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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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고구려와 수나라가 나라빵 걸고 일기토를 찍다가 결국 수나라가 패배하고 멸망한 병림픽
만약 수나라 113만명 동원이 사실이면 이는 전근대 세계사에서 최대 규모의 전쟁이 된다.
제1차 고구려-수 전쟁[편집]
589년 수문제가 200년이 넘는 남북조 시대를 통일하고 수나라를 세웠는데 변방에 있던 돌궐과 고구려가 존나게 거슬려서 그나마 덩치가 상대적으로 적던 고구려를 치려고 각잡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이 소식을 듣고 전쟁준비를 하자 이를 빌미로 598년 30만을 동원해 수륙병진으로 쳐들어왔는데 등신같이 여름에 쳐들어와서 수군은 평양으로 바로 오려다가 폭풍우를 만나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철수했고 육군 역시 요하까지는 왔는데 장마를 만나서 전염병이 돌고 식량이 떨어져서 결국 철수한 희대의 병신짓이었다. 실질적으로 전투는 한번도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그 해 9월 철수하면서 살아 돌아온 인원은 처음 출발한 병력의 1~20%밖에 안됐다고
거기다가 30만의 병력에 충격을 받은 영양왕이 형식적으로 "죽을죄를 졌으니 요동분토의 아무개로서 앞으로 조공을 바치고 안깝치겠습니다"라는 서신을 보내 형식적으로 항복하여 수문제 역시 이 항복문서에 정신승리하고 전쟁을 끝냈다.
결과[편집]
1차 전쟁이 워낙 병신같이 끝나서 충격을 받은 수문제는 두번다시는 고구려 침공을 시도하지 않았고 고구려 역시 30만의 병력이 쳐들어오던 것에 놀라서 깝치지 않고 조공보내며 그렇게 잘 살고 있었으나...
수나라에서 수 문제의 아들이었던 양광이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왕위을 차지하여 수양제가 되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수양제는 아버지와는 달리 욕심과 허영심이 많던 폭군이었기에 아버지가 중단했던 대운하 사업을 더 큰 스케일로 늘려서 재개하고 궁궐도 새로 짓고 남만도 정벌해서 복속시키고 돌궐까지 정벌하는 등 팽창주의를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수나라의 팽창주의에 잔뜩 겁먹은 고구려는 동돌궐과 동맹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 수양제가 제후국들을 시찰하러 가있던 참이라 들켜버리게 된다. 그래서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니들끼리 손잡으려던거 눈감아줄테니까 니네 왕이 직접 와서 나한테 조아리면 봐줌. 안그러면 니네도 돌궐처럼 박살낼꺼임"이라고 최후통첩을 날렸고 이를 들은 영양왕이 좆까를 시전하며 또다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제2차 고구려-수 전쟁[편집]
변방의 좆만한 나라가 자신의 자비에도 좆까를 시전하자 야마가 돌아버린 수양제는 곧바로 전쟁준비를 시작했고 대규모로 쳐들어가기위해 수양제가 자신이 직접 전쟁 지휘를 하여 밤낮으로 300여척의 군함을 만들도록 시키고 113만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612년 고구려를 향해 출발했다.
요하 전투[편집]
612년 3월 15일 수나라의 대군은 요하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고구려와 첫 전투를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숫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용감하게 싸워서 2달동안 버텼으나 끝끝내 인해전술에 당하고 수나라 대군은 요하를 건너게 된다.
요하를 건넌 수나라 군대는 곧바로 요동성을 둘러싸며 고구려로 통하는 모든 보급로를 끊어 굶겨죽이기 작전을 했으나 이미 청야전술에 능했던 고구려 성은 단 한곳도 항복하지 않았다
요동성 전투[편집]
612년 5월 16일 요동성을 포위한 수나라 군대는 밤낮으로 요동성을 공략했지만 이미 한나라때부터 천예의 요새로 불리던 요동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공성전만 하다가는 후방에서 보급로가 끊길까봐 두려워한 수양제는 요동성은 포위만 하고 나머지 군대들을 요동 등지의 성들을 공략하게 지시했으나 요동의 20개 성들 중 한곳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대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군 3개 군이 몰살당한다.
이러다가 요동에서 아까운 병력들만 다 날리게 생긴 수양제는 초조해져서 요동 함락은 포기하고 포위만 하고 우중문과 우문술을 시켜 곧바로 평양성으로 우회하여 진격하게 시킨다.
