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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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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바이마르 공화국
Deutsches Reich/Weimarer Republik
기본 정보
건국일 1919년 8월 11일
멸망일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총리 임명),
1933년 2월 27일 (공식적 멸망)[1]
수도 베를린
국가 독일, 오스트프로이센 일부
대륙 유럽
면적 468,787km²
인구 62,411,000명(1925년)
인종 게르만 족
추가 정보
지도자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초대)
[수상] 필리프 샤이데만 (초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말대)
[수상] 프란츠 폰 파펜
아돌프 히틀러(말대)
언어 현대 독일어
종교 개신교,가톨릭

소개[편집]

인류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가졌던 국가

근데 히틀러가 다 말아쳐먹었다 ㅅㅂ

여튼 그 헌법이 수십년후 동방의 헬반도의 현행 6공화국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니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첨단 헌법이었는지를 알수 있다. 머륙법의 쌍두마차이자 본좌인 독궈인들 답게 스위스의 직접민주제, 미국의 머통령제, 영궈의 의원내각제, 독일의 지방자치제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그 덕분에 이를 악용한 나치에 의해 시원하게 망했다. 이를 바이마르 헌법의 자기파괴적 모순이라고 한다 카더라. 독일인들은 그 트라우마로 본 기본법을 제정할 때 바이마르 헌법에 있었던 요소들을 멀쩡한 것까지 포함해서 최대한 뺐다고 한다.(다만 그 후 헌법 개정을 통해 다시 포함시키기도 했다) 근데 헬반도에서는 반대로 이 헌법을 베꼈다.

1919년 부터 1933년까지 존속하였던 독일과 현재 폴란드 일부(오스트 프로이센) 에 존재하였던 공화국이다.

제2제국과 제3제국이 전쟁으로 패망했다면 바이마르 공화국은 끝끝내 바이마르 헌법 자체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합법적 선거로 집권한 나치에 의해 합법적 의회정치에 의해서 망했다. 단 알아둘것은 나치스가 독일국민들의 절대다수결과 압도적 지지율로 집권한것은 아니다. 나치스는 수권법 통과시키는 즉 바이마르체제가 종말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의회 단독과반은 못먹고 있었다(최대 45퍼정도 지지율 먹었다). 이때문에 수권법은 히틀러를 비록한 정치꾼들의 밀실 야합에 의한 것이었고 수권법 통과 이후에서야 나치가 나머지 여당세력들을 모조리 해산시키고 1당독재를 이룩한다.

이후 이에 대한 반성으로 법의 형식적 요건 뿐만 아니라 내용자체도 따지는 실질적 법치주의가 전후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민주국가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서독은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확립하였고 이때문에 바이마르 헌법보다 보수적인 헌법이란 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전후 4,50년대 벌써부터 나찌스와 공산당 잔당이 재건 음모를 꾸미는 판에 어쩔수가 없었다.

역사[편집]

11월 혁명으로 인한 탄생과 제1차 세계 대전 패배[편집]

독일 제국가톨릭 중앙당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 3당이 11월 혁명을 일으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이로 인해 독일은 제 1차 세계대전 패전하였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내게 되었다.

사실 여기에 내막이 있는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제2제국 말대 황제인 팔병신 빌헬름2세는 점차 권력을 잃고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였고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들과 달리 러시아와 함께 황제권이 강력한 축에 속하던 독일제국의 권력은 군부의 수장들이 맡게 되었던바. 1차대전을 종료하기 위해 군부는 강화협상도 떠맡게 되었는데 영불 연합국은 전범인 독일 군부 와 협상할수 없다 며 강짜를 부린것이다.

1918년 드디어 독일제국은 모든 전쟁수행 영량을 하얗게 불태우고 완전히 그지 깽깽이 모드로 들어가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었고 이것만은 막기 위해 정부에서 강화협상이 진행중이었다. 그걸 바보가 아닌이상 뻔히 아는데 아무짝에도 쓰잘대기 없는 출격명령을 해군장병들에게 하달한것이다. 즉 제대 말년병장인데 뜬금없이 영국왕 목따와라고 하면 누가 하고 싶겠는가? 결국 킬 군항의 수병들은 정치가 머국적이지 않다며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독일 11월 혁명이다. 이에 벙찐 황제가 하셨던 말씀이

(군인들의)명령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겠다던 깃발의 맹세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자 옆에 있던 군무대신의 말씀또한 걸작

폐하. 오늘날, 깃발의 맹세는 한낱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통일 막판까지 삐댓다는 남부의 바이에른 왕국의 비텔스바흐 왕조마저 쫓겨나자 다음날 퇴위했고 중립국인 네덜란드로 망명할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때 옆나라 벨기에와 달리 네덜란드는 독일이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중립국으로 양쪽과 무역하며 꿀을 빨았기 때문에 망명도 허용하고 연합국이 전범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쳐도 즐을 외쳤다.

결국 전쟁 최고 책임자인 빌헬름 2세는 나가리 되었고 남은것은 군부였는데 연합국이 군부 니들이랑 안놀아 즐! 을 쳤기 때문에 씁 어쩔수 없지! 라면서 민간인들인 사민당과 중앙당에게 공화국을 만들고 강화협상 책임을 떠넘기고 아몰랑을 쳤다.

