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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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意. 是 文書는 國父에 對해 扱니다. 諸 默念부터 爲시다... 族와 國를 爲해 命을 納리... 最小限 是 文書만은 國丰(彼가 捧지는 國의 國丰)을 쳐 吸시길 望니다. 萬若 國父를 侮辱하는 言을 行爲면 汝는 四肢가 切斷되고 屍體는 廢棄物 燒却場에서 廢棄 處分될 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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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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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로마 제정 성립 |
← | 초대 아우구스투스 | → | 2대 티베리우스 |
로마 제국의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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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 | 티베리우스 |
재위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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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7년 1월 16일~14년 8월 19일 |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소시오패스
기원전 63년 ~ 기원후 14년
개요[편집]
세계 정치사를 통틀어 최고의 천재이자 통수와 공작의 달인이다. 아마 정치사를 통틀어서 얘 만큼 정치질 잘한 놈은 몇 없을 듯. 그게 나쁜 뜻으로든, 좋은 뜻으로든.
최소 수백만 로마인에서 최대 수천만 서양인들에게 1인 독재국가를 공화국이라고 사기치는데 성공한 대국적 사기꾼이기도 하다.
그렇게 공화국인 척 해서 로마제국 초기를 제정이 아닌 원수정(principatus.혼자 다 헤쳐먹는 공화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치능력은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데 비해 군사능력은 아예 없는 수준이라,
밑에 서술한 군사적 업적은 전적으로 그의 친구 겸 사위이자 오른팔인 아그리파의 업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키는 175cm로 고대인 치고는 큰 편이지만 현대인으로서는 보통키에 해당된다.
상세[편집]
어린 시절[편집]
본래는 기사 계급인 옥타비우스 가문 출신으로 태어나면서 받은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이다.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오래전에 로마로 와서 집정관을 여럿 배출했던 분가 가문 사람들과 달리 본인 대에 와서야 원로원 의원 자격을 얻은 '신참자'였다. 어머니는 폼페이우스의 사촌 동생인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와 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사이에서 태어난 아티아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에게는 외종손, 폼페이우스에겐 외외종손이 된다. (촌수로 따지면 카이사르 쪽이 더 가까웠다) 아버지는 법무관을 지낸 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해 실적을 여럿 남겼으나(키케로가 자기 동생을 까면서 제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동맹을 대하는 방법 좀 배우라고 할 정도엿다) 한창 나이인 40살도 되기 전에 집정관도 못 해보고 로마로 귀환하다 요절해버렸다.
사실상 평민 가문 출신이었기에 옥타비아누스의 어린 시절은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으나, 4살 때 친아버지가 객사하고 어머니가 재혼하자 의붓아버지의 지원을 받으며 자랐고 카이사르의 내전 때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을 제압하는 스페인 전투에 참전했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는 중병을 앓고 있다 겨우 회복된 상태였지만 소수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즉시 전선에 합류해 카이사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으니 이 즈음에 카이사르가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카이사르는 아직 한창 나이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에게 모자란 군재를 채워줄 평민 출신의 아그리파를 붙여주고 그리스로 보냈다.
권력 쟁취 과정[편집]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옥타비아누스가 그 후계자이자 양자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조직된 군대를 이끌고 아그리파와 함께 로마로 귀환한다.
