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무위키
한국사의 시대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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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 탐라 · 우산 두막루 |
남북국시대 발해 · 신라 · 탐라 · 소고구려 · 소백제 · 보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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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신라 · 발해 태봉 · 후백제 (반란세력) |
통일왕조 시대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대한광복군 정부 · 대한민국 임시 정부 |
군정기 미군정 · 소련군정 |
분단시대 대한민국 · (자유조선) 북괴 (반란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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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의 계보 | ||||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개요
조선국 대조선국 朝鮮國 / Kingdom of Choson 大朝鮮國 / Kingdom of Great Choson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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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한양 |
대륙 | 아시아 |
인구 | 약 17,000,000(1907년) |
인종 | 한민족 |
추가 정보 | |
언어 | 중세 한국어(~16세기) 근대 한국어(16~19세기) 현대 한국어(19세기~현대) |
종교 | 유교(성리학) |
(좌) 명나라 황제복(노란색), (우) 조선 왕복 혹은 명나라 번왕복 or 황태자 복(푸른색, 붉은색)
명, 청의 500년 제후국
존속 기간: 그레고리력 서력기원 1392년 8월 13일~1910년 8월 29일[1]
서기 (그레고리력) 1392년 8월 13일 혹은 (율리우스력) 8월 5일 (음력 7월 17일),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세운 나라로 왕은 곤룡포(4개의 용, 붉은색)를 입었다. 다만 위 사진에서 보듯이 이성계는 특이하게 푸른색 용포를 입었다.
같은 경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체재의 일본이 '명의 속국'임을 인정 받으면서 명 황제에게서 조선의 곤룡포와 동일한 곤룡포를 하사 받았다. 사진은 KBS에서 방영한 '임진왜란 1592'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기한 김응수 씨가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다.
조선 초기 정도를 빼면, 일제시대, 북한과 함께 한반도 역사 최악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으며 외국에서도 중국에게 무분별한 사대와 힘이 없고 변방의 국가로 취급된 이미지로 그 취급이 좋지 않다. 구한말에는 영국이나 미국도 개병신으로 보게되었음. 고종이 일제에게 먹히기 직전 타이밍에 미국에게 도움 요청했는데 국제정세는 실리에 움직여서 미국도 일본편에 섬. 참고로 조선이 일본보다 강했다는건 1450년 까지의 이야기지 임진왜란으로부터 100년 전에도 일본이 더 강했을듯하다.
그런 개병신 같은 나라였는데 2000년대 들어서 사극을 빙자한 판타지물때문에 이미지가 세탁되어서 한국사의 황금기인 마냥 재포장되었다 ㅅㅂ... 아니 미국처럼 남의 나라 사람을 노예로 쓴게 아닌 자국민을 노비로 부리는 이상한 나라인거에 이상함을 느껴야되지 않나?
생각해보면 의외로 조선이 현대 대한민국과 크게 연관성이 있지는 않다. 오히려 나라를 못 지키고 원숭이 제국에게 박살 나는 바람에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후손들은 나라를 지키려고 군복무를 필수 하게 되었다.[2]
주위 대부분이 이씨 조선도 공식 명칭 취급하지만 한국만 이씨 조선을 멸칭으로 취급한다. 그러므로 한국말 잘 하면서 리씨 조선이라 하는 인간 신고해보자. 운 좋으면 절대시계 받을 수도 있다.
세계가 보는 조선의 이미지
</gallery> [3]
세계적인 강국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속국과 약소국으로 더럽힌 흑역사 그 자체
걍 학계의견만 적겠다. 考 에드워드 와그너(하버드)-考 제임스 팔레(하버드)-존 던컨(UCLA) 등 한국사를 외국에서 연구한 사람들의 견해는 대충 이렇다
1. 조선은 고려를 계승하였으며 핵심지배계층은 동일하다. 고려와 조선은 연속적이다.
2. 조선은 잘조직된 중앙집권화 시스템을 완성시켰으나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사회였다.
3. 조선의 폐쇄성은 왕조의 영속에는 큰 도움을 주었으나 근대화와는 별 관련이 없다.
해외 사학계에서는 조선을 명/청의 속국으로 취급하고있다. 영국, 미국 논문에 조선은 중국에 종속된 나라라고 나옴. 또 강화도 조약, 조청수륙무역장정 등의 국제법 조약에서는 조선은 청의 속국임을 대외적으로 명시했음.
해외사학계에선 조선을 명/청의 tributary state라 분류하는데 이건 속국과는 다른 개념임. 서양사에서 여기에 해당되는 관계는 나폴리왕국과 교황의 관계가 대표적인데 나폴리왕국이 교황청과 이런 관계였다는 이유로 나폴리왕국을 교황령의 일부라 해석하지는 않음. 이 tributary state에 포함되는 국가들 중 1840년 런던조약 체결 이후 ~ 1882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기 이전의 이집트 같이 종주국에게 매년 세금 받치고 주권에 여러가지로 제약받는 케이스도 있었는데 이집트의 경우에도 이 시기에는 사실상 독립국이었다고 취급함. 물론 이집트의 경우 40년 동안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저런 관계 유지하면서 독립국 상태였다가 1882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이후엔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나 다름이 없는 신세가 됐다. 청나라 기록에서도 조선은 자주국이며 내정과 외교는 거기서 알아서 한다는 기록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강화도 조약에서는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조항이 1관에 있지 않나. 굳이 자주국이라는 조항을 넣은거 자체가 중국의 속국이라는 근거지. 정말 자주국이면 굳이 자주국이다 라는 조항을 넣을 이유 자체가 없거든 ㅋㅋ
애초에 운요호 사건 일으키기 전에 일본이 청나라로 공사 보내서 조선에 대한 입장 물어봤을 때 청나라 측에서 조선의 내정 및 외교에 대해선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며 종주권 부인하고 있었음. 그래서 일본이 강화도조약 체결할 수 있었던거다. 청나라 측에서 종주권 부인하고 있었고 내정과 외교에 대해 별다른 간섭도 없었는데 이걸 속국이라 보긴 힘들지.
관련 사료 올려드림. 청사고 조선 전 내용임. [4]
“ |
임금이 경기 감사 유엄(柳儼)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때에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의 행차가 있었는데, 경외(京外)에서 어수선하여 뜬소문이 크게 떠도니, 임금이 몹시 근심하여 도성을 지키는 것과 강도(江都)에 들어가는 것의 편의 여부를 유엄에게 물었다. 이에 유엄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외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자, 유엄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약소 국가입니다. 몽고(蒙古)가 공격해 오면 청인(淸人)의 경우와 같이 접대(接待)해야 하고, 비록 서달(西韃)이 공격해 온다 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할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아무 대답 없이 주서를 돌아다보며 이르기를, "이런 말들은 모두 기록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약소 국가이다. 그러나 유엄의 대답한 말은 어찌 이다지도 무례(無禮)하단 말인가? 식자(識者)로 하여금 한심하게 여길 만하니, 임금의 대답이 없었던 것도 마땅한 일이다." |
” |
— 영조실록 58권
|
고려 사람들이 보면 뒷목잡고 쓰러질 발언이다. 고려 때는 쌈닭이 되고 존나 치열한 중립 외교로 자주성을 어느 정도 확립했고 실제로 여진족이나 거란족에게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였지만 중간에 원나라에게 간섭을 당하기는 했는데 원나라가 막강해서 그랬던거지 일방적으로 주변 국가들에게 쳐맞은건 아니다. 고려말기에는 이념전쟁이 심해서 정치 제도를 한번 갈아엎기는 했어도 내부의 규칙만 바꾼거지 외세에게 쳐먹히는걸로 끝난 비극은 없었다. 고려도 무신대우로 인해서 무신쿠데타 일어나고 문벌귀족이나 권문세족 등등 정치적 문제도 많았지만 그때는 중세시절이고 조선말기에는 근대사회에 접어들기 시작했음에도 고대사회에 가질법한 문제점을 다 가졌다.
고려도 자민족을 노예로 쓴다고 악명 높아서 몽골인이 극딜했는데 솔직히 남은 사료가 별로 없어서 그렇지, 우리 민족 특유의 전통일 수도 있다.
이 나라가 현대의 한국에 끼친 영향력이라고 한다면 모조리 부정적인 영향력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짱깨나 쪽본같은 주변국이나 일부 서양놈들이 한국을 무시하는 이유중에 조선에 대한 원인도 있음.
짱깨놈들은 조선은 자기들의 속국으로 살았다고 까대고 쪽본놈들은 식민지배 아니였으면 원시부족으로 살았다고 까댄다.
천조국, 브리튼, 불란서, 로스케 모두 조선과 연관된 역사는 차마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한다. 그나마 경복궁은 조선왕이 살았던 곳이라고 문화홍보를 해줘서 외국 사람들이 방문해주기는 하는데 그마저도 일부 유물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있는거지
외교/정치/제도 같은 사회요소에 대한 긍정평가는 어쩌면 전무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서양놈들이 보는 황인종 이미지는
- 일본 : 예전부터 강한 국가였고 시민의식도 탑클래스
ㄴ여기서 예전의 기준이 뭐냐?
ㄴ 서양은 근세나 근대 기준으로 인지도를 알아보기때문에 여기서 예전의 기준이라면 뭐겠냐
- 한국 : 최근에 뜨기 시작한 국가인데 가끔식 북한이랑 헷갈림
- 중국 : 황인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여러모로 황인종 이미지 말아쳐먹음
도대체 왜 최근 들어서 알려진 국가라고 평가되느냐?
바로 조선시대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 조선 역사는 최악의 콤플렉스로 손꼽히며 세계사적인 시각, 객관적 역사관에서 바라봤을 때 국내 사학자들이 가장 정신승리, 짜집기, 왜곡 등을 즐겨하는 파트이기도 하다. 세계사 시각, 특히 서구학계 관점, 애초에 전 세계에서 국내 사학계를 빼면 조선의 대한 시각과 이미지는 중국의 클랜국이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유투브나 구글에 'Vassal Of Qing'을 치면 조선이 나오는 것을 손쉽게 볼 수 있고, 미국인들이나 서양인들의 역사 유튜브 영상에서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표시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3] 뿐만 아니라 식민사관이 만들어지게 제공한 나라이기도 하며, 온갖 한국에 병신 같은 이미지는 모두 미개한 조선에서 나왔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안 그런 영상이나 지도도 있다.구글에서 Qing dynasty를 쳐보면 청나라와 조선을 별개의 나라로 취급한 지도도 몇 개 발견할 수 있음. 아니 애초에 미국인이나 서양인이 그렇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도 안 하고 무조건 옳은 거임? 그들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봄? 외국인이 똥을 메주라고 하면 그대로 믿을 양반일세?
19세기에도 조선이 독립적인 국가임을 주장하는 외국인이 있었다.
1980년대부터 국뽕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사에 대한 미화, 왜곡이 끊임없이 지속되었지만 미디어, 핸드폰 발달로 조선이 얼마나 좆병신인지 알게 된 국민들의 사고관에 큰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 그러자 요즘엔 조선을 띄우기 위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는 전시대 역사인 고려를 까면서(동족상잔)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복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2022년 현재 현대 대한민국은 이러한 조선이 똥 싼 이미지들을 대부분 개선하는데 성공했다. 삼성, 현대, LG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창출했고 IMF 선정 세계 10대 경제 대국, 파리 클럽의 회원국, G20 주요정상회의 국가, MIKTA 리더국으로서 현재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국가로서 발돋움했으며, 세계적으로도 '지역 강국' 위상을 부여 받으며 청이나 명의 속국으로 취급되던 조선과 달리 '작지만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역에 대해 소극적이던 조선과 달리 대외무역흑자를 G7 국가 이탈리아보다 더 많이 내고 있는 나라로, 최근엔 민주주의 지수 증가, K-POP(BTS, 싸이) 같은 세계적인 문화 콘텐츠 발생, 성의 자유화 등으로 조선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 조선은 그 반면교사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조선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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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좆같은 때거지들에게는 강력한 정화광선이 필요합니다! 이 문서는 정화광선으로 모조리 죽여버려야하는 저그보다도 더한 때거지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새끼들은 정화광선으로 정화시켜 죽여버리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익도 안되는 떼거지들입니다! 이 틀을 본 위키러 여러분! 부디 이 문서에서 다루는 때거지 새끼들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모조리 죽여버리십시오! 제발! 적을 정화하리라! |
- 쪽본이 패망하자 백성들은 임시정부와 광복군 등 독립에 힘쓴 지식인들과 군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정작 조선 왕족은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거부를 당했다. 이는 당시 백성의 여론이 조선 왕조에 대한 반감이 큰 것을 이유로, 이승만이 민심을 받아들인 갓-정책이다. 다만 이후 박정희가 입국 금지를 풀었다고 한다. 그래도 임시정부 시절에는 조선 황실 우대 조항이 (일단은) 있었다고 한다.
- 고려가 만든 '작지만 강한 나라' 이미지를 전부 깎아먹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명나라는 조선하면 고구려와 고려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일본쪽바리에게 신 나게 얻어맞자 그때부터 '조선은 참 문약한나라구나'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피해를 따지면, 조선은 이겨도 이긴 게 아니었다. 일단 엄청난 학살과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 때문에 인구가 급감했고 전쟁의 주된 무대가 한반도였기 때문에 땅은 황폐화 되어서 농사가 매우 힘들어졌다. 수많은 문화재도 불탔는데 고려 실록은 전부, 조선 실록은 판본 1부 빼고 전부 불탔다. 이후에 경신대기근까지 겹치면서 국력은 지구 내핵을 향해 드릴을 뚫고 있었다. 명이나 일본도 역시 피해를 입었으나 조선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명나라가 망한 이유는 만력제의 병신짓과 대기근 때문이지 임진왜란 때문이 아니다.
- 1897년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을 세우고 대외명칭을 'Dai-han'(대한)으로 정하여 외국 선교사들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리려고 했으나 듣보잡 취급 당하고 전부터 부르던 Korea로 불렀으며, 지금도 Republic of 'Korea'를 영문 국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 명이 있어야 조선이 있는 법...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사실 조선에 매우 어울리는 말이다. 빵셔틀로서 고통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러워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 제임스 팔레란 한국학 미국 학자는 조선을 '노예제 국가'로 규정하며 조선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국민을 노예로 만든 유일한 나라라고 평가하였다. 이 평가에 대해 국사학자 아무도 태클을 걸지 못하다가 유일하게 반박한 사람이 있는데, 뉴라이트로 유명한 이영훈이다. 다만 서구의 Slave와 조선의 노비를 같게 볼 수 있는지는 아직 논란이 좀 있다. 이 사람은 남북전쟁 당시 미국도 노예제 사회로 봤다고 한다.
- 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전혀 없었다. 물론 고구려처럼 국력은 ㅅㅌㅊ 수준이였지만 지나치게 이전인 과거사는 몰라도 조선은 근대국가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였는데도 듣보잡 취급이다. 그래서 국내 반크나 사이버외교사절단 등이 유튜브나 미디어를 통해 꾸준히 홍보하고 있지만 여전히 효과는 미지근하다. 애초에 문화력이 우수한 나라였다면 17~18세기의 일본처럼 서구에서 자포네스크라도 유행시켰을 텐데, 그냥 문화가 평범하니 해외에서도 안 알아준다는 게 지배적이다.
- 사실 조선 왕조가 일본으로부터 나라만 지켰어도 군대 갈 확률이 적었을 거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징병제는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일본 경제재건의 아버지 김일성 씹새끼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 보통 군사력이 약하면 문화적으로 발달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대표적인 게 송나라) 조선은 한글 말고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게 한 가지도 없었다. 『일동장유서』에서 조선 사신단이 일본의 수치 사용을 보고 조선은 수치를 다루는 방법조차 모른다며 한탄하였으며, 위생의 개념이 없어 목욕을 하지 않았고 길거리에 용변을 보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실제로 일제에 먹혔을 당시와 일제 패망 직후 해방 당시에도 문맹률이 90%에 달할 정도로 백성들은 글자를 몰랐다. 오직 양반만이 글자를 쓸 수 있고 양반만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그것을 본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만들어준 글자가 바로 한글이다.
- 조선 시대 옹호자들을 보면 이들이 마조히스트가 아닌가 의문을 품게 된다. 신 나게 두들겨 처맞고 문화력도 융성하지 못했으며, 세계적으로도 변방으로 취급된 나라가 뭐가 좋아서 빠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꼭 마조히스트적인 면만 있어서 빠는 것만은 아닌데, 국내에 전주 이씨나 여흥 민씨, 안동 김씨 같은 조선 시대 이름 있는 명문세가 후손(이마저도 매관매직이지만)이 수백만에 이르기 때문에, 자기 조상뽕에 맞아 빠는 경우도 많다. 족보 자랑 하는 놈들은 죄다 자기 족보 말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병신들이니 그러려니 해라.
- 보통 국까 카테고리는 역센징 일뽕만이 들락거리는데, 조선 왕조 카테고리는 역센징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일반인도 병신 같은 나라라고 기여하고 가는 유일한 문서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휴전선 이북의 모 불법단체조차도 조선이란 이름을 계승했다고 자뻑하면서도 조선시대를 극혐하며 맹비난을 퍼붓는다 그래서 북괴에서 조선시대를 가르칠 땐 이조(李朝)라는 멸칭으로 부른다. 근데 어차피 지금 지들의 모습도 조선시대 그 이하이자 하위호환인 모습인데 결국 누워서 침뱉기 아닌가?
- 한국 여성들이 제일 극혐하는 역사다. 대다수의 조선 혐오 증상은 한국 여성들에게서 발원되며, 대표적으로 성리학의 산물인 남존여비, 현모양처, 사농공상, 군인 푸대접(문과 중시, 무과 천시) 등이 대표적이다. 시집 가면 시어머니가 갈구는 풍습도 조선 남존여비-현모양처 단계를 타면서 깊숙이 뿌리내린 악습이다. 반면에 한국 여성들이 제일 호감으로 여기는 역사는 고려다. 아휴 진짜... 요즘 일부 여자들 무고 무섭다. 아니... 세모자 사건이나 서정범 교수 무고 사건을 보면 벌써 1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씨발 정말 전국적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도 시행해야 하나?
- 웬만하면 모든 한국 역사를 날조해서 미국으로 만들어버리는 환빠들도 혐오하는 나라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최근 환빠들은 조선이 아예 반도에 있지 않고 아메리카에 있었다는 '아메리카대조선'이라는 설을 퍼뜨리고 있다.
- 일본, 대만, 중화인민공화국 등 인접 국가 모두가 만만한 약소국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1800년대 이후에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도 조선을 만만하게 봤다. 한 나라도 아니고 여러 나라가 다 병신으로 본다면 그것은 상대가 우릴 비하하려 왜곡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업보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짱깨 새끼들은 청나라 시절 생각하면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있다고 봐야한다.
- 매년 미스코리아 같은 대회를 창설해 전국 8도에서 가장 이쁜 여자들을 뽑아 명나라에 처녀로 조공했다. 다만 처녀 조공은 세종 시기에 폐지되었다고 함. 세종이 너무한거 아니냐고 존나게 싹싹 빌어서 폐지함 ㅇㅇ
- 국가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서 백성이 나라를 지킨 유일한 나라다. 대표적인 게 임진왜란이다. 고종은 아예 생판 다른 나라인 러시아 공사관으로 튀는 기행을 보여줘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에게 빅-웃음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 국가가 다른 나라 군대를 불러서 자국민을 학살한 유일한 나라다. (1894년 9월) 제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고종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제1차 농민 봉기 (동년 3월) 때 전주성을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당했던 트라우마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10년 전 갑신정변 때 맺었던 톈진조약 핑계로 청군과 같이 한반도에 들어왔고 수많은 의병을 학살했다. 어찌 보면 청일전쟁의 실질적인 원흉이 바로 고좆이다.
- 국가가 자국민의 절반을 노비로 부린 유일한 나라다. 전 국민의 40%가 노비였다. 40% 노비의 대다수는 전쟁 포로가 아니고 자국민이었다. 다만 정석 노비로 부리면 세금 낼 놈들이 없어지니까, 봉급도 주고 땅도 빌려주는 일종의 노동자 개념으로 부렸다. 몰론 공노비 한정으로 사노비는 그냥 노예 그 자체였을 뿐이다.
- 부민고소금지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왕에게 상소문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멀쩡하게 돌아가던 청와대 국민청원을 뜬금없이 섭종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 자국 역사 왜곡에 가장 앞장선 나라다. 정통성을 위해 고려사를 일정 부분 훼손 시도했는데, 세종과 정조가 이것을 금하여 그나마 〈고려사절요〉 같은 사서가 남게 되었다. 또한 발해를 '북적' 취급해서 고구려와 조선을 별개의 역사로 봤을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을 정통성으로 보았다. 현대 우리가 '단군조선'을 정통성으로 보는 것은 환빠 역사학자들이 그나마 조선의 악습 사관을 개선한 유일한 공으로(유일하게 환빠를 좋게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은 '소중화 사상'을 외치며 중국인과 혈육적으로도 내선일체하려고 노력하였다.
- 짱개, 쪽본 놈들도 조선이란 단어가 욕인 걸 아는지 서로 '서조선'(물론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북한이긴 하지만 어쨌든 짱깨국 내에서는 공산당 비판을 대놓고 하다가는 공안이 마라탕을 배달하러 오므로 잘 사는 것만 빼면 북한이랑 다를 게 없다고 돌려까는 의미로 쓰인다), '동조선' 거리면서 자국을 깎아내리는데 조선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 헬조선 단어의 아버지이다. 사실 헬조선이라는 것은 현대 대한민국의 단점이 조선 시대의 그 비참한 역사와 동질감을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시각에서 온 비하 용어로, 결국은 조선의 병신 이미지를 한국 사회에 덮어씌우는 것이다. 물론 헬조선 이론에 일제강점기가 큰 영향을 주긴 했지만 일제강점기는 막타였고 1800년대 이후부터 내부에서 썩어간 나라가 조선이였다고 말해도 틀린건 아니다.
- 나라가 너무 썩어문드러져 망해가던 시기인 개화기때 이것저것 개혁을 시도하려했으나 왕 자체가 유교탈레반 꼰대 틀딱이었고 뭐 좀 하려고하면 늘 왕의 헛기침 한방에 엎어져버렸다. 그나마 왕을 견제할 수 있었던 양반새끼들도 뭐 좀 하려고 들면 유교에 반하는 행위 운운하면서 단체로 반대했었다.[5] 반면에 당시 일본은 지금처럼 왕이 내각에다 통치권한을 신하들에게 위임하고 아무것도 안 했기 때문에 일본의 상징으로서 남아 있다. 그래서 개혁이 쉽게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개화파들을 친일파로 흑화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후 한일합방이 일어났다.
- 조선 말기에는 신분을 사고 파는 일까지 일어났다. 양반이 스스로 양반 직위를 포기해서 백성에게 매매하는거다 당연 백성은 나도 양반좀 되어보자며 좋다고 사들였다 이런 일은 나라가 망했을때 부자들이 빨리 현금화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개족보가 이때 나왔고 현시대에 뼈대있는 양반가문이라고 자뻑하는 가족들은 이때 양반 족보를 산게 아닌지 의심해봐야된다.
- 한민족 역사속의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토 전체가 외세의 직접통치로 넘어간 나라다. 고려시대에도 원 간섭기였지 언어를 지키려는 세력이 탄압받고 고려의 부유층이 원나라의 말단 공무원의 눈치를 보는 수준은 아니였다. 한민족 전성기라면 나름 전성기인 삼국시대 역시나 신라의 통수질로 만주땅 잃었지만 당나라와 당당히 싸워서 이기고 통일신라까지는 일본이 함부로 깝치지 못했다.
어쩌다가 나라가 병신이 되었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나라의 근간을 잘못 잡은 탓이 크다. 조선은 성리학을(조선 건국 당시에는 성리학이 최신학문이었다) 국가 이념으로 삼고, 유교 이상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인 국가였다. 그래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을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삼았고, 대대로 세금을 굉장히 적게 걷는 편이었다. 엥? 좋은 거 아니야? 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가가 제대로 안 돌아갈 정도로 세금을 안 걷으니까 문제지. 세금을 너무 적게 걷으니까 왕 앞마당인 서울은 몰라도 지방쪽에는 예산이 당연히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지방 지주인 향리층의 부정부패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백성들의 부담이 커지는 역효과를 낳게 되었다.
한국사를 조금만 봐도 알겠지만, 조선은 불과 개국 100년 후 쯤인 중종때 부터 방납의 폐단이니 뭐니 하며 수취제도의 부패로 민생이 어지러워진다. 조정이 이걸 해결하려고 내놓은 방법이 주구장창 세율을 낮추는 거였는데, '높은 세율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그러면 세금을 줄이면 되겠네!' 라는 1차원적인 발상에만 머문 것이다. 실제로 세율을 아무리 줄여도, 근본적인 것에는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 관리들의 수탈은 그대로였고, 조선의 이런 개혁정책은 대대로 삽질의 연속이었다.
이런 경제를 고려하지 않은 국가관 때문에 국가 재정이 만성적으로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중국 바로 옆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고려 때부터 대대로 익혀둔 체계적인 정치구조와 관료제 덕에 처음에는 그냥저냥 잘 굴러갔지만, 아무리 늦게 쳐줘도 연산군 때부터는 포텐이 다 바닥났다.
여기에 국가관에서 성리학만을 제일로 여기고, 정말 이걸 종교처럼 맹신하는 폐쇄적인 모습 때문에 내부적으로 곪아있는 나라가 외부와의 접촉도 안 되면서 북한처럼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해버렸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로 안 그래도 이미 중국에서는 한물 간 학풍이었던 성리학을 조선은 오로지 사대부들의 정신승리를 위해서 더욱 교조화되었고, 외국과의 교류로 문물이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있던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조선은 어떻게든 무시하면서 입으로 쑤셔넣어지는 신문물과 시대의 변화마저도 온 몸으로 거부한 병신성을 보여주었다.
결국 거지인데다가 폐쇄적인 사회였다는 것=국가 전체가 수백년간 고인물로 남아있었다는 점이 조선의 병신성을 99% 설명할 수 있다.
정통성
혁명파 사대부들은 썩을대로 썩은 고려를 엎고 세운 나라이므로, 그 자체로서 조선의 건국이 정통성을 가진다고 보았지만, 사실 이는 혁명파 사대부 일부를 뺀 나머지 세력에게는 한낱 개소리일 뿐이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해보아도 조선의 건국은 정통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근데 사실 조선 양반들은 대체로 죄다 고려 중앙 귀족 출신이라 그게 그거였다.(물론 지들한테 대항하는 귀족들은 다 조짐.)
따라서 조선은 건국 초에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고려 왕족의 잔당들을 탄압했고, 고려왕조 내내 지방에서 그 세를 유지하던 호족(향리)세력을 철저히 억압했다.
그뿐만 아니라 건국하자마자 역사의 흐름속에서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세우고자 <고려국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절요> 등을 저술하였다.
잠시만,생각을 해보자 왜 한 정권 또는 체제를 논할때 민생이 아니라 민족적 대의명분이나 자존심 등이 훨씬 더 우선순위에 놓이는거지? 이게 신자유주의자들이나 국뽕과 무엇이 다르지?
우선 조선은 이성계가 유혈정변을 통해 세운 체제(regime)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정통성이 송두리째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혈정변 수준이 아니라 레알 고려 왕씨들이 흘린 피의 대축제로 세워진 폭압적인 나라다.
그러나 헬고려 귀족들에겐 비귀족 천것들은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몽골군에 맞서던 백성들을 송길유와 같은 고려 귀족들은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살강간파티를 벌였으며 심지어 너무 무자비하게 끌고 간 나머지 가다 9할이 죽기도 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렇게 생성되었다. 오히려 여말선초의 경우는 피를 많이 흘리지 않은 축에 속한다
60년간 왕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제 탈조선 행이었는데 이게 피를 적게 흘린거라고? 심심하면 통수치고 선양했던 중국 역사에서도 이정도로 전 왕가에 대한 학살을 해댄 적은 많이 없다. 5호 16국이나 남북조 시대 처럼 씹창 난 케이스 보단 나았다고 하면 할말은 없네
중요한건 인명살상이 아니라 그 인명살상을 통해 무엇을 이뤘느냐이다. 토지제도 정비를 위해 왕족들과 권문세족 일부를 살해 숙청한 것은 그 인명의 가치보다 많은 가치를 창출한 행위였다.
전형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정당화 된다는 논리다. 이런 생각 진짜 존나 위험함. 당장 나치새끼들이 이런 생각 가지고 있었지
그럼 민생개선은 어떻게 함??
꼭 피를 흘려야만 가능하냐? 이새끼들은 지금 우리가 21세기 국가 말하고있는거로 보이냐? 전근대국가에선 당연한걸 가지고 씹선비 마냥 걸고넘어지네
꼭 이런 학살류 쉴드치는 병신새끼들이 전근대국가에선 당연한 거라능~ 이지랄 하면서 쉴드치는데 전근대 국가에서도 이런 학살짓은 욕개처먹었다 무슨 옛날 국가들은 법도 윤리도 없는 개막장 국가인줄 아네 미친놈이
애초에 한국사 내내 국체가 교체될 때 전 정권 왕족에 대한 학살을 저질렀던 나라는 오직 조선 뿐이었다. 고조선 시기 위만이 준왕을 몰아낼 때 학살을 했단 기록이 없고 태봉에서 고려로 바톤 체인지 할 때 조차 왕건이가 궁예 가족을 건드리지 않았다. 국체 교체로 어쩔 수없단 말과 '시대 한계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구욧!~빼애애액!' 이딴 말은 부흥카페에서 흔히 보이는 대깨조(선)식 쉴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애초에 시대적 한계 운운하는거면 그 전 시대에 그러지 않았단 건 어찌 설명할텐데? 기록이 부족해서 학살은 했는데 사서가 남아있지 않은 거라고? 개솔ㄴㄴ 애초에 고려사가 중국사서들과도 비교해도 분량면에서 꿀리는게 전혀 없는데 기록이 없다는건 걍 안했다고 봐야함
조선은 토지제도의 개혁(말이 개혁이지 거의 혁명수준 토지의 사유권을 대폭 건드렸다)으로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자영농의 위치에 놓고 출발하였다.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사병을 혁파해 토지와 군대가 기본적으로 공공재의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고 민생의 개선과 안정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졌다.
