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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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장(拙將)
적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주변에서 왜적에 대한 정보를 주어도 적을 과소평과하면서 얕보다가 제대로 얻어맞았다. 임진왜란이 장기화되고 전국적으로 피해가 커진 것에는 이 새끼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립이 충주로 데려간 군사들의 숫자[편집]
신립은 체찰사 유성룡에게 장교 80명을 받았다. 장교 한 명 당 군사를 100명씩 인솔한다. 당시 서울 한성부에는 잡색군(민방위)으로 '8만 명'이 있었다.
- 활 잘 쏘는 대(大), 소(小) 한량인 기마병 8천 명(삼의사 장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군대 면제를 받고 있었다.)
- (한량의) 개인노비 8천 명
- (한량에게) 보인종자로 지급된 시정방리인 1만 6천 명
- 도성 궁가에 남아서 수비대로 남을 4500 + 2500명(서울 아전, 악공 악생, 장애인, 노약자, 병자) (한량에게 면포를 바치는 자들)
- 서울 도성 각사 노비(서울 도성 관청 노비) 3만 명(결채하는 자들)
- 도성 인근 고을 8천 명의 시정악동
이중 4, 5번만 빼고 전부 충주로 데려가고 5번은 군량 수송대로 삼았다. 신립은 이 병력의 질을 믿지 않아서 추가로 궁궐호위군 2천(도성무사재관)을 받았는데 이들은 상번하는 군사 2천에게 고용된 대립인들이었다.
신립은 항상 직속철기 500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고대일록」, 「선조수정실록」에서도 나온다. 결국 신립과 작전의 호흡을 같이 맞출 군사는 500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계갑일록」을 보면 1, 2, 3, 5번 항목은 니탕개의 난 당시 북방으로 출정한 경력이 있는 병력들이다. 니탕개의 난 당시 서울의 한량인 8천 명은 조방장들이 이끄는 80명 용사들을 따라 북방으로 출정했다. 한량인 8천에게 말, 면포를 조공으로 바치고 출정을 면제 받는 면제보인 8천 명, 함께 뒤따라가는 종군종자보인 8천 + 8천을 서울 시정방리인 중에서 뽑았다. 한량은 당시엔 신라의 화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에 니탕개의 난이 더 위급해지자 율곡 이이는 서울에서 활 잘 쏘는 사람으로 1만 명을 더 뽑았다.(「율곡전서」 행장)
이때 서울 5부 각방의 향도들이 이곳 저곳을 뒤지며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병조의 색리들은 한 사람 당 면포 5~6필을 내야만 징병 면제를 해주겠다고 발표했는데 노비든 백성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뽑게 했다. 이때 이이는 병력의 양보단 질을 우선시했다. 그래서 전투 말을 사서 바치는 자는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순식간에 구름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전투 말 1만 여 마리가 모였다. 이이는 이때 활을 잘 쏘는 사람 1만 명을 뽑았지만 이중에서 활 잘 쏘는 실력을 상, 중, 하로 나누어서 200명만 장교로 뽑고 그들에게 보인을 주고 나머지는 예비대로 삼았다. 200명 장교들은 먼저 선발대로 북방으로 출정했다. 뒤따라 출정할 부대를 뽑는데 전투 말도, 면포도 바칠 능력이 없는 불쌍한 서울 도성 방리시정 백성들은 활을 못쏨에도 전부 북방의 전쟁터로 끌려가 서울 시내가 쓸쓸하게 텅텅 비었고 결채하는 도성 관청 노비들도 백성들의 탈영을 감시할 보인들로 붙여져 우글우글 끌려갔다.
「고대일록」을 보면 신립의 정예병 500명이 충주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나온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신립이 평소 직속 철기 500명을 거느리고 치돌을 즐겨했다고 나온다.
「상촌집」에서는 신립이 탄금대 전투 때 철기 500을 거느리고 단월역 인근 평원 광야에서 치돌하다가 전부 죽었다고 나온다.
어떤 모습의 철기였을까?
이일의 병력 징집 장면[편집]
이일이 경상도순변사가 되어 경상도로 가려하는데. 기마장교 40명, 궁수장교 20명을 비변사에서 받았다. 그리고 도성의 금군 300명을 호위병으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군적을 보니까 유생, 역관들이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병역 비리의 끔찍한 현장을 본 이일은 한숨을 쉬었고 유생과 역관들은 안 끌려가려고 지랄을 하다가 결국 별장 유옥에게 전부 끌려갔다. 이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던 게 별장 유옥의 장교들이 집들을 일일이 뒤지며 숨은 유생, 역관들을 끌고 가는데 시간이 걸렸다. 유생, 역관들은 하도 기생에게 돈을 탕진해서 말도 못 타고 노비들과 함께 걸어갔다.
