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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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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밥은 아니였다. 동아시아에선 소드마스터였다고 우리 조상님이랑 짱개 조상들이 수두룩 빽빽하게 기록해놓음. 항왜 기록이나 임진왜란 기록들을 보면 단병접전을 귀신같이 잘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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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가 칼싸움을 하면?

칭! 챙! 춍-

일본 봉건시대의 지배계급을 뜻하는 말이다. 서양으로 치면 기사에 가까운 개념. 한국의 양반과도 비교될 수 있겠다.

소개[편집]

키가 작지만 긴 칼을 들고다니는 일본내의 무력행사 계급. 현대로 비유하자면 위관급 이상의 장교들이다.

현대 일본인의 특성으로 거론되는 복종심, 혼네/다테마에 이중성의 근원을 형성했다.

사무라이는 일반 양민이 버릇없을 경우 바로 칼로 베는 권한이 있었다. 그럼 이제 양민들은 본심이야 어떻든 간에 앞에서는 설설 기어야지.[1][2]


덴노 중심의 중앙집권제가 서서히 쇠락하고 지방 영주들, 즉 다이묘라는 계급이 부상하던 헤이안 시대에 형성되었다.

초기의 사무라이는 일자 무식의 무뢰배들로, 그냥 동네에서 유명한 깡패들을 다이묘나 유력가문이 고용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그냥 힘만 세서는 양민들한테 존경을 받아내기 힘드니 나름대로 유교와 불교공부를 하게 되면서 우리가 현재 아는 단순한 주먹패보다는 조금 더 간지나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무라이 문화가 출현했다.

초기의 사무라이들의 주무장은 카타나라는 와패니즈의 생각과는 다르게 말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 혹은 일본식 창인 야리가 주무장이었다.

전국시대에도 보면 카타나로 1:1보다는 말을 타고 일기토를 겨루는 경우가 많았다. 에도시대를 거치며 사무라이들은 공무원에 가까워지고

지방세력에 대한 견제로 사무라이의 상징은 카타나로 남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최전성기는 센고쿠 시대로 각 지방에 난립한 다이묘들은 사무라이 계급의 고용창출을 해주었고 진정한 창조 사무라이 경제가 실현되던 시절이다. 좆병신같은 할복자살 문화도 이때부터 부각이 시작되었다.

당시 사무라이들의 교양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고 하는데, 한 쪽 지방에서는 포르투갈 어까지 알아서 외국인들이랑 클럽가서 백마들과 놀아났던 반면에 한쪽에서는 글자 읽을줄도 몰라서, 그거 숨기느라고 바빴다고 한다.

의리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인간사는 게 다 똑같다. 뒷통수쳐서 얻는 이득이 많으면 거리낌없이 뒤통수를 치곤 했다.

사무라이의 의리와 관련된 미담들이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그들이 평소에 의리를 잘 지켜서가 아니라 워낙 안 지켜서 그런 거다.

전재산 기부하는 부자들이 많아서 그와 관련된 일이 칭송받나. 워낙 없고 한두명 있으니까 칭송받고 그 이야기가 후대에까지 내려오는 거지.


의리에 관한 이미지는 실제로 칼빵넣고 다니던 시절엔 없었고 에도시대에 조선에서 성리학을 수입해온 일본 유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성리학 유입 경로는 조선 통신사.
에도시대 이전 사무라이들은 모시던 주군이 칼빵맞고 죽으면 충성이나 의리 어쩌구 하면서 복수하는게 아니라 바로 항복했다.


존나 쎈척하지만 사무라이도 결국 죽창에 한방이다. (갓죽창)

정작 이들의 후예인 일제말기 똥별들은 너흰 죽어라 난 살테니 하며 부하들은 사지밀어넣고 지들은 항복할 때 까지 살아남았다.

에도 시대에 들어오면서 사실상 헬조선의 선비 포지션이 되었다. 칼을 차고 다녔지만 잘 못쓰는 사무라이가 반이였다.

양키 와패니즈 새끼들은 일뽕에 거나하게 취해서 닌자랑 싸무롸이를 빨고다니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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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선비와 비교하는 역사를 판타지로 배운 좆병신들 위해 설명 들어간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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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을 숙지하시고 문서 볼 때 거슬리니까 갤러리처럼 처 달면서 답글을 다는 ㄴ성애자는 없길 바랍니다... 제에에에발-좀
ㄴ을 달고 싶으면 토론을 파십시오.
ㄴㄴ토론을 안 오니까 ㄴ을 달지.
ㄴㄴㄴ씨발 극혐.