흔히 비판하는 사대 역시 신생국가 조선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조성해주는데 매우 큰 기여를 했다
여진의 벼슬을 하고 있다가 고려로 돌아온 이성계가 쿠데타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이름은 조선(명 황제가 정해준 국명이다), 서울은 한양으로 정하고, 쿠데타로 세운 새 정권 답게 나라를 새로 바꿨다.
정통성이 없는 데다가 항상 물질욕에 굶주린 나라라서 그런지 명나라한테 죽어라고 조공했다. 조공을 보내면 하사품을 의례 받았는데, 하사품의 양이 조공한 것 보다 많아야 했다. 중국으로서는 하사품을 조금만 주면 대국적이지 못 하다고 생각해서 하사품의 양을 줄이지는 못 했다.
물론 이건 망상이고 좆목민 새끼들은 지들이 거의 손해를 보지 않았으며 명은 상대적으로 조선에는 적은 물품만 받고 기술이나 서적 등을 제공해서 이익은 맞았지만 망상하는 것만큼 퍼주지는 않았다. 물론 조공 자체보다 의외로 그 시절에 놀랍게도 오랑캐놈 전쟁에 병력과 돈을 존나게 퍼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선은 명 뒤질 때 지들도 힘들다고 전력을 다해서 좆목민들을 공격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애미뒤진 착취로 돌아왔다.
조공 관련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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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중국에게 조공을 바쳤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 이제와서 보면 좀 부끄러울 수 있지만, 중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는 적당히 꼬리 흔들어줘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삼국시대부터 그랬던 어쩔 수 없는 생존전략으로 이해해야지.
여하튼 당시 조선 내부에서 조공&사대에 대한 태도는 시대마다 다르다. 적어도 관학파가 주도하던 조선 초기는 '씁 어쩔 수 없지' 수준이었지만, 진심으로 중국을 떠받들던 사림이 주도하는 조선중기로 들어서면서 정말로 간 쓸개 다 대주는 태도로 변하게 된다. 이런 사림애들도 정작 청에게 개털리고 청에게 조공하게 되자 속으로는 존나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바친다는 티를 팍팍 냈지만, 현실을 점차 깨닫게 되는 조선 후기로 가면 이제 그러려니 하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걸 그만두게 된다. 여하튼 가면 갈수록 열화되는 걸 알 수 있다.
국뽕들의 조공 무역 관련한 주장들은 일반적으로 조공 개념을 부끄러워 하는 한국인들의 변명섞인 주장일뿐이다. 실제로 말 가격이 세종때와 태종때의 기록으로 동시기의 기록이 아니며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던 말수량에는 턱없이도 못미치는 수량이었다. 특히 명나라는 당시 여진족과의 무역이 조선보다 훨씬 활발했는데 그러한 여진을 놔두고 조선에게서 훨씬 비싸게 말을 구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말 관련 조공으로 이익 봤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역시 존재하는데 실제로 가격을 비교하려면 동일시기의 가격을 비교해야하는데 비교하는 말 가격이 세종때와 태종때의 기록으로 동시기의 기록이 아니며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던 말수량에는 턱없이도 못미치는 수량이었다. 특히 명나라는 당시 여진족과의 무역이 조선보다 훨씬 활발했는데(누르하치가 큰 힘을 얻게 된것도 아버지의 죽음값으로 명나라 무역권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진을 놔두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조선에게서 훨씬 비싸게 말을 구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조공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시기가 다른 내용의 기록을 무리하게 엮어서 지나친 민족주의 사관적 관점으로 풀어낸 주장이라고 지적 하는 의견도 있다.
조선이 명에게 조공을 함으로 '이득을 보았다'라는 말은 사실이나 '물질적 이득'을 보았다라는 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때의 명나라의 지원과 같이 명을 상국으로 삼고 조공을 보냄으로써 명으로 부터 조선이 자주국임을 보장받고 타국의 침략으로 부터 지원 받을수있다는 이점은 있으나 흔히 인터넷에서 떠도는 하나를 주면 3~4배를 돌려받는다는'물질적 이득'을 본다는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역사 기록에도 조공을 바치는 내용물과 횟수가 명으로 부터 하사를 받은 내용물과 횟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예를 드는 내용도 조선과는 전혀 상관없는 중국 왕조와 타 국가와의 예들 뿐이며 실제 조선에 사신으로 오는 명나라 사신들은 태감들로써 입찰을 가장 많이한 태감들로 선정되는데 이러한 태감들은 입찰비 이상을 조선으로 부터 뽑아내기 위해 많은 내용물을 조선으로부터 조공 받아갔다.
하지만 명나라 조공에 관한 조선의 '1년 3사'명의 '3년 1 사'를 바탕으로 조공이 조선에 '꿀조공'이니 '물질적 이익'이 있었다고 결론내리는건 억측에 불과하다고말 할수 있다.일단 조선이 주장하는'1년3사'때의 1회 조공의 량 명이 주장하는'3년1사'때의 1회 조공의 량과 같다는 내용이 없으며 실제 역사 기록에 조공으로 힘들어 하는 기록은 있어도 조공을 통해 하사품을 받는다고 좋아하는 기록은 찾아볼수가 없으며 실제로 조공을 하는 횟수와 조공의 량에 대한 기록이 명나라로부터 하사품을 받은 량과 횟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면 그 이상의 하사품을 받는 다는 소위 말하는 '꿀조공'이 사실이라면 조공에 관하여 부담스러울 이유가 조선입장에서는 전혀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에는 명나라의 조공에 대한 부담감에 관한 기록을 여러곳에서 찾아볼수가 있다 또한 명나라에서 가져왔다는 조선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물품의 대부분은 조선사신이 명나라에 조공을 하러 간김에 명나라에가서 구매를 해서 가져온 물품이 대부분이다. 과거 명나라에 조공을 했다는 내용을 부끄러워하여 이런식으로 조공에 관하여 은근슬쩍 왜곡과 날조를 하는 내용들이 사실인양 인터넷 공간에서 떠돌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이 부끄럽다고 왜곡 날조하는것이야말로 부끄러운일임을 "꿀조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직시해야할 것이다
참고로 나무 위키에서는 위 조공 무역 내용에 대해서 일괄 삭제하는 병신 짓을 저질렀다. 이쯤되면 역사를 믿는건지 판타지를 믿고 싶어하는건지 모를 수준이다. 나무 위키에서 특히 국사 관련 편은 절대 믿지 말아야 한다. 국뽕 몇명이서 죽치고 있으면서 자기들 맘에 안드는 유저 나타나면 돌림빵해서 날려보냄.
그나마 중기 들면 명나라도 길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부담을 줄여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임란 이후 광해군이 뜯긴 거 보면 장난 아니다. 후에 청나라한테 처발리고 뜯긴 것도 장난 아니다. ← 이건 솔직히 인조 새끼의 삽질 때문이지
조공으로 이득 본 건 정말 잠깐이고 나머진 그냥 삥뜯겼다고 보면 된다. 국뽕새끼들은 현실을 무시한다.
명나라의 영락제-선통제 이후부터는 삥뜯긴건 오히려 중국 측이다. 조공을 무슨 힘 센 나라가 약한나라 쥐어 박는걸로 착각하나 보다. 조공으로 준 것보다 반대급부로 더 많이 받았다. 괜히 조공 뒤에 무역을 붙히는게 아니다.
이전시대인 고려시대에는 송나라를 상대로 조공을 빙자한 삥뜯기 하시었다.
당시 이런 현실을 본 소동파는 "맥적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은 터럭의 이득도 없고, 다섯가지 손해만 있습니다."라 한탄하였다
쿠데타로 등극한 조선왕조 또한 이런 이득을 알고 명나라에 3년에 한번오라는걸 굳이 1년에 3번 오겠다고 하자, 거의 외교 단절 수준까지 간적도 있었다. 만약 조선이 손해를 보았다면 미쳤다고 조공 많이 하겠다고 하려고도 안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으로서는 조공무역으로 중국의 기술을 뒷주머니로 빼돌릴 수도 있었다.
만약 명나라가 조공으로 조선을 뜯어먹던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공을 하라고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가 오히려 필사적으로 주변국들에게 조공횟수를 '몇 해에 한번' 씩으로 제한한 걸 보면 무작정 중국이 삥뜯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몽골때문에 말을 제때제때 급하게 얻어야 해서 비용을 먼저 지급하고 말은 나중에 받아갔으니까 이득은 더 큼 게다가 같이 따라간 사무역 상인들도 말 열필에 인삼 가득 실어 가지고, 중국 건너가서 비단이랑 기름진 말 40필로 바꾸고 들어옴. 필수품 부분에서도 당연히 이득. 요즘으로 치면 러시아산 무기 가지고 미국한테 바가지 씌워서 팔아치우는 꼴. 퍽이나 이득이니 조선이 1년에 3번 조공한다고 생난리를 피우지.
- 이건 또 뭔 헛소리야. 조선 군마 역시 조선 토종말 질이 병신같아서 여진족한테서 구해썼구만. 본인이 급한데 상국이 요구하니 바치는 클라스 캬.
여기까지 좆문가 목록이고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이득 본 때도 있고 손실 본 때도 있으나 어쨋건 '조선 윗대가리들은' 이득이라고 생각했기에 조공을 계속한거다
보통 조공으로 가는 물품은 말이나 인삼같은 특산물이고 오는 물품은 사치품이나 예술품 서적 등등인지라 조선 금수저들은 천민들 특산품 가거나 말거나 자기네 사치부릴 수 있는게 들어오니 좋아라하고 조공했다
가격만으로 따져보면 보통 손해를 좀 많이 본 편이나 금수저들은 사치품 들어오기에 우리 이득봤다고 생각해서 계속 조공했다.
물론 백성들은 자기 딸을 조공으로 바쳐야 하는 괴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역사씹덕후새끼들이 경제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헛소리들을 많이 썻는데 조공무역의 핵심은 북경의 시장을 이용하는데 있었다. 조선왕조가 초반에는 정통성도 부족하고 그래서 명으로 부터 상당히 삥도 많이 뜯기고 처녀도 바치고 그랬지만 후반으로 가면 이런 상납의 형태보다는 역관+상인들의 무역행태가 주를 이룸. 조천일기같은거보면 잘나와있는데 실제 명의 황제가 하사하는 물건은 비단 몇필+식량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중간에 삥뜯는게 많아서 사신단이 굶는일도 발생함. 대신 밑에 애들이 가지고간 조선의 토산물이 북경에서 잘팔려서 이득이 남았음. 이런 무역형태는 당시 일본,베트남은 물론 유럽국가들도 포함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우리가 미국의 똥꼬를 빨아주고 그 댓가로 미국의 거대한 시장을 이용한거와 비슷하도 보면 된다. 이런 국제교역은 비교우위가 나타나기 때문에 누군 손해고 누군 이익이다 할수없다. 물론 어린 처녀들을 정액받이로 바치는 것과 미국 시장에 접근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물질말고 의학,미술,건축을 명에서 가르쳐주는 경우가 많았다. 한의학 관련자들은 모두 알《본초강목 》도 명 태조의 친척이 지은 책이다
참고로 청, 일본 같은 오랑캐 성님들은 준 것도 없이 좆같게 존나게도 뜯어갔다.
10배 이상 이익을 보신 만주족 성님들.
일본도 도자기, 은광 개발 등 ㅆㅅㅌㅊ로 이익 존나 보고 조선에 준 건 거의 없었다. 가끔 왜구 보내서 지나가는 배를 털거나 조선땅에 놀러와서 약탈을 저지르는 등 오히려 피해를 많이 줬다.
당연히 조선 후기 국력은 손해를 존나 봐서 폭망했으며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조상 성님들도 오랑캐 성님들을 존나게 증오했다.
사실 명한테 존나게 뜯기다 청은 나름 잘 막아서 잘 뜯기지 않았던 베트남을 고려하면 청 이후 조선이 몰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명 멸망 이후 오랑캐 성님들이 조선 삥 좀 뜯는 동안 베트남은 우왕ㅋ굿ㅋ을 외치며 부유해지고 인구도 크게 증가하며 군대도 뇌관식 머스킷, 증기 군함 등 ㅅㅌㅊ로 무장하고 근대화를 나름 잘 진행하다 망했는데 조선보다 씹넘사벽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베트남이 존나 성장하는 걸 보면 초반에는 조선이 분명하게 베트남보다 강한 것 같은데 어느 시점부터는 조선이 ㄹㅇ루 개쳐발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이후는 공산화로 좆망했다.
공녀제도와 명나라의 조선인 후궁들
참고자료: 명나라 황제들이 맞이한 조선인 후궁들
이 글은 중국의 지식공유 사이트, 커뮤니티에 게재된 ' 명나라 황제는 모두 몇 명의 조선 아내를 맞아들였을까?'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한중 양국민의 과거 역사 인식에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번역했다./ 편집자 주
대장금이 있던 조선시대,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한가족 같이 지내는 일이 많았다. 명나라 영락(永樂), 선덕(宣德)황제 시대에는 각각 8명의 조선 후궁이 있었다. 시녀, 여사(女史, 후궁을 섬기며 기록과 문서를 맡아보던 여관)로 있던 조선 여성은 영락황제 시절 22명, 선덕황제 시절 16명, 청나라로 넘어가기 전 10명, 순치(順治)황제 시절 16명이 각각 있었으며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예술인, 주방장만하더라도 선덕황제 때에만 100명이 넘었다.
이 같은 여성은 조국의 언어, 음식, 복장, 가무, 지방 특색과 풍습 등 문화풍속을 중국 궁정에 그대로 들여 와 두 민족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시켰으며 양국 정부와 인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했다.
명나라 영락황제, 선덕황제는 각자 여러 명의 조선 후궁을 거느렸으며 일부는 1482년 이후까지 살았다. 정덕(正德) 후기, 명 무종(武宗)은 조선에 가서 후궁을 선발해 조선 전체가 순식간에 불안에 빠지기도 했으며 청나라가 세워지기 전 섭정왕인 도르곤은 조선 여인을 첩으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사서에도 적지 않게 기록돼 있지만 당시 조선에서 한자로 기록된 ‘조선이조실록(朝鮮李朝實錄)’, ‘고려사(高麗史)’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기록돼 있다. 황제의 말이 통속적인 말 그대로 기록돼 있어 중국의 사서가 다듬은 것과는 다르다. 이 같은 일이 있기 전인 원나라 말기, 원순제(元順帝)의 황후 기씨도 고려인이었으며 원나라 태자 아이유시리다라도 기황후에게서 태어났다.
영락황제가 조선 후궁을 모은 것은 부친인 주원장(朱元璋)과 고려의 국왕 왕창과 후대 왕조인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사돈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홍무(洪武) 22년(1389년) 4월,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로부터 국왕으로 책봉받기 위해 출신이 좋은 여성과 명나라 황제의 자녀와 결혼시켰다.
홍무 25년 고려가 조선 정권으로 교체된 후, 홍무 31년 명 태조가 서거하기까지 조선과 명나라는 여러 차례 혼사와 관련된 일을 상의했으며 조선에서는 5명의 환관을 선발해 난징(南京)으로 보냈다. 명 태조는 당시 조선의 왕에게 “나는 실제로 혼사를 맺고 싶다. 내 자녀 중에는 아들이 많고 딸이 적어 16세만 되도 (혼인이) 성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영락제 원년(1403년),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친히 난징을 방문해 영락제를 만나 양국간의 우의를 증진하기도 했다.
영락제는 세 차례에 걸쳐 조선에서 후궁을 선발했다. 영락제는 조선 여성을 좋아하게 됐을 뿐 아니라 한민족의 식습관, 문화풍습도 받아들였다.
첫 후궁선발은 영락제 즉위 초기 때이다. 영락제는 홍무제 시절 혼사를 논의하던 것에 이어 영락 원년 4월, 신하를 조선의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보내 건문제의 심복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에 대해 상의함과 더불어 결혼 의사를 표시했다. 영락 5년, 황후 서 씨가 병으로 죽자, 영락제는 이듬해인 1408년 4월 16일, 내사(內史) 황옌(黃儼) 등을 한양으로 파견해 조선에서 후궁을 선발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같은해 11월 일차적으로 5명의 여자를 선발했다. 그녀들은 공조전서 권집중의 딸, 인녕부좌사 윤임첨의 딸, 공안부(恭安府)판관 이문명의 딸, 호군 여귀진의 딸, 중군 부사정 최득비의 딸이다. 이외에 수행원과 환관이 각각 12명이 있었다.
조선의 왕은 예문관 대제학 이문화를 특사로 임명해 후궁들의 호송을 맡도록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순백의 두꺼운 종이 6천장을 함께 이송하고 종이 조공을 바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듬해 초 베이징에 도착했다. 2월에는 권씨가 현비(賢妃)로 책봉돼 육궁(후비가 거차하는 궁실)의 업무를 맡아 황후의 직권을 행사했다. 임씨는 순비(順妃), 이 씨는 소의(昭儀), 여씨는 첩여(婕妤), 최 씨는 미인(美人)으로 각각 책봉됐다.
권씨의 오빠인 권영균은 조정의 광록사경(朝廷光祿寺卿, 연회 업무를 책임지는 관공서의 장관)로 임명됐다. 관직 품계는 삼품이며 채색 비단 60필, 채색 명주 300필, 비단 10필, 황금 두 덩어리, 백은 10덩어리, 말 5필, 말안장 2개, 옷 2벌, 지폐 3천장 등을 하사했다. 이들은 책봉된 후궁에게 기본적으로 보낸 청혼예물이다.
순비의 아버지는 홍려사경(鴻臚寺卿, 의식을 전담하는 기구의 장관)으로, 소의의 아버지, 첩여의 아버지는 광록사소경(光祿寺少卿, 광록사 부장관)으로 임명됐으며 관직 품계는 사품이었다. 최씨의 아버지는 홍려사소경(鴻臚寺少卿, 홍려사 부장관)으로 임명됐으며 관직 품계는 오품이었다.
권씨는 ‘명사•후궁전(明史•后妃傳)’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조선 여성이다. ‘명사•후궁전’에는 “현비로 책봉된 권씨는 조선인이다 … 자태가 깨끗하고 불순물이 없는 쌀처럼 아름다워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현비는 이듬해 10월 영락제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이조실록(李朝實錄)’에는 “영락제가 현비의 오빠를 만났을 때 말을 하려 했으나 병이 깊고 눈물만 흘려 말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의 전통음식 및 문화풍습을 좋아한 영락제는 말년에 현비를 그리워해 “짐은 늙어 음식이 맛이 없구나”, “현비가 죽은 후에는 모든 식사, 술, 빨래 등의 일이 별로 안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번째 후궁선발은 영락 7년(1409년)에 있었다. 5월 3일, 태감 황옌은 한양에 와서 “지난해 당신이 여기에 왔을 때 모든 여자가 살찌고 피부가 거칠며 키가 작아 모두 보기에 좋지 않았다. 단지 조선 왕의 존경하는 마음을 받아들여 후궁으로 책봉했다”는 내용의 황제의 성지를 발표했다.
같은해 8월, 조선은 후궁을 모두 선발했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 수도가 원나라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자, 영락제는 이를 핑계로 후궁을 들여오는 것을 미뤘다.
영락 9년(1411년) 4월 2일, 조선은 정씨의 딸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영락제는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함께 온 수행원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이 같은 일은 비밀리에 진행됐으나 영락제의 자손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 “9월 15일, 정윤후(鄭允厚 정씨의 부친)을 광록사소경으로 임명했다. 정윤후는 조선인이다”고 기록했다. 황제의 장인은 보통 그에 상응하는 작위와 녹봉을 받는다. 영락제는 조선의 장인들에게 광록사 직위를 여러 차례 하사하며 자신이 조선의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세번째 후궁선발은 영락 15년(1417년)에 있었다. 조선 측은 한씨, 황씨의 여식을 후궁으로 골라 시녀 6명, 환관 2명의 수행을 받도록 했다. 8월 6일 출발한 이들 일행은 10월 8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영락제는 이들 중 한씨의 딸을 특히 아껴 한씨 집안에 막대한 규모의 재물을 계속해서 하사했다.
같은해 11월 3일에는 포상 조서와 함꼐 백금 2천냥, 문기표리(文綺表里) 2백필, 실•베비단 50필, 마 24필을 하사했으며 왕후에게 별도로 문기표리 80필을 하사했다.
명나라 선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황제 중 하나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인 영락제의 총애를 받아 베이징에 있건 북벌을 떠났을 때에도 항상 할아버지 곁에 있었다. 황제 자리를 이어받는 것도 할아버지에 의해 결정됐다. 재미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역시 조선의 전통음식을 좋아했으며 특히 조선의 춤을 좋아했다. 재위 10년 동안 가수, 주방장이 100명이 넘었으며 조부와 마찬가지로 조선 후궁 8명을 뒀다.
선덕제 주첨기(朱瞻基)는 단 한번 조선 후궁을 선발했다. 재위 후 2년째인 1426년의 3~4월 사신으로 내관 창성(昌盛), 인펑(尹風), 바이옌(白彦)을 보내 후궁 및 주방장 등을 선발했다. 선덕제는 28세였다. ‘명선종실록(明宣宗實錄)’의 기록을 보면 조선 왕에게 선물로 백금 1천량, 견사, 방직용 실, 비단 240필을 하사했다. 당시 선발했던 여성은 모두 7명으로 성씨, 차씨, 정씨, 노씨, 안씨, 오씨, 최씨 등이었다.
여기에 영락제 시절 입궁한 한 씨에게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동생이 있었다. 사신의 말을 들은 후 그녀까지 초대해 후궁은 8명이 됐다. 이들과 주방장 10명, 시녀 16명, 환관 10명 등은 선덕 3년 7월 20일 한양을 떠나 11월 26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선덕제 이후 136년 동안에는 명 황제가 조선에서 후궁을 선발하지 않았다. 명 무종(武宗) 주허우자오(朱厚照)는 색을 밝히고 잔인한 황제로 유명했다. 정덕(正德) 16년(1521년) 정월, 조선에서는 명나라에서 후궁을 선발한다는 설이 확산되자, 민심은 요동쳤고 재빨리 자신의 자녀를 장가 또는 시집보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중종 이역(李懌)으로 대장금도 궁중에 있을 때였으며 이 같은 일의 자초지종을 직접 겪었다. ‘명무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무종은 환관 진의(金義), 천하오(陳浩)를 조선으로 보내 조선의 왕세자 책봉, 후궁 선발 등을 논의했다. 그들이 출발한 후인 3월 16일, 당시 31세였던 명 무종은 지금의 동물원인 ‘표방(豹房)’을 헐었다. 그런데 그들이 요동(遼東)에 있을 때 명 무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들은 4월 10일 압록강을 건넜으나 이어 즉위한 가정제(嘉靖帝)가 이를 중지시켰다.
조선과 명나라는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양국은 만주, 후금에 이어 청나라를 세운 공동의 적에 맞서 싸웠다. 이에 청 태종은 숭덕(崇德) 2년(1637년), 군대를 통솔해 조선을 공격한 후에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인질, 결혼 등의 조건을 강요했으나 조선은 겉으로 복종하는 척하고 속으로는 따르지 않는 바람에 큰 진전이 없었다.
순치 7년(1650년), 실질적으로 조선을 섭정하고 있던 도르곤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의 왕에게 사돈을 맺을 것을 강요했다. 당시 조선의 왕인 효종 이호의 공주는 2살밖에 안 됐던 것도 있지만 조선과 청나라는 서로간에 적대관계였으며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화민족과 오랑캐와의 구분을 확실히 해 왔다. 때문에 조선은 명나라 사람과의 결혼이 정상적이고 더욱 명예로운 일이라 여겼으며 청나라 사람과의 결혼은 치욕이라고 여겼다. 금린군(錦林君) 이개윤은 이 같은 전반적인 국면에서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청에 보내겠다고 나섰다. 효종은 고마운 마음에 이개윤의 딸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봉하고 4월 12일 친히 한양 서쪽 외곽에 나가 그녀를 배웅했다.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는 “5월 21일, 섭정왕은 다른 왕, 대신들을 데리고 친히 조선의 국왕이 보낸 롄산관(連山關)에서 재물을 받고 그날 곧바로 결혼했다.”고 기록돼 있다. 롄산관은 지금의 랴오닝성(辽宁省) 랴오양(辽阳) 일대에 있다. 도르곤은 당시 그 먼 곳까지 직접 갔으며 기다리다 못해 그날 바로 혼인을 치뤘다. 도르곤이 죽은 후, 순치(順治), 강희(康熙) 등 황제는 그의 추악한 행위를 폭로하기도 했다. 순치 13년(1656년), 순치제는 자신의 태자로 하여금 의순공주 호송업무를 지시해 공주를 조선으로 돌려보냈고 조선은 이에 감사를 표시했다.
여기까지 언급된 후궁은 모두 17명이다. 별도로 시녀, 여사를 담당한 여성은 모두 64명이며 이 중 영락제 때 22명, 선덕제 때 16명이며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에는 10명, 순치제 때 16명이다
선덕제 때 입궁한 후궁 한 씨는 ‘샤오한(小韓)’으로 불렸다. 영락 10년(1412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귀란(桂蘭)이다. 명나라 시대, 선덕, 정통(正統), 경태(景泰), 성화(成化) 4대를 섬기며 영종(英宗)의 아들 성화제를 부양했다. 때문에 성화제의 감사와 존경을 받았으며 성화제의 후궁들은 그녀를 ‘여사(女師)’로 받들었으며 ‘외할머니’로 불렀다. 노년에는 고향이 생각나 수차례 태감 정선(鄭善) 등을 보내 고향의 옷, 식품, 문물 등을 가져오게 하고 “고향의 토산물을 보니 고향을 본 것 같다”며 그리움을 달랬다. 성화제도 이 같은 토속물을 보고 너무 좋아하게 돼 조선의 왕으로 하여금 예물을 올릴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요구는 순식간에 조선에게 부담을 줬다.
성화 19년(1483년) 5월 18일, 후궁 한 씨는 7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 씨는 별세 전까지 57년을 명나라 궁궐에서 보냈다. 성화제는 한 씨에게 “정성껏 부지런히 힘써 일했다”며 ‘공신(恭愼)’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표창을 수여해 그 공로를 기렸다. 또한 신하에게 한 씨의 시신을 베이징 서쪽 교외의 향산(香山)에 안장토록 하고 이부상서(吏部尙書) 완안좐(萬安撰)에게 묘비를, 호부상서(戶部尙書) 류쉬슈(劉珝書)에게 묘지명을 쓰도록 했다. 여기에 조선 왕에게 한 씨의 집안을 돌보도록 지시했으며 매년 수도로 오는 조공사절에게도 한 씨 집안의 가족 수를 파악하도록 했다. 그 후, 황제는 추모의 글을 읽고 묘비에 써 있는 글을 조선의 왕으로 하여금 한 씨의 가족에게 전달토록 했다.
이 같은 일이 있기 2년 전, 조선에서는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장금의 아버지인 서천수도 사건에 참여한 사람 중 하나이다.
후궁 선발은 고대의 수많은 국가에 존재하던 풍습이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긴밀했던 시기에 후궁 선발은 조선까지 확장됐다. 특히 명나라 때 많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한나라, 흉노 시기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등의 기록도 곳곳에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의 후궁은 언어, 음식, 패션, 가무, 지방 특색과 풍습 등 조국의 문화풍속을 중국 궁정으로 들여와 양국 민족의 문화교류를 촉진시켰으며 양국 정부와 인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리학과 조선의 제도
당시 동양에서 유행하던 성리학을 나라의 중심학문으로 세우고, 반 종교운동을 벌여서 불교와 무속신앙을 배척하였으나, 왕족들부터가 불교를 뿌리 깊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배척을 하지 못한다.(지금도 불교와 무속신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한다)
고려의 철저했던 신분제도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약간 개선되었다. 이론만이라면 생업 다 포기하고 빡시게 공부만 하면 평민도 양반 될 가능성은 있었다.이때부터 헬조선종특인 만물노오오오력설이 시작. 이때도 양반들이 일반 백성들도 노오오오오오오력만 하면 선비가 될 수 있었다는 식으로 포장했을 걸 생각하면 극혐이다.
조선 초기도 썩어문들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선 초기의 기록이 후기보다 적어서 그런지, 조선 후기보다 부패가 적은 줄 안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노비를 늘리기 위해 경국대전에 "애미가 노비면 애새끼도 노비"라는 희대의 좆병신 법이 만들어 진것도 이때다.
이게 그 당시로서는 그나마 나았던 점이 토지는 국가경제의 근본이고(농경사회의 경우) 다수의 사회구성원인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그 착취의 대상이 노비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심할 때 노비인구 비율이 50%를 넘어선것은 쉴드불가 어느 체제이건 지배계급이 욕망을 통제하고 적절히 배출하는 기제가 중요하다.
그리고 과부들이 재혼하면 그 자식은 과거를 못보게 하는 좆병신법도 빠질 수 없다. 서얼차대법 < 골품제도. 말이 필요 없다. 6두품들은 그저 출세에 한계가 있다 뿐이지, 서자들은 문과 응시가 아예 금지라서 더 막장이다.
