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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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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일명 북베트남)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던 프랑스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배경[편집]

베트남은 1802년부터 응우옌 왕조가 들어선 바가 있으나 1862년 체결된 제1차 사이공 조약을 계기로 20년 간 식민지화가 진행되었고, 1885년 청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가 톈진 조약을 통해 베트남 전역을 차지하면서 60년간의 프랑스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프랑스가 나치에게 멸망했고, 일본 제국비시 프랑스 정부를 베트남에서 몰아낸 후 베트남 제국을 세웠다. 일본의 패망 이후 베트남 제국도 같이 없어졌다.

포츠담 회담의 논의 결과에 따르면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베트남에는 영국이, 북베트남에는 중화민국이 진주하기로 되어있었고 이에 따라 북베트남에 국민혁명군이 진주했으나, 국공내전 발발 이후 국민혁명군은 되돌아갔다. 영국은 영국령 인도 제국의 독립 문제로 되돌아갔다.

이후 호찌민베트민 따까리들은 즉시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을 세웠다. 그리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서 사회주의를 수단으로서만 이용하던 호찌민은 기존 식민제국들을 부정적으로 보던 미국에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새 베트남을 승인해줄 것이라고 믿었으나, 하필이면 전쟁이 끝나자마자 냉전이 시작되는 바람에 사회주의 국가인 북베트남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원래 지배자였던 프랑스가 돌아와버렸다. 이렇게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개 과정[편집]

프랑스군이 하이퐁을 포격하자 호찌민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선포했다.

아무리 예전보다는 약해졌다고 하더라도 프랑스는 여전히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고, 호찌민의 독립군들 따위가 프랑스를 이기기는 어려웠다. 베트민들은 일방적으로 줘털리고 정글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해야 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제국의 무덤 중 하나로 유명한 곳이다. 자기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던 베트민 게릴라들은 프랑스가 박멸시킬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그리고 이들이 프랑스군을 몰아낼 때마다 지역에서 민심을 얻는 것도 덤.

그런데 이들도 결국 공산주의자였던지라 민족주의 세력과는 마찰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세력인 베트민들은 같은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도 공격했고, 딥빡한 민족주의자들은 자기들이 혐오하는 프랑스와 일시적 동맹을 맺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까오다이교를 믿던 찐민테 같은 인물들은 프랑스, 베트민 모두와 싸웠다.

1949년 중국이 적화된 이후 베트민은 새 중공 정권에게 지원을 받았다. 전투 경험이 쌓인 베트민은 1951년 하노이 진공에는 실패했으나, 프랑스의 국내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반전 여론이 강해지자 프랑스군은 갈수록 베트민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프랑스가 쳐발리면서 프랑스군이 북베트남군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협정을 맺으면서 북베트남에서 물러났고, 2년 후 남북 동시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남베트남에서는 응오딘지엠이 친프랑스파와 바오다이 황제를 축출하면서 베트남국이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