폭동이다!
이 문서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장태완 장군님의 마음가짐으로 반란군노무새끼들의 머리통을 전차로 날려버립시다.

전쟁나면 선비가 왜 싸워? 선비가 무슨 귀족이냐, 나라에서 돈 받아먹고 그 의무로 나라지키게? 그냥 학자라고 병신아. 전쟁나면 세금 먹은 군대가 싸워줘야지.

조선은 그냥 양천제 중앙집권제 국가일뿐, 선비는 애초에 계급이 아니고 그냥 직업 같은 거야. 넌 그럼 대학 교수직을 신분제 사회의 계급으로 보냐? 니가 월세 주는 사람은 너한테 돈 받았으니 귀족임? 무사계층이 되어 전쟁나면 앞장서서 그 돈으로 비싼 사제 무기 사서 총대매야되는거임?

그리고 정상적인 국가라면 군대 따로, 정치인 따로 있는거라고. 게다가 선비 중 극소수만 과거 급제해서 조정에 들어가는데, 그래도 싸우면 안 돼. 왜? 문반과 무반도 모르냐? (둘이 통틀어서 양반이란 말이 생겨난거다). 문반이 전선에 나가 싸워줌? 어쨌든 나라에서 돈 받았으니 칼 들고 싸워야한다고? 현대 한국의 기획재정부 장관보고 전쟁나면 총들고 싸워라는 소리급의 병신 논리다.

아니 오히려 임란 초기때 전쟁 경험 없는 양반들이 야비하게 칠땐 치고 빤스런 할 때 빤스런 할 줄 아는 200년의 전국시대 경험자들인 사무라이와 다르게 자꾸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을 때까지 싸워서 향촌 인재들이 많이 죽어나갔다. 오히려 조정에서도 무관들이 하지 마라는 것도 유교 정신이 더욱 충만한 충성심 높은 문관이 "저 칼쟁이 무관들 주제에 쪼는 거 보소, 제게 병력을 주신다면 제가 해내겠습니다!" 라고 나대서 좆망해버린 적이 좀 됨.

이순신, 권율 이 사람들도 전부 양반 출신이야 병신들아. 그런데 그 양반도 무슨 나라에서 보장해주는 신분이 아님. 양반이 법적 신분이라고 우기려면 현실의 기업가들도 법적 신분이라고 우겨야됨. 이들이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무관이 된 경로는 무관 뽑는 시험에 급제한 경로라서 선비가 문관 되는 것과 조금 다르긴 하다만.

선비는 학자이고, 학자가 되려면 돈 써서 공부해야겠지? 그러면 당연히 돈 많은 집안들이 빡세게 공부해서 자식 출세시키려고 했겠지? 그럼 그런 돈 좀 있는 정치인 집안이 생기겠지? 그런 집안이 고착화 되니까 양반이 "신분"처럼 착시되는 거다 우매한 새끼들아. 그런 집안도 무슨 세습으로 자동으로 정치해먹은 거 아님. 자식도 아버지처럼 조정에 들어간 경우도 충분히 능력 없으면 그 관직 언저리도 못 감. 그게 세습이라면 천조국 부시 가문은 무슨 왕정 세습이라고 우길래?

조정에 들어가기는 하늘에 별따기이니까, 돈 좀 있어서 공부해도 권력층에 못 낀 사람들은 그냥 선비로 남는 거다. 그래도 존나 공부해야함. 왜냐? 급제는 해도 전부 조정에 자리 나오는 건 아니거든. 그래도 급제 인증 따는 게 가문의 영광이자 나중에 이게 선비 집안의 필수가 되었던 거다. 그래서 선비는 무슨 한량처럼 그냥 노는 게 권장 된 건 아니다.

그리고 그 돈은 오늘 날로 치면 세 받아서 얻는 거지, 무슨 유럽 귀족처럼 그냥 나라에서 법적으로 귀족 신분 보장해주고 땅에서 띵가띵가 놀면 돈 들어오는 줄 아나. 그리고 아무리 문/무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 중 선비가 왜 나라를 지킴?