후기
임진왜란때 일본에게 보지를 따먹혔으며 병자호란에는 청나라에게 후장을 개통당해 현세에 도래한 씹지옥이 되었다.정부에서는 '공명첩'이기 뭐시기인 하는걸 사람들에게 팔아서 부족한 돈을 벌었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말 그대로 이름이 비어있는 수첩이라는 뜻으로 빈칸에 자기 이름만 써놓으면 공무원이 될 수 있는 티켓이었다. 물론 이름만 공무원이고 하는 일도 없고 봉급도 안준다. 다만 신분은 상승할 수 있기에 평민 노비들의 입장에서는 개이득인 것이다. 씨발 나도 갖고싶다
왜 이 짓을 했냐면 조정은 노비에게선 세금을 걷을 수 없지만 평민에게선 세금을 뜯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이제까지 양반니뮤에게 세금을 내던 노비의 세금을 국가로 돌리려 한 것이다. 당연히 당시 재벌...아니 양반니뮤들이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서 결국 효과는 별로 못 봤다.
그래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농업 생산량이 왜란 이전의 수준을 능가하였는데, 왜냐하면 외국의 선진적인 농업 기술을 받아들여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모내기법이 있다. 원래에는 밭에다 쌀알을 뿌렸다. 당연히 쌀 생산도 씹창이었는데, 이 때 모내기라는 혁신적인 농사법으로 폭발적으로 식량이 많이 나오게된다. 사실 모내기법 자체는 임란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게 물을 졸라 많이 쓰는데다 한번 삐끗하면 한해 농사가 완전 개망하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 이제껏 실행을 안 하고 있다가 개량법도 나오고 임란 때문에 대부분의 농지가 강제로 리셋되는 바람에 에라 한번 해보자하고 실행했고 성공하게 된 것이다.
늘어난 식량덕분에 인구도 처음으로 1800만을 넘어섰다. 근데 이조차도 동시기 중국,일본의 인구증가에 비하면 약하다. 상업 공업 과학 기술 다 때려치고 오직 유교와 농업에 몰빵했지만 그 농업 조차도 병신 ...
상업도(일본이나 좆중국보다는 미약했지만) 발달하였다. 평양과 개성, 부산, 서울이 상업이 크게 발달했고,
5일장이니 3일장이니 하는게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고, "엽전 한 닢, 두 닢"하는것도 이때 처음 나온다.
서민들의 경제사정도 넉넉해져서, 서민문화라는게 나온다.
게다가 돈 좀 있는 새끼들이 돈 주고 양반을 사서 갈수록 정부 재정은 개쓰레기가 되어간다. 왜냐하면 양반은 세금을 거의 안 냈기 때문이다.
이게 해결된 건 흥선대원군 시기에 이르러서 인데 이땐 이미 조선 멸망 일보직전의 시기다.
그나마 흥선대원군도 경제관념이 제로라서 화폐개혁했다가 경제 말아먹음.
- 영조는 화폐 없애려고 했다
최근 북한이 화폐개혁했다가 국민들 죄다 초상집으로 만든걸 보면 역시 같은 민족이다.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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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지옥이자 인페르노 조센
본격적으로 헬조선이 망해가던 시기
19세기 들어서 안동김씨 풍양조씨들에게 나라가 휘둘린다. 부패도 심해져서, 관리들은 세금을 뜯기 위해 별짓을 다하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세도정치 시기이다.
이 시기 분위기는 딱 망하기 직전의 비잔티움 제국 꼬라지였다. 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왕을 자기 멋대로 세워버리는 등 안그래도 개판인 조선이 완전히 씹창나게 된 시기가 이 시기였다.
- 그래도 마 비잔티움은 간지나게 멸망했다
성군이 와도 나라가 망할지 안망할지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하필이면 고종같은 병신이 등극해서 갑자기 외국에게 문을 열더니만, 미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일본에게 국토를 돌림빵당하면서 동아시아 공식 걸레화 되었다.
역대 왕조중 가장 개판으로 망한 나라이다. 계하고 최영이 멱살잡고 간신히 살려낸 홍건적 여진족 몽골 왜구 4놈한테 돌림빵 당하던 인세지옥이었던 고려말기도 이러지는 않았다. 아무리 최근 망한 이미지 있어도 조선이 더 개판인 건 맞다.
파일:망한시즌.PNG | 주의!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시즌은 망한 시즌입니다. |
결국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기점으로 국력이 크게 기울더니 한반도 역사상 가장 비참한 형태로 1910년 나라가 망했다. 과장이 아니라 한반도 역사에서 치열한 사투 끝에 망했거나 개혁파들이 기존 기득권 세력을 몰아내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매국노들이 도장 찍어서 나라를 팔아먹어 끝을 본 케이스는 이게 유일무이하다. 그나마 비슷한 신라는 후백제 때문에 빡쳐서 고려에 들어갔고, 이렇게 비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 약 50년간 한반도 역사상 전례없는 망한 시즌이 전개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층이 권력을 잡고 국외 정세가 혼란하면 어떠한 결과가 벌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 멸망후 117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과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고종과 민비 세력과 비슷한 순실치킨이 집권하여 나라를 흔드는 중이다. 그래 씨발 친일지주 한민당의 후예 더불당 네놈들 말하는거야 너 말이야 너 이 좆같은 친일파 후예새끼들
사대부의 나라
전기엔 그래도 훈구세력애들이 아직 고려물이 덜 빠져서 그런지 공식적 입장은 불교 배척이긴 해도 개인적으론 불교도 믿고 잡학도 좀 하고 대신들이 농서도 저술하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는데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 이후부터는 오직 주자의 주장만이 옳다는 성리학 탈레반들의 신앙에 의해 움직인 사실상의 신정국가이다.
그래도 중기까지는 분명히 성리학 탈레반의 정신적 시조 중 하나인 이황만 해도 까마득하게 어린 기대승하고 논박을 하는 등 그 논박이란 게 사단칠정이니 이니 기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긴 해도 당대 학문의 최고봉이란 자와 이제 관직 출사한 새내기라는 자가 저렇게 키배를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에서 토론문화가 나쁘지 않았으나
후기에 들어선 내 말만 옳고 네 말은 무조건 틀린거고 근거따위 들을 필요 없다. 어린 놈이 뭘 알겠냐! 는 이분법적 사고와 권위주의가 팽배해진다.
처음에는 분명 왕 밑에 사대부가 있었는데 어느샌간 왕도 사대부다! 라면서 끌어내리고 세도정치기엔 아예 왕을 사대부 부하로 만듦.
과거와 단절되었다는 대한민국의 원화 도안 중 탈레반의 제1 시조 이황이 천원권에, 역시 탈레반 1시조와 쌍벽을 이뤘던 EE가 오천원권에 실려 있다. 성리학 탈레반이 현대 한국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대해 국민적인 공감도 없는 두사람이 가장 많이 쓰는 액면권의 얼굴마담으로 실려 있다는 점에서 조선의 위인 풀이 빈약하며 이공계나 문학가 등등 다양한 직업군의 타국 화폐인물에 비할 때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당연히 여기는 조선의 피가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지배층이 유교 성리학에 집착하게 된 나머지 숭문천무, 농본억상, 남존여비 등 아주 그냥 제대로 썩어버리게 된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소중화도 조금은 덜했을거고 상황판단 못해서 만주족에게 덤비다 병자호란같은 실수도 안했을 것이며 한반도의 운명, 더 낙관적으로 보자면 세계사가 참 많이 바뀌었을 거다.
ㄴ이 문서를 쭈욱 읽으면서 이해하기힘든게 조선의실패요인에 남녀차별을 넣는거다. 조선에 대해 성차별에 대한 성토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페미가 쓴건지 여자가 쓴건지는 묻고싶지않지만 당시 시대를 고려할 때 성차별을 한 왕조나 국가의 실패요인에 넣는건 바람직하지않다. 여자를 도구쯤으로 본 일본이 그래서 근대화에 실패했나? 일본은 아예 자국여성을 지구반대편으로 팔기도했다.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친 명나라역시 바람핀아내에게 나무딜도를 쑤셔버릴정도로 성차별이 심했다. 중딩때 청나라에 여자바친걸 울분을 토하던 여교사가 생각나네.
로얄귀족의 나라 고려를 비판하며 까대던 이새끼들도 막상 족벌주의와 지역차별이 존나게 심했다. 영남, 호남, 호서로 불리던 세 지역은 지방치고는 대대로 조선의 지배층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함정 카드로 이쉑들 뿌리가 최소 고려 시절부터 헤처먹던 새끼들이다. 이 지역들은 곡창 지대를 가지고 있거나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받던 곳들이 있어서 옛날부터 은근 탐을 내던 새끼들이 많았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진짜 헤처먹고 그 부를 조정과 지들 출신 집안에 보내는 새끼들 많았다. 평안도, 함경도 같은 북부도 존나게 차별을 받았지만 여기서도 이성계 라인을 탔던 출신이면 잘 나갔다. 어떻게 보면 홍경래 같은 새끼들이 개빡쳐서 지랄했던 것도 이해가 될 정도이다. 참고로 조선 조정에서는 이런 불만론자들에게 니들 지방 출신도 기용하는데, 뭐가 불만이야! 역적패당들아!라고 했으나 까보면 지들이랑 상관이 없었기에 좆도 먹히지 않았다. 조선시대 학자인 윤기도 그딴 꼬라지를 좆같이 여겼다. 이새끼에 의하면 당시 조선은 집안이 후지면 답이 없었다. 반대로 집안이 좋으면 어떻게든 기회가 생겼다. 참고로 음서제로 유명한 고려는 이것보다 더 심하긴 했다. 무신들이 빡쳐서 높으신 문신들 쳐죽인 게 이해가 될 정도이다. 집안이 더 좋으면 좆밥 관직이여도 지보다 높은 관직을 가진 하찮은 출신 놈한테 심지어 명령을 내리거나 멸시하는 하극상마저 가능한했던 게 고려이다. 조선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무신들도 그런 형태를 참고 참다가 무신 노인네한테 한 하극상에 빡쳐서 반란 일으켰다. 저 하극상 사건은 지금으로 치면 60대 중장(3스타)에게 30대 5급 사무관이 뺨아리를 갈겨서다. 물론 무신들도 막상 지들이 정권을 잡니 천출들을 좋아하진 않았다.
명나라와의 관계
한마디로 명백한 명나라의 속국이다. 조선왕조실록 보면 그냥 스스로 처음부터 외번을 자청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야, 우덜이 요동 실효지배 시도하다 버리고 떠난 관청이랑 백성들 있는데 거기서 왕 할래?" 괜히 제안한 거 아니다.
그나마 독립국으로 인정은 해줬다는게 다행이다. 사실 이점은 청나라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황제들도 거기 독립국인데 말잘듣는데 뭐하러 치냐? 냅둬 이랬음 ㅇㅇ (명태조,청태종 빼고) 단지 청 때 명 때보다 훠얼씬 많이 뜯어갔을 뿐이다.
건국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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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는 생전에 "조선군 20만명만 요동에 쳐 기들어와도 우린 헬게이트 오픈임 ㅇㅇ"이랬다고 한다.
물론 당시 명나라가 조선보다 동원력이 월등히 앞썼고 오랜 전란이 겨우 끝났다고 해도 정예병력만 20만이기 때문에 엄살처럼 보일수도 있겠으나 아직 후방에는 북원세력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나마도 원나라 잔존세력과의 대치때문에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이때문에 홍무제는 조선을 견제하고 있었고 태조시기에는 조선도 처돌았는지 명나라의 몽니에 어깃장을 부린다. 대표적인 게 정도전이다.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 및 여진족 귀순문제를 둘러싼 마찰로 인해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또한 정도전이 말 안듣고 계속 개지랄하니까 여러번 정도전을 명에 보낼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임금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성, 강계 등지에 와서 의탁한 여진의 인물을 찾아 돌려보내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좌우에 이르기를 "황제는 군사가 많고 .... 작은 나라를 자주 책망하면서 강제로 청구함이 한량이 없었다. 지금 또 나에게 죄가 아닌것을 책망하면서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니,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공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태조실록
원래 명나라 주원장은 여진족 기병을 기반으로 삼은 이성계를 경계하고 있었다.
비단 이성계의 군벌 세력만이 아니라 고려에 좆달린 새끼들은 별에 별 전투를 겪어서 실진경험도 꽤 있었다.
게다가 조선은 몽골과 여진이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구가 많았다.
이것 때문에 신진 사대부들도 동명성왕(고주몽)의 옛 강토(요동) 운운하며 고구려 흉내 내보려 했다....였는데 정도전 죽고 이방원이 정권 잡으면서 일단 숙이고 보는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이런 놈들이 먼저 간을 보니 명나라로서는 기쁘기 그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을 순이라 부르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 항시 경계심을 갖고 있던 명태조 주원장이 죽고 태종이 명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인해 관계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현실은 조선또한 장부상으로나 10만 대병력을 동원할수 있었지만 실재로는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문제로 저정도로 병력 동원은 불가능하다.
명나라는 10만 10만씩 두번 써먹을수 있었지만 조선으로선 10만을 한타싸움에 갈아넣어야만 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산악지형이라는 조선반도 홈 어드벤테이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을 주살하고 집권한 태종이 현실을 인정하고 명나라와 선린우호 관계를 다시 구축한 것이다. 마침 역시 쿠데타로 황제가 성조 영락제로 바뀐것도 있었다.
..고는 하지만 사실 관계가 나아졌다는 것은 조선이 명에 반강제적으로 저자세 외교를 강요받는 수준이었다. 명의 사신은 조선에서 갖은 횡포를 부렸고 조선은 명의 눈치를 엄청 보아야 했는데 다음 링크를 참고해라. [5]
반도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 세종조차도 명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어찌할 바를 찾지 못했다... 속으로 씨발거리거나 신하들이랑 뒷땀만 깔뿐이다.
- 실제로 명사신 앞에서 신하 셋과 함께 절하고 춤추는 추태를 보였다,다만 이땐 베트남이 강하게 나가다 명의 "일부"로 "수십년"이나 먹혔다. 물론 이외에 수치는 찾기 어려운데 애초부터 명 내부부터 조선을 완벽하게 신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도(세종 본명)를 시험한게 아닐까
- 참고로 베트남은 옛날부터 개겨서 베트남이 이길 때도 있었지만 맨날 대량학살 당하고 식민지 신세였다. 명도 베트남놈들이 게릴라랑 사정사정하면서 간신히 몰아낸 다음 지들이 미녀도 조선보다 훨씬 많이 바치면서 알아서 기었다. 반면에 조선은 보낸 공녀들이 명나라 왕족들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하고 물론 명나라 새끼들 중에서도 조선 가지고 지랄하는 새끼들이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대접이 달랐다. 서열도 그냥 높았음.
조선 중기 이후
조선 초부터 어쩔수없이 명나라 눈치를 보는 사대외교를 하긴 했어도 그나마 조선 초 집권파였던 관학파들은 마음속으로나마 "씨발..큰나라면 다야? 존나좆같네" 라는 생각을 가진 놈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집권파인 사림들은 정말로 명에 대해 충성과 으-리를 다해야 한다고 뼛속깊이 생각하는 인간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이는 그 이름높은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가 <기자실기>[6] 를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얼추 알 수가 있다.
사림들은 명을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고 조선을 중화의 세계에 편입된 소중화로, 나머지 이민족을 중화세계 밖의 오랑캐로 인식하는 화이론적 세계관을 답습했고 이러한 사림들의 생각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15만 대군을 조선에 파병한 이후 더욱 강해졌다.
결국 사대부의 존화주의적, 화이론적 세계관은 명이 망한 뒤에도 신종황제나 의종황제의 묘[7] 를 조선에 세우는 정신병적인 사대의리 의식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이 묘는 신하들이 감히 똑바로 서서 올라갈 수 없도록 계단을 매우 가파르게 만들었다. 일본이 강제로 중단, 철거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만동묘 세계문화유산+조선의 빛나는 문화로 포장하여 전세계에 똥을 뿌렸을 것이다.
- 아니 다른 건 몰라도 만력제 찬양은 인간적으로 인정할 만한 부분 맞지 ㅅㅂ. 사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무조건 중국 찬양은 까고 보는데 애미없는 풍신수길 씹새끼 막는 데 만력제의 도움이 얼마나 컸냐.
- 간단히 신종 제사나 치렀으면 모르겠는데 사대부놈들이 정신병 걸린것처럼 만동묘 계단을 가파르게 만들어서 똑바로 서서 올라갈 수 없게 만들었단게 포인트임. 조선인 전체가 대중화에 알아서 기겠습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얼마나 개좆같음. 이딴 개짓거리를 지배층이 주도적으로 조선멸망할때까지 하고 자빠졌으니 신정국가 조선이 일본손에 망한것도 당연함. 사실 조선시대는 정신적인 '중제강점기'라고 봐도 무방할듯하다.
왕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되는 병신같은 나라
유교의 이념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수양이 안돼있으면 집구석을 잘 돌볼수 없고 자기 가정조차 추스리지 못하는 자는 나랏일을 할수가 없으며 자기 나라조차 못 돌보는 자가 세계평화를 어캐 논하냐는 논리로서, 즉 '열심히 니부터 잘하고 공부해라. 그럼 된다'는 논리지만, 이건 반대로 니 행실이 좆같네 ㅇㅇ 라거나 집구석 콩까루네 ㅇㅇ 라고 테클이 들어오는 순간 관리들은 당연 탄핵에 심지어 귀양 사유가 되었고 왕들은 머갈통이 날아갈 좋은 명분이 되어 버린다.
즉 유교를 믿는 유교도로서 유교이념에 맞게 실천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왕이 왕답게 처신 못하거나(군군자자부자유친이라고 하나, 거 왕은 왕답게 신하는신하답게 쏼라 그거) 수신이 덜되있으면 까이거나 신하들에게 교체 당할 명분(이것도 유교에서 맹자이후로 역성혁명론으로 정당화 되었고 이론으로 편입)으로 딱 좋았기 때문이며 조선왕조에 전례가 두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수신이 안됐고 광혜군은 제가가 안됐다.
사실 선진 유교가 쓸데없이 사회 계약론적인 요소가 있어서 근머적이라서 그렇다. 그래봤자 유학을 갈고닦은 유학자 관료(사대부)들의 귀족 혹은 관료 민주정의 탈을 쓴 엘리트 과두정형태지만, 그 때문에 터진게 예송논쟁이다.
그놈의 성리학때문에 왕이 되려면 존나게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잘 해야된다. 특히 세자로 책봉되는 순간 현대 헬조선 고3 수준으로 먹고 자고는거 말고는 하루 일과가 공부밖에 없다.
그리고 시험도 존나게 본다. 하여튼 이놈의 공부때문에 사도세자가 병신이 되었고 500년 역대 조선왕들이 대부분 똘빡대가리 병신들밖에 없었다는게 이해가 된다.
왕이 공부하면 좋은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적어도 조선은 절대 아니었다. 왜냐? 개똥만도 못한 성리학이나 죽어라 배워댔기 때문이다.
물론 성리학에도 경영에 대한 내용은 있다. 근데 그게 걍 도덕적인 내용이지 구체적인 경영학은 절대 아님.
근데 이건 조선왕조에게 억울할수도있고 병신같기도 한건데 저당시엔 학문이 딱 유학 그것도 성리학 하나뿐이었다. 성리학 이후? 양명학? 너 이단이지 빼애애앵액.
근데 이건 서양도 다를바가 없긴 했는데 문제는 같은 근세기의 윾럽은 철학에서 도덕철학은 윤리학, 윤리학에서 경제학, 자연철학에서 과학 등 학문들이 전문화 하면서 분리되었고 과학과 수학등과 결합하기 시작(이라기 보다는 고머부터 윾럽에서 수학은 학문의 기본 베이스로 깔고간다. 제대로 본격적으로 써먹기 시작한거) 해서 더욱더 안습하기 그지없다는 거다.
즉 뭘 공부하고 싶어도 성리학 외엔 배울수가 없었다.딴거 배우려고 하면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서 ㅈㄹ 한다 ㅇㅇ. 기술과학인 잡학, 군사학, 개인적 무술연마, 취미로 예술활동 등도 전면 봉쇄당한다. 그래서 남는 선택지가 유교에서 권장하는 섺스, 그리고 유학자들 지들도 좋아하고 잘마시는 술마시기 뿐이다...ㅁㅊ
찬양받는 세종대왕이 잡학에 관심을 둘 수 있었던 건 성리학으로 어지간한 관료들을 다 쳐바를 수 있는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찐따새끼가 딴짓하면 우르르 들고 일어나 패지만 일진새끼가 딴짓하면 꿀먹은 벙어리짓하는 병신근성에 기대어서야 세종의 치세가 가능했던 거 ㅋㅋ 성리학으로도 쳐발려서 세종한테 개기지 못한 관료들조차 세종의 잡학 사랑에 대해 뒤로는 꽁시랑댈 지경이었으니 실로 노오답
이때문에 조선임금들이 본격적으로 직접 정치를 시작하는 20세 때쯤되면 요즘 유학과 박사소지자 수준까진 지식교양 수준에 도달한다고 한다. 머가리가 빡머가리만 아니라면 그렇다. 강사진도 우수하고 그러기 때문이다.
세계사를 통틀어 왕이 나라경영을 뒷전으로 배우고 사상학문에 몰빵하는 나라는 조선이란 나라밖에 없었다. 현대 헬조선 학자들은 대단한거라고 자위하지만 대기업 회장이 경영학, 경제학 안배우고 성경책이나 도덕책 보고있는 꼴이나 마찬가진걸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ㄴ 웃긴건 그 지랄을 했어도 철학 수준마저도 서양에 털렸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청나라를 통해 학문분화는 후기에나 시작되지 그마저도 같은 유학내의 분파 개념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그들이 집권을 못함으로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상식적으로 나라든 기업이든 리더는 경영능력이 우선이다. 근데 이 병신같은 조선은 성리학을 먼저 마스터해야됨. 그 외 다른 현실적인 학문은 왕이 관심을 안가지면 걍 성리학밖에 모르는 병신이 되는거다.
지금 이스라엘에서 노동도 안하고 애만 싸지르면서 하는 일이라곤 유대교 경전이나 읽는거밖에 모르고 생활비는 전부 나랏돈으로 해결하는 하레디 새끼들이랑 똑같다.
저런 새끼들이 왕이 되니 아무리 정도전이 선민정치를 표방했다지만 결국은 왕새끼도 대부분 무능했고 그 밑의 공무원새끼들이 우쭈쭈 달래주면서 뒤에서는 지들 권력키우고 밥그릇 싸움질이나 한거다.
딱 하나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태종의 맏아들이 공부안하고 여자 존나게 따먹고 놀다가 폐위되었고 그 결과 세종대왕이 왕이 되었다. 이거 딱 하나 빼고는 긍정적인 효과는 없었다. : ㄴ 이건 양녕대군이 충녕대군보다 공부를 못해서 폐위되었다고 할 때나 가능한 논리다. 양녕대군은 공부만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노답이어서 폐위된 거다. 그놈의 성리학이 양녕 -> 충녕 교체 과정에서 보여준 건 오히려 유교의 장자승계론 들먹이며 교체를 저지하는 짓거리 뿐이었다. 실로 노오답. ㅉㅉ
이러한 비정상적인 교육열은 현대 헬조선 천민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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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거문도 점령하고 조선인들 동원해서 기지 건설할때, 그에 알맞은 보수를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거문도의 조선인들은 공사에 동원하고도 보수도 제대로 안주는 조선 정부와는 반대로,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는 영국의 태도 때문에 큰 반감은 없었다고 한다.
- 반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때 주민들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림.
- 어패가 있다. 전근머 똥양 국가는 조 용 세라 하여 노동력도 국가에서 정당하게 뽑아쓸수 있는 세금이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중국에서 율령제 받아들인 모든나라 공통사항이다. 단 중국은 명나라 후기 부터 세금이 은 하나로 전부 통일되어서 걍 나라에서 세금으로 걷어 들어온 은으로 직업군인들과 노동자들을 모집해 임금을 결제했다. 이건 남미에서 은이 흘러넘쳐 들어오면서 세계적인 추세였다. 즉, 조용조를 만든 중국 본인도 예전에 폐지하고 세금일원화를 실행했고 일본도 마찬가지 였는데 조선 혼자서만 천년전 당나라가 만든 조용조를 고수하며 백성들을 조지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냥 노예로 설명 끝이다. 왕이 까라먼 무보수로 노동에 나와서 부역질해야했고 왕이 싸우라하면 죽창들고 싸우러 나가다 적에게 죽는 SCV 겸 저글링이었다.(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동시대 일본 명나라 오스만 심지어 유럽국가들도 그랬다)
- 조선 초 요역은 8결의 토지에서 1명의 장정을 1년에 6일 이하의 기간 동안 무상으로 부릴 수 있도록 했다. 군역도 원칙이 있었고, 왕이나 지방 수령 개인이 맘대로 할 수 없었음. 마음대로 할수 있었다면 그건 중세때까지임.
이러한 무보수노동은 정조 이후로 없어졌다. 수원에 있는 화성 지을때 백성들한테 임금을 주고 부려먹었다. 덕분에 보통 5년이 넘게 걸리는 작업을 2년만에 끝냄.
사상적으론 왕토사상으로 모든게 왕의 것이다. 물론 대놓고 뺐는 경운 드물었지만 또라이 임금 나오면 백성의 사유재산이고 지랄이고 없다. 연산군은 전국 팔도 미녀들 납치해서 궁궐에 뒀다.
- 그 왕토사상이 중앙집권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중세의 귀족 분할통치 (즉 장원 영지 등의 사전)를 억압 내지는 부정하는 장치였다는 소리다.
조선은 상당히 백성에게 잔혹했던 나라로 조금만 반항끼를 보이면 그대로 찍어누르는 경우가 많았다. 동학농민운동때 조선의 힘으론 안되니까 바로 청나라 군대 불러서 유혈진압을 시도했을정도였다. (사실 이건 태평천국의 난때 청나라도 했던 짓이다. 역갤 새끼들은 인정 안 하겠지만 일본도 한때는 이랬다) 평소에 백성이 어쩌고하는건 다 코스프레였던 것이다.
사실 백성들도 병신이다. 세도정치 시기에 탐관오리에 대한 학정으로 민란이 일어났는데 양반들 선동으로 그걸 진압하는 의병이 일어난 적이 있다. 똥수저들을 똥수저들로 진압.
사실 집단의 대표자라는 건 그 집단을 구성하는 인간들 수준에 맞는 퀄리티라는 말이 있기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지도자가 병신인데 국민들은 깨시민일까?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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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노예지국(東方奴隸之國)
전체 인민이 노예인 북괴보다는 쬐금 나았던 나라이다.
노예제는 세계 어디에나 있었다. 다만 자국민을 노예로 삼은 것, 그리고 신분 세습을 볼 때 조선은 까여야 마땅하다. 일천즉천인 고려도 답이 없는건 마찬가지. UCLA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던컨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배운 것과 달리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은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물론 조선 지배층이 고려 왕족을 학살하긴 했다. 그래도 저게 사실이면 헬조선 지배층은 신라 시절부터 단일한 계승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귀족 놈들은 죄다 자국민 노예로 삼았다. 자국민 노예 해방자란 헛소리가 있는 칭키즈칸도 막상 자국민 부족 학살하고 보골로 삼았다. 황금씨족들조차 청나라 때 만주족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들한테 개기는 자국민 노예들 죽이는데 관심이 있었지.
조선 성종 때 신자치(愼自治)의 여종 겁탈사건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참봉 신자치의 집에 외모가 뛰어난 도리(道里)라는 계집종이 있었다. 어느 날 참봉은 부인 몰래 도리를 겁탈을 하게 된다. 그러나 종의 몸으로 상전의 노리개가 됐다고 해서 당시로서는 문제가 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신자치의 아내가 알게됐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신자치의 아내는 도리를 모든 종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발가벗겨 묶어 놓고 때리며 치욕을 줬다가, 숯불에 쇠꼬챙이를 달궈 가슴과 음문을 지지기 시작했다. 도리는 단지 노비였다는 이유로 신자치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의 아내에게 부끄러운 죽임을 당한 사례다.
신자치 아내는 도리의 시체를 흥인문 밖 산골짜기에 버렸다가 주민들의 신고로 알려져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게 되지만, 사람을 죽여놓고도 '장(杖) 100대'에 처하는 대신 경상도 땅에 부처하는 것으로 종결됐고, 신자치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사실 조선은 그나마 기록이 많이 남아서 이딴 것들이 알려졌기에 욕을 먹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고대 국가들도 기록이 상세하게 남았다면 지금보다 욕을 더 먹었을 수도 있다. 조선보다 너그러웠다는 카더라가 있는 헬고려도 아랫것들을 그냥 학살하고 짓밟은 기록들이 발굴되었다. 일본도 과거에 관해 무사 성님들이 칼질만 하느라 농민들한테 땅을 존나게 줘서 살기 좋았다나 뭐라나 이딴 카더라들이 있었는데, 현실은 아니었다. 일본 현실은 개발된 개꿀땅인 조카마치 내의 택지 2/3를 무사 성님들이 그냥 가져갔으며 농민들은 개발지를 가지고 싶으면 무슨 오지 개척 같은 것들을 했었어야 했다. 그것조차 개척 성공하면 무사 새끼들이 창칼로 빼앗는 경우도 많았다.
노비는 착취의 중심이 토지와 그 생산물에서 인구의 일부에 대한 노동력의 착취로 전환된 것으로 일종의 현실과의 타협이다.
