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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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가 불쌍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건국 200년 기념으로 조선에 군대 보내서 축하해준 사건.
1592년에 섬에서 탈출한 원숭이들이 반도를 넘어 대륙의 많은 중국인들을 착하게 해주려 시도한 사건. 중세판 혹성탈출.
정확히는 등신같은 개싸가지 원숭이가 땅덩어리가 드럽게 큰 머륙을 치려고 좆센한테 길을 내주라고 했는데 반도의 선좆이 쌍엿을 날려서 ㅂㄷㅂㄷ한 개싸가지 원숭이가 침략을 한 전쟁이다 카더라
생쥐 머가리에 원숭이 몸통을 달고 있는 혼종 한 마리가 지 욕심이 극에 달한 걸 참지 못해서 일본을 다 쳐먹고도 만족하지 못해 조선까지 또 쳐먹으려고 발악한 개수작이다.
tip)1본놈이 5면 92(구둣)발로 차버려라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약 7년간 좆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히키코모리, 싸이코, 노망난 원숭이 셋이서 만드는 장대한 드라마. 그리고 셋 다 망했다.
단 전반기 임진왜란 2년, 후반기 정유재란 2년으로 중간에 평화협정을 위한 휴전기 3년으로 실질적인 전쟁 기간은 4년이다.
원숭이섬에서 몰려나온 유인원들이 좆선반도를 대부분 점령했으나 짜장면의 참전으로 기세가 꺾이고 남부 지방에서 장기간 농성하다가 원숭이섬으로 철수했다.
조선의 몰락을 초래한 전쟁이다. 기괴하게도 불교는 승병 활동 때문에 취급이 좋아졌다만...
어느 씨밸럼이 정유재란 등 갈아버렸냐.
개요[편집]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난. 이 전쟁의 승리는 분명히 조선과 명이 맞다. 전쟁의 결과 유무는 누가 더 이득봤느냐가 아닌, 침략한 쪽의 목표가 성공했냐 실패했느냐에 따라 갈리는 게 맞고 일본은 실패했으니 당연히 그걸 막아낸 조선(+명나라)가 맞다. 미국을 막아낸 베트남이 승전국이듯이. 다만 실질적인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면 사실상 일본의 승리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인 아닌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술적 측면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고 명군 또한 보급 문제 등으로 일본군과의 답보 상태가 지속되었고 일본군의 철수도 패퇴가 아닌 일본 내의 정치 지형 변화로 인한 전력 온존을 위함이었기에 전술적으로 따지면 일본군이 패배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리고 초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은 둘째치더라도 일본은 여력을 가지고 물러나 손해를 최소화한 측면이 분명 존재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후 정권을 그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주면서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이는 일본의 내부적 사정에 가깝고 오히려 일본은 전란이 끝난 지 단 2년 만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벌이거나 임진왜란의 주축을 맡았던 사쓰마 번이 단독으로 류큐 왕국을 털어 복속시키는 등 전쟁 피해는커녕 엄청난 국력 팽창을 과시하고 대외적으로 일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특히 더 중요한 물질적 이득 도 있는데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기도 했고 그리고 이들 포로 중에는 이삼평과 심수관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의 도자기 공업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들 도자기 장인들은 임진왜란 직후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고 중국의 대외 무역이 일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시기적 배경과 함께 일본이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도자기는 대체제를 찾던 유럽 및 아라비아 상인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일본은 은 생산량 폭증 및 제련 기술의 향상으로 넘쳐나는 은을 소비할 무역 창구 확보를 절실히 노렸는데, 이후 청과의 직접 무역은 어려웠으나 조선을 통한 중계 무역을 통해 일정부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렇듯 외부에 존재감을 과시하고 무역을 통해 실리까지 확보하는 동시에 전성기를 열어 차후 메이지 유신 및 개화까지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얻은 이득은 어마무시하다. 또한 조선인 김여철이 우키타 히데이에에 의해 납치되어 와키타 나오카타(脇田直賢)라는 이름을 얻고 이후 마에다 가문의 가장 든든한 가신이 되었다.
한마디로 승리는 조선이 한 게 팩트지만 이득은 일본이 훨씬 크게 본 전쟁이다.
조선의 사정[편집]
동서붕당 본격 진영논리 & 말꼬리잡기 정쟁의 시대. 유명한 붕당 원로가 거의다 이시대 인물이다
진관제를 대체한 제승방략의 헛점
- 뭔소리야 제승방략이 전력 집중시켜서 적군 때려잡자는 건데 제승방략이니까 그나마 신립이 있는 군대 없는 군대 모아서 맞다이라도 깠지 진관제였으면 진작에 각개격파당해서 선조 잡혔겠지 고당전쟁에서 고구려가 왜 망했는지 모르냐
- ㄴ니 논리대로라면 전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제1보병사단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키고 나머지 부대는 죄다 동원사단으로 개편하자. ㅇㅇ, 실제로 해 봐. 어떻게 되나. 게다가 니 생각과는 반대로 제승방략이니까 동래부터 한양까지 싹 빈집이 되어 송상현이 쓰러진 뒤부터 신립이 출동할 때까지 계속 빈집털이를 당했잖아.
ㄴ3차 고당전쟁 제대로 모르나보네. 신성탈환 하려고 고구려가 20만 일으켜서 당군과 금산 부근에서 맞다이까다가 여기서 패퇴하고 부여성과 북부 땅 당에 넘어가고 이후부터 남은 고구려 병력 분산배치로 당군 방어해서 각개격파당했다.
ㄴ그건 군사제도 문제가 아님. 애초에 당시 고구려 상태가 연개소문 아들들끼리 치고 박느라 사분오열 되어 있었고 사기도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군사제도로 뭘 선택했든 전황을 뒤집을 순 없었음. 상대도 좆본군따위완 비교를 불허하는 당시 아시아 최강의 당나라 군대였고. 진관제였으면 진관제대로 박살이 났을걸.
ㄴ 3차 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 자식새끼들이 힘을 합쳤으면 그런 꼴 안났어! 연남생 새끼가 다른 형제들과 반목해서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수도가 2개였던 거 몰라? 국내성과 평양성. 근데 연남생은 지가 수도로 삼은 국내성을 당나라한테 줘버렸고 그게 원인이 되어 고구려가 멸망했을 뿐이다.
제승방략은 개좆병신 맞다. 왜냐 하면 어디서든 병력이 조금이라도 주둔해야 병력을 모으기 쉬운데 씨발 허허벌판에서 병력 모으려고 해 봐 되냐? 게다가 병력을 한쪽에 몰빵시키면 적군이 바보냐? 거기 빼고 나머지 지역을 노리지! 21이 상주에서 도망친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21 새끼가 똥별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고...
특히 조선에 대해서 잘못 알려진점은 200년동의 평화라는 식으로 기존에 조선의 군사적 활동이 아에 없었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사실은 임진왜란전에 선조는 이미 니탕개의 난이라는 여진족 3만명규모의 대규모 난을 막은적이 있으며, 조선은 툭하면 야인여진등의 여진족의 일부를 계속 정벌하는 등 일정시기마다 북방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의 진짜 문제는 임진왜란 이전에 정신분열증을 격고있던 선조가 기축옥사를 벌이면서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은 수천명에 달하는 조선의 관리들을 때몰살시키면서 니탕개의 난등에서 행정실무를 보던 동인이 쓸려나가면서 군사행정등에 공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제대로된 행정체제를 보여주지 못한 것과 큰 연관이 있다.
심지어 반란을 획책했다는 정여립은 지금으로서 진짜 반란을 일으켰는지 의심이 드는 것은 물론 왜선 18척에 달하는 왜구가 쳐들어 왔을때 자신이 조직한 향토예비군도 겸하던 지방조직인 대동계를 이끌고 왜구와 싸운적도 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즉 임진왜란에서 선조가 자기 자리보전하느라 스스로 팔다리를 잘랐다가 전쟁 준비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봐야한다.
ㄴ 특히나 임진왜란에서 활약했던 김시민이나 이순신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군비확충을 위해 건의했지만 오히려 파직당하는 꼴을 당하고 이후의 전쟁대비는 자급자족 수준으로 했다는 점이다. 또한 패전의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돌리는데에는 도가 터서 런닝맨 전문가였던 이일은 신립과 함께 조선 최고의 장수로 평가되었고 원균같은 똥별들이 임진왜란때 활약하게 된다.
동인은 전쟁가능성이 있으니 제대로 준비하자고 했지만 선조가 골몰한 것은 기축옥사에서 누구를 또 죽여버릴까였다.
기축옥사가 종료된 때는 1591년으로 바로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사실상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기축옥사가 중지되었지 임진왜란 일어나지 않았다면 선조는 계속해서 자신의 신하들이나 처형 학살하는 기축옥사를 계속했을 것이다.
그리고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동인이 이 기축옥사로 쓸려나가던 상황이었던만큼 사실상 제대로된 행정체계를 통한 임진왜란 준비는 안되었다고 봐야한다.
ㄴ조선도 좆본의 침략가능성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했었고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던 상태였다.(수상하다 수상하다 해서 통신사 보내봤는데 이색기들 뭔가 심상치는 않은듯 ㅇㅇ수준)
실록에 보면 영내의 대규모 축성과 성곽보수, 군비증강, 병력 확보등에 의한 과중한 요역과 군역으로 인한 대규모 민심이반에 대해 보고하는 경상감사의 장계가 수시로 한양으로 날아들었고 비변사에서도 수시로 공론화 되었다.(다만 조선이 침략의 수준을 오판한건 사실인게 수천단위에서 기껏해야 1만 단위였던 기존의 왜변보다야 대규모 도발일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게 20만 단위의 대규모 침략이 떨어질지는 예상하지 못한것뿐)
조선은 당시 주요 전장으로 고려되던 경상도 지역에 경상감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6~7만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병력들이 수사 박홍이나 원균, 좌병사 이각이나 우병사 조대곤같이 도망쳐버리나 한양에서 파견한 경장인 순변사 이일이 도착하기 전에 대구에 모였다가 흩어져버린 2만의 병력등 제승방략 자체의 허점으로 인해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했을 뿐
물론 이후에는 이러한 문제점이 경상도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된 방어사 성응길과 조경, 조방장 유극량, 변기같은 경장들이 지휘해야할 병력을 인수받지 못해 한줌의 병력만을 보유한채로 일본군에 속수무책으로 조령까지 밀려나게되는 원인이 된다.
오판[편집]
조선은 오래전부터 일본이 섬나라이므로, 전통적으로 수군은 강력하고 육군은 약할 것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조선은 일본이 1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막강한 육군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 섬오랑캐는 수전에 능숙한 반면 육전에 서툴고, 우리나라는 육전에 장점이 있어도 수전에는 단점이 있다. 적들이 비록 수전을 잘하지만 우리가 전함으로 맞싸우지 않고 지는 체하며 그들을 육지에 끌어들인 다음 기병으로 공격하면 거의 물리칠 수 있다.
<세조실록> |
” |
ㄴ 이걸 원균같은 새끼가 철썩같이 믿고 배와 병장기를 수장시켜버렸다는 점에서 헬조선의 스타트를 끊은 세조의 선구적 병신성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의 적 전력에 대한 잘못된 판단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후인 4월 14일에 선조가 내린 수군해산명령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결국 이러한 오판은 조선군이 전쟁 초기에 순식간에 박살나는 데에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여담으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위와같은 선조의 수군해산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덕분에 조선 수군은 호남에서나마 온전히 그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1].
