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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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景福宮
조선 제일의 궁궐, 서울의 심장
대한민국 수도 서울, 그 중심부인 종로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한 궁궐 이다.
경복궁의 모든 궁궐의 이름을 지은 것은 조선 건국 1등 공신 정도전이다.
조선 왕조 시대를 넘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애환의 상징, 그러함에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야할 궁궐이기도 하다. 뒤에 청와대가 보이고 인왕산과 북악산이 있다.
경복궁의 역사[편집]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조선을 건국하였고, 그와 더불어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그 한양의 확대판이 지금의 서울인데, 이때 서울은 성곽으로 연결된 하나의 성이었기에 한성이라고도 불렸다.
한양에서 1395년, 경복궁이 건립되었다. 경복궁은 모든 궁궐 중에서도 법궁, 즉 제일 가는 궁이었고, 추후에 창덕궁 등의 이궁이 세워진다.
이때의 경복궁은 아직 완성판이 아니었다. 일례로, 지금은 모두가 당연하게 광화문을 광화문이라고 부르지만, 태조 당시에는 광화문이라는 이름 없이 그냥 사정문이라고 불렸다가, 후에 세종 때 이르러 집현전 학자들이 광화문이라고 붙였다. 광화문은 왕의 지혜가 밝아져 만백성과 국가를 옳게 이끌어간다는 의미이다.
경복궁의 북쪽에는 북악산이, 그리고 바로 옆에는 인왕산이 있으며, 앞에는 청계천이 흘러 이상적인 명당자리로 뽑힌다. 예로부터 뒤에 산, 앞에 강이 있으면 좋은 기를 산과 강이 막아주어 좋은 기가 만연하는 명당이라 하였다.
허나 경복궁은 법궁의 체면에 맞지 않는 여러 수난을 겪게 되었다.
먼저 명종 8년, 완공된 지 백몇 년이 넘어가는 경복궁에 화재가 났고, 다음 해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역시 임진왜란, 즉 1592년에 일어난 일본의 침략이다. 이때 당시 일본군은 삼진으로 나뉘어 빠르게 한양까지 올라왔는데, 여기서 의뭉스러운 부분이 나타난다.
우리가 역사를 판단할 때 사용하는 '조선왕조실록' 선조 때에는, 대략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성하께서 궁궐을 나와 피란을 가셨다는 걸 알게 된 백성들은, 즉시 분노하여 궁궐에 침입하여 노예문서를 불태우고 궁궐 자체까지 불로 파괴해 버렸다."
허나 일본군 1진의 기록엔 무엇이 좀 이상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 일본군 1진은 가장 먼저 한양에 당도했고, 경복궁 안에 진입했건만 궁에는 그 누구 없다. 허나 그 경치와 아름다운 건축에 병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을 제작하는 기준은 사관들의 기록물이다. 허나 당시 사관들은 왕을 따라다녀야 정상일 텐데, 왕이 피란가면서 동봉해야 할 사관들이 백성 봉기를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정작 저 일본군이 경복궁에 감탄했다는 기록도 임진왜란당시 있지도 않았던 일본인이 쓴 소설이 출저이기때문에 의심스러운건 매한가지다
그리고 선조가 파천을 가던 날의 기사를 보면 이런 기록도 나온다.
"새벽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
이 기록에 따르면 파천을 가던 날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단 얘기인데 이 기록이 맞다면 경복궁이 파천에 분노한 백성들이 일으킨 봉기 때문에 불 탔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하지만 그당시 민본을 국시로 내서웠던 유교국가에서 백성들이 화가나 궁궐을 태우는 창피한일을 굳이 실록에 적어놓았다는것을 생각해 보면 사관들이 어느정도 신뢰할만한 출저에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긴하다.
또한, 일본군 제 1진이 저렇게 경복궁의 미에 감탄한 것으로 보아, 일본군 제 2진, 혹은 제 3진이 경복궁을 무참히 파괴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실로 일본군 제 2진의 장수는 성격이 포악하기 그지 없어 지나가는 곳을 쑥대로 만들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니면 제4차 평양성 전투의 패배 후 일본군이 분풀이 차원에서 한양의 백성들을 학살하고 대규모 방화를 했을 때 불탔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 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결국 두 가지 추측이 난다.