그때 이일은 먼저 기마장교, 궁수장교 60명과 함께 도성을 출발해 경기 감영을 지나며 금군 300명을 호위할 조례(서울아전) 4천 명을 호위병으로 징집했다. 이때 호위병들의 짐을 싣고 같이 가줄 보인들도 하나씩 뽑았다. 그렇게 해서 병력이 8천 300명 이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게 상주로 내려갔는데 문경을 지나면서 곡식 창고를 다 털었다. 그리고 상주에 도착했는데 이일은 함께 온 귀족 종사관 2명과 함께 상주 읍성 북쪽 시냇가 북천으로 상주의 민병 800명과 상주에 모인 경상도 장사 2천 명을 데려와서 자기가 데려온 조례병 4000명, 보인종자 4000명, 장교 60명, 금군 300명과 합체시켜 전투병 6000명 이상, 보인종자 6000명이 된다.
4월 25일 충청도 조령을 방어하는 방어사 겸 조방장 변기와 종사관 1명이 충청도군현병 8천 명을 이끌고 이일을 후원하러 상주로 와서 이일과 합류했는데 이들 중에서 민병 800명만 북천 시냇가에서 진법 훈련을 시키는 척하며 왜군의 밥으로 내어준 후 나머지 군사는 전부 뒤편 숲 속을 통해서 변기의 도움 하에 무사히 퇴각한다.
같은 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때 상주에서 이일 변기의 연합군 병력 2만 명을 만났는데. 이 2만 중 1천 명만 격파하고 나머지는 놓친다. 이일이 떨어뜨리고 간 역관 1명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서 조선 조정이 4월 28일 충주에서 항복하기로 했으니까 어서 오라고 유인한다. 이일과 변기는 함께 총병력 2만 명을 이끌고 조령을 지나 단월역 근방으로 오던 중에 급히 오는 신립 김여물과 만나서 급히 '조령작전회의'를 연다. 웃기는 건 이일이 신립에게 왜군에 대한 보고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일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졸장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
왜군은 무조건 신병(神兵)입니다. 그냥 무조건 졸라 짱 셉니다. |
” |
이런 멍청한 발언을 보고라고 한 것이다. 참 영양가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일단 명장이기는 하다.
ㄴ 맹장으론 칠 수 있어도 명장은 무리는 아닌가 싶다. 하지만 기병 하나만 다룰 줄 알지 다른 건 그냥 평타 수준.
그러나 평화 속에서 병신이 되어있던 당시의 헬조선에서 기병이나마 명장급으로 다뤄줬던 신립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큰 유산이었다. 이일이나 원균 같은 새끼를 봐라.
ㄴ 김시민, 이순신 전부 백의종군 경험이 달린 걸 보면 그냥 그 새끼들이 병신인 거다.
극소수의 기병대로 5배 이상 되는 니탕개의 난을 기병으로 진압했을 때는 선조가 직접 신립에게 곤룡포를 입혀줄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기까지 했다. 자기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존나 강해서 류성룡이 대조총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라고 신립에게 숙제를 내줬으나 신립은 류성룡을 비웃었다. 물론 이해가 가기는 한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꼴에 공부라고 한 건 행정고시 합격이 전부인 책상 공무원 새끼가 육군사관학교에서 4년간 모질게 구른 뒤, 초군반 고군반 다 거치고 육군대학 등을 다 거친 육군참모총장한테 전술에 대해 야부리 터는 꼴이니까.
그리고 당시 조총은 위력 자체는 강했다. 그러나 쿨타임 역시 무지하게 길다. 화약 가루 넣기 → 쇠구슬 넣기 → 심지 박기 → 부싯돌 긁기 → 조준하기 순으로 쏘는 조총이 활에 비해 쏘는 시간이 말도 안 되게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군은 3단 철포사격법을 개발해서 이 미친 쿨타임을 극복하는 것에 성공했는데 신립은 그걸 몰랐던 것이다.
역시 장거한으로는 백팔식 어둠쫓기를 상대하기 힘든 것이다. 닥돌왕 신립에게 이런 걸 극복하길 바라지 말자. 무릇 인재는 그 용도에 맞게 써야 하는 법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선두타자 이일이 좆본군한테 털리자 그다음 타자로 파견되었다. 이때 신립의 절친인 선조가 자신의 직속 호위부대와 자신의 명검인 상방검까지 쥐어주며 신립에게 홈런 치고 와달라고 당부했...지만 신립은 충주에 도착하자 새재가 아닌 탄금대로 내려가서 싸웠다. 그 결과 신립의 조선군은 벌집핏자가 되었다. 내야뜬공 시발아 빼타 아웃.
