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조무위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청과 일본의 모습. 멀리서 담배 피우고 있는 건 관망 중인 러시아.
조선에게 끼친 영향[편집]
일본의 본격적인 조선 침략 준비가 청일전쟁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동학농민운동이 타협으로 끝나는데 영향을 끼쳤고, 이제는 외세가 조선에 들어와서 빡칠 대로 빡친 동비들이 2차를 일으키게 되었다.
개요[편집]
1894년,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합하던 일본과 청이 조선 정부의 동학난 진압 요청을 명분으로 대규모 군대를 파병해 충돌한 전쟁이다.
조선 정부 대다수 대신들은 기를 쓰고 원병 요청을 반대했으나 희대의 김치년인 민비와 그의 친척 민영준이 빼애애액을 시전해서 이 꼴이 난 거다.
이 전쟁에서 조선의 2000년 마스터였던 중국은 크게 패배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이제 일본이 영향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격퇴한 이후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속국이 된다. 어떻게 일본이 청과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지? 일본이 그렇게 셌다니...
아마도 러시아는 병력이 대다수 유럽 쪽에 있고 일본은 최상의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지구 반 바퀴 돌면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싸워야 했으니...
청나라는 딱히.
배경[편집]
청의 자존심 지키기 욕구와 일본의 대륙 진출 욕구의 충돌이다. 두 목표가 딱 충돌하는 지점은 바로 조선과 랴오둥 반도였다.
청은 청프전쟁 패배로 베트남에서의 종주권을 완전 상실하였기 때문에 조선까지 잃기는 싫었고 일본은 그냥 한반도가 옆 동네이고 반도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대륙으로 세력을 뻗치고자 하였다.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사 시간에 졸지 않은 병신들이라면 다 알 것이지만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동학농민운동과 톈진 조약 때문이다. 여기서 톈진조약은 2차 아편전쟁 이후 영프 연합군과 청나라가 맺은 톈진조약이 아니라, 1885년 청일이 갑신정변의 결과로 맺은 톈진조약을 가리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갑신정변으로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이런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대비하고자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맺은 조약이다. 그러니까 급진개혁파가 갑신정변이란 똥을 싸지만 않았어도 생길 일 없었던 조약이다. 만약 생겼더라도 훨씬 나중에 생겼겠고. 이 톈진조약에서 청과 일본은 갑신정변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와 있었던 양국의 군대를 즉시 철수하고 만약 앞으로도 다른 한쪽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다른 쪽 군대도 자동으로 조선에 주둔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사실 이 조약은 당시 조선의 주도권은 청이 잡고 있었기에 청나라에 이득이 될 것 없는 병신 같은 조약인데 당시 병신 같은 청나라는 이걸 수용했다.
어쨌든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터지자 병신 같은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진압군 지원을 요청했고 이후 톈진조약으로 일본군도 조선에 파병한다. 이때 청은 진짜 진압을 위하여 충청도에 있는 아산만에 군대를 보내는데 일본은 인천만에 병력을 보낸다. 처음부터 난을 진압할 생각 같은 건 없었고 조선 먹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개전[편집]
동학농민군은 외국 군대의 파병 소식을 듣고 외세에 침략 구실을 제공할까 봐 전주 화약을 맺고 일단 해산한다. 이후 병신 같은 조선 조정은 청일 양국군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요구하나 애초에 진압할 생각도 없이 한성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일본군은 조선 조정을 좆까고 다짜고짜 경북궁을 무단으로 점령한다. 이때 조선과 일본 양국군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하나 조선 조정의 병신 같은 고종과 병신 같은 민비가 존나 빨리 잡히면서 별 손 쓸 일도 없이 상황이 종료된다. 여담으로 이때 조선군의 무기 수준은 예상 외로 꽤 좋았다고 해서 꽤 동등하게 싸웠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고작 일본군 고함 하나듣고 조선군이 겁을먹어 찌질하게 항복했다는 소리가 떠돌고는 하는데 당시 일본군의 거짓기록이거나, 훗날 역센징이 퍼트린 유언비어니까 걸러듣기를 바란다.
조선 왕실을 확보한 일본은 그대로 갑오개혁을 강요하며 친일 인사로 채워진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청을 몰아내기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아산만에 있던 청 함대를 일본 함대가 공격(풍도 해전)하면서 개전하고 이후 양국이 서로 선전포고를 하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개[편집]
여기서 양측의 무장 수준을 확인해보자.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청군의 무장 수준은 일본군에 비해 우수하였다.
일본군은 한 발 쏘고 재장전하는 단발식 후장소총인 무라타 소총을 휴대한 반면, 청군은 볼트액션식인 마우저 소총에 개틀링까지 있었다.
게다가 보급 상황도 본래 조선에 영향력이 컸던 청군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일본군의 압승이다. 이러한 결과의 원인은 청군의 형편없는 기강과 사기 때문이다. 철저한 근대식 훈련을 거쳐 기강이 잡힌 일본군과 달리 동네 깡패를 징집한 청군은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병신 집단이었다. 그러니까 전투가 시작되면 일본군이 각 잡힌 사격으로 청군을 잡고 청군은 그대로 쫄아서 튀는데 그마저도 정신없는 퇴각이라 인명피해 매우 커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이 시기에 일본은 사관학교에서 엘리트들을 뽑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휘관부터 수준 차이가 남. 해전에서도 일본에 없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두 척이나 있었던 청군 북양함대가 더 유리하게 싸움을 진행할 수 있었으나 사기와 훈련의 차이로 인해 북양함대는 철저히 전멸하는 수준으로 깨진다.
청의 수병들이 전함의 포대에 빨래를 너는 꼴을 본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이미 청일전쟁 이전에 북양함대도 병신임을 인지한 듯하다. 북양함대조차도 정말 무기만 사왔지, 훈련이 개판이었다는 소리다. 이후 중국에서의 전투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일본군이 청군을 학살하고 청군은 학살당했다.
종전[편집]
결국 좆됐다는 것을 느낀 이홍장은 더 좆되기 전에 일본과의 정전협정을 진행한다. 이렇게 체결된 것이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본인이 즐겨 찾던 복어집으로 이홍장을 불러서 체결했다. 능욕 수듄 ㅗㅜㅑ
이 조약에서 청은 일본군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일본의 돈 셔틀로 전락하고 일본에게 최혜국 대우를 하며 요동 반도와 대만, 팽호 열도를 내준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으로 이들이 보낸 편지 한 통 덕분에 일본은 쫄아서 요동 반도를 바로 토해낸다.
영향[편집]
일본은 이 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제국주의 군국주의로 한발 다가선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얻은 막대한 배상금을 산업화를 위해 사용하여 산업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중국은 아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위상을 완전히 잃었으며 조선에서의 영향권을 상실하여 자신들은 덩치 큰 병신임을 전세계에 다시금 확인시켰다. 이 때문에 큰 충격을 먹은 중국은 중체서용의 온건적 개혁인 양무운동보다는 적극적 개혁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물론 병신 같은 서태후 때문에 다 실패하고 청나라는 망한다.
조선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삼국간섭에서 일본이 러시아에 자박꼼 당하자 이에 크게 감명 받은 조선 조정은 러시아의 잦이를 빨기 시작한다. 이는 결국 을미사변과 러일전쟁까지 가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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