1. 실제로 조선의 백성들이 분기탱천하여 경복궁에 불을 놓았고 어떠한 연유로 사관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다.
2. 본디 일본군 아무개 진이 경복궁을 불살랐으나, 국가의 약한 점을 이유로 삼는 것을 원치 않아 백성들의 탓으로 돌렸다.
하여튼, 경복궁의 수난은 이걸로 끝나진 않는다.
경복궁은 불타고 난 뒤에 엄청난 세월을 복원되지 않은 채로 지내야 했다. 왕들은 경복궁의 복원에 힘쓰지 않았고 창덕궁을 법궁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가 경복궁의 터가 좋지 아니하여 국난이 일어났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경복궁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폐가가 되어버렸고, 창덕궁이 조선 역사를 관망하게 된다.
추후,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왕에 즉위하게 도와준 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힘쓰게 된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아무런 기반이 없는 채로 권좌에 앉은 것인데, 이를 위해 고종이 왕의 면목과 왕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각각 경복궁과 태원전을 지었다.
이때 경복궁을 중건할 때, 백성들의 노동력과 여러 자재들을 징발하고 착취하여 경제를 좋지 아니하게 했다고 비판을 받는 편이 있는가 하면,
경복궁을 중건하여 조선 왕실의 면목을 다시 살리고 지금 우리가 경복궁의 일부라도 보면서 복구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칭찬하는 편도 있다.
허나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건천궁에서 일어난 후,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을 하게 된다.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피했는데, 그는 다시는 경복궁에 돌아오지 못한다.
그런 경복궁은 다시 시련을 맞게 되는데
예컨대 그들은 광화문을 건춘문, 즉 경복궁의 동문쪽으로 옮겼고, 삼문삼조의 가운데 문인 흥례문을 무참히 파괴했다. 유일하게 근정문은 멀쩡했는데 근정문은 일제가 저지르는 만행을 지켜봐야 했다.
일부는 해체시켜 팔기도 했으며 일부는 순서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동안 경복궁은 무려 85~90%가 파괴당한다 ㄷㄷ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정치인생을 걸고 복구했던 경복궁은 100년도 못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일제는 경복궁의 가장 상징적이고 정전인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워 근정전을 가렸다.
이는 의미하는 바가 큰데 518년이나 이어져온 조선왕조의 멸망과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의 암울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후에, 광복이 된 후 조선총독부는 부끄럽게도 중앙청, 그리고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됐다가 김영삼 대통령 때 국치라고 하여 파괴했다.
1990년부터 강녕전, 교태전, 광화문 등을 비롯한 많은 경복궁의 건물을 복원하고 있지만, 아직도 경복궁의 40% 뿐이 복구됐다고 한다.
경복궁은 모르고 보면 중국의 거대한 자금성과 일본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보고 조선의 것에 실망할 수 있다.
허나, 조선만이 가진 특색과 다른 점을 알고 본다면 경복궁은 매우 재미난 곳이 된다. 그에, 경복궁을 보게 될 때엔 시간에 맞춰서 해설을 듣기를 권장한다. 혹은, 음성안내기가 삼천 원에 대여가 되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건물 몇 개만을 소개할 것이다. 광화문부터 시작하여 수정전까지 다 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문서가 될 것이고, 솔직히 그것을 다 보려면 매우 지루할 것이다. 실물이 없기에.
정전, 침전, 경회루 정도면 될 것 같다.
광화문[편집]
광화문 야경(光化門)[2]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때 처음 준공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후, 1864(고종 1) 다시 중건 되었다가 1927년 일제에 의해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되었다가 6.25 전쟁으로 다시 소실 1968년 다시 다시 준공 되었다, 그 후 2010년 또 다시 복원 공사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냥 쪽바리 새기들 때문에 존나게 부수고 짓고를 반복하며 고통 받았다.
정전 - 근정전[편집]
삼문삼조라는 법칙이 있다. 궁궐을 지을 때 정전까지 들어가려면 세 개의 대문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도 이것을 지키긴 하였으나 완벽하게 이것을 지키진 않았다. 경복궁은 삼문삼조를 지킨 사례에 든다.