이후 정계에 입문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후계자이자 양자로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집행하고, 그의 이름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줌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다.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안토니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했고 옥타비아누스도 자신의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었으므로 서로 간에 아귀가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총지휘권을 가지고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를 패퇴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로원파는 옥타비아누스의 지휘권을 거두어들이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지휘권을 넘기려고 했다. 즉, 옥타비아누스를 안토니우스 견제의 수단으로 이용한 뒤 팽하려는 속셈이었던 것.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타고난 정치적인 능력으로 키케로와 원로원파의 속셈을 훤히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일단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군대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선 안심할 수 있지만 만약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가 해산당하기라도 한다면 정말 위험해진다. 눈엣가시 같은 자신을 원로원파가 내버려두고 있는 이유가 지휘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 지휘권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뻔했다.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도 똑같은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애송이' 취급하며 옥타비아누스를 밀어줘서 안토니우스를 박살낸 후에 옥타비아누스도 팽한다는 계획을 동네방네 퍼뜨리고 다니는 입방정을 너무 떨어서 새로운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의 귀에도 다 흘러들어갔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 간의 내부 다툼은 일단 접어두고 공공의 적인 키케로를 위시한 원로원파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안토니우스와 화해하고 동맹을 맺어 뒤통수를 거하게 갈긴다.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긴 했지만 카이사르 사후에 한동안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었으므로 여전히 힘과 지위는 남아있었고, 여기에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하고 있던 레피두스가 합류하면서 제2차 삼두정이 성립된다. 이건 원로원파 쪽에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고 카이사르의 암살자였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자신이 지휘할 장병들에게 거부당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브루투스를 향해 도망치다가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한 갈리아 족장에게 사로잡혀 처형된다.
새롭게 결성된 삼두는 반대파의 살생부를 작성하는데 이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 컸고, 따라서 직접적인 카이사르 암살자가 아니라면 돈을 내고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숙청의 결과 원로원 의원 130명과 기사계급 2천명이 추방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와 별개로 삼두는 이 동맹이 소중하다는 증표로서 각자 희생제물을 내놓기로 했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 전투에서 털려서 궁지에 몰렸을 때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외삼촌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지명했고, 레피두스는 키케로 파였던 자신의 형 파울루스를 지명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던 키케로를 지명했다. 이 중 키케로는 카이사르파의 전멸을 꾀했기에 카이사르 파의 입장에선 공공의 적이었고 특히 신랄한 인신공격에 시달렸던 안토니우스는 굉장히 분노한 상태였다. 이에 안토니우스가 키케로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을 냈고 레피두스는 거기에 동의, 옥타비아누스는 이틀간 안된다고 우기다가 3일째에 묵인하여 희생제물 중 유일하게 죽었다.
이후 삼두정은 동부에서 군대를 모집한 브루투스 일파와 한바탕 회전을 치르게 된다. 레피두스가 로마에 남아 수비를 하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동방으로 건너가 브루투스 일파를 상대하기로 한 것. 이 필리피 전투의 1차전에서 옥타비아누스 군은 브루투스 군을 상대로 먼저 도발을 걸었는데, 도발에 넘어간 쪽이 먼저 공격하면 진다는 통념을 깨고 브루투스쪽이 승리해 옥타비아누스는 18,000명의 손실을 입고 군단기 3개를 뺏겼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고지대를 점거한 카시우스를 끌어내기 위해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응하지 않자 이판사판으로 자기 군대가 있는 늪지대와 카시우스 군대가 있는 고지대 사이의 요새화 지대로 병력을 투입시켜 승리를 거둔다. 카시우스는 9천명의 손실을 입어 1차전에선 공화정 군에 유리했지만 워낙 난전이 벌어졌고 흙먼지도 자욱한데다가 브루투스 군이 있어야 할 장소에 없자 패배했다고 판단한 카시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여파는 상당히 컸는데 삼두정군은 안토니우스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군사적인 면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던 반면, 브루투스 쪽은 그 역할을 해줄 카시우스가 자살해버리면서 균형이 무너졌다. 브루투스는 군사적인 능력이 일천했고 휘하 병사들이나 동맹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다. 병사들을 카리스마로 휘어잡은 상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재물로 이들을 붙잡아두는 수완도 없었다. (삼두정 군이 군단에 2만 5천 데나리우스, 병사 개개인당 5천 데나리우스를 보너스로 약속하여 힘든 보급 상황에도 군대의 사기가 올라갔던 반면 브루투스는 겨우 1천 데나리우스를 약속했을 뿐이었다) 브루투스는 고지대를 점거하고 있다는 입지를 이용해 요새를 여러 개 건설하여 적을 말려죽인다는 지연작전을 계속 밀고 가려고 했지만 20일 넘게 지연작전을 벌여댄 끝에 휘하 병사들의 불만이 위험수준에 이르렀고 동방에서 고용한 용병들과 일부 병사들이 탈영을 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우스 군이 1차전 이후 3주 동안 서서히 진군하면서 브루투스 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위치에 이르게 되자 브루투스는 유리한 고지를 점거하고 있음에도 먼저 싸움을 걸지 않으면 안 되었고, 2차전이 개시된다. 브루투스는 삼두정군을 거세게 밀어붙였으나 병력이 너무 분산된 탓에 삼두정군의 주공을 저지하지 못해 전부 돌파당했다. 2차전 결과 브루투스가 남은 군대를 집결시키자 3개 군단만이 남았고 패배를 깨달은 브루투스는 자살하여 전투가 끝났다.