왜냐면 이전에 있던 삼포왜란 을묘왜변에서 조선수군은 개 참피같이 패했기때문이다. 물론 이 점때문에 판옥선이 만들어졌긴했는데 당시에는 판옥선의 위력을 잘 몰랐다.
반면 조선육군은 왜군들을 철저하게박살냈기때문에 조정에서는 일본군은 육군보다 수군이 더강하다고 생각했던것
일본의 사정[편집]
전국시대를 정리한 승자 도요토미는 자수성가형 지도자라 자신의 출신성분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해소해 권력의 신성성을 획득하려면 아주아주 큰 공적이 필요했다. 또한 거의 찬탈과 마찬가지인 방식으로 얻은 권력이라 휘하 다이묘들의 불만도 아주아주 드글드글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섬 따위로 만족을 못했다. 그래서 조선도 쳐먹고 명나라도 쳐먹고 천축국까지 쳐먹을 생각을 하고 자빠졌다.
거기다 히데요시가 승자라 해도 히데요시의 반대파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 할 수 있을정도로 많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에야스의 석고가 히데요시보다 많았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꼬붕인 관토 지역의 다이묘들은 실제로 임진왜란에 직접적으로 병력을 보내지 않았고
지원을 하더라도 군량만 보내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우에스기 카게가츠 같은 비교적 친 히데요시편이지만 세력이 강한 경우는 참전은 했지만 그냥 후방에서 놀다가 돌아왔다
특히 신진 다이묘들의 공적에 합당한 포상 영토가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대외원정에 착수했다.
자신에게 불복하는 다이묘들을 약화시킬 필요도 있었다. 왜란 당시 선봉에 섰던 시마즈 요시히사 같은 서부 다이묘들은 끝까지 자신에게 저항했던, 매우매우 위험도가 높은 불순분자들이었다.
마침 조선은 병신이었고, 명나라도 F4의 릴레이로 병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대륙정복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다른 관점도 있다.
명나라를 향한 본인 세력의 무력 어필을 통해 무역에서의 이점을 살려보겠다는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관점이다. 지방의 다이묘가 독자적으로 명나라와 무역하는 것을 막고 오직 자신만이 독점을 하려는 술수였다. 무엇보다 조선과 일본 사이를 잇는 중간 상인, 대마도주 등이 히데요시에게
조선은 당신의 아래에 들어오고 싶어함다. 속국이 되겠대요
라며 지랄맞은 거짓 정보를 흘려 저ㅡ질 판타지를 심어준게 컸다. 덕분에 히데요시는 일본이 거병하면 휘하의 다이묘들처럼 조선도 한걸음에 달려와 힘을 보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 통일을 축하하러 온 조선 통신사의 방문도 일본의 휘하에 들어오기 위한 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정명가도라는 헛소릴 지껄인 것도 조선에게 다이묘로써의 의무를 다하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물론 쥐뿔도 없었지만.
일본이 조선을 통해 명나라로 진입하려고 한 이유는 명백했다. 수군은 병신이고 육전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 조선의 육로는 히데요시에게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길을 빌려줄 생각은 커녕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결국에는 급기야 고니시 같은 너구리 새끼들이 먼저 부산에 어택땅을 찍으면서 공격을 퍼붓고는
어! 태합 전하 조선이 먼저 쳤어양!
하고 히데요시에게 거짓 보고를 올려 조선침략의 명분을 챙겨냈다. 이로써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휘하의 다이묘가 자신의 군대를 공격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엄연히 반역행위를 응징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태도가 잔혹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른 관점은 또 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인은 딱 한 가지로 정해져있지 않아 여러개로 나뉘는데, 세번째 설은 히데요시가 과도한 망상에 빠져 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대륙 정벌을 입에 담았던 때는 일본이 통일되기도 전의 시기였다. 대륙 정벌이란 개념을 생각해냈던 사람은 오다 노부나가였는데 정작 노부나가의 경우는 뜬 구름 잡는 소리란 식으로, 그냥 툭 내던진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히데요시 이 원숭이 새끼는 그걸 실행에 옮기고야 말았다.
일본에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히데요시가 중국을 정벌하고 유례없는 최고의 군주가 되길 원한다는 소릴 본인의 입에서 직접 전해들었다. 그 만큼 이 새끼의 과대망상증은 극에 달해있는 상태였다. 히데요시는 본인이 북경으로 건너가고 조선은 하시바 히데카츠에게, 일본 천하는 다른 놈에게 물려줄 구체적인 계획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자기가 동아시아 전체를 삼킬 수 있다고 믿었을 뿐더러, 이것을 자기 인생의 최종 과업으로 삼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명나라의 사정[편집]
쓸데없이 명'제국'이라 되어있길래 수정함. 인터넷에보면 대명제국,대청제국 이라고 쓰는애들 있는데 청이든 명이든 절대 '제국'이라는 표현을 쓰지않았다. 제국은 원래 서양의 로마제국,프랑스제국등에 쓰인 empire를 동양에 맞게 번역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즉 이전까지 중국에서 제국이라는 국호가 쓰인적은 없으면 명도 정식 국호는 '대명국'이었다. 동아이사에서 대ㅇㅇ제국이라고 쓰는 용법은 서양의 엠파이어를 번역하면서 들여온 일본이 처음이다. 이런 용법에 따라 청나라는 서구열강들을 대영국,대법국,대덕국 황제에게 청나라 황제가 어쩌고라고 국서를 썼다. 왜냐면 한단어짜리 국호를 쓰는나라는 정통 중화제국이고 두단어 이상국호쓰는 나라들은 오랑캐,제후국으로 쳐서 격이 떨어졌다. 애초에 대명국 자체가 우리 제국입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것이나 마찬가지라 동어 반복과 유사해져서 제국을 굳이 쓸 필요가 없는 체계였던것.
F4(정통제,가경제,만력제,천계제)의 명나라는 병신이었다. 근데 사실 앞에 두놈은 선좆보다는 나은데 역갤놈들이 끼워넣었다.
만력제가 즉위했으나 맨날 결근했다.
신하들은 뭔가 대첵을 세워야지 싶었다. 그래도 명색이 천자라서 어케든 출근을 시키려고 노력은 했다.
사실 장거정이 만력제 어린시절 존나게 쪼고 몰아붙여서 만력제는 숨조차 쉴 여유마저 없었는데 장거정이 뒈짓하자 만력제는 그대로 나자빠져버렸다.
그리고 제국 변방에는 듣보 오랑캐가 이넘들 먹으려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실 만력제는 수보(지금의 수상) 장거정 생전만해도 상당히 괜찮은 황제였다.
그 기간동안은 만력중흥 소리를 들을정도로 국력이 회복되기도 했었고...,다만 장거정은 만력제의 아버지이자 스승과도 같은 역할을 했었는데 이 양반이 지나치게 꼬장꼬장해서 어려서 놀기 좋아하는 만력제에게 잠깐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막장 환관들이 설쳐대던 명나라에서 예외적으로 이시기 환관들의 우두머리는 상당히 현명한 사람이었고 이 양반이 어린 만력제가 헛짓하는것을 밑의 태감들에게 보고받는 즉시 태후에게 달려가 일러버렸다. 그럼 눈 뒤집어진 태후가 만력제를 불러 "니 새끼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니 동생을 황제시킬걸 그랬다!'(만력제는 실제로 즉위가 어려울뻔 했는데 가까스로 즉위한 케이스) 이러면서 머리싸매고 들누워버리는데다 이 소식을 들은 장거정마저 만력제를 찾아와서 "폐하 님 잘못했음 잘했음? 신이 너님을 그렇게 가르쳤음?? 지금 태후께서 너님때매 앓아누웠는데 너님은 불효자까지 된거임 ㅇㅇ"이런식으로 충고하는일이 계속되고 이걸 십수년간 맘속에 쌓아뒀던 만력제는 장거정이 죽은 후 자신을 꼬발랐던 환관대장을 내쳐버리고 장거정에게 추존된 시호등의 영예를 모두 박탈하고 수상격의 지위인 수보직을 폐지해버린후 막나가버리게된다(물론 이때 태후는 뒈짖한 상태였고 이후의 만력제는 너희가 아는대로 전후무후한 파업황제로 진화한다)
사실 어떻게 보면 명나라도 관료제나 국가조직이 대단한게 황제가 수십년간 이지랄병을 했는데도 황제의 지분이 존나게 많은 개인 왕조 체재에서 신하들의 힘만으로 제국을 유지했다는점을 보면 대단하긴 대단하다. 근데 그건 나라가 원체 커서 가능한 거지. 나라가 크면 그만큼 유능한 인재도 많이 나오는 법이다.
사실 임진왜란 참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존나 많았다. 왜냐하면 좆본군이 존나게 용맹하다 해도 좆목민들의 영역에 진입해서 좆목민들처럼 우회해 다닐 것이 아니면 바로 북경쪽 요새 뚫어야 하는데, 이게 쭝꿔국 가서 보면 알겠지만 크고 아름다웠다. 홍이포로도 뚫기 어려웠고 조총으로 비빌 수 있는 레벨은 아니었다. 청나라도 저거 공략할 때 이자성이란 병신 덕분에 운빨이 좀 따랐다. 더구나 나라가 점점 기울고 있어서 내치에 신경을 더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석성 새끼는 이상할 정도로 조선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새끼는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대명회전 문제만 봐도 그게 드러났다. 이성계의 정적인 윤이와 이초 덕분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자손으로 기록되었고, 다른 새끼들은 별로 아는 게 없어서 (ㅇㅅㅇ)거리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석성 새끼가 활약했다. 명을 먹은 청나라도 이성계 아버지를 이인임으로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새끼는 어떻게 그랬는지 의문.
전쟁전 과정[편집]
타이코 토요토미와 조선 국왕 선조 사이에 끼인 대마도주는 3자사기를 벌인다.
대마도주입장에서 조선과의 무역은 사실상 지 생명줄과 다름없는지라 조선국왕의 외번이자 원숭이의 신하로 투잡을 뛰는식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전쟁이나면 택일을 해야되니 전쟁만은 무슨수를 써도 막아야했다.
하지만 무한정 양측을 기만할수는 없고, 결국 토요토미는 전쟁개시를 결심한다
전쟁의 시작[편집]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후 군을 나누어 북상한다.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근데 둘은 원수지간이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의로 이걸 역이용해서 한양에 먼저 닿는 한놈에게만 상을 주겠다.라고 선언해서 두 장수는 경쟁적으로 치고 올라갔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너도 가라고 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까로 일축했다. 요놈새끼 술수는 뻔하다.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으로 힘 다 뺄때까지 기다렸다가 일본을 낼름 차지하려는 심보다.
부산진에서 유해조수 구제작업을 벌이던 정발이 구제작업을 끝마치고 복귀하는데 바다에서 시커먼 것들이 몰려왔다. 그게 일본군이다. 정발은 방어전을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조총탄에 맞고 죽었다. 20000명 상대로 500명 가지고 5시간 버텼다.
부산진을 털어버린 왜군은 이번에는 동래로 쳐들어갔다. 여기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나무판에 명나라를 치러 가려 하니 길을 비켜달라는 글을 보여주었고(한자로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어주기는 어렵다는 답신을 보낸다. 바로 전투가 벌어져서 동래성은 함락되고 송상현은 전사한다.
동래부는 당시로 보아도 상당히 큰 고을이었고 제승방략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상당수의 조선군이 동원되어 동래성을 구원해야 했지만 제각기 놀며 늑장대응하다 동래성 구원에 실패했고 적은수의 병력이 지키는 조선식 대형성인 동래성은 백여년의 내전을 거치면서 수성에 특화된 일본식 성에서의 전투로 단련된 좆본군에겐 한끼 식사수준이었다.