국뽕교과서로만 공부하면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인데 노비의 비율이 무지막지하게 높아진 때가 조선왕조이다. 미국인 한국역사학자 제임스 팔레 교수는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는 나라는 조선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노비 인구가 전체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퍼센트를 넘지 않았는데 세종이 신하들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노비종모법을 통과시키면서 노비의 불법증식이 시작되며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노비인구는 전체의 40퍼센트 가까이까지 치솟는다. 더구나 노비는 양반을 고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신문고를 두드려도 소용없다.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뉜다. 솔거노비는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모습처럼 주인집에서 직접 일하는 노비다. 외거노비는 주인집 밖에 살면서 주기적으로 주인집에 돈을 갖다 바쳤던 노비다. 외거노비는 비록 직접 노동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국가와 양반 모두에게 세금을 내야 했고 또 군대까지 가야했다.
왕과 양반 중심으로 봤다면 세종은 사대부들의 재산을 크게 불려 준 성군으로 볼 수 있겠으나 / 양민으로 살 수 있었으나 노비가 되어버린 수많은 백성 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세종 쌈싸먹는 성군은 어머니 신분을 따라 자동 노비가 되는 악습을 폐지한 영조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 교과서 자체가 서민들의 삶이 아니라 철저히 지배층과 소수 유력자들의 사관에 현대 민족주의를 짬뽕시켜 나온 괴작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들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면도 크다
내재적 관점이니 뭐니 하면서 왜 그 때 사건을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하냐고 하면 할말이 없다 그럼 식인종들 문화도 걔들 입장에서 배고프니 인정해야지
즉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전근대 왕조국가 중 인간등급의 격하가 가장 심하게 일어난 사회가 조선이라는 뜻이다
ㄴ 조선의 노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와는 그 처우가 다르다. 노비는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주인과 노비 사이에는 군신의 윤리가 적용돼 주인이 함부로 죽이거나 사사로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됐다. 물론 주인이 노비를 미워하고 괴롭히려면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노비병신 만들 수 있었겠지만 법적 도덕적으로 최소한의 명시적 보호는 있었다. 당시 다른 나라의 최하층 대우에 비교하면 어떠한지 살펴보고 그에 근거해 비판해야 온당한 비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노비 비율 1/3 은 고려 시대보다는 줄어든 것이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노비 비율이 5퍼센트정도 였다는 건 대체 무슨 팩트인지... 미국 교수가 실제로 저런 말을 저 뉘앙스로 했을지는 의문이나 조선이 전쟁이나 무역으로 노예를 들여오지 않았던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이분 로마의 노예에 대한 관대함 보면 까무러치실 분이네 ㅋㅋ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노예는 자기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심지어는 자유도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조선의 노예제는 고대 국가인 로마의 노예제보다 훨씬 가혹한 수준이다. 로마에서는 주인이 열심히 봉사한 노예를 해방시켜 주는 게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고 노예들도 재산을 모아서 자신들의 자유를 돈으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해방노예들은 여전히 자발적으로 옛주인의 밑에서 일하면서 하나의 권력집단을 이루는 게 로마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조선의 노비제는 가축을 번식시켜서 재산을 크게 불리는 것에 더 가깝다. 노비가 자신의 자유를 살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주인 마음대로 할 권리만 존재했다. 중세를 가봐도 마찬가지다. 유럽은 농노제가 있기는 했지만 농노들은 엄연히 양민들이었고 도시로 도망쳐서 좀 버티면 자유인이 될 자유까지 존재했다. 그게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영주는 농노들을 보호하는 건 기본이고 정당한 재판을 해주고 직업까지 제공해야 할 의무까지 있었다. 무슨 중세의 영주를 조선의 놀고 먹는 양반들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영주는 엄연히 한 지역의 행정, 사법, 치안을 담당하는 공식적인 지배자였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대를 이끌고 참전해야 하는 의무를 진 군 지휘관이었다. 더 웃긴 건 조선도 분명히 농민들의 거주 이전 자유를 제한해서 토지에 묶는 법과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농노가 땅에 묶여있기 때문에 노예라는 논리라면 오가작통법 같은 것들로 땅에 묶여야만 했던 조선의 농민들도 다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조선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농민들을 땅에 묶으려고 했다. 노예제가 더 번성했던 이슬람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조선과는 아예 다르다. 이슬람에서 노예는 하나의 소유물이긴 했지만 동시에 엄청난 출세의 기회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행정 관료와 군 지휘관의 상당수를 노예로 채울 정도였고 애초에 예니체리도 초반에는 노예병들이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노예병인 맘루크들은 노예로만 머무른 게 아니라 능력이 있으면 계속해서 출세를 거듭했고 결국 무력으로 왕조를 찬탈할 정도였다. 맘룩 왕조가 어떻게 생길 수 있었겠는가??? 그만큼 이슬람의 노예제도는 신분 상승의 기회가 꽤나 보장된 편이었다. 조선의 노비제는 고대, 중세, 근대의 어느 국가와 비교해 보더라도 딱히 나은 점이 없고 같은 동족을 노예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최악의 노예제도였다. 이런 동족을 노예로 삼는 제도가 1895년이 되어야 겨우 폐지가 됐으니 얼마나 노답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팔레 교수의 지적은 지극히 타당하고 사료들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임스 팔레가 들이민 사료들과 그의 주장을 공신력 있는 학술지나 국제 학회에서 제대로 비판하고 그가 틀렸다는 걸 증명한 한국 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제임스 팔레의 주장에 불만을 가진 한국 학자들은 많았어도 그가 주장한 내용과 근거로 제시한 사료들이 틀렸다는 걸 입증한 한국 학자들은 없었다. 중국, 일본은 노예제도 폐지가 한반도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비교, 대조 대상도 충분하다. 해외의 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도 사료를 읽을 능력은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한국의 민족주의적인 학자들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잘 활용한다. 그 학자들 입장에서는 노예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거나 노예 신분 대물림을 폐지한 일본과 청나라를 보면서 조선의 노비제를 동족을 노예로 삼는 상대적으로 가혹한 노예제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뽕 정신으로 한국의 노예 역사를 왜곡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 역사적 진실은 진실일 뿐이다.
조선의 노비는 서구의 '노예'와는 성격이 다르다. 여러 공통점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동서양의 노비, 노예, 농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제임스 팔레 교수는 근본적으로 노비=서양의 노예로 규정하고는 하는데, 이것은 노비의 성격을 볼 때 큰 오류다. 위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그리고 서양의 노예들도 그랬듯이) 조선의 노예는 밖에서 사는 외거노비, 집안의 솔거노비로 나뉘는데, 이 비율은 대략 외7 솔3으로 나누어졌다. 외거노비들은 독자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소유한 상전에게 돈을 조금 내는것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런 제제가 없었다. 이들은 제한되지만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국가는 도망노비를 처벌하지 않았고(이들을 처벌하는건 도망노비의 주인이었는데 노비에게 심한 형벌을 내리면 노동력이 줄어들기에 심한 처벌은 적었을것이다) 노비의 재산은 법적으로 보호받았고 도망간 노비를 다시 잡았을때 노비에게 받는 벌금도 5년을 도망치든 10년을 도망치든 3년 밖에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의 위상이 올라갔기에, 이들은 점점 노비에서 계약 노동자로 변해갔다. 그렇다면 솔거노비들은 노예와 같은 상황이었는가? 꼭 그렇다만은 할 수 없다. 명목상으로는 집에 같이 사는 솔거노비지만, 그들 중 일부는 집안에서 일만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주인의 땅을 일구는 형태의 솔거노비도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양의 노예와 비슷한 노비(같지는 않다)는 노비 전체가 아닌 노비중에서도 사노비중 솔거노비, 그중에서도 집안에서 일하는 일부 솔거노비였다. 또 위에서는 조선은 다른 국가와 달리 신분상승의 기회가 없었다고 나오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납속을 통하여 천민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고 조선 전기 세종시절에 국가에 돈을 낸 노비에게 천역을 면제시켜 주는 제도를 실행한 적도 있으니 조선의 노비도 신분의 상승이 가능했다. 또한 노비의 삶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는데 그 근거로는 대부분의 도망노비들이 자유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다른 양반에게 가서 의탁하는, 지금으로 치면 지금 직장이 뭣같으니 이직해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 후기 들어 양민의 조세부담이 가중화되고 자영농들이 몰락하자 스스로를 노비로 팔아넘기어 구속되는 상황도 자주 있었다. 만약 노비의 삶이 개차반이었다면 다른 양반에게 도망치는 일이 있었을까?
- 자유를 찾아나설 곳이 있어야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거 아님? 유럽이나 중동의 다른 나라들도 자유 찾을 곳 없으면 다른 주인님 구했는데.
게다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가 중요해지기 시작하는데, 이는 노비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자신의 토지를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따라서 양반들은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 노비의 이탈을 막으려했고 이에 따라 노비가 주인에게 내는 신공은 점차 감소하였으며 오히려 주인이 노비들의 잡역세를 내주는 상황도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지 노비=서양의 노예라는 것을 근거로 하여 조선이 노예제 국가였다는 확실한 근거를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노비=서양의 노예 라는 전제가 옳지 않은데?
결론을 말하자면 노비는 서양의 농노, 기타 여러 문화권의 노예와 비슷한점은 있지만 구분되어야 하며 함부로 한가지 잣대로 재단질해서는 아니된다.
로마의 노예에 대한 관대함은 로마 후기에 노예의 수가 부족해지면서 생겨난 현상이지 로마 전체를 관통하는 현상은 아니었다. 로마 초기만해도 노예들의 대우가 아주 낮았다. 예를 들어 한 재력가는 황제를 초대하였을때 자신의 노예가 실수로 잔을 깨트리자 장어 연못에 던져 산채로 뜯어먹게 하라고 한 기록도 보이고 주인이 살해당한채 발견되자 그 아래의 노예 수백명을 처형하기도 했다. 이게 대우가 좋다고 보이면 할말이 없다. 다만 후기로 갈수록 대우가 좋아지긴 했는데, 이는 노예 자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윗 문단에서 말했듯 조선도 후기로 갈수록 노비의 가치가 올라갔다.
오스만 제국도 이름만 술탄의 노예지 사실상 조선의 노비, 로마의 노예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계층이기에 당연히 붙이는게 적합하지 않다.
또 위에서는 묵재일기를 들면서 노비가 폭압적 가내사법권에 묶인 존재라고 주장하는데 묵재일기에는 주인이 노비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려 이런저런 수법을 쓰고 노비의 사유재산이 완전히 보호되지 않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반대로 노비들이 자신의 사유재산을 불리려고 상업활동을 하거나 주인의 물건을 떼어먹는 등의 행위를 하기도 하며 상전도 이에 대해 알지만 넘어가기도 한다. 묵재일기에는 심지어 한 노비가 고리대를 유용하여 돈을 갚지 못한 채무인의 아내를 관아에 고발하여 가두고 집을 빼앗기도 하는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노비가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계약문서를 조작하거나 관아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는 등 위 문단에서 반박의 소재로 쓴 묵재일기에는 만약 노비가 그저 폭압적 가내사법권에 묶인 존재들이었다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부분들이 구구절절 나온다[8].
게다가 묵재일기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시대 중기의 서적이다. 그때도 저런 모습이 나오는데 신분제가 문란해지는 후기 조선은 어떠했겠는가?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노비는 서양의 농노, 기타 여러 문화권의 노예와 비슷한 점들이 보이지만 그들을 한가지 잣대만으로 재단하기는 불가능하며, 이들이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은 당연히 아니지만 생각처럼 완전히 부자유만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 사실 여기 나오는 단편적인 일화들은 고대 서양 노예나 중동 노예들도 다 이런 일화가 있기 때문에 조선의 노비가 타 문확권보다 관대했다는 근거 자체가 못됨
노예세습제가 1886년,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때 혁파되긴 하지만 그 이전까지 종모법이니 공노비 해방이니 이런건 그때그때 재정적 문제 등으로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 근본적으로 인권을 고려한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노예제 뿐만 아니라 서얼차대법도 만만치가 않은데 지들은 첩은 두고 싶고 일부다처제는 막아야겠고 해서 만든 희대의 개쓰레기 제도이다.
The DNA abnormality due cause incest of Korea hwabyeong
한국인의 유전자 특징에 대해서 미인류학자 Cavalii-Sforza의 유전자구배(비탈) 데이터에 의하면, 한국인은 세계에서도 유래를 볼 수 없을 만큼 균일한 DNA염기배열의 주인이며, 이것은 과거에 있어서 큰 Genetic Drift(소수의 인간이 근친상간(간통)을 포개서 지금의 인구동태를 형성)인가,혹은 근친상간(간통)을 일상적으로 되풀이하는 문화의 주인이었던 것을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문헌:The Great Human Diasporas: The History of Diversity and Evolution. 1995.. Luigi Luca Cavalii-Sforza and Francesco Cavalli-Sforza. Addison Wesley Publ. ISBN 0-201-44231-0)
유전자 수준으로 보아도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이 맺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유전자가 대다수 발견되고 있다. (아마 족보 주작도 영향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인은 근친상간(간통)의 물건이라고 생각되는 게놈상의 흔적이 너무 많고, 한국인 남성에 발증한다라고 말해지는 정신장애들 중 일부는 그것이 원인인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유전자 근친성과 노비종모법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보이는데, 조선시대 때는 여자노비는 거의 물건처럼 취급되었으므로 다른 노비나 평민과도 프리섹스가 가능했다. 특히 세종이 노비종모법을 실행한 뒤에는 이걸로 재산 증식을 할 수 있어서 장려하는 양반 주인님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을이라는 여자노비가 갑이라는 양반가에 예속되었다면 그여자노비 후손들도 그 갑이라는 양반가 사람들에게 물건처럼 대대손손 상속이 되었으므로 최대 무려 50세대를 여자노비의 후손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의 후손들이 근친을 했을 수도 있다.
사실 양반들은 대체로 자기들끼리는 근친을 피했고 그러면서 노비종모법이 시행되고 시간이 지나자 양반과 평민, 노비출신 첩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인 중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하며 엄격한 동성동본을 지켜 태어난 자식들에게만 상속권을 주고 가문의 대를 잇도록 했다. 물론 그래도 시대상 한계로 그 과정에서 근친이 발생하기도 했다.
- 이거 일웹에서나 가끔 나오는 우생학적 논거인데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일뽕들은 조몬인들이 눈이 크고 잘생긴 인종이라며 일본인들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답이 없는 애들이니 걸러들어야 한다.
근데 진짜로 조상님들의 신분 의식은 결코 허접하지 않았다. 금계필담에서는 노비를 죽이고 관가에 신고를 하지 않은 이서구를 칭찬하며 묵재일기에서는 양인 수공업자를 매질한 일화를 자랑스럽게 수록하고 있다. 양인들도 아무렇지 않게 억압하는 마당에 노비가 받는 대우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실제로 여러 일기에서 양반들이 사사로이 노비를 처벌하고 심문하고 매질하고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불손한 노비를 때려 죽이고 미성년자에게조차 친구의 밤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 자랑할 만한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양반들끼리 놀 때 기생이나 여종을 부르는 이유다.
참고로 일반적으로 옛날로 갈수록 더 심했다. 신라 시절에는 골품제 덕분에 신분이 낮으면 마음대로 살기도 힘들었다. 백제랑 고구려도 마찬가지고
경제와 사회
유교적 경제관에 입각해 상공업 발달을 억제하고 강력한 중농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주력 산업인 농업에서조차 그 생산력이 높지 않아서 결국 조선은 만성적인 재정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돈이 없으니 도로, 저수지 및 관개시설 같은 기반시설에 대한 국가의 투자도 기대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상공업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인해 농업 외에 기타 산업이 성장하길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똥땅에 비해 농업생산력은 그래도 동시기 다른 유럽에 비해 높았다. 모든걸 다 포기하고 오직 농사에 모든걸 몰빵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조선의 인구가 좁은 땅에 비해 500만이 넘었으니 GDP 자체도 전근대 기준으로도 꿀리지 않았다.
- 국가에서는 지속적으로 경작지를 늘리려는 시도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속적으로 하천 근처의 기름진 범람원을 농지로 개간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주로 백성들을 징발하여 개간하였다. 물론 어느 관점으로 보자면 자신들의 밥그릇을 늘리기 위해 백성들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조선 정부에서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보는 건 조금 무리가 있는 듯 하다.
또한 성리학 교육에만 온 국력을 몰빵해 인재들이 전부 관직 부문에만 집중되어 사회 각 부문간에 인력 배분에 실패했으며, 지식 또한 지배층이 독점하여 민간에 지식이나 정보가 유통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인쇄와 출판을 사실상 국가가 독점하여 통치에 필요한 것들만 조금씩 서적으로 찍어냈지만 대량생산을 하지 못해 값이 비싸 일반 백성들은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 책의 경우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 백성들이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던 것이었다. 서양도 구덴베르크 이후에나 해결되었다.
조선의 경우 물론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국가에서 교과서인 동몽선습 등을 발행하여 각지의 서당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농업에서 만큼은 기술 배포를 위해 세종 대에는 각지의 농사법을 모아 농사직설을 편찬하였으며 금양잠록, 농가집성 등의 책도 출간되었다.
수취제도에서 조세의 공식적 세율은 토지생산량의 1/10 이었지만 과전법과 직전법이 무너지고 환곡, 병역, 공납제도에서 무수히 많은 폐단이 발생하여 수취제도 전반이 백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백성들은 부담을 감당하다 못해 토지를 이탈하여 도망다니기에 이르렀다. 수취제도가 심각하게 썩었음을 인식한 조선 후기에 비로소 대동법이 시행되어, 공납을 각 가호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세와 같이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부과하는(공납의 재산세화) 일부 개혁적 조치가 행해지긴 했지만 전국에서 이것이 시행되기까지 100년의 세월이 걸렸다.
총체적으로 보면 조선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성장을 가져오는 요소보다는 오히려 저해하는 요소를 더 많이 갖고 있었다. 500년에 이르는 역사 가운데에서도 단 한번도 그러한 체제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지배층들은 착취와 체제의 안정만을 고집했을 뿐이다. 상공업은 집어치우고라도 주력산업으로 찍어놓은 농업의 생산력을 늘리려는 노력도 거의 하지 않았다.
- 농업 생산력의 경우 고려 때 보다 발달한 것 은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중농 정책을 펼치었으며 농지는 조선 전기부터 계속해서 개간을 통하여 증가하였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방치되었던 하천 근처의 범람원과 원시림들이 개간되어 논과 화전으로 바뀌었고, 치수사업을 통해 보 같은 저수시설을 확충하였다.
소(牛)의 경우도 있다. 세조때의 기록에는 오키나와의 물소와 한국 소를 교배하여 힘이 센 소가 나오도록 계량하였으며 이를 전국에 보급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초기 3만마리 정도였던 소가 18세기 후반에는 100만마리 정도로 증가하였다는 계산도 있다. 다만 이 경우 소가 많아지다 보니 소 전염병인 우역의 창궐과 소가 옮기는 우두로 인해 천연두가 유행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선에서도 노력은 했다. 관점을 바꾸어서 말해보자면 지배자 자신들(양반들)의 밥그릇이 나오는 농업을 발전시키려 하지 않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천 개간과 화전으로 인한 다양한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 상업에 대해서도 17세기 이후나 양란이후 처리에서 신하들이 각종 상업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즉 조선 정부가 상업을 무조건 찍어누르기만 한 국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예로 17세기 서인과 남인은 상업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근데 GDP는 생각보다 낮지 않았다고 한다. 'Development Centre Studies The World Economy A Millennial Perspective' 라는 OECD에서 발간한 책에 따르면 1900년대 당시 GDP가 한국이 850달러로 세계 27위, 일본이 1135달러로 세계 24위였다. ...근데 당연하지만 GDP가 높다고 기술 수준이 높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당시 조센 수준을 보면...
- 저 책을 쓴 앵거스 메디슨의 2010년 자료에서는 조선의 일인당 GDP가 더 떨어졌다. [6]
- 애당초 앵거스 메디슨 자료는 그냥 재미로만 보는거다.
양천제였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반상제였기 때문에 양반층은 부역과 조세에서 면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비는 엄청 많았고 이래서야 나라가 부강해 지려야 질 수가 없다. 거기다 화폐경제도 늦게서야 정착이 되었고 나름 세율은 낮게 잡아주려 했지만 나라에 도둑놈들이 많은 관계로 폐단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나라가 거지였다. 남간에서야 정부가 검소하게 운영했다 하는데 안한거와 못한거는 다른거지.
- 안한거 맞다. 조선은 성리학,민본주의땜에 세금 적게 거두는 작은 정부를 표방했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그래도 일하는 관리들 녹봉은 짭짤하게 챙겨줘야하는데 개ㅈ만하게 챙겨줘서 대부분의 관료들은 녹봉으로 생계유지조차 못했다. 그러니 지방 관료들의 수탈이 생겨난거지 단순히 동네 사또들이 미친 사이코 새끼들이라 뜯어먹은건 아니였다
좆같은 도로
유교 탈레반인 정치인(사대부)들은 도로를 건설하면 오랑케가 도로를 이용해서 침략한다는 부류가 대부분이라 도로건설을 극렬히 반대했고 거기다가 도로가 건설되면 상업이 발달해 성리학에 입각한 중농주의가 위협받는다고 주장했다. 상업이 발달하면 중농주의가 파괴되면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던 정치인(사대부) 자신들이 위협받으니 국가의 발전과 안위보다는 지들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거 보면 헬조선이라는 말이 그냥 떠오른다. 거기다가 존나 답답한데 놀고 먹고 정치질하는 지주인 사대부들은 세금을 내는 계층이 아닌마당에 노동하는 농민은 지주에게 소작세를 바치고 나라에 세금까지 바쳐야됨.
도로가 발전하지 못 해서 상업이 발달하지 못해 산업도 발달하지 못했고 그에 따른 경제철학이나 사회현상발견같은 혁신을 가져오지 못 해서 예를들면 조선후기 경복궁을 중건할때 인플레이션 개념을 몰랐던 조선은 당백전을 틈만나면 찍어대서 물가가 상승했는데 해결방법은 몰랐다.
거기다가 그나마 있던 도로 거의 모두가 흙길이라 비가오면 질퍽한 뻘로 변해 우천시 교통은 매우 좃 같았음.
그리고 그 도로도 한반도 자체가 산이 존나 많은 국가라서 산길에 겨우겨우 뚫어놓고 걸어다니는 도로였으며 당연히 산으로 다니다보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중,후기들어서 실학자들이 주장한게 "도로 정비해서 수레좀 씁시다"였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급식시절 초중고에서 배우는 실학자 박지원의그 유명한 허생전 자체가 조선은 도로가 없어 유통이 이루어지지않음으로 말미암은 열악한 시장상황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가끔 조선 쉴드치는 국뽕들이 좆선은 해운에 의존하여 도로 안지었다고 쉴드 존나 치는데 시발 무슨 강이 한반도 내륙마다 베네치아마냥 연결되어 있으면 모를까 개헛소리니 들을가치조차 없다.
다만 이는 근대 이전 국가에서 전형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로마를 언급하는데 로마 이후 유럽에서는 로마와 같은 포장도로를 발달 시키지 못했고 도로 대다수가 질척한 흙길이었다. 다만 조선이 국가적으로 도로를 닦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도로를 닦는 것과 같은 일로 인력을 동원하는 건 민폐라고 생각했으리라 추측한다.
- 삼면이 바다 그거는 ㄹㅇ 존나 어처구니 없는게 씨발 이탈리아도 반도지만 얘네는 워낙 씹사기니 넘어가더라도 바다 낀 나라가 한둘이 아니거늘 그 어느 나라도 조선만큼 도로가 후진 나라는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도로를 석재로 포장하는건 근대 이전에 로마만이 해냈던 일이기는 한데, 로마처럼 아예 싹 다 포장하는 미친 짓만 안했을 뿐이지 최소한의 관리들은 했다. 동시대 청나라와 비교하는 북학파들의 글만봐도 조선은 전근대 국가 중에서도 특별히 도로가 병신임이 다 나온다.
도시
초기~중기까지는 수도인 한양 및 평양부, 개성 유수부, 광주목, 경주부 등 지방행정단위로서 국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지방관을 파견한 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생성되었다.
17C이후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효종 이래로 화폐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상업이 발달해 점차 물품거래가 상대적으로 활발한 강 중하류의 포구, 세곡미 저장 창고가 있는 곳, 해안가에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였고 이때 포구, 포구를 중심으로 한 시장(장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금강의 강경포나 함경도 원산지역이 대표적이다.
- 효종 이래로 화폐가 널리 쓰였다는건 개씹구라다. 조선 후기 경제를 대표하는 상품은 바로 '베'였다. 즉 베를 가지고 다니며 물건을 구입할때마다 그때그때 베를 잘라서 내주었던게 조선이 멸망하던 그 순간까지의 경제수준이다. 그나마 초기에는 쌀과 계란으로 물물교환 했던게 발전한거다! 참고로 당연히 쌀 한 포대에 베 2필 이런 통일된 규정따위 없었고 걍 흥정나름인 원시경제수준이었다.
- 효종 이후 화폐가 널리 쓰였다는건 개소리 맞다. 명이 15세기에 화폐경제를 부활시키고, 17세기에 일본에서 화폐경제가 발달시작한 것과는 달리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조선의 화폐는 대도시나 시장에서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수준이었다.
조선의 화폐제도는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임란 이후 명과 일본에서 은이 다량으로 유입될 때에는 동전보다는 은이나 베, 쌀을 화폐처럼 썼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은 유출을 적극 규제하면서 동전이 슬슬 퍼지기 시작한게 숙종때부터다. 그러나 그마저도 동전유통을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영조 때 부터는 아예 주조가 중단되기도 했던걸 보면 교과서의 '널리' 라는 표현과는 다르게 국가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이진 못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지주들이 소작농에게 소작을 주는 대신 직접 경작하는 행태가 늘어나고 일부 소작농이 토지를 독점하여 부농으로 성장하는 한편, 많은 소작농들이 토지를 잃고 반 강제적으로 농촌을 떠나 광산노동자나 소상인이 되면서 포구나 장시는 물론 광산 주변에도 인구가 집중되었다.
조선의 가장 큰 도시는 역시 수도인 한양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에 인구가 10만이었고 임란 이후에 4만, 조선 후기에 20만이었다고 한다. 한성부과 관할하는 한성 밖 10여리 정도의 인구까지 포함하면 30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명 뒤에 '-포', '-진'이 붙은 곳이 한성 주변 인구밀집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노량진, 마포등이 그 예이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후기 도시의 인구집중화 현상으로 위생,환경 문제가 크게 발생한다. 한양의 식수은 토양의 오염으로 염분도가 상승했고 길거리는 오물과 똥이 방치되고 벌레가 들끓었다. 특히 여름되면 어떤 말로 표현도 못할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도시전체를 뒤덮었기에 조선으로 장사를 하러오거나 선교를 하러 온 외국인들도 차라리 코를 없애버리고 싶다고 한탄할정도. 상'하수도가 정비되지 못해서 그냥 맑은 물 만있으면 마셨고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복통에 대한 잦은 기록들이 조선 특유의 과식과 한양의 식수원 오염이 원인이라고 추정된다.
거기다가 더럽게 씻지도 않고 머리에 이가 있으면 오히려 장수의 상징이라면서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도시가 발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건설되어 건물과 건물은 규칙성도 없었고 건물끼리 가까이 붙어있어 화제가 나면 일대가 쑥대밭이 돼버렸다. 한양에서 조그만한 화재만 나도 왕이 수시로 보고를 받고 명령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주요도시 인구가 18C(정조 치세시기)에 어떠했을지는 다음 링크를 참고해라. [7] MLB파크 이용자가 아주 구체적으로 작성하였으나, 출처를 적시하지 않았으므로 아주 믿지는 마라. 단순 참고용이다.
지나친 기술 천시 풍조
삼국시대보다 못한 경제적 인프라가 있다. 칼럼 이 병신 칼럼은 백자가 더 높은 온도에 구원서 청자보다 만들기 힘들다는 것도 모르고 쓴거니 무시하자. 진짜 '암흑시대'라는 말을 중세 유럽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추가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깊게 통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유명한 사>농>공>상의 조선 풍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새끼들에겐 뒤진 공자 새끼 말씀이 제일 중요했고, 그 다음으로는 지들 배때지에 밥 넣어줄 농민들이 중요했고, 기술자는 필요할때만 찾는 쌍것들에 불과했다. 이러한 조선의 풍조는 발전이 정체되어 세계 제일의 극빈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프랑스의 샤를 메시에가 메시에 천체 목록(그 유명한 안드로메다 은하도 포함되어 있음)을 작성하던 그 시기에도 조선 새끼들은 기술 천시 풍조로 천문학에 대한 발전이 전혀 없이 지배층이라는 새끼들이 몇 세기 전에 명나라에서 짓껄인 개소리 '양명학'을 두고 이것이 옳으네 그르네 지들끼리 싸웠던 나라니 얼마나 미개한지 알 수 있다.
요약하지면 상업은 농담 아니고 고대 수메르 문명보다 못한 수준이고(얘넨 수천 킬로 떨어진 인더스와 교역이 활발했고 그를 위해 상인들끼리 공동투자도 하고 놀았다. 쏟아지는 점토판 유물의 대다수가 '영수증'이다), 공업도 동시대 국가 중에서 가장 ㅎㅌㅊ인 수준이며, 그나마 농사에 몰빵해서 농업생산성은 꽤 준수했지만 사실 이마저도 상공업 몽땅 내던지고 몰빵 한 것 치곤 병신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수차 도입을 안한 건 상류층이 얼마나 농민들 배려를 안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생을 사서한다 아주
기술자를 천시하고 실제로 장인들에 대한 관아의 횡포가 심했다고 한다. 또한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고 대우도 형편없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도공들이 일본으로 간뒤, 좋은 대우를 받자 고국으로 돌아가기 싫어했었다고 함
지주를 위한 나라
조선이 좆망한 가장 큰 원인이다.