이후 삼두는 영토를 배분한다. 안토니우스는 가장 부유했던 동방을 선택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선택했으며, 레피두스는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를 고른다.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을 고르긴 했지만 아직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와 샤르데냐 섬을 점거하고 로마의 곡물 공급을 끊어버릴 정도로 위협을 가하고 있었기에 이탈리아와 갈리아만이 세력권으로 남아있었다. 필리피 전투 직후에는 레피두스가 가장 세력이 강했지만 (자신의 임지인 히스파이나와 갈리아에 있던 현역병/퇴역병 군단이 7개나 되었기 때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제대로 된 싸움하나 없이 세력이 줄어들고 만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의 해상봉쇄에 따른 로마의 식량난에 퇴역병들에게 지급할 토지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치를 썩혔고, 이탈리아 본토의 안토니우스 파인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일으킨 페루시아 전쟁을 해결해야 했다.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아내를 지원했다면 옥타비아누스는 끝장났겠지만 희한할 정도로 본토의 지지기반 유지에는 소극적이었고 결국 제압됐다.
한편 동부에 그대로 머무른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는지 판단력이 정상이라면 자기 세력의 지지기반을 깎아먹을 결과를 초래하기에 해서는 안 되는 삽질을 연거푸했다. 파르티아 원정을 갔다가 동맹인 아르메니아에서 지원군을 보낸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후퇴하자 아르메니아를 공격해 평정하게 되는데 이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로마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에게 분할해주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해서 지지를 크게 잃게 된다. 그리고 서부의 교통정리가 끝난 옥타비아누스가 본격적으로 안토니우스를 제압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자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서 싸우자는 클레오파트라의 말만 듣고 그리스의 악티움에서 후퇴하는 최악의 삽질(악티움 전투)로 측근인 참모부터 일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대규모로 모반을 일으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는 사태가 터져 세력을 거의 다 상실했고, 재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자살한다.
이렇게 경쟁자들이 전부 퇴장하면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전체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편집]
이제 모든 방해자가 사라진 옥타비아누스는 철저하게 대국민 사기계획을 실시하게 된다.
우선 '공화정 복귀 선언'을 통해 모든 권력을 내려놓는다는 개구라를 친다.
내전이 끝났으니 이제 원로원의 권한을 원래의 수준으로 되돌리고 민회를 정상화 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원로원은 기립박수를 치며 그에게 최고존엄 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최고존엄이 라틴어로 바로 "아우구스투스(AVGVSTVS)" 다. 이 때 나이가 드디어 30살...
그렇게 분명 아우구스투스가 공식적으로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서 일개 원로원의원으로 됐는데도
그의 명예와 (개인소유인 이집트로부터 나오는 무한의)부와 인맥, 지지율 등에서 비롯된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거수기 집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합법적으로 군통수권(군대)과 호민관 특권(거부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 2가지의 특권을 자신이 지명한 시민에게 양도할 권리까지 획득하게 된다.
원래부터 카이사르파였던 민회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이며 아우구스투스의 법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과시켰다.
겉으로 보기엔 의회의 표결을 거치고 민회의 승인을 받는 공화정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론 아우구스투스만이 나랏일을 독점하는 최고존엄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역사학에서는 이를 원수정. 그리고 사실상 황제정으로 부르게 된다.
