 점은 이미 관련 연구자도 인정한 사례가 있다. 현대 한국인이 단두라고 해서 한국인 100명을 측정해서 단두가 100%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고인골은 해당 유적에서 1~2개 샘플 정도 수집한 경우가 많아 일반화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물론 늑도 인골 같은 경우 단순히 샘플 타령은 하기에도 너무 벗어난 측정치를 보여준다. 이런 인골은 종족 이동, 민족 이동 현상이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상대적으로 머리 높이가 높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➄ 왜 하필이면 부여족 포로인가. 부여 영토가 요서 라마동까지 미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당시 문헌이 묘사하는 시대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 라마동 유적 이외에는 당시 요서 일대에 전형적인 선비족풍의 유적이 많이 존재한다. 라마동 유적 외에 당시 요서지역 유적에서 나오는 인골도 고몽고고원유형-고시베리아유형-북아몽고인종 계통이어서 라마동의 인골과 전혀 달라 선비족 계통의 유적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라마동 유적이 기본적으로 선비족의 정치적 영향권 내에 있었던 부여족의 유적이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➅ 왜 하필 부여족인가. 요서에서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인골이 나왔다면 백제 요서진출설의 증거로도 활용할수 있지 않나. 이런 질문도 나올줄 알았다. 인골 자체만 보자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의 양상이 한성 백제 내지 그 이전단계의 한강 유역 일대의 유물과 비교할 여지는 없다. 선비족 유물과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송화강 유역의 유적들과도 강한 관련성이 있는 유물들이어서 부여 외에 다른 집단을 생각하기 힘들다.


요약

1. 현대 한국인과 고구려인(예맥인)은 문화, 역사 뿐 아니라 DNA 검사 해보면 혈연적으로도 45-65%는 남아있다.

2. 짱깨&좆본이 자꾸 예맥인과 떼어내고 싶어하는 한반도 남부원주민은 이미 고구려 건국 이전에 남하한 예맥인들이 혼혈을 일삼거나 다쳐내서 일본열도로 몰려갔고 그 민족은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덧붙이자면 마한 변한 진한 주류 민족부터가 고조선에서 온 예맥인이다)


여담으로 한국어 관련 언어학 연구가 진행되면서 요즘엔 고구려어가 생각보다 더 현대 한국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무려 신라어보다도 직계 조상에 가깝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섣불리 결론내릴 단계는 아니고 고구려어 직계 조상설vs신라어 직계 조상설 논리가 경쟁하고 있는 정도이다. 아직까진 신라어 직계 조상설이 더 우세한데 앞으로 더욱 연구가 진행되는걸 기다려보자.

역사[편집]

삼국사기에 따르면 4세기는 백제 우세기(근초고왕) 5세기는 고구려 우세기(장수왕) 6세기는 신라 우세기(진흥왕) 이다.

기원전~1세기[편집]

부여이탈 주민들이 고주몽을 중심으로 남하하여 기원전 37년 즈음에 세운나라.(삼국사기 기준이다. 으떤 학계에서는 성립은 기원전 75년즘에 됐다고 한다.)

졸본성에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부여의 일종으로 취급되어 졸본부여라고도 불렀다.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에 따르면 위치선정을 개좇같이 해서 생산력이 그지라 그 대신으로 노략질을 좋아하고 호전적인 민족이었다고 한다.

이 고구려에서 다시 이탈하여 남하한 세력이 오늘날 서울인 한성과 충청도 일대에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백제이다.

2세기~3세기[편집]

여튼 고조선 멸망이후 한나라는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해 통치하려고 했는데 고구려랑 백제애들이 극딜을 했다.

한국 역사상 기록으로 보자면 고국천왕이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복지를 실천했다고 한다. 고국천왕이 백성들이 봄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국상(國相) 을파소의 건의에 따라 진대법(賑貸法)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 진대법은 말하자면 먹고 살기 어려웠던 고구려의 서민들에게 곡식을 저금리 대출해주는 제도라고 보면 된다. 물론 서민 백성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지면 백성들이 자꾸 귀족의 노예가 될테고 그러면 귀족의 권한이 세지고 왕권이 위협 받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러한 제도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의도야 어떻게 되었든 그러한 제도 덕분에 고구려 서민들의 삶이 많이 나아졌을 것이다.

그래서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며 부여와 손을 잡지만 태조왕과 미천왕때 한사군은 축출되었다. 다 쫓아낸 이때가 기원후 3세기다.

동천왕은 위나라와 시비 붙었다가 관구검에게 털려 충신이 가미카제해서 겨우 목숨 보존한 안습한 사건도 있었다.

참고로 이때 연맹왕국 에서 더이상 성장이 지체된 옥저와 동예까지 합병한다. 그 전까지는 이 둘은 고구려에 조공바치던 셔틀이었음.

4세기[편집]

하지만 최악의 위기가 닥쳐오는데 그거슨 모용선비의 전연이 침입해 고국원왕을 관광시키고 왕비는 납치당했고 수도를 털어 왕릉을 도굴하고 사람들을 잡아갔다.

사실상 나라가 망해도 이상할게 없는 상태였으나 소수림왕이 중집화 정책을 실시해 5세기 중흥의 발판을 닦는다.

광개토대왕을 18살에 즉위해 50도 되기전까지 왕을 하다 사망했는데 인생이 정복의 연속이었다. 신라를 셔틀로 삼았다.

ㄴ그래도 좆라를 안 멸한대가로 신라는 1000년,고구려는 700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그 셔틀에 왜구가 쳐들어 와서 왜구를 때리다 보니 왜구가 셔틀의 옆에 있던 금관가야로 도망을 쳤고, 고구려군은 그대로 금관가야까지 쓸어버려서 가야의 판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만주를 쳐묵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만주는 꿀땅은 아니었고 그냥 간지템이었다. 캐안습

(그래도 만주의 양고기는 좋은 식량감이었다고 한다)

만주 자체는 상징성이 더 컸다. 당시 개꿀로 여겨지는 땅인 중원으로 바로 가는 길목이 요동ᆞ만주 지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을 차지하면 보통 "내가 이 동네에서는 짱짱맨이다!!"라고 뻐길 수가 있었다. 중국이 존나게 만주를 뺏고 싶어했던 것도 중원 지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주변국가들이 설치지 못하게 누르려했던 게 이유였다.

ㄴ 요동은 중국 입장에서 보면 바로 옆동네여서 위협적이고, 요동이 당시 교통의 요충지라서 무역이 발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음.