그런주제에 어쩔수 없다한들 권력을 군부가 민간인들에게 내주었으므로 안그래도 군국주의 성향이 강한 프러시아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제국의 군부를 고대로 또 물려받은 바이마르 군부는 정치에 간섭하며 분탕을 쳐대며 바이마르 공화국 혼란을 키우는데 큰 축을 담당했다. 근데 이 군부(독일 국방군)는 그 천하의 히틀러 마저도 나치 독일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그 탐쿠르즈 나오는 영화인 발키리 작전(암살)사건 전까진 함부로 못 건드렸다.

이 때문에 아래에도 나오듯이 돈을 마구마구 찍어내는 막장정책을 저질러 인류역사상 헌법과 히틀러의 집권에 레드 카펫을 깔아준것과 함께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영원히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혼돈 파괴 망가[편집]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빨갱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면서 나라가 건국 초기부터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11월 혁명때부터 폭력혁명만은 안된다~~!! 라면서 공산당을 위시로한 극좌계와는 척을진 독일 사민당은 협상해야 되니까 나라 니꺼 하세요 라면서 던져준 독일 군부를 위시로 한 우익세력과 얼리를 맺고 극좌파 세력을 조져서 (이 와중에 로자 룩셈부르크도 우익 정치깡패들 한테 맞아죽었다) 공화국을 수립했다.[2] 이로서 사민당과 공산당은 같은 좌익이지만 가뜩이나 사이가 나쁜데 넘을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고 이로서 공화국 존속기간 내내 나치와 함께 공화국 부정세력의 쌍두마차로 급 부상했다.

이 와중에 독일에 지방정부에도 공산정부가 들어섰는데 그게 바로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이였다. 여담으로 이때 바이에른 평의회에 참가한 전역군인이 한명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돌프 히틀러 예비역 상병이었다... 그러나 위에 적었다 시피 좌익세력들은 사민당과 우익들에게 쳐맞고 버러우 하게 되었고 바이에른 은 우향우하여 공화국 최대의 수꼴지역으로 급부상한다. 그리고 그 태풍의 눈에 이번에는 우향우 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정작 당시 프러시아 군국주의의 심장인 프로이센 주와 수도 베를린은 좌익색깔이 강했고 그바람에 헌법이 안전한 바이마르란 동네에서 기초되었다. 극좌가 베를린과 프로이센에서 쳐맞고 버러우한 이후에는 사민당 텃밭이 되었지만 나치가 집권하면서...

돈내놔! 드리겠습니다! ?! 필요없어![편집]

어쨌건 우여곡절 끝에 나라는 세워졌으나 진짜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파리 강화회담 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조지기로 합의 하였다. 특히 청년인구 3분의 1이 갈려나가고 서부전선 대부분이 걸쳐있었던 나라인 프랑스는(벨기에는 전 국토가 전선이었지만 이 나란 작으니까 넘어가고, 여담으로 1차대전때는 독일 본토는 전쟁터도 아니었다.) 다시는 독일이 감히 프랑스에게 대들 꿈도 못꾸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다.

일단 석탄과 철광이 풍부한 보불전쟁때 뺏들어간 알자스 로렌을 도로 프랑스로 되찾아 왔고 라인란트에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였다. (+모젤란트) 그리고 1350억 마르크의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떠안겼다. 이로서 독일은 국토의 10퍼센트 인구의 15퍼센트를 상실하고 모든 해외식민지를 상실하였다.

근데 전쟁 끝나고 전선에서 돌아온 제대 군인들은 고대로 실업자가 되었고 마지막 1미리 까지 전쟁에 다 쥐어짜서 써버린 덕에 나라가 경제는 ㅄ이 었으므로 빚을 갚아주고 싶어도 못갚아 주었다. 그래서 정부는 짱구를 굴려서 돈이 없으면 돈을 찍어내면 대지! 라는 발상을 하여 돈을 마구마구 찍어내었고 이덕에 독일 국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되어 돈을 땔감으로 쓰고 똥딱는데 쓰고 돈다발로 애들 장난감 블록으로 쓰며 도배 벽지로도 썼다. 그리고 독일 경제는 좇망했다.

한편 돈을 안갚자 참을수가 없게된 프랑스와 독일제국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벨기에가 군머를 보내 석탄과 공업지대를 점령하자 공화국 정부는 총파업으로 맞써서 이들을 물러나게 하였고 독일 국민들의 반불 반연합국 감정에 불을 지폈다.

이 와중에 당시 영국 재무성에서 근무하던 케인즈는 전쟁배상금 부과 의 부당성을 비판하였고 그와 동시에 사표를 냈다. 이에 따라 배상금이 많이 탕감되거나 유예되었다. 이때 케인즈는 자기 저서에서 프랑스의 클레망소에게 당신은 한세대동안 독일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나라 수상인 영국의 로이드조지는 당신은 (유권자들 에 의해) 장님에 귀머거리 입니다 라고 비판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히틀러와 나치스가 집권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니 아이러니...