실제로 그는 50여년에 걸쳐 조금씩 눈치를 못 채게 이렇게 권한을 자신이 독점하도록 확대시켜 나갔다.
그러면서도 원로원 속주를 정해서 원로원 권한도 챙겨주기도 했는데 대게 원로원 속주는 로마식으로 완전히 포맷된 지역이었고
국경지역이나 유대속주 같은 신경써야 할 곳은 황제속주로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게 만들었다.
이런식으로 아무나 앉혀놔도 굴러가는 일은 원로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중요한 건 다 자신이 정했다고 보면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권한이 필요한 이유도 천천히 만들고 의원들을 최대한 설득시켰다.
진짜 방해가 된다 싶은 의원들은 따로 정중하게 모신 뒤
푸틴이 값 비싼 홍차를 내오듯 정성스러운 대접을 하며 감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급 능력자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원로원 의원들은 수십년간 그냥 놀고 먹던 시절이라고 보면 된다 (레알 팍스 로마나)
아우구스투스가 이런 식의 대국민사기를 친 이유는 그냥 발터에 맞기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말년[편집]
본인은 일찍 죽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엄청나게 오래 살아서 최측근들이 다 먼저 죽어버렸다.
자기 핏줄들도 다 먼저 죽어버리는 바람에
NTR해서 데려온 아내인 리비아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았던 아주 튼튼한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죽을 때 내 연기가 발연기였냐 어땟냐하며 자신의 대국민사기극을 사실대로 털어놓고는
그래도 좋았잖아 하면서 자기합리화를 하다가 억하고 가버렸다.
업적[편집]
행정[편집]
대체적으로 앞으로 이어질 로마제국 1,500년 체제의 기본을 혼자서 전부 닦아놓은 사기캐라고 보면 된다.
제국뿐 아니라, 오늘날 가장 거대한 종교집단인 로마 카톨릭 체계 역시 아우구스투스식 로마 행정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상비군 체계 정돈 - 군축을 통해 상비군을 30만명으로 줄이고, 사병 복지 정책을 강화하여 사상 최초의 군퇴직금, 군연금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연간 군예산을 편성하고 예산에 맞춰 전군을 운영했는데, 이는 근대이전까지는 로마가 유일했다.
로마시 경찰청과 소방청 창설 - 군대같은 조직도를 가진 본격적인 공무원 집단으로 만들어 로마시의 치안 수준을 높임
우편제도 - 원로원이 돈없다고 거짓말하며 시간을 끌자 자신의 돈과 개인영지인 이집트에서 나오는 부로 가도망을 정비하고 원로원에게 빅엿을 먹이고 역참제도를 창설했다.
세금 정책 - 이전엔 재정관리 및 세금징수직(감찰관:켄소르)이 원로원 귀족들의 필수코스로
개나 소나 이 직업으로 한 밑천 챙겨먹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서 세금 줄줄이 다 새나가는거 감지하고,
직접 호구조사를 통해 (재위기간중 3번 실시했는데 이중 한번이 기독교 애들이 예수가 실존인물임을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가 된다)
세수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원로원 귀족들이 아닌 자기 직속의 법무 실무자들을 켄소르로 임명해 국고낭비를 사전에 막게 했다.
세금은 수입의 1/10 로 정해는데 기독교에서 이를 따라해 십일조 헌금이 생겨났다.
다만 켄소르들이 정직하게 1/10 만 걷은게 아니라 훨씬 많이 뜯어먹은 경우가 많았다.
외교[편집]
카르헤 전투 때 어떤 병신 금수저가 빼앗겼던 군단기를 파르티아와 화의를 통해 돌려받았다.
파르티아 입장에서도 통일된 로마제국의 신경을 건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군말없이 돌려줬다.
군단기는 로마사람들에게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라서 돌려받은 것 만으로도 개선장군급 업적이 되버렸다.
문화[편집]
시인, 문학가 적극 후원. 측근인 마이케나스를 통해 문학,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해서 라틴문학 황금기를 이룩한다.