5세기[편집]

5세기는 장수왕 한명밖에 없다고 보면 댐. 그래서 왕의 시호도 오래살아서 장수왕이다.

머왕의 아들 장수왕은 꿀땅인 한반도 남부 즉 한강유역에 집중한다.

극딜을 당한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는데 이것이 1차 나제동맹이다.

하지만 장수왕은 개로왕 북위 국서사건을 구실로 침공,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전사시키며 신라를 매금(노비)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대꿀멍시킨다. 사실상 고구려 최대 전성기 이다.


이때 신라는 무지막지하게 영토가 찌그러진다. 사실상 이때가 신라를 없앨 마지막 기회였을 거다.

그러나 장수왕은 자비롭게도 한반도 중원에다가 고구려비를 세우며 빵셔틀 신라왕은 중원으로 나와서 인사나 나누자고 했으나 신라 왕은 나오지 않았다. (이때 없애지 못한 신라는 그 후로 지증덕만춘추가 다스리며 무지막지한 국력 상승을 이루어내고 나중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후대의 우리가 고구려라고 부르는 것은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광개토대왕비는 아빠묘지에 세운 묘비이고 중원 고구려비는 백제정ㅋ복ㅋ 인증용으로 이 양반이 세운거다.

지두우(흥안령 일대, 몽골 땅이다)를 분할 점령하려다가 불발된걸로도 유명하다.

6세기[편집]

초반에 문자왕이 선비족에게 개박살나서 빈사상태이던 부여를 합병한다. 고구려의 최대판도는 이 왕때 찍는다.

이때가 한민족 최대영토였다. KIA~주모옹!

안장왕 시기 전성기를 찍지만 암살당하고 안원왕 시기부터 서서히 몰락한다

7세기[편집]

중국을 통일한 거대제국 수와 당나라에 맞서 싸워 이겼지만 사실상 청야전술로 전국토를 스스로 초토화 시켜서 이길수록 나라 살림또한 초토화된다.

거기다가 왕을 뒈짖시키고 독재자가 된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들이 분열되기까지 하면서 국가 막장태크를 탔고 나당연합군은 옆에서 툭 하고 건들이자 와장창 무너졌다. 668년 건국후 705년만이다.

수도인 평양 자체가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가까운데, 마침 남쪽의 신라에서 당나라 군사가 상륙할 땅까지 지원해주니 그대로 신라에 상륙해서 평양만 치면 되는 거였다.

이걸 생각 못하고 요하부터 쳐들어가서 번번이 틀어막힌 수문제ㆍ수양제와 당태종에게 묵념.

물론 수도만 치면 지방에 있던 장수들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고구려 부흥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부흥운동조차 왕족인 안승의 내전으로 인해 시망.


이후 협정에 따라 청천강을 경계로 하여 이북은 당나라가 먹고 이남은 신라가 먹었다. 사실 거의 당나라가 다 쳐묵한것이다. 신라는 고작 지금의 황해도 밖에 못 먹었다. 그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확실하게 먹어 버리자, 수도를 지키는 목적으로 만든 안동도호부가 국경에 너무 가까워져 요동으로 이전하였다.

ㄴ신라는 먹어볼만큼 먹어보려고 당나라를 선공하고 북상을 시작했는데 황해도 석문에서 저지되어서 그 후 대동강이남으로 만족했다. 사실 당나라가 조약 먼저 깨고 백제,신라까지 도호부를 설치했는데 여기서 눈치깐 신라가 백제지역 주도권을 확보하고 이후 당나라를 경계해 안동,웅진도호부를 털고 당의 관원을 조지며 기습공격 한것이 나당전쟁의 시작이다.

왕과 유민들은 당나라 내륙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7세기 말 측천무후의 혹정으로 인한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다

멸망 후[편집]

안승, 검모잠, 고연무 등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백수산 전투 등에서 싹 다 진압당한다.

이후 안승과 검모잠이 신라의 도움을 받아 보덕국이란 허수아비 국가를 674년 하나 세우나 지들끼리 싸우다가 683년에 좆망한다.

보장왕 3남이 소고구려란 나라를 699년 세워 820년 발해 성왕에게 병합될 때까지 가기도 했다.

고구려 지배층은 당에 의해 중국 내륙 깊숙한 곳으로 강제 이주당했으며 남은 이들은 여진족, 신라인으로 흡수,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민중들이 자주 죽창을 들어서, 당나라에서 병약한 이들만 남기고 대부분 중국 서북부나 강남 지역으로 강제이주를 자주 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끌려간 고구려 금/은수저들과 말갈은 지역개발을 위해 강제노역을 했는데,

그 중 본토 가까이에 남아있다가 못해먹겠다고 폭동일으켜서 도망나온 대조영과 그의 무리들이 발해를 세운다.

또 한반도에 있는 고구려 유민들의 후손들은 궁예의 후고구려(태봉)에서 일하다가

궁예가 또라이 짓을 하자 반란을 일으키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해서 고려가 세워지게 된다.

사회[편집]

종족[편집]

사실 고대 국가에 섣불리 종족을 따지는 것은 애매한 일이다. 일단은 굳이 따지자면 주로 예맥이라고 보고 있다. 이 예맥은 한반도 남부의 한(韓)과 함께 한민족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소수의 말갈인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ㄴ 고구려 내의 말갈은 소수였고, 그 말갈마저도 요즘은 예맥계 말갈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음.

한족 새끼들도 있었다. 평양에서 발견된 서기 45년의 낙랑군 호구조사를 보면 인구의 14%인 4만 명 정도가 한족으로 나온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런 인구 이동이 생각보다 자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자가 심히 많았다, 한나라의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천여 가를 데리고 투항해 오자 왕은 그들을 받아들이고 책성에 안치하였다. 같은 기록도 있으며 반대로 잠지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가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신대왕이 죽고 그의 둘째 아들 이이모가 왕위에 올자 맏아들 발기는 소노가와 함께 각각 하호 3만 여명을 거느리고 곤송강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같은 기록도 있다.