평양성 전투[편집]
요동 공략에 실패한 수나라 군대는 곧바로 30만 별동대를 꾸려 평양성으로 진격하였으나 그 과정에 군량미 보급을 한 병사가 자기 먹을 분량의 식량을 자기가 직접 짊어지고 진격하라는 병신같은 지시를 내려서 결국 군량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압사하거나 무거워서 오는 도중에 땅에 파묻은 병사들이 속출했고 평양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수나라 군대는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보급을 지원해야할 수군까지 평양성에 정박해있다가 수군을 통솔하던 내호아가 공을 세우기 위해 독단으로 좆지랄하다가 궤멸당해서 평양에 도착한 30만 별동대가 먹을 식량이라고는 풀 한포기도 없었다. 심지어 고구려의 전술 역시 청야전술로 성 밖에는 ㄹㅇ 말 그대로 풀한포기 하나 남아있지 않아서 훔쳐먹을 것조차 남아있기 않았다.
살수대첩[편집]
상황이 좆됨을 직감한 우중문과 우문술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영양왕이 을지문덕을 시켜 거짓 항복을 하였고(사실은 염탐하러 들어간거였고) 우중문과 우문술이 "항복할꺼면 왕이 직접 나와서 항복해라!"고 하여 을지문덕은 ㅇㅋ하며 다시 평양성으로 들어갔는데 그 이후로 다시 나오지 않았고, 속았다는것을 깨달은 우중문은 당장 평양성으로 쳐들어갈것을 주장했으나 우문술은 이미 병력 꼴이 말이 아님을 알고 철수를 주장했다.
그렇게 둘이서 옥신각신하면서 싸우고 있는데 을지문덕이 이를 틈타 군사를 이끌고 나와 도발하였고 빡친 수나라 군대는 추격전을 벌이며 쫒아갔는데 을지문덕은 싸우는척 하다가 거짓으로 패하며 다시 달아나는 것을 반복하며 일부러 수나라 군대의 기를 살렸고 신중론을 펼치던 우문술도 생각이 바뀌어 직접 군대를 동원하여 을지문덕을 쫒았다. 그렇게 을지문덕은 점점 30만 대군을 평양성 외곽으로 유인하여 살수를 건너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이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한편의 시를 보내는데 이 시가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이다. 거기에 추가로 우문술에게도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만약 군사를 물리신다면 마땅히 왕을 모시고 항복하겠나이다"라며 철군을 요청했고 이미 계속되는 승리로 신이났던 우문술은 우중문에게 철군을 지시했고 우중문 역시 이미 공은 공대로 세웠고 평양성 함락은 어렵다고 보고 7월 살수를 건너 되돌아가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때!
정의가 구현되었습니다! 이 문서에서는 사실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정의를 존나 드물게도 구현한 보람찬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
우중문의 대군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때 을지문덕의 고구려군이 갑자기 후방에서 들이닥치기 시작했고 이미 몇날 며칠을 굶은대다가 계속되는 전투로 지칠대로 지쳐있던 수나라 대군은 작살이 났고 전방위로 살아남기 위해 도망만 칠 뿐이었다.
결국 30만이 넘던 수나라 별동대는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하며 다시 요동으로 살아남아서 돌아간 군사의 수는 고작 2천 7백에 불과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래없는 일방적인 대패였다.
결과[편집]
평양성을 함락시키라고 30만이 넘는 정예 별동대를 보내줬더니 단 1%만 살아돌아온 꼴을 보고 수양제는 딥빡하여 그자리에서 우중문, 우문술, 내호아를 삭탈관직하고 직접 군사를 지휘했던 우중문은 쇠사슬에 묶어 수나라로 압송시키고 곧바로 하옥시켰으며 우중문 역시 홧병이 나서 병사했다.
결국 원정을 나온지 8개월만에 30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은 수양제는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113만명의 대군으로 고구려의 단 한개의 성도 함락시키지 못한 전설로 남게되었다.
113만명 진위 여부[편집]
이 문서는 확고히 검증된 진실일 수도 있고 교묘하게 거짓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얼핏 봐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를 읽을 때는 안심하셔도 되니 마음껏 편안하게 보셔도 됩니다. 하지만 만약 이 내용에 낚여서 피해를 볼 경우 원 작성자를 굴다리로 불러내서 존내 패버릴 것을 추천합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응?? 사실인가??? 시발 모르겠다." |
113만은 현대 헬지나도 운용 불가능한 병력. 물론 대군이었던게엔 틀림 없음 험준한 지역이라 방어만 잘해도 침입자가 알아서 돌아가기때문에 전투력 측정이 어렵다. 그래도 농사짓기 퍽퍽한곳에서 부족한 생산력으로 쌀밥 좀 먹는 백제, 신라, 짱께들한테 근근히 엿을 먹인걸보면 한따까리하는 것은 맞다 ㅇㅇ
ㄴ걍 심심해서 대충 계산. 1인 소비 칼로리, 전쟁터이긴 하지만 대충 당시 평균 키와 무게 고려해서 하루에 2000 칼로리 = 쌀 대략 500g
솔까 기초대사량만 1,500 ~ 2,000이라 군장 따위를 가지고 갈 때 필요한 에너지 계산하면 호빗 난쟁이 새끼들이라도 더 쳐먹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계산하기 좆같으므로 넘어감 (실제로 공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략 키 150 무게 50 정도로 잡은 계집애 수준 호빗 새끼들도 기초대사량만 1,400 ~ 1500 나옴.)
