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노비

조무위키

주의. 이 문서는 노예에 대해 다룹니다.
일해라 일! 노력해라 노오오력!
열심히 일해서 주인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새끼들아
조선 시대 계급
양반 선비, 관료
중인 그냥 중인, 서얼
상민 농민 > 공인 > 상인
천민 노비, 백정

개요[편집]

원조 헬조선이 무려 19세기까지 운용했던 자국민 노예제도의 노예계급을 담당했던 이들을 이른다.

알고봤더니 일방적인 노예만도 못한 사상이였다.

고려의 소작농을 대신해 지배계급의 착취대상 역할을 담당했다

고조선 8조법에 "도둑질을 한 자는 종으로 삼는다." 라고 하는걸 봐서는 지옥불반도에 노비 없던 적은 없다.

다만 헬조선의 노비와 기존의 노비는 명백히 다른부분이 있는데, 고조선 법 8조의 도둑질한 자는 종으로 삼는다는 위의 조항처럼 헬조센 이전의 노비는 주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나 전쟁포로를 관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용된 것으로 전체 인구수의 10%이하를 차지한다고 봐야하며, 사실상 처벌이나 포로관리의 측면으로 사용되었으며, 사실 생산력이 낮은 시대에는 수십년동안 감옥에 가두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사용한 처벌의 방법이다.

ㄴ물론 진실은 모른다. 까고 골품제처럼 카스트와 비슷한 제도가 우리 민족 특유의 신분 질서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헬조선만은 명백히 시대적 발전을 역행해서 그냥 노비를 많이 만들어서 부려먹었다.

전세계적으로 노예제가 완화되는 방식으로 발전되는데 반해서, 헬조센은 혼자서 이걸 역행한 것을 보면 빼도 박도 못할 헬조센이라고 봐야한다. ㄴ 동방식민운동 이후 동유럽: ???

서양 역사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중 하나다.서양사학자들은 고려->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지만 지배계층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그들이 가진 토지와 노예, 가문이 유지되면서 신분제도가 강화되었고 본다. 또한 조선은 구조적으로 하향이동은 쉬우나 상향이동이 힘들어 ㄴ 이에 대한 반론으로 조선의 과거 급제자 중 1/3이 상민이었다. 전근대 왕조 치고는 상당히 개방적인 편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통치하는 폐쇄적 사회가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점들은 사회의 성장동력을 저하시켰으나 왕조의 영속성에는 도움을 줬다는것. 그덕에

조선은 중국과 일본과 다르게 500년 넘는 왕조를 유지시켰다는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주장을 식민사학의 잔재니 양놈들은 한국사에 대한 애정이 없니 하며 욕했지만 요새는 조금씩 받아들이는듯? 갓양인들의 FACT 공격은 어쩔수 없으니까.

동시기 중국[편집]

주의. 이 문서는 중증 중뽕이 작성했거나 중뽕 그 자체를 다룬다 해.
이 글엔 마오쩌둥의 은총과 한자의 향기가 가득하다 해.
이 글은 친중 성향이 풍기는 착해진 우마오당 냄새가 난다 해.
이 글은 친중 성향을 띄므로 당신이 중화민국뽕이거나 정상적인 갓-한민국의 반공주의자라면 이 글이 매우 역겨울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란다 해.
짜장면, 짬뽕, 탕수육, 깐풍기, 팔보채, 양장피, 마라탕, 탕후루 존나게 먹고싶다 해!
췐궈 쭈이따더 메이뉘 루오리아오 지에다이쫑씬 썅씨엔라!

중뽕 틀을 달긴 했지만 이 부분은 고대 중국 인정 각이라고 본다.

주변국 간의 전쟁이 많아 전쟁 포로 등을 노예로 삼으니 그나마 많았던 고대 상나라, 주나라 시절을 지나 한나라 시절까지 가면 이미 전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1% 미만이었으며 그나마도 노비를 해방시켜주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조선의 노비와는 달리 노비 계급의 세습이 없었다.[1] 광무제는 이 부분에서 하드 캐리했다. 중국의 노비는 후세대로 갈수록 더욱 줄어들어서 반계 유형원이 반계수록에서 조선의 노비 세습제를 비판하면서 세습 노비가 없는 중국과 그렇지 않은 조선의 상황을 비교하기까지 했을 정도. 동시기 로마 제국 등 타 문화권에서 세습 노예 노동으로 상류층이 부를 챙겼던 점을 생각하면 매우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 한족들만의 이야기다. 이민족들은 해방은커녕 얄짤없이 노예 행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차별에 대해서 이민족들의 불만은 딱히 없었던 걸로 보인다. 다른 민족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같은 민족이라도 노예로 삼고 있었고 법률과 제도도 더 심한 편이었으니 그닥 상관은 없었을지도.