사실 베르사유 체제에도 불구하고 오헝과 터키가 걸레짝이 되고 제국 자체가 공중분해당해버린것과 달리 독일은 90퍼와 85퍼의 영토와 인구를 보존하고 있었다. 베르사유조약에 따르면 독일이 이 전쟁의 원흉이고 그래서 모든 책임을 진다고 명시되어있는데 이건 프랑스 입김이 들어간것이고 독일을 3분할 시키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1민족 1국가라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운 미국과 즈언통의 세력균형외교에 입각하여 영국에 의해 거부된다.

이유는 중부유럽에서 러시아-소련의 서진을 견제할 거대세력을 하나라도 남겨 두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영국은 전쟁전에 독일에 제일 많은 물건을 팔아먹고 있었으므로 단일시장 하나가 날아가는것도 탐탁치는 않았을 것이며 사실 1차대전 이전까지 영불은 고양이와 개사이로 독일이라는 개깡패때매 손을 잡은것에 불과했으므로 머륙에서 프랑스혼자 설치는꼴 못보겠다는 심뽀와 소련과 프랑스도 동시에 독일이 견제좀 해줬으면 하는 소망의 발로였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을 못살게구는 프랑스도 아니꼬왔고 소련막아줄 탱커가 약화되면 자기들도 손해이므로 미영의 주도하에 독일에대한 전후배상이 너무 가혹하다는 동정적 여론이 일었으며 전쟁으로 국력이 오링난 프랑스가 물주인 미국과 독일이 설칠때 제일먼저 달려와야할 동맹인 영국이 그렇다면 까라면 까는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미국의 도슨안을 따라 전쟁배상금을 줄여주고 차관이 뿌려지는 등 혼란했던 바이마르 공화국도 한시름 놓게 되었고 히틀러도 맥주홀 폭동에 실패해서 잡혀가서 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지는등 공화국에 짧은 봄날이 도래했다.

여담으로 이 독일의 채무는 2010년에 모두 완납했다.

몰락[편집]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려는 도중에 1929년 미국 월가 증시 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 을 직격으로 쳐맞고 독일경제는 완전 좆망하였고, 이는 결국 나치가 부상하게 되는 구실이 된다.

이유는 위에 나와있듯 도슨안에 따라 미국의 차관과 채무를 경제재건에 많이 얻어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과 별로 경제적 연결고리가 없던 소련은 같은기간 별 피해를 안입었다고. 물론 대기근(홀로도모르)으로 우크라이나 농민 2천만명이 갈려나갔는데 머공황 탓이라기 보다는 스탈린놈의 자영농 숙청과 중공업 정책탓이다. 소련은 당시 왕따라서 독일처럼 서방사회로 부터 차관을 대량으로 도입하거나 폴란드와 무역전쟁(갑질)을 벌여대던 독일과 달리 수출 실적도 거지였다. 그리고 농업생산 공황은 이미 머공황이전에 미국에서 터지고 있었다. 농산물을 가증스런 빨갱이 소련에 수출하지 않고 땅에 파뭍고 바다에 집어던지거나 썩혀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렸다.

한편 사실 나치당 본진인 바이에른 사법부를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나치에 호의적이었다. 이 덕에 맥주홀 폭동을 일으키고도 빵에서 1년도 안되서 나오게 되었다. 이 바람에 무쏠리니의 로마로의 진군을 흉내냈다 어맛 뜨거라! 하면서 크게 데인 히틀러는 폭력혁명을 포기하고 합법적인 선거전을 통해 집권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때 괴벨스를 얻게되었고 괴벨스의 천부적인 선전 선동능력에 힘입어, 씹망중인 독일경제탓에 넘쳐나는 실업자와 사회 불만세력들, 좌파의 득세에 겁먹은 기득권과 중산층들의 지지와 결집아래 갑툭튀 듣보잡인 히틀러와 나치는 순식간에 원내 제2정당 수준으로 부상하고 정치깡패 돌격대도 회원이 40만에 달할정도로 성장하였다.

반면 좌파들과 진퉁을 자처하는 정통 우파모두 히틀러라는 좇뉴비를 과소평가했다.

  • 공산당은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기먹던 공산주의자들이 사민당과 우파들의 연합공격속에 극적으로 살아남아 두눈 벌겋게 뜨고 살아있었기에 나치보다 사민당을 더욱 미워했고 적의 적은 친구라고 둘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사민당 정권 까기에서는 한마음 한뜻이었으며 초창기엔 돌격대와 공산당이 협력하여 파업을 돕기도 했다. 물론 이거때문에 극우파들이 나치에 밥맛이 떨어지자 히총통께서...
  • 한편 집권 사민당은 우리 잘난 독일 국민들이 나치따위를 찍어줄리가 없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이러고 있었다.
  • 중앙당군부를 비롯한 비나치 우익들은 히틀러 저 ㅄ은 우리손안에 입습죠 깔깔깔 거리는 오판까지 저지르게 된다. 즉 히틀러와 나치를 자신들이 통제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연정 파트너로서 집권에 이용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참고로 한웹 한정으로 후겐베르크가 히틀러의 급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건 오해다. 결정적으로 기여한건 없다. 이 소릴 들었다면 지옥에서 괴벨스가 서운해 할것이다.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극우 수꼴로 겹치는면은 많지만 서로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경쟁자 관계였다.

