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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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영조의 둘째 아들이다. 자기 형은 태어나기 전에 죽어서 태어난지 1년 만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자가 역모를 꾀한다고 나경언이 꼰질러서 영조가 처음에는 자결하라고 했다. 자결안해서 영조가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죽게했다. 죽고 나서 얼마 안되서 영조가 이 세자의 이름을 사도세자라고 했다. 후에 정조가 사도세자→장헌세자로 추존하고 고종이 장조로 추존한다. 사도 영화도 같이 참조하자.
시발 문서마다 강제개행하는 새끼 제발 좀 뒤져라.
생각할 사 슬플 도 자를 써서 사도세자라 하라.
원래부터 좀 유약한 면은 있었으나 그래도 나름 똑똑하고 할거 다 할 줄 아는 왕자였다.
그러나 청소년기부터 헬조선 군주 특유의 유교탈레반식 꼬투리 잡기와 갈굼을 당한 끝에 끝내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만다.
다만 사도세자가 당한 갈굼은 헬조선시대 유교탈레반 입장에서 봐도 도를 훨씬 넘은 수준이여서 옆에 있던 신하들과 대왕대비인 인원왕후가 보다못해 세자를 너무 못살게 군다고 영조한테 잔소리를 했을 정도다. 근데 그렇게 말하고도 계속 지이랄했다. 특히 헬좆선 윾교탈레반식으로 교육한다기보다도 그냥 좀 열받으면 세자 패고 갈구는 수준이였다. 그러니 대신들이랑 대왕대비까지 잔소리를 하지;
내리갈굼[편집]
이때 영조가 어떻게 얘를 갈궜는지 보면
- 아무거나 질문한 뒤 되도않는 말꼬투리 잡아 갈구기.
- 아들이 문안인사 올때마다 옷차림 갖고 개갈굼.
- 안 끼어들테니 대리청정 해봐라 해놓고 5분도 못 참고 끼어들어 (모든 문무백관 앞에서) 갈구기.
- 세자가 눈병 걸려서 이를 스승에게 얘기하자 이 새끼가 공부 안 하려고 꾀병 부린다며 불러다 갈구기
- 영조는 평소에 사특한 말(듣기에 좋지 않은 말)을 들으면 귀를 씻는 버릇이 있었는데 사도세자가 마음에 차지 않는 발언을 하면 바로 앞에서 귀씻기
- 비가오나 눈이오나 선위파동 일으키며 " 크흠 나 이 자리에 욕심 없음 크흠크흠! " 하며 돌바닥에서 열흘동안 석고대죄 시키며 갈구기
ㄴ참고로 이때 18살이였다. 하필 한겨울에 홍역이 돌아 사도세자를 포함한 왕족 몇몇이 홍역에 걸렸는데(당시 홍역은 위험한 병이였다) 홍역에 걸린 상태에서 석고대죄를 3일 동안 했다. 퍄퍄 ㄴ이후 영조에게 같이 미움받던 누이인 화엽옹주가 홍역으로 사망하자 2주뒤에 또 선위파동을 일으켜 10일 동안 석고대죄 추가됐다.
- 대리청정 좆도 못 한다고 겁나 갈구면서 석고대죄 또 시키기
ㄴ 웃긴게 말이 대리청정이지 세자가 뭔가 하려고하면 너 왜 나랑 상의 안하고 내가 신중히 결정한걸 바꾸냐며 혼냈다고 결국 영조가 뒤에서 시키는대로 하거나 아뢰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해놓고 가관인게 아뢰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면 넌 그거 하나 못하냐고 말하며 갈궜다.
- 더 가관인게 시를 읊을터이니 다 읊기전에 울면 대리청정 교지를 거둘터이니 광광우럭따 하여라하다가 너 진심을 다해서 울지 않았어 빼액! 이러거나
석고대죄가 적극적이지 않아! 빼액 거리며 화내거나 치매기가 있는지 너 여기서 뭐하냐 빼액! 거렸다고 덕분에 사도세자는 광광울다가 머리에 피가나도록 땅에 찧는 등 별 생쑈를 다 해야했다. 그것도 한 겨울에 10일 동안이나!
- 세자의 생일날 불러놓고 신하들 앞에서 갈구기(심지어 연례행사였고 신하들보고도 세자 욕보라고 시켰다.)
- 했던 질문 또 하고 대답이 그대로면 반성 안 했다고 갈구고 다른 대답을 하면 구라 친다고 갈구기
- 친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몸져눕자 문병을 온 세자에게 공부도 안 하고 감히 어딜 왔냐며 갈구기.
- 날씨가 안좋으면 세자가 부덕해서 그렇다면서 갈구기.