진짜 정체[편집]

1950년 6월 24일까지 노비였던 사람들이 현재의 꼰대이다.

6월 24일 밤까지만 해도 주인님한테 쇤네쇤네 거리며 주인니뮤의 신발이나 핥던 새끼들이 1950년 6월 25일 김일성 똥쓰레기가 개지랄을 떨자 주인니뮤가 부르주아는 빨갱이한테 걸리면 뒤지니까 "걸음아 날살려라!"하고 재산이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치고 몸만 빠져나와 도망친 사이에 자기는 프롤레타리아 코스프레를 하고 주인니뮤가 미처 챙기지 못한 재산을 훔쳐 잠적한 뒤 개지랄 끝나자 그걸로 사업차려서 기업가가 된 버러지들이다.

는 커봤자 큰개라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고 있으며 노비는 돈이 많아봤자 돈 많은 노비일 뿐이다.

정신적으로 귀족이 되어야 탈노비지 으이구... 이 새끼들...

방ㅂㅊ이랑 피ㅈㅇ. 니들 얘기하는 거야. 주인니뮤의 성씨로 족보세탁한들 니들 정체가 어디 가는 줄 알아?

어원[편집]

남자종 노 (奴)자에 계집종 비 (婢)자의 합성어 이다. 즉, 종연놈이라는 뜻이다. 어떻게보면 노예계층은 이미 남녀평등이 되어서 헬조센은 고대부터 양성평등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세[편집]

주의! 이 글은 헬-조선의 현실을 다룹니다.
K- !!!
이러한 헬조선의 암울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전세계와 우주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런 것들과 당신에게 탈조선을 권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야...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상응하는 한국 고유의 신분제도의 최하층 계급이었다

국뽕들이 노예제가 절대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기지만, 어디까지나 사소한 점이 다르고 노비제는 사실상 국가가 운영한 노예제도로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더 미개하다. 상속,매매,증여는 물론이고 생사여탈권도 있었다. 고대 로마제국만 해도 노예를 폭행하거나 함부로 죽이면 주인이 처벌을 받았는데 ㄴ이건 또 뭔 개소리냐? 그냥 고대로마때 노예=가축 그 자체였는데 조선은 19세기까지 그런거 없었다. 노비를 처죽이던 꼬맹이들을 기둥에 머리를 처박게 해서 피를 질질흘리게 하던 자유였다.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면 관아에 신고를 하긴 해야했었는데 물론 신고 안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ㄴ 전혀 아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에선 생사여탈권은 오로지 왕만이 가지고 있었다. 이거 쓴놈은 조선왕조실록 한번도 안 읽어본놈인듯. 세종때부터 계속 노비 살해는 물론 구타까지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계속 교지가 내려왔고 영조때는 아예 그게 법제화됨. 그전까지 법제화 안되었다고 빼애액거릴 역알못놈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일단 기본적으로 조선은 법치가 아니라 덕치라 덕으로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개념인데 실질적으로는 그냥 왕의 말이 곧 법이란 소리임. 그럼 왜 법전이 따로 있느냐? 일단 왕명은 한번 교지가 내려졌으면 그건 함부로 범할수가 없음. 심지어 그게 후대왕일지라도. 하지만 간혹 부득이하게 법을 만들필요가 있는데 이건 명령을 내린 왕 스스로만이 그 명령을 취소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임. 뭔말이냐면 왕도 사람인데 자기가 한말 어떻게 다 기억하겠냐? 그렇다고 자기가 한말이 적힌 실록을 함부로 열람할수도 없으니 자기가 한말 다 저장해놓으라고 만든게 법전임. 그럼 나중에 까먹었을때 저장해놓은거 보고 적절히 벌을 줄수가 있지. 실제로 같은 죄를 지었어도 형벌이 제각각이라 그걸 방지하기 위해 법전을 만든건데 노비를 구타, 살인했을때에 대한 법은 오로지 대명률에만 있었고 게다가 그것도 풍속이 다르다며 대놓고 안지켰으니 실제로는 노비를 구타하거나 살인하면 영조전까지는 노비주를 구워삶든 맘대로 조질수가 있었단거지.