양반 되고 싶다고? 일 안하고 먹고 살 정도의 수입은 있으면, 그 다음은 공부해서 너나 자식들이 과거 급제하고 조정에서 한 자리 주면 됨. ㅇㅋ? 현대사회에서 정치인 가문 되는 거와 비슷하지?


그 반면 일본은 장기간 모든 권력자들이 군 출신인 막부 군부독재+봉건제라고 병신들아. 군부독재 체제가 살기 좋을 거 같냐? 군=정부 체제였단 말이다. 현대 머한민국 군대 체제를 떠올려봐라. 그런 환경을 니네 동네 구, 동, 읍 단위의 민간 정부에서까지 본다고 생각해봐라.

ㄴ 참고로 군부독재란 말은 독재자 혼자라는 뜻이 아니라, 문인이나 왕족 없이 모든 게 군부의 손아귀에 있어서 독재라고 하는 거다. 봉건제라면 군부독재 아니라고 지랄하는 흑우 없제? 한국은 비슷한 거로 봉건제 국가인 고려에 무신정권이 짧게 있었다.

"이기면 관군"이 수백년 된 일본 관용구인데 바로 "누가 이겨봤자 주인만 바뀌지 세금만 내는 노예일뿐"이란 염세주의적인 말이다. 알어? 그래서 임란 때 놀랐던 거다, 여러 번국으로 쪼개진 일본에서는 옆 나라에서 누가 쳐들어오면 민간인은 그냥 시큰둥하면서 누가 이기는지 보다가 이긴 사람한테 납세했지. 근데 예상과 다르게 조선에서는 의병이 많이 일어났지. 지휘자는 대부분 그 지역 마을의 양반들이었고. 일자무식의 평민이 사람들 통솔하기 쉬울 거 같음?

마비키라고 못 들어봄? 전국시대 때 워낙 전쟁쳐해서 세금 60~90% 올리고, 그 후에 비교적 평화로운 에도시대에 와서도 한번 올라간 세금은 절대 안내려오지, 그리고 그때 세금은 대체적으로 쌀. 참고로 조선과 당대 유럽 평균은 세율이 25% 였다. 일본인이 왜 과거에 왜소하다는 인식이 박힌 이유가 충분히 못먹어서다. 통신사 기록 마저도 그 대식가 조선인들이 일본인한테 밥주자 즐겁게 먹기는커녕 존나 엄근진하게 죽을힘을 다해 쳐먹어대는 거 보고 놀렸을 정도로 얘네는 밥이 존내 귀한거였다.

이땐 진짜 세율 50% 내주면 성군 소리 듣던 시기다. 엄마들은 애들이 7살 먹기 전까진 그냥 입하나 덜려고 죽여버리는 일이 많았지. 피임도구도 없었으니까 워낙 많이 태어나기도 했고.

워낙 수백년 동안 습관화 되어서 그냥 "애들은 인간으로 치지 않으면 됨. 그래서 이건 살인이 아니고 애기를 귀신님께 돌려드리는 거임." 이렇게 자기합리화하던 거. 어떤 기록에 따르면 10만호 지역에서 매년 3,4만명의 애가 죽어나갔다고 하는데, 이걸 솎아낸다, 즉 "마비키"라고 한다.

그리고 무슨 나라가 부양 인구 줄이자고 강제로 애기들 죽이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잡히면 처벌했는데도 대다수 일본인들은 이걸 자발적으로 행했고 이게 수백년간 고착화 될 정도로 심각함.

ㄴ일본도 겐로쿠 호황기 보면 무려 농민들 사이에 장거리 여행이 유행해 오늘날 일본 지역 곳곳의 온천여관이 발달했다고 할 정도다. 상공업 융성한거야 이미 조선 통신사들 ㄷㄷ거리며 감탄하는게 널리 퍼진 얘기고. 경신 대기근이나 삼정의 문란이 조선의 모습 전부가 아니듯이 잇키나 텐메이 대기근이 에도시대 300년의 모습을 대표할 순 없음. 세율의 경우 일본은 화폐로 세금을 일원화 했고, 조선은 1000년전 당나라의 조요조 체제를 유일하게 혼자서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세율로 비교할 문제가 아니다. 키가 좆만한건 먹을거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열도 유전자 자체가 좆만하다. 왜냐면 일제시대조차 평균키가 한국한테 지는데 단순히 못먹어서 키가 작다는 니 말대로라면 일제시대에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잘먹고 잘살았다는 소리? 엥 이거 완전 천황폐하의 은혜 아니냐?