그 덕분에 근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개병신 쓰레기 공갈 명장 취급이나 받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기는 한다. 일단 가장 잘 다루는 병과가 기병인데다가 기병이 주력인 북방에서 싸웠던 터라 일본군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둘째로 새재에서 싸우려고 하면 왜군이 딴 지방으로 돌아가서 한양을 조지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신립은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끌고 온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자신이 뚫리면 그 뒤는 변변한 방어 병력도 없는 무주공산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로선 어떻게든 여기서 일본군을 격파하거나 최소한 붙들어 놓기라도 해야 했다.
ㄴ 그 말대로면 쪽바리들이 굳이 문경을 통과하려고 했겠냐?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새재 외에는 사실상 길이 없다시피 한 곳이다.
셋째로 조총이라는 무기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약점인 장전 시간 동안서 달려가 짓밟아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은 열도 내에서 집안 싸움으로 조총의 운용과 관련 전술로는 거의 만렙을 찍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걸 몰랐다. 먼저 개털려본 이일이 난생 처음 접해본 적의 전술에 대해 얘길 해 줬으면 몰랐겠으나(아마 말해줬어도 걍 씹었겠지만) 이걸 모르고 그냥 기병을 돌진시켰으니...
제일 큰 문제는 당시 신립이 한양 경군까지 다 빼서 동원한 병력이 최대치로 잡아도 8천 명이 안 되는데, 고니시의 본대가 끌고 온 병력은 최소한으로 보아도 이것보다 1.5배 이상의 수치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질적으로도 상대조차 안되는데 양까지 밀렸다는 소리다.
ㄴ 문경새재는 행주산성, 진주성과 비교가 안되는 천해의 요새다. 신립의 패배는 마속의 등산이나 비슷한 삽질이다.
그 외로 김여물과는 2대에 걸쳐 친구 지간이었는데 여기서는 신립이 주장, 김여물이 부장이었으나 능양 반정 때는 김류(김여물의 아들)가 주장, 신경진(신립의 아들)이 부장이었다.
“ |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 신흠, 상촌집, 제장사난초함패지 |
” |
이것만 봐도 이새끼의 마인드를 알수있다. 그냥 평지에서 기병이란 생각뿐이지 전략이고 뭐고 없다. 탄금대로 간 이유도 뻔하다 그나마 평지니까
이길 수 있는 전투였는가[편집]
우선 당시 신립이 보유하던 군대는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8천 명이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론된다. 심지어 선조가 자기 호위병들까지 다 빼서 내어준 병력 숫자가 고작 이 지경이다.
ㄴ 근데 선조가 빼준 병력은 갑사로 궁기병에 정예 병력이었다. 그리고 진주대첩이나 행주대첩은 일본군의 1/10으로 정예병은커녕 백성으로 막은 전투고 2차 진주대첩은 거진 10만 가까이 되는 병력을 끌고 왔어도 일본군의 피해 또한 만만찮았다.
그리고 1차대전 때까지 왜 참호전이 이어진 건지 아냐? 애초에 그런 싸움은 요새 끼고 싸우는 놈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괜히 공성전 하려면 적어도 3배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나온 게 아니다.
정상적으로라면 이 대여섯 배 정도가 소집되어야 하는데, 전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회사 사원들이었다. 그만큼 조선의 관리 체계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상황이었다.
ㄴ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군사는 아니였다. 조선군은 교대제라 평시에는 자기 순서가 아닌 군사들은 자기 집에 가서 생업에 종사하고 전시가 되면 한 번에 다 소집되는 구조였다. 문제는 일본군이 너무 빨리 북상하다보니 집에 돌아가있던 병사들이 소집되지 못했다는 점.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중앙군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기정병 23700+보정병 16200+갑사 4640+정로위 2161+별시위 1119로 약 4만8천 정도였는데 기정병과 보정병은 8교대고 갑사, 정로위, 별시위는 4교대제라 실제 근무 중인 군사는 7천 수준이였다. 신립은 실제 근무 중이였던 군사를 다 끌고 간 셈이였다. 사실 이런 조선군의 구조와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신립은 쉴드 불가다. 신립의 임무는 그냥 조령을 방어하며 나머지 중앙군 4만여명과 지방군들이 소집될 시간을 버는 거였지 일본 선봉군이랑 결전을 벌이는게 아니였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선발대 5천 명에 후발 1만여 명에 합쳐서 신립군과 두 배 가량의 차이가 난다. 군사의 질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차이다.
신립이 문경새재에 도달하기 직전 고니시의 군사는 기민하게 움직여서 이미 새재와 유기적으로 붙어있는 주변 성채까지 점거하며 턱밑까지 도달한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농민 징집군과 다름없는 병력의 질로 신립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지경이다.
