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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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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한반도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병존해 있던 시기. 이름은 삼국 시대지만, 저 세 나라만이 존재했던 시기는 삼국 시대 전체로 보았을때는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1] 역사 구분으로는 고대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건국 연대(신라 : 서기전 57, 고구려 : 서기전 37, 백제 : 서기전 18)로부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


명칭에 대해서[편집]

이 시대의 명칭이 "삼국"시대이긴 하지만, 가야가 완전히 멸망하고 네임드국가인 만 남아서 한반도 패권을 다투다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 겨우 98년밖에 안되는 기간이다.

물론 어쩌다보니 저렇게 명칭이 고착화되긴 했지만, 차라리 한반도의 전국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알맞지 않았을까 싶다. 삼국시대라고하니까 비주류 국가 뿐만 아니라 나름 네임드인 가야마저도 일반 대중들에겐 쩌리로 분류되는 참사가 현재진행형이다.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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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만주지역의 예맥(濊貊)족과 한(韓)족 사회에는 철기문화가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어로·목축과 함께 농경이 크게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강되었고, 새로운 전술인 기병전(騎兵戰)의 등장으로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안으로는 인접한 정치세력 간의 통합이 촉진되고, 밖으로는 요동군·현도군·낙랑군·대방군 등 중국의 식민지 세력과 충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고대 왕권이 성립되고 그 지배력도 강화되어 갔다.

고구려가 성장한 동가강(佟佳江) 유역과 압록강 중류 지역인 통구(通溝) 일대는 가장 먼저 정치세력이 성장하여, 이미 위만조선 때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세력이 성립되었던 지역이다. 또, 서기전 82년에는 이 지방의 지배세력이 현도군을 몰아내어, 한(漢)나라는 서기전 75년 현도군을 요동지방의 흥경(興京)노성(老城) 방면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 요충 지대에서 성장한 고구려는 태조왕(53∼145) 때 동해안 지역에 진출하고 청천강 상류 지역을 확보하였으며, 계속해서 요동지방을 위협하였다.

고구려는 이같은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5부에 대한 국왕의 지배권을 상당 부분 확립하고 책구루(幘溝漊)를 설치하여 한의 정치 경제적 간섭을 차단함으로써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통구를 잃은 한나라는 서안평(西安平 : 지금의 鳳凰城)에서 압록강 하류를 건너 낙랑군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였다.

신대왕은 다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는 등 교통로를 위협하더니, 311년(미천왕 12) 서안평을 확보하고, 313년에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북방에서 중국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하면서 그 세력을 구축하며 성장해 나갔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약 100년 늦은 고이왕(234·285) 때 고대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백제의 성장에 위협을 받게 된 낙랑군은 맥인(貊人 : 동예 세력으로 추정)과 함께 백제를 자주 침입하였고 책계왕을 죽였으며, 자객을 보내 낙랑군의 변경을 빼앗은 분서왕을 죽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백제 역시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세력과의 힘든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신라는 왕호로 볼 때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시기에 이어 연장자인 연맹장을 뜻하는 이사금(尼師今) 시기를 지나 대수장을 의미하는 마립간(麻立干) 시기에 이르러 고대왕국을 이루었다.

진한의 한 지역국가에 불과했던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은 3세기 초부터 가야 등 주변 세력들과 대항하는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낙랑군과 연결된 종족들, 가야와 가야의 영향력 하에 있던 왜(倭), 한강 상류 지역을 개척하고 있던 백제 등과 자주 충돌하면서 성장하였다.

신라 고대왕권의 성립은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내물마립간(356·401)때의 일로, 고구려보다 약 200년, 백제보다 약 100년이 늦다. 신라는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 계속되어 이들이 신라에 미치는 압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고대국가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