문제는 히총통의 야심은 연정? 그런거 없다로 한줄 요약이 가능했고(실재로 좌파인 공산당, 사민당은 물론이고 중도우파인 중앙당도 나치랑 연정은 불가능 했다) 실재로 연정문제를 놓고 몰래 협상하던 슈트라서는 나치당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나치한테 맞아죽었다.

이덕택에 1930년대 내내 바이마르 총선과 머선은 공화국 부정세력인 나치당공산당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치달았고, 독일국민들은 은근슬쩍 재수없는 매국노들인 바이마르 공화국과 외세의 강요로 도입한 민주주의를 누가 됐던 끝장내 주기를 바랬으며 나치당도 자금과 조직력 소모에 허덕여서 더이상 선거는 안된다는의식이 팽배했고 이는 독일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저 당시 독일은 의원 내각제+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이기 때문에 정치적 혼란이 극심한 편인데 계속되는 내각 불신임과 의회 해산과 군소정당 난립으로 총선이 잦아짐+내각 구성이 파행된 것이 원인 이었다.

자세히 설명하면 이미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0년 총선으로 이미 뇌사 상태였다. 이때 총리는 브뤼닝 이었지만 이 사람은 정상적인 의원내각제 형식으로 정치를 한게 아니다 이건 뒤에서 설명하겠다. 당시 브뤼닝은 가톨릭 중앙당이었지만, 가톨릭 중앙당은 총원 577석 중 68석 뿐이었다. 거기다 브뤼닝 본인도 전임 총리였던 사민당 출신 헤르만 뮐러[* 사실 뮐러는 해임직전 힌덴부르크한테 대통령 비상대권 시행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뮐러는 나치에 부상을 막기위해 사민당 의원들에게 브뤼닝 내각을 지지할것을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실각이후 1년후인 1931년 병사한다]가 대공황으로 실각하면서 힌덴부르크 권한으로 취임을 한것이었다. 뮐러가 나치를 막기위해 브뤼닝 내각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중앙당 사민당 의석으로는 과반을 넘지못했고 브뤼닝은 1932년까지 사실상 모든 법안을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처리한다. 이 시점에서 의회 기능이 마비가 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의회를 무시하고 지 ㅈ 대로 행동하던 브뤼닝과 중앙당+ 나치땜에 울며겨자먹기로 지지하던 사민당은 민주주의를 구한다는 명분 마저 잃어버린다. 거기다 독일 귀족이었던 융커까지 그를 극혐 했고 버틸수 없었던 브뤼닝은 32년에 5월에 프란츠 폰파펜 한테 총리직을 넘긴다(파펜도 브뤼닝처럼 비상대권으로 임명된 총리였다) 하지만 파펜은 브뤼닝보다 심각하게 무능했고 중앙당과 동의없이 총리직을 받아서 제명을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경제은 최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위에서 설명했지만 파펜을 지지하는 정당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황으로 노동자 임금을 깍는 법안을 통과 시키면서 나머지 우파 정당들도 표 땜에 지지를 하지 않았다. 결국 파펜은 히틀러한테 손을 내밀게 된다. 히틀러는 나치당이 파펜을 지지하는 대신 2년 임기가 남은 의회를 해산하고 재 선거 요청과 돌격대 활동 정지를 풀어 줄것을 요구 했다. 의회 해산을 그렇다 쳐도 돌격대 활동 정지는 중앙 정부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고 사민당이 먹고 있던 프로이센 주 정부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파펜을 이를 수락했고 때마침 프로이센 주 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대패하고 나치가 다수 의석을 먹는다.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나치당에 돌격대 공산당 붉은전사동맹과 무력충동이 계속 일어났고, 파펜은 이를 근거로 '프로이센 주는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 며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프로이센 각료들과 사민당의원 주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자기가 주지사와 주 경찰 경찰청장 직을 겸직 한다. 히틀러와 약속했던 재선거를 치뤘지만,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와 공산당이 원내 절반을 넘게 먹었으며 나치가 원내1당을 차지한다. 원내1당을 먹은 히틀러는 갑자기 파펜내각 지지를 취소 해버린다. 나치당은 공산당과 합심해서 내각 불신임을 발의해서 파펜을 내쫒는다(힌덴부르크가 지켜줄려했지만 실패했다) 힌덴부르크는 슐라이허를 비상대권으로 총리직에 임명하지만, 얘도 병신이었고 결국 힌덴부르크한테 경질당하고 80순 넘긴 노인네는 히틀러를 총리로 앉히게 된다


결국 독일국민들은 그토록 미워하는 유머인 색체가 강한 공산주의 대신 히틀러를 선택하고 말았다. 아이고...

그리고 원내의 다른 정당들은 히틀러와 나치를 과소평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우선 왠 정신병자가 독일 국회의사당을 방화했는데 이걸 공산당 짓으로 덮어씌워 공산당을 해산시켰다.