경복궁의 삼문은 각각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
이중 근정전의 바로 앞엔 근정문이 있다. 본디 근정문은 상시 열려있지 않고, 특별할 때 임금이 가마를 타고 들어간다. 감히 문무신들은 근정문으로 다니지 못하였으며, 그 옆에 일화문과 월화문으로 들어섰다. 문신은 일화문, 무신은 월화문이다.
근정전으로 들어서면, 앞에 삼도와 그 옆 품계석들이 도열해 있고, 답도를 통해 올라서면 2층 월대와 근정전이 보일 것이다. 허나 다른 세세한 것도 파고들면 재밌다.
근정전의 바닥엔 박석이 깔려있다. 박석은 화강암을 깎은 것으로, 울퉁불퉁하다. 왜 못생긴 박석을 이 아름다운 궁전에 지었냐 하면, 박석은 많은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박석은 햇빛을 직격으로 반사하지 않아 왕과 신하들의 눈을 눈부시게 하지 않는다. 감히 용안에 빛을 직격으로 반사하면 그것은 크나큰 문제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박석은 신하들이 미끄러질 염려가 없게 한다. 왕이야 가마를 타니 별 상관이 없으나, 신하들은 그 당시 돼지가죽신을 신어서 바닥에서 미끄러질 염려가 있었다. 허나 울퉁불퉁한 박석은 그것을 방지해 준다.
세 번째로, 박석은 비가 올 때 쉽게 고이지 않는다. 또한 박석이 엇나게 박혀있어서 비를 잘 흘려준다. 또한, 근정전의 바닥은 기울어져있어서 비가 잘 하수된다.
네 번째로, 박석이 박혀 있는 바닥에선 뛸 수가 없다. 박석이 워낙 울퉁불퉁해서 뛰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이를 통해 무례를 예의로 바꾸어준다.
이렇 듯 박석은 매우 유용한 자재라 할 수 있다.
품계석은 말 그대로 벼슬을 품계에 따라 돌로 나눈 것인데, 정 1품부터 정 9품까지 있다. 정 9품의 품계석 뒤에서, 정 1품의 품계석 뒤까지 출세하고 싶다면 30년은 걸린다. 그 정도로 조정은 힘들었다.
사실 조정에 들어서는 것 하나만으로도 엄청나게 힘든 것이었는데, 과거시험을 대과까지 합격하는 것이 수능보다 쉽다는 것은 매우 엄청난 낭설이다.
수능은 대학 정원이 비교적 많고 1년에 한 번이라도 하지, 과거시험은 전국에서 대과 33명이었고 3년에 한 번 보는 시험이었다. 가끔씩 특별시를 치루긴 하지만, 그건 특별할 때만이다.
대과의 1등은 장원, 2등은 방안, 3등은 탐화이다.
차일고리도 설명하고 싶은데 이건 실물이 있을 때 설명하기 편하므로 건너뛴다.
근정전의 주위에는 회랑이 둘러싸여 있는데, 사실은 여러 공공 기관이 있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파괴됐을 뿐.
근정전의 월대로 올라서면 본격적인 근정전이 보이는데, 근정전은 2층 건물로 보이지만 실상은 통층 구조이다. 통층 구조 위의 천장엔 황룡 두 마리가 있다.
본디 제후국, 즉 우리 조선 같은 '왕'국은 황룡이 아니라 봉황을 쓰게 되어 있다. 허나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을 복구하면서, 조선은 청나라에 지지 않는 국가다, 라는 의미를 함포한 채 황룡이 조각됐다.
실제로 황룡 보면 존나 멋있다.
옥좌 뒤엔 일월오봉병이 있다.
또한 월대 난간 위엔 십이지지에서 두 동물을 뺀 열 마리의 동물이 있고, 또한 사방신이 있다.
사정전으로 가는 곳에 현무가 있다.
근정전과 사정전에 청기와를 얹어야 할 이유[편집]
대충 상상이미지[1]
경복궁을 고종 시기에 맞춰서 복원한다는 문화재청의 취지는 응당 이해할 만하다. 결국 가장 최근의 모습이기도 하고. 다만 애초에 일백퍼센트 완벽하게 고증을 맞춰서 문화재를 복원하고 있는가를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문제점이 튀어나온다. 애초에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히면 한 발 물러서는게 반복되는 이중성의 원칙인지라.