인구[편집]

모든 고대 국가들이 그렇듯, 정확히 인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멸망 당시 고구려에는 가구 수가 69만호 정도였다고 하며, 백제는 멸망 당시 가구 수가 76만호 정도였다고 적혀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역시 고구려는 대부분의 땅이 척박해서 인구가 땅에 비해 적다고 말하는데, 고구려가 그동안 중원의 통일 제국들과 오랫동안 싸웠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인구가 줄어들면 줄어들지 늘어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히려 그 전에는 고구려의 인구가 더 많았는데 잦은 전쟁으로 인해서 고구려의 인구가 처참한 수준으로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대략 한 가구당 적어도 5명으로 잡으면 고구려의 멸망 당시 인구는 345만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예측된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되면 오히려 후대의 고려조선에 비해 인구 수가 과장된 면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것을 떠나서 고구려 땅이 다 쓸모 없는 땅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평안도와 황해도와 함흥평야 지역과 요동은 농사 짓기 괜찮은 땅이었다. 그리고 농사(특히 벼 농사)를 짓기 어려운 다른 땅에서는 이나 조나 같은 작물들을 재배했을 것이다.[6]

언어[편집]

한국사의 고대 국가들이 다 그렇듯 언어 자료가 굉장히 부족하다. 그나마 신라는 향가라도 몇개 남아있지만, 고구려나 백제는 그저 안습. 대략 고구려 시기에 제작된 비석들이나 유물에 적은 글로 추정하는 정도다.

대부분이 그냥 뇌피셜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김유신열전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지배계층이 언어가 통했고 고구려와 신라의 지배계층과 평민 간에도 통역 없이 언어가 통한 것처럼 묘사되는 기록들이 있다. 다만 이는 주로 삼국시대 후반에 집중되는 기록들이라 삼국시대 초반부터 언어가 통했는지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일단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의 유민인 진한 6촌 세력이 진언(진한의 언어)을 사용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 진언이 어느 계통에 속하는 언어인지 확실히 밝히기 이전에는 확언할 수가 없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 중후반부터는 서로 언어가 통한 건 맞는 거 같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평민들끼리도 언어가 통한 것으로 묘사되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백제의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언어가 다르다는 주장도 문제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 피지배계층이 왕을 부를 때 사용한다는 건길지는 일본 천황가나 백제 왕족, 귀족들도 잘만 사용한다. 때문에 호칭만 가지고 다른 언어를 썼다고 속단하기 어렵다.

경제[편집]

고구려도 엄연히 농본국가였다. 누가 고구려는 약탈 경제의 유목 국가였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고국천왕 시대의 진대법(賑貸法)은 무엇인가? 그러나 초기에는 고구려 땅이 워낙 척박해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영토를 넓히면서 농사 짓기 좋은 땅들이 많아지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났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략 요동, 평안도, 황해도, 함흥원산평야 지역이 고구려의 곡창지대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벼 농사가 불리한 지역에서는 [7], 조, , 수수, 기장, 보리 같은 작물들을 재배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 만주 땅에서는 목축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원으로는 철이 꽤 유명했다고 한다. 요동에 대규모의 철 광산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요동에서는 석유도 난다. 고구려 땅이 지금까지 내려왔으면 한국도 산유국이었을텐데... 안습 ㅠㅠ

그리고 소금도 꽤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북한 평안도 온천군에서 대규모의 고구려 시기 소금 생산지 유적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아마 근처 바다에서 소금을 채취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발굴된 유적을 보면 고구려의 소금 생산 기술이 꽤 뛰어났다고 한다.

왜(일본)에게 토산물로 낙타를 보냈다고 한 기록을 보면 만주평야에서 쌍봉낙타를 많이 키웠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정치[편집]

부여의 5가처럼 5부가 있었다. 그때문에 3세기 태조왕 즉위 이전까지 고씨가 아니라 여러 왕족들이 신라마냥 왕관을 돌려먹은거 같다고도 한다. 나중에 중집화 과정에서 부족자치제의 성격이 강한 5부는 행정구역의 5부로 개편되었다. 고구려의 왕 이외에 알려진 사람중 하나인 관나부인은 이 5부중 관나부 소속이다.

다른 삼국 여러나라들 처럼 신분제 사회로서 왕족과 귀족, 지방토착 지배계급(촌주), 평민과 노비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좌식자는 상호라고 불렀고 평민들은 하호라고 불렀다. 상호는 전시에 국방을 책임지며 하호는 생산과 전시에 보급만을 담당했다.


일단 전쟁이 터지면 지방관들과 촌주가 병력을 이끌고 자비로 무장해 출진하면 중앙에서 군관을 보내 지휘하였다.

군사[편집]

평소에는 밥만 먹다가 일이 생기면 나가 싸운다는 전문 무사 집단인 좌식자가 있었다.

국뽕들의 동아시아 최강국이니 로마와 비교니 이런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고구려의 군사 수준은 삼국 중에서 군사력이 가장 강했거나, 중국 왕조들과 단독으로 1:1 맞다이 깔 수 있는 정도이다.(이긴다는 소리 아님)

그리고 좆구려 군대가 국뽕들 말처럼 존나 강했으면 그 시절에 무조건 영토 확장해서 중국 대륙 정복하고 이웃 민족들에게 각종 재화와 음식, 미녀 등을 내놓으라며 설치고 다녔겠지.

까놓고 이웃의 진귀한 재화와 음식, 미녀들을 따먹으려는 개인적 야심을 가진 제왕들이 판을 치던 시대 아니냐?

ㄴ영토를 확장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영토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크다면 영토를 굳이 확장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장수왕때 요서 점령하고도 사람들하고 물자만 빼앗은채 철군함

ㄴ 요서는 당시에 습지, 황무지여서 가지고 있으면 관리하기 힘들었음.

ㄴ근데 과거에는 그런 개념 자체를 사람들이 거의 다 선호하지 않거나 믿지 않았음.(양적 이론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질적 분석처럼 질을 강조하는 풍조도 의외로 생긴지 얼마 안 됨. 근본의 탄생은 의외로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까놓고 과거 강대국들이 스노볼 못 굴리고 죄다 망하는 게 현대 이론으로 보면 당연함.) 제국주의 시대 유럽도 현대 기준으로 보면 어이없는 짓거리하고 있는데 고구려 사람들도 그런 개념들을 알고 있거나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 거의 없었을 걸.

고구려도 사실 위나라 관구검에게 두들겨 맞거나 말갈족까지 동원하고 일개 영주총관 위충 따위에게 막히기도 하는 등 능력이 후달린 면도 분명 있었다.

ㄴ 당시 위나라는 화북 지역을 다스리는 나라였고 고구려는 아직 완전히 척박한 산골짜기 나라였는데 당연히 후달릴 만도;;

ㄴ 고구려 국력이 크게 신장된 것은 요동 영유권을 확보한 광개토왕 이후이다.