100만명이 소비하는 쌀 무게 = 0.5 kg X 100만 = 500톤 = 500000 달러 = 5억
(쌀 1kg 가격은 변동될 때도 있고 걍 귀찮으니까1kg = 1달러)
1달 동안 전쟁을 지속할 경우 먹는 것으로만 들어가는 돈 = 5억 x 30 = 150억원
1년 동안 전쟁을 지속할 경우 먹는 것으로만 들어가는 돈 = 150억원 x 12 = 1800억원
무기 같은 건 중국 새끼들 당시 무기나 갑옷 가격 찾기가 어려워서 서양 고대와 중세 무기와 갑옷들 가격 고려해서 당시 당나라 군대 기준에 맞게 대충 싸게 맞추니까 1인당 100만 정도
100만 X 100만 = 1조
말이나 공성병기, 야전에 필요한 보급품들 이딴 것들은 귀찮으니까 생략.
세금은 청나라 데이터에다 인구도 걍 5000만으로 가정.
http://www.chogabje.com/board/column/view.asp?cpage=0&C_IDX=59790&C_CC=BC
인구는 여기 있는 자료 기준으로 3억 5000만에 일본 기준으로 1000만 석이고, 양제의 세금 버프로 300만 석으로 가정.
일본 기준에 따라 1석에 150kg로 가정. 돈으로 환산하면 15만 X 300만 = 4500억
여기서 국방비로만 20%씩 갈겨도 최소 10년 정도는 모아야 출발이 가능한 원정.(수나라는 40년 동안 존재) 더구나 수양제 새끼는 각종 공사 벌이고 폼잡느라 돈낭비하고 다녔다.
물론 식칼 정도만 쥐어주는 수준으로 100만은 가능할 듯.
뭐 113만은 오바고 대략 80~90만? 아무튼 100만을 칭할 정도의 수준은 되었던 것 같다. 당장 대운하 건설에 투입되었던 것만 수십수백만명인데 그걸 연단위로 굴릴정도면 전쟁에서도 크게 못굴릴건 없다. 뭐 오늘날 중국을 생각하면 중국에서 고구려 거리가 꽤 머네 할 수도 있지만, 수나라 지도를 보고 수나라의 중심지가 북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보급로가 니들 생각하는 것만큼 수만리 단위로 길지는 않다. 대략 한 천킬로미터 정도? 중간중간에 보급창도 있고, 무엇보다 고대 전쟁 특성상 오늘날의 군대에 요구되는 보급량 보단 단위 장병당 필요보급량 자체가 많지 않다. 오늘날 군대는 탄약부터 시작해서 기름에 온갖 물품을 가져가야 되지만, 옛날 군대는 약간 정도는 현지보급이 가능한데다 무기같은건 화살 빼고는 잘 소모되지 않고 적병 것을 노획해 쓸수도 있으며 식량과 말 사료 정도만 있으면 되거든.
ㄴ수나라 조세로 볼 때 백만 전투병 운용 불가능함. 군량과 무장 비용까지만 합쳐도 기간 동안 명나라 1년 조세 규모보다 드는 비용이 큼.
ㄴ 그거 데이비드 A. 그라프도 중국측 기록 읽어보고 60만 썰 주장했는데, 수양제 병신 새끼가 그 많은 대군을 다 데려가서 죄다 뒤졌다카더라, 지 애비가 남긴 막대한 국고를 다 날렸다카더라 뭐 이딴 식으로 쓰여져 있어서 비난 목적으로도 봄. 글고 수서는 솔까 한족 행세(?)하던 선비족 새끼들의 입김이 작용해서 유목민족식 카더라도 존나 많다. 고구려 패잔병들이 경상도를 정복하고 신라를 세웠다! 신라는 백제 속국이다! XX 신라 왕은 백제인이다! 백제와 신라는 왜를 섬긴다! 카더라 이딴 씹소리들이 일상. 앰창년들이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막 지름.