ㄴ헛소리하지 말고 일제시대에 한국인 신장은 줄어들었다. 마비키는 잇키나 텐메이 대기근 이전에 존재했고

워낙 심해서 에도 시대 300년 동안 인구에 거의 증가가 없었을 정도다.

ㄴ오히려 에도시대 동안 한일 인구격차가 넘사로 벌어졌다. 전국시대 초기만 해도 조선과 비슷하거나 많아도 1.5배 정도로 추계되는 것이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일본은 3400~3600만 조선은 1700~1900만으로 더블 스코어로 벌어진다.

ㄴ정확하게 말하면 일본의 인구는 17세기에는 증가했고 18세기 초반~19세기 초반에는 정체되어 있었다. 이 당시 일본 인구에 대해선 학자마다 추정치가 다른데 McEvedy와 Jones의 추산에 따르면 1600년에는 2200만 수준, 1700년에는 2900만 정도로 추산된다. 조선은 통계청에서 발행한 인구대사전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에 1400만 정도로 인구가 추산되는데 임진왜란과 기근 때문에 임진왜란 직후에는 1200만 정도로 감소했고 이 후 호란, 경신대기근 같은 요인들 때문에 17세기 중반에는 1100만 수준으로 감소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다시 증가해서 18세기 중후반에는 1800만 수준이였고

그 지경으로 거둬들인 돈이 전부 사무라이들과 다이묘들이 먹었다는 거라고 새끼들아. 거기서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면 적당히 거두는 것에 비해 반항심이 훨씬 더 생기겠지? 그래서 사무라이란 무뢰배들이 중간관리직으로 임명된 거고, 키리스테 고멘이라는 죽여도 법적으로 문제 없는 권리가 부여된 거라고. (실제론 키리스테 고멘은 최후의 최후의 핑계였지, 웬만해서는 서민은 그 전에 뭐라도 트집잡혀서 죽을 이유는 넘쳐남)

진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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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재의 사무라이의 이미지는 에도시대의 공무원화 된 사무라이들이 자기 직업군의 리즈시절을 빨다보니 생긴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방 군벌 난립을 막고 중앙집권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방 세력들을 크게 탄압했다. 그에 따라서 지방 영주들은 쇠락했고, 그 밑에 있는 사무라이들도 쇠락.

그나마 살아남은 사무라이들은 칼보다는 붓을 휘두를 일이 더 많은, 사실상의 행정직 공무원이 되어버렸다

에도시대 때 만들어진 하가쿠레라는 책을 사무라이 정신의 근본이라고 하는데, 이 책의 실상은 존나 "아 전국시대 땐 우린 존나 간지였겠지"라고 딸딸이치는 내용이다. 충성이고 할복이고 존나 뇌피셜을 진실인 것 마냥 써놓았는데, 진짜 전국시대 사무라이라면 병신으로 취급할 내용들이 수두룩하다.

전국시대 사무라이 전성기 땐 자식이 결혼 잘해서 재산 상속 받을 게 생기면 그거 물려받으려고 아버지가 아들의 양자가 되거나 이모랑 결혼하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무자비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진짜 사무라이다. 해적질 노예시장 뭐 안하는 게 없었다. 수틀리면 배신하고도 능력있으면 다른 쪽에서 스카웃 받았다.

그로 인해 사무라이가 얼마나 가혹하고 서민들이 싫어했냐면, 전투가 끝난 후 패퇴한 적의 낙오무사들을 눈에 불을 켜고 수색해서 사냥했다. 왜냐하면 낙오무사를 죽이면 그가 가진 무구와 소지품을 빼앗아서 나중에 쓰려고 챙겨두거나,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었고 생포하면 노예로 팔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죽인 사무라이가 고위 지휘관이었다면 한 마을의 세금을 몇 년 면제시켜줄 정도로 보상이 매우 짭짤했으니 농민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패퇴한 사무라이들을 찾아서 족쳤다. 전국시대의 농민은 평범하게 농사만 짓는 이들이 아니라 유사시에는 아시가루로 복무하는 병사들이기도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다.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걸로 유명한 아케치 미츠히데도 하시바 히데요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군에게 박살난 뒤 도망치다가 낙오무사 사냥에 나선 농민들의 죽창에 찔려 죽은 뒤 목이 잘려서 히데요시에게 보내 죽음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나온 일본의 속담이 '낙오무사는 억새꽃에도 겁을 먹는다.'(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와 똑같은 의미다)이다.

