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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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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32호.

懲毖錄者何 記亂後事也
“징비록이란 어떤 기록인가? 난후(亂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 유성룡 자서(自序) 中

징비록은(懲毖錄)은 선조 때 재상이었던 문신 유성룡이 사직 후 임란(壬亂) 7년간의 일을 기록한 전기(戰記)이며 저자가 영면하기 3년 전에 기술한 책이다. 일견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저자가 정밀하고 체계적인 문체로 기록했다.

징비록이란 서명 자체는 시경(詩經) 소비(小毖)편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後患) "내가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구절에서 따왔으며 이것이 저자가 징비록을 집필한 집필한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1633년 유성룡의 아들 유진이 유성의 문집 '서애집'을 간행하면서 그 안에 수록하여 처음 간행하였다.

내용[편집]

저자가 밝히고 있듯 비단 임진왜란 발발 후의 7년간의 일 뿐만 아니라 발발 전의 조정의 여론, 분쟁, 전시 대비 상황 등 역시 기록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조선에 시비를 거는 내용의 국서를 보내는 등 슬슬 꼴같잖게 나대는 국면, "우리는 자주 사신 보냈는데 니네는 왜 안 보냄 우리 무시함?" 거의 이런 내용의 국서를 보내고 사신을 요청하는 내용. 결국 통신사가 갖다온 뒤 전쟁 징후에 대한 찬반론. 그리고 그에 따른 허술한 전시 대비 상황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했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前 전적(典籍) 이로(李魯)도 내게 글을 보냈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삼가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넘을 수 있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답답하오.'
아니 넓디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막지 못한 왜적을 그깟 한 줄기 냇물로 막을 수 있다니 내가 더 답답했다. 당시 사람들의 의견은 한결같이 이러했고 홍문관 또한 그런 의견을 내놓곤 했다.

-징비록 中-

평가[편집]

난중일기와 함께 당시 전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취급되며 이로서 우리나라의 국보 132호에 지정되어있다. 또 일본에서 간행되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도 적잖이 읽혔던 모양이지만 나쁜 평가도 다소 있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유성룡 졸기(卒記)-

물론 위의 기록은 당대 사관의 기록일뿐이고, 당시 실제 서평 중론이 어떠했든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징비록이 유려한 문체로 쓰인 명저이자 실질적인 사료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기타[편집]

  • 서울대에서 선정한 인문 고전 50선 중 한 책이다.

참고문헌[편집]

  • 유성룡 作, 김흥식 譯 <징비록>
  • 국가기록유산 사이트 징비록 원문 열람

같이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