결국 히틀러는 이런저런 정치적 음모와 야합과 협상과 공갈협박 끝에 총리를 먹었고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이 시점에 사실상 바이마르 공화국은 멸망한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서거하자 대통령 직까지 겸직하게 되어 그 유명한 리겸 대령 총통이 되었다.

그리고 사민당, 중앙당, 나머지 우파 정당들 까지 모두 해산되고 나치스 1당 독재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래봤자 나치즘 특성상 지도자 원리 때매 당보단 히총통 1인 영도체제였지만.

여담으로 독일은 히틀러 사망후 다시 대통령은 되니츠제독에게, 총리는 괴벨스에게 나누어 승계되어 다시 쪼개지지만 이미 나라가 완전히 망한마당에?

인플레이션[편집]

그냥 인플레이션이 아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다. 이른바 천문학적인 수치를 뛰어넘는다는 경제학적인 수치를 보여주었다.

시바 감자 한 포대가 얼마나? 돈을 수레로 끌고 가져와야 겨우 산다. 빵 하나가 몇억 마르크나 했다.벽지?ㅅㅂ 걍 대충 돈으로 때워. 돈이 다른것보다 더 잘탄다

독일경제 개판됐다.수장이란놈은 뭐하는거냐?

ㄴ 인플레이션이 절정일때는 브뤼닝 슨상님이 경제 관리하셨는데 브뤼닝 슨상님은 (배상금탕감 목적으로) 인플레 어느정도 조장했다. 브뤼닝 센세 운지하고나서 나중에는 돈 안찍어봤는데 경기침체로 공화국 체제까지 운지 후 나치당 집권...


배경[편집]

일단 가치있는 화폐란 같은 천원짜리라도 빵 한개를 살때보다 두개를 살수 있을때가 더 가치있다고들 한다.

위에 역사에 써있듯이, 독일은 전쟁으로 모든 경제력을 쥐어짜버렸다. 본디 화폐란 것은 그 자체로는 똥딱는 휴지 그 이상도 이하의 가치도 없다. 화폐가 화폐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기능하기 위해선 정부가 이 액면가치를 보증해 줄때여야 그 진가가 발휘되는 거시다.(여기까진 고딩 사회책만 펴봐도 나오는 이야기고)

저 당시는 각국은 독일을 비롯하여 금태환을 통해서 정부가 액명가치를 보증해주는 금본위제를 체택하고 있었다. (오늘날엔 아니다) 왜냐? 사실 지폐는 중세와 근세에 이미 발명된것이었으나 각국 정부가 미친듯이 찍어내다가 인플레이션을 쳐맞고(사실 저 당시엔 인플레가 뭔지도 몰랐다!) 신용을 잃어버려 아무도 안쓰게 되면서 시중에서 자취를 감춘것이다. 그 와중에 스페인이 남미 식민지에서 은을 대량으로 뽑아내서 전세계에 유통시키자 걍 은을 교환가치로 써먹기 시작해서 기축통화가 되버린게 결정타였다.(이시기 일본이 은을 돈으로 쓰던버릇이 고대로 은행의 어원이되었다)

그러자 은, 금이 모자란 각국정부가 짱구를 굴려서(그리고 금은 덩어리는 시중에서 보관과 운반도 힘들고) 다시 돌아온 지폐였으나 이미한번 시중에서 신용0라서 퇴출당한물건을 다시 써먹기 위해선 담보를 걸어야했는데 그게 짐 당장은 없지만 나중에 생길 그 나라의 금을 건것이 근대지폐의 시작이다.(근데 그렇게 나중에 생길 금 생각하고 찍어낸 지폐는 결국 불태워지고 망했다고 한다.)

즉 금본위제하에선 1원이란 나중에 금1원짜리와 1:1교환이 가능함을 전제로하고 각국 통화량은 각국이 보유한 금의 양과 1:1로 연동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1차대전 패배로 경제는 좇☆망 했고 제국 정부도 좇★망 했으며 곧 대혼란에 빠졌는데 이걸 수습해야될 바이마르 정부는 화폐 교환가치를 보장해줄 담보인 금마저 연합국이 다 배상금으로 뺐어가서 거덜났으며 태환이 정지되었다. 가뜩이나 구 제국정부는 전비가 부족해? 그럼 돈 찍어!를 시전했고 전시물자를 찍어내던 공장들도 전쟁 끝나자 더이상 물건 찍을 필요도 이유도 없어지자 망했다. 즉 화폐가치는 바꿔줄 금은 바닥을 치는반면 시중에 막 찍어낸 돈들이 풀려서 가뜩이나 낮아져 있었는데 거기에 물자 부족이 덮친거시었다. 즉 돈은 넘치게 들고 있는데도 물건을 사지못하는 기이한 상황

기록들[편집]