고구려는 낙랑군을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식민지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4세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한족(漢族)의 세력이 중원에서 약화되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강력한 정복국가를 형성하여 이들의 정복 사업은 고구려에까지 그 손길을 뻗쳐 왔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342년(고국원왕 12) 연(燕)의 침략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었고, 371년에는 이러한 위기를 틈탄 백제의 북진을 막으려다 왕이 평양에서 전사하는 불운을 맞았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남북 양면에서 큰 압력을 받았으나 370년 연나라를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친교를 맺으면서 일단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국제관계의 안정 구축과 더불어 내치에 힘을 써 태학(太學)을 세우고 율령을 공포하며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안팎으로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정비된 힘을 바탕으로 광개토대왕 때는 요동을 확보하고 한때 요서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장수왕대에 이르러서는 475년(장수왕 63)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점령하고 아산만과 죽령을 연결하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중국이 남북조(南北朝)로 분열되어 있는 동안 고구려는 북조의 위(魏)와, 백제는 남조의 송(宋)·양(梁) 등과 연결되어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북위·고구려·신라를 연결하는 세력과 송·백제·왜의 연결 세력이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삼국의 관계사는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2) 때부터 장수왕(413∼491)·문자명왕(492∼518) 때까지의 약 130년간으로, 이 때는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펴 삼국 관계를 좌우하던 시기이다.

제2기는 후발 세력이었던 신라가 큰 발전을 이룬 법흥왕(514∼529)·진흥왕(540∼575) 때의 약 60년간이다. 신라는 돌궐족의 침략을 방어하느라 고구려의 군사력이 북서 지역에 집중된 틈을 타서 백제와 더불어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고, 이어 백제를 쳐서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남양만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해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어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함경남도 이원(利原)까지 진출하였으며, 낙동강 유역의 가야지역을 완전 병합하였다. 이에 신라의 국력은 백제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3기는 수(隋)가 589년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때부터 668년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수 왕조는 통일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먼저 고구려와 돌궐족(突厥族)의 연합 세력이 가해 오는 압력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경계가 되었던 요하(遼河) 선에서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여수전쟁과 여당전쟁이 7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파동은 한강 유역에까지 미쳐 신라·백제·고구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였다. 그러다가 신라가 당과의 외교에 성공하여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정치행정[편집]

삼국은 초기국가(부족국가, 성읍국가)들을 파괴하지 않고 국가의 하부 지배체제로 받아들였다. 초기국가는 지형, 생태, 생업, 주민의 안보 등의 조건에 의하여 형성된 상호 의존적인 취락들의 집합체인 나(那) 혹은 읍락(邑落)들을 구성 요소로 하는 정치체였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초기에는 이같은 읍락이 여전히 사회 조직의 기간 역할을 하였다. 주민들은 국가에 편입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종래 지배층의 지배를 받았으며, 읍락공동체의 질서에 따라 살았다.

이같은 읍락들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수취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가졌는데 국가는 국가의 통치를 받아들인 종래의 지배자를 통하여 이같은 읍락 혹은 읍락군(邑落群)들로부터 집단적 공동적으로 수취를 행하였다.

그러나 읍락 내에는 이미 정치적 지배관계가 성립되어, 지배층인 호민(豪民)과 그들의 지배와 지도를 받는 농민인 민(民)들이 있었다. 이들 민은 상대적으로 가난하여 중국인들로부터 하호(下戶)로 일컬어졌다. 이외에도 종족 간의 전투나 범죄 출생 등에 의해 산출된 노예 신분인 노비들이 있었다.

이들 주민들은 읍락을 구성하는 취락에서 대체로 소규모의 반움집이나 지상가옥에 부부와 자녀 중심의 가정 단위로 살았다. 호민이나 일부 부자들은 기와집에 사는 경우도 점차 나타났다.

종래의 읍락은 삼국시대의 중·후반기에 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보였다. 내적으로는 철제 농기구의 보급, 국가 정책적인 수리시설 확충 등 적극적인 농업 증산정책에 힘입어 읍락민 상호간의 경제적 분화가 심화되고, 외적으로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파견되는 변화를 맞게 되었다.

지방관을 통한 지방의 지배는 주로 조세 수취에 집중되었는데 현물 및 부역의 수취가 있었다. 그런데 읍락 내 주민 간의 사회경제적 분화가 진행되었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 지방의 읍락 단위들은 여전히 문화 생활의 공동체로 견고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국가도 행정의 편의상 읍락 단위의 통치를 계속하였다.

따라서 군현을 설치하면서도 각 군현에 지방관을 한 명만 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군현 내의 읍락별로 지방관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각 군(郡)에 3명의 군장(郡將)을 두었으며 신라의 경우도 각 군에 나두(邏頭)를 둔 것을 위시하여 각 촌별로 도사(道使)를 두고 있었다.