ㄴ 전혀아니긴. 조선사회는 사적폭력이 굉장히 흔했기 때문에 양반집에서 말안듣는 노비에게 곤장을 치거나 멍석을 말아 반죽음을 만드는 일이 늘상 있었다. 쇄미록만 봐도 노비들 패는게 일상이였음. 물론 법적으로는 노비 구타와 살해, 고문등이 금지되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지. 노비는 주인을 고발하면 교수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고소,고발이 불가능한데다가 주인이 노비를 폭행/고문/살해에도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음. 금계필담을 보면 젊은 명사였던 이서구는 관청에 허락을 받지않고 노비를 살해했지만 오히려 관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조용히 처리했다 하여 당대인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 머 윗놈이 말한것처럼 노비를 구타/살해해서 법적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긴했다. 하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노비들은 걍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는 졷같은 삶을 살았다. 왕이 교지 몇번 내린다고 노비 살해/구타가 없어졌으면 1950년대까지도 멍석말이를 했겠냐. 조선사회에서 노비에 대한 주인의 권한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고 봐야함.

ㄴ 일단 금계필담은 고종때 나온거에다 저자가 교차검증 없이 그냥 들은 풍문을 적은 책이니 그건 증거로선 신뢰성이 떨어짐. 그리고 노비는 굉장히 중요한 인력이기 때문에 자칫 심하게 다루다간 도망이라도 갈 수 있기에 주인 쪽에서도 함부로 하기가 힘듬. 흔히 추노라고 하는 거는 막 사람 풀어서 노비 잡아오는 일 같은 건 없고 대부분은 관아에 신고해서 다른 지역 관리의 도움을 얻어서 다시 데려오는 건데 문제는 이것도 거기서 이미 자리잡고 생활하고 있으면 못 데려오고 신공만 받아야 하고 이 신공도 최대 3년까지만 받을 수 있음. 그리고 무엇보다 도망노비 측에서는 자기가 노비가 아니라고 항소할텐데 관아에선 송사가 길어지는 걸 싫어해서 (조선시대는 송사 횟수가 적을수록 관리가 일 잘한걸로 여김) 아예 주인 측의 송사를 안 받는 경우도 있음. 고로 주인측에서도 노비들한테 함부로 못함.

ㄴ금계필담은 당시 시대상을 엿볼수 있는 좋은 자료다.민담의 편찬자들은 민담의 뒷부분의 평을 달아놓았고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걸 통해 당시 시대 분위기를 읽음. 또한 이서구의 이야기는 금계필담의 작가 서유영의 7촌 숙부의 일이라 신빙성이 높은 내용임. 그리고 노비가 도망갈까봐 함부로 못해주었다? 이건 헬조선을 한참 모르는 소리임. 노비 통제의 기본 방침은 폭력이였음. 파주 안씨 가문의 안씨치가법제를 보면 노비에 대한 세세한 규칙과 처벌이 나와있는데 말은 안들으면 곤장 30대. 정해진 농작물을 소출하지 못할때는 장 100대까지 치게 했음.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선사회는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폭력이 굉장히 심했다. 가부장적 가내사법권이라고 해서 국법 이외의 또다른 그들만의 법과 처벌법이 있엇음. 조선 후기로 가면 남형금단사목같은 걸로 이런 사적폭력에 제제를 가하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었지. 19~20세기에도 사적폭력은 흔했거든 고문도 많았고

ㄴ 일단 사적폭력은 기본적으로 세종때부터 불법이었다. 물론 그걸 일일이 다 감시하긴 힘드니 사적폭력이 암암리에 성행했다 치자. 그렇다고 그게 당연시 되는건 아니거든? 그리고 노비한테 못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잘해주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왜 한가지 면만 보고 노비의 인권이 헬이라고 하냐? 그리고 금계필담에서 당대인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나오는데 왜 당시의 기타 다른 서적에는 그 이야기가 안나오냐? 그게 그렇게 칭찬받을 일이면 적어도 다른 서적에도 그 내용이 나와있어야지.

ㄴ 이서구의 이야기는 서유영의 7촌 숙부가 겪은 이야기를 쓴건데 이게 뭔 대단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다른 책에 실리냐? 역사전문가들도 잘 인용해먹는 이야기를 자꾸 못믿겟다고 그러네. 그리 못믿겠다니까 다른 사례를 들어주마. 묵재일기라고 묵재 이문건이라는 사람이 쓴 일기가 있다. 노비 체벌 기사가 수백건이 넘고 사례도 풍부해서 당시 양반가의 가부장적 가내사법권을 연구할때 자주 쓰이는 책임. 묵재일기를 보면 노비통제의 기본방침은 폭력이였고 자신의 가내사법권이 미치는 영향에서는 왕과 같은 권력을 누렸음. 엄밀하게 따지자면 국법을 무시하는 일이였지만 사적폭력의 행사는 너무나 당연시됐지. 물론 너 말처럼 잘해주는 사람도 있었어. 이황같은 인격자들은 그렇게 행동했지. 하지만 이황같은 사람은 소수였고 폭력은 노비통제의 주요 수단이였음. 애초에 노비는 물건처럼 매매가 됐고 열약한 법적 직위 속에서 주인의 폭력에 시달렸으며 사유재산의 강탈을 물론 자녀마저 임의로 처분당하기까지 했는데 이게 헬이 아니면 뭐임?