동래까지 털렸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부랴부랴 이일에게 부관 80명을 줘서 상주에서 징발하라 하고 내려보냈으나 제승방략이라는 애미가 쳐 뒤진 병신제도로 인해 동래부터 한양까지 가는 길목이 죄다 허허벌판이라서 징발실패. 하지만 그 허허벌판에서조차도 병력을 모아 대구로 보냈지만 정작 대구에 모인 병력이 이미 다 도망친지라 800명으로 으쌰으쌰하다 떡되서 도망친다.
제승방략이라는 개좆병신 제도 탓에 조선의 사또들 중에서 병방(兵房)을 휘하에 두고 있는 사또라고는 북방에서 근무하는 무과 급제자 출신 사또들과 저기 부산쪽에 내려가 있는 일부 사또들이 전부였다. 그나마 부산쪽 사또 중에서 조차 윤흥신에게는 병방도 없었다. 병방이 있어야 징발을 할 거 아냐!
이에 선조는 신립에게 친위대까지 하사하고 지휘봉으로 쓰라고 상방검까지 내줘가며 신립을 문경으로 내려보냈다. 신립은 기병의 달인이라 선조가 준 친위대도 죄다 기병이었다. 근데 지형선택을 잘못해서 새재가 아닌 탄금대로 내려와서 기병으로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일본군은 기병 잡아먹는 귀신이었고 게다가 날씨도 비가 왔다. 결국 탄금대에서 방어하던 조선군이 전멸한다. 신립도 전사했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때 광해군에게 세자로 책봉한 뒤 분조 만들어서 민심다독이라고했다.
덤으로 이 때 경복궁 불에 타서 한양핫 찍고 만다.
평양도 버리고 압록강 근처까지 도망간다.
국제전쟁[편집]
발등에 불 떨어진 조선이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명군이 들어온다.
그리고 일본군은 조선군을 존나 우습게봤다가 지속된 소모전으로 병력 절반이상이 뒤졌다.
평양성 탈환작전에는 명군과 조선군 관군, 의병, 승병 등이 총 집결해서 5만 병력을 만들어 놓았다.
명군은 네덜란드에서 사온 대포로 왜군에게 막 갈겨댔다.
그렇게 진행된 평양성 맹공으로 일본군은 목숨이라도 건지려고 꽁지빠지게 도망친다.
기세가 올랐던 명군은 추격하지만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선은 정체된다.
참고로 섬나라에서는 저거 벽제관대첩이라고 한다더라.
ㄴ벽제관 전투는 이여송이 평양을 탈환한 기세로 한양까지 찾아주겠다며 소수의 가정(집에서 육성하는 일종의 사병으로 중기 이후 명군의 주력정도로 보면 된다, 이 가정들이 전선에 구멍을 내면 정규군이 마무리 하는식)과 기병2천만 이끌고 중화기도 없이 존나게 달리다가 일본군 보병대의 매복에 걸린것이다. 이때 자신의 주력이 뒤진 이여송은 더이상 손해보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꺼라 판단 성안에서 존버한다.
벽제관에서 매복으로 명나라군을 잡아낸 왜군은 더 내려가서 행주산성에서 권율과 맞붙었는데 권율은 그야말로 죽을 똥을 싸가면서 막는데 끝내 막아내고야 말았다. 비록 이겼지만 권율은 이 때의 정신적 고통 탓에 한 10년은 늙어버렸다.
이순신은 한산도 출진 하루전에 탈영병 황옥현을 잡아 참수한다. 그 이후 도망친 원균을 자기 등 뒤에 숨겨주고 한산도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한다. 이 승리를 포함하여 이순신이 보급로를 끊어버려, 조선 진주군이 거지때화 된다.
단기승리가 불가능해진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퇴각한다.
정유재란[편집]
고니시와 심유경이 서로 명과 히데요시 모르게 짜고 고스톱쳐서 휴전하려다 걸려가지고 심유경은 오함마에 모가지 날아가고 전쟁 재개됨. 그 직전에 고니시의 반간계 보고 선좆이 얼씨구나 하고 이순신을 트집잡아서 족치려고 햇으나 갓원익과 정탁 할배 덕에 목숨은 겨우 부지하고 백의종군행. 그 사이에 원흉이 팀킬로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을 싸그리 꼬라박해서 조트망하니까 왜놈들이 "요오시이이~" 하면서 전라도를 쑥밭으로 만듦.
여기에 당황한 선좆은 이순신한테 싹싹 빌지만 그 와중에도 졸렬하게 직급 살짝 깎아서 복직시킴. 그리고 우리의 갓순신은 명량 해전에서 중력절에 일어난 전쟁답게 왜놈들 싹 다 물속으로 운지시키고, 여기에 당황한 왜놈들은 마침 직산에서도 막힌 참에[2] 잦됐다 하고 남해안 일대로 후퇴해서 왜성 쌓고 농성.
전쟁의 종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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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가을 토요토미 사망. 일본군 철수
전후처리[편집]
- 1604년 유정(사명당) 일본 방문. 선조의 국서 전달
- 1609년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 체결. 광해군
이후[편집]
선조는 전후처리를 자기 나름 괜찮게 했다. 그러다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고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좆된 국력을 더 말아먹게 된다. 중간에 사르후 전투에서 병력 좀 말아먹기도 함. 그러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필이면 이때가 만주족의 홍타이지가 명을 노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엥? 후방에서 우리를 칠지도 모를 조선이 엑윽대네? 엥? 이거 완전...?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전쟁은 히데요시가 벌였는데 이득은 만주족이 본다. 물론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병자호란에서 이기거나 여진족이 성장하지 못 했을 거라는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선조의 여진족에 대한 견제는 나름 고평가를 받는 것을 고려하고, 또한 선조 이후의 임금이 왕권회복을 위해 궁궐병에 걸려서 국력을 낭비하지도 않았을 테니... 하지만 이제와서 의미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교가 이 전쟁을 거치고 나면서 극도로 열화되었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적장자상속같은 미친짓은 거의 안했지만, 조선후기 신분제 망하고나서부터 철저히 적장자상속이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안 그래도 암군이 자리 잡은 시점에서 이 전쟁으로 머니와 인물을 좀 써먹고 여기에 더불어 여타 이민족과 전쟁을 치루다가 여진족을 통합한 누르하치에게 사르후 전투에서 탈탈 털리고, 그 이후 등장한 홍타이지에게 또 털린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 연합해 홍타이지를 칠 전략이 있었다는데 그 전에 조선이 발려버렸다. 더불어 명나라 자국의 반란도 많았기에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나타나게 된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파와 도쿠가와 이에야스파로 갈라져서 대립하다가 점점 과열되고 급기야는 인류역사상 가장 굵고 짧은 전투인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고 여기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겨서 히데요시 정권이 망하고 이에야스 정권이 성립된다. 그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당들을 청소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이는 우키다 히데이에가 사망하는 도쿠가와 이에츠나 치세기에 끝난다. 그 이외에는 시마바라의 난 이 일어난 정도를 제외하고는 일본은 세키가하라 전투가 종료된 시점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장장 260년 동안 싸움의 나라 일본답지 않게 평화로움이 극에 달하는 태평성세를 누리게 된다.
미스테리[편집]
주의!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존나 미스터리합니다. 씨ㅡ발 뭐가 뭔지 몰?루겟소요. 무섭습니다. ㅠㅠ |
임진왜란에도 미스테리가 존재한다
일단 이때에는 비거가 있는데 이게 뭐냐면 조선시대판 드랍쉽이다 11km를 날았다고함. 실제로 이경규라는 사람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교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때 비행기가 있다는것도 놀라운데 이걸 어떻게 띄었냐도 미스테리다 이걸로 인해 인질구출도 하고 물자도 조달함 즉 제공권이 완전장악하고 시작한거다.
당연 현대에도 믿지 못하는걸 선조가 믿을일은 만무했다 존나 삽질해대는데 정평구가 이 비거를 이용해 쪽바리 조져놓겠다고 상소문을 올렸는데
선조가 와ㅋㅋ ㄹㅇ 참신한 ㅂㅅ이네 하늘을 난다고?ㅋㅋㅋ ㅈㄹ하지마라 나라가 이상하니깐 별 ㅂㅅ새끼들이 다 돌아다니네ㅋㅋ 이러니
조선왕족실록에도 못실렸다. 전수는? 당연 안됌 200년동안은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엔 정보가 없다. 그래서 설계도가 없다 당연 복원도 불가능
다음은 원숭이 부대인데 임진왜란판 혹성탈출이다.
하지만 이건 기록이 없다 시피 해서 찐인지 구라인지도 알수없다. 근데 명나라에선 이미 훈련한 사례도 있어서 잘 모른다.
기록에 의하면 원숭이 3백마리가 혹성탈출 찍었다는 예긴데 이 무리가 왜놈들 한따까리 해서 이긴적도 있다.
다른 말로는 용병 끌어다 온거라고 하는데 캄보디아인 혹은 포르투칼인이였다는 주장이다 포르투칼인이 사실이라면 최초의 외국인이라는 타이틀이 바뀐다.
이미지상으론 나와있는데 정체를 모르니 미스테리다
임진왜란에 대한 조선의 시각[편집]
트라우마, 광해군의 사례로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민족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쁜쪽으로
미신을 신봉하게 되었으며 유교와 가부장제의 교조화가 진행되었다.
결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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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만세!
대명제국 만세!
- ㄴ 사대주의 운운하지 마라. 명군이 그렇게까지 폄하될 존재는 아니었다.
대포 만세!
흑인 만세!
- ㄴ 실제로 포르투갈 쟁이들이 선조 임금에게 흑인 몇명을 바쳤고 선조는 그 흑인들을 잠수부로 활용했다. 주로 바다 속에서 잠영으로 왜선에 접근해서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도주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에도 조선에 남아서 조선군에게 서양식 군사훈련을 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이 그림에서 시커멓고 덩치 큰 놈들이 수레에 타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해귀라 불리운, 흑인 병사들이다.
ㄴㄴ 어?!.... 근데 임진왜란때 흑인도 조선군에 참전했었나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ㅇㅅㅇ;;
도쿠가와 : 야 기분좋다
일본의 시각[편집]
일본에선 조선정벌, 혹은 분로쿠 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표현한다
일본에서는 당연한 거지만 패배하고 아무 것도 얻은 게 없는 전쟁이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대형 병맛 뻘짓 정도로 기억한다. (사실이다) 아니면 좀 안다 싶은 사람들은 풍신수길vs이순신 정도로만 알고 있다.
ㄴ 글쎄 일본사이트 눈팅하면 죄다 일본vs명나라로 생각하던데??
ㄴ 좀 '안다' 싶은 사람들. 인터넷에 서식하는 넷우익들은 이순신 장군님조차 폄하하는 병신들이니 무시해도 된다.
일본 입장에선 잘나가던 도요토미 정권이 나락으로 떨어진 계기로 이해하는듯.
그러다가 일본 사극인 군사 간베에에서 임진왜란이 제법 상세하게 묘사된다. 조선에 간 왜군들 사이에서 이 전쟁에 대해 다같이 염증을 느끼고 있으며 죄없는 조선을 침공한 결과 이 지겨운 고통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 나오고 명분도 없이 고생을 해야 한다는 간베에의 푸념도 제법 나온다.