고구려의 군현 지배는 보다 체계화된 듯하다. 군현과 비견되는 성(城)의 군사상 중요도나 인구 등이 참작되어, 중요한 성에는 도사(道使)라고도 일컬어지는 처려근지(處閭近支)가 파견되고 여타 성에는 가라달(可邏達) 및 누초(婁肖)라는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한편 성에는 여전히 촌(村)이라는 종래 읍락을 이어 편제된 행정 단위들이 최하 단위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삼국은 세습적 신분사회였는데 신분은 왕경민과 지방민, 그리고 노비로 일단 구분할 수 있다. 왕경민의 상층부는 왕족을 위시하여 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귀족 내에도 신분별 차별이 존재하였다.

신라의 경우 골품제는 왕경민 중에서도 진골 귀족의 특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있었는데, 각 신분별로 관직의 취임을 제한하고 집이나 소비 생활 등에 있어서도 일정한 차별과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경민 가운데 다수를 차지했을 하층의 주민들은 초기에는 5부 혹은 6부민으로서 국가 운영의 중추 세력의 하부 인자로서 군사력의 기간이 되었지만, 주민의 증가 및 귀족층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그 신분이 격하되면서 평민화하는 과정을 밟아 삼국시대 말에는 지방의 농민 일반과 차이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지방민들의 경우도 이미 읍락 단계 이래 계층 분화가 진전되면서 신분 등급의 차이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신라의 경우 진촌주와 차촌주 등으로 등급이 나뉘어져 있는 촌주층은 물론 일반주민 내에서도 신분 등급이 나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에도 광개토대왕 수묘연에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의 신분 차별이 개재된 민들이 보이는 바, 그 정도가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지방민은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다만 삼국간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전공을 세우거나 지방에 진출한 유력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일부 지방민이 중앙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경우 지방의 유력층인 촌주 중 진촌주와 차촌주는 중앙의 5두품 및 4두품과 같은 신분적 대우를 받았다.

삼국은 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 체제를 구축해 갔다. 초기에는 연맹왕국적 성격을 갖고 있었던만큼 5부나 6부의 대표인 중앙 귀족들은 귀족회의체를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며 국가의 통치에 공동으로 대응하였다. 고구려의 제가회의(諸加會議), 신라의 화백제도(和白制度)와 사영지회의(四靈地會議) 등은 그 구체적인 예이다.

신라의 상대등은 왕이 귀족회의를 하부기구화 했을 때에도 귀족회의 의장으로서 여전히 큰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고구려 후기의 최고위관인 대대로(大對盧)는 왕의 임명에 의하지 않고 귀족들의 합의나 상호 경쟁에 의해 선출되었다.

한편 왕은 보다 관료적 성격을 갖는 국상이나 주부, 사자, 품주 등을 설치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 체계를 갖추어갔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14등급, 백제는 16등급, 신라는 17등급의 관계(官階)를 마련했고 다양한 중앙 제부서와 지방 관청으로 구성된 비교적 체계적인 행정 조직을 갖추었다.

귀족들이 지휘하는 군사 조직도 갖추어졌는데, 삼국은 중앙의 왕의 측근 부대는 물론 신라의 6정(停)과 같이 지방의 성이나 전략적 요충에 주둔하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상쟁의 길에 나섰다.

경제[편집]

삼국시대에는 수렵이나 어로, 열매채취 등의 방식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으며 일부 종족 사이에는 목축도 비중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농업의 비중이 거의 절대적인 농업 사회였다. 따라서 농토의 소유와 경영은 사회경제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삼국시대 초에는 인구에 비해 대지가 상대적으로 많아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도 가능한 정도였다. 따라서 토지를 둘러싼 주민 간의 갈등은 크지 않았다.

토지에 대한 일반적이고 국가적인 분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적 성격이 존속하던 읍락사회였기 때문에 토지를 점유하고 경작한 자의 해당 토지에 대한 권리가 관습적으로 인정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지에 대한 소유관념이 강화되고 사회경제적 분화가 심화됨에 따라 토지의 소유를 둘러싼 갈등도 발생하게 되었다. 최초의 기록으로 ≪삼국사기≫ 고국천왕 12년(190) 9월조에는 왕후의 친척들이 타인의 자녀와 특히 전택(田宅)을 빼앗아 왕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전한다.