국력이 받쳐주던 조선 초기에도 청기와는 부담이 컸는데, 하물며 후기에는 더욱 그랬다. 청기와 사랑으로 유명한 그 광해군조차 인경궁 창건공사를 크게 벌였을 때 정전인 홍정전, 편전인 광정전(지금의 창덕궁 선정전), 침전인 청와전에만 덮을 수 있을 정도였고, 기술도 끊기고 무리해서 중건하였던 고종 시대 경복궁에 청기와는 꿈도 못 꿨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 전기 때까지만 해도 역대 군왕들이 청기와에 신경쓰는 에피소드들이 실록에서 꽤 여러번 언급될 정도로 그 위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경복궁 출토 청황와들을 보면 조선이 마냥 검소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와들을 토대로 애써 복원할 노력도 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찬란한 예술을 묻어버리는 것과 같은 애석한 일이다.
이제는 청기와를 올리는 것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 시대이다. 경회루처럼 전기와 후기의 형태의 차이가 극심하여 문제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새로운 기와를 얹는 것 뿐이다. 다른 복원 사업을 제쳐놓고 우선적으로 해볼 만도 하다. 한 번만 해놓으면 뒷걱정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계속 청기와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지나치기 쉽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다거나 어색하다고 우려할 수도 있겠지만, 동궐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청기와 건물은 주변 건물보다 더 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완벽하게 고종 때의 그대로를 박제해 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때로는 조선 전기 때의 스타일링을 좇아 멋을 부려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단순 복원품이 아니라, 역사를 살아오는 건축물 그 자체로서 말이다.
롯데월드타워가 현대적인 마천루로서 대한민국과 서울을 대표하는 이미지라면, 역사와 전통을 대표하는 상징물은 다름아닌 근정전, 광화문, 숭례문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상징으로 여긴 궁전도 다름 아닌 경복궁이었기에 그만큼 철저하게 파괴했던 것이다. 청기와를 올림으로써 근정전과 사정전은 조선 전기의 절정에 달한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고, 경복궁의 위엄과 품격을 가한층 드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조선 시대의 인식이 박한 요즘, 융성했던 조선 전기의 향수를 느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닥 포장하기[편집]
언제까지 구시대적인 흙바닥 진창을 전통이라는 미명으로 놔둬야 할지 모르겠다. 박석같은 돌판으로 싹 포장만 해도 문제될 것이 없고, 만약 유연하고 개방적인 시각으로 서구식 잔디포장까지 도입하게 된다면 전통과 역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침전 - 강녕전과 교태전[편집]
편전 그냥 건너뛰었다 미안하다. 편전은 그냥 지금의 머통령 사무실이라고만 생각해 두자.
여튼 강녕전은 왕이 자는 곳이다. 원래 강녕전 컸다. 꽤 컸는데 일제 시대 때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타면서, 그걸 복구하기 위해 일제가 강녕전이랑 왕비 침전인 교태전을 뜯어다 복구했다.
돌려막기했단 말이다. 씨발 새끼들.
덕분에 큰 경복궁의 큰 침전은 작아졌고, 창덕궁의 작은 침전은 존나 커졌다. 개씹라
여튼 강녕전을 보면 방이 존나 많다. 여러 개다.
이유는 왕이 무작위로 방을 바꾸며 자서 자객을 피하기 위함이다. 이는 편전인 사정전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데, 사정전엔 가구가 별로 없다. 그래서 자객이 숨을 공간이 없음.
강졍전의 앞엔 월대가 있고, 들어가는 문이 들어열개라서 큰 잔치할 수 있었다. 무희 불러서 춤도 시켰다고도 하고.
교태전으로 넘어가자면,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아직 어린 왕자나 공주들 여기서 살았다고도 한다.
왕비는 궁 밖으로 감히 나가질 못 했다. 그런 왕비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왕은 아미산이라는 후원을 지었다.
아미산은 본디 어메이산이라고 중국의 산 이름이다. 그 어메이산을 축소했다 해서 아미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정말 매우 작으며 겨울에 가면 꽃과 풀이 다 죽어 별로 멋이 안 난다. 그러나 봄이나 가을에 가면 정말 아름답다.