일본의 전국 삼영웅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각자 그 중에 자기가 제일 좋아하고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이 세 영웅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제일 싫어하는 일본인들은 인터넷을 아주 열심히 뒤져서 괜히 임진왜란을 이빠이 물고 늘어지며 도요토미 그 씹새는 죄없는 조선을 학살해서 나쁜새끼다라며 아주 열폭을 하며 떠벌거린다. 그전에는 일본쪽에서는 임진왜란을 하도 감추려 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잘못이라고 언급하는 게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을 날치기한 정도였으나 인터넷으로 인해 전세계 모든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게 되자(그래서 정사 삼국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요토미까들이 임진왜란을 발견하고는 아주 임진왜란만 존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그걸 누가 반박하려고 들면 그럼 조선은 무슨 죄로 도요토미한테 학살당해야 하냐?로 일축한다.
이후 일제강점기때 조선에 재입성한 좆본은 전국에 있던 임진왜란이후 세워진 전승기념비를 대부분을 뽀개버렸다. 해방이후 공구리쳐서 다 복구시키긴 했다만 헬본 새기들 참 졸 - 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따구니까 너네가 천조국한테 참교육 쳐맞은 거야.
임진왜란의 오해[편집]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은 서인들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에만 나오는 기록으로
이 기록의 근거 또한 이율곡 제자의 개인적 기록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10만 양병설'이 없었더라도 조선은 이미 장부상으로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실제로 임진왜란 때 동원한 병력을 합치면 10만 대군이 나온다. 임진왜란 막판에는 병력을 약 20만 가까이 됐다. 다만, 이후 조선 전체가 피폐해지면서 정유재란 때는 병력동원이 매우 낮아져서 전적으로 명군에 의지하게 된다.
농사지을 사람도 없는 판에 전쟁터에 누가 나가나? 이미 농사 못 지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전쟁 2년차부터 떼로 나왔고, 그 후엔 시체 썩어서 전염병까지 돌아 더 많이 죽었다.
문제는 이들이 각개격파 당했다. 그리고 훈련도와 사기가 낮아 동수로 일본군과 붙었을 때 승전을 장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니시가 이끄는 1군 1만4700명이 부산을 뚫고, 상주, 탄금대를 뚫고, 임진강까지 무려 3만에 가까운 조선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한양 찍고 그 뒤로는 타 일본군과 연합하여 평양까지 뚫었다.
가토의 1만명은 경주를 거쳐 한양 입성 뒤, 강원도 - 함경도까지 다 뚫고 두만강 건넜다가 여진족에게 혼났을 정도.
부산 방어시 부산진, 동래성에서 격파된 조선군이 3천명. 상주전투에서 1천의 손실, 탄금대 8천. 이것만 해도 1만2천
ㄴ탄금대는 8천이 아니라 1만 3천이라는게 현재 정설. 신립이 끌고 가야 되는 원래 병력 8천에 류성룡이랑 선조가 붙혀준 5천~6천
임진강 방어선에서 붕괴된 경기도, 황해도 조선군이 1만3천. 여기까지 2만5천.
용인전투로 인해 박살난 경상-충청-전라 3도 근왕군이 5만. 여기까지 7만5천.
평양 방어전에서 3천의 조선군 손실. 7만8천.
이순신이 이끈 3도 수군이 1만 이상. 여기까지 9만.
이후 강원도, 함경도에서 가토에게 박살난 조선군과 진주성을 비롯하여 아직 일본에게 점령되지 않고 남은 남부지방. 주로,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그리고 선조의 호위부대가 1만 이상.
따라서 전부 다 합치면 10만 이상 대군이 나온다.
실록에 나온 집계로는 임진년 초기에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14만이 넘는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들 역시 실제로는 조선군에 편입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군역에 올라와 있었으나, 조선군이 붕괴되고 이들을 징집할 정부도 행정력도 미치지 못하기에 의병이 되었을 뿐.
조선의 동원능력은 그렇게 허접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군이 약했을 뿐.
조선이 임진강 방어선에 1만3천명을 투입하고, 후방에서 3도 근왕군 5만명이 북상하자 일본측에선 크게 긴장했다. 이 당시엔 일본의 1,2,3군만 한양에 있어서 병력 상으로는 되려 조선이 더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조선의 개발살.
당대 조선만한 행정력 가진 국가가 전세계적으로 몇이나 있을거 같냐??? 신립이 충주로 내려갔을때 삼도순변사 권한으로 충청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만 해도 2만 5천이다.
조선군이 머릿수가 작아보이는건 명군 참전이후로 군량대면서 이듬해부로 동원병력이 2~3만대로 급감하면서 생겨난 결과다.
또한 명나라 군의 역할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있는데('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라던가), 명나라군이 없었더라면 조선이 한양을 탈환하지 못했다라는 것이 정설이다. (제 아무리 이순신과 의병이 있었다 한들...) 정유재란 때도 마찬가지. 각주에도 적었지만, 직산에서의 공적은 함부로 폄하할 게 못된다. 바닷길 막아도 육로 털리면 이것도 GG인데.
ㄴ이건 사실이다, 애초에 지상전의 대부분을 대규모의 명군이 수행했고 전쟁후기 직산전투같은 경우는 전략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는 승리인지라(물론 잘싸웠단 말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는 사로병진 작전시 동일원이 이끌던 중로군이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개털된 사천전투인데 머륙새끼들은 여기서 교훈을 얻지 못해 후일 사르후에서 똑같은 병신짓을 반복해서 요동을 만주족에게 완전히 내주고 수세로 전환해 멸망할때까지 지속적으로 가드올리고 쳐맞고 만다.)
ㄴ http://www.dogdrip.net/166297746 갓 만력제 황제폐하 만세! 중뽕아님
또한 명나라군의 횡포 또한 군량을 제공하지 못한 조선의 잘못이라 할 수 있다. (근데 조선군 또한 군량이 충분하지 못했다.)
명나라군의 경우는 병사들에게 군량이 아니라 일정량의 은을 지급해서 현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거래하는 보급방식을 채택했다. 이미 명나라는 일조편법을 통해 화폐경제를 완성해서 가능한 것이였는데,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조센에서는 이게 불가능했다.
개씹병신 어떻게 인구가 1000만 가까이 되는데 상업이 발달하지 않을 수 있었지 이런 개병신 국가 같으니라고....
ㄴ최근에는 유럽 인구도 상당히 많았고 기존의 연구 결과가 똥양뽕들에 의해 똥양 인구가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실제로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오기 시작하고 보니 백인 숫자가 황인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유럽 인종(인도 유럽 인종, 백색 인종)은 최근 역사에서 전체 인구의 과반을 먹은 적도 있으며, 고대를 보면 중동 제국을 뺀 로마 인구만 봐도 압도적이었다.
ㄴ 뭐 물론 그렇다고 화폐경제도 생기지 않은 걸 덮어줄 수 있는건 아니다. 아니 세상에 14세기에 제대로 된 화폐조차 없이 일반 백성들이 물물교환으로 거래하는 나라는 조선이 유일할 듯. 물론 북아메리카 인디언 나부랭이나 아즈텍 잉카 이런 나라 말고 국제관계 라는걸 제대로 설립한 나라중에. 바로 옆 명나라가 화폐쓰는걸 사신 가서 수십번을 봤을텐데 그걸 도입할 생각을 못했단 말인가? 당장 유럽은 고대 그리스 시절 그러니까 약 임진왜란 2000년 전 즈음엔 이미 화폐제도가 있었다.
심지어는 그 일본도 장타원형의 화폐를 사용했다. 근데 조선만 화폐가 없었대. 캬하하하하하~
(기득권 유지 위해 그 어떤 개혁도 막아서댔고 양반을 제외햔 서민들은 철저한 농민으로만 살게끔 국가를 운영했으니 상업이 살아날 수가 있나?
애초에 장사꾼은 서민경제부터 시작이지 귀족경제부터 시작이 아니다. 즉 머가리좀 돌아가는 정치인 또라이 새끼가 있었다면
서민경제 내에서 상업을 키워내고 스폰해서 그새끼한테 돈받아 정치를 했다면 정경유착으로 상업력이 클수있는 인력인데.
더 중요한 건 서민들에게서 세금을 뜯어야 관리가 부유해지지! 서민들에게 뜯을 세금을 서밍들로 하여금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이게 되려 관리들이 더 이득인데 왜 안했을까?
서민이 세금을 1맘원 내는 거랑 50만원 내는거랑 천지차이일 텐데 웹툰 작가가 1일 동안 번 돈이면 노가다 잡부가 1개월 동안 번 돈이랑 삐까뜰텐데 관리들은 서민들을 웹툰 작가로 키워주지 않고 계속 노가다 잡부로 썩혔다.
이정도 머가리 돌아가는 새끼가 좆선엔없었다.)
이건 철저히 농업국가 위주로 가서 민중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조선의 방책이라 이렇게 ㅄ이 된거지만..
더 쓰기 귀찮다 ㄹㅇ
ㄴ 조선 왕들은 끊임없이 화폐 풀려고 노력했다. 다만 농본위주 정책을 유지하면서 그걸 시도했으니 될리가 있나
그리고 임진왜란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바로 조선의 매우 심각한 수송체계에 대한 이해부족과 요동지방의 막강한 경제력등에 대한 오해로 잘못된 내용이 자주 전달된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명나라가 은자를 들고와서 조선에서 사먹겠다고하다가 조선에서 통용이 안된 내용까지만 나오고 여기서만 논의가 나오며 조선에 대한 잘못된 커버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알은 명나라는 긴급하게 요동지방에서 식량을 마련해서 조선의 철산 혹은 의주까지 수송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수송은 일본군의 북상으로 해상에서 식량을 빼앗길 수 있다고 조선에게 일임했다.
조선은 이 백만석에 달한다는 명나라군 식량을 전혀 수송하지 못한 수송무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며. 이건 조선의 인구규모와 국가 수준상 말도 안되는 수준이다.
즉 명나라군 5만명분량을 넘기는 식량을 명나라가 빠르게 마련해서 철산 혹은 의주에 수송해주었고 조선이할일은 이 식량을 전선으로 수송하는 일밖에 없었건만 이걸 못해서 명나라군이 극심한 식량난에 약탈까지함은 물론 조선고위관료를 끌고가서 곤장을 쳤으며, 명나라가 임진왜란 2년차에 일본과 전쟁하기 보다는 오히려 평화협정으로 방향을 바꾼 결정적인 이유다.
일본의 행위는 명나라로서 매우 심기가 거슬리는 일로서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감히 일본따위가 명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명나라의 조공국인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다. 명나라의 입장에서 무조건 일본을 박살내야할 전쟁이며.
실재로 정유재란에서 명나라군은 수군까지 동원한 대규모 군대로 사실상 일본은 박살내며 쫒아냈었으니 임진왜란때는 조선을 믿고 병참을 맡겼더니 병량수송조차 못하는 무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보급 재앙으로 인해 명나라 군대 기병대의 군마 절반 이상이 굶어 죽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다만 전근대 국가에서, 그것도 개전초기 개털려서 곡창지대인 삼남의 7할을 잃은 시점에 5만명이 먹어야 할 쌀을 마련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병사1인당 한끼에 300g만 먹인다 치고 그 조차 하루 두끼만 먹는다고 잡아도 하루에 명군이 소모하는 쌀만 30톤이다. 이 정도 먹으면 절대 싸움 못한다. 그럼 최소 명군의 1일 곡물소비량만 최소50톤인데 여기에 각종 부식에 기병이 중심이었던 요동군의 군마가 쳐먹을 마초까지 계산해보면 당시 조선이 부담해야할 수송부담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조선도 개병신은 아니라서 나라의 존망을 손에 쥔 동정군에 대한 보급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렇게 하고도 요동 출신 기병들이 보유한 마필의 절반이상이 뒈짖했지만(이건 임진년에 14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조선이 이듬해 겨우 2만을 동원하는 수준으로 전락하는것으로 증명된다.)