이같은 사실과 이후의 자료들로 보아 삼국에서는 전공에 의한 사전(賜田) 혹은 매득이나 강제겸병 등을 통해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가 진행되고, 일반민 중에는 경영상의 실패나 천재 등으로 토지를 상실한 무전농민도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라 촌락문서 등을 통해 보면 삼국시대의 많은 농민들은 자영소농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제도와 관련하여, 삼국에는 귀족들의 식읍(食邑)이 존재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큰 전공을 세운 경우 토지를 지급한 다수의 사례가 확인되며 신라에 귀순한 금관가야 왕의 경우 본래의 지배지인 김해지역을 식읍으로 받았다.

식읍은 소유권보다는 일정한 행정구역에 대한 조세 수취권을 준 것이다. 따라서 식읍민에 대한 지배 정도는 국가권력의 의지나 행정력의 수준 등에 달려 있었을 것인데, 현물 수취와 더불어 부역에 대한 수취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신라 초기에 녹읍을 혁파한 사실이 나타나므로 삼국시대에도 녹읍(祿邑)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녹읍은 식읍과 유사한 성격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나, 식읍이 일시적이며 매우 큰 공로에 대한 대가로 지급된 데 비하여 녹읍은 문자대로 보면 관직 복무에 대한 대가로 일정 행정구역의 수취권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녹읍은 국가성립기로부터 귀족들에게 종래 연고가 있던 지배지에 대한 경제 및 경제외적 지배를 인정해 주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삼국시대 후반이나 말기에 국가지배체제 및 관직 체계의 정비 과정에서 관료 보수의 체계화와 관련되어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수조권 역시 해당 지역의 조세 전량에 대한 수취권인지 일정률에 한한 수취권인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세제도는 국가의 지속적인 유지 발전을 위하여 주민들로부터 항상적 강제적으로 현물 및 노동력을 무상 수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주부(主簿)나 사자(使者), 품주(稟主) 등 조세와 관련된 관직들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물장고(物藏庫) 등 창고가 운영되었으며, 특히 지방관을 통하여 수취체계가 운영되었다.

삼국 각국 주민들의 조세 부담액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서 隋書≫ 고려전 등을 통해 볼 때 고구려의 경우 그 후기에는 일반민들은 아마도 정남인 호주를 기준으로 곡 5석과 포 5필을 내었고, 부가적으로 3등의 호등제에 따라 5두, 7두, 1석의 곡을 더 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도 유사했다고 하는데, 특히 백제에서는 풍흉의 정도에 따른 차등 수취가 있었다. 이같은 사실을 통해 삼국시대 초기나 중기에는 보다 소량의 수취가 있었으며 특히 균일액의 호별 수취 부과와 더불어 그 이전에 인두별 부세 수취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농업은 국가나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산지가 많은 고구려 지역은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에도 밭농사의 비중이 컸으나 점차 논농사가 보급되어, 삼국시대 말에는 논농사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콩·보리·밀 등 다양한 곡식과 채소가 재배되었으며 벼도 점차 보급되어 재배되었다.

농사에는 철제의 호미, 따비, 괭이, 낫 등이 이용되었으며 삼국시대 후반에는 소를 이용하여 철제 쟁기로 논밭갈이를 함으로써 더욱 많은 땅을 경작하고 기왕의 경작토지의 이용도도 크게 높였다.

1993년에 발굴된 서울 근교 한강가의 미사리유적에서는 한 지점에서 시기가 다른 삼국시대의 밭 경작 유구 2개가 발견되었는데 하층의 유구는 휴한농법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삼국시대 중후반에 이용된 상층의 유구는 이미 상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생활[편집]

삼국시대의 주민들은 자신의 신분에 따라 생업을 갖게 되었다.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관리나 전문군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같은 직책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귀족들은 수도에 살며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발견된 삼국시대의 수많은 건축물과 그 자취, 그리고 많은 무덤들을 통해 삼국시대 귀족들의 세련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 과 귀족들의 무덤 벽화에는 많은 노비들로부터 봉사를 받고 있는 귀족들의 풍족한 생활상이 나타난다. 벽화에 그려진 이들은 늘 을 타고 사냥을 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군사적인 훈련을 하고 있으며, 무용가들의 이나 음악가들의 연주를 즐기곤 하였다.