ㄴ 위충에게 간건 애초에 일개 말갈군 1만이지. 고구려 정예군이 간 것도 아닐 텐데..

문화[편집]

생활[편집]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일찍이 증언하듯, 호전적인 문화를 가지고 이었다고 한다. 국뽕사관에선 상무적 기풍이라고 표현한다.

서옥제로 유명하다. 결혼을 하면 신랑이 장인집에 서옥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거기서 첫 아이가 태어날때까지 노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력 부족을 벌충하려는 풍습이었다. 단 이게 귀찮다고 돈을 떼우는건 금지되었다. 지참금 제도는 딸을 팔아먹는 짓이라고 혐오했다고 하며, 결혼하면 그냥 술과 고기만 만들어 돌렸다.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행하면서 국동대혈에서 제사지내고 나서 놀고 먹었다.

건축[편집]

잦은 전쟁과 만주와 북한의 안습한 기후 때문에 현세에서 복을 누리기 힘들었기 때문에, 무덤 치장에 유난히 신경썼다. 잦은 외침 때문에 요동의 험준한 산맥을 이용해 높은 성곽을 쌓았으나 정작 고수전쟁시에는 평지성인 요동성 말고는 야전으로 클리어했고, 고당전쟁시에는 요동 성들 다 털려나갔다.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중국식 벽돌무덤과 함께 벽화가 있다. 안학 3호분과 집안의 무덤들이 중국과 북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전기 고구려 벽화들은 유주자사 진의 무덤처럼 일상생활의 풍경을 묘사했다면, 후기 고구려 무덤들의 벽화는 사신도 처럼 도교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추상적이거나 신화의 세계를 그렸다.

교육[편집]

고구려 전국의 각 동네마다 경당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치해서 평민들에게 경전이나 기마나 궁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수림왕 때 오늘날의 국립대학 같은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립했다.

이렇게 교육 증진에 많은 노력을 해서인지, 당시 남녀노소나 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심지어 개까지도 책을 가까이 했다고 한다.

인물[편집]

주요 왕들[편집]


고구려의 국왕 목록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동명성왕
고추모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
유리명왕
고유리
(기원전 19년~18년)
대무신왕
고무휼
(18년~44년)
민중왕
고해색주
(44년~48년)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모본왕
고해우
(48년~53년)
태조대왕
고궁
(53년~146년)
차대왕
고수성
(146년~165년)
신대왕
고백고
(165년~179년)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고국천왕
고남무
(179년~197년)
산상왕
고연우
(197년~227년)
동천왕
고우위거
(227년~248년)
중천왕
고연불
(248년~270년)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서천왕
고약로
(270년~292년)
봉상왕
고상부
(292년~300년)
미천왕
고을불
(300년~331년)
고국원왕
고사유
(331년~371년)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소수림왕
고구부
(371년~384년)
고국양왕
고이련
(384년~391년)
광개토대왕
고담덕
(391년~412년)
장수왕
고거련
(412년~491년)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문자명왕
고나운
(491년~519년)
안장왕
고흥안
(519년~531년)
안원왕
고보연
(531년~545년)
양원왕
고평성
(545년~559년)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평원왕
고양성
(559년~590년)
영양왕
고원
(590년~618년)
영류왕
고건무
(618년~642년)
보장왕
고보장
(642년~668년)
  • 동명(성)왕: 대략 199x년생이면 알만한 주몽이다.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다. 고구려인들은 추모라 불렀으나 현대 한국에서는 거의 완전하게 주몽이라는 이름이 유통되고 있다. 근데 추모가 못난이에 난쟁이라는 뜻인데 중국인이 동명왕 욕할려고 붙였다는 설이있다.
  • 태조왕: 장수왕 때문에 묻히긴 하지만 태조왕도 존나 오래 살았다고 한다. 119살?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세습하고 옥저를 복속시켰다.
  • 고국천왕: 진대법을 실시하고 부족적 성격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시켰다.
  • 미천왕: 낙랑군과 대방군을 쫓아냈다. 이렇게 말하면 별 느낌이 안오겠지만 한마디로 현재 북한 땅에서도 개마고원 산골짜기 제외 가장 알짜 땅에 해당하는 부분을 혼자서 다 차지했다!
  • 소수림왕: 니칸인들로부터 이런저런 법과 이런저런 룰을 도입해서 고구려를 세련된 짱개식 국가로 다듬었다카더라 태학설립 ㅎ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침략은 절대 하지않는 한민족의 전통에 따라 부동산거래를 통해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 장수왕: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하지만 정작 삼국사기에는 조공기록으로 도배되어 있다.
  • 문자명왕: 장수왕 다음대의 왕이자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던 마지막왕. 외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조공기록만 있다. 부여왕이 처자식을 이끌고 나라를 바쳤다는 기록을 빼면 특별한 기록이 딱히 없다. 조다의 아들. 즉, 장수왕의 손자이다.
  • 안장왕: 백제에 두고 온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한강 유역을 공략했으나 이에 반감을 산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
  • 평원왕: 장안성으로 천도하고 한강 유역을 수복, 만주를 넘보는 돌궐을 두들겨 패는 등 망해가는 고구려를 살려냈지만 듣보잡....이지만 딸이 평강공주라서 딸 때문에 유명해진 케이스(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그 평강공주다)
  • 보장왕: 고구려의 마지막 왕. 하지만 실권은 연개소문에게 빼얏겼으니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주요 인물들[편집]

  • 명림답부: 99세의 척추도 안서는 할배가 정변을 일으켜 차대왕을 몰아내고 신대왕을 옹립하였음.
  • 창조리: 고구려 봉상왕때 국상 북부 대형 고노자를 등용해서 창조적으로 모용외에게 엿을 먹임 캬 ㅆㅅㅌㅊ 그리고 폭군 봉상왕을 몰아내고 을불, 즉 미천왕을 옹립함.
  • 고노자: 고구려 북부대형 이였다가 신성 태수가됨