에도 시대 때는 사무라이가 몰락해서 덜하지만 이때도 서민들은 사무라이를 존경하지 않았다. 몰래 혼자 있는 사무라이 찾아서 시비 걸고 도망가는, 목숨 거는 벨만튀를 하고 다녔다. 그나마 이것도 도시에서 할 수 있었지 누가 누군지 다 아는 향촌에는 이런 거 못함. 어쨌든 사무라이는 이거 갖고 공론화 하면 사무라이 주제에 서민한테 당하고도 아무것도 못했다는 사실이 쪽팔려서 나중에는 서민들 피해다니는 꼬라지가 됨.

1868년 명치유신(메이지 유신) 후 막부가 권력을 뺏기면서 데미지를 입었고 1877년 서남전쟁을 계기로 크게 몰락하고 말았다.

19세기 중~후반 쯤으로 가면 검을 쓰거나 하는 것이 사실상 예장용으로만 익히는 경우도 많아졌고, 본질적인 모습의 사무라이보다는 그저 사무라이 명문가 등으로 남게 되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사무라이다'라며 뽐내고 다녔고 그것이 현재까지 내려와 현대의 사무라이 이미지가 된 것.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진짜 사무라이들이 그나마 있었지만 그마저도 사라지고 만다


좀 더 정확하게 살피면 현대의 사무라이 정신, 즉, 무사도는 일본 정부 입장에서 나름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서 체계를 잡아놓은 이론이라고 보는게 옳다.

니뽄국의 니토베 이나조는 서양의 크리스트 정신으로부터 좋은 장점들만 싹 긁어모아 기존의 사무라이라는 개념과 융합시켜서 무사도라는 책을 출간한다. 사실상 이때부터 사무라이 정신을 급조한 일종의 경전이 생겨난 셈이다. 거의 기사도를 베낀 수준.

현대 일본인들은 정작 그 무사도라는게 어디서부터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고 지금도 무사도 무사도거리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사무라이의 온갖 미화된 이미지가 튀어나온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고 이 거지같은 무사도를 적용해서 일본 제국은 병사들에게 죽음을 향해 돌격하는걸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칼보다 사상이 무섭다는 말은 바로 이런걸 의미하는 것이다.

냥반님네 선비들은 빨아제낄 리즈시절도 없잖아?
니가 이용해먹는 쪽이라면 빨아도 되겟지. 근데 실제로는 이용당해 사지로 내몰리는 쪽일 확률이 99.999% 순금 퍼센티지다. 그래도 빨래?
좆병신이, 선비랑 왜 비교함? 학자가 전쟁나면 칼들고 무쌍찍어줘야 됨? 나라에서 녹을 받아먹으면서 보장 받는 귀족 계층도 아닌데? 그냥 현대로 치면 그냥 대학 교수나 연구원 배출하는, 스스로 공부하는 좀 있는 집안 건데? 사무라이는 신분제 사회에서 나랏돈 쳐먹는 정식 계급인데? 둘이 같이 비교 가능하냐?
비교하려면 무반의 장졸들이랑 비교해야지. 역사공부를 판타지로 했냐? 조선에서 그나마 엘리트 군사 비슷한 건 갑사들이었다.

이놈들이 일본의 정신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데 일제의 수많은 전쟁범죄와 학살은 이런 사무라이 정신에 기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국화의 칼이라는 저서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다.

이건 약간 지랄인 게 간혹 국가나 민족을 위해 지들 목숨도 쉽게 버렸다는 헛소리도 있느나 막상 좆본의 ㄹㅇ 사무라이 혈통들은 전쟁범죄와 학살강간은 하고 다녀도 다수가 지들 목숨이 아까워서

목숨 구걸이나 하고 할복이나 자폭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 하찮은 것들이나 세뇌당해 뒤짐. 좆본 병사들도 고참들은 그 꼬라지를 보면서 존나 현타나 겪고 군기 개판으로 만들면서 어떻게든 전쟁터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했다.