조령에서의 전투는 매복전의 양상으로 전개해야 하는데, 무전기도 야투경도 아무것도 없는 그 미개한 시대에서 야간 매복전이란 어지간히 전쟁터에서 굴러봐야 할 수 있는 고난도 전법이다.
ㄴ 현재 지도를 봐도 새재 외에는 돌아갈 곳도 마땅치 않은 지형이다. 괜히 새도 못 넘는다는 의미로 조령이라는 말이 붙었던 게 아니다.
아마 추측건대 거의 할 수 있는 게 없는 신립은 반쯤 멘탈 붕괴해서 그냥 자기가 자신 있는 전술(기병개돌)에 모든 걸 걸고 자폭한 것이 아닐까 싶다.
ㄴ 신립의 전적을 보면 사실상 지휘관이기보단 돌격 대장에 가깝다. 그저 할 줄 아는 게 돌격밖에 없는 장수의 한계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리고 상황은 추풍령과 죽령에 배치된 조선군이 더 열악했는데 죽령을 지키던 방어사 유극량은 가토의 2군을 저지해 결국 가토가 죽령 통과를 포기하고 조령으로 향하게 만들었으며 추풍령을 지키던 방어사 조량은 조령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수의 부대가 한양을 구원하기 위해 이동하는 바람에 구로다의 3군에게 결국 돌파당하긴 했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시간을 버는데는 성공했다. 애초에 조령이 뚫리지 않았다면 추풍령 방어선도 뚫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신립이 무능했던거다.
결정적으로, 이일 씹새끼를 살려둔 게 패배의 큰 축 중 하나다.
이일을 참수했더라면 장수고 나발이고 군무 이탈은 하면 안됨을 증명해서 군 기강이 바로 잡혔을 건데 신립은 이일과의 개인 친분 때문에 살려주는, 실수를 뛰어넘는 커다란 죄악을 저질렀고 그것 때문에 병사들 사이에서는 군기가 크게 빠져버렸다. 신립은 이일을 참수하지 않은 탓에 사기가 확 떨어진 부하들 때문에 탄금대까지 나가야만 했다. 신립도 조령에서 싸우는 게 더 편할 거라는 걸 몰랐던 게 아니다.
이럼에도 멍청함이 극에 달하는 병신 똘추 이일 새끼는 자기 때문에 탄금대로 내려가는 건 줄도 모르고 탄금대로 가지 말고 한강까지 물러서 싸우자는 개소리를 싼다. 이일 이 씨발새끼는 신립에게 "적은 신병이라서 무조건 강하니까 일단 튑시다."라는 개소리를 했고 안 그래도 정발, 윤흥신, 송상현에 이일까지 왜군에게 털린 소식을 접한 병력들이라서 절대로 못 이긴다는 그 소리에 심한 중압감과 공포를 느껴서 사기는 아주 푹 떨어졌다. 이순신이 "도망치면 살 거 같냐? 오히려 다 뒤진다!"라고 외치며 병력들의 사기를 계속 올리려고 노력한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발언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말해야 하는데 이일 이 새끼는 절대 못 이기니까 도망치자는 개소리를 한다. 이게 장수라는 작자의 주둥이에서 나올 소리인가? 이 새끼는 생각하면 할수록 한 대 패주고 싶다. 녹둔도 시절 이순신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운 것부터 시작해서.
뭐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 당시 전황이 신립이나 조선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고, 그 상황에서 신립 장군의 선택 범위가 매우 협소하긴 했으나, 지방의 근왕군이 상경하기 전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단기간에 대군을 완파 당했기 때문에 재평가는 앞으로도 힘들 듯하다. 다만 그 수만 명의 근왕군이 나중에 와키자카의 1500명에게 작살 난 걸 보면...
결정적으로 비가 와서 졌다. 신립은 기병이 주특기였고 그때도 기병을 이끌고 있었다. 문제는 비가 오면 땅이 질어져서 말 발굽이 흙두렁에 한 번이라도 빠지면 답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탄금대에서는 비가 왔다. 전투는 못해도 도망은 잘 쳤던 이일은 비가 오는 거 보고 신립의 기병대가 절대로 못 이긴다는 걸 간파하고 도망쳤다. 실제로도 기병은 치고 튀는 전술에 특화된 병과인데 그래서 졸라 빨리 이동해야 효과를 보는 병과인데도 땅이 질어서 신립의 기병대는 제대로 된 기동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ㄴ 애초에 논두렁에 기병으로 배수진을 치는 빡대가리 장수가 어디있냐 이일탓이라기보단 애초에 본인부터가 질 이유는 다가지고 있었다.
기병이 보병 같은 속도로 닥돌하니까 그게 강할 리가 있나. 신립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