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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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세계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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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선 탈조선 선배
탈조선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본보기이자 우상이며 진정한 인간 승리자. 22살에 표류하여 살아 돌아가겠다는 집념과 함께 약 14년 후, 극적인 조선 탈출에 성공하여 쪽본 나가사키에서 정식으로 배를 얻고 그의 나이 36살인 시름시름 아재가 다 되어서야 드디어 네덜란드로 돌아갔으며, 그의 파란만장한(어찌보면 지옥과도 같은) 지옥 토끼불 반도 속에서의 기기묘묘한 경험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본국으로 돌아간 후 책을 쓰기도 했다. 그 책은 다들 알다시피 하멜 표류기. 이 책으로 말미암아 환상향의 나라라는 거품에 가득차 있던 조선의 실체가 서양에 최초로 전해졌다는 의의도 있겠다.
나를 포함한 탈조선을 꿈꾸는 모든 젊은이들은 노오오력 하면 이루어진다는 비꼬는 말에 좌절하지 말고 힘들 때마다 하멜갓을 떠올린채 정신을 가다듬으며 암스테르담의 축복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또한 하멜을 포함하여 그 일행이었던 탈조선 선배들과 미처 탈출하지 못한 채 반도에 남게 된 표류 선배 박연, 조선에 스스로 남겠다고 선언한 한 명의 요리사, 그리고 감옥에서 죽은 두 명의 네덜란드인 및 따로 기록되거나 언급되지 않았지만 희생되었을 다른 네덜란드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모두 모니터 앞에 일어서서 3초 간 묵념한 후 읽도록 하자.
평범했을'뻔'한 일생, 그러나..[편집]
동인도 회사의 서기겸 상선 스페르버르 호의 1등 항해사를 겸하던 ㅅㅌㅊ 네덜란드 청년. 겜앰창인생 디씨러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이시다.
쪽본 나가사키를 목표로 태평양을 항해하던 도중 재수 없게 폭풍 맞고 이리저리 표류하다 제주도에 상륙한 뒤 현지인들에게 붙잡혀 몇 개월동안 개 취급 받으며 살다가 전라도로 옮겨진 후 수도 한양으로 압송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ㄴ 이건 어느정도 오류가 있는데 하멜이 제주도에 처음 왔을 당시 목사였던 이원진은 하멜 일행을 굉장히 잘 대접해줬다. 하지만 이원진이 영전하면서 온 후임이 병신이라 고통받은거다.[1]
제주도에서의 생활[편집]
표류 선배에게 들은 조선의 현실과 갖가지 고생[편집]
제주도에 붙잡혀 있던 도중 놀랍게도 표류 선배인 박연(본명 얀 야너스 벨테 브레이/심지어 같은 네덜란드인) 을 만나는데 당시 네덜란드를 비롯한 영국 등 유럽은 미개척지 태평양을 항해하는게 유행은 아니고 트렌드였나보다.
심지어 벨테 브레이는 하멜 일행을 만난 후 돌아와서 옷 소매가 전부 젖을 정도로 펑펑 울었다고 하며, 하멜은 벨테 브레이에게 같이 탈출하자 권유했으나 이미 벨테브레는 네덜란드어를 거의 다 까먹었을 정도로 조선에 정착한지 한참된지라;;;
표류 선배이자 조선의 생활관에 찌들 대로 찌들은 후 탈출할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한 벨테브레이의 심정이 너무나도 잘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ㄴ벨테 브레이는 이미 조선에 정착한지 오래였다. 외국인치고는 좋은 대우에 관직까지 있겠다 거기다 가족까지 둔 마당에 따라갈리가;;; 거기다 벨테 브레이는 자칫하면 죽기 딱 좋은 사략선 장교였는데 그 생활 하고 싶겠냐. 지금으로 치면 벨테 브레이와 하멜의 입지는 베링해협 꽃게잡이배 선원 Vs 정규 원양어선 선원의 차이 그 이상이다.
첫 번째 탈출 시도[편집]
하멜 일행은 가시덩굴로 덮힌 집[2] 에 감금당한 채로 유일한 희망인 왕의 회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출을 나가는것까지도 감시당하던 그때, 외출하던 두 사람이 해안가에 주인 없이 떠다니던 배를 발견하고 급하게 물 한 사발을 들이키고 빵 두 덩이를 갖고 배를 타 탈출하려했으나...
안타깝게도 서양 배와 구조가 다른 조선 배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돛조차 못 피고 첫번째 탈조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탈조선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곤장 25대를 쳐맞는다. 참고로 하멜 표류기에는 이 곤장때문에 두 사람이 한달이나 누워있었어야 했다는 기록이 있음.
한양으로 압송되는 과정과 그 후[편집]
전라도로 압송되는 중 조선인 모두가 배멀미를 심하게 한다는 것을 눈치챈 하멜과 그의 일행들은 '통수쳐서 싹 다 물에 빠트린 후 배를 탈취해서 빠져나갈까' 라고도 생각했지만 압송을 목적으로 띄운 선박이라 돌아갈 물자도 부족했으며, 당시 조선의 선박과 유럽의 선박은 다른 점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다룰 수 없다 판단하고는 그만 두었다고 한다.
전라도를 거쳐 한양으로 가던 중 중간 중간의 마을에 들렀던 압송 일행 속에서 조선인들의 생활 양상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하멜에게 그들은 거의 문화 충격을 넘어서 신세계급이라 하멜 표류기에 전부 기록했다고 하며, 한양으로 왔을 때 효종을 만나 자신의 원래 목적지는 나가사키니까 쪽본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기각당한다. 왜인지는 관련된 기술이 없어 알수없지만.
보통 양인이 조선에 오면 주로 명이나 일본을 통해 송환시키는게 관례이지만 하멜의 경우 혼란스럽던 당시 대륙의 상황상 그건 불가능했고 남은 루트는 일본인데 대체 뭔 이유로 기각당했는진 모르겠다.
참고로 벨테 브레이와 그 동료들 또한 이런식으로 송환될 예정이였지만 당시 명은 전시상황이였고 일본은 그가 기리시단(예수쟁이)이라는 이유로 거부해서 쭉 조선에 눌려앉게된 케이스다. 하마터면 하멜 또한 그 케이스가 될뻔했다. 하멜의 경우는 아예 일본으로 보낼 시도도 안한 게 일본에서 가톨릭교도들이 반란 일으켰다 몰살당한 사건이 터진지 20년밖에안되서 보내면 죽는거 아닌가 해서 안 보냈다. 그나마 일본애들이 크리스트교 애들 안받는다고 벽돌에 예수 새겨놓고 밟으면 통과시켜주는 방식 썼는데, 하멜은 신교도여서(가톨릭 애들은 그거 성물 취급한다나 뭐라나...신교도는 그냥 우상 취급함.) 그런 거 신경 안쓰고