일본 대본영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사무라이의 연장선 이라는 건데 최소한 러일전쟁 이후 일본 군부에서는 오히려 최대한 사족(구 사무라이)집단을 배제하려 애썼고 그로인해 일본군의 인적 자원은 정통 사무라이 출신이 아니라 사무라이 코스프레 하는 빈농출신들로 채워지게 된거다.

진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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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이묘의 호위장들이다.

사무라이를 한자로 쓰면 이다.

즉, 다이묘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모시니 이를 의역하자면 경호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게 해괴하게 일본 무사의 상징이 되었다.


현실은 조선 농민들한테도 피지컬로 압도당해 짱돌 찢기로 머갈통 터지던 놈들이었다.

왜놈이 그냥 왜놈이 아니지.

ㄴ근데 이건 아니다.임진왜란때 백병전으로 도저히 일본을 당해낼 수 가 없었다. 당시 사무라이는 커녕 그 아래 아시가루들한테도 조선병사들 백병전으로 개털렸다.

ㄴㄴ둘 다 맞는 얘기임. 농사짓는 농민이랑 얼마 전까지 전국시대에서 창들고 싸우던 애들이니 털리는게 당연하지... 농사일 피지컬이니 뭐니 해도 우리 같은 파오후 좋밥이나 개털지 비슷하게 일해오고 전투훈련 받은 상대라면 뭐... 근데 짱돌로 머가리 깨지던 것도 맞음. 싸울 때는 사거리 긴게 일단 먹고들어가고 짱똘 던지면 죽이는건 힘들어도 불구는 쉽게 만듦(뼈만 부러져도 저 시대 의술이면 불구될 확률 높음). 돌 맞고 졌대요 역시 왜놈! 이 아니라 조선의 전통 짱돌던지기가 생각보다 존나 무서운거(마을끼리 대항전 수준으로 하다가도 수십명 죽는게 조선 돌던지기 놀이였는데 하물며 죽이려는 생각으로 한다면...)

ㄴㄴ 돌의 위력은 무시못함. 그 로마 제국 군단도 로도스 섬 출신 돌팔매 전문 용병들을 고용한 적 많음. 거긴 그냥 던진 게 아니라 슬링으로 던진건데, 주먹만한 돌을 대형 새총으로 날리나 슬링으로 날리나 존나 위험한 건 매한가지임,

ㄴㄴ 실록 기록 보면 양손으로 들고 다니는 폴암 대형 도리깨로 왜군 400명 머리 뽀갠 사람도 기록되어 있음. 기억하자. 이때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인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상비군도 유지하기 힘든 시절에 병사 바로 징집해서 투입하는 환경이면 그들이 가장 갖추기 쉽고 (평생 바느질 해온 아내가 만든 면갑)과 수십년간 뼈빠지게 다뤄왔던 농기구와 비슷한 무기가 많이 쓰였다.

현대 와서 사무라이가 부풀려진게 찐한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일본을 보는 양놈들의 기호와 그걸 알아채고 열심히 선전하던 일본덕인데

ㄴ메이지 시대 직전에도 할복 퍼포먼스 한다고 서양인들 앉혀놓고 보여줬는데, 서양인들도 "아 드러 미개한 원숭이새끼들"이러고 지들도 드디어 쪽팔린 걸 알았는지 당분간 할복 같은 거 지양함. 미시마 유키오가 1970년에 할복한 게 대서특필 됐을 때도 일본에서는 "저 구시대의 악습을 왜 함? 좆병신새끼가 으휴"이런 반응이 대다수 였음.

지금의 환상처럼 일본도가 존나 쌔고 사무라이는 최강의 검사다 이런 수준으로 빨아줄만한 존재도 아니고

사무라이 정신도 현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미개하기 짝이 없는 개념이다.

그저 서양놈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거리였을 뿐이다.

세상에 사무라이 같은건 일본에만 있는게 아니다. 사무라이같은 전사계급은 어느나라 역사에나 존재한다.

너무 환상을 가질필요도 너무 깎아 내릴필요도 없다.

그냥 칼 잘쓰고 방어력 존나 구린 라멜러 갑옷입는 동양의 미개한 전사일뿐이다.

추신쿠라[편집]

추신쿠라(충신장)라고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다. 혹은 겐로쿠 아코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가부키가 만들어졌는데 좆본에 있어 '심청전'이나 '놀부전' '춘향전'만큼 민간에 히트친 고전대작이다.