중하급 관료들은 군사 및 행정의 다양한 직무에 종사하며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대다수의 일반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며 국가에 세금을 내고, 삼국 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진 삼국시대 후반에는 병사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주민들은 노래와 춤을 매우 즐겼다. 고구려의 경우 저녁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노래와 춤을 즐겼다 한다. 또 공부하기에도 힘써, 고구려의 경우 수도에 태학(太學)이라는 대학이 설치되었고 지방에도 경당(扃堂)이라는 수련기관이 있어 농촌의 평민 자제들까지도 책 읽기와 활쏘기를 힘써 하였다 한다.

백제의 경우에도 국가적으로 중국의 왕조로부터 유교의 경전을 수입하여 가르치고 왜(倭)에 학자를 파견하여 이를 전하고 가르쳐 주었다. 신라의 경우 국가적인 정책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이 스스로 제자를 가르치며 유학의 경전들을 읽히기도 하였다.

문화[편집]

삼국시대인들의 신앙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조상신을 숭배함은 물론 천신(天神)이나 산천신들을 섬겼다. 삼국시대 중반 이후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삼국시대 말기에는 일반민 사이에서도 불교가 확산되었다. 이외에 중국에서 형성된 도교가 들어와 신앙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중국문화와 접촉하기 쉬운 만주지역에서 성장하여 가장 먼저 고대국가를 성립시켰고, 오랫동안 한나라의 침략 세력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자주적으로 외국 문화를 수입하였다.

고구려는 중국문화뿐 아니라 인도문화·서역문화 및 북방문화와 먼저 접촉하면서 이를 정리, 소화하여 고대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다양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를 백제·신라에 전하는 구실을 하였다. 고구려는 한국 고대문화의 기준을 먼저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의 진행을 볼 때, 사회의 문화기반은 중국문화와의 격차가 커서 중국문화 수입에 치중하면 토착 문화가 해체되는 작용이 일어나 자주적인 발전이 저해되었다.

또한 새외민족(塞外民族)과 연결하여 중국과 대결하는 경우에는 복합적인 사회를 운영해 보지 못한 동북 아시아 문화의 한계성에 부딪히게 되었다. 따라서, 삼국문화는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러한 양면적 한계성을 극복하며 성장하였다.

삼국시대 문화사에 있어 불교의 역사적 기능과 공헌은 대단히 컸다. 삼국의 불교는 고구려의 낭법사(朗法師), 백제의 겸익(謙益), 신라의 원광(圓光)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불교는 원래 유일신 신앙과는 달라서 각 지방의 토착 신앙을 부인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섭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불교 이전의 전통 문화와의 갈등이 심하지 않았다.

또 국가 성립 전단계에 비하여 크게 확대되고 복잡해진 고대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철학을 제시하였으며, 다른 나라들의 고대문화를 전달하는 구실을 하여 삼국의 고대문화 발전의 길잡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나 서역, 중국이나 북방 민족과 우리 나라 삼국에 공통되는 국제문화의 기준을 제공하며 문화 교류를 촉진시켰다. 이로써 삼국으로 하여금 국제문화 정세를 자각하고 한족 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문화적 탄력성을 갖게 하여 한문화(漢文化)에 전적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한국불교가 가지는 호국사상도 이러한 역사적 전통 밑에서 성립된 것이다. 원광이 제시한 세속오계도 신라의 전통적 사회 체질을 토대로 유교와 불교를 아울러 이해하면서 세운 신라 고대사회의 가치 기준이었다. 이와 같이 삼국사회는 불교를 통하여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편, 삼국은 공히 중국으로부터 한학(漢學)을 수입하여 배우는 데 노력하였다. 한학은 유학을 중심으로 한 중국 고중세의 종합적 학문으로, 삼국은 이의 습득을 통해 통치 철학을 보강하고 행정의 체계화를 시도하며 보다 세련된 문화생활을 도모하였다.