500기를 이끌고 침투하던 모용외군을 작살냄 신성 태수가 되자 모용외는 더이상 고구려에 안왔다 카더라

  • 을파소: 당시 고구려의 서민들을 위해서 진대법(賑貸法)이라는 저금리 대출을 해주는 정책을 건의하고 고국천왕의 명에 따라서 직접 집행했다.
  • 하발: 우산국 왕자. 우산국이 신라에 의해 망하자 고구려로 망명, 대형에 까지 오르나 왕의 눈밖에 나서 북위로 도망갔다.
  • 온달: 원래 평민 흙수저 집안인데 여자(평강공주)를 잘 만나서 공부하고 출세해서 장수가 되었다. 뒷날 신라와 전쟁하다가 결국 전사했다.
  • 을지문덕: 수나라 건국 시에 을지씨 가문을 숙청하는 양씨 일가를 피해 고구려에 도망왔다. 이후 고수전쟁을 치르고 다시 중국에 가 이세민 휘하에서 활약했다. 고당전쟁에 참전할때는 기분이 어땠을까....(진짜냐?? 사실이면 좌표좀)

ㄴ 네다짱. 그게 아니라 울지경덕 이라고 당태종 휘하에 유명한 장수가 있는데, 이름, 성이 유사해서 그런 얘기가 나왔던거. 을지가 성이 아니라 을만 성이고 지는 존칭에 쓰이는 조사나 접사같은 것으로 추정하는 썰도 있다.

  • 연개소문: 고구려 마지막 세기말 패자. 나름대로 재주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고구려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아들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멸망의 길을 가게 만들었음.
  • 안시성주: 흔히 '양만춘'으로 잘못 알려진 인물. 고구려 최후의 타워 디펜스 마스터. 요동성도 갈아버린 당태종을 존만한 안시성에서 막아냈다.
  • 고선지: 고구려 멸망 뒤의 인물이긴 하지만 국뽕들은 고구려인이라카니 여기 넣어도 상관은 없다만 너무 확대해석하지는 말자. 그런데 말년에 고구려 유민 출신이라고 까인 걸로 봐서 고구려인이 맞기는 함.

여담[편집]

한마디로 정리하면 삼국중 평균적으로 가장 강했고 중국 왕조들이랑 1:1 로 싸워볼만한 수준?

사방이 적인 좆같은 상황에서도 의외로 분전했다.

ㄴ근데 당시에는 개나소나 사방이 적 아니냐? 제대로 된 민족주의도 없어서 같은 민족들끼리도 존나 증오하고 학살하느라 바쁜 시절이었는데. 짱깨들도 다른 지방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욕하고 좆구려도 짱깨, 쪽바리처럼 백잔 거리며 같은 민족을 멸시했었는데 그냥 우덜 집단이랑 맞지 않으면 적이지 뭐. 실제로 분열이나 반란 시도도 존나 일어났고. 많이 실패해서 그렇지. 역사에 기록된 반란들이 평타는 치거나 했으면 존나 분열 했을 듯.

ㄴ 백제나 신라는 옆과 위만 방어하면 되지만 고구려는 아래로 백제와 신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도 외국들이 있었기 때문에 동급으로 놓기는 힘들지.


좆목 민족의 성격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영토가 훨씬 넓었을 가능성도 있다. 솔까 고구려나 발해나 중국 침공하다 위총 같은 놈들한테 털리고 도로 집에 간 이유가 농경 민족 성격이 강해서 그렇다. 유목민 새끼들처럼 왕 새끼도 이동식 천막에서 말이나 타고 생활하면서 다녔으면 중국 지형상 걍 좆같은 새끼가 지키고 있거나 뚫기 어려운 요새 있으면 굳이 싸우지 않고 돌아서 가도 되었다. 참고로 몇몇 요새들은 지형빨에다 존나 견고하게 지어서 열병기가 존나 후지던 시절에는 진짜 뚫린 적이 없었는데 그거 함락 안 시켜도 다른 주요한 지방들 먹고 대빵 새끼 대갈통 박게 하면 자동으로 손에 들어왔다 쫓아오면 어떻게 하냐고하는 애들도 있을 수 있지만 옛날 제국들은 대체로 미친 새끼들이 깝치는 걸 막기 위해 군대 지도자가 마음대로 못 돌아다니게 했다.(대충 삼국지만 봐도 동탁 같은 새끼가 군대 끌고 수도 입성하더니 존나 깝치잖아.) 마음대로 움직이면 대체로 반란 행위였다. 실제로도 몇몇 명장들도 마음대로 군대 움직였다고 목이 따인 사례가 꽤 많다. 그러니 왕 새끼가 말 타고 돌아다니면서 깝치는 좆목민들의 장점을 가진 좆목 국가였다면 영토가 훨씬 넓었을 것이다.(물론 좆목 정신을 존나게 숭배하는 문화가 생겨 후대의 국가들이 훨씬 망했을 수도 있다.) 좆목민 새끼들은 실제로 그런 장점들을 활용해 넘사벽인 제국인 로마 제국이 정복한 속도를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제국들을 자주 건설했다. 금방 처망한다는게 에러지만...

ㄴ유목제국의 영토라는건 정주국가의 영토와는 사실 좀 다르다. 예를들어 돌궐보면 영토가 당나라 싸대기 후드려 패는데 그게 당나라처럼 도시 세우고 인구조사하고 조세걷는 그런 영토가 아니다. 대충 목축영역 혹은 약탈영역이라 봐야함


존나 졸렬한 나라[편집]

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병신입니다.
그냥 개좆병신 그 자체입니다.

동천왕 때 위나라 선빵쳤다가 관구검에게 개털림, 이후 중천왕 때 다시 복수

ㄴ우덜은 존나 깨지고도(미친놈이 군대 절반이 금방 바로 다 뒤졌는데 계속 싸움 ㅆㅂ ㅋ ㅋ)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역전한 인물로 좆구검이를 보지만 원래는 걍 이긴 놈으로 나온다.

고국원왕 때 백제 선빵쳤다가 근초고왕에게 목따임, 이후 광개토대왕 때 복수

영양왕 때 수나라 선빵쳤다가 위총에게 좆망, 이후 을지문덕이 복수

ㄴ고구려 정예군도 아닌 말갈군 1만으로 영주 점령 못한게 참으로 좆망입니다.

뭐하는 나라냐?

근데 안타깝게도 각종 오랑캐 새끼들이 국왕 묘지 도굴까지하면서 존나 설치며 개강간한 적도 있었는데

고구려 강간한 오랑캐 놈들 중에 많은 놈들이 지들끼리 존나 싸우다 알아서 죄다 뒤졌기 때문에 복수하는데 실패했다.

존나 어이없다.

고구려 멸망 뒤 후대의 고구려 영향들[편집]

고구려가 멸망하고 주요 귀족들은 당나라로 많이 끌려가고 그 외에 신라로 많이 망명하기도 했다. 또 왜(일본)으로 간 사람들도 꽤 있다.