백제 신라 새끼들은 사실상 근초고왕 이후 고구려한테 눌려지냈고 짱개들은 뭐... 사실 수당 이전까지만 해도 관구검 제외하고는 별로 부딪칠 일이 없었다. 당장 오호십육국 그 헬게이트 시대에 옆나라 족치기도 바쁜데 수천리 너머의 고구려까지 원정갈만한 한가한 국가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 험준한 지형이라서 잘막았다기 보단 너무 멀어서 보급선이 열라 길어졌다는게 문제. 실제로 고수전쟁 보면 수나라도 보급선이 좆같아서 기껏해야 몇주 침공하다 말았고 고당전쟁은 10만명 정도의 나름 소규모(?)로 처들어왔던 전쟁이다. 한마디로 오래있으려면 병력 수를 줄여야 하고 병력수를 늘리면 그만큼 전쟁할 수 있는 기간이 줄어듬. 요동성 보면 거의 평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막았는데, 험준한 지형 어쩌고는 그냥 헛소리라 보면 된다 당장 삼국지 시대 촉나라가 고구려보다 백배는 험준했는데도 불구하고 뚫을 사람은 다 뚫었음.
외국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60만 이하로 보고 있음.. 영문 위키피디아 란을 국뽕들이 계속 테러 중임. 고서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건 멍청한 짓이며 고수 113만 기록보다 더 상세하고 자세한 페르시아 500만대군 기록 역시 현대 세계에서는 부정됨.
ㄴ외국에서 60만정도로 얘기하는 학자들은 보급부대들 빼고 얘기한거다. 전투랑 관계없는 보급병력들까지 다 포함하면 100만정도로 보고 있다.
일단 고서의 기록들 보면 전투병력이 113만 가량이고, 병참 부대가 그의 2배라고 하니, 도합 300만이 넘는 대군이라는데, 서구권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최대 60만으로 추정하는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것이, 서구권 역사학자들은 '전투병이 최대 60만'이라고 추정한다. 전군 도합 60만이 아닌 '순수 전투병력만'. 서구권에서도 비전투 병력까지 합하면 최소 100만이 넘을 것이라고 보는게 정설이다.
그런데 중국 내에서 통일 직전 국가 혼자 100만 찍은 비수대전이 있는데 여수전쟁에서 100만 끌어왔을거라는 말도 크게 이상하진 않지 않음?
비수대전은 디시위키ㅔ 없어서 여기에 여수전쟁이랑 엮어서 물어봄
제3차 고구려-수 전쟁[편집]
2차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개박살이 난 것에 분통이 터진 수양제는 4개월만에 다시 40만 대군을 이끌고 613년 고구려를 또다시 침공한다.
2차 전쟁을 교훈삼아 이번에는 장수들에게 재량권을 부여하고 요동성을 밤낮으로 공략하였으나 이번에는 워낙 세차게 몰아붙여서 요동성이 ㄹㅇ 함락직전까지 갔으나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고 포대와 망루를 동원하여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성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요동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2차 전쟁과 마찬가지로 별동대를 구성해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시켰고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고구려의 ㄹㅇ 위기였으나 별동대가 압록강에 다다랐을때 보급을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계속되는 전쟁과 수양제의 폭정에 반감을 사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수양제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양현감의 절친이자 수양제의 참모였던 곡사정이 고구려에 투항해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가 퇴각한다는 것을 알게되고 뒤를 쫒아 기습하였고 수천의 군사를 죽이는 업적을 세웠다.
제4차 고구려-수 전쟁[편집]
일단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수양제는 곧바로 비호아를 시켜 수군을 동원해 614년 고구려를 치게 했으나 이미 3번의 전쟁으로 양 국 둘 다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비호아의 수군이 고구려의 비사성을 함락시켰으나 수나라 내부의 계속적인 반란으로 수나라의 육군이 동원되지를 못했다.
고구려 역시 지칠대로 지쳐있어서 영양왕이 고구려로 투항했던 곡사정을 다시 수나라로 송환시키는 조건으로 수나라에 화친을 제안했고 수양제는 이를 받아들여 철군을 했다. 이렇게 그 처절하고 끔찍한 여수전쟁은 이제서야 막을 내렸다.
결과[편집]
수양제의 계속적인 폭정과 고구려에 대한 집착으로 막대한 국력을 손실한 수나라는 결국 끊임없는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에게 피살당하면서 수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 역시 계속되는 전쟁으로 상당한 양의 국력을 손실하게 되고 이후 대중외교에 깝치지 않고 소극적으로 대하게 되고 일단 굽히고 들어가게 된다. 수나라가 망하고 세워진 당나라와도 이 기조를 쭉 유지하며 평화롭게 지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실 다 떠나서 4차까지 이어진 전쟁 동안 인명 200만 이상을 갈아넣었는데 고작 성과가 비사성 하나다. 도저히 수지타산이 안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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