- 술 입에도 안댔는데 마셨다며 갈구기.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술을 왜 마셨냐고 호통치자 거짓으로 마셨다며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보다못한 유모가 술 잡숫는단 말씀이 원통하니 술냄새가 나는지 맡아보십시요. 라고 영조 앞에 항변했다. 세자가 내가 먹었다면 먹은것이지 라며 빨리 수습하려고 꾸짖자 영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또 꼬투리 삼아서 어른 앞에선 견마에게도 꾸짖지 아니하거늘 이라며 혼냈다고 하필 이게 후술할 낙선당 화재사건이랑 동시에 이루어졌다.)
- 저지르지도 않은 사고를 쳤다고 우기며 거짓 자백 받아놓고 갈구기
- 신하들에게 세자를 갈구라고 시킴
(하필 이때 신하들에게 물러나라고 호통을 치고 신하들이 물러나다가 촛대가 넘어져 낙선당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그것 가지고 또 세자탓이라고 분노했다.)
- 친여동생이랑 같은 방에서 웃고 이야기했다고 갈구기.
- 시 내용가지고 꼬투리 잡기
시에 호랑이가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라는 글귀를 가지고 겁나 갈궜다.
사도세자는 이걸 14년동안 당했다.
칭찬이 없었던건 아니다. 자식인데 어찌 칭찬을 안하겠는가? 문제는 칭찬을 10번하든 100번하든 갈구는게 고차원적으로 혹독해서 돌아버릴 지겅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작 이 갈굼은 옛날에 뒀던 효장세자에겐 안했던 게 함정.
이러니 정신이 무너지는게 당연할 터. 얼마나 영조의 갈굼이 심했냐면 서로 앙숙인 노론과 소론 모두 한마음으로 세자를 동정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당파싸움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 때 신하들은 당파불문하고 사도세자의 편을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영조가 사도세자와 마찰을 빚던 때에 영조는 50이 넘어가던 시기인데 조선 시대에 50이면 언제 갑자기 임종할지 모를 나이였고 사도세자는 영조의 유일한 아들이라 영조가 사망하면 왕위에 오를 사람인데 생각이 있으면 누가 모함을 하겠냐? 오히려 세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실제로 실록에 따르면 자살소동 일으키거나 (그것도 3차례나) 의대증 외에 정신질환을 겪었는데 결국 일이 터졌다.
바로 옷입는걸 돕던 세자의 후궁인 경빈 박씨도 때려 죽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녀와 세자의 아들인 은전군은 정조대에 자기도 모르게 역적들이 보위에 올릴 인물로 선정되다가 역모 세력이 뽀록나서 정조가 덮어주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집단 반발로 사약을 내리는데 억울하고 원통하다며 발악하다가 사약 드링킹을 한다. 이것 또한 엄히 꾸짖었는데 우물에서 자결소동을 일으킬 정도로 총애하며 아끼더니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느냐며 크게 노했다.
근데 잘보면 영조의 책임도 크다.
덤으로 영조가 온다하면 창문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도망갈만 했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면 너도 훌륭한 헬조선의 일원이 됐다는 뜻이다. 축하한다.
결국 이렇게 아버지한테 존나 시달리다 궁밖으로 뛰쳐나가 기생끼고 여승을 부르고 놀러다니다 결국 궁녀들과 내시들을 죽이고 그 뒤에도 백명 단위의 학살극을 벌이게 된다. 또 상인에게 돈을 빌리는데 1년 후에 영조가 이런 비행을 나경언의 고발로 알게 되는데 상인에게 빌려준 돈을 대신 물어준다. 하필 액수가 크고 아름다운터라 안그래도 열거된 비행들 때문에 불난 영조에게 기름을 콸콸 쏟은 꼴이 되어 결국 폭발한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었다.
뒤주에 가두기 전에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 장선왕후가 꿈에서 말해줬다고 빼액거린 다음 이어서 세자의 생모인 영빈이 세자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하였다며 자결하라 명하다가 뒤주에 가둔다. 가관인게 생전엔 남처럼 취급하여 장례식 때도 영조가 쌩까던 장선왕후다.(여담으로 이날 영조는 화완옹주의 남편 즉 사위의 장례식에 갔다.)
그리고 세자가 죽은 이후 영조는 손자 산(정조)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비록 아들을 죄인 취급했지만, 손자들까지 연좌시키고 싶진 않은듯. 아니 오히려 손자들은 존나게 이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손자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사도세자가 애 낳기 전에 갈굼 못 참아서 자살했다면 그 이후는 또 방계로 후손 찾느라고 시간 허비했을 것이다.