이걸로 조선이 미개하다고 한다면 당시 추정치로 조선보다 2~3백만가량 인구가 많은데다 대부분의 수송체계를 역시 조운에 의존하던 일본도 좆 미개한 국가란 소리가 된다.
ㄴ지랄하지마 병신아 존나 무슨 장거리도 아니고 고작 의주 - 평양까지의 거리인데 이것도 보급 못해서 씹창이 난거다. 참고로 위화도 회군때 이성계가 대놓고 태업하면서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기어가다시피 해서 걸린 기간이 20일이다. 존나 대놓고 배째라 씨발 안 갈란다 하는 새끼들도 20일만에 가는 거리인데 이 보급로 하나 제대로 유지 못한게 조센정부다. 제딴엔 대가리 굴린다고 여기저기서 난립해 있던 의병들까지 잡아다가 강제 노역 시키면 뭐하냐 어차피 결과는 앰창인데
ㄴ 그래도 미개한 조선의 도로 덕분에 일본도 부산에 도착한 물자를 육로로 운송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조선이 버리고 간 군량미 덕분에 국뽕들의 착각과 달리 평양이나 함경도까지 진출한 일본군이 식량이 부족했다는 증거나 수륙병진을 시도했다는 증거는 없다.
명나라는 임란의 나비효과 때문에 멸망했다. 고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국력은 명을 이기고도 남았다!!!!! 일본은 손 안대고 코를 풀어 명을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라고 지껄이는 일뽕 새끼들이 있는데 저 말은 =뎃챠아아아악!!!!와타시의 공격에 닝겐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데수웅~~!! 하는 참피새끼의 망상이랑 똑같은 것이다. 고로 일뽕새끼들은 참피새끼들이랑 동급의 하등생물이니 맘껏 쳐죽여도 된다.
애초에 임란은 좆본새끼들이 '조선을 통해 명나라를 공격하여 정벌하겠다'는 궁극적 목적을 가진 전쟁이었다. 그러나 좆본새끼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는 커녕 직산에서 명나라 중기병 말발굽에 머가리 터져서 뇌수 질질흘리고 결국 명나라는 고사하고 응디뒤에 숨어있던 만만해보이는 조선도 못쳐먹어 패배한, 좆본새끼들에게 좆같은 역사적 사건이 임란이다.
일뽕새끼들과 좆본새끼들은 어떻게든 이 개좆같은 역사적 사건을 미화하고 대단한 것처럼 딸딸이는 쳐야 하는데 마침 50년 후에 명나라가 전혀 엉뚱한 이유로 망한다. 그걸 보고 이 개같은 좆본새끼들과 일뽕새끼들이 정신승리 하기를 "톄챠아아악!! 우리가 조선에서 물러난건 맞지만 우리가 일으킨 전쟁때문에 저 거대한 똥명나라가 멸망한 데스웅!!! 이것이 바로 세레브한 좆본의 저력인데스!!!"라고 딸치는 것이다.
띵나라는 분명 임란에 적잖은 전비와 자원을 소모하여 참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임진왜란이 명나라 멸망에 작용했던 수많은 원인 중의 하나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지 그것이 결정적일 정도로 중대한 원인은 아니었단 것.말기 띵나라는 병신같이 골골대고 엑윽대는 야갤러같은 나라였지만 임란에 투입한 정도의 인력과 자원, 전비의 소모량과 손실 수준으로 망할 만큼 좆만한 좆밥나라는 아니었다.
근데 일뽕새끼들의 망상속의 띵나라는 임란끝나고 40~50년동안 일본에게 줘터진 임란후유증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빌빌대기만 하다가 멸망한다.(그렇다고 극력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속의 띵나라는 내부에선 80만이 넘는 농민반란군을 진압하면서도, 내몽골까지 합병하여 세력을 이따시만큼 키운 후금이랑도 30년을 치고받고 싸우는 나라였다.
띵나라는 암군의 연속적인 등장. 만력제의 태업과 재정낭비로 인한 재정악화, 환관의 전횡과 관료들의 알력다툼과 부패. 16~17세기에 걸쳐 중국 대륙을 강타한 기록적이고 절망적인 대기근, 그리고 그 기근으로 인한 국가역량저하, 기근에 의해 먹을것도 없어지고 삶도 피폐해진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 임란을 틈타 줄타기해서 세력키운 후금의 절묘한 타이밍을 파고든 군사적 공세에 휘청이다 멸망한 것이다.'띵나라는 일본이 일으킨 임란의 파장에 의해 망했다'는 그저 섬숭이 새끼들 자위사관이다.
ㄴ사실 쭝꿔 땅이 천명 사상이 있는데 본질적으로 심심하면 자연재해(지진, 태풍, 가뭄 등)가 일어나는 땅(심지어 일본 자연재해 빈도도 그냥 쳐바른다.)가 터지던 땅이라 미개했던 옛날에는 재산 피해와 더불어 하늘이 우덜을 버렸다며 반란이 자주 터졌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자연재해 때 터지는 반란 덕분에 왕조가 교체되기도 쉬웠다.(심지어 과학기술이 꽤 발달한 최근에 일어난 자연재해로만 1억 명이던가 뒤짐.)
ㄴ참고로 저새끼들이 사는 땅에 저런 자연재해 터질 때 쭝꿔 대륙에 있던 다른 나라들에게도 대재앙이었다. 다리(X발, 다리 맞냐?)란 나라도 꽤 크고 부유했는데 원나라 때 천명 터지고 쭝꿔 농민 새끼들이 몰려와서 멸망했다.
- ㄴ '다리'는 처음 들어보는데, 혹시 무협지에 나오는 '대리국' 얘기냐?
- ㄴ ㅇㅇ
서양 빠는 좆문가와 그에 대한 온갖 반박자료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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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 활만 쏘던 미개한 조선인들에겐 쇼킹했던 무기지만, 당시 서양인들은 그보대 배는 강한 머스켓을 썼다. 서양에서 조총은 그 시대엔 그냥 사냥에나 쓰는 물건. 명나라에선 서양 머스킷도 수입 하고 지들 나름대로 개조했지만 제식화하기 전에 만주인들에게 멸망 크리 ㅋ
ㄴ 활만 쏘던 미개한 조선인은 개뿔 역알못 새끼;; 조선이 여진족 애들 줘팸할때 기병마저 소형화기 들고 다닌건 알고 있냐? 조총보다 효용이 떨여져서 그렇지. 활만 쓰는 야만인은 아니었다. 역알못 새꺄
ㄴ아직도 조총쇼크를 신봉하는 역알못 미개인종들이 있네 좆본보다 수백년은 앞서서 대규모 화약병기를 운용한 국가인데 쏠때 피슉피슉거리는 소리나는 조총에 쫄아서 초기에 발린줄 아는 미개충
ㄴ네 다음 좆미개 핸드캐논 갓양에선 몇세기전 개인화기인 핸드캐논 좀 썼다고 자위질 지리공노
ㄴ좆미개 핸드캐논으로도 온몸에 중갑쳐바른 유럽식 기병도 충분히 저지해낼 수 있다 병신아 예비군 훈련때 쓰는 카빈이 사격할때마다 받침때 떨어져나간다고 사람못죽이냐? 레알 머가리가 미개한듯
임진왜란 이전 조선에서도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이 있었다. 다만 전반적인 성능이 조총에 비해 미개했던 건 사실이라 탈탈 털리고 결국 조총으로 갈아타게 됨
차징 기병: 당시 똥양엔 카우치드 렌스 기법도 없었다. 즉, 가공할만한 돌격력을 지닌 창기병이 없었다는 것. ㄴ이거쓴새끼 최소 좆문가 시발 동양권에서 왜 차징기병 안쓰는줄아냐? 보병방진술에다가 지형 글고 차징기병이 ㅈㄴ 비효율적이라안쓴거다 병신샛갸 그런걸로따지면 서양은 시발 궁기병도 재대로안키워서 몽골한테 ㅈ털리냐? 글고 서양권 갑옷이 그냥 미개하게 배때찌에 철판을 깐수준인데 그런갑옷입은 보병이 기동성이 떨어지니깐 차징기병이 통해서 쓰는거고 동양은 비늘갑옷에다가 보병 무기가 창비율이 ㅈㄴ 높아서 차징하면 끔살 이란다 ㅂㅅ아 그리고 똥양이 아무리 18 19세기 이후로 서양성님들 전용 동네북되는 개병신들이어도 랜스에 대응하는 무기정도는 있었다. 삭朔이라는 장창인데 보병이 사용하는 보삭과 기병이 사용하는 마삭이 존재했다. 운용법도 비슷했음
ㄴ네? 중세 후기 서양 갑옷이 그저 철판만 바른 미개한 거라고요? 이거 완전 태왕사신기 아니냐?
ㄴ서양 갑옷 30kg가 동양권갑옷 15 kg랑방어력 맞먹는 수준보면 중세 유럽 갑옷이 얼마나 미개한지를 알수있단다 그래서 철판 입고뒤뚱뒤뚱 걸어다니는 좆보병에게 그당시 명중률 똥망수준인 총을 사용 해도가능해서 중세유럽이 대포또는 총을 개량발전시켰단다. 글고 꼭 유럽기사갑옷은 화살 에도끄떡없고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빡머가리들을위해 말해주는데 그시대 어느지역 갑옷이든 화살은 다 막는단다.
ㄴ서양갑옷 30kg가 동양갑옷 15kg랑 맞먹는 수준밖에 안된다고? 밀덕역덕들 보면 뒷목 잡고 쓰러질 개소리는 아마 99% 강철의 열제같은 환빠 양판소에서 주워들었겠지? 하여간 국뽕 양판소가 애들 다 망친다 ㅉ
ㄴ 뭔 개소리냐 판금갑옷은 활은 물론 칼, 창 그리고 왠만한 둔기류로 줘패도 즉사안했는데. 판금갑옷은 갑옷 최종테크다. 그리고 뒤뚱뒤뚱? 서양이나 똥양이나 무거운건 똑같애
ㄴ 좀 역좀알의 시점에서 쓰자면 조선시대 철갑옷 안쓴건 이걸 만들 기술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http://dcollection.snu.ac.kr/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58430 논문이다. 보면 알겠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철갑이 굉장히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인이 보통 조선시대 철갑을 잘 안쓰는 줄 아는건 걍 막장 사극 때문이고, 실제로는 철갑 내지는 나무에 철 붙인 갑옷을 썼다. 철갑은 그렇다치고 왜 나무와 철을 결합해서 썼나면 일차로 싸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철이 열전도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체로 조선시대 갑옷의 사용환경은 추위가 하늘을 찌르는 북방이었는데 여기에 철갑입고 가면 누가 얼어 뒤지라고? 거기다가 철은 열팽창률도 높다 나무의 경우 내부 조직에 틈이 많아 열팽창으로 인한 부피증가를 충분히 상쇄 가능하지만 철로 만들면 혹한의 추위에 빵빵 금가는 꼬라지를 볼 수 있을거다.