ㄴ 그래 사적폭력이 행해졌다는건 인정함. 그렇다고 무작정 패지는 않았을거라는게 내 의견임. 묵재일기 보니까 종아리에 매질하는게 전부던데. 물론 내가 다 보지 못했을수도 있지만. 근데 이문건은 자기 노비한테 약까지 지어다주고 자기 노비가 죽자 제사까지 치르게 노비 가족들한테 돈까지 준 사람임. 게다가 묵재일기에서는 어떤 노비가 심부름시키는게 싫어서 도망가겠다고 하니까 안 때리고 말로 잘 타이르던데. 물론 요즘보단 못하겠지만 이거대로라면 동시대 기준으로 헬까진 아니라고 봄.

ㄴ 밥상에 국물 좀 식었다고 사람 패던 새끼가 이문건인데 그걸 성인군자인냥 써놧네. 너 솔직히 묵재일기 보기는 했냐? 어디 네이버 블로그 같은거 읽고 와서 쓴것 같은데 묵재일기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건 종아리에 매질이 아니라 태와 장이다. 논문중에 '16세기 이문건가의 노비에 대한 체벌의 실태분석' 이라고 있거든? 이거 보면 이문건이 어떻게 노비들 줘팼는지 잘 나와있음. 진짜 사소한 건수 하나하나 다 잡아서 졷나게 때림.

ㄴ 태가 회초리인데요? 님 태형이 뭘로 치는건지 모름? 게다가 논문에서도 등, 볼기, 종아리가 주 타격처라고 되어있구만.

ㄴ 태는 엉덩이를 치는거고 니가 위에 써논 종아리의 매질은 회초리 초자를 써서 楚라고 한다. 초(楚)는 가벼운 벌이지만 태(笞)는 잘못맞으면 병신됨. 엄연히 다른 종류의 체벌이고 묵재일기에서도 초(楚)와 태(笞)로 각각 구분해 놓고 있다.

ㄴ 엉덩이에 매질이 태라는 거 아님? 태형 검색해보니까 작은 막대기 갖다가 엉덩이 때리드만.

ㄴ 태가 엉덩이에 매질하는거니까 종아리에 매질하는거랑 같다고 생각하냐? 진짜 벽보고 이야기하는것 같다. 니가 못알아먹는것 같으니까 상세하게 설명해줌. 너가 위에서 이문건이 노비들에게 잘해줬고 종아리에 매질하는게 전부라며? 난 거기에 대한 반박으로 묵재일기에는 태와 장이 가장 많이 나오고 사소한 일로도 노비를 졷나게 팼다고 했음. 그 근거로 '16세기 이문건가의 노비에 대한 체벌의 실태분석' 이라는 논문을 제시했다. 근데 넌 초와 태의 차이도 잘모르면서 두개가 같은거 아니냐고 빼액거리고 있음. 아까도 말했지만 종아리에 매질은 가벼운 체벌로 楚라고 하고 부모가 자식을 훈계할때 주로 쓰는 체벌임. 이문건이 지 손자를 때릴때 많이 썻다. 그리고 태는 형틀에 사람을 묶고 바지를 내린다음 엉덩이를 막대기로 매질하는건데 맞는 방식도 치욕적이고 재수없으면 뒤진다. 이문건은 때로는 자애롭게 노비들을 대하기도 했지만 좋은 말보다는 폭력을 선호했고 절구공이로 머리를 칠만큼 잔혹했다. 이새끼가 특별히 성격파탄이거나 그런것도 아니였고 그냥 당시 사족들은 대부분 이런식으로 노비들을 다스렸음.

ㄴ 그래 초와 태가 다르다는건 인정함. 그리고 사적폭력이 있다는것도 인정한다. 근데 이문건이 막 덮어놓고 앞뒤사정 안가리고 때린건 아니잖아. 전근대 노비한테 뭔 대단한 인권을 바라는것도 아니고 저정도 폭력은 동시대에는 당연하게 행해졌던거다. 흔히 자국민을 노비로 많이 부려먹었다고는 하지만 조선조정은 최대한 노비해방에 앞섰고 또 웬만하면 노비한테 잘대해주려고 했는데 그냥 막 폭력이 있었으니 헬이라고 하는건 아니라고 봄

ㄴ 동시대 기준으로 봐도 당연하지 않음. 지배층이 자국민의 40~60%를 노예로 부리면서 노동착취와 폭력을 행사한곳은 조선이 유일함. 세계사적으로도 굉장히 드믄 사례다. 그리고 조선정부는 딱히 노비해방에 앞장서지 않았음.태종 이방원의 노비종부법과 19세기의 공노비해방을 제외하면 조선의 노비정책은 굉장히 소극적이였다. 갑오개혁전까지 조선정부는 인간에 대한 재산권을 부정한적이 없고 취득한 노비에 대한 소유권을 위협하거나 노비거래를 금지,제한하는 정책을 취한적이 없음. 동시대의 중국,유럽,일본등에서도 노예는 있었지만 정부차원에서 노예를 법전에 명시하고 인간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보호해준적은 없었다. 오히려 당시 대부분의 메이저 국가들은 노예제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거래를 금지시킴.