고구려는 태학이라는 국립 대학을 세워 지배층의 자제들로 하여금 유교의 경전을 위시한 한학을 학습하게 했고, 백제의 경우도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서적을 수입하여 학자를 양성하고 이를 일본의 전신인 왜에 전달함으로써 아스카(飛鳥)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신라의 경우 대학인 국학(國學)은 통일기에야 세워졌지만 학자들이 스스로 유학 경전을 통해 제자를 기르기도 하며 중국에 유학하여 배워오기도 하였다.

이 시대 한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문을 사용하여 일찍이 ≪유기 留記≫라는 사서가 편찬되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고흥(高興)이 ≪서기 書記≫를 편찬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6년(545) 널리 문사를 모집하여 국사를 편찬한 바 있다.

금석문(金石文)으로는 고구려의 것으로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장수왕 때의 것으로 보이는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등이 있고, 신라의 것으로는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를 위시하여 4개의 진흥왕순수비 등의 비문들이 남아 있다. 백제의 것으로는 말기의 것으로 보이는 사택지적비문(沙宅智積碑文)이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이나 중원비문에는 유교 사상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당시 고구려 문화의 성격이나 경향에서 온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진흥왕순수비에서는 ≪서경≫과 ≪논어≫의 구절을 이용하면서 고대국가의 왕자의 권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고대국가적 경험의 단계가 ≪시경≫이나 ≪서경≫에 나타난 주나라의 정치·사회경험과 유사하여, 삼국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12년(진평왕 34)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시경≫·≪서경≫·≪예기≫·≪춘추≫ 등을 읽은 것이 나타난다. 이로써 당시 청소년들이 새로운 교양을 갖추기 위하여 경전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541년(성왕 19) 양나라에 ≪열반경경의 涅槃經經義≫ 등 불교 서적과 모시박사(毛詩博士)를 보내줄 것을 청했다. 이것은 불교나 한문학 또는 유교에 대한 이해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백제 말기의 것인 사택지적비문에는 노장사상(老莊思想)까지 나타나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말기에 당나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여 불교와의 마찰이 발생하는 문화파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삼국시대 말에 신라의 강수(强首)는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데 능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한문 수사에 있어서 그 수준이 향상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한학이란 정치이념의 표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의학(醫學), 역학(曆學), 병학(兵學), 율학(律學) 등 중국의 학문 및 문화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 강수같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 태학이 세워진 이래 30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학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나라가 삼국시대에 와서 문화적 개성을 확립하여 문화의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반도는 기후가 온화하여 농업에 적합하므로 한 곳에 정착하여 지속적으로 문화를 축적할 수 있었다.

둘째, 전국시대부터 산동성(山東省)을 중심으로 북중국 일대에 살고 있던 맥족(貊族)이 보다 앞선 중국 철기문화를 가지고 이동하여 옴으로써, 이미 성립되어 있던 고조선의 청동기문화 전통과 복합할 수 있었다.

셋째, 각 지방에서는 이러한 유이민들이, 북방에서는 부여족 계통이, 남방에서는 한족 계통이 수많은 초기국가(부족국가, 성읍국가)를 세우면서 철기문화 기반을 넓히고 저마다 개성 있는 지방문화를 성립시켰다.

넷째, 삼국이 성립된 뒤 불교를 통하여 당시의 국제문화를 폭넓게 이해함으로써 삼국의 고대문화는 보다 다양한 탄력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밀도도 높아지고 세련되는 과정이 있었다.

국내·국외를 물론하고 전쟁으로 영일(寧日)이 없었으면서도 삼국은 충분한 능력을 가진 고대문화를 건설함으로써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왕과 귀족세력이 거주하는 수도에는 궁궐·관청·불교사원 및 귀족들의 조상신이나 토지신·농업신을 모시는 신사가 설립되었다. 또한, 전국의 물산이 모이는 시장이 개설되고, 수도의 안전을 위하여 궁궐과 관청을 보호하기 위한 내성(內城)과 일반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羅城)을 축조하였다.