  • 전후 3년간 물가가 1조배나 올랐다.
  • 한 미망인이 전쟁기간 동안 예금 60만 마르크를 예치한 채로 스위스로 갔었는데 돌아와보니 은행에서 소액계좌는 더이상 맡아줄수 없다며 역시 소액권 부족으로 100만마르크 한장을 편지로 부쳐 주기로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리 찾아도 봉투속에 돈을 찾을수 없었다. 대신 거기에 우체국 소인이 찍힌 우표가 백만마르크였다.
  •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열심이 일을해 저축했지만 동생은 술퍼마시는 백수였다. 근데 전후에 형이 번 돈은 휴지조각이 되었던 반면 동생이 술퍼마시고 차곡차곡 쌓아둔 술병을 팔아서 먹고 살았다고 한다.
  • 하루 숙박에 40만 마르크, 저녁 한 끼에 180만 마르크, 우유 한 통에 25만 마르크. 이게 당시 독일에서 물가가 싼 축에 드는 동네였다고 한다.
  • 물가가 가장 높았을 때는 레스토랑의 한끼 식사가 100~200억 마르크, 학교 구내식당에서도 저녁 한끼가 10억 마르크, 극장표가 3~4억 마르크였다.
  • 돈을 수레로 실어다 놓을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어도 벽지한장조차 사지 못해 그냥 돈으로 도배를 했다.
  • 방석을 살바에 그냥 돈을 깔고 앉는다.
  • 돈이 다발로 있는데도 땔감도 못구해서 그냥 돈을 태워쓴다.
  • 블록이 없어? 돈다발을 갖고 놀면 되지!
  • 절정일때인 1923년 10월 한달동안 물가는 300배가 올랐다
  • 역시 같은해에 100조마르크화를 발행했다
  • 이는 전쟁전 화폐가치의 백조분의 1수준까지 떨어진거다.
  • 농민들이 농산물의 판매대금으로 마르크화를 결제를 거부하자 식량부족사태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햇고 폭동까지 일어났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정치체제[편집]

이원집정부제 머통령제 공화국으로 국가원수는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머통령이었지만 정부수반은 의회간선으로 선출되는 총리였다. 전신인 독일제국처럼 양원제 국회(라이히스탁)가 입법부가 되었다. 평상시에는 일반적인 총리제 국가처럼 운영되었다.

그러나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의 헛점이자 문제점이 머였냐면 머통령 권한이 다른 총리제국가들과 달리 절라쏐다는데 있다. 뭐 위기극복을 위해 비상상황에 한해서만 머통령이 풀파워 권력을 가지고 그러치 않은 평시에는 총리가 다 해먹는다고 되어있긴 했지만 문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짧은 역사에서 그 평시란게 존나 짧았단게 문제였다. 쉬벌...

이를 황제적 머통령제라고 부른다. 이른바 선출하는 황제라는거. 힌덴부르크 옹도 그렇게 생각했다.(정확히는 대통령 출마를 고사하는 옹에게 측근들이 저런식으로 썰을 풀면서 설득했다나 뭐라나...) 어디까지나 옹 자신은 제정복고가 될때까지 임시로 황제대행을 하겠다는 의도였다는데...결국 힌덴부르크옹과 같은 프로이센왕당파나 빌헬름팔병신 황제의 바람과 달리 같은 극우보수파이지만 나치스가 제정복고엔 관심이 없었고 히틀러는 혈연승계엔 부정적이라서 실패했다.

결국 비상상황이란 이유로 강려크한 권한을 쥐게된 연로하신 힌덴부르크 머통령은 귀찮음+히틀러의 알랑방구에 넘어가 과반은 커녕 원내1당도 못먹은 나치스의 히틀러 상병신 따위에게 나라를 내어주고 말았다. 이것이 수권법이며 이로서 바이마르공화국은 멸망하고 독일역사상 최대의 흑역사이자 인류역사상 최악의 흑역사인 나치독일이 탄생한다.

여전했던 형식적 법치주의[편집]

독일제국과 별로 달라진게 없었고 이건또 후신인 나치독일로도 이어진다.

형식적 법치주의란 급식사회시간에선 대충 이렇게 배우는데, 아무리 그 법의 내용이 사악한 것일지라도 일단 국회를 통과해 재정되면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니며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이른바 악법도 법이다)

그러나 나치스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이후 나치스의 만행의 도구로 법이 전락하자 바이마르공화국 멸망과 나치스에 대한 반성으로 독일국민들이 이번엔 스스로 서방의 자유민주주의와 실질적법치주의를 독일법, 정치체계에 도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일연방은 헌법재판소와 헌법수호청(반헌법 사범들에 대한 수사, 정보기관)을 설치했고 방어적 민주주의이념을 창시했다.

ㄴ 실질적 법치주의는 악법 만들던 나치 때문에 실시한거고, 바이마르 공화국 좆망하는거보고 도입한건 방어적 민주주의다. 바이마르 시절에 문제됐던건 법이 모든 권리, 그러니까 공화국 폐지하자는 새끼들까지 보호하던거랑 그로인한 혼란을 방지할 수단이 없었다는거랑 대법관 새끼들이 우덜식 법해석을 했던거였다.[3]

지방자치제도[편집]

30년 전쟁 이래로 독일지방은 걸래쪼가리였던 관계로 2제국 때도 지방의 자치권이 매우강했다. 바이마르 헌법이 원래 지방자치 전통이 강한 독일제국에 역시 연방제이자 자치제도를 실시하는 스위스와 미국의 헌법을 참고하여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건 전신인 독일제국이 북독일연방에서 출발했고 연방은 주권국가들의 국가연합이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2제국 패망이후 성립된 공화국도 연방제를 유지했다.즉 독일제국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1920년대에 작게 쪼개져있던 여러 공국들을 하나로 합쳐 튀링겐주로 만들었다.