ㄴ 뭔소리여?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30%인데 40~60%는 어디서 들은 소리냐? 그리고 노비 거래에 대한 제한은 당연히 있었다. 관아에 신고하지 않고 그냥 거래하면 노비는 공노비로 환수되었고 또 노비종모법, 속오군, 면천첩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왠만한 노비들은 어떻게든 양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노예제도를 부정했다는 건 또 뭔 소리냐? 왠만한 국가들은 다 노예제 운영했다. 넌 미국이 흑인 노예 해방했다가 전쟁 일어난거 모르냐?

ㄴ 씨발 안쓸려고했는데 마지막으로 쓴다. 일단 조선은 노비거래를 제한한적이 없다. 관아에 노비거래를 신고하게 한건 노비거래를 제한할려고 그런게 아니라 노비의 소유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였음. 관아에 노비거래를 신고하면 입안(立案)이라고 하는 문서를 발급해 줫는데 이를 통해 노비주들은 노비의 소유권을 강화했다. 현대의 공증같은거지.'조선 후기 노비 가격의 구조와 수준' 이라는 논문이 있는데 이거 보면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노비 비율은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갈리지만 17세기를 기준으로 최소가 30% 고 40~60%까지 보기도 한다. 1606년 단성현 호적에서는 노비가 인구의 60%를 넘었고 1609년의 울산부 호적도 인구의 40% 이상이 노비였음. 다른 국가의 노예제도를 설명해주자면 영국은 이미 12세기에 노예무역을 금지했고 동유럽은 이보다 느리지만 16세기면 노예제도가 폐지됨. 중국은 홍무제,옹정제등이 노예제를 금지시켰고 일본도 에도막부때 노예거래를 금지했다. 미국의 경우 노예거래가 활발했고 노예제 사회로 분류될정도로 노예가 많았지만 적어도 헌법에 노예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미국 초대 헌법을 보면 노예를 기타 주민으로 분류했을뿐 노예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음. 로마 자연법과 기독교 교리상 모든 인간은 평등했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법제화 시킬수는 없었지. 실제 노예는 있었지만 법적으로 노예를 명시하는건 별개였다는 소리다. 그나마 예외를 꼽자면 포르투칼인데 얘들도 어디까지나 이교도/식민지에서만 적용되는 예외적 법률이였음. 반면에 조선은 자국민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노골적으로 법전에 사고 팔리는 인간을 명시했다. 심지어 반품기한과 가격까지 적어놧으며 부모 한쪽만 노비여도 자자손손 노비가 되었는데 이딴 쓰레기 법은 세계에서 조선이 유일함. 그리고 너가 말한 노비종모법,면천법등은 이미 6세기 로마제국에서 실행됐던 방법에 불과하다. 아니 로마제국은 적어도 부모중 한쪽이 자유민이면 자식은 노예에서 해방됐으니까 조선보다 나았지. 동시대는 물론이고 천년전 로마제국만도 못한게 조선의 노비제도였는데 국뽕 좀 그만 빨아라. 제임스 팔레가 조선은 노예제 사회라고 일침한 이후에 수많은 국뽕들이 빼애애애애액거렸지만 제대로 반박한 새끼는 한명도 없었다. 글고 더이상 글 안쓸꺼니까

ㄴ이영훈 교수가 반박하긴 함, 뭐 이양반은 국뽕 아니니까 니말이 맞긴하나? https://blog.naver.com/lord2345/220203515443

ㄴ 달아도 답변안해줌

ㄴ 정신승리도 정도껏 해라. 최초로 노예제가 폐지된게 1833년 영국인데 뭔 헛소리를 하고있어. 니가 말한건 자국민에 대한 노예화 금지를 말한거고 흑인노예는 해당사항 없음. 그리고 미국도 법적으로 노예제가 있었는데 뭔 개소리냐? 그리고 조선은 노예제 사회 맞긴한데 그게 그렇게까지 비참하거나 후진적인건 아님. 아니 애초에 팔레는 미국 남부도 노예제사회라고 규정함. 게다가 조선은 다른나라에 비해 노비한테 잘해준 국가임. 비교대상이 농노이든 노예든 일반 평민이든 말이지