고구려 멸망 30년 뒤 고구려 유민들과 일부 말갈인들이 합작해서 발해를 건국했다. 그리고 나중에 신라가 막장이 되었을 때 후고구려가 세워지고, 궁예가 점점 정신병자가 되자, 그 밑의 고구려 유민들은 결국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서 고려를 세우게 된다.

일본과의 관계[편집]

고구려 당시[편집]

일본 열도 내에 고구려 귀족들이 진출하여 지방 세력(호족)을 이루고 있었고 이들은 야마토 조정에 맞서기 위해 고구려 본국에 손을 벌렸다. 종종 열도 내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천문도나 갑주 등이 그 흔적.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가 쇠퇴하면서 고구려 정부는 더이상 열도 내 고구려 호족을 지원해줄수 없게 되었고 고구려 영토는 왜군에 의해 하나둘 쫓겨난다. 그 최후가 비진류도에 주둔하던 제후왕 양향. 양향과 그 외 열도내 고구려군과 왜군의 충돌은 일본서기에 서술되어 있는데 특히 양향의 최후가 상세하다.

ㄴ 이게 북한 모 학자가 주장한 삼국의 일본 열도 분국설이라는건데 요즘 학계는 안믿음

고구려 멸망 이후[편집]

고구려 유민들이 관동 지방에 배치되어 전쟁병기로 활용된다.

현대[편집]

고구려 왕족이라는 약광이 일본에 망명한 뒤 형성된 고구려 유민촌이 있다.

현대까지도 정체성을 온존히 보존하고 있고, 일본 정치인들 사이에서 영험하다 정평이 난 고마신사(高麗神寺, 고려신사)를 운영하며 때돈을 벌고 있다.

일본은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렀는데 고려의 일본식 발음이 "코마"다. 그래서 일본 코마신사에 가면 우리나라 전통 장승을 볼 수 있다.

이 신사는 정치인들에게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고이즈미 총리도 여길 다녀와서 총리가 됐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총독을 지냈던 개씨발롬 사이토 마코토고이소 구니아키도 여기 다녀오고 난 뒤에 총리로 등극했다.(고구려 네이노옴!)

참고로 이 신사는 조선의 마지막 세자 영친왕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 신사를 운영하던 분들 애도막부때 까지 도쿠가와네 점도 쳐주며 잘먹고 살다 일제시대때 국뽕이 나라를 잠식하면서 잠시동안 '반도놈', '센진'이라 차별을 받은 적도 있다. 수당 짱꼴라 손아귀에서 구해준 은혜도 모르는 좆본씹년들 ㅠㅜ

일본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추가 바람.

관련[편집]

발해, 백제, 가야, 신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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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유방 · 장안 · 군국제 · 한무제 · 향거리선제 · 호족 · 유교(동중서 · 훈고학) · 오경박사 · 태학 · 장건(실크로드) · 오수전 · 사기(사마천) · 왕망 · 신나라
후한 광무제 · 불교 · 한서 · 채륜 · 황건적의 난(태평도) · 오두미교
위진남북조시대 삼국시대 위나라 · 촉나라 · 오나라 · 서진
5호 16국 시대 흉노 · 갈족 · 선비족 · 저족 · 강족 · 동진
남북조 시대
북조 북위 · 효문제 · 뤄양 · 한화 정책 · 동위->북제 · 서위->북주->수나라
남조 동진 · 유송 · 남제 · 소량 · 남진
사회, 경제, 문화 구품관인법 · 문벌귀족 · 균전제 · 청담사상(죽림칠현) · 윈강·룽먼 석굴 · 도교 · 도연명(귀거래사) · 고개지(여사잠도)
수당시대 수(隨)
양견(과거제 · 균전제 · 조용조 · 부병제) · 수양제(돌궐 · 고구려-수 전쟁 · 대운하)
당(唐)
역사 이연 · 당태종(정관지치 · 동돌궐 · 율령) · 당고종(서돌궐 · 나당연합 · 고구려-당 전쟁) · 당현종(개원지치 · 안사의 난) · 토번 · 절도사 · 황소의 난 · 주전충
정치, 사회, 경제 율령 · 3성 6부제 · 주현제 · 균전제 · 조용조->양세법 · 부병제 · 기미 정책(도호부) · 비전 · · 실크로드 · 시박사
문화 오경정의 · 현장 · 조로아스터교 · 마니교 · 이슬람교 · 네스토리우스파 · 이백 · 두보 · 당삼채 · 유교 · 불교 · 한자
한국 고대사 고조선 · 부여 · 삼국시대(고구려 · 백제 · 신라) · 발해
일본 고대사 선사 시대 조몬 시대 · 야요이 시대(야마타이국) · 고훈 시대
야마토 정권 고훈 시대 · 아스카 시대(쇼토쿠 태자 · 견당사) · 다이카 개신
나라 시대 헤이조쿄 · 견당사 · 율령제 · 도다이지 · 고사기 · 일본서기 · 만요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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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시대 송(宋)
역사 5대 10국 시대(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 · 조광윤 · 전시 제도 · 신법(왕안석 vs 사마광) · 남송(임안 · 몽골-남송 전쟁)
경제, 사회, 문화 용골차 · 모내기 · 참파 벼 · 교자 · 시박사 · 사대부 · 주자(성리학 · 화이론) · 자치통감(사마광) · 나침반 · 화약 · 청명상하도
정복 왕조
요(遼) 거란 · 야율아보기 · 전연의 맹 · 북면관제와 남면관제 · 거란 문자
서하(西夏) 탕구트족 · 서하 문자
금(金) 여진 · 정강의 변 · 중도 · 여진 문자 · 맹안·모극제
몽골 제국·원(元)
역사 칭기즈 칸(천호제) · 쿠빌라이 칸(대도 · 원나라 · 몽골-남송 전쟁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 홍건적의 난
경제, 사회, 문화 색목인 · 교초 · 역참 · 원곡 · 티베트 불교 · 파스파 문자 · 수시력 · 마르코 폴로 · 이븐 바투타
명청시대 명(明) 홍무제(어린도책 · 부역황책 · 이갑제 · 육유) · 영락제(자금성 · 베이징 · 베트남 정복 · 내각 대학사 · 정화의 항해 · 정화) · 환관 · 북로남왜 · 장거정(일조편법) · 임진왜란 · 이자성의 난
청(淸) 누르하치(팔기제 · 후금) · 홍타이지 · 순치제 · 강희제(오삼계 · 삼번의 난 · 정씨 왕국 · 네르친스크 조약 · 지정은제) · 옹정제(군기처) · 건륭제(사고전서 · 문자의 옥) · 변발 · 호복 · 만한병용제 · 백련교의 난
사회, 경제 신사층 · 회관 · 공소 · 명의 해금 정책 · 감합 무역 · 청의 해금 정책 · 공행 · 일조편법 · 지정은제
문화 양명학(왕수인) · 본초강목 · 천공개물 · 농정전서 · 고증학 · 공양학 · 사고전서 · 삼국지연의 · 수호지 · 서유기 · 홍루몽 · 경극 · 마테오 리치(곤여만국전도 · 기하원본) · 아담 샬(시헌력) · 전례 문제
일본 막부 시대 가마쿠라 막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봉건제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무로마치 막부 아시카가 다카우지 · 감합 무역 · 센고쿠 시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임진왜란
에도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 에도 · 다이묘 · 산킨코타이 · 조카마치 · 슈인장 · 쇄국 · 네덜란드 공화국 · 조닌 · 가부키 · 우키요에 · 난학(해체신서)