오늘날 기업인들의 문화 후원활동을 뜻하는 메세나 운동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문학인들이 국뽕 잔뜩 빨던 시절이기도 했다.
오점[편집]
군사 능력 똥망[편집]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능력이란 가감없이 정말 별볼일 없었다. 본인이 직접 지휘를 하면 대패를 한다든지 고전하는 경향이 강했다. 필리피 전투에서는 병으로 골골대다가 겨우 전투에 나섰으나 도발에 넘어간 쪽이 먼저 돌격하면 진다는 당대의 상식을 깨고 브루투스한테 개쳐발렸는데 1만 6천명 손실에 군단기를 3개나 빼앗겼다고 하니 대참패였다. 이후 폼페이우스의 작은 아들인 섹스투스를 처리하기 위한 시칠리아 전쟁에서도 아그리파가 달려오기 전에는 또 개발렸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군사적인 능력을 보완해줄 아그리파를 붙여줬고,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인 업적은 사실상 전부 아그리파의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일례로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쩔쩔맸는데(결혼동맹도 시도하고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사기쳐서 빼오는 등 손을 많이 썼다), 아그리파가 갈리아에서의 전투를 마무리하고 나서야 나울로커스 해전에서 섹스투스를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섹스투스의 마지막 본거지인 메사나를 함락시키고 8개 군단의 항복을 받아낸 건 아우구스투스가 아닌 레피두스였다.
하지만 영토 정책에선 떨어지는 군사능력과 달리 확장정책을 펼쳤는데 이게 망해버린 게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 때 많은 병사들과 함께 게르마니아 지역을 관리할 인원까지 같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아우구스투스 사후에도 계속 원정은 진행되었으나 결국 확장은 그만두고 라인강으로 물러나게 된다.
성격[편집]
남아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 등을 살펴볼 때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먹어줄 만한 꽃미남이었지만, 성격으로는 정말로 친해지기 매우 어려웠다.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주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는 카리스마와 함께 다른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는 능력이 무척 뛰어났던 반면에 아우구스투스는 남의 감정에 무관심하면서 차가운 괴물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까칠하고 이성적, 논리적으로만 판단하고 행동해서 인간적인 매력과 호소력은 크게 떨어졌다. 여기에 자기 속마음을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아무에게나 정을 주지 않았던 반면, 겉으로는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는 듯한 연기에도 뛰어나서 정적들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정리하면 한 개인으로서는 친해지기 극히 어려운 성격이었다.
당대의 보수적인 로마인 가장들이 가부장권을 행사하여 자식들에게 명령하곤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마치 신민들을 다루듯이 통치했다. 따라서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정치적인 판단이 조금이라도 들어갈 여지가 있다면, 사랑한 양아들이나 손자가 한 결정이라도 전부 뒤집혔고 그의 뜻대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감정이 전혀 없는 냉혈한은 아니어서 유일한 친자식인 대 율리아가 어린 시절에는 손수 기르고 챙겨줄 정도로 정을 쏟았으나 자란 뒤 온갖 스캔들을 일으키자 죽기 전에 대 율리아를 낳은 걸 후회했다고 하며, 그 말을 들은 양아들 티베리우스는 잠시나마 아내였었던 그녀를 동정했다고 한다. 여기에 양아들들이나 손자들의 사소한 고민거리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준다든지 웅변 연습하는 걸 직접 봐주는 등 의외로 가정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차가운 점 때문에 그와 성격이 가장 비슷했던 양아들 티베리우스조차도 전 아내인 대 율리아와의 불화와 어린 친아들의 요절로 인해 지쳐버린 끝에 만사를 다 던져버리고 로도스 섬으로 들어간 뒤 자연인으로 은퇴선언을 하고 8년간 로마에는 얼씬도 안했다는 걸 생각하면 가까운 이들이라도 계속 견딜만할 성격은 아니었던 듯 싶다.