ㄴ조선은 자민족을 천민으로 삼고 부렸는데, 타민족들을 노예로 부린 나라들하고 비교하네. 그리고 타민족 노예하고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특이한 케이스 가지고 조선놈들이 천민놈들에게 잘해주었다고 정신승리하는 거 봐라 현실은 백정각시놀음 수고

ㄴ레알 개꿀잼 썰전 잘 감상했습니다. 바득바득 우기면서 발악하는 국뽕을 무자비하게 깔아뭉게는 모습이 넘나 잼있내요

노비가 노예 아니라는 건 현대 섬노예를 과거 노예보다 잘 대우해주니 노예 아니라고 우기는 주인놈들과 똑같은 발상이다.

애초에 노비가 국뽕들이 우기는대로 멀쩡한 계급이었으면 공명첩은 왜 그리 잘 팔렸소? 그리고 장례원엔 왜 불을 지르고 도망간 노비를 잡기 위한 추쇄꾼들은 왜 있었음?

ㄴ 공명첩이 잘팔렸다는거 자체가 오히려 국가에서 대놓고 노비제의 점진적인 해체를 장려했다는 뜻이고 임진왜란때 장례원에 노비가 불질렀다는건 근거가 부족한 설임. 그리고 추쇄꾼은 어디까지나 민간인이지 국가직이 아님. 뭐 국가에서 추쇄도감을 만든적은 있는데 이것도 사실 노비주에게 노비를 돌려줄 의도보단 도망친 노비를 양인으로 만드려는 시도였음.

ㄴ어이구 말앞에 마차달고 있네. 공명첩이 잘팔렸다는게 국가에서 장려했다는 뜻이냐? ㅅㅂ. 그럼 닌 지금 아이폰이 잘팔리는게 애플이 장려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함? 소비자가 아이폰에 대한 선호도가 있어서 구매하는거지. 헛소리 작작좀 해라. 그리고 노예에 대해 가장 중요한 정의는 '인신구속'이다. 그런 점에서 노비는 노예가 맞다.

많은 놈들이 새경받고 일하는 머슴과 헷갈린다. 노비는 새경같은 거 안 받는다. 열정페이만 받고 일했다.

세계 차원에서 봐도 무려 19세기까지 자국민 노예제를 법령으로 운영한 나라는 거의 없다. 헬조센징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부분.

ㄴ 중국은? 그리고 적어도 조선은 타민족을 노예로 부려먹진 않음.

ㄴ이런 식이면 영국은 자민족을 노예로 부려먹지 않았는데? 이딴걸 자랑이라고 써놨냐?

ㄴㄴ타민족을 노예로안쓰고 자민족을쓴게 자랑 ㅋㅋㅋㅋ부모님이 노비출신인가봄 ㅋㅋㅋㅋㅋㅋㅋ

갑오개혁을 끝으로 양천제를 폐지했지만 명목상의 법률과는 별개로 노비를 들이는 관습 자체는 한국전쟁 직전까지 남아있었고, 한국전쟁으로 양반상놈세상이 리셋되자 없어진.....줄 알았으나

1970년대까지도 양반집에 기거하는 머슴들이 상당수 남아있었다고 한다. 동네마다 흔했음

그리고 시사프로그램에 의해 현대판 노예의 존재(노예할아버지, 섬노예 등)가 다수 확인되고 공무원들이 전수조사를 통해 노예근절운동을 시작한게 불과 최근의 일이다.

영국이 식민지포함해서 노예무역 금지한거는 19세기가 맞고 국내에서 chattel slavery 없어진거는 12세기가 맞음. 근데 지금 영국애들이 아니고 물건너온 프랑스 노르만 애들이 없앴음. 일단 12세기에 없어졋다해도 틀린말 아님. 조선노비갖고 싸우는거면. 조선이 식민지 가졋던 나라도 아니고. 글고 위에 말대로 사고팔고하는 유럽에서 Chattel slavery 금지한거는 11세기부터 기록 나옴. 대신 노예가 농노된거긴한데...