틀:기원전 1세기


기원전 1세기 1세기 관련 문서 2세기
1st Century / 1世紀 / 1년~100년
국가 로마 제국 · 파르티아 · 쿠샨 제국 · 흉노 · 진한시대(한나라(전한 · 후한) · 신나라) · 한 9군 · 쯩 자매 · 제2차 북속시기 · 한사군 · 고구려 · 부여 · 마한 · 백제 · 진한 · 변한 · 신라 · 일본(야요이 시대)
사건 세계사
신나라 건국 (8년) · 신나라 멸망 (23년) · 후한 건국 (25년) · 기독교 등장 (27년) · 예수의 성전 정화 · 예수 사망 (30년) · 쯩 자매의 난 (40년) · 왜 노국왕에게 한위노국왕 도장 하사 (57년) · 로마 대화재 (64년) ·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 (79년) · 오현제 시대 시작 (96년)
한국사
고구려 국내성 천도 (3년) · 가야 성립 (42년) · 모본왕 암살사건 (53년)
대표 인물 예수 · 베드로 · 리노 · 아우구스투스 · 네로 · 오현제 · 왕망 · 광무제 · 쯩 자매 · 모본왕 · 태조대왕 · 온조왕 · 혁거세 거서간 · 탈해 이사금 · 수로왕
관련 작품 성경(신약)

1세기 2세기 관련 문서 3세기
2nd Century / 2世紀 / 101년~200년
국가 로마 제국 · 파르티아 · 쿠샨 제국 · 선비족 · 진한시대(한나라(후한)) · 제2차 북속시기 · 한사군 · 고구려 · 부여 · 마한 · 백제 · 진한 · 변한 · 신라 · 일본(야요이 시대 · 야마타이국)
사건 세계사
채륜종이 발명 (105년) · 하드리아누스 장벽 건설 (122년) · 오현제 시대 종료 (180년) · 황건적의 난 (184년) · 반동탁 연합군 결성 (190년) · 관도대전 (200년)
한국사
신라 박지마 즉위 (112년) · 박지마 사망 (134년) · 신라 박아달라 즉위 (154년) · 박아달라 사망 (184년) · 고구려 진대법 실시 (194년)
대표 인물 채륜 · 오현제 · 동탁 · 조조 · 헌제 · 태조대왕 · 고국천왕 · 박지마 · 박아달라
관련 작품 삼국지연의

2세기 3세기 관련 문서 4세기
3rd Century / 3世紀 / 201년~300년
국가 로마 제국 · 파르티아 · 사산 왕조 페르시아 · 쿠샨 제국 · 선비족 · 진한시대(한나라(후한)) · 위진남북조시대(위나라 · 촉나라 · 오나라 · 진나라) · 제2차 북속시기 · 한사군 · 고구려 · 부여 · 마한 · 백제 · 진한 · 변한 · 신라 · 야마토(야마타이국 · 야요이 시대 · 고훈 시대)
사건 세계사
적벽대전 (208년) · 중국 삼국시대 개막 (220년) · 사산 왕조 페르시아 성립 (226년) ·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 (235년) · 히미코에게 친위왜왕 칭호 하사 (238년) · 촉 멸망 (263년) · 서진 성립 (265년) · 서진의 삼국 통일 (280년) · 군인 황제 시대 종식 (284년) · 로마 4두 정치 (293년)
한국사
고이왕 즉위, 실질적 백제의 시작 (234년)
대표 인물 디오클레티아누스 · 유비 · 유선 · 장비 · 관우 · 조조 · 조비 · 손권 · 사마의 · 사마염 · 봉상왕 · 미천왕 · 고이왕 · 히미코
관련 작품 삼국지연의

3세기 4세기 관련 문서 5세기
4th Century / 4世紀 / 301년~400년
국가 로마 제국(서로마 제국 · 비잔티움 제국) · 사산 왕조 페르시아 · 쿠샨 제국 · 굽타 제국 · 선비족 · 유연 · 위진남북조시대(서진 · 동진 · 5호 16국 시대 · 북위) · 제2차 북속시기 · 한사군 · 고구려 · 부여 · 마한 · 백제 · 진한 · 가야 · 신라 · 야마토(고훈 시대)
사건 세계사
5호 16국 시대 개시 (304년) · 밀라노 칙령 (313년) · 동진 건국 (317년) · 굽타 제국 건국 (320년) · 니케아 공의회 (325년) ·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380년) · 로마 제국 분열 (395년)
한국사
신라 김씨 왕조 확립 (356년) · 평양성 전투 (371년) · 고구려 율령 반포 (373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 즉위 (391년)
대표 인물 디오클레티아누스 · 콘스탄티누스 1세 · 테오도시우스 1세 · 사마충 · 미천왕 · 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 근초고왕 · 침류왕 · 내물 마립간
관련 작품