선조대 들면서 조선의 주요 지배계층으로 된 사림쪽은 대체로 중소 지주계층이다. 관료들도 죄다 이쪽 계열이다보니 얘네한테 유리한 방향의 정책밖에 내지 않았다.
- 근데 이건 의외로 유럽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급성장한 독일의 융커 새끼들도 지들이 지주 출신이니까 지들 지역에 유리한 정책과 법률을 만들어서 다른 상공업 지역들을 쪽쪽 빨아먹었다. 농업에 별로 의존하지 않던 부르조아들이 존나게 귀족들을 혐오한 이유다.
왜 상공업 천시하고 농업에 몰빵했냐? 상공업이 흥하면 지주들은 당연히 예전만큼 힘을 못쓰니까
향약보급, 서원을 왜 그렇게 지어댓냐? 말이좋아 교화지 그냥 지방 사대부들 권한확대용이다. 굳히기용 유향소는 덤
노비수가 왜이리 많았나? 상공업이 씹창났으니 농업외에는 할게없고 흉년이 들면 밥만 먹여달라고 노비로 들어오니까 농업사회는 거의 무조건이다 싶을정도로 노동력이 곧 재산이다. 근데 굴러들어온 노동력을 놔주고 싶어하겠냐? 관료라는 새끼들도 극소수의 개념인 빼고는 노비제 굳히는데 안달이 나있다.
수미법? 상공업 좆망하고 농업에 몰빵한 나라에서 수미법 도입은 건국하고 절반이 지나간 상황에서 진행했다. 애초에 수미법은 세부담을 지주한테 지우는 탓에 지들 부담이 늘거든
지주의 나라였던 조선이 망하고 한반도에서 소작이 사라진건 광복 이후, 북괴새끼들이야 지주들에게서 토지를 몰수해서 무상 분배했고 남한은 농지개혁법이라고 토지를 유상구입해서 농민들에게 장기 분할 납부로 팔았고 어짜피 그 뒤에 한국전쟁으로 지주나 소작농이나 똑같은 거지새끼들이 되면서 소작이 사라졌다.
상인
상공업이 좆망해서 조선이 좆망했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새끼들 탓도 크다. 중앙정부가 상인들 이윤좀 빨아먹자고 특정 상인들에게 독점권을 줘버렸다. 조선이 교통이 병신인탓이 이들 덕일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상공업을 이새끼들이 독점해버리니 기술발전이 쉽게 될리가 없다. 더군다나 결속력은 기가막히게 높아서 새로 뭐가 나올수가 없다.
나중에는 어용집단으로 변질되고 이게 구한말까지 지속된다. 우리가 아는 보부상이 그거다.
당백전
조선 왕조가 경제에 대한 지식이 모자르다는 증거. 항목 참조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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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의 종로.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조선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조선 최고의 부촌이었다..는 아니고 그때 조선 최고의 부촌은 경복궁 옆의 북촌이었다 집들이 빽빽하게 몰려있어 극심한 인구밀도를 보여준다. 구한말 당시의 도시 정비사업으로 길 양옆의 간이 초가집이 모두 철거되었다. 참고로 일제시대 사진 아니다. 대한제국 시대 사진이다. 시대는 구한말이지만, 조선시대 모습이라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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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회사에서 내려본 한양 시내. 역시나 너무 빽빽하게 몰려있다. 저런데서 살면 답답해서 일찍 죽는다. 조선을 방문했던 외부인사는 '내가 세계 여러 나라 수도와 도시를 다녀 봤지만 조선처럼 2층 건물 하나 없이 평평하며 문화시설 없는 곳은 처음 본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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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종로의 피맛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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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밖의 빈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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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중심가. 개성과 함께 상업이 크게 발전한 도시였다. 문화가 아니라 경제력으로만 보면 조선 최고의 도시였음. 해외의 선진문물이 수도보다도 빠르게 유행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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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성내의 빈민굴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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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정조 중흥기를 거치고, 순조 때부터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가 정권을 잡았더니 결국 이하응이 왕권 강화를 외치며 나타나서 이들을 때려 잡았고, 그대로 아들에게 왕권을 계승당한다. 하지만 이미 정세는 외국들이 한반도에 침을 흘리고 있던 때였고, 조선을 누가누가 집어먹나로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 고종은 점차적으로 이권을 외국에 빼앗기면서도 어떻게든 나라의 기틀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을 선언하고 개혁을 지시했다. 조선의 애국심 높은 관료들은 살기위해 이 악물고 개혁을 추진하지만, 고좆과 개완용 같은 새끼들의 사인 몇 장으로 인해 결국 일본한테 나라가 넘어가 버린다.
500년 동안 긴 치세를 자랑했는데 중간에 정권이 바뀌어서 근대화 가능성이 열렸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솔직히 500년동안 발전은 커녕 퇴보와 개병신짓만을 일삼았는데 다른 나라에 식민지가 돼버리지 않는 게 이상한거다
ㄴ 이게 맞다 천몇백년전에 죽은 사람의 가르침이나 받아서 쓰고 있었고 명나라 후빨만한 아주 좆병신 국가다.
설령 일본제국이 아니었더라도 청나라나 러시아 식민지가 될 가능성 높았다. 만약 이랬으면 중국의 일부가 되거나 조선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과학 기술
나도 한줄 추가하자면 신라시대의 '포장도로'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난 조선도 당연히 포장도로가 있는줄 알았다. 왜냐면 신라시대에 있던 포장도로가 조선에 없을리가 없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잖아? 그런데 조선에는 포장도로가 없었다. 500년 내내 포장도로를 깐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진짜 개쓰레기 왕조다.
애초에 똥양엔 과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과학이란게 자연현상을 이론화 하든가 그것을 설명해줄 실험같은 것을 해야 과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중국은 높은 인구와 지디피로 인해 경험에서 축적된 것들이 발명되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과학기술쪽에서는 조선과 비교가 안된다. 임진왜란때 총을 들고온것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도 유럽(네덜란드)으로부터 의학,약학,천문학,해부학,역학,화학,전자기학 등등 새로운 학문들을 계속 받아들이고 공부를 했다.
이러한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들이 19세기에 주인님한테 강제로 뒷문을 개통당하자마자 급속히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일본마저도 조선은 미개인 왜구 새끼들 wwww 하면서 무시하다가 결국 전쟁 한번도 못해보고 노오예가 되었다. 그나마 세종 시기 등 조선 초기에는 조금 발전하나, 사농공상의 구조로 이공계를 천대하던 구조상 발전이 정체되고 만다.
솔직히 세종시대에도 별로;; 웬 씨발 빗물받이 깡통 하나를 가지고 조선 과학기술의 수준이라며 물고빠는게 현실이다. 참고로 그제야 장영실이 빗물받이 깡통 만들때 유럽은
- 혼천의
- 자격루
- 훈민정음
- 측우기를 깡통이라고 하는건 경기도 오산
- 우리가 금속 활자 만든 200년 후 유럽에서 개발된 금속 활자 (200년이 아니라 78년이고 유럽은 금속 활자 개발 이후로 잘 써먹었는데 우리나라는 활용을 좆도 못했지 최초로 개발만 하면 뭐하나 그걸 제대로 활용을 못하는데)
- 한지
- 온돌
아무리 좆선이 좆같아도 세종은 건드는거 아님
옆에 중국이 있다고 지레짐작으로 중국 과학 기술하고 비슷하겠지 여기는 병신들이 있는데 지금도 바로 옆에 노벨물리학상 11명, 노벨화학상 7명, 노벨의학상 3명을 보유한 일본이 있는데 왜 우린 물리학상, 화학상이 한명도 없냐. 그나마도 존나게 논문발표하고 공유하는 현대도 그모양인데 그딴 거 없던 과거엔 더욱 설명이 필요하냐?
- 노벨과학상의 수상기준은 새로운 것을 발명하면서 이를 실제적으로 입증하고 체계화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한국에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없다는 것은 우리 과학기술이 미개해서 그런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는 데 몰두할 환경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 당장 높으신 분들부터 극단적인 성과주의를 강요하는데 당연히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안 나오지.
박지원이 쓴 갓소설 허생전만 봐도 당시 헬조선의 현실을 알 수 있는데 자기들보다 문물이 훨씬 뛰어난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청나라는 누가 봐도 조선보다 기술이 뛰어났고 허생이 죽어라 조선을 발전시킬 내용을 설명해줘도 말 안들어처먹는 양반새끼를 보면 조선이 망한 이유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미 송나라때 물레방아 신나게 쓰던 중국과 달리 이놈의 조선은 물레방아는 커녕 통방아같은거나 썼다. 대장간에선 그럼 어떻게 풀무질 했냐고? 헬조선답게 인적자원을 사용했다.
그나마 19세기 들어서 겨우 물레방아 사용시작. 애초에 사신 보낼 때 산업스파이 노릇좀 해야하는데 고려말 문익점, 최무선과 달리 조선새끼들은 카피캣 증오하는 앱등이 마냥 산업스파이짓을 잘 안했다.
어쩌면 죄다 유교탈레반이라 기술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훔쳐오고 싶어도 이해를 못해서 훔쳐오지 못한 거 일 수도 있다.
- 초기 이후 집권한 사림새끼들은 성리학탈레반에 씹선비들이라 그런 생각 자체를 안했다.
근데 위에 말이 맞다 조선시대때 나라 과학기술이 진보는 커녕 하루하루 뒷걸음질 퇴보만 일삼았던게 바로 유교탈레반꼰대들의 영향이 컸다.
뭐만할려고하면 "아이되옵니다. 그것은 유교의 순리를 위반하는것이옵니다"이딴 개좆같은 소리를 하며 훼방을 놓았다 니가 좆소에서 파워포인트, 엑셀로 존나 열심히 정리한 작업을 부장이나 사장새끼가 퇴짜놓으면서 "그딴 간단한 작업도 컴퓨터에 의지하냐?"라고 빠꾸먹는것 그 이상이라 보면 된다. 유교탈레반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탈레반급으로 개지랄하던거였으니깐
그나마 농지에 물좀 쉽게 공급하게 수차(물레방아말고 나선식 펌프같은거)를 도입하자는 산업스파이가 있었으나 농지에 물대는거보다 비오는거 걱정을 더 해야하는 저주받은 기후 문제와 미개한 조선농민들이 그딴거 만들어서 쓸 돈 아껴서 싸게 인력으로 물주면 된다고 도입을 안했다. 그래도 아주 미친놈들만 있는건 아니라서 나무 남획이 심하니 우리도 중국처럼 석탄쓰자고 주장한 깨인 인물도 있었는데 석탄 채굴보다 나무 베는 게 더 쉽다는 미개한 이유로 무시당했다.
고려에 비해 항해술도 퇴보했는지 분명 고려때는 닝보까지 논스톱으로 배타고 가던 놈들이 조선되니까 배타는 걸 존나 두려워해서 멀쩡한 영토였던 울릉도 관리 힘들다고 비워버림.
애초에 시발 무슨 공군이 있는 것도 아닌데 건축제한을 심각하게 걸어놓고 자빠진 마당에 건축술이 발달되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남의 집 기둥에 척재서 크기 크면 바로 잡아가버리는 클래스인데 건축기술이 발달되겠냐. 그리고 이런 이공계 천시와 쓸데없는 규제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가끔가다 빼얘애애애애애애액! 조선에도 서양보다 뛰어난 기술이 있었거든요! 하는 국뽕종자들을 본다면 그렇게 잘난 조선의 현실을 설명해 주자. 조선이 지동설을 받아들인 때는 1857년 "지구전요(地球典要)"를 통해서이고, 만유인력을 받아들인 때는 1867년 성기운화(星氣運化)를 통해서 였다 .
정리하자면, 만유인력과 지동설이 조선 땅에 전해진 것은 불과 150년 전 밖에 안되었다는 것이다 ㄷㄷㄷㄷ 서양에서 케플러 법칙이니 만유인력이니 하는 센세이셔널한 이론들을 연구하고 있을때 조선인들은 공자느님은 그런 말씀 하신 적 없다능!!! 이지랄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는 귀족이나 왕실, 돈 많은 상인들이 내 이름 좀 높여보렴 이러면서 예술, 학문가들에게 투자해서 여러 방향으로 발전할 바탕을 만들었지만 조선은 상인을 존나 천대하고 상인들의 영향력도 크지 않아서 국가의 학문 과학 발전은 오로지 왕의 관심에 달려있었다. 중국이 전국시대에 여러 사상가를 배출했었지만 조선왕조는 중국 발 햝으면서 일본에게 후장 따이기 바빴다. 그래서 조선의 정치가들이자 학자들인 선비들은 장례식을 몇 년 치를지에 대한 주재로 오랜시간 싸우고 칼부림을 하기도 했다.
노무현이 이지스함 진수식때 `세종대왕시절 약50개의 세계 발명이 있었는데 그중22개를 한국이 중국이3개 일본이1개 발명을 했다고 합니다` 라는 개소리를 지껄여서 세계인들에게 개망신 당하기도 함 ㄴ 개소리가 아닌 팩트다. 일본 학자가 쓴 과학사기술사전에 나온 내용이다. [[8]]
그냥 간단히 조선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과학기술이 뒤떨어진 국가라고 보면 됨. 국뽕들 헛소리는 그냥 무시가 답이다.. 국뽕 나무위키 가서 쳐 놀기를 바람.
- 조선 전기는 터무니없는 개소리지만, 조선 후기는 엄연히 뒤떨어진 건 맞다. 조선 전기 당시에 일본은 오닌의 난이라고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웠음, 조총 들어오고 기독교 들어오고 서양문물 들어오면서 떡상한거다.
그래도 하나 빨아줄 만한건 '은연분리법'이라고 은을 채취하는 신기술이 있었는데 연산군대라서 빛을 발하진 못했고 오히려 일본에 넘어가서 일본놈들이 개항하기 전까지 은화만드는게 애용했다. 퍼주는 병신 국가잼~
의학
가장 잘 알려진게 동의보감밖에 없다. 그것도 오류가 많은 편이라고 함. 한무당들은 동의보감들고 써먹으려고 하는데 지금 먹히겠냐?
기생충
기생충이 지금에 비해 많이 걸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화학비료를 안쓰고(화학비료가 만들어지기 전이니까) 똥으로 만드는 천연비료로 친환경 농법을 주로 사용했는데 화학비료의 화학성분으로 오염될 걱정이 없는대신 기생충 감염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깨끗한 자연환경
화학물질로 이루어진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아서 매우 깨끗한 자연환경을 가졌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화전민들이 인공적으로 산불을 일으켜도 송충이가 갉아먹는 소나무의 양의 2분의 1도 안될정도로 환경에 매우 신경을 썻다고 한다.
사실 석탄을 개발하지 않아서 엄청난 벌목으로 인해 조선의 삼림은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군대
시조인 태조 이성계는 한반도 역사상 이순신과 더불어 개사기 천재 지휘관이다. 어느 정도냐면.. 전통적인 기병강국 몽골을 기병으로 격파했고, 평지에서 여진족 기병 수만을 격파하고, 산에서 농성하는 쪽바리들을 상대로 기병으로 상대하고 활로 무쌍난무 펼치고, 이미 20대 때 10만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다. 몽골족, 여진족, 쪽바리, 짱깨 다 때려잡은 한반도 육군 역사상 최고 아웃풋을 자랑한다. 심지어 홍무제는 이성계가 군대끌고 처들어 오면 어케막냐고 신하들과 의논했을 수준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세운 오리지널 헬조선 군대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손 꼽히는 개약체다. 중국은 아무리 삽질하던 시기라도 해도 전반적으로 강력했고, 일본은 계속 된 전국시대로 인해 군대의 용맹과 강력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총력전을 한 임진왜란이 200여년의 걸친 평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전에도 조선군은 제대로 된거 같지는 않았다. 리즈시기 태종-세종 시절때 대마도 정벌 때 매복한 대마도군에게 당한건 그야말로 개씹좆이라 할 수도 있다.
- 근데 이건 매복해서 갑자기 당한 것도 있고 집이고 배고 엄청 태워버려서 대마도주가 빌빌 길 정도의 피해는 입히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한게 잘한 건 아니지만
조선 초 사병이 해체된 이후 징집병들로 군대가 편성되면서 근접전 역량이 급격히 저하되었고, 결국 조선군은 근접무기보다는 원거리 무기를 선호하는 군대가 되었다. 조선군의 주요 전술은 고지를 선점한 후 활이나 조총같은 원거리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을 배치해놓고 적이 접근하면 격퇴하는 방식이었는데 대마도 정벌에서도 이와 같은 전술을 썼다. 임란때도 근접전은 명군이 주축이 되어야 했다.
- 이건 사병이 해체된 탓이 아니다. 세조가 멀리서 활쏘면 되는데 창기병 뭐하러 있음? 하면서 창기병 없에고 돈나간다고 화통도감 폐지해서 병신된거지
그리고 전체적으로 수가 정말 적은평이였는데 이괄의 난때 1만2천명이 배신했다고 나라가 씹창났다 ㅋㅋㅋㅋ(그 1만 2천이 당시 최정예병들이었고 그 당시 조선 총 병력이 10만도 안된다. 지금도 최전선에 있는 야전부대 10% 이상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면 진압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 정도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잘 감시해서 방지하는 거지)
병력의 질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가 바로 보급 자체가 씹망 수준이었다는 거다. 당장 임진왜란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얼마나 보급력이 앰창이었는지 대놓고 자기들한테 덤빈 일본군 작살내려고 온 명나라 군대도 조선의 보급력이 너무 앰창이라서 뜨악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강화교섭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당시 명나라 군대는 봉급제로 은덩어리를 지급받아 이걸로 셈을 하여 식량을 사먹는 시스템이었는데 당시 화폐 경제 자체가 없던 앰창 조선에서는 이게 불가능, 그러자 명군 지도부는 재빨리 요동에서 준비된 식량을 조선으로 운반하기 시작하여 의주까지 운반하였고 그 후의 보급은 조선에게 일임하였는데 조선은 이걸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의 개념 자체가 씹망이라서 보급이 제대로 안되기 시작했고 결국 명나라에서 온 기병대의 군마 절반 이상이 굶어 죽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그것도 존나 장거리도 아닌 의주에서 평양까지의 보급을 못해서 이 사고가 터진거다. 명나라가 얼마나 빡쳤는지 조선보급담당 관리를 직접 불러다가 곤장을 때리고 류성룡까지 불러다가 조질려고 했을 정도로 명나라 입장에서 어처구니가 없었던 일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전쟁론 같은 책이 나오고 있을때 갓조선은 무엇을 하고있었는가?
평화를 사랑해서 임란때는 영웅 한명에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했다.
고려 왕조의 군인은 그래도 거란의 침입을 막거나 한 전적이라도 있었다. 근데 조선의 군대는 진짜 말 그대로 초기를 빼면 털린 역사밖에 없다.
근데 이건 학자풍이 강해져서 그렇게 된 점도 있다. 원래 과거에는 상무정신이 강하고 무사들이 설치는 나라들의 맨파워가 아주 강력했고 세계의 다른 나라들도 학자풍이 들면 군사력이 엄청 하락했다.
심지어 그 로마도 상무정신이 강한 민족들하고 전쟁은 덩치와 장비빨에 비해 엄청나게 고전한다. 그 로마제국이 군사적 최전성기를 맞이한 상태에서 다키아는 아직 온전한 문명 단계에 도달하기엔 상당히 먼 상태였고 다키아의 인구도 고작 50만에 불과했지만 그런 다키아를 ㅅㅌㅊ 지휘관 + 정예병 + 대군을 동원하고도 간신히 이겼을 정도다. 처음에는 오히려 로마가 탈탈 털리고 강화 조건으로 다키아에 기술자와 군사고문, 그리고 배상금을 지불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첨에 그깟 야만족 쯤이야 이때까지 처럼 툭치면 머가리 빡하고 깨지겠지 하고 갔다가 팔크스에 스쿠툼과 오른팔이 같이 잘려나가버렸다. 결국 트라야누스가 15~20 만 대군을 동원해서 줘패버림.
조선군이 이처럼 인식이 개좆병신인 이유는 물론 외세의 침공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무력하게 당하는 역사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이렇게 굴욕적인 전과를 세운 이유를 요약해보자면 첫째로 전쟁을 수행하는건 무관들이다. 얘들은 말그대로 싸우고 군대를 이끄는 것에 인생을 받친 애들이라 아무리 그래도 병법을 익히고 싸움의 기본적인 이치를 아는등 군대를 지휘할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글 읽고 글 쓰는게 말그대로 빠워였던 병신 조선에서는 전쟁만 일어나면 문관들이 무관의 지휘권을 거의 빼앗다시피하고 군대를 지 좆빵매처럼 휘두르다 존나 시원하게 말아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가 대표적으로 칠천량 해전과 쌍령 전투, 선비들의 빼애액질로 억울하게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울분을 참아가며 뒤져버린 수군을 재건하려 혈투를 벌였다. 장수들이 전쟁의 상황을 읽고 부관들과 상황을 의논하고 있을때도 씹선비 새끼들이 나라를 위한 싸움에 서둘러 나서지 않고 뭐하냐 이 매국노 새끼야라며 매도하면 무관으로썬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둘째로 조선군의 재정부족이다. 헬조선이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조선에선 세금을 적게 거뒀다. 동시대 일본에선 농민들이 지나친 과세 때문에 폭동을 전국적으로 일으키던 것과는 다르게 꼴에 유교 사상이라고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는 양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근데 거두는 양이 적다 보니까 관리들에게 주는 봉급도 적고 관리들은 주어진 관직의 힘을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으로 이어진게 문제지. 때문에 군대도 재정부족으로 인해 일정 이상의 군대확장이 거의 불가능했고 더불어 공명첩으로 세금에서 면제되는 양반들이 많아지고 씨발 도저히 못살겠다하고 아예 빤쓰런 해버리는 농민들의 숫자도 늘면서 자연스레 군비의 축소로 이어졌다. 물론 이를 알고 군대를 키우려는 왕들도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말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거의 유명무실한 수준으로 퇴보한 유령군대였다. 지원도 거의 끊긴 상태에서 쫄쫄 굶던 군인들은 곧 두 차례의 양요를 맞이하고 철저히 패퇴한다. 흥선 대원군은 이 문제점을 간파하고 군대의 확충, 서양화와 신무기 개발, 도입에 박차를 가했지만 경제가 씹창나고 대원군도 곧 고종으로 바뀜당하며 조선의 뿌리로부터 이어지는 군대는 사실상 해산된다.
셋째로 대비가 부족했다, 물론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임란 전에도 조선은 일본이 힘을 키우고 뭔 짓을 벌일것 같다라는 첩보 정도는 입수했었고, 선조도 나름 군비 확충에 성을 쌓아 올리는 등 전쟁 대비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대비를 했다 정도지 잘한 것은 절대 아니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뇌가 전쟁에 관한 지식과 병법으로 가득 차있었던 베테랑 왜군들을 기껏해야 고려시대 왜구 해적 정도로 과소평가한 조선은 장창으로 높이가 모자란 성벽 위의 병사가 찔려 죽고 조총 세례에 정예 기병들이 갈려나가는 참사를 겪으며 쇼크를 받는다. 무엇보다 진조차 형성하지 못해 훈련을 시켜야했던 처참한 숙련도의 징집병과 전국시대를 몸으로 느끼며 자란 왜병들의 숙련도 차이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후 의병이 군세를 일으켜 왜군들과 혈투를 벌이고 몇몇 명장들의 기적과도 같은 수성전에서 왜군을 잠시 주춤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하고 풍토병이 돌아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왜군의 지원담당인 수군들이 어느 재앙 덩어리의 지휘를 받은 조선 수군들에게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왜군의 진격이 멈췄다. 호란에 대해 알아보자, 여진족에 대한 대비 역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진족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에 초점을 둔 정예병들이 만 단위로 양성되고 있었고 훈련도 매우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여진족의 전술에 대응하는 전법이 항왜들과 정예무관들의 지시 아래에 개발되었는데, 근데 아시다시피 이 정예병들의 말로는 이괄의 난으로 거의 햇볕에 눈녹듯이 증발해버렸고 실력있는 무관들이 대거 사라지고 전쟁을 지휘해야할 무관들에 대한 불신이 심해져 지휘권 약화와 감시 강화라는 미쳐 돌아가는 결과로 돌아왔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빤쓰런을 시작했지만 청군에 의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고 별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왕이 산성에 갇혀 국운의 명이 보통 위기에 처한것이 아니라는 풍문을 들은 근왕병들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오는 족족 각개격파 당하고 이에 대응해야할 김자점 씨발럼 휘하의 조선군은 그냥 관전하기만 했다. 결국 하늘이 도와도 모자랄 판에 조선 특유의 병신같은 정치암투에 외세의 침공에 대비해야할 군대가 통째로 증발해버리고, 지휘체계가 통합되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지휘부와 인재풀이 터져버리는 것도 모자라 김자점 김경징 두 김씨로 대표되는 병신들의 삽질 때문에 병자호란은 거의 전무후무한 치욕적인 결과로 완패한다.
병역제도
병역제도는 지금의 헬조선처럼 개쓰레기였다.
16살부터 60대까지 죽어라고 군역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지금처럼 계속 병영생활을 한건 아니고 교대로 근무하였지만, 16살부터 60살은 진짜 이 나라가 옛부터 백성을 개호구로 보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참고로 조선 왕 평균 수명이 50살 전후임. 실제로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참전한 개 불쌍한 백성이 있었다.
병역제도의 가장 큰 병신같은 점은 일반 사병들에겐 월급이 없었다는 얘기다. 지금의 헬조선 군대는 휴가 때 오피갈 월급이라도 주지.... 이 땐 그냥 봉족이라고 같이 군역의 의무진 새끼가 재정적으로 도와주는거다. 지금으로 치면 군바리 둘이 사회생활하면서 버는 돈을 군바리한테 돈 조금씩 주는거라 생각하면 된다. 봉족제라고 가호 단위로 계산을 하면서 2명 정도를 묶어다가 군인 한명을 먹여살리게 했다.근데 이게 시간이 점점 갈수록 토지를 가진 자유민은 사라지고 군머를 요역에 동원하는 등 뒷생각 않고 마구 써먹는 등 군역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흙수저들은 그냥 있는 세제만으로도 힘든데 점점 부담이 늘어버리니 좆돼버렸다. 결국 때려치고 노비가 되거나 야반도주를 해버리거나 배째라를 해버렸다. 그래서 군인들 월급이 끊겨버렸다. 군바리 취급이 이러니 솔까 어느 병신이 조선을 위해 싸우겠는가?
더욱 더 골때리는 건 무기나 장비를 병사 스스로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이야 수통같은거 잃어버리면 심해봐야 군기교육대 가지만, 이 때는 군장비 잃어버리면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자기 돈으로 사야 했다. 근데 이런제도는 세계역사상으로도 상당히 많은케이스였다. 그 로마제국도 원수정체제때는 일반병이 군장비를 다 부담해야했며 제정시기때는 밥처먹는것도 자기돈으로 해결해야했고 이때도 장비는 공동구매로 마련해야했다. 그러나 정말 큰 차이점은 로마제국은 군인을 무척우대해줬으며 월급도 엄청빵빵하게 대주는 편이었다. 국민소득수준도 천년전나라라는게 믿기지않을정도로 엄청난 넘사벽급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을보라 똥구녕 찢어지게 가난한 국민대다수가 이런걸 부담할 턱이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이탈리아반도는 저주받은 조선의 병신 기후와는 다르게 울림푸스 신들의 축복을받은 젖과꿀이 흐르는 땅이였기에 농업이 굉장히 발달했다.
- 다 좋은데 로마도 군바리들 우대했다는 건 내전기나 군인 황제 시절에나 그랬지 제정 성립 이후엔 그냥 일반 노동자 수준 돈 받았다. 그래서 이 당시 로마 군인들 보면 대부분 투잡 (주로 농사 또는 목축) 뛰는 경우가 많았다.
- 그래도 네가 말한 내전기나 군인 황제 시절 덕분에 군대의 힘이 막강했다. 그래서 황제 되려는 군사령관놈들은.. 로마 시민의 여론보다 자신 휘하 군바리들에게 더 잘보여야 했다. 툭하면 게르만 촌구석에서 군바리 새끼들이 자기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빈번했던게 로마니까
이러한 병신같은 제도 덕분에 지금의 헬조선처럼 원조 헬조선은 병역기피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 병역기피할려고 스스로 대가리 밀고 산에가서 땡중되는 이가 수만에 이르렀다. 가장 큰 폐단은 군역을 대신 치뤄주는 것이었다. 얼굴 비슷한 새끼가 토익시험같은 거 대신 치뤄준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데... 사진기술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꼼수를 더욱 더 잘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지휘관도 눈깔이 개병신은 아니라서 가짜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대신 뒷돈 받고 묵인해줬다. 뒷돈 받는 건 헬조선의 유구한 전통이란걸 알 수가 있다.
금품을 받고 군대를 면제해주는 것도 있었는데 이를 방군수포라 한다.
조일전쟁 때 일본군에게 개발리고는 훈련도감이라는 일종의 직업군인 제도를 중앙에 만들었다. 나중에 말기에 들어서면 나라의 군대는 점점 개판이 되어 이러한 소수의 직업군인만이 무기를 다를 줄 알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는데, 그 꼬라지가 지금의 헬조선 금수저가 맘대로 병역기피 할 수 있는 거와 똑같다(고려도 마찬가지였다)
똥수저들의 군역말고 관직에 오르기 위해 병역을 지거나, 무과제도로 급제한 새끼들도 병신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위에 설명한대로 병역기피 해주는 대신 뇌물 받아 처먹었다.