근데 자국민 노예제 라는 비판은 근대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전근대 조선 사회를 바라봤다는 점에서 조선도 좀 억울한 부분이 있음. 또한 조선은 다른 나라를 정복해 타 민족을 노예로 삼을 기회도 없었음. 그리고 위에 다른나라 노예제 예시로 서유럽 국가를 드는데 이 국가들은 일찍이 여러 요인으로 농노제가 폐지된 국가고 동남유럽은 그런거 없었다. 폴란드도 3차 분할 전까지 농노제가 완고했고 근대 민족주의가 나폴레옹 때 이미 전파된 러시아 제국에서도 알랙산드로 2세의 개혁 전인 1861년 까지 농노제가 유지되어 왔다. 서유럽이 농노제에 벗어날수 있었던 요인은 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한 농사가 잘되어서 잉여 생산물이 많이 남았고 이민족 침입이 줄어 땅을 굳이 더 경작할 필요도 없고 장원이 해체되면서 농노가 굳이 필요하지 않게 된 점이 있다. 그리고 흑사병의 전파도 한건 했으며 성경이 절대적인 당시 유럽 사회에서 와트 타일러의 난에서 존 볼이 남긴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귀족은 어디있고 평민은 어디 있었는가?" 말을 보면 노예에 대한 동양의 사상과 많이 차이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민족주의와는 다른 관점이다) 마지막으로 전근대 국가들과 초기 국가들의 하층민의 삶은 다 나빴다. 근대 초기 노동자들도 기업에게 살인적인 착취를 당하고 어린이들도 돼지 여물통을 뒤지는 수준이었다. 물론 귀속 여부에서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다시 조선을 보면 조선은 주변 국가보다 농사에 불리했다. 유럽처럼 평야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일본이나 중국 처럼 2모작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전근대 농업의 한계로 잉여생산물이 없으니 조선왕조가 농본주의를 내세운거는 어쩌면 당연한 거고 그러니 노비들의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또한 유럽처럼 스펙타클한 사회변동이 있지 않았고 조선왕조는 나름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조선왕조의 지방행정력이 강한것도 한건 한다. 그리고 사상 측에서도 노예 해방에 관한 사상이 유럽처럼 없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노비 비율이 30%가 넘은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경신 대기근 같이 국가적 위기로 인해 하층민의 삶의 질이 떨어진게 가장 큰 원인이었고 이후 차츰 안정되면서 영조 때는 10% 이하로 줄어든다.(무려 이영훈의 주장이다) 이렇듯 조선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에는 그 특수성이 좀 있다. 로마제국도 지중해를 호수처럼 가지고 논 나란인데 그런 대제국과의 비교는 좀 조선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이다. 조선이 남긴 기록이 많아 까일꺼리가 많은것도 있고 결론적으로 그 특수성을 좀 따지고 봐야 하지 자국민의 절반을 노예로 삼았다는 어느정도 자극적인 문구는 약간 삼가해야 할 필요도 있다.

ㄴ 전근대의 평민의 삶은 실로 비참했다. 음지에서는 언제나 인간이 거래되었고 서유럽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이 수두룩 했으며 거의 노예취급을 받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노예제는 어디까지나 음지의 영역이였며 국가가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그 재산권을 보호한 사례는 드믈다. 조선은 최고법에 노예제를 명시했고 수많은 규정을 통해 노예주의 이권을 보호했다.국가 스스로가 수십만의 노예를 가진 최대의 노예주였으며 주기적인 호구조사를 통해 노예의 숫자를 유지했다. 조선 성종처럼 사회가 안정할때도 노비의 비율이 30프로는 유지했고 전쟁,기근시에는 50프로를 넘어섰다.이것은 단성호적,성종실록에서도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조선이 타국가보다 사악했거나 피지배층을 착취했던것은 아니다. 조선의 왕들은 높은 도덕교육을 받았고 지배층들은 스스로가 사치를 억제했으며 국민들의 비참한 삶을 안타까워 하며 최선을 다해 구휼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해서 결과가 좋은것은 아니다. 중앙집권적 폐쇄적 유교국가는 도덕을 내세우며 국민들을 통제했고 위민정신을 가진 군주들은 노예제를 더욱 공고히했다. 역사를 배우는것은 자국을 비하하기 위해서도 찬양하기를 위해서도 아니다. 정확하게 과거의 사실을 알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형과 유교문화, 중앙집권, 쇄국, 신분제가 만났을때 어떠한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파악하고 이 땅이 얼마나 노예제도에 취약한지를 알 필요가 있다.

위의 헛소리들 다 집어치우고 우리나라는 예나지금이나 중국 또는 일본을 침략해 포로를 얻어 인력으로 써먹는게 아예 불가능했기에 같은 헬조선인들 중에서 하자가 있는 사람을 부려먹은게 바로 노비라는거다. 그러니까 헬조선의 사디즘에 해당되며 우리 인간처럼 이성을 가진 존재가 어디까지 잔혹해질수있고 위선적이게 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그러니까 우리는 과거 노비라는게 존재했다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자.

노비는 노예인가? 농노인가?[편집]

결론은 노비는 농노보다는 고대 노예 또는 미국 노예에 더 가깝다.