물론 조선 초기 환경에서 왜구가 들끓는 시점에서는 전장환경이 대체로 따뜻한 남부였고, 설령 남부 아니더라도 빈번한 싸움으로 인해 생존률이 우선시되어 철갑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진관체제-제승방략-속오군을 거치면서 10만명 이상의 무기를 사전에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누가 제승방략에 대해 예비군 개념이고 실제 상비군은 적었다고 하는데, 일단 걔네들한테 줄 무기와 갑옷 자체는 상비해 두고 있어야 하므로 필요한 갑옷 수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리고 상비군 수가 적었던 이유는 대부분의 부대들이 4~5교대로 근무하고 근무 안 할 때는 집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식이여서 그런 거였다.) 요는 10만 개 이상의 갑옷을 미리 만들어두어야 했으며, 더군다나 유럽과는 달리 이 비용은 중앙에서 각출하는 것이었으므로 - 요컨대 세금 나간다는 말이다 - 참고로 동시대 유럽에서 갑옷 비용과 종자는 기사가 직접 냈다. 물론 영주가 갑옷 사라고 돈을 보태준 기록도 있고 기사들도 지들 장원 있었지만, 지 갑옷 살 돈 없어 파산한 기사들도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어디까지나 성과에 따라 차등지불이었던 듯 하다. 보급성을 심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 중기 들어 전란이 많이 줄었으므로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 쓸데없는데 돈나간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초기의 생존성을 중요시한 철갑은 중기 후기 들어 보급성과 편리성을 생각하여 피갑, 피갑 + 목갑 내지는 부분적인 철갑으로 갈아타게 되었으며 카우치드 랜스나 이딴건 어쨌건 조선에 판금 갑옷 없다고 까는건 무리가 있을 듯 하다. 분명 조선 초기만 해도 철갑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으로 봐서 기술적 역량 안되어 철갑을 쓰지 못했다거나 이런건 말이 안되며, 조선의 전장환경과 보급성에 중점을 두고 '발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양의 판금갑옷은 그 가격에 있어 굉장한 사치품이었으며, 실제 하급 기사 중에 영지가 가난해서 갑옷 살 돈이 없어 적당한 피갑 입고 싸웠다는 애들도 있다.
글고 이거 윗글 쓴ㅂㅅ이 자꾸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 없다고 풀발하는데 그짓 전투중에4 ~5번만해도 창이 박살나서 전투력 상실하는 개병신 전술이다 카우치드는 1대1 상황에서 일기토 하듯이 하는 전술이지 전쟁용으론 부적합하다
ㄴ 응 병신아 훗사르는 잘만씀. 그리고 십자군이 이슬람 상대로 잘만씀
ㄴ 전투중에 4~5번만 해도 창이 박살난다는데 애초에 랜스는 장거리 돌진용으로 백병전에서 쓰는게 아니다. 4~5번 쓰면 부러진다는데도 자주 쓰인 이유는 당연하다 애초에 4~5번 씩이나 쓸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전투중에 일제돌격할 때 쓰고 백병전 들어가선 랜스 냅두고 칼이나 둔기쓰는데 중세시대 전투에서 일제돌격 몇번할까? 보통 한번이고 운좋아서 돌파하면 측면이나 후방 상대로 돌격 한번 더 해서 많아야 2번이다. 혹시라도 돌파 후 돌격 후 돌파 이게 계속 반복될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을까봐 첨가하는데 애초에 기병한테 돌파당하는 순간 그 보병부대의 생명력은 그냥 좆망이라고 보면된다. 사실 2번째 돌격도 그냥 숨통 끊는 용도고 목숨 아끼려고 안하는 경우도 많은데? 카우치드 랜스가 1대 1 이지랄하는건 마상전투시합 이 얘기하는거 같은데 그건 전투가 아니고 시합이라 1대1 하는거고, 실제로는 전쟁용으로도 잘만 쓴 전술이니 헛소리하지 말것. 조선시대 활이 발달해서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 쓰일 일이 없었던 거지 카우치드 랜스 기법 자체가 병신은 아니다. 기병의 충격력을 높여서 보병부대를 관통해서 진을 와해시킨 후 돌파한 기병부대가 측방이나 후방을 공격한다는 점으로 본다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훌륭한 전술임.
대표적인 예로 전세계 어느지역 유목민 기병군대를보면 창보다는 반달모양칼을 선호한다 그이유는 창은 전투중 잘부러지고 돌진중 휘두르면서 피해를 주기 힘들지만 칼은 창보다 유연하게 휘두르기때문에 훨씬 더효율적이다 윗글쓴 빡대갈이 그렇게 빠는 유럽창기병은몽골침략받고 12~13 세기쯤 사라지고 카발리 라고 불리는 기병 ex퀴레지어 로 바뀐다
ㄴ 응 병신아 카우치드 랜스는 나폴레옹 시대때도 있었음
ㄴ 응 아니야 윗놈도 개소리지만 카우치드 랜스를 위시한 중기병은 16세기쯔음에 쇠퇴하고 나폴레옹 전쟁때는 창기병이 있었지만 카우치드 랜스법은 아니었어
그리고 동양권에서는 몽골,여진족 제외하면 전부 알보병중심 군대이기 때문에 기병이 활약한일이 그리없다 고로 동서양의 병력 선호도에 따라 달라진것을 누가 더뛰어나다고 할수는 없다
ㄴ 알보병? 그건 일본이고 병신아
ㄴ 뭔 개소리여 조총병 무시하냐
좆본 기병은 말타다가 내려 싸우는 놈들. 조선 기병은 도리깨들고 대가리 찍는 놈들. 명나라는 몽골이나 여진 용병들도 데리고 다녔다.
ㄴ이게 뭔 소리인지 모르겠네;;;똥양에 창기병이 없기는 왜 없어? 똥양 역사에서 숱하게 나오는 중기병들이 전부 창기병들인데.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이 요나라 군대 벌집피자로 만들때 마지막으로 발터 꺼내든게 김종현이 지휘한 1만의 중기병임.
ㄴ아니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 없었다고 말끼 못알아듣냐?
그리고 임진왜란때 조선군 창기병이 없다시피한건 다름아닌 세조가 왕되고 난 후 군제개혁 하면서 화약 만들던 총통위 날리고 창기병 대신 궁기병 위주로 기병전력 재편성해서다.
ㄴ 조선의 병.신력을 인정해주시는
ㄴ시발 창기병없다고 똥양 미개 빼애애액 거리는 애미가 미국가신 헬무새 새끼들
ㄴ이전 서술의 명나라의 기병 양성이 없었다는 것은 구라로 조선 편곤 기병이 명의 영향을 받았다.
ㄴ 이여송의 기병대가 타타르계 출신들이다. 애초에 편곤이 몽골 기병 무기밍
ㄴ 편곤은 본래 서융의 무기였는데 한족이 무기로 쓰게 된다.
ㄴ 똥양에서 서양식 충격 기병이 발달해야 할 이유가 있긴 햇냐?? 특히 조선에서는 서양식 중기병이 더더욱 필요 없었다. 왜냐면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이 한 전쟁은 기껏해야 북방 여진족 야만인 새끼들 줘팸하는거 하고 남쪽 왜구 해적애들 줘팸하는 거 였는데, 이런 애들 상대로 서양식 중기병 뭐하러 씀?
ㄴ 유럽 대륙애들이 바이킹에 그나마 맞설 수 있던게 카우치드 랜스법 덕분, 물론 바이킹도 왜구들처럼 약탈하고 튀는 전법 쓰는 애들
ㄴ 뭔 개소리야 카우치드 랜스법을 쓴게 노르만 기병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이킹이 왜나와 빡대가리놈아
ㄴ 바이킹 새끼들이 정착해서 된 게 노르만이고 그 노르만 애들이 발명한게 카우치드 랜스. 애초에 바이킹 새끼들은 배타고 약탈하는 새끼들이라
기병 전술을 쓸만한 여건이 못되었다. 반면 노르만 새끼들은 정착해서 말타고 싸우면서 이런 카우치드 랜스 기법을 발명해냈고 곧 유럽애들이 배워
바이킹을 막는데 잘 써먹었다. 사실 노르만 애들하고 바이킹 애들 또한 뿌리만 같지 사이가 그닥 좋지 못했다.
ㄴ뭔 개소리가 이리 잔뜩 적혀 있냐? 조선은 개국초부터 정주왕조 치고는 정신나간 정도로 대규모의 기병전력을 양성, 운용했던 국가다. 다만 중기이후로 중기병의 육성이 멈춘건 애초에 병권을 잡고 있던 거대정적들을 힘으로 뒤엎고 집권한데다 초창기 기병전력이 주력으로 보유했던 북방 병마사 세력의 반란을 경험했던 세조가 무과의 시험과목과 무관의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실기에서 단병기의 사용을 빼고 궁시의 비율을 대폭 높인것과 주적이었던 여진족이 경무장 기병을 활용한 약탈전에 능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 역시 경무장 기병대의 양성쪽으로 방향을 바꿨기 때문이다.
이런 조선인데도 니탕개의 반란을 진압했던 주력은 신립이 이끌던 중기병이었다.
중기병이라고 죄다 15,16세기 유럽같이 전마까지 중무장시킨 중갑기병이라 생각하는 단순한 생각밖에 못하냐?
명나라 또한 기병전력을 아예 양성하지 않은것은 아니라서 역사상의 대부분 한족 왕조들과 같이 군마수급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당나라를 제외하면 중국의 한족 정주왕조중 군마수급에 어려움을 겪지 않은 왕조는 없다, 이 군마수급을 몽골외번과의 조공무역을 통해서 유지했는데 여기서 말값 후려치려던 몽골족 줘팰려다가 황제까지 잡혀버린게 토목의 변이고)굳이 돈 많이 들고 힘든 대규모 기병전력을 100%자국출신으로 구성하기 보다는 간편하고 돈도 적게 드는 몽골, 여진출신 용병들로 적지 않을 비율을 채운게 사실이었다.(이들의 위력은 직산전투에서 대규모 중기병 돌격으로 보병중심의 일본군을 짓밟으면서 증명된다.)
그리고 카우치드 랜스 얘기도 서양에서 이게 발달했던게 노르만의 기독교화 이후인데 얘네는 보병전력에 애초 화약무기가 없었기 때문에(유럽에 화약무기가 개인화기로 보급된게 언제인지를 생각해봐라)중기병의 대규모 돌격 한방으로 보병진형을 무너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송대부터 보병들이 화약무기를 이용했던(보병에게 대규모로 보급된건 명대부터지만)동양의 전장환경에선 대규모 중기병돌격이 보병의 밀집진형에 막힐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당장 화약무기가 보병의 개인화기로 본격적으로 보급된 유럽과 비슷한 병종비율을 보였던 고니시군과 전통적인 기병돌격을 사용했던 신립군의 탄금대 전투 결과를 봐라(물론 주력은 경장기병이었지만) 기병이 쇠퇴하게 된 이유가 화약무기의 대규모 보급과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을 보면 이건 그냥 개소리일 뿐이다.(더군다나 일본군은 기병에게 치병적인 4m는 쉽사리 넘어가는 장창보병을 대규모로 운영했다, 비슷한 구성의 스페인 테르시오가 당대 유럽에서 다른국가의 군대를 얼만큼 개박살냈는지 설명이 필요하냐?)
ㄴ 네 다음 유럽애들 치고 박고 싸울 때 꼬꼬마 전쟁한 똥양 미개 토인들
ㄴ 그당시 유럽전쟁 병력규모 10 만 동양 전쟁규모150 만 잼꼬꼬마전쟁하는군대로 유럽 역사에서지울수있었단다
ㄴ꼬꼬마 전쟁한 똥양 미개토인인 명군의 임진년 참전 규모는 연인원 28만명이 넘는다.(강화회담기 제외하고 실 전쟁기간이 3~4년이란걸 고려할때 외번에 대한 원조전쟁에 연간 7,8만의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는 소리다 그것도 전투병으로만)
ㄴ조선족 새끼 삼국지연의급 구라보소 수나라 통일기 최대치로 잡아봐야 비전투인력 포함 사십만이다.