보병
임진왜란 당시 신나게 털려서 명나라의 원앙진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 원앙진이라는게 긴급징집한 농민용 진법이라 강군하고는 거리가 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일본사신이 조선 창 길이를 보고 너넨 왤케 창 길이가 짧냐 전쟁할 수 있겠냐 라고 깐 걸 보면 노답
역덕 새끼들이 조선군 나오는 드라마에서 제발 포졸복좀 입히지 마라고 고증질을 해대는데.. 씨발 솔까 지금의 한국보다 더 가난했던 씹조선에서 병사들에게 일일히 갑옷같은 걸 입혔겠냐?
당시 스페인의 테르시오도 보면 모든 장창병이 흉갑을 입은게 아니라 짬 낮거나 거지새끼들은 걍 투구만 썼다. 근데 뭔 조선 씹거지 새끼들이 다 갑옷입은줄 아나 병신들;;
조선시대 찰갑 유물이 부산에서 발굴된 게 있는데 물론, 병사용이 아니라 장교용이란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의 헬조선 전방부대도 돈 없다고 방탄쪼끼 안 입히는데 오리지널 헬조선이라고 뭔 돈이 있어서 일일히 다 갑옷 입히겠냐? 그나마 수도에서 임금 지키는 새끼들이랑 북방에서 여진족 막는 새끼들이나 입혔겠지
갑주
문관 지휘관이나 무관들이 입었던 갑옷은 현재 유물로도 여러 점이 남아있어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지만 과연 일반 병사들은 어떠했는지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딱히 일반인의 양식 수준으로는 어떠했을지 알 수가 없다. 그 대략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아래 중종34년의 기록, 육군박물관의 흉갑, 그리고 일본 야스쿠니 신사 조선군 흉갑 1점 전시물을 보면 조선의 일반 병사들은 지갑, 흉갑 등을 착용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있었던 서양 선교사 프로이스는 조선병들이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라고 한 바 있어[9] 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프로이스의 기록 외에도, 조선군이 가죽제 갑옷을 활용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있는데, 지방 각 현에서 작성한 읍지를 보면 수군용으로 피갑주皮甲冑 가 비치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예이다. [9] 갑옷의 형태 참고 [10]
(중종 34년)..군장을 점열하는 일을 일시에 거행하면 지갑(紙甲)하나의 값이 1동 베 50필에 이르고, 말 한 필 빌리는 값이 베 30∼40필을 넘게 됩니다. 다른 장비의 값도 다 이와 맞먹을 터이니 재산이 넉넉한 자는 이미 갖추었겠지만 아침 저녁으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자는 찌든 가난에 울부짖을 뿐인데 어떻게 이들에게 준비하라고 요구하겠습니까. 지갑은 좀먹기 쉽고 빌린 말은 점열이 지나면 즉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군졸만 괴롭게 하고 나라의 방어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이익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만일 국가에 급히 간열할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은 급한 경보도 없으며, 하늘마저 재변을 보여 주는 때인만큼 임금이 친히 교외로 나가서 군장을 점열함은 매우 온당치 못하니 성명을 거두소서.
중기에 이미 병역제도, 군포징수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한 조선에서 개인이 마련하는 것이든 국가가 마련하는 것이든 방어구의 준비 상태는 좋지 못했을 것이고 이마저도 형편이 되는 사람은 입고, 아닌 사람은 입지 못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조선군은 아예 갑옷을 입지 못한자, 흉갑이나 지갑, 피갑을 걸친자, 전시에 국가가 만들어 지급하는 두정갑 을 입은 자 등 상당히 제각각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에 비해 직업군인인 갑사나 문, 무 지휘관들은 두정갑, 경번갑, 찰갑, 쇄자갑등을 입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정확히 고증하고 싶다면 전립과 투구를 제각기 쓴 병사 + 그리고 지갑과 피갑 및 두정갑을 입거나 애초부터 아무것도 입지 않은 병사를 전부 등장시켜야 할 것이다....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포졸복, 웨이터복은 조선 후기에 화약무기가 주요 무기가 되면서 갑주의 중요성이 감소해 입게 된 것이다. 사극에서 포졸복을 입은 조선군을 보고 기분이 다운되는 역덕후들이 많지만, 사실 조선 후기 조선군 고증으로는 틀린것도 아니다.
조선 말에는 방탄복의 일종으로 면갑을 보급하기도 했는데, 미칠듯한 더위에다가 물에 빠지면 대책이 없어 그다지 많이 쓰이진 않았다. 19C 무렵부터는 이미 보병들이 방어구를 입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서구에서도 퀴러시어 기병이 3MM정도의 경갑을 착용한 것 외에는 전투시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다.
좀 역좀알의 시점에서 쓰자면 조선시대 철갑옷 안쓴건 이걸 만들 기술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논문이다. 보면 알겠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철갑이 굉장히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인이 보통 조선시대 철갑을 잘 안쓰는 줄 아는건 걍 막장 사극 때문이고, 실제로는 철갑 내지는 나무에 철 붙인 갑옷을 썼다. 철갑은 그렇다치고 왜 나무와 철을 결합해서 썼나면 일차로 싸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철이 열전도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체로 조선시대 갑옷의 사용환경은 추위가 하늘을 찌르는 북방이었는데 여기에 철갑입고 가면 누가 얼어 뒤지라고? 거기다가 철은 열팽창률도 높다 나무의 경우 내부 조직에 틈이 많아 열팽창으로 인한 부피증가를 충분히 상쇄 가능하지만 철로 만들면 혹한의 추위에 빵빵 금가는 꼬라지를 볼 수 있을거다.
물론 조선 초기 환경에서 왜구가 들끓는 시점에서는 전장환경이 대체로 따뜻한 남부였고, 설령 남부 아니더라도 빈번한 싸움으로 인해 생존률이 우선시되어 철갑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 진관체제-제승방략-속오군을 거치면서 10만명 이상의 무기를 사전에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누가 제승방략에 대해 예비군 개념이고 실제 상비군은 적었다고 하는데, 일단 걔네들한테 줄 무기와 갑옷 자체는 상비해 두고 있어야 하므로 필요한 갑옷 수가 달라지진 않는다.) 요는 10만 개 이상의 갑옷을 미리 만들어두어야 했으며, 더군다나 유럽과는 달리 이 비용은 중앙에서 각출하는 것이었으므로 - 요컨대 세금 나간다는 말이다 - 참고로 동시대 유럽에서 갑옷 비용과 종자는 기사가 직접 냈다. 물론 영주가 갑옷 사라고 돈을 보태준 기록도 있고 기사들도 지들 장원 있었지만, 지 갑옷 살 돈 없어 파산한 기사들도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어디까지나 성과에 따라 차등지불이었던 듯 하다. 보급성을 심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 중기 들어 전란이 많이 줄었으므로 높으신 분들 입장에서 쓸데없는데 돈나간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서양의 판금갑옷은 그 가격에 있어 굉장한 사치품이었으며, 실제 하급 기사 중에 영지가 가난해서 갑옷 살 돈이 없어 적당한 피갑 입고 싸웠다는 애들도 있다
기병
이성계가 기병으로 흥해서 그런지 기병비율은 높은 편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가면서 궁기병사랑으로 인해 차징따위 안하는 병신 기병이 되었고 게다가 부정부패로 인해 군마용으로 쓸 말이 고관대작 말로 돌아가고 막상 군마는 쓰레기말. 그나마도 장부상이랑 실제 말 숫자도 다름. 총체적 난국. 그리고 과거나 군 인사체계가 활쏘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전면전에서 여진족과의 국지전으로 전장이 바뀌면서 정작 중요한 충격기병은 줄어들고 거의다 궁기병이었다.
임란 때 타타르 기병을 카피해서 편곤기병을 만들어 일본 보병들 대가리 따고 다녔다. 그러나 그나마 천명 언저리 되던거 이괄의 난때 없어지고 병자호란때도 편곤기병이 있었으나 김자점의 방관과 평안도 일부세력의 투항으로 만주 기병에게 털린다. 병자호란 관련 항목마다 그 놈의 홍이포 홍이포 노래를 부르는 병신이 여기도 똥을 싸질러 놔서 지우고 한마디 하는데, 병자호란에서 조선한테 홍이포는 큰 의미 없었다. 강화도나 화성에 홍이포 모형이 있는 거 보고 실제로도 홍이포를 썼을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화약 생산량이 딸려서 천자총통도 잘 안 쓴 조선이다. 화약을 몇 배로 처먹는 홍이포를 썼겠냐? 조선이 홍이포를 제작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영조 때 2문 밖에 없다. 그 외에도 홍이포로 추정되는 대포를 보유한 기록이 좀 보이지만 다 합쳐봐야 20문도 안 되고 대부분 서양배에서 노획한 걸로 추정된다. 전투에서 조선군이 홍이포를 썼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조선 후기의 주력대포는 소형 불랑기와 현자총통이었고 그래서 나중에 서양 군함이 왔을 때 생채기 밖에 못 냈지.
정리하자면, 조선군은 홍이포를 거의 운용 안 한 거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이 홍이포라고 기록에 남은 거도 홍이포의 구체적인 개념을 당대 조선인들이 잘 몰라서 잘못 적거나 엉뚱한 걸 홍이포라고 했다. 실제로 홍이포가 아닌 불랑기가 주력이어서 숙종 대 돈대들 잔뜩 구축할 때도 불랑기만 주구장창 가져다 놨다. 한마디로 윗새끼가 싸지른 표현 중 조선군이 홍이포를 썼단 건 명백히 구라다. 홍이포를 쓴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남한산성에 식량 준비를 못했다고 하는 것도 졸라게 웃긴게 원래는 식량을 성 안에 들여 놓으려고 했다. 근데 담당 지방관이 야 백성들이 존나게 힘들어 하네. 그냥 평시엔 성 밖 창고에 놓고 일 터지면 안으로 옮기지 이래서 기껏 식량 준비해 놓고 못써먹은 거다. 한마디로 윗대가리보다 뭐든지 불평불만만 조온나게 처 늘어놓고 아무것도 안하고 맨날 나라탓, 사회탓 하는 헬조센인들 특유의 기질을 조상들부터가 가지고 있어서 생긴 참극이다. 윗대가리도 문제지만 아랫것들도 좆병신 천지라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인 헬조센인들도 마찬가지라 이 꼬라지인 거다.
궁병
국궁은 휴대성 및 사거리와 살상력이 꽤 뛰어나다고 하는데, 장점은 거기까지이다. 제작비가 엄청났고 습한 좆반도에선 유지하기도 힘들었으며, 비오는 날엔 사용하기도 힘들었다. 전쟁에서의 실용성 면에서는 만들기도 쉽고 유지하기도 쉬운 만주족의 활이 오히려 더 나았으며, 이는 조선시대 실학자 및 일부 군바리들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미친 국뽕들은 총은 비오면 쓸 수 없으니 조상님들도 어쩔 수 없이 활 쓴거라고 개소리를 하지만 비오면 국궁도 아교가 다 풀어져서 못 쓴다.
편전이라는 무기가 있는데 아주 개쩌는 독창적인 발명품까진 아니고, 비잔틴제국이나 터키 새끼들도 비슷한 걸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터키라든가 비잔틴제국의 스타일이 아니다. 일례로 편전, 통아의 2배, 1/2가 맞다
이 편전이라는 무기도 사거리를 위해 관통력을 희생한 무기다. 편전의 기원이라는 썰 중 하나가 여몽전쟁때 화살 부족하니 화살을 반으로 잘라서 2개로 만들어 썼던게 기원이라는 썰이 있을 정도로 일반 화살보다 작다. 화살 크기가 작으면 당연히 관통력도 낮아진다.
사실 조총 성애자였던 조선군은 후기로 가면 갈수록 궁병보다는 조총수를 존나게 양성하게 된다. 숙련도가 낮은 지방군인 속오군의 경우 배우기 힘든 활을 장비시키는 것보다는 단시간에 배우기 용이한 조총수로 양성하는것이 더 합리적이었고 광해군때 명을 도운답시고 보낸 1만 5천명도 다수가 조총수였다. 숙종 때 충청도 지방 군적부를 보더라도 1300명중 70퍼센트 이상이 조총수였다. 문제는 숙종 시기면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인데 이 시기 갓양은 아르쿼부스 따위가 아닌 플린트 락을 쓰고 있었다. 총검도 이 시기 개발했다.
총병
임진왜란 때 탈탈 털린게 인상 깊었는지 후기에 들어선 총병을 많이 양성했다. 하지만 쌍령전투에서 탈탈 털린 걸 보면 운 쥐뿔도 없지만, 김화전투만해도 화력을 보여줬다.
나름 머가리가 없지 않아서 선형진 비스무리한 운용이 보이긴 하는데 상대 기병이 들이닥치면 어찌 막을지에 대한 방비책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 그냥 뇌내망상 진법. 역시 군알못 씹선비들답다.
- 걍 사실 아군기병이 사전에 대기병전 안해주면 보병진영은 뚫리는 순간 올 멘붕오고 패주하다 장기자랑당한게 동서고금을 막론한다.장창,조총,참마도 많이 보유한 일본군도 진영 퍼진상태에서 명기병에게 당한전력이 있지(직산전투)
송시열같은 경우엔 여자도 총으로 무장하자고 주장함. 나선정벌때 노획한 러시아제 수석총과 벨테브레이나 하멜이 참여해 만든 수석총으로 업그레이드할까 생각하다가 너무 비싸다고 그냥 조총 계속 썼다.
- 조선도 수석총으로 업그레이드 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막상 복제한 수석총이 성능도 그저 그렇고 불발율도 높은데다 비싸기만 오지게 비싸서 결국 조총을 개량하는 방향으로 선회한것임. 조선이 개량하고 또 개량한 조총은 18C까지만 해도 서구 국가들이 쓰던 머스킷과 성능이 그다지 많이 차이 안났다. 단순히 비싸서 안쓴건 아니다. 수석식으로 얻어지는 운용편의성 자체가 조총보다 훨 좋음
그나마도 세도정치기 들어선 아예 관리를 안해서 창고안에 녹슨 총들이 넘쳐흘렀다는 실록의 기사가 인상깊다.
병인양요때는 얼마나 상황이 앰창이었는지 군대도 아닌 호랑이 사냥꾼들을 데려다가 전투를 벌였는데 의외로 프랑스군이 당했고 이에 정신 못차린 조선정부는 신미양요때도 똑같이 호랑이 사냥꾼들을 데려다가 미군과 싸우게 했는데 결과는 3명 사살, 350명 전사였다.
- 엄밀히 말하면 사냥꾼들 징병해서 써먹은 건 이상한게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총이 기존 냉병기보다 익히기 훨씬 쉽다고 하지만 사용법을 익히기 쉽다는 거지 재장전, 명중 등의 요소는 숙련이 되지 않는 이상은 마찬가지로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없었다. 근데 가뜩이나 비싼 총과 총알, 화약을 일반 쫄따구들한테 무한정 퍼줄 순 없지. 이건 화약병기가 훨씬 발전한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최초의 저격수, 특수부대라고 할 수 있는 샤프슈터, 예거 등등 이런 건 사냥꾼 출신들을 징병해다가 써먹었다. 걔들은 총질하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미국인데, 거긴 미개척지를 개발하고 사냥도 하고 원주민과 전투를 하고 이러다보니 일반인들도 총에 친숙하니까 그런 거. 미국이 총기 시장 탑인 이유가 다 있는 거다. 따라서 조선군도 남들 하는대로 한 거다. 문제는 이미 그 시기가 되면 사수의 숙련도를 어느정도 보완해 줄 무기 발전이 서양에선 이루어 졌다는 거다.
포병
대포들은 원시적인 사석포 기준으로는 꽤 뛰어났다. 신기전같은 로켓무기는 중국이 그 원조인데, 조선도 꽤 잘 만든 거 같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는 익히 알고 있는
신기전은 신호용으로 주로 사용했고 총통넣은 건 변이중화차라고 행주산성 관련 기록에 나온다. 리볼트가 이미 있었던 건 아니고 리볼트는 효율이 애미뒤져서 금방 버려졌고 화차가 여러 면에서 조금 더 나았지만 그래도 화약 애미뒤지게 많이 처먹는 건 똑같아서 총통만큼 대규모 운용은 못함.
이건 고려말에 화포 도입해서 세조때 화통도감 없어지고 사실상 200년간 개발중단된거라 나름 선전한거 아닌가 싶다.
수군
함대는 대양함대는 없고 연안함대 밖에 없다. 조일전쟁에서 이순신이 포격전 중심으로 일본군 쳐바른게 유명하다.
- 이것도 말이 포격전이지 당시 사용하던 화포들 사정거리로 따져봤을때 근접전이나 다름없었다. 천자총통? 이순신이 대놓고 화약 많이 처먹는다고 디스한 화기다. 당시 해전은 세키부네나 안택선 보다 높은 판옥선에 기어올라오는 일본군 상대로 산탄을 끼얹어 대는 바다위의 공성전 형태로 진행되었다는게 정설이다.
초반에는 포격으로 원거리전함,주력화포인 현자총통의 최대의 사거리가 1km지점이다
최대사리는 그냥 그까지 가긴 간다 수준이다
덧붙이자면 조선시대 수군에서 군역의무를 하는 자는 신량역천이라 하여, 천한 역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서양에선 임진왜란 20년 전에 레판토에서 함선 200여척 홍이포 1800문으로 사석포와 활 중심 오스만터키를 격파한 적이 있다.
패배한 오스만터키조차도 750문을 가지고 있었다. 국뽕새끼들은 당시 조선 수군이 세계 제일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기도 하는데 그냥 무시하면 된다
참고로 동시기 스페인 무적함대 갈레온은 판옥선보다 몇백톤은 더 나가고 선채도 더 높으며 유렵 최강의 스페인 보병대도 삼백명 탑승해있다. 그리고 그 잘나신 판옥선은 평저선이라서 대양으로 나가면 파도에 뒤집혀서 뒤지기 십상이다. 유럽이 대항해시대에 아메리카 아프리카까지 항해할때 판옥선은 고작 일본 중국 가는데도 벌벌 떨었다. 훗날 2,30여년 후 홍이포 몇문은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다.
총평
정치랑 군사가 나라에 얼마나 중요한지 조선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우선 똑똑한 왕이 신권을 견제하며 적절히 자신의 뜻을 펼치고 사람을 잘 쓸때는 정치적 안정에 힘입어 사회, 문화적 발전을 보였으나 지만 살려고 도망을 가는 놈이 왕이 되거나 근자감으로 설치다가 적이 쳐들어오니 무릎을 꿇는 놈이 왕이 되면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외척 및 종친관리, 인재관리, 신권과 왕권조화 어느것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병신새끼들이 왕이 되면 지도 뒤지고 신하들도 미쳐 날뛰고 나라도 망하는 테크를 탄 전형적인 국가가 바로 조선이다.
차라리 러시아나 프랑스같이 왕권이 절대적으로 전제화된 국가였으면 똑똑한 왕이 멱살잡고 캐리도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텐데, 군약신강 조선에서는 그런일이 대체로 벌어지지 않았다.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는 국가를 만들길 원했으나, 신권을 쥔 대부분의 성리학 탈레반들은 안타깝게도 고착화된 국내적, 국외적 질서에 갇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그나마 깨어있던 학자들과 지배층 일부는 자신의 뜻을 펼만한 기반을 갖추기 힘들었다.
변화의 적기에 세계사적 흐름에 맞춘 변화를 겪지 못하고, 19세기 들어서 중앙의 정치적 균형이 깨지고 지방에서 수령에 대한 견제가 무너지면서, 세도정치라는 괴물 돌연변이가 등장했고, 결국 세도정치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숨길마저도 끊어버렸다.
나라가 좆개판이라 갈때까지 간 1860년대 초까지 민란과 반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는데, 사실 이때 나라가 뒤집혔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걸 보면 그냥 조선의 명운은 다했다고밖에 볼 도리가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은 여말선초의 혼란기, 양란 시기, 강점기 시기를 배경으로 한 것들을 빼면 그냥 높으신 분들이 밥그릇 싸움했던 걸 열심히 미화한 게 대부분이다.
또한 군사도 12대 133을 이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람이 있으면 나라가 망했을 걸 살려놓기도 하지만 병신이 그 사람 자리에 앉으면 120대 60을 해도 쳐발린다. 그 멍청한 놈 말을 안 따르고 도망친 똑똑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이딴 나라가 500년넘게 유지한건 걍 중국 꼬봉이라서 어찌저찌 안망하고 잘 버텼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짱퀴벌레들보다 그 짱퀴벌레들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했던 여진족이나 만주족같은 만주 연해주 일대 오랑캐들이 조선 국방력을 그나마 키우고 중국을 방해해 중국으로 흡수되지 않게 유지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 북방에 오랑캐들만 활개치지 않았어도 진작엔 없어졌을 듯?
- 오랑캐들이 활개치지 않았으면 더 안정됐겠지 병신아.
- 그나마 오랑캐들이라는 외적이 있었기 때문에 병신같은 나라에서 그래도 군사력 쥐꼬리만큼이나 유지하고, 이순신같은 명장도 발굴할 수 있었던 건데...혹시 유토피아 믿음?
중국이란 커다란 나라 옆에 있던건 관계로 중국이 먹고 싼 똥고물이나 받아먹어도 조선이란 나라는 충분히 먹고 살만했다. 덕분에 세계사에서 주목받을만한 개혁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중국 옆에 있어서 중국형님 후장만 살살 핧아주면 딱히 큰 전쟁 날 일도 없었고 그로 인해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이 조선역사 대부분의 내용이며 누군가 급진적인 생각을 가지면 기존 정치실세들이나 왕이 자기들 밥그릇 줄어들까봐 단칼에 없애버린다. 놀랍게도 이런 현상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넘어갈때까지 무한반복이다. ← 지금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조선 이전엔 중국이란 나라때문에 일본보다 발전한 나라였지만 말년엔 중국 때문에 같이 망한 나라다.
중국이나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양인으로부터 그들의 선진 군사기술을 배웠는데, 조선은 그딴거 없었다. 단지.. 하멜이라는 희대의 불쌍한 서양인을 사로 잡아 감금생활을 하게 한 뒤 조금 배웠을 뿐이다.
지배계급
유교탈레반 미만 잡
사극에서 양반이 평민 잡아다 주리틀고 이러는 거만 보여줘서 오해할 수 있는데 그건 양반중에서도 방귀 좀 뀌는애들 얘기고 대부분의 양반은 오늘날 앤수생마냥 공부 코스프레하다 늙어 뒤지곤 했다. 실질적으로 이런애들은 양반 대우 크게 못받음. 의외로 양반 - 양민 계층이동은 '나름 쉬웠다' 그 전 고려시대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지
- 물론 현실은 양반들 출신이 죄다 고려 귀족 출신이라 존나게 어려웠다. 단지 과거라는 길이 있긴 있었다.
문관 무관으로 나눠 정종 9품으로 이루어졌다.
정도전이 계획했던 조선의 정치 주도세력은 자신같은 유학자 사대부 세력이었다. 지방분권 호족정치는 고려시대에 볼꼴 못볼꼴 다봤으니 학을 뗐고 왕에게 모든 권력이 다 가는것도 유학자들이 씹극혐하던 중국의 환관정치같은 폐단이 생길 수 있으니 능력이 검증된 엘리트 관학파들의 중앙집권 정부로 국가를 이끌어가는게 옳다는 나름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문제는 정도전이 개씹 경제알못 유교탈레반이었다는것이다. 유교탈레반답게 현실을 전혀 고려 안하고 '덕과 인으로 왕도정치를 펼쳐야지' 하는 씹멍청한 생각때문에 관료들에게 자원봉사에 가까운 녹봉체계를 강요했다. 이것때문에 관료들은 가족들 먹여살리려고 생계형 비리를 저지르면서 도덕적 명분에 흠집이 나기 시작한것이다.
정도전도 마냥 개병신은 아니기에 사헌부같은 감사체계를 도입했지만 월급도 쥐똥만큼 주면서 돈많고 권력있는 공무원들 찔러대라고 하면 참 잘도 그러겠다.
이렇게 비리질로 민심을 잃은데다 세조씨발의 찬탈질로 사육신과 생육신으로 대표되는 관학파 엘리트 갈갈+찬탈질에 동조하면서 유학 이데올로기 상실+세좆씨발의 공신놀음으로 한명회같은 훈구권신들이 등장하면서 정도전보다 더 심한 유교탈레반 유교 IS 사림들이 집권하게 된다.
훈구세력은 사화질로 사림들을 정치권에서 몰아내려 했지만 명분 강조하면서 지방 거점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림에게 정권을 넘겨줄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 사림새끼들은 심각한 이상주의자 극 유교탈레반들이었다는게 문제. 어디서 주자학같은거나 줏어들어와서 현실을 중시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어디가고 이기이기 헛소리 지랄하면서 붕당질을 일삼는 병신집단으로 퇴화하고 만다.
여기서 제일 덕본 사람은 당연히 왕이다. 지들끼리 알아서 편먹고 쟤가 잘못했대요 일름보놀이하는 찐따들 반갈죽시키면서 왕권을 키웠지만 왕이라고 항상 정치력좋고 똑똑할리 없으니 정권 바뀌고 왕이 좀 모자라다 싶으면 어김없이 외척들이 다해처먹는 시스템이 된것이다.
이건 유학자들이 존나 극혐하던 환관정치보다 더 심각한 병신짓이었는데 환관들이란 기본적으로 황제 응딩이 뒤에 숨어서 형님형님 형님 빽만 믿겠다 할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권바뀌면 그대로 대가리도 같이 날아가기 마련이었다. 괜히 조고가 미쳤다고 진시황 유서를 조작했겠는가. 근데 외척들은 정권 바뀌어봤자 나 왕 외할아버지요 장인이요 하면서 꺼드럭거리니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후대에 더욱 심해져 세도정치라는 애미뒤진 개씨발 정치라고 볼수도 없는 무언가로 진화하고 만다. 후반기 들어서는 중인계급이 열라 성장하면서 방귀 좀 뀔 수준까지 성장했기에 이들이 중근세시대 이탈리아 애들이나 독일계 상인들 나름 권세를 가지고 중앙정치에 태클걸 수준일꺼라 착각하지만 딱딱딱 나눠져있는 계급제도 하에서 돈'만' 많다는 것은 서원 놈들이나 고위 관료들에게는 살아있는 보물고블린 이상도 아니었다
- 이건 유럽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새끼들은 미국과 비교하면 경제보다 정치를 중요시했다.
이런 중인계급들이 주변에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네 수령한테 불려가 빠따 맞았다는게 무슨 미담마냥 남아있는데 사실 잘 생각해보면 재벌기업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새끼들이 이사니 상무니 회사에서 내공 쌓인 양반들을 별별 이유를 다대가면서 군기잡는 오늘날 헬조선과 소름끼치도록 일치한다. 실제로도 이렇게 빠따를 쳐맞은 중인새끼들이 정신차리고 기부 좀 하고 베풀었냐 하면 베풀었다. 다만 주변에 부리는 소작인이나 이런애들이 아니라 수령 주머니 속에 베풀었다는게 문제지.
교과서에서는 신분계급의 붕괴니 뭐니 하지만 실질적으로 권력계층까지 진출한 중인계급은 없다시피하다는게 현실이다. 좆고려귀족들이기 때문이다. 걍 양반 하위계급과 중인 최상위계급간의 경계가 흐릿해졌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조선시대 원탑급 거상인 임상옥이 씨발 집 좀 크게 지었다는 이유로 귀양가서 위리안치당했는데 말하자면 존나 돈 많아도 결국은 권력자 후장써킹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가카시대 국제그룹이 진상금이 약간 적었다는 이유로 공중분해 당했는데 그당시에는 그게 매우 흔했다.
도자기
백자로 유명하다.
백자의 대명사인 아무 그림 없는 순백자는 교과서 등에 선비들의 고결하고 검소한 정신과 취향이 맞기에 애용되었다고 나와 있는데 그딴거 없고 그냥 염료 살 돈이 없을 정도로 나라가 가난해서 그랬던거다. 다만 시대가 지나고 당시 상황을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되어 순백의 색채가 또다른 매력을 주는 면이 분명히 있기에 재평가 받은 것이지, 저것의 탄생 비화는 안습했던 조선의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다. 애초에 가난을 '고결, 검소, 질박'으로 미화하는 것부터 문제의식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분청사기가 슬슬 사라져 가면서 나타난 백자 초기 형태는 위 사진처럼 코발트 그림이 현란하게 그려진 버전이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나라 재정이 내려앉고 백자 기술자들이 전란에 사방으로 흩어져 자기제조술은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백자에 넣던 회회청(코발트)이 너무 비싸서 그냥 그림 안 그린 맨도자기를 유통시킨 게 훗날 발굴되어 백자로 정립된 것이다. 이후 재정문제로 비싼 안료 대신 저렴한 철가루를 안료 땜빵으로 쓴 진사 백자가 탄생했다. 가난이 낳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마니악한 맛이 있다. 다만 당시 일본은 훔쳐간 도공과 기술력을 업그레이드 시켜 채색자기를 유럽에 많이 팔아먹었고 조선은 세계 도자기 전쟁에서 소외되었다.
예전 사대부나 유력자 무덤 파면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채색자기가 심심찮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백자가 선비취향 어쩌고라는 말을 과연 믿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움. 질박한 풍토는 돈 없거나 지지리 궁상일 때 어쩔 수 없이 경비 아끼려고 발버둥치는 와중에 생겨난 것이다 당시 사람들도 요즘사람과 똑같이 돈 있고 여유 있으면 무늬 있고 화려하고 현란한 것을 갖고 싶어한 것 다 똑같다. 단적으로 흰옷을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면서 왜 궁중 복장은 울긋불긋한 색동옷들로 도배돼 있을까? 흰옷 입던 서민들 보고 흰색을 사랑한 백의민족이라고 왜곡하는 것과 동급의 언론플레이라 보면 된다
청나라와 일본처럼 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도자기는 만들지 못했다.