ㅇㅇ 그리고 농노가 한 계급으로 존재할만한 양의 농장을 가진 귀족이 드물었다. 농노는 땅에 의한 구속이며 노예는 인신구속이므로 인신구속에 속하는 노비는 노예의 한종류라고 할 수 있다.

국뽕새끼들은 노비는 노예가 아냐. 왜냐면 대우가 괜찮으니까! 라며 본질을 흐리는데.

ㅅㅂ 그런식이면 그리스 로마 시절 노예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세력가의 노예로 살면서 어지간한 평민따위 개무시하고 사는 케이스도 있었는데? 그 세력가의 가정교사도 하고?

노예에 대한 정의는 대우에 있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신구속에 있다. 국뽕새끼들은 어디서 외거노비 가지고 와서 노예랑 다르다는데 서양에서도 외거노비처럼 지 집 따로 놓고 설렁설렁사는 케이스가 있었다.

그러니까 자꾸 노비는 노예보다 대우가 좋았어요. 라는 헛소리 좀 그만하자. 그리고 민주제가 도입된 고대 아테네와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성리학 탈레반 조선 후기 둘중 어느쪽이 더 살기 좋은지 머리를 잘 굴려보자.

또 국뽕새끼들이 양민들은 역이나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역과 세금이 없는 노비로 자발적 신분강하를 했다는 헛소리를 하는데 막상 노비도 제집주인 대신 군역 부역 다 갔고 아예 노비로 구성된 군대도 있었다. 거기에 세금도 노비가 대신 낸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엔 인지부조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자발적 노비가 일어났다는 저 논리로 인해 조선은 멀쩡한 사람이 오죽 생활이 힘들면 스스로 노비가 되길 자청한 지옥국가라는 논리가 성립하지만 국뽕들은 그걸 모른다.

첨언하자면 농노가 무슨 노예보다 나은 신분인 줄 아는데 그건 또 아니다. 농노는 토지라는 계정에 귀속된 템이다.

농노가 노예보다 낫다. 노예가 농노보다 낫다. 논쟁은 헬조선에서 상근이 낫냐 공익이 낫냐와 비슷한 수준의 별쓸데없는 논쟁이다.

자꾸 노비가 노예보다 낫다는 넘은 저기 신안 염전노예주랑 똑같은 발상이다. 그넘들도 느그랑 비슷한 소리하더라.

현황[편집]

정시퇴근이 뻔뻔하다는 헬조선의 현실 ㅠㅠ....

물론 현대에 와서도 헬조선의 유구한 노비제 역사가 단박에 어떻게 될 리는 없으며 당연지사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양인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지 안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따로 독립을 안하고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경우 이것과 비슷한 처지가 된다. 어차피 솔거노비마냥 집에 있을거면 사고쳐서 속썩이지 말고 부모님 말씀 잘듣고 일이나 잘 도와드리자.

사극에서[편집]

항상 뭔가를 봤다고 함.

관련항목[편집]

  • 추노 - 농담이 아니라 조선의 리얼한 현실이었다. 임진왜란때 경복궁 방화 소실 사태도 노비 추쇄(추노관)를 관할하는 장례원에 노비들이 지른 불이 궐로 옮겨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ㄴ 노비들이 불태웠으면, 왜놈들이 리얼 경복궁 관람한 기록은? 왜놈들이 노비들 잡아와서 불 놓은 거냐?

도성의 궁성(宮省)009) 에 불이 났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010) 이 있는 곳이었다. 역대의 보완(寶玩)과 문무루(文武樓)·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書籍), 춘추관의 각조 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史草),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草稿)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타버렸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임해군의 집과 병조 판서 홍여순(洪汝諄)의 집도 불에 탔는데, 이 두 집은 평상시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유도 대장(留都大將)이 몇 사람을 참(斬)하여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亂民)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선조실록 25년 4월 14일 기사인데 선조실록이 미쳣다고 쪽본애들이 불지른걸 자기들 백성들이 질렀다고하냐? 것도 공가노비의 문적 운운하면서? 만약 니말대로면 조선왕조가 더 악랄해서 쪽본놈들이 불지른걸 노비복구할 구실쌓으려고 백성들이 공가노비 문적 불지른거라 한거네?
ㄴ 경복궁 문서 보면 일본 측 사료하고 "왕이 피난갈 때 사관들도 같이 피난갔는데 어떻게 백성들이 불질럿는지 알 수 있냐"며 반박하던데?
  • 티거 - 어떤 전차작명가에 의해 종종 노비라고 불린다. [[1]]

각주

  1. 그래서 여포의 아버지는 노비인데 여포는 양민이었다. 그리고 여포는 싸움실력 하나만으로 관직까지 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