카우치드 랜스갖고 싸우는 놈들은 그만 여물어라. 임진왜란 시기에 서양 기병은 창 대신 권총 쓴다
대포수준: 총통류 무기가 있지만, 서양의 캘버린 대포에 비하면 화력이 똥송한 수준. 그나마 명나라가 서양에서 불량기포와 홍이포를 수입해서 카피했다.
화차: 이런 오르간포 종류는 이미 이 시기에 서양에서는 쇠퇴된 무기.ㄴ는 지랄이고 기술력이 딸려서 더이상 개량 을 못해 포기한 무기란다 ㄴ크아으아 주모오오오 여기 국뽕 한사발!
ㄴ그럼 시발 카츄샤는 수백년은 뒤쳐진 무기냐
상비군의 부재: 제대로 된 상비군이 없다. 그나마 일본군이 내전으로 인해 실전을 경험하고 명나라군도 왜구 상대로 경험치 쌓았을 뿐이다.
ㄴ갑사라고 쥐 좆만한 규모이긴 하지만 있긴 있었다. 탄금대 전투에서 전부 저세상 가서 그렇지
ㄴ갑사도 지금으로 치면 부사관 내지 위관급 장교다.
일반병졸까지 상비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보유한 국가가 당시 몇개나 되냐? 전국시대의 내전기를 거친 좆본군도 영주나 소수 무사집단을 제외하고는 죄다 징집된 잡병이다.
그나마 조선이나 머륙왕조쯤 되니까 번상병 제도를 통해서 준 상비군을 구성해 놓을 수 있는거지(머륙은 모병제인데다 전통적으로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았다는 특징은 있다.)
일본군의 보병전술, 명나라의 원앙진 등이 있으나, 이들도 어디까지나 징집병임...
ㄴ응 개소리 잡병이라는 아시가루는 저렴한 인건비로나마 대규모로 '고용'되는 벙력이지 징집병이 아니다. 진짜 징집병한텐 막노동 시키지 절대 무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ㄴ아시가루는 징집병의 성격도 강했다. 아시가루의 동원방식 보면 영주가 마을마다 아시가루 몇 명 보내라고 할당량 주면 지원자가 할당량 채울 수준 되면 지원자들만 보내고 할당량 못 채우면 강제징집시켜서 머릿수 채우는 식이였다. 그냥 아시가루는 영주가 요구하는 숫자가 적을 땐 모병제 성격이 강했고 요구하는 숫자가 많을 때는 징병제 성격이 강한 집단이였다.
방어류: 똥양 최고의 갑옷 테크 두정갑이 있다. 화살은 막는다. 등패라는 방패도 있다. 물론 서양에서 방패는 16세기 초에 도태 됨....
ㄴ똥서양을 가리지 않고 활은 중장갑을 상대하기 좋은 물건이 아니었다.
구식 아퀘부스랑 동양 군사기술의 결정체라 불린 합성궁의 운동에너지량 차이를 봐라, 니들이 물고빠는 갓양식 판금갑옷이라도 구식 아퀘버스한테 걸리면 한방에 요단강 직행이다.
ㄴ 판금갑옷 최종진화형은 무려 아퀘버스로도 못 뚫었다. 아퀘버스에 쉽게 뚫렸다면 머스킷이 나왔을까?
판옥선: 조선의 자존심. 그러나 동시기 서양의 대항해선에 비하면 체급에서 한참 밀린다. 대포 구경도 더 작다. 항해성능도 쓰레기다.
ㄴ항해성능이 쓰레기인건 상국이었던 명나라가 영락제 사후 해금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이에 맞춰 조선수군도 연안해군이 되었기 때문이다.(사실 조선의 남,서해안 특성상 연안해군으로 가는게 맞기도 했고)
공성전: 공성전도 똥송하기 그지 없어서.. 공성할 때 화포 쏘는 군대는 명나라 밖에 없었다.(그것도 서양에서 수입한 걸로)
ㄴ공성전이 똥송했던 건 인정하는데 조선도 경주성 탈환전 때 화포로 비격진천뢰 쏘고 그러긴 했음
조선의 성은... 조쎈징들의 미신인 배산임수 사상으로 만들어서 산에서 훤히~ 내다 보일 수 있었다.
또한 성이 좆나가 낮아서... 일본 아시가루들의 5m 넘는 장창으로 사다리 안타고도 푹푹 찔렀다 카더라
도검류: 갓본의 일본도가 유명하다. 명나라는 북로남왜일 때 일찌기 카피했고, 조센은 임란 후에 카피했다. 또한 명나라와 조선의 월도류가 유명하다. 좆본군한테는 나기나타가 있다... 그런데 이딴 무겁기만 하고 후까시 잡는 폴암류는 이미 서양에선 한 물간 무기들...
ㄴ그 무겁기만 하고 후까시만 잡는 한물간 무기인 폴암류를 집단으로 운용한 좆본 보병대가 창질 한방하니 우리애들 몸이 절단나고 창자가 쏟아져서 군병들이 패닉에 빠졌단 기록이 실록이나 류성룡의 문집에도 나온다.
둔기류: 화포가 발명됐지만.. 똥양인들은 둔기류를 계속 애용했다.. 북방의 몽골족들이 썼던 편곤이 명나라에서 조센으로 전해져서 좆본군 대가리를 따고 다녔다.
ㄴ둔기류를 애용한 이유도 접전상황에서 중갑을 갖춘 상대병사를 가장 쉽게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무기가 화포보다는 둔기류였기 때문이다.
ㄴ중장갑을 무력화시키는 무기가 둔기류긴 병신아 서양의 기사계급이 좃망한게 화약무기의 보급때문인데 탄환의 운동에너지가 2000J을 넘는 화약병기 제쳐두고 둔기류 찾는 수준보소
인조실록만 봐도 조선군 기병대가 쓰던 편곤이 청군 중기병대를 상대로는 죄다 이음새가 끊어지고 부러졌다고 나온다
애초 편곤같은 둔기류가 애용된 이유는 정주민인 명나라와 조선의 농민출신 병사들이 추수때 쓰던 도리깨와 그 매커니즘이 유사해서 별도의 훈련과정 없이도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첩진: 좆본군한테 쳐발린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원앙진을 수입한 뒤에 만든 진법이다. 별 다른거 없고 앞에 조총병 중간에 창병 맨뒤에 활쏘는 놈이 배치된다. 그런데 서양의 테르시오처럼 빼곡히 중대전술을 취하는게 아니라서 기병한테는 취약했다.
ㄴ그래서 결론이 뭔데 병신들아
그냥 존나 의미없는 토론이다 병신들아
애초에 동 서양이 서로 문화권이 달라서 군사체계가 아예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이딴 토론한다고 조상님들이 좀비되서 서양조상이랑 싸워서 시물레이션 해주겠냐??
그냥 쟤들은 저랬고 우리는 이랬다 정도면 끝날걸 굳이 의미없이 토론함, 하여간 수준들 하고는...
애초에 이딴걸로 누가 더 우월한가 싸우는거 자체가 미개한 거임
이야깃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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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한 시간만에 털렸다. 근데 원래 부산은 동래 밑에 딸린 좆만한 항구에 지나지 않았다. 한참 후에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일본에게 개항되고 이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동래에서 독립시키고 역으로 동래를 야금야금 집어삼키고 진주에 있었던 경남도청을 뺏어먹은 것으로 성장하다가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인구가 대폭 늘어나고 서울이 털리는 상황에 대비하여 키운 결과로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일본 선봉대 하나가 바로 항복했다. 그 선봉대장이 바로 김충선이라 불리는 사야카이다. 김충선은 조선인들의 신뢰를 얻기위해 관군과 함께 왜놈들을 격퇴하였다.
이렇게 항복한 일본군대가 몇몇 있었는데 보통 반 히데요시 가문들이라 카더라.
애초에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게 잘 알다시피 전국 시대 통일의 불만 세력을 잠재우려는 것도 있었기에 수많은 도요토미의 반대세력들이 조선 쪽으로 넘어온 건 사실이었다.
이새끼들이 알게 모르게 전쟁에 도움이 됐다. 그 당시 총도 없던 미개한 조선인들에게 조총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 당시 조선은 검술이나 창술이 시험과목이 아니라서 개좆망 수준이었는데 항복한 왜놈들이 훈련도 시켜줌.
ㄴ 총도 없던 조선군이 아니라니 . 효용성이 떨어질 뿐이지. 조선도 개인화기 있긴 있었어.
ㄴ 핸드캐논이 총이라는 건 치하가 전차라는 말과 같은 수준인 거 아니냐?
ㄴ 씨발 예비군 훈련장에 있는 카빈이 쏠때마다 개머리판 떨어진다고 총아니냐?
ㄴ 치하가 전차지 그럼 자동차니 씹새야
ㄴ 베트남 축구팀이 월드컵 참가팀이라는 소리지. 매 월드컵 지역예선때마다 1년 이내에 떨어지는 새끼들.. ㅋ
ㄴ 총이랑은 전혀 다른 것 맞다. 승자총통은 심지에 불 붙여서 쏘는거고 조총은 방아쇠당겨서 쏜다.
전쟁 초기에 선조가 왜놈들이랑 싸우라고 여진족 잘 줘패던 신립을 보냄. 근데 싸우라고 준 병력이 다 하라부지나 꼬꼬마, 동네 행려병자들 수준이라 직속병력만으로 쇼부보려고 탄금대로 갔는데, 논밭많은 지형에서 기병으로 깝치다 그대로 순삭당했다.
ㄴ선좆이 싸우라고 지원해준 군대는 자기 지키던 금군이었다. 정예병이란 말이지
ㄴ이놈은 진짜 병신이고 위에놈이 잘아네 선조가 준 병사들은 훈련 안된 너같은 애들만있어서 목숨이 걸리면 싸우겟지 라고 해서 배수의 진을 친거야 병신새끼야
ㄴ 논밭이라기 보다는 진흙밭에 가깝지 않았냐....그런데 진흙밭이라 하니까 신립 새끼 더 병신 같네 에효 씨발
ㄴ 중요한건 신립새끼 탄금대에서 싸우던날 비가 뭉텅이로 쏟아졌다. 논밭이든 진흙받이든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에 싸웠는데 따지는 게 무의미하지 않음?
ㄴ 병신소리
ㄴㄴ실록에 보면 경병8천을 동원했다고 기록되 있고 도성의 무사도 포함되 있다고 적혀있다.(이건 선조를 호휘하던 금군청 소속의 정예병도 포함돼 있다는 소리)
경병 8천에 도성 내의 사대부들은 집안마다 출정하는 군대를 위해 전마 한필씩을 내게 했다고 하고...(여기에 충청도 병력이 얼마나 합류했느냐가 관건인데 기록상으로 신립이 충청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2만 5천에 달한다 요즘에는 지방군과 경병을 합쳐 1만4천~1만6천정도의 병력으로 계산하지만),결과론적으로 볼때 신립이 탄금대에서 일전을 치룬건 병신짓이 되버렸지만 아마도 신립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가 도성으로 가기전에 조선이 운용하는 유일한 야전군이라고 생각하고 대규모 회전 한판을 통해 좆본군의 주력에 강력한 한방을 먹이겠다는 생각을 한듯하다.(문제는 이걸 막아도 가토나 구로다의 병력이 있으니 산넘어 산이었겠지만)
전투 직전 김여물이 썼던 글을 보면 이들도 자신이 조선의 유일한 야전군이란걸 인지한듯 하고 결과적으로 볼때 신립의 전략적 목표설정(좆본군의 주력병력에 대한 일격)은 옳았지만 전술적 목표설정(전장상태로는 좋지 못했던 탄금대에서의 결진)이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관군들이 개병신 노답새끼들이라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같이 싸워줬다. 더욱이 그 지역 토박이들이라 지형도 잘 알아서 잘 싸웠다. 근데 관군새끼들 열폭이 심해서 일부러 뒤지게 냅둔적도 있다.