4세기 5세기 관련 문서 6세기
5th Century / 5世紀 / 401년~500년
국가 서로마 제국 · 프랑크 왕국(메로베우스 왕조) · 훈족 · 동로마 제국 · 사산 왕조 페르시아 · 굽타 제국 · 유연 · 에프탈 · 위진남북조시대(동진 · 유송 · 남제 · 북위) · 제2차 북속시기 · 고구려 · 백제 · 가야 · 신라 · 야마토(고훈 시대)
사건 세계사
유송 건국 (420년) · 북위 수립 및 남북조 시대 개막 (439년) · 북위 효문제 즉위 (471년) · 서로마 제국 멸망 (476년) · 남제 건국 (479년) · 프랑크 왕국 건국 (481년)
한국사
장수왕 즉위 (413년) · 고구려 평양성 천도 (427년) · 나제동맹 체결 (433년) · 고구려의 한양 점령 (475년) · 부여 멸망 (494년) · 지증왕 즉위 (500년)
대표 인물 클로비스 1세 ·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 오도아케르 · 유유 · 효문제 · 부레쓰 덴노 · 광개토대왕 · 장수왕 · 개로왕 · 내물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지증왕
관련 작품

5세기 6세기 관련 문서 7세기
6th Century / 6世紀 / 501년~600년
국가 웨섹스 왕국 · 프랑크 왕국(메로베우스 왕조) · 아바르 · 동로마 제국 · 사산 왕조 페르시아 · 굽타 제국 · 돌궐 · 에프탈 · 위진남북조시대(남제 · 소량 · 남진 · 북위 · 동위 · 서위 · 북제 · 북주) · 수당시대(수나라) · 제2차 북속시기 · 전 리 왕조 · 고구려 · 백제 · 가야 · 신라 · 야마토(고훈 시대 · 아스카 시대)
사건 세계사
남량 건국 (502년) · 프랑크 왕국 분열 (511년) · 서력기원 등장 (525년)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동로마 황제로 즉위 (527년) · 반달 왕국 멸망 (534년) · 북위의 동서 분열 (535년) · 북제 건국 (550년) · 돌궐 성립 (551년) · 북주 건국 (557년) · 남진 건국 (557년) · 수나라 건국 (581년) · 수나라의 중국 통일 (589년)
한국사
지증왕의 왕 칭호 도입, 신라로 국명 변경 (503년) · 신라의 우산국 정벌 (512년) · 신라의 율령 반포 (520년) · 이차돈 순교 (527년) · 불국사 건립 (528년) · 신라의 금관가야 정복 (532년) · 백제의 사비 천도 (538년) · 나제동맹의 한강 공격 (551년) · 나제동맹 파기 (553년) · 백제 성왕 전사 (554년) · 대가야 멸망 (562년) · 진흥왕 순수비 건립 (568년) · 아차산 전투, 온달 전사 (590년) · 제1차 고구려-수 전쟁 (598년)
대표 인물 클로비스 1세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달마 · 진패선 · 양견 · 부레쓰 덴노 · 게이타이 덴노 · 평원왕 · 영양왕 · 무령왕 · 성왕 · 무왕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관련 작품

6세기 7세기 관련 문서 8세기
7th Century / 7世紀 / 601년~700년
국가 웨섹스 왕국 · 프랑크 왕국(메로베우스 왕조) · 베네치아 공화국 · 아바르 · 동로마 제국 · 정통 칼리파 시대 · 우마이야 왕조 · 사산 왕조 페르시아 · 돌궐 · 수당시대(수나라 · 당나라) · 전 리 왕조 · 제3차 북속시기 · 고구려 · 백제 · 신라 · 보덕국 · 발해 · 야마토(아스카 시대)
사건 세계사
수양제의 쿠데타 (604년) · 대운하 건설 개시 · 이슬람교 창시 (610년) · 당나라 건국 (618년) · 헤지라 (622년) · 현무문의 변 (626년) · 정관의 치 개막 (627년) · 일본의 견당사 파견 (630년) · 정통 칼리파 시대 개막 (632년) · 다이카 개신 (645년) · 사산 왕조 페르시아 멸망 (651년) · 우마이야 왕조 개막 (661년) · 천황 칭호 등장 (670년) · 수니파-시아파 분열 (680년) · 측천무후의 무주 건국 (690년)
한국사
제2~4차 고구려-수 전쟁 (612년~614년) · 살수대첩 (612년) · 천리장성 착공 (631년) · 연개소문 쿠데타 (641년) · 고구려-당 전쟁 (645년) · 안시성 전투 (645년) ·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645년) · 나당연합 결성 (650년) · 백제 멸망 (660년) · 백강 전투 (663년) · 고구려 멸망 (668년) · 나당전쟁 (671년) · 매소성 전투 (675년) · 기벌포 전투 (676년) · 9주 5소경 설치 (685년) · 발해 건국 (698년)
대표 인물 무함마드 · 아부 바크르 · 우마르 · 우스만 ·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문제(수) · 양제(수) · 고조(당) · 태종(당) · 고종(당) · 측천무후 · 현장 · 영류왕 · 보장왕 · 안승 · 무왕 · 의자왕 · 풍왕 · 선덕여왕 ·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대조영
관련 작품

각주

  1. 지도가지고 지랄하는 환뽕들아 고대사 특성상 영토의 경계가 모호한것은 알고말하자.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구려 영토는 이정도 크기가 맞는데 이정도 크기가 직접통치영역이고 그 위의 연해주나 만주지역은 물론 고구려 영역권은 맞는데 농사짓기도 좆같도 관리하기도 존나 추워서 딱히 먹어봤자 의미없는 땅이라서 걍 말갈족같은 유목 부락들이 듬성듬성 있던 지역이다. 짱깨들 역시 통일왕조시절에나 북방 오랑캐들 견제하려고 한번씩 정벌해줬지 만주지역은 딱히 조공만 재깍재깍 바치면 안건드렸다. 즉, 중앙집권적으로 중앙의 컨트롤을 따르느냐 안따르느냐에 따라 직접통치영역이 존재하는거임.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도 백제를 몇번이나 정벌했지만 영토로 편입하지 않고 걍 자치하도록 냅뒀다.
  2. 스카이데일리 성현식 - [1]
  3. 사실 이건 전설일 뿐 실제로 이세민이 여기에 간 적도 없을뿐더러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추격전을 벌인적도 없다. 짱깨들이 탈무드 일화를 연개소문이랑 적절히 쓰까묵은걸로 추정
  4. [2]
  5. [3]
  6. 실제로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 유적을 발굴해보니까 좁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군인들에게 조팝을 먹였던 것으로 보인다.
  7. 많은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콩의 원산지는 한국(정확히 말하자면 북한)이라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 콩의 원산지를 대략 한반도 북부와 만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중국 역사 기록에 콩이 고려대두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