함월지 등의 작은 물 받치는 석기둥이 있고, 굴뚝들이 있는데, 이 굴뚝들이 하나 같이 아름답다.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한자를 새겼다. 불 나지 말라고 불가사리와 나티를 그렸다.
나무 하나가 기울어져 길을 가로지르는데 볼 만하다.
경회루[편집]
한 마디로 노는 곳이다
네모난 연지 안에 지은 거대한 놀이터. 원래 경복궁 처음 지을 때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태종 때 대대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원래 경회루의 기둥엔 용이 감겨져 있었다는데 임진왜란 이후로 파괴됐다.
이 기둥도 가장자리에 있는 기둥은 네모나고, 가운데로 가면 원기둥이 되는데, 땅은 네모낳고 하늘은 동그란 천원지방 사상에 입거한 것이다.
실제로 천원지방 사상은 왕과 신하의 흉배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경회루 지붕이 상당히 큰데, 안에 들어가면 장관이다.
밖에서 봐도 장관이지만, 안에 들어가보는 것도 추천한다.
여담으로 세종 때 이야기인데,
어떤 자가 풍류를 즐기기 위해 감히, 제 멋대로 경회루에 들어와 놀았다. 그 새벽에 누군가가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왕이 갑자기 납셨다.
아 뒤졌구나 싶었던 찰나에 왕은 흥미로워 그에게 시를 읊도록 시켰고, 그는 한 시를 읊어 왕에게 들려준다.
왕은 감탄하여 풍류를 아는 자라고 종 5품으로 특급승진 시켜준다.
경회루는 승진의 장소다.
경회루에서 직진하다 보면 수정전이 나온다. 수정전은 예전 궐내각사 중 하나였으나 왕이 자주 출입하여 좀 격이 높은 건물이다. 특이하게 월대가 있다.
더 직진하면 커피숍이랑 기념품 가게 나온다. 기념품 가게에 멋진 건 많지만 가격이 많이 비싸다.
자선당,비현각[편집]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집 동궁,동궁전이라고 부른다
강녕전과 같이 세자와 세자빈도 사람이니만큼 개인생활이 필요했으니까
원래 동궁은 궁 밖에있어서 보통 세자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왕이랑,왕후 등등 왕실 어른한태 인사하는데 이게 엄청 불편했었는데
세종때 드디어 궁궐 안쪽에 건설되고 문종이나 이후 세자들이 여기서 지냈다
몆번 불타서 재건하고 그러다가 임진왜란때 재대로 불타서 270년동안 방치된다.
그러다가 고종이 지금 자리에 복원했지만 이후 일제가 그걸 또 가져가 도쿄에 호텔을 짓는데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도 관동대지진때 박살나 영구소실됨.
비현각은 자선당 옆에 붙어있는데 세자의 공부방 겸 사무실로 쓰였다 세조때 지어졌으며 이후 그럭저럭 있다가 임진왜란때 또 불타서 방치되다가 고종이 다시 만들었다
자선당과같이 일제가 그걸 또 가져갔으나 이후 어케 됬는지는 모름
소주방[편집]
경복궁의 주방이다
위치가 아주 좋은데 강녕전(왕의 집),교태전(왕비의 집),자선당(세자의 집),자경전(대왕대비의집) 사이에 있다.
기타[편집]
현재 터가 남아있는 한국의 왕궁 가운데 발해의 상경용천부를 제외하고는 경복궁의 터가 가장 크다.
안학궁, 만월대 둘다 경복궁 보다 작다. 못 믿겠으면 구글어스로 돌려봐
만월대는 기록에서도 터는 좆만하지만 이걸 건물 크기나 배치로 커버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총독부 청사[편집]
경복궁 코앞에 세웠다가 김영삼 때 철거가 되었다.
광화문 광장[편집]
광화문 앞 광장
관련 문서[편집]
저작권 표시[편집]
- 저작권 표시
- ↑ By Goodbye4ever (자작)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 ↑ By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Seoul Metropolitan Fire & Disaster Headquarters)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
- ↑ BBlmtduddl at the English language Wikipedia [GFDL (http://www.gnu.org/copyleft/fdl.html) 또는 CC-BY-SA-3.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 ↑ By Naturehead (자작)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 ↑ By Story-grapher(sang hun kim) (자작)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