참고로 선조새끼는 관군이 좆털리는 와중에 의병이 존나 잘 싸워주니까 초반엔 지원도 해주고 칭찬도 해줬다. 그러나 이후 명나라가 도와주니까 바로 토사구팽 해버리고 의병 총 사령관은 역적으로 모함당해서 죽여버린다. 이때 의병들 피꺼솟해서 다 해산함. 이후 조선 역사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은 없었다.
ㄴ무식한 소리 마라 선좆이 의병장들한테 병신짓거리 벌인건 사실인데 이후로 의병활동이 뜸해지는건 그 의병들이 관군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애초 의병장들이 죄다 지역 유력자들인데 니가 아무리 집좀 산다고 해도 몇년간 3,4천명이나 되는 병력에 그 식솔들 생계까지 책임져줄 수 있겠냐?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로도 병자호란이나 구한말처럼 의병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ㄴ 김덕령이나 곽재우 같이 의병장들을 선좆새끼 졸렬 하게 행동하긴 했지wwww. 근데 니가 잘 모르는게 있는데. 의병은 원래 행정체계가 제대로 작동했으면 관군이 됬어야 할 애들이야. 왜군을 남해안 으로 몰아내고 정유재란 전까지 화의 를 하고 있었으니(명나라랑 좆본 이라 둘이서 ) 당연히 비정규 무장집단인 의병은 해산하는게 맞지. 기억해라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사꾼이랑 병사가 하나의 집단이었다. 걔네가 해산안하면 농사 누가 지음? 느그가 지을거임? 그리고 막말로 걔네가 반란 일으키면 어쩔껀데? 실제로 김덕령이 숙청 된거는 그 전에 있었던 이몽학의 난에 가담한 폭도 새끼들 입에서 김덕령 이름이 나와서 그럼. 물론 증거는 종범이었지만. 그리고 정유재란 때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의병 애들이 관군으로 편입되서 관군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선조가 어버버하면서 명나라로 도망가려니까 신하들이 존나 반대했는데 그렇게해서 나온 방안이 광해군을 필두로 한 분조였다. 쉽게 말해 임시정부. 존나 웃긴점은 보통 아버지가 막고 아들을 보내는게 정상인데 선조새끼는 지가 도망감.
ㄴ ????? 현대의 관점을 그때에 들이대면 안된다. 광해군은 정통성도 별로인데다가 (후궁의 자식인데다가(물론 정실 자식은 없었지만) 심지어 친형 임해군도 있었다.) 막말로 뒈짓해도 대체할 수 있는 왕자는 많았음. 근데 왕이 앞장서다가 뒈짓하면 나라 꼬라지가 어케 되겠냐? 당연히 광해군이 죽으러 가고 선좆이 도망가는게 맞는거다. 임진왜란 때 왜 왜군이 보급로도 신경안 쓰고 풀발기해서 선조 잡으러 가고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방어선 점거를 포기하고 최단 속도로 인조의 대피로를 막았는지 생각해봐라. 그 당시엔 왕 = 국가야. 왕의 뒈짓하면 종묘사직이 좆망하는거다.
ㄴ 근데 문제는 친형이라는 임해군 새끼가 강호순이 선량하다 느껴질 정도의 악질 악당이라는 거지. 그냥 취미삼아서 정승을 살해한 위인이라는데 더 말이 필요하냐?
이후 광해군이 하드캐리한다. 근데 분조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센터 만들라고 한 지역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그 방향으로 쳐들어오고 있어서 중간에 강원도 이천으로 빠짐. 이후 선조는 그걸로 꼬투리 존나 잡으면서 내 명령도 어긴 새끼들 니네들 다 짤라버린다고 빼애액 지랄함.
광해군은 그 당시 아들을 하나 봤는데 분조 후 기록이 없다. 갓난애기였는데 장마철이라 분조하러 가는길에 비맞고 독감걸려 뒤진 듯.
이후 히데요시 뒤지고 이에야스랑 합의해서 조선인들을 본국으로 데려옴. 근데 와서 한다는게 항구에서 곧바로 몇 일치 식량 던져주고 니 알아서 사셈ㅋ 이러고 끝냄. 이후 일본에도 이런 내용이 소문나서 납치된 조선인들이 고향으로 가지않고 걍 일본에서 삼.
납치된 조선인 중에 백자 장인이 있었는데 사실상 일본 백자 역사의 시초다. 지금도 그 사람 후손이 백자 장인이고 그 동네 토속신앙으로 신으로 추앙받음. 그 와 반대로 조선에 항복하고 전쟁에서 많은 도움을 준 항왜들은 조선에서 개무시당하고 살았다.
ㄴ이사람이 그 유명한 이삼평이다.
ㄴ?김충선은?
위만 보면 무슨 당시 양민들이 전쟁특수로 탈조센 하여 존나 잘 먹고 잘 산줄 아는데 그것도 기술 되는 놈들만 특수받고 산거지.. 말도 안통하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좆도 없는 디씨럼들을 잘도 귀화 허락해줘서 써먹겠다? 결국 대부분은 노비로 팔리는 신세였다. 특히 당시 흑인 노예들보다 단가가 싸서 그 당시 일본에 있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보통 중국, 동남아, 인도 쪽으로 많이 팔리고 유럽에서 좀 팔렸다고 함.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이들 노비들은 당시 관습대로 남자는 잦이커팅이...
ㄴ후세의 통계로 볼때 당시 국제노예시장에 나온 조선인 수가 1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당시 국제노예가격을 폭락시켰다고도 하는데 가격이 흐긴들에 비해 넘사벽으로 싸서 유럽놈들이 줬나게 사갔다고 하고 동남아 호족들이나 좆본 영주들한테 팔려가서 막료로 종사한 유생들의 사례도 있다.
이탈리아에는 '코레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 살고 있는데, 임진왜란 시절 일본을 통해 노예로 팔려간 소년들에게 그 나라의 이름을 성으로 그대로 붙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코레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
ㄴ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앙헬 코레아가 사실 한국인의 후손이라고?
- 얼어죽을... 아직도 이런 삼류 카더라 믿냐? 근거라고 드는 루벤스 그림도 실제론 조선인 그린 게 아니란 반박도 나오는데. 그리고, 위에도 나왔듯이 당시 똥양인 노예는 Fire Egg 컷팅이 대부분이었다. 미쿡 쪽 노예가 오히려 예외사례.
흑인이 조선군으로 참전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실이다. 명나라 장수들이 포르투갈 선교사들한테 거금을 주고 모잠비크 출신 흑인들을 사갖고 조선에 출병했다. 근데 선조가 이 모잠비크 출신 흑인들을 봤다. 선조는 존나 신기해해서 명나라 장수한테 이 흑인들을 사왔다. 막상 사와서 보니까 체격도 존나 크고 피부도 시커먼게 뭔가 엄청 짱쎌거 같이 생겼다. 그래서 선조는 이 흑인들을 수군에 하사했고 이 흑인들은 잠수부로 활약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흑인들을 해귀(海鬼)라 불렀다.
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의 66%가 못쓰게 되었고 선조의 런조짓으로 인해 빼앗긴 궁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청에 있는 호적자료는 죄다 날아가버려서 누가 양반이고 누가 상놈인지 모르는 상황이 발생했다. 거기에 한 술 더떠 개나소나 자기 군공을 운운하며 관직 달라고 떼를 써댔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궁성으로 쓸 건물이 없어서 친척인 월산대군이 살던 개인 저택을 잠시 빌려서 그걸 궁성으로 사용하니 이를 덕수궁이라 한다.
공신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왜군과 싸운 선무공신과 런조 런닝짓 같이 해준 호성공신으로 나뉜다. 대우는 당연히 호성공신이 더 좋은 데다가 선무공신은 그나마 딱 3명만 1등급이고 나머지는 2등급 이하인 데다가 그나마도 후보만 존나 많았다. 근데 그 1등급이라는 게 이미 고인이 된 이순신, 원균과 오늘내일 오늘내일하는 권율이었다. 권율이 1599년 사망함으로서 선무공신 1등급은 전원 고인이 되었다. 심지어는 런조 런닝하다가 가마에서 내릴때 런조 부축해준 내시조차 호성공신 1등급이었다.
런조의 런닝짓도 평양성 이기고 대소신려들이 말려서 그 정도로 끝났지 정말 가만 냅뒀으면 아마 유럽까지 런조짓 했을 거다. 응, 포르투갈에서 런조가 발견되면 참 볼만할듯.
베트남도 명에 의해 이와 비슷한 일을 당했었다. 일본처럼 명의 2군쯤 되는 애들이 베트남 침공했었다. 그것도 나름 꿀잼이다.
명군 장수들이 공을 다투기 위해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썰이 있으나 사료에 의하면 거짓이었다. 용병으로 고용된 몽골인이나 여진족에 의한 자의적 학살 및 약탈은 있었다.
이 전쟁에서 조선 장수 중 졸장의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는데 싸우기는 싫어하면서 수급에는 욕심이 강하다는 것이다. 딱 두놈이 그래서 양민까지 학살하고 상투를 마꿔 틀어서 조정에 왜병을 잡았다고 구라를 치면서 갖다 바쳤는데 그게 원균과 이일이다.
주요 전투[편집]
- 동래성 전투
- 탄금대 전투
- 임진강 전투
- 평양성 전투
- 이치 전투
- 한산도 대첩
- 금산 전투
- 연안성 전투
- 북관 대첩
- 진주 대첩
- 벽제관 전투
- 행주 대첩
- 칠천량 해전
- 남원성 전투
- 직산 전투
- 명량 해전
- 울산성 전투
- 사천성 전투
- 노량 해전
조선시대 임진왜란 관련 저술과 픽션[편집]
현대 대한민국 임진왜란 관련 컨텐츠[편집]
현대 일본 임진왜란 관련 컨텐츠[편집]
임진왜란 당시 인물[편집]
조선[편집]
- 왕실
- 대신
- 관군장군
- 의병장
- 충의지녀
- 역적
- 내시
- 임우 : 내시 주제에 혼자서 왜군 수천 명을 죽였다나 뭐라나 역시 갓조선의 공신이다.
일본[편집]
-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쟁 일으킨 새끼
- 사이소 쇼타이: 글참모
- 도쿠가와 이에야스: 참전 안한 전쟁의 최종 승리자
- 다테 마사무네: 제2차 진주성 전투 참전
- 고니시 유키나가: 좌선봉장
- 소 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
- 가토 기요마사: 우선봉장
- 와키자카 야스하루
- 구로다 간베에: 군사
- 구로다 나가마사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우키다 히데이에: 육군 총사령관
-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와 가토 뒤치닥거리하려고 출병.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마지막으로 싸운 상대가 이 녀석임.
명나라[편집]
- ↑ 물론 경상우수사 원균이나 경상좌수사 박홍같은 장수들은 소속 수영의 전투함들을 모두 자침시키고 도망갔다...그런데 이러한 원균과 박홍의 행동은 단순히 도망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명령에 따라 육군과 합세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존재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임금이 내리는 명령을 무시하고 본인의 소신을 끝까지 관철해 나가는 무장이 얼마나 될까? 이러한 점을 보면 역시 이충무공같은 영웅은 역시 뭔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 직산 전투의 의의를 낮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 때 왜놈들 기병돌격 안 막았으면 한양이 또 털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