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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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875년 일본 제국 해군 소속의 군선이던 운요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핑계로 한반도 영해에 얼쩡거리다가 조선 수군이 경고포격을 하자 그대로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여 민간인 학살과 약탈을 하고 도망친 사건
상세[편집]
1875년 운요호가 부산 앞바다에 처음 출현하였을때 부산 훈도였던 현석운이 부산에 있던 왜관을 방문하여 왜왔냐고 항의하자 운요호 함장이던 이노우에 요시카는 "조선 해안을 측량하고 조선과 통상수교를 하러 왔다"고 시치미를 뗐다.
그렇게 운요호는 남해안을 돌아 서해안으로 와서 인천 앞바다에 이르렀고 9월 20일 함장이던 이노우에를 포함한 일부 승조원들이 단정양강으로 강화도 초지진에 다다랐을때 단정을 발견한 조선 수군이 돌아가라고 경고 포격을 했고(물론 맞추지는 않았다) 이를 빌미로 단정에서 조선수군을 향해 소총사격을 하고 달아났다.
그 다음날인 9월 21일 운요호는 전날의 경고포격을 빌미로 함포사격을 해서 초지진을 파괴했고 그대로 강화도와 영종도에 상륙하여 민가를 방화하고 약탈하고 조선군 대포를 비롯한 무기들을 노획해서 달아났다.
이후 운요호는 다시 강화도로 돌아와서 조선 수군의 무력도발에 대해 항의하며 보상을 요구했다.
배경[편집]
쿠로후네 사건[편집]
1853년 천조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 동인도 전대가 군함 9척을 끌고 들어와서 아직 처녀였던 일본의 문호를 강제로 열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개항으로 갑작스럽게 서양 열강들과의 수교로 일본에는 끊임없이 은이 들어오게 되고[1]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고 임진왜란때부터 이어져오던 길고 긴 에도막부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어쨌든 이왕 개항했으니 이전부터 통신사를 보낸 것 처럼 조선이랑 외교관계를 맺으려 했는데 하필 그때 조선은 하응이가 집권하고 있었고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통상을 거부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보낸 외교관련 편지는 하응이에게 가기도 전에 씹혔고 이에 ㅂㄷㅂㄷ한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있었던 정한론이 널리 퍼지게 되고 결국 일본은 조선에게 포함 외교를 시전한다.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민비의 집권[편집]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으로 나라 경제를 씹창내고 가장 결정적으로 서원을 박살내서 윾교탈레반들의 눈 밖에 난 흥선대원군은 결국 최익현을 비롯한 수많은 사대부들의 상소로 결국 10년의 섭정에서 물러나게 되고 실각하게 된다.
덍복이가 아직 남아있던 흥선대원군 라인을 견제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 민비의 일가친척인 여흥 민씨였고 남아있던 흥선대원군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서는 흥선대원군이 밀어붙이던 쇄국정책을 박살낼 필요가 있었다. 근데 이미 코쟁이들에 대한 반감은 만백성에게 퍼져있었고 그나마 옛날부터 알고지냈던 일본은 괜찮겠지라는 심정으로 일본과 수교를 하게 된 것
조선 국방력의 약화[편집]
물론 당시 군함 한 척 없던 조선이지만 그래도 나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때 까지는 잘 버텼던 조선이지만
이때 대부분의 조선 수군의 병력이 박살이 나게 되고 특히 신미양요때 강화도의 요새는 박살이 나있던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으로 국가 경제가 박살났으니 복구시킬 돈도 없었는데다가 두번의 양요때 무기까지 죄다 파손되고 심지어 노획도 존나게 당했다.
그래서 고작 운요호 군함 한 척에 본진까지 싹 다 털린 것
요약[편집]
일본: 우리 근대화도 했고 막부도 쫒아내고 이제 천왕까지 모시는데 니네 조선이랑 관계 계속 맺고 싶음ㅇㅇ(물론 통상수교도)
조선: 이 쪽빠리 생퀴가 뭐라 지껄이는가 천황? 좆이나까샘ㅗ
일본: 어어 괘씸하거든요? (서양식 군함)맛 좀 보여야지...
조선: 와봐 생퀴야ㅋㅋ 우리 불란서랑 미국도 막음 너 정도야 껌이지
조선(조정): 우리 군비 국왕 밥 먹이느라 써서 부족한데 알아서 할 수 있지?
조선: 씨1발새끼야 어떻게 싸우라고
조선(조정) : 아몰랑 니네가 알아서 해
일본: 주먹을 꺼내기전에 빨리 문 여십쇼
(강화도 조약 체결)
결과[편집]
결국 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운지 4년만에 드디어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그것도 아주아주 불평등한 조건으로.
이렇게 수백년간 국제사회와 단절되어 비밀에 싸여있던 조선은 갑작스럽게 국제 무대로 내던져지게 되고 500년을 이어져오던 조선 왕조는 서서히 망조가 들기 시작하는데...
- ↑ 당시 일본은 은본위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