신라의 수도 경주는 지형적 조건으로 나성을 쌓지 않고 외곽에 산성을 쌓아 방위하였다. 이와 같이 수도의 도시문화가 발달하게 되어 삼국의 문화는 도시 중심의 귀족문화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 외국 문화와의 접촉과 수용은 주로 사신의 내왕과 불교승려의 유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북조(北朝)의 문화를, 백제는 남조(南朝)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처음에는 고구려의 것을, 뒤에는 백제의 것을 받아들였는데, 중국과의 교통도 여제 양국의 교통로에 의존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중국 음악의 수입에 잘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는 서역 음악과 북조계의 음악을 받아들여 거문고·공후·피리·생(笙) 등과 요고(腰鼓)·담고(擔鼓) 등의 타악기를 사용하여 그들의 기질에 맞는 활기찬 음악을 만들어냈다.

한편 백제는 남조계의 청악(淸樂)을 양나라로부터 들여왔는데, 타악기의 사용을 즐기지 않아 고구려와는 달리 전아(典雅)한 음악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의 음악은 진흥왕 때에 와서 가야 음악을 받아들임으로써 가야금 연주에 맞추어서 무용과 노래를 곁들이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진(晉)으로부터 칠현금이 들어오자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嶽)은 이를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 곡을 작곡하였고, 그 뒤 통일기에 옥보고(玉寶高)가 다시 30곡을 작곡하였다. 비파나 대금·중금·소금 등 삼죽(三竹)은 일찍부터 신라에서 발달했는데, 이것들은 중국의 것을 본받아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금은 본래 중국의 쟁(箏)을 고쳐서 만든 것인데 우륵(于勒)이 12곡을 새로 작곡한 바 있고, 가야가 망한 뒤에도 신라에 전해져 오늘날의 우리 음악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예들을 통해 볼 때, 삼국은 중국의 음악을 수입하여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게 악기를 개조하기도 하고 스스로 작곡도 하여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진 음악으로 발전시켰다.

고대국가가 성장하고 귀족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궁궐·사원·성곽·고분 등의 건축 기술, 또는 각종 무기 제작 기술 및 장식품 제작을 위한 세공 기술이나 유리·옥 등의 제조 및 가공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고분 축조에 따라 발달된 고구려 고분벽화의 회화 기술은 백제와 신라에도 영향을 주었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뒤 초기에는 주로 북위(北魏)의 양식을 모방한 불상이 고구려에 나타났다. 그런데 불교가 보급되고 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불상 제작도 세련되어갔다.

신라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경주 삼화령(三花嶺) 석조미륵세존의 협시불인 앳되고 가련한 모습의 속칭 ‘애기부처’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고대 사회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철학을 생각하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이 나오기도 했다.

탑을 만드는 기술에서는 백제가 가장 앞섰는데, 목탑은 남은 것이 없으나 석탑으로는 익산의 미륵사탑, 부여의 정림사탑이 남아 있어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황룡사의 구층탑도 백제인 아비지(阿非知)가 만들었다고 전해 온다. 이같은 석탑 조성 기술은 통일신라기에 계승되어 석가탑·다보탑으로 승화 발전되었다.

기타[편집]

병신들이다. 왜 고구려와 백제가 힘을 합쳐서 신라를 멸망시킬 생각을 안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더군다나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의 둘째아들이 백제를 건국해서 둘은 형제국가인데도 말이다.


경고! 이 문서는 히틀러 같은 애미 뒤진 나치 놈들이 매우 좋아합니다!!

유일한 답은 여제동맹을 맺어 신라인들을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조리 도축하는 것이다. 그렇게 했으면 지금 한민족은 상당한 강대국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같은 병신이 날뛰지 읺았을 것이며 설령 분단이 되었더라도 휴전선압록강두만강으로 해서 한반도는 남한, 만주는 북한 이런식으로 분단이 되었을 것이다.

ㄴ 말하는게 무슨 북괴, 나치, 좆본우익들 수준이노 ㄷㄷ

참고문헌[편집]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위서(魏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당서(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자치통감(資治通鑑)』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한국사 』1·2(국사편찬위원회, 1973)
『한국불상의 연구』(황수영, 삼화출판사, 1973)
『한국고대사회연구』(김철준, 지식산업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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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혜구,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8)
「일본에 있어서의 삼국악(三國樂)」(이혜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고대문화와 인접문화와의 관계』, 1981)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김기흥, 역사비평사, 1991)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시대 [三國時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국가[편집]

그외국가[편집]

관련[편집]

대한민국

  1. 기원후 6세기까지도 마한이나 변한(가야)의 세력들은 버젓이 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