현재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린 조선 백자는 10억이고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도자기는 청나라 건륭제 시기 도자기로 720억에 팔렸다. 일본 도자기는 저 아래에 있다.
일본산 전통 도자기중 가장 비싼게 헬조선에서 직수입한 이도다완이다. 헬조선에서는 장인들이 생활용품 급으로 대충 빚어 만든 싸구려 그릇들이었는데(플라스틱 바가지 급이라고 보면 됨) 이 투박하고 거친 질감과 제멋대로 생긴 모양이 일본 다이묘들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민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밥그릇이나 종지그릇들을 보고 환호성을 질러댔다고 한다. 조선의 다완에 말차를 담아 마시면 전쟁이나 정치로 혼탁한 마음이 안정이 된다면서, 예쁘고 화려한 그릇보다는 되는대로 생긴 조선의 그릇이 자신들의 다도를 이룩하는 완벽한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매끈하고 예쁘게 생긴 그릇보다 유약이 거칠게 흘러내리거나 그릇 모양이 울퉁불퉁한 것들을 더 좋아했다. 대충 만든 것에 덕후들이 온갖 의미를 부여하여 세기의 명작이 되는 요즘 사례와도 비슷하다.
전에 버전에선 그냥 무조건 병신이라고 깠는데 그 병신 백자 기술자 납치해서 정착시킨 후 무역에 잘 써먹은게 일본이다. 이 글 쓴 새끼 논리가 신기한게 조선에 있을땐 병신 백자라고 까더니 일본 버전으로 바뀌자 세계 짱짱이라고 개지랄을 한다. 역갤러 새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이놈은 당시 도자기 수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모르는 새끼가 틀림없다. 조선에서 도자기를 만들던 말던 그걸 발전시킨건 어찌됐던 간에 일본이며 당시 오삼계의 난으로 중국 도자기 생산지였던 정덕진이 완전히 초토화 된 덕분에 중국에서의 도자기 수출길은 완전히 막혀버렸고 도자기 무역으로 돈놀이 하던 동인도회사는 남아있던 재고량으로 버티는 상황이었지만, 마침내 재고가 동이나기 시작하면서 단체로 템스강에 뛰어들기 직전에 이걸 타개한게 일본산 도자기 수입이었다.
고려때 청자 만들던 장인들 후손도 있고 임란후에 아리타 도자기 영향도 준데다 수출품이기도 했고 분청사기와 백자는 당시 집권층과 사회분위기를 타서 만든거니 저렇게 나오지
게다가 성리학은 중국, 일본에서 한물간 학문이었다.
- 이건 좀 잘못된 내용이다. 중국에서도 양명학이니 고증학이니 운운하지만 결국 성리학에 비교하면 부수적인 학문이었다. 일본은 오히려 성리학을 늦게야 받아들였다. 다만 정착하기 전에 미국이 강제개항 시키고 서구화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성리학도 중국에선 할일없는 사람들 뜬구름잡는 귀족적 학문이라고 명나라 때부터 까였던것은 맞다. 대신 모든 학문 특히 철학은 전단계 학문을 모르면 그다음 단계의 학설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성리학은 반드시 떼고가야 하는 교양학문이었다. 단지 청나라는 청나라 정부의 한족들에 대한 사상 검열과 탄압이 심해서 더이상 학문발전을 못하고 고증학이란 덕질에 빠져들어서 그런거고, 일본은 성리학이 선진 학문이라 일단 받아들였지만 명분론이 알파이자 오메가인 성리학적 정치관은 일본 현실을 생각하면 영.... 걍 조선만 성리학이 일방주의가 브레이끼가 걸릴 이유가 없었던것 뿐이다.
법률체계
조선은 기본적으로 성문법 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전근대 국가이므로 법치가 아닌 인치(즉 왕의 의지가 우선이다)국가였고 증거주의니 일사부재리니 무죄추정이니 죄형법정주의 그딴거 없다. 이른바 원님재판의 시대이다.
그래도 이전 왕조인 고려보다는 훨씬 발전된 법률체계 와 윾교 탈레반에 입각한 민본주의(말로만)와 엄벌주의 보단 교화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혹형과 고문을(법으로만) 금지한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고려가 당률을 기반으로 하여 관습법(즉 이래되면 동내마다 법이 달라질수 밖에 없다. 예를들어 서울에선 전통적으로 짱돌로 쳐죽이는 죄일지라도 강원도에선 봐주는 식이 되기 때문)위주 이었으나 조선은 이를 전부 성문법전으로 싸그리 정리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의 성문법의 위머함은 5백년뒤 근대 민주공화정 국가 대한민국의 관습헌법 으로 인정되어 수도를 확정지을(사실 성문헌법에서 정하기 전까진 합법 수도임 이란 논리) 정도로 위머한 것이다. 머단하다. 머단해 조선왕조 놈들!!!!
그밖에 아래의 설명할 고발금지 사유, 재판관 3인이상 입회하에 2심재 실시. 사법권과 행정권의 미분화, 사형의 경우 국왕의 결제가 필요하다는 점 등이 있다.
조선의 법전
조선의 법전으로는 경국대전이 유명하다. 경국대전은 세조때부터 편찬을 시작해서 예종때 완성되었으나, 예종이 요절한 탓에 그다음 왕인 성종때 반포(즉 발표)되었다.
사실 성종 이전부터 많은 법전이 편찬되었다. 이미 그 작업은 태조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엄연히 근세 성문법주의 국가였던 것이다.예를들어 사극에도 나오듯이 신하들이 왕에게 '그런건 전례도 없고 이나라 국법에도 없다!'라고 받아치는것이다. 저기서 말하는 국법은 대체로 조선의 헌법구실을 한 경국대전이다.
물론 조선왕조는 5백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법전이 편찬되었는데 법전이 새로 편찬될때마다 법률이 개정된 셈이 되는 거다.(엄밀히는 법이 개정되어서 법전이 새로 나온거겠지만) 이후 영정조때 크게 한번 손본다음 대원군때 마무리 되고 조선이 패망하여 일제의 근현대적인 법률체계를 맛보게 된다.
경국대전은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자체적 성문법전인데 그닥 국뽕빨건 못된다. 왜냐하면 갓양은 이미 성문법전인 로마법 대전(정식명칭 민법대전Corpus Iuris Civilis)을 천년먼저 편찬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공법
전근세 국가에 헌법같은것이 있을리가 없기때문에 조선 공법은 행정법+형법으로 구성된다. 단 헌법계정과 유사한 과정(국가 이념의 수정)은 한번 한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그 악명높은 예송논쟁이다.
조선의 형법 체계는 명의 법전인 대명률을 따른다. 처벌은 이른바 태장도유사의 5형이 있다.
즉 의외로 조선은 형벌의 부과는 성문법전을 따르도록 되어있고 나이, 연령, 신분에 따라 세밀하게 법제화 하여 배려를 해주도록 되어 있지만, 왕이 사이코라거나 탐관오리를 만나거나 원수진 사람이 윗 대가리중 한두사람 낑겨 있으면 걍 꼼짝없이 난 죽었다고 복명복창하면 된다.
고발금지 사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고발하는것을 금지한다. 사스가 헬조선의 조상님 ㄹㅇ 조선답다. 단 역모는 제외한다.
- 노비가 주인을, 마누라가 남편을, 자식이 애비를 고발할수 없으며 백성이 수령을 고발할수 없다. 고발시 고발한 사람이 최대 사형까지 당한다. ㅎㄷㄷㄷ? 이 전통은 대한민국이 충실히 계승하여 형사소송법 제224조로 자식이 부모를 고소할 수 없게 되었고, 헌법재판소에서 합헌판결까지 받았다. 역시 유사국가 헬조선답다.
- 단 수령고발 금지는 갓종머왕이 제정한것인데 이를 갓종머왕의 유일한 흠으로 거론하곤한다.
근데 당시 지방에서 방구좀 낀다는 어른들이 설치면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들은 부들부들 거릴뿐 식물인간으로 진화하곤 했기때문에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한다.조선이 온전한 중집을 한건 세종의 아들이기도 한 다음다음번 임금인 세조때 완비된다.
이래서 세조가 빠가라는 것이다. 씨발 법이 필요를 다했으면 빨랑빨랑 없애야 될 것 아닌가? 중집을 완비한 이상 수령고발 금지는 수령이 한탕 해먹을 수 있는 도구로 악용될 뿐이란걸 왜 모를까? 당장 계유정난으로 난다긴다하는 조선의 문무관을 씹창내버린것도 모자라서 여러모로 발암거리만 한사발 안겨주고 난리다
태형
- 꼴리면 병신?
얇고 긴 회초리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이다. 구한말 이것을 구경한 서양인들은 the 발가락 slayer 라는 별명을 붙혀주었다. ㄹㅇ 이거 잘못맞으면 발가락 다 떨어져나가고 안죽어도 사람이 반 병신이 된다고 한다. 아래의 곤장못지 안게 강려크한 형벌중 하나.
참고로 사극에선 심심하면 장형이나 주리를 트는데 실제로 탐관오리들이 가장 즐겨 쓸수 있고 만만하게 내릴수 있는 벌이 태형이었다고 한다. 돈을 내면 깎아주거나 돈주고 매 대신 맞는 사람을 고용할수 있었다고 하며, 최대 200대를 때리는데 하루만에 저거 다 때리면 걍 사형이고 때리는 사람도 고욕이기 때문에 50대씩 나눠서 몇일 텀을 주고 집행한다.
영 좋지 않았던 전근머의 공중위생과 의료 사정에 의해서 태형이나 장형 맞고 상처가 덧나서 죽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양반들은 태형이나 장형을 잘 내려주지 않았다.
현머에는 싱가폴에선 아직도 하고 있다. 다에쉬에서도 실시한다.
장형
태형보다 무거운 형벌이 장형이었는데 저런 몽둥이로 볼기짝을 찰싹 때려주는거다. 근데 이게 좆같은게 응디 때리면 충격으로 불알이 으깨진다는 거다. 그래서 거진 장형을 받은 놈들 거의 대부분은 불알이 으깨져 고자가 되거나, 아니면 세균 감염으로 시름시름 앓다 며칠뒤 으앙주금
그냥 사약먹고 뒤지는게 제일 좋다 그 다음으로 좋은게 솜씨좋은 망나니한테 참수당하는 거다. 솜씨 나쁜 망나니한테 참수 당하면 한방에 목을 못잘라서, 목에서 피가 뿜어져나오고 으어멓미ㅓ후마ㅜ히머이무히ㅓ뭉히머엉ㄱ엉ㅋ엌엌엌엌엌 하는 상태로 죽을 수 있다.
ㄴㅇㅇ참수는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1방에 못보내는거라 망나니들이 곧 유가족 될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 고로 돈없으면 "고의적으로"여러번 썰리다 죽었다.유독 조선에만 일어난 현상은 아니다 단두대 등장전엔 서유럽 참수형장에도 생기는건 마찬가지..영국 메리 여왕은 엎어놓고 도끼로 목을 내리쳤는데 첫방에 반쯤 자르고 두번째에 피니쉬 하는 것이 영화로 생생히 나온다.
도형
그 춘향전에 나오는 칼 씌워서 가둬놓는데 맞다. 근데 칼은 원래 사형수에게 씌우는거다. 일반적인 도형수들은 저런 칼 안씌운다.
사극 보면 걍 칼만 씌우고 감옥에 짱박는걸로 나오지만 원래 춘향전 보면 춘향은 칼 + 수갑 + 차꼬 풀세트로 차고 있었다. 영조가 야 여죄수는 칼만 채우는게 어떰? 이랬지만 대명률에 여죄수도 칼 씌우는 조항 있다며 빼액거리는 씹선비들 때문에 죄수 인권 발전이고 뭐고 그딴건 영영 없었다.
한마디로 감옥에 짱박는 것이다. 현대형법의 징역형에 해당하지만, 전근머인 조선에선 주로 형이 집행될때 까지 대기하거나 조사중인 미결수들을 수용했다. 저때도 오늘날처럼 죄수들을 일 시켰다지만, 현대는 재사회화 목적과 달리 이때는 당근 ㄹㅇ 부려먹기 목적이었다. 어차피 곧있음 나가실 양반나으리가 FM되로 하겠다고 일하겠다고 설치면 감옥 관리들도 골아파 어쩔줄 몰라했다.
반면 쌍념놈들 수용자들은 그딴게 없는데 갓종머왕께서는 죄수들도 사람이니 인권을 생각해 여름에 일주일에 한번 머리감게 해주고 한달에 한번 목욕시켜 주라고 친히 지시했다고 한다.
유형
유배보내는 것이다. 귀양이라고 부르는 그것 맞다. 주로 양반들(정치범)이 당하는걸로 사극에 그려지나 사실 일반범도 받는다.
소달구지에 끌려가는 묘사가 있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호송할때 소달구지에 넣고 간거다.
실제로는 말을 타고 갔다. 근데 전근머 국가 조선답게 귀양하는 동네로 내려갈때 말값, 말 먹이값, 자기 밥값, 의복비, 호송원 경비(말값,밥값,말먹이,의복)+잘 봐달라고 뇌물 까지 자비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집안에 유배형 한명이라도 받으면 걍 그집안은 뿌리째 망했다고 복창하면 된다.
유배지는 제주도, 전라도 해안과 여러 절해고도 들에 배정되었다.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할때 이책을 썼다. 사군 6진이 처음 개척되었을땐 저기 백두산 아래에다가도 가족단위로 쳐박기도 하였다. 그리고 형량은 대충 왕 꼴리는 대로.
대명율에선 머륙의 스케일답게 북경에서 몇천리 이런식으로 나와 있는데 대충 북경에서 티베트 근방 어디 사천성 어디 이렇게 짱박아란 말이다. 그런데 콩만한 좃선땅에선 이게 불가능해서 뺑뺑이를 돌렸다. 물론 이렇게 뺑뺑이 돌리면 호송하는 사람도 고욕이고 당하는 사람도 더 고욕에 비용이 배로 불어나기 때문에, 평상시엔 그냥 다이렉트로 전라도로 짱박는걸 선호했지만 왕이 특히 미워하는 얘들은 짤없이 수천리 뺑뺑이 다 채우고 갔단다 ㅎㄷㄷㄷㄷ
그나마 유배지에서 다시 사면복권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간혹 왕이 생각하다 더 열받는다며 유형보다 더쎈 사형때려버려 라고 해서 ㄹㅇ 죽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왕의 총애가 지극해 걍 잠시 머리식히고 오라고 유배보내거나 당대의 쩔어주는 대 문인 학자라면 지방관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촌동네에 저런 거물+머학자가 오시다니 하면서 유생들과 양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잘먹고 잘살수 있었다.
반면 그딴거 없는 사람들은 글이라도 할줄알면 서당차려서 훈장노릇이라도 하지만, 그런거 없음 양반으로 태어나 팔자에도 없는 구걸과 노가다를 뛰어야 했다.그나마 유배중에 병을 얻거나 자연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역죄인이 이걸 받으면 위리안치라고 더 쎈걸 받았다. 현대의 금고형에 가까웠다. 담장높이가 어마무시 해서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였다고 한다.
- 이건 그냥 하는 말이다.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이려면 담장을 30~40미터 이상은 올려야 하는데 조선의 씹미개한 건축술 수준으로 담장을 그만큼 올리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정확히는 느그가 생각하는 단단한 벽돌을 단디 쌓는게 아니고 존나 키가큰 까시나무를 베어다가 담장 치는것이다. 남해에 가면 서포 김만중이 유배당했던 곳이 있는데 거기서 체험 가능하다고 한다.
사형
조선에서 내릴 수 있는 법정 최고형벌, 전근대 시대임에도 인권의식이란게 눈꼽만큼은 있었던 조선이었기에 앵간해선 사형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살여탈권이 왕한테만 있는 조선에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지방의 수령들이 서류를 올려보내 왕의 재가를 받아야만 이루어졌는데, 당연히 세월내월 걸리다 보니 많은 범죄자들이 감옥 안에서 병걸려 죽어버림...
엥? 당파싸움에선 잘만 처죽이지 안음? 이라고 생각할수 있을텐데 그 앵간치 안은 일이 바로 역모라서 그렇다. 전제왕조인 조선에서 역모뜨면 걍 인권이고 나발이다...
사형은 위에서 나와있듯 역모죄와 패륜범죄, 살인죄 에 한해서 내려진다.
이웃나라 중국, 일본을 비롯해 동시대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비교할시 조선인의 극형률은 상당히 완화된 수준이라 볼만하다.(유교 근본주의의 순기능인듯)
중국은 말할것도 없고(사실 중화권 자체가 형벌이 매우 강하다. 타이완조차도 흉악범은 사형을 집행하며, 대만 4세 여아 참수 사건의 범인처럼 종신형으로 감형한 게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욕하는 나라다), 조선통신사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정말 가벼운 죄에도 밥먹듯 효수형을 남발했으니...
요참형
허리를 끊어 죽이는 것이다. 한신이 여태후한테 이걸 당한걸로 유명하다. 존나 서서히 죽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조선에선 시행되지 않았다.
팽형
삶아죽이거나 기름에 튀겨 죽이는 것이다. 탐관오리에 한해서 자결과 팽형 두가지 선택지를 줘서 후자를 선택하면 빈 솥에 들어갔다 나오는 쇼를 한뒤 죽은 사람으로 가정해 살아있는 귀신 취급하면서 모두가 그사람을 영영 왕따시키고 쌩까는 형벌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조선에선 시행되지 않았다.
교수형
도적등 일반범들에게 주로 집행했다. 목아지 매다는 그거 맞다.
참수형
목아지 댕겅시키는 그것이다. 사극에서 칼춤추시는 그 망나니 아재들이 집행했다. 주로 역모죄인, 살인범, 군인들에게 집행되었다. 군인의 집행은 도부수란 보직에 있는 자가 시행했다고 한다. 하는 법은 사극처럼 걍 막자르는게 아니라 일정한 규칙이 있었는데 일단 얼굴에 허연 가루를 발라 이 새끼 사형수래요 라고 표시한뒤 조리돌림 한판 한후 뒷짐 결박을 시키고 목아지를 평평한 나무도막에 올려놓고 귀에 화살을 꿰어 놓는다. 이건 좀 독특하다.
그리고 상투끝을 도르레 달린 장대에 묶어서 잘리자 마자 바로 올라가서 효수되도록 장치하고 망나니 칼이 아니라 창에 가까운 언월도로 내려친다. 이때 망나니가 서툴거나 지나치게 술에 취하면 엉뚱한데를 찍기 때문에 사람이 받을게 못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망나니 입장에서도 직업이긴 해도 맨정신으로 사람죽이기 힘들어서 만취한경우가 많아서... 그래서 가족들은 뇌물을 줘서 한방에 죽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사
임금께서 하사하시는 약, 사약을 먹여 죽이는 그거 맞다. 유배갔다가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며 임금님이 친히 내리시는 약. 이 테크를 탄 사람으로 조광조, 송시열 이 유명하다. 신 러시아 제국엔 홍차가 있다면 조선엔 이것이 있었다. 단 조선쪽은 암살이 아니라 어엿한 정규 형벌이다.
신체보존을 효의 시작으로 보는 씹선비의 나라답게 양반들에게 주로 실시되었다. 양반이 아니라면? 위에 써있든 민간인 절도범은 교형, 살인자 군인은 참수형.
재료는 짐새 깃털로 담근 술 어쩌고 하는데(여태후가 즐겨 섰다.) 이미 조선때엔 짐새는 중국에서도 씨가 말랐기에 걍 독극물인 비상(비소)을넣어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 짐새도 말이 짐새지 씨발 저런 새가 있을리가 있나? 그냥 여태후가 자기가 주로 쓰는 독 까발려지는게 싫어서 (해독제라도 나오면 좆되니깐) 둘러댄게 짐새독이다.
하여간 사약은 제조법에 대한 보안이 어찌나 5백년간 철동같았던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재료는 아는데 그걸 어떻게 얼마만큼 넣고 어떻게 조제해서 먹는지 현대엔 모른다고 한다.
일단 이것도 임금께서 주시는 약이라 당근 의관을 갖추고 임금이 계신곳에 명예롭게 죽여주셔서, 마지막까지 성은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라면서 절을 해야 한다.
이것도 약은 약이라 조선 명종때의 권신이었던 김안로는 쓰다고 밤을 달라고 해서 먹고 죽었다고 한다. 숙종때 대 정치가이자 거유 우암 송시열은 한잔 퍼먹어도 아무 이상없는데? 라고 해서 한잔 더 먹이고 어때요? 라고 물어보니 별로..?라고 해서 사형 담당자를 애간장 타게 만들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오늘안으로 안죽으면 가져온 사약이 동나기 때문이다...결국 세잔먹고 죽었다고 한다. 근데 이양반 평소에도 비상이 엄청 들어간 정적이 보내준 약먹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았고 병도 나았다는거 보니 비상자체에 내성이 있었던 듯하다.
근데 저렇게 사약다 먹고도 안죽으면 그땐 야 신난다 형집행 정지가 아니라 그날안으로 자결해서 끝장을 봐야했다. 한약이 다 그렇듯이 이것도 약은 약인지라 체질이나 그날 컨디션, 혹은 다릴때 뭘 잘못 다렸는지 한두 사발로 끝장이 안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장희빈 마냥 사약마시길 거부하면 억지로 퍼먹이는게 아니라 목졸라 죽여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교형이다. 송시열의 경우가 특이 케이스인데 야당의 영수이시자 대 유학자이며 80먹은 정치판에서도 구를때로 구른 정객이라 반대파들도 마지막 가는길 배려차원으로 선배님 목졸리는것만은 면하게 해주려고 저런 특혜를 인정해 주었던것이다.
능지처사
능지형, 능지처참의 그 능지처사다. 능지란 낮은 언덕이란 뜻으로 낮은 언덕에 오르듯 서서히 고통도 그렇게 줘서 죽인다는 의미다. 중국이 오랑캐에게 점령당하면서 오랑캐의 형별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 시행국가는 오랑캐 왕조인 요나라였다. 북방 오랑캐 왕조는 피를 보는것을 전통적으로 기피하여 죽여도 교형정도로 그치는데 사람을 포를 뜬다는것은 엄청난 형벌로서 영혼까지 발기발기 찢어 죽이겠단 의미의 최고 극형이었다. 이때문에 황족을 살해했거나 대를 이을 아들을 살해하여 그 집안의 대를 끊어버리거나 3명이상을 살해한 패륜범죄자등 사회적으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만 집행되었다.
그리고 요나라와 금,원나라까지 이어지다 정통 한족왕조인 명나라로 넘어와서도 시행되었다. 근데 문제는 이것은 명의 헌법이라고 할수 있는 대명률에 기록되지 않은 형벌이다. 그러나 신하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원장께서 친히 이것을 내려주셨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주원장 께서 이거보다 더 센거도 많이 내렸다고 하는데...
명나라 말기 명장 원숭환이 이것을 당한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명나라가 망하고 청 말기까지 존속되어 중화민국 초까지도 집행되었고 이게 마지막이었다.
이형벌은 인간을 산채로 수천조각 포를 뜨고 회를 뜨는것이다. 능숙한 집행관은 도합 6000번까지도 칼질을 했다고 한다. 방법은 신체 말단부터 조급씩 예리한 면도칼 같은 전용 집행도구로 살을 발라내 마지막엔 뼈와 장기가 드러날때까지 칼질하며, 사형수가 도중에 사망하면 집행관이 사형에 처해진다. 그덕에 마취약으로 아편을 먹이기도 했다. 최후는 갈비뼈를 도끼로 부순뒤 심장을 칼로 찔러 마무리했다. 그나마도 청나라땐 너무 잔인하다고 2000번을 한계로 정했고 평상시엔 3번만에 목을 치도록 하기도 했다.
조선에선 너무 잔인하여 형벌로 집행되지도 법제화 되지도 않았으나 연산군때 목숨걸고 직언을 하였다는 내시 김처선에에게 한정해서 딱 한번 시행된적이 있다고 한다.
- 형벌이라기보다 그냥 사이코패스한테 살해당한 피해자1로 해라
- 연산군이 즉흥적으로 칼들고 자른거라 형벌이라 하긴 미묘하다, 술먹고 당한거라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듯
능지처참이라고 흔히 나오는 것은 거열형이다.
거열형
이게 흔히 말하는 능지처참이다. 능지형에 비하면 심플하게 팔다리목아지 사지만 뜯고 치우는 형벌인데 사람이 아니라 소를 이용해 5방향에서 찢어버리는 것이다. 근데 이것도 너무 잔인하다고 하여 대부분 교형하고 나서 뒷풀이로 실시했다고 한다.
- 직접적으로 당한 인물 중 세종대왕 치세 때 강상인이 있다. 상왕이던 태종의 속을 읽지못한게 이유다, 문제는 알쏭달쏭한 문제로 테스트친 후 우디르급 변환으로 역적으로 물으니,어벙벙해진 무인 강상인은 자백하지 않으려 빠따질을 제법 견뎌낼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조선초기는 사약마저 잘 주지않고 역모는 걍 최소 참수형감이다)끝내 거열을 당하고 거열직전 "난 죄가 없는데 매를 이기지 못해 죽는다!!" 외치며 사지가 잘라나와서 죽게된다
부관참시
죽은자의 죄를 물어 시신에다 고인드립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 능욕을 가하는 것이다. 무덤은 파헤치고 관은 빠개고 뼈는 부스러뜨려 흩어버린다. 유교 탈레반으로 시신마저도 조상님이 주신 몸뚱이라며 애지중지 하는 조선으로선 줄수있는 최고의 고인드립이었다. 하지만 정육점 상한고기에 죄를 묻는것과 비슷한 꼴이다.
폐지
이토록 복잡하고 죄인에게 고통을 주는 전근머적인 조선 형법은 갑오개혁에 의해 징역형과 사형으로 축소되고 사형또한 민간인 교수형, 군인 총살형으로 개편됨으로서 사라졌다.
종종 조선이 미개하여 저런 잔혹한 형벌을 운용했다고 하는데 사실 조선이 19세기 털리기 시작하던 때 기준으로 유럽 열강에 비해 아무 변화도 없었기에 미개해 보였던 것이지 4-500년 전 시대에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형벌이 다 저런 식이었다 아니 중세 서구권이나 중국, 일본은 조선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으로 잔학했다. 비록 유교탈레반들이 횡행했다고는 하지만 잔악한 신체형은 꺼리는 성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궈에서는 정말 사람을 탕으로 끓였던 팽형이 조선에서는 이름판만 끓이고 사람은 그릇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늉만 했으며 능지처사도 사실상 집행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비슷한 수준의 조선초 시절 기준으로는 세계에서 그렇게 나쁘지 않은 죄인 대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압슬형이나 자자형 단근질 같은 후유증이 많이 남는 그나마 잔인한 형벌 마저도 영조가 폐지해버렸다.
민법
임란전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의 민법은 고려와 유사할 정도로 여권이 높았고 왕자의 난 이전까지는 서자의 지위또한 적자들과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왕자의 난 이후 서자의 지위가 ㅄ이 되어 부렀고(양반지위를 유지하려면 문과 대과를 쳐서 합격해야 하는데 애들은 이거 자체를 못쳐서. 대신 무과는 칠수 있었다) 양란이후 조선왕실과 사대부 권위가 땅에 널부러져 버림으로서 윾교 탈레반으로 퇴화하면서 여권또한 파멸을 맞이하였다.
물권이야 당근 전근대 국가이니까 왕국토 사상(전국토가 짐의 것이니라)으로 명목상 왕꺼지만 토지소유권은 인정되긴 했다. 왜냐하면 신진사대부와 이성계가 고려무너뜨리면서 토지대장을 초기화한후 양반부터 평민까지 토지를 재분배 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단 경자유전의 원칙으로 전주전객제 자영농제를 추구한다. 물론 전기에는 이미 세조때부터 이게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다 양난을 거쳐 전국토의 80퍼가 초토화당하고 토지대장이 모두 초기화 되다시피한다. 그리고 조선후기가 도래하자 지주전호제가 일반적으로 확산되고 삼정의 물란 크리를 맞으면서 조선의 농민들은 몰락한다.
대부분의 양반들 토지는 단체명의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모모 마을 공동소유, 무슨 문중 공동소유, 어디 항교 공동소유, 왕실 소유, 관청 소유 이런식으로 토지 소유주체가 불분명했다.
이후 조선말 대한제국때 양전사업으로 토지조사를 한번 했지만 별로 소용없었다. 곧바로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불분명한 토지 소유권 문젤 한큐에 정리한것이 바로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이었다. 국뽕 교육과 달리 충분한 홍보와 기존 토지 소유권자들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다. 세금 걷어야지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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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초기엔 그나마 정상이였으나 중후기에 좆병신 씹쓰레기된 나라'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여기 글들만 보아도 조선에 대한 패배주의 때문인지, 온갖 카더라들을 사실인양 싣는 경우가 많다.
왜란 호란이후로 조선은 오히려 그 전 시대보다 발전을 거듭한다. 자본주의 맹아론 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동법이라든가, 농업 생산력의 증가, 상평통보, 도시 발달 등이 있다.
문제는 옆 나라들은 이미 예전에 한 발전이라는 거다. 유럽의 미친 발전은 커녕 옆나라도 제대로 못 따라가서 하다못해 조선통신사가 왜놈들 더럽게 잘사니 분하다고 홧병 터뜨리는데 참 잘난 발전이다.
물론 중국은 이미 중세시대부터 상업적이 발전이 있었다.(사실 고대 중국이 상업적으로는 조선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일본이나 베트남 같은 경우는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상업적 발전을 보여주었다.
