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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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편집]
중국 수나라 문제 때 시작했다. 이전까지 쓰던 구품중정제 같은 병신 제도에 비하면 그나마 공정했기에 천 년 넘게 지속된다. 이 제도는 짱깨 기준에선 전근대 마지막 왕조 청나라까지 유지되었으며, 한반도에서는 고려 때 유교와 함께 도입되었다. 사실 신라 때 '독서삼품과'가 있었는데 골품제라는 개병신 신분제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실질적으로는 고려부터 시작되었다.
시대별 구분[편집]
고려[편집]
고려의 과거는 제술과(진사과), 명경과, 잡과, 승과 네 가지로 나뉜다. 제술은 만들고 짓는다는 뜻으로 이름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문예 방면의 재주를 기준으로 인재를 뽑는 것이고 명경과는 유교의 경전에 대해 묻는 시험이었다. 잡과는 법률·의학·천문·지리 등 기술 과목으로, 승과는 불교 경전에 대해 묻는 시험이었다.
당시는 문과가 칭송받던 시절이라서 제술과가 1지망, 명경과가 2지망이었다고 보면 된다. 무신의 등용을 위한 무과시는 막바지 공양왕 때 비로소 실시되었다. 괜히 무신정변이 일어나던 게 아니다. 시험은 3년에 한 번 봤는데 한 번 떨어지면 3년 동안 재수생이다 8ㅅ8
잡과는 기술관 등용 목적이었는데 위상이 가장 낮았다.
조선[편집]
조선의 과거는 생원•진사시(소과), 문과(대과), 무과, 잡과로 나뉜다. 3년마다 치르는 정기 시험(식년시)와 그 외에 현량과, 별시, 충량과, 기로과 등 존나 많은 비정기 시험이 있다. 꼬우면 이징옥처럼 천거(공천) 받는 방법이 있다.
시험 과정이 5단계로 구성되어서 존나 복잡하고 시험 자체도 존나 어렵다. 그냥 서울대 제수해서 치는 시험따위랑 비교하면 안됀다 과거제는 몇년동안 해서 붙는 시험이 아니거든. 백패 수령자는 매년 200명 꼴이었다고 한다. 백패 받은 사람 중에서 치는 게 대과였다.
그래서 대과는 응시하는것 그자체도 영광이다. 조선 왕조 시기 과거 실시 503년 동안 문과 급제자는 모두 1만 4615명에 불과했다. 매년 평균 29명만 통과한 셈인데 유명한 사람으로 을사오적 중 2人 이완용과 박제순이 있다. 시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소과 초시(1차 시험) → 소과 복시(2차 최종 시험) → 합격 시 백패 수령, 진사 신분 획득[1] → 대과 초시 → 대과 복시 → 대과 전시(3차 최종 시험)[2]→ 홍패 수령(급제).
물론 생원시, 진사시에 붙지 않더라도 문과에 응시할 기회는 있다. 오성과 한음도 소과를 스킵하고 바로 대과에 붙은 인물들이다. 단지 대부분은 위의 과정을 밟았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덕분에 급제자 대부분이 30대 중반의 아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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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과거 폐지(갑오개혁)까지 누계한 지역별 과거 합격자 수. 당시 제주는 전라도에 소속되어있었지만 문화적 차이 때문에 그냥 따로 떼어서 파이를 만든 듯하다.
사진 출처 기사가 평안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파이에서는 평안도 지분이 잘려나가 있다.
서울 합격자 비율이 매우 크고 아름답다. 과거 시험을 서울에서 봤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유생들은 시험 보러 오기도 힘듦 ㅋ 경기까지 포함해서 수도권으로 확장한다면 43.9%다. 조선 전기, 중기에는 어땠는지 알 길 없지만 정말 좆같이 뽑았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반역향이라는 훌륭한 제도 덕분에 자기 고향에 낙인이 찍히는 순간,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은 바로 접고 다음 생을 기대해야 한다...까지는 아니고 생전에 반역향 신세에서 어찌어찌 탈출하고 늘그막에나마 응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역향의 대명사쯤 되는 평안도가 홍패를 이렇게 많이 받았던 것은 당시 특별히 탕평책을 실시했던 영조 시기라는 점, 숙종 이후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화폐 경제 덕분에 상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한 평안도의 경제적 여유와 이를 통해서 늘어난 응시 기회 등이 있다. 평안도가 차별을 많이 받았다더니 대과 합격자 수가 의외로 많다는 생각은 잠시 접자. 저 평안도 급제자 중에서 95%가 낮은 신분이라는 제한 때문에 합격했어도 한직에 꽂혔거나 제대로 관직에 앉은 비율은 8도 중에서 제일 낮았다. 여기에서 신분이 낮다는 것은 족보에서 급제자의 이름 또는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거나 자기 씨족 중에서 자기가 유일한 급제자인 경우가 해당된다. 또 조선왕조실록에서 신분이 '미천하다', '비천하다', '서얼 출신이다' 같은 기록이 있거나, 가까운 조상 중 벼슬아치가 없는 몰락 가문 출신도 포함한다. 쉽게 말해서 뽑힌 가문만 계속 뽑히는 구조라는 것이다.
경상도에서도 대구와 경상우도는 이인좌의 난 때부터 흥선대원군 때 영남만인소 이전까지 대과 응시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고 나머지 다른 지역도 평안도보다 쬐끔 나은 수준이었다. 과연 우덜식 탕평답다.
그 외에도 뇌물, 시험 부정행위, 가문의 레벨, 고향, 붕당 소속, 빽 등에 의해서 시험 당락과 근무지 배치가 결정 되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합격한 인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대단한 인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완용이 과거 급제했다는 사실을 들려준다면 윾교 탈레반들이 기모띠해 할 것이다.
여담[편집]
흥미로운 점은 고려 시대에는 무(武) 관련 시험이 망하기 직전까지 없었는데 성리학 윾교 탈레반 조선 시대에 무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폐단은 조선 중기 이후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갑오개혁의 내용 중 하나가 과거시험 폐지였을 정도로 좆망하기 시작한다.
의외로 똥남아나 좆본 등에서도 존재했다고 한다. 좆본에서는 헤이안 시대에 도입되었다. 한국보다 빨랐다.
현대에도 공무원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다. 급식충+N수생 열화판인 수능이라는 것도 있다.
조선에선 7, 9급은 서리, 아전이다. 이 새끼들은 세습직.
- ㄴ 아전이나 서리는 사실상 10급이나 별정직. 엄연히 9품관까지 따로 있었는데 뭔 헛소리?
- ㄴ헛소리는 너지. 지금 7, 9급이 하는 업무가 딱 서리 아전이 하던 업무여. 7, 9급이 고시봐서 되는거냐?
- ㄴ 근데 서리나 아전이 시험쳐서 되는 거였냐? 고시는 아니라도 7, 9급도 엄연히 시험 치잖아?
- ㄴ헛소리는 너지. 지금 7, 9급이 하는 업무가 딱 서리 아전이 하던 업무여. 7, 9급이 고시봐서 되는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