헐리웃의 47로닌은 이걸 바탕으로 만든것이다.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한 지방 영주가 도쿠가와 쇼군을 배알한 자리에서 쇼군 옆자리의 모리배가 존나 갈궈대서 팩폭을 견디지 못하고 칼을 뽑는다.

쇼군 앞에서 칼 뽑으면 뒈지기로 되어있어 즉석에서 할복당한다.


그러자 실업자가 된 영주의 부하 사무라이 47명이 그 모리배 관리를 난도질해 죽인다.


죽인 관리 머리를 영주 무덤에 갖다놓고 부하 47명이 의리를 지켜 할복 자살을 한다.

일본인들은 이 일화에 감동을 느낀다고 한다.

ㄴ씨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네.... 갈궜다고 50명 가까이 뒤지냐
ㄴ 존나 미개한거 봐라 ㅋㅋㅋㅋㅋㅋㅋ
ㄴ 백이 숙제 굶어뒤진걸로 충절을 지켰다고 빨아재끼는 조선 선비들이랑 뭐가 다르다고 미개드립을 치냐 ㅋㅋㅋ

거위와 구슬[편집]

고을의 갑부집에 숙식하는 낭인무사 아빠와 아들이 집주인의 구슬을 훔쳤다는(삼킨다음 나중에 똥싸서 빼돌리는 방식의) 누명을 쓴다.

낭인무사가 아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즉석에서 아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보여준다.

기절 직전인 집주인과 집안사람들을 낭인무사는 '무사의 명예를 의심했다'며 모조리 난도질한다.

이쯤되면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알겠지만 무사는 천한 것들하고 다투느라 명예를 더럽혓다면서 할복한다.

한편 거위가 꽥꽥대며 걸어가다 구슬이 들어있는 똥을 싼다 뿌지직.


이게 고전설화라는 좆본인의 머가리 상태가?


ㄴ 굳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면 뭔가 교훈이 있는 이야기인거 같은데. 저렇게 명예만 좇아서 목숨을 허무하게 버리지 말라는건가?

ㄴ 목숨을 버릴지언정 무사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병신같은 사상 주입용 프로파간다.

거위와 구슬 조선판[편집]

비슷한 얘기가 조선에서도 전하고 있는데 조선의 개국공신 윤소종의 아들 윤회가 여염집에 잠시 묵었는데 마찬가지로 귀한 보석이 사라졌고 윤회를 도적으로 의심해 집주인이 기둥에 묶어놨다.

윤회는 거위가 구슬을 삼키자 거위를 살리기 위해 치욕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똥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고 이를 알아차린 주인은 잘못했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주인이 왜 거위가 삼킨지 알면서 말 안했냐니까 그 말을 했으면 당장 거위 배부터 갈랐을거지 않냐며 거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 답변했다 한다.

좀 지나치게 동물애호가스럽고 윤회라는 개인의 덕망을 후빨하는 설화나 적어도 저 위에 나온 눈물의 할복 똥꼬쇼보단 확실히 정상적인 일화인게 분명하다.

미디어 속의 사무라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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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통칭 키리시테고멘. 그렇다고 해서 사무라이가 막 갑질하면서 양민들을 슈슈슉하고 베고 다니진 않았다. 얘네들도 유교 영향을 받아서 칼을 쓰기 전에 자신의 인덕을 보여서 양민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양민을 실제 칼로 베는 것은 무척 가오상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2. ..라고 전 작성자가 썼지만 사실 이게 그렇게 특기할 사항은 아니다. '공서방어정서'에 의하면 키리스테고멘(우치스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는데, 첫번째. 평민이 고의로 무사의 행동을 방해하거나 무례한 언동을 한 상황에서 / 두번째. 무사 개인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졌다. 라는 상황에서만 정당방위로 칼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현대기준으로보면 즉결처분권이 인권에 반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당시 기준으로보면 그리 혹독한 법률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개 평민을 벤 무사들에겐 할복명이 떨어졌다. 심지어 위 두가지 상황을 충족한 상태에서 평민을 벤 무사들 중에서도 이를 입증치 못해 할복행된 무사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에도시대에는 금수저이거나 금수저 빽이 없는 중하급 사무라이가 오히려 사리고 다니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