가령 일본 같은 경우는 전국시대의 대혼란과 텐메이 대기근을 끝내고 에도막부의 평화 시대에 본격적인 포텐을 터트리며 발전을 한다.
- 이건 생산량차이가 큰거 아닌가 싶다. 조선 세율이 50퍼, 일본 세율이 90퍼였는데 쪽본 농민들은 이래도 먹고살았다.
게다가 조선통신사들의 기록 또한 한글판에서의 번역이 미숙하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실제 제대로 번역되어 있는 통신사기록에서는 '우월한 나라의 입장에서 낮은 나라의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나온다. 물론 이시기 일본이 크게 발전한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윗대가리들에 대한 인식도 해악을 끼쳤다거나 공자왈 맹자왈 하는 족속들이란 시각도 있지만,
노비오히려 기존 정치체계가 소멸하고 세도정치 시기에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종모법(엄마가 노비면 애도 노비가 되는 법)에 대해 논쟁하거나, 상업을 일으키기 위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등 민생에 엄연히 신경쓰고 있었다.
논의만하고 안 바뀐게 현실이라 까이는 거다. 뭔 헛소리냐. 엥? 이거 완전 탁상공론 아니냐!?
- 그 세도정치를 부른게 기존 정치체계라는 건 개무시하는 얘기이다. 그리고 기존 정치 체계에선 나라꼴이 제대로 된 줄 아나? 경신대기근으로 다들 뒈져나가는데 예송논쟁잼
- 기존 정치체계는 붕당정치이다. 붕당정치가 뭔지는 교과서 점만 뒤져보면 알테니 패스하고,
이 붕당정치가 세도정치를 부른건 아니다. 세도정치는 정조시대에 붕당정치를 개박살 내버린 여파로 발생했다. 붕당 대신에 일개 외척가문이 권력을 휘두른게 세도정치이다.
정조가 죽고나서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자연히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고,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 때는 붕당이 사라진 뒤라서 서로의 권력을 견제할 시스템이 없었단 탓도 있다.
영정조 시대에 설마 세도정치하려고 붕당 없앴겠냐. 다 좋으라고 ㄱ랬겠지. 그런데 결과적으로 세도정치를 불러왔다.
영정조시대는 이웃나라의 사정으로 평화가 주어진 시기일 뿐이다. 이 둘의 능력은 객관적으로 평가되고 격하될 필요가 있다
사실 조선 후기만 300년이다. 한나라가 생기고 멸망할 정도의 시간을 그냥 싸잡아서 '망해가는 시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19세기에 보여준 일들로 조선 전체를 싸잡아서 비판하면 안된다.
- 그 19세기 꼬라지가 실상 17세기에서 그대로 온거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어디 멀리 떨어진 섬나라라도 되는 건지 혼자 느린 시간의 흐름속에 있는게 조선이다. 자세한건
동시기 명나라, 일본, 베트남을 보면 알 수 있다.
- 17세기에 그대로 온거라니. 19세기의 꼬라지는 이전 시대가 아닌 홍경래의 난과 세도정치의 등극으로 나라가 개막장이 되면서 생겨난 암흑기이다.
실제로 19세기초 홍경래의 난 이후로 나라가 혼란스러워 지면서 인구가 크게 감소한걸 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까지 꾸준히 증가하던 조선의 인구가 19세기들어 정체되었다.
19세기의 혼란이 17세기에서 유래되었다는건 어불성설이다.
- 죄송한데 홍경래의 난으로 19세기 꼬라지가 만들어진게아니라 나라가 개망했으니까 홍경래의난이 일어난겁니다
- 근데 딴건 몰라도 조선후기 300년동안 뭐하나 임팩트있는 개혁이 단 한개도 없다. 동시대에 다른 나라에서 했는지 나열하기엔 내 손만 아프고
순조 항목에도 있지만 19세기에 비안온다고 기우제 지내고 백성들은 왕이라는 새끼는 뭔데 나라가 비도 안오고 이꼴이냐고 개얨병이나 떨고있었다.
- 그나마 대동법,균역법,탕평책은 임팩트가 좀 있었다.->물론 세도정치 시작하면서 셋 다 씹창난다.
다시 말하는데 19세기다. 양놈들은 15세기부터 대항해시대 -> 18~19세기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이러고 놀 동안 조선 정치인들은 지들 밥그릇싸움 한답시고 개혁이 안됐다.
그리고 선조새끼가 정철 불러다 바지사장 세워놓고 역적이랍시고 선비들 천여명이 넘게 쳐죽인 사건 이후로 선비들이 완전 씹선비로 탈바꿈하게 된다. 왜냐. 저 당시 급진적인 의견을 꺼냈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천명이 넘게 몰살당했는데 세월이 지나서 또 안그러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중국 응딩이 뒤에서 형님형님 이러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던 짓을 수백년동안 한 나라다. 일본은 섬에 혼자 뚝 떨어진 나라라서 지들끼리 쌈박질하다 급진적으로 외세문물을 수용했지만 조선은 시발 그저 우리 중국형님만 믿고 갑니다! 이 지랄하면서 정작 독자적으로 뭘 한게 없다.
그래도 정신승리를 하자면 서양은 지리적 이점에 아프리카같은 나라를 존나게 조져서 부를 창출해 그걸 기반으로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고, 일본은 조선 방어막 +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 아래 중국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때마침 중국의 병신짓으로 시장도 만들어지자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도 만들고 서양과의 교류도 조선처럼 누구 눈치 안보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500년 왕조 내내 중국 응딩이 걷어내기도 벅찼고 다른 시대처럼 중국이 쪼개져서 힘이 분산 된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지랄까다간 중국 내 어느 소수민족 23호로 전락할 수 있었음. 몽골제국의 화살촉 맛을 톡톡히 맛 본 한반도의 왕조 조선이 그걸 모를 리는 없었고 그래서 나름대로 살고자 선택한 것이 중국 후빨이었다. 어디서 금덩어리 나오는 땅도 아니고 주변에 조질 나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땅떵이도 존나 작고 인구도 경험도 기술도 중국에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고 세력 확장해보겠다고 괜히 전쟁 일으키다 민심 좆되기 십상이고 결국 한반도의 역사는 결국 중국 내 지역 1이던가 아니면 중국이란 대국 옆에서 형님형님하며 후빨하던가 둘 중 하나였음.
이런 상황에서 서양과 일본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며 비교하는 건 좀 그럼. 상병신 국가는 맞지만 동정의 여지는 있는 나라임.
세종대왕(+문종)이 조선의 기틀을 기껏 마련했는데, 직계 후손이 돌같은 머가리로 쳐말아먹고, 일제가 그걸 싹 다 없애려 하고, 역센징과 국까에게 폄하당하는 걸 보면 진짜로 세종대왕이 하늘에서 울 법도 하다.
일본과의 국력 역전
조선의 국력이 일본에게 밀리기 시작하는 점에 대해서는 1600년대론(에도시대 개막)과 1800년대론(활발한 난학 수입 및 연구)으로 나뉜다.
국력을 단순한 인구수와 생산력으로만 판단하면 1550년 이전에도 일본이 조선보다 더 유리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왜구 정벌에 적극적이였고 왜구가 초기에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눈치를 봤다는 점에서 생산력과 인구수는 우위였지만 고차원적인 과학 기술이나 문화 측면에서는 조선 초기까지는 일본이 약간 밀렸다고 볼 수 있다.
ㄴ 근데 조선 이전의 고려말기에도 정식군대가 아닌 유사군대 왜구들한테 개털리지 않았노
에도시대에 일본의 권력을 쥐었던 도쿠가와 막부는 천하보청제도, 참근교대제도를 통해 상공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도로의 정비도 촉진하였다(그 과정은 위의 책에 잘 나와있음). 그것은 곧 서민생활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난학에 대한 대중들의 높은 학습의지가 더해져 이후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1700년대부터 여기저기에 이름있는 난학자들이 세운 '주쿠'(학원이라고 보면 된다)들이 생겨나 난학이 널리 퍼졌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중들이 난학을 배우는 것을 은근 꺼렸지만 그것은 난학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지식을 막부가 독점하고 싶어서 그랬다.
확실한 것은 일본의 성장력이 1600년대부터 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국력이 역전된 시기가 정확히 언제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하지만 역전의 시기가 빠르고 느리고를 떠나서 일본은 '근대화' 라는 숙제를 풀어나갔으며 조선은 해당 숙제를 풀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1890~1960년대 까지는 일본에게 삼일한 수준으로 당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북괴가 남한에게 국력이 따라잡히는 과정이랑 비교해봐도 상당히 유사하다. 우선, 일제의 만주지역 짱깨들을 겨냥해서 군수공장을 북괴에게 몰아준 탓인지 북괴가 1948년에 창설된 직후에는 남한보다 더 잘 살았고 전후복구도 더 빨랐다. 그렇게 1955~1970년까지 남한에게 형님 노릇을 하며 살다가 1973년부터 급격히 남한의 포텐이 터져서 1980년이 지났을때는 이미 어느정도 따라잡혔고 격차도 커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1990년 이전까지는 군사력만큼은 남한에게 밀리지 않고 대등하거나 이상이였지만 그것도 결국 소련이 폭망한 이후에는 좆망해서 현재 재기불능인 봉건제 왕국으로 전락했다.
역대 국왕
역대 조선 왕 목록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태조 (1392년~1398년) |
정종 (1398년~1400년) |
태종 (1400년~1418년) |
세종대왕 (1418년~1450년) |
문종 (1450년~1452년)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단종 (1452년~1455년) |
수양대군 (1455년~1468년) |
예종 (1468년~1469년) |
성종 (1469년~1494년) |
연산군 (1494년~1506년) |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중종 (1506년~1544년) |
인종 (1544년~1545년) |
명종 (1545년~1567년) |
선좆 (1567년~1608년) |
광해군 (1608년~1623년)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능양군 (1623년~1649년) |
효종 (1649년~1659년) |
현종 (1659년~1674년) |
숙종 (1674년~1720년) |
경종 (1720년~1724년)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영조 (1724년~1776년) |
정조 (1776년~1800년) |
순조 (1800년~1834년) |
헌종 (1834년~1849년) |
철종 (1849년~1863년) |
역대 대한제국 황제 목록 | ||||
초대 (26대) | 제2대 (27대) | |||
고종 광무제 (1863년~1907년) |
순종 융희제 (1907년~1910년) |
이 문단은 리브레위키 - 조선 문서 에서 포크됨.
조선의 역대 국왕에 대해 외울 때, 앞글자를 따서 외우곤 한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능양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모아서 독도는 우리땅 노래와 합치면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망
미미미미미미미 미미미미도시라 라도라라라라라 라라솔파미미미
이 된다. (나리나리개나리로 외워도 된다) (산토끼로도 가능하다) 그냥 외워라 참고로 리듬감 살리려면 망 넣어라
아래는 음력 기준으로 정리한 조선왕들 신상정보다. 우리가 쓰는 양력이랑 차이가 있으니 그 점 참고해라.
제 1대 태조 (성계, 생몰 1335~1408, 재위 1392.7.~1398.9.)
제 2대 정종 (경, 영안대군, 생몰 1357~1419, 재위 1398.9.~1400.11.)
제 3대 태종 (방원, 정안대군, 생몰 1367~1422, 재위 1400.11.~1418.8.)
제 4대 세종 (도, 충녕대군, 생몰 1397~1450, 재위 1418.8.~1450.2.)
제 5대 문종 (향, 세자, 생몰 1414~1452, 재위 1450.2.~1452.5.)
제 6대 단종 (홍위, 세자, 생몰 1441~1457, 재위 1452.5.~1455.윤6.)
제 7대 세조 (유, 수양대군, 생몰 1417~1468, 재위 1455.윤6.~1468.9.)
제 8대 예종 (황, 해양대군, 생몰 1450~1469, 재위 1468.9.~1469.11.)
제 9대 성종 (혈, 자을산군, 생몰 1457~1494, 재위 1469.11.~1494.12.)
제 10대 연산군 (융, 세자, 생몰 1476~1506, 재위 1494.12.~1506.9.)
제 11대 중종 (역, 진성대군, 생몰 1488~1544, 재위 1506.9.~1544.11.)
제 12대 인종 (호, 세자, 생몰 1515~1545, 재위 1544.11.~1545.7.)
제 13대 명종 (환, 경원대군, 생몰 1534~1567, 재위 1546.7.~1567.6.)
제 14대 선조 (연, 하성군, 생몰 1552~1608, 재위 1567.7.~1608.2.)
제 15대 광해군 (혼, 광해군, 생몰 1575~1641, 재위 1608.2.~1623.3.)
제 16대 능양군 (종, 능양군, 생몰 1595~1649, 재위 1623.3.~1649.5.)
제 17대 효종 (호, 봉림대군, 생몰 1619~1659, 재위 1649.5.~1659.5.)
제 18대 현종 (연, 세자, 생몰 1641~1674, 재위 1659.5.~1674.8.)
제 19대 숙종 (순, 세자, 생몰 1661~1720, 재위 1674.8.~1720.6.)
제 20대 경종 (윤, 세자, 생몰 1688~1724, 재위 1720.6.~1724.8.)
제 21대 영조 (금, 연잉군, 생몰 1694~1776, 재위 1724.8.~1776.3.)
제 22대 정조 (산, 세손?, 생몰 1752~1800, 재위 1776.3.~1800.6.)
제 23대 순조 (공, 세자, 생몰 1790~1834, 재위 1800.6.~1834.11.)
제 24대 헌종 (환, 세자, 생몰 1827~1849, 재위 1834.11.~1849.6.)
제 25대 철종 (원범, 변, 덕완군, 생몰 1831~1863, 재위 1849.6.~1863.12.)
제 26대 고종 (명복, 형, 익성군, 생몰 1852~1919, 재위 1863.12.~1907.7.)
제 27대 순종 (척, 세자, 생몰 1874~1926, 재위 1907.7.~1910.8.)
출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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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대 명조(무츠히토, 외국인, 생몰 1852~1912, 재위 1910.8.~1912.7.)
제 29대 대종(요시히토, 외국인, 생몰 1879~1926, 재위 1912.7.~1926.12.)
제 30대 소종(히로히토, 외국인, 생몰 1901~1989, 재위 1926.12.~1945.8.)
제 31대 미종(존, 외국인, 생몰 1893~1963, 재위 1945.8.~1948.8.)
제 32대 이조(승만, 우남, 생몰 1875~1965, 재위 1948.8.~1960.4.)
제 33대 장종(면, 운석, 생몰 1899~1966, 재위 1960.4.~1961.5.)
제 34대 박종(정희, 생몰 1917~1979, 재위 1961.5.~1979.10.)
제 35대 전종(두환, 생몰 1931~2021, 재위 1979.12.~1988.2.)
추존 1대 태조 혹부리우스(일성, 생몰 1912~1994, 재위 1948.9.~1994.7.)
추존 2대 핵종 뽀그리우스(정일, 생몰 1941~2011, 재위 1994.7.~2011.12.)
추존 3대 돈종 꿀꾸리우스(정은, 생몰 1984~, 재위 2011.12.~)
기타
조선왕조 여진족 역사설
일부 유사역사학계에서 떠돌아다니는 낭설이다.이성계는 여진족이고 따라서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한국사가 아니라 여진족의 역사라는 주장이다.
반박
여진족 오랑캐 새끼들은 너무 미개해서 지들이 어떻게 사는지 지들 애비 애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글을 남겨놓지 않아, 현대에도 여진족새끼들 연구하려면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여진족들 쳐때린 기록을 바탕으로 연구하는데 이성계 같은 경우 3대 4대는 물론 그들의 외가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있다.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하면 이성계에게는 여진족 피가 없다 할 수 있다.
어쨌든 확실히 그가 이끌던 친위대 가별초는 여진족으로 구성 됐으며, 이는 그의 군벌로서 성공하는데 기여해준다.
존나 웃긴건 나중에 여진족 중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나서 동북공정용으로 신라 조상 드립을 치고 그걸로 조선 역사를 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후세의 환빠들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한민족이다라는 이상한 논리로 이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ㅋㅋㅋㅋ
신 조선 왕조
1948년, 북 지옥불반도에 좇일성을 황제로 하는 신 조선(조선민주주의 인민제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조선 왕조는 3대째 계속 이어져 오는 중이다. 물론 상태는 조선보다도 못하다. 자세한 것은 조선 북지옥불반도 주체교왕국 참고
태조 혹부리우스(뒈짐), 핵종 뽀그리우스(뒈짐), 광종 꿀꾸리우스(곧 뒈짐)가 역대 황제이다.
대한제국 황실 복원
한국의 개돼지들는(은) 사실 조선왕조에게 깊은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한국의 개돼지들는(은) 사실상 조선왕조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존나 싫어한다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싫어하면 관심을 주지 마 병신들아 ㅉㅉ "한국의 개돼지들는(은)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조선왕조을(를)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는 것일까?" |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문서나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현재 병신들이 말도 안 되는 개지랄을 떨고 있습니다. 정상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문서를 정리하여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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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랬다가는... 뭐... 뭐야 당신?! 읍읍!
이 틀이 근거가 있는 게 유럽 왕실을 보면서 21세기에 무슨 왕족이냐고 말하면서 창작물을 보면 온갖 왕국(더 킹 : 영원의 군주 같은 거)이 나오는 걸 보면 적절하다. 하지만 친북행위 이상으로 극악한 행위로 간주되기에 황실 복원에 대해 여기에다가 더 적다가는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간략하게 생략해서 설명하겠다. 국가보안법 틀은 결코 장식이 아니니까 지우지 마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헌법에서부터 금지행위라고 했으므로 절대로 내뱉어서는 안된다. 정치권에서도 당을 불문하고 장난으로도 하지 않으며 허경영이 전에 대통령제 폐지하고 군주제로 바꿔서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는식의 말을 한적이 있으나 조선왕조를 돌려놓겠다는 병신같은 개소리는 지껄인적 없다.
이런 병신 같은 조선 왕조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먼 헬브리튼 왕실 뽕이라도 맞았는지 간간히 대한제국 황실 복원이라는 애기가 간간히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다.
대한제국은 조선 왕조의 직계 후속으로 취급되는 게 보통이라서 복원 얘기가 나올 때는 보통 대한제국 황실이라고 얘기한다. 왕보다는 황제가 좀 더 있어 보이기 때문에 구 대한제국 후손들이 이걸 노리고 대한제국 황실이라고 칭하는 것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노예를 자처하는 새끼들이 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미 일제강점기 시기 때 근왕파가 깡그리 몰살당한 것을 생각하면 의아하겠지만 현대 엔터테이먼트(만화나 드라마)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가 제기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혹은 무개념 전주 이씨들이 특권 내놔라 이기야! 하며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진작에 초대 머통령 저승만에 의해서 나가리 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저승만이지만 저승만의 몇 안 되는 업적들 중 한 가지다. 이후 박정희때 해제되었다가 전두환이 집권하여 다시 탄압을 받자 전부 일본으로 튀었다.
딱히 이승만이 아니더라도 이씨 왕가라고 해서 일본이 나라 뺏은 다음, 대한제국 황실을 왕족(이왕가)으로 대해주면서 일본 천황가와 통혼을 강요했기 때문에 왕족 전원 모두 친일파로 갈아탔다. 일례로 이 문단 만들게 한 이석도 일본 천황계 피가 흐르고 있는 일본인이다.
거기다 왕족 간의 결혼으로 구 대한제국 황실에게 일본 천황가의 피가 섞여 들어갔기 때문에 만약 복고했다면 독립하고도 일본 왕족을 왕으로 모셔야 하는 개같은 상황이 펼쳐졌을 수도 있다. 조선 복고가 아닌 일제강점기 복고라는 말이다.
한국만 왕족 입국 금지를 했다라는 이상한 소리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고 당시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 터키 등이 하던 왕족 추방 및 입국 금지를 싱먼리가 따라했을 뿐이다. 오히려 한국은 입국 제한을 박정희 때에 풀어서 금방 해제된 편이고 이탈리아나 터키는 2000년대 들어서야 왕족의 입국 금지가 해제되었다. 터키의 경우 1974년 해제했다고는 하나 2004년까지는 암묵적으로 왕족의 입국이 제한되어 2004년이 되어서야 오스만 왕족 후손들이 터키에 들어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한제국 황실 복원은 머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내란죄다. 절대 거짓말 아닌 진실이다.
유신 4공시절에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로 수정된적이 있으나 1항은 헌법제정 이후 단한번도 수정된적 없다.
그리고 전주 이씨는 고려 왕씨처럼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도 모자를 판에 목숨이나 유지해준 것을 고마워하면서 지내도 모자랄 텐데 이런 지랄은 지 명줄만 짧아지는 행위다.
설령 복원한다고 해도 황실이라면 품위 유지비 등의 명목으로 황실 전용으로 쓸 자금이 들어갈 텐데 지금 머한민국에서 이런 걸 눈뜨고 감수할 인간이 얼마나 있을까? 다만 만약 천문학적인 확률로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했다고 가정하면, 구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전량 압수했던 국가에서 일부 혹은 전부 돌려줄 수도 있다. 물론 결론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린 황실 복원을 씨부리는 전주 이씨를 보면 전부 죽창으로 찔러 죽여 조선 왕조의 잔재를 말끔히 지워버리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예를 들어서 북괴는 전주 이씨 왕족들을 1950년대에 싸그리 사형시켜버렸다.
전주 이씨 왕조는 일제가 왕족(이왕가)으로 대접해줘서 의친왕같이 예외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친일파로 갈아타고 왕족 간의 결혼으로 일왕가 피까지 섞여들어가서 품종개량 실패작이다. 군인으로 입대한 몇 명은 일본군 출신으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서 아시아 제국주의 확장에 빼박 못하게 손을 담갔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안 해서 감싸줄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상하게 친일파 논란에서 이씨 왕가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 문제였다고 실드 쳐주는 자들이 많은데 친일인명사전 등의 기준으로 봐도 생계형 친일이 아닌 명백한 악질 친일 행위를 한 전주 이씨는 개화기때에도 가장 많았다.(이광수가 유명한 전주 이씨 친일파다.) 영국 왕실은 엘리자베스 2세부터 2차 세계대전 때 군에 입대해서 나치와 싸웠다. 전주 이씨는 임진왜란 때, 6.25전쟁 때 국민 버리고 도망갔다. 이승만은 북한에서 점심 먹을 수 있다고 해놓고 자기만 도망가고 국민들 도망 못 가게 한강다리 끊었는데 이건 스탈린도 안 하는 짓이다. 스탈린은 나치가 침략했을 때 도망 안 가고 모스크바에서 국민들과 결사 항전을 지휘했던 사람이다. 비교 불가다.
ㄴ 런닝맨 한 건 ㅇㅈ하지만, 실질적으로 대전차 무기가 전무한 상태에서 탱크를 막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잡히면 남한산성의 인조 꼴 나기 쉽기 때문에(후방으로 튀지 못하고, 국군은 제한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부산에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대한민국은 끝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전쟁 전 한강 다리 폭파 자체는 육본과 미 군사 고문의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한강 다리 폭파 전체를 까기보단 통제와 예보 없이 너무 일찍 터뜨려 시민들이 있을 때 조기 폭파한 게 까일 부분이다.
ㄴ 그 이승만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평화선 선포로 깝치는 쪽본과 북괴를 참교육 하는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공부 잘한다고 무조건 착하고 정치력 높은건 아니지만 이승만은 일가 대대로 높은 자리를(인조반정 같은 쿠데타도 있었지만 어쨌든 전주이씨 일가에 해당하는건 맞음.) 물려받은 조선 왕조와는 다르게 미국 유학파 엘리트다.
결론을 말해주자면 이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에도 기여한것이 없고 공산화 저지에도 기여한게 없으며 산업화나 민주화에도 기여한게 전혀 없는 암적인 존재다.
이 병신 짓거리는 가장 최근에 드라마 궁이 방영되며 황실 복원론이 인기를 끌때 이해원이라는 왠 옹주를 데려다가 이분이 대한제국 30대 여제시다! 이지랄 하다가 정말 일말의 관심도 없이 묻혔다. 사실 이거 엄밀히 따지면 법적으로 다 잡아넣을 수 있는 행위다. 정부가 보기엔 걍 전주이씨 종친회장을 좀 요란하게 뽑나보다 해서 넘어갔을수도? 참고로 그 할머니 2020년 2월에 101살 나이로 죽어서 복원 시도는 그렇게 영원히 끝이 났다.
한편 대한제국 황실 최고 웃어른이라는 의친왕 10남 이석은 무명 가수로 입에 풀칠하면서 살다가 가끔씩 종편 방송에 등판해서 황실 복원론을 아가리로 내뱉고 다닌다. 진짜로 전주 이씨 새끼들은 레닌한테 죽창 맞은 러시아 왕족 엔딩 안 난걸 감사해야지 막말로 6.25 전쟁 났을때 북괴가 이겼으면(당연히 북괴도 개막장이다.) 백두돼지혈통한테 서열정리 당했을 애들이 말이 많음. 어쨌든 이석은 1941년생 80대 이상의 고령이라서 현재로썬 임팩트는 거의 없음.
황실복원 홈페이지라는 이상한 사이트가 있지만 이곳은 위에 적은 이석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정체불명의 사이트로 방통위에 의하면 국내 주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며 정확히는 북괴의 우리민족끼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국정원이 24시간 감시하고 있는곳이니까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평가
초기과 말기의 평가는 다르겠지만 수천년의 역사상 가장 개병신 같았던 시절 그 자체
정말 알면 알수록, 아니 세상에 21세기의 지역강국 대한민국의 과거가 에콰도르, 볼리비아, 알바니아, 도미니카 공화국에 필적하는 씹찐따 같은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에 한 번 충격을 먹었고, 그 씹찐따 같은 나라가 한때 바로 내가 현재 사는 나라의 과거였다는 사실에 두 번 충격을 먹었다.
왜 조선이 욕으로 쓰이는지 생각해 봐라. 조선은 자타공인 한민족 최악의 흑역사다.
ㄴ 솔찍히 왜구들 참교육하고 다니던 신흥무인세력이랑 훈구가 권력을 잡던 전기는 그나마 정상적인데, 후기는 사림새끼들 꼰대짓 개오졌고 이게 탁상행정의 시초임.
물론 조선 얘기하면서 조센이라고 하는 새끼들은 거르면 된다. 답이 안나오는 일뽕새끼들이기 때문이다. 그냥 구한말이 지옥이였으면 중일전쟁 이후 일제시대도 지옥이지 뭐가 더 낫다고 싸워대는 키배충도 거르자.
나무위키는 조선/오해 항목까지 만들면서 쉴드친다. 역덕들 사이에서도 쉴드치는 무리가 종종 있는데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서 (특히 사학전공자의 경우 밥그릇싸움) 파고들 게 많아서 그런 것도 있고, 친중반일 프로파간다 퍼트리기 딱 좋은 시대라 그렇기도 하다. 시대별로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보면 삼국시대때는 고구려가 중국 왕조들과 자주 전쟁하다 당에 망하고, 백제도 결국 당나라에 망한다. 신라가 왜구에 시달리긴 했지만, 백제는 왜와 거의 혈맹 수준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송이 워낙 군사력이 약해서 충돌은 없었지만 대신 북방민족(거란, 여진, 몽고)과 자주 충돌하고 원나라한테는 거의 속국수준까지 갔다. 고려 말 왜구가 대대적으로 침입하지만 이 때 활약한 무장도 조선 세운 이성계라 사실상 조선 프리퀄인것도 있고 망하기 직전인데다가 명과의 관계도 요동 정벌,홍건적 보면 딱히 좋은 건 아니었다. 반면에 조선은 명에 허구한날 사대하며, 임진왜란때 명에 구원받았지만, 일본과는 임진왜란을 거쳐 식민지로 망했으니 친중반일 하는 세력 입장에서는 딱 맞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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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대한제국의 존속 기간까지 포함. 총 518년 16일 동안 존속했다. 대한제국을 제외하면 1897년 10월 11일이 끝으로 총 505년.
- ↑ 우선 남북 분단의 원인은 논란이 크다. 조선이 망하지 않고 계속 존재했다면 남북의 분단은 없었을 수도 있지만 징병제가 도입되지 않았을지는 모른다. 사실 어떤 나라든지 자국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필요한 법이고 조선 또한 군대가 존재했기에 병사를 모집하는 제도 자체는 징병이든 모병이든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징병제가 지금처럼 빡세진 건 북한이 가장 큰 원인이다.
- ↑ 하지만 그렇다고 식근론이 옳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이먼 쿠즈네츠 이론을 반영하면 식민지 병탄 이전과 이후의 소득 수준 차이가 거의 없었고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식근론은 틀린 말이다. 그러나 이 사진의 의의는 그만큼 외국인들이 보기에도 조선이 당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했으며 다른 국가들에게 손가락질 받을만한 것들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의 정상적인 역사 평가를 죄다 갉아먹은 근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바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승만 정부부터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일단 이영훈 교수도 자신의 저서인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일제 시대를 비판하기도 했음.
- ↑ [1]
- ↑ 실제로 한국사에서 종종 양반층이 단체로 왕한테 개기던 적이 몇 번 있었을 정도로 양반도 무시 못 할 권력계층이었다. 당장 그 유명한 안동 김씨가문도 이씨왕조한테 개길수 있을만큼 힘이 강했다.
- ↑ 조선의 모든 문화의 근원이 중국사람인 기자에게서 왔다는 사상을 글로 싸지른 율곡이이의 저서
- ↑ '만동묘' 라고 하는데 고종때 철거되었다.
- ↑ 자세한 내용은 이혜정. 2017. 노비(奴婢)의 기상(記上)행위와 쟁송(爭訟) ― 『묵재일기(默齋日記)』 를 중심으로 ― 를 참고하라
- ↑ 다만 프로이스의 기록은 그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