주권국가들이 전신이었던 만큼 각주는 주의회를 구성하고 주총리를 선출하며 미국의 주군대처럼 강력한 주경찰병력을 가지고있었다고 한다. 즉 경찰권은 각주가 가지고 있었지 중앙정부가 쥐고있지 않았던 것.

그런만큼 프로이센이 1제국에이어 여전히 공화국내에서도 면적, 인구, 경제력에서도 씹넘사다. 거진 오늘날 머한의 서울공화국, 수도권 집중현상을 떠올릴텐데 이것보다 훨씬 더해서 공화국 절반이 프로이센이란 한 주 소속이다. 근데 이건 독일3분의 2를 다 차지했던 프로이센 왕국이 그대로 제국내 왕국이었다가(국왕은 황제가 겸임한다)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또 그대로 주가 된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프로이센을 손에 쥐는자가 공화국을 차지하는 격이었고 실재로 사민당이 집권중일때는 프로이센을 먹고있었다. 이때문에 행정구역 개편(프로이센을 여러개의 주로 나누는것)이 제안되기도 했지만 당시 기득권인 사민당이었으니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프란츠 폰 파펜이란 왠 정치꾼이 나타나 프로이센 쿠데타를 일으켜 사민당 빨갱이들의 주정부 권한을 정지시키고 고스란히 나치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독일의 머부분이자 본체 그자체인 프로이센을 먹은 나치는 공화국 자체를 날름하게 된다. 훗날 파펜도 토사구팽 당했지만 그래도 히틀러에게 용서를 빌었고 그덕에 힛통이 측은했는지 죽이진 않고 해외대사로 전출시키는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했다.

이후 나치스는 주제를 폐지하여 지방자치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가우라는 신성로마제국 시절 행정구역을 설치했다.(한국으로 치면 현재도제 폐지하고 신라시대 9주 5소경으로 돌아가는거랑 비슷하다)

이 프로이센주 개편안은 나치독일패망이후 동프로이센이 폴란드에게 보상으로 넘어가고 서독은 절반남은 구 프로이센주지역은 해체하여 여러주로 쪼개고 동독은 나라가 작아졌기 때무에 주제를 폐지시켜 우리나라 도정도 되는 행정구역들로 나누어 설치했다가 동서독 통일이후에야 다시 주제가 부활하면서 완전히 마무리된다.

그런전차로 오늘날 독일에 프로이센주가 없고 그자리에 8개주와 우리나라 서울특별시처럼 주에서 분리된 베를린시가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편집]

자유주[편집]

  • 안할트
  • 바덴
  • 바이에른
  • 브라운슈바이크
  • 코브르크
  • 헤센
  • 리페
  • 메클린부르크-슈베린
  • 메클린부르크-스트렐리츠
  • 올덴부르크
  • 프로이센
  • 작센
  • 샴부르크-리페
  • 뷔템베르크
  • 바이덱-필라먼트
  • 튀링겐

도시주 혹은 자유시[편집]

  • 브레멘
  • 함부르크
  • 뤼베크

특수행정구역[편집]

  • 단치히 자유시(폴:그단스크,국제연맹 신탁통치령)
  • 라인란트(비무장지대)

별명의 유래[편집]

바이마르 공화국은 별명이다. 당시 로자룩셈부르크를 위시로한 빨갱이들과 그에 맞서는 우익들의 난장판인 베를린과 멀리 떨어진 안전한 바이마르 라는 동네에서 그 유명한 헌법이 기초되었고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별명이 더 유명해 졌다.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나치 독일이나 둘다 정식국호가 독일국(Deutsches Reich) 이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서 두 나라 모두 별명으로 더 많이 부른다.

참고로 나치스의 악몽때문에 라이히 라는 어감이 영 거시기 해져서 오늘날 통일독일의 정식국호는 독일 연방 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이다.

평가[편집]

11월 혁명을 무시해 버리고 연합국이 독일 점령해서 세운 공화국인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동독이랑 서독 얘기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이기고 있는 줄 알았던 독일인들은 휴전과 그에 이은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다 이긴 전쟁이었는데 조국을 적국에 팔아먹은 매국노 새끼들이 세운 괴뢰 국가라고 반발이 심했으며, 이걸 나치스가 아주 잘 이용해 먹었다.

실제로 1차대전의 승전국인 협상국의 좆집이나 마찬가지였고 공산당이나 나치당이나 이 점을 이용해 잘 선동하고 다녔다. 굳이 나치당이 대두 안했어도 공산당이던 프로이센 꼰대 군부건 독일인들 손에 협상국의 괴뢰정부는 무너질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독일인들은 민주주의를 협상국이 강요한 혐오스러운 무언가로 봤고 실제로 독일의 민주주의 주입과정은 까놓고 말하면 협상국의 집단강간으로 탄생한 그 누구도 원치않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나마 바이마르 체제는 집단당간까지만 당하고 피임은한거였는데 공화국 부정세력새끼들은 다 이긴걸 매국노들이 나라 갖다바쳐서 집단강간+질싸+임신당한거라고 선동하고 다녔고 이게 잘 먹혀서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바이마르 체제를 역겨워했다.

같이 보기[편집]

둘러보기[편집]

독일의 역사
국가 등장 연도 멸망 연도
독일 본토
게르마니아 기원전 481년
프랑크 왕국 481년 843년
동프랑크 왕국 843년 911년 또는 919년
독일 왕국 911년 또는 919년 1806년 8월 6일
신성로마제국 962년 1806년 8월 6일
라인 동맹 1806년 8월 6일 1815년 6월 8일
독일 연방 1815년 6월 8일 1866년 8월 24일
북독일 연방 1866년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
독일 기사단국 1230년 1525년
프로이센 공국 1525년 1701년 1월 18일
프로이센 왕국 1701년 1월 18일 1918년 11월 9일
통일 이후
독일 제국 1871년 1월 18일 1918년 11월 9일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 11월 9일 1933년 2월 27일
나치 독일 1933년 2월 27일 1945년 5월 2일
플렌스부르크 정부 1945년 5월 2일 1945년 5월 23일
현대
연합군 점령하 독일 1945년 5월 23일 1949년 10월 7일
독일 연방 공화국(통일 전) 1949년 5월 23일 1990년 10월 3일
독일 민주 공화국 1949년 10월 7일 1990년 10월 3일
독일 연방 공화국(통일 후) 1990년 10월 3일 현재

19세기 20세기 관련 문서 21세기
20th Century / 20世紀 / 1901년~2000년
국가
사건 세계사
한국사
대표 인물 히틀러
관련 작품

2015 개정 교육과정 세계사
4단원 근대 V. 제국주의와 두 차례 세계 대전 6단원
제국주의 식민지 · 민족주의 · 사회진화론 · 인종주의
대영제국 이집트 왕국(수에즈 운하) · 남아프리카 연방 · 종단 정책(파쇼다 사건) · 영국 동인도 회사 · 플라시 전투 · 영국령 버마 · 영국령 인도 제국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프랑스 제국 프랑스령 알제리 · 프랑스령 튀니지 ·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 횡단 정책(파쇼다 사건 · 모로코 사건) · 프랑스 동인도 회사 · 플라시 전투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청프전쟁)
독일 제국 독일령 동아프리카 ·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 독일령 카메룬 · 독일령 토고 · 모로코 사건 · 독일령 뉴기니
벨기에 콩고 독립국 · 레오폴드 2세
쿠로후네 사건 · 하와이 공화국 · 필리핀군도도민정청 · 미국-에스파냐 전쟁
네덜란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청의 근대화 아편전쟁 공행 · 삼각 무역 · 임칙서 · 아편 · 난징 조약 · 최혜국 대우 · 영사 재판권 · 톈진 조약 · 베이징 조약
태평천국 운동 홍수전 · 상제회 · 천조전무제도 · 한인 의용군
양무운동 증국번 · 이홍장 · 중체서용 · 금릉 기기국 · 청일전쟁
변법자강운동 청일전쟁(시모노세키 조약) · 캉유웨이 · 량치차오 · 무술정변
의화단 운동 백련교 · 의화단 · 신축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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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배경 라인란트 재무장 · 스페인 내전(프란시스코 프랑코 · 프랑코 정권) · 방공 협정 · 오스트리아 병합 · 주데텐란트 점령 · 독소 불가침 조약 · 대동아공영권 · 추축국(나치 독일 · 이탈리아 왕국 · 일본 제국) · 연합국(대영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자유 프랑스->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 중화민국 · 소련 · 미국)
전개 1939년: 폴란드 침공 · 영국 프랑스의 선전포고)
1940년: 노르웨이 침공 · 프랑스 침공(샤를 드 골 · 자유 프랑스 · 비시 프랑스 · 프랑스 군정청 · 레지스탕스) · 그리스 침공
1941년: 소련 침공->독소전쟁 ·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1942년: 미드웨이 해전 ·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카이로 회담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1945년: 얄타 회담 · 독일 항복 · 포츠담 회담 · 일본의 무조건 항복
전후 처리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 극동국제군사재판 · 독일 분할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유엔(대서양 헌장 · 샌프란시스코 회의 · 안전 보장 이사회 · 상임이사국 · 유엔군)
  1. 나치 독일이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
  2. 스파르타쿠스 연맹 봉기 문서 참조
  3. 똑같은 테러라도 극우파가 저지른거면 '애국심'을 봐서 형을 경감해줬다. 히틀러는 폭동 일으켰는데도 반년인가 살고 나옴ㅋ. 형식적 법치주의라도 제대로 돌아갔으면 히틀러는 정계복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