이렇게 미쳐버린 이유가 전부 영조 때문이라 동정이 안 가는건 아닌데 그렇다고 사람들 죽이고 다닌게 무마되는건 아니다. 유영철이나 정남규가 어렸을때 아버지한테 학대받으며 자랐다고 그들의 범죄행각까지 옹호해선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원인이야 당연히 영조 새끼가 원흉이지만 어쨌든 이 시점의 사도세자는 아버지가 있든 없든 이미 완전 미친 싸이코 새끼였다. 절대로 왕위에 올라선 안 되었음. 만약 이 또라이 새끼가 죽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판 킬링필드가 펼쳐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도 미쳐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불행했던데다 그 불행을 피할 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동정표를 많이 받는 편이다.
근데 아들 정조가 아빠가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둥 띄워주는건 이해해도 노론메이슨 사관 가진 인간들이 사극등으로 띄워주는건 당췌... 불쌍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능력까지 붙여서 빨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좋은 왕이 될수도 있었다. 만약 영조가 어렸을때부터 갈구지 않고 좋은 교육환경에서 자라났다면 적어도 미치지는 않고 평타는 치는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얘 친아들이 지능으로는 희대의 먼치킨 정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잠재력 하나는 진짜 쩌는 인간이었는데... 애비가 병신 만들어서 그렇지.
그 외에도 사도세자는 정조 낳기 전에 먼저 의소라는 아들을 둔 적 있었다(세자가 15살일 때). 헌데 안타깝게도 2살인 1752년에 죽었다(1750년생). 그리고 이후 정조가 태어난 것.
참 이런 걸 보면 경종에게 그렇게 개같이 갈구던 지 애비 버릇을 그대로 물려받은 영조가 대단하다.
당파[편집]
당시에는 남인, 북인, 소론 등의 여러 당파 들이 대립되던 시기였다. 영조는 이러한 당파 싸움을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고 당파에 관계 없이 능력이 되면 벼슬을 주거나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남인, 북인, 소론이 앞세워 권력을 누리려 하자, 노론은 사도세자와 영조를 대립시키기 위해 사도세자가 한 일들을 일일이 왕비에게 꼰질러서 일이 커지게 만든 것이었다. 노론은 다른 당파들과 친한 사도세자가 왕이되면 자기들 다 좆되는걸 알고 그랬던것. 영조는 그때 마다 내리갈굼을 하고 꼰대짓을 존나게 했다. 이때는 1749년 부터 1761년 사이의 일들로, 1749년에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믿고 있던 사이였는지라 대리청정도 시켜주고 했다.
이후 1761년에는 노론이 사도세자가 평안도에 몰래 가서 군사를 모았다는 소문을 만들었다. 노론은 이걸 구실로 삼아 역모를 꾀한다고 하고 영조에게 고자질 해서 자신의 탕평책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딥빡한 영조가 결국 세자를 1762년 여름에 뒤주에 넣고 죽음에 몰아넣게 한 것이다. 물론 이후로는 영조가 수 없이 울었다곤 하지만 탕평책에 어긋난다 했던 것은 세자가 각 당파마다 공평하지 않게 생각했다고 했던 것.
이후에도 영조가 사도를 죽이게 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그냥 미워서.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었다는 이유로 신하들한테 많이 따끼고 살았는데 영조는 이후 자신의 아들을 왕비의 몸에서 태어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자는 후궁에서 난 몸이라 이러한 이유가 사도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이유도 있다.
두번째는 쫄아서.
영조는 어렸을적 부터 왕위에 집권하기 전 까지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는 숙종때 일로, 당시 노론이 당시에 세자였던 경종을 암살하고자 했던 일을 목호룡이란 노론 신하가 경종한테 고자질 했다. 이후 노론의 세력은 주요 대신들이 죽어서 약화되고, 소론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소론은 이후에 영조(당시 연잉군)가 이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선 영조의 변명으로 어떻게든 의심을 풀 수 있었다. 의심을 풀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숙종이 당시 아들이 경종, 영조 밖에 없었고 만일 이 일을 구실로 영조가 죽게 되면 숙종의 대를 이어 가는 것을 긋는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 이후 경종이 죽자, 1721년 세제가 되고 왕위에 집권하게 된다. 이러했던 영조가 자신을 어느 당파가 몰아내고 왕을 빼앗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도 세자가 쿠데타 일으킨다는 걸 생각하고 쫄아서 죽여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근데 결정적인 이유는 살인마라서다.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를 어떻게 왕좌에 앉히냐?
영화 사도[편집]
역사상식이 부족한 노답을들 위해 스피드왜건짓을 하자면 영화 '사도'에서 유아인이 맡은역으로 아버지역을 맡은 송강호는 영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사람들조차 사도세자로 기억한다.
아니 시발 읍읍 틀이 뭐 이렇게 많아?
애미뒤진 읍읍충의 뇌절 지웠다. 어거지로 넣지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