사기[편집]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은 왕이라는 개념에 거부감이 강했던 당시 로마의 상황에 맞게 '회복된 공화정', 즉 카이사르의 내전 이전의 공화정 체제를 복원했다고 선전한 뒤 실질적인 권한은 여러가지 '특권'을 가진 아우구스투스 본인이 쥐어 옛 공화정 체제에 올라탄다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것이다. 이 때문에 4세기에 공식적으로 전제정(도미나투스)가 확립되기 전까지 황제의 지위는 취약점이 굉장히 많았으며(세습으로 지위를 얻어도 어느 정도 정계와 군부의 지지가 요구되었고, 최고 지휘관이 곧 국가원수라는 개념 등) 로마의 민속놀이라는 개드립의 유래가 된 틈만 나면 뻥뻥 터지는 내전의 원인이 됐다.
참고로 로마제국의 '황제(Caesar)' 라는 직위는 로마 후기 쯤 되서야 공식화 되었으며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는 왠 게르만족이 로마 계승을 우겨대서 서로마 제위를 이어받아 '황제(Kaiser)'를 칭하게 되고,
동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는 왠 슬라브족이 로마 계승을 우겨대서 동로마 제위를 이어받아 '황제(Tzar)'를 칭하게 된다.
이렇게 야매로 계승된 서로마 제위는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반강제적으로 해체됨으로서 완전히 소멸되었고
마찬가지로 야매로 계승된 동로마 제위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제국이 뒤엎어짐으로서 완전히 소멸한다.
구라로 시작해서 구라로 끝난 로마제국 제위의 위엄...
달력을 개판으로 쳐만든 새끼[편집]
지 생일이 있는 8월이 30일이나 되는데도 굳이 자기 생일이 있는 달은 꼭 31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일념하에 안그래도 날짜 모자라 죽겠는 2월에서 하루를 빼다가 8월에 박아넣었다.
일년 중 가장 뜨거워 뒈지겠는 달을 하루 연장시킨 씹새끼다. 2월 30일은 이 새끼 때문에 사라진 날이다.
달력 하루 바꿨다고 더운 날이 안더워지나? 문과는 이래서 안된다.
배스킨라빈스 무료 사이즈업 개이득 ㅎㅎ
기타[편집]
"왕"이라는 단어에 극혐하는 로마인들이라 대신 가문이름인 카이사르,
오늘날 국방장관 정도에 해당하는 임페라토르로 스스로를 호칭했는데
후대에 가서 이 단어들은 모두 왕보다 더 격이 높은 동아시아의 '황제'에 해당하는 단어가 되버린다.
또한, 후빨러들이 똥꼬 핧는답시고 8월달 명칭을 그의 이름을 따서 최고존엄으로 바꾸는 바람에
현대까지 서양권에서는 8월달 명칭이 최고존엄(영어로는 August)으로 불린다.
이 8월달의 존엄을 세우기 위해 31일까지 억지로 늘리려고
2월에서 억지로 날짜를 빼가는 바람에 2월이 28일까지 밖에 없다는 루머가 있다.
비실비실대던 허약 빵셔틀 체질(덕분에 의도적으로 야심을 숨기기는 좋았다)이었는데도 오래 살아서 오래 해먹었다.
동갑이자 건장남이었던 아그리파가 훨씬 일찍 죽었다.
로마인이었음에도 몇 안되는 금발로 유명해서, 이 시대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 흑발이나 갈색으로 캐스팅해도
이놈만은 금발배우가 맡았다.
저세상에서 카이사르한테 쳐맞았을지도 모른다. 카이사르의 연얘편지 야설 등을 신격에 안어울린다면서 다 없애버렸기 때문에
- ㄴ사실 카이사르한테 뚜까맞는다면, 그보다는 카이사르가 그린 빅 픽쳐를 핏줄에 집착해서 다 망가뜨린 '원수정' 체제 때문에 쳐맞을 확률이 더 높다.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여러명 있으면 아우구스티스라 카더라
자기 친구인 아그리파에게 자기 친딸 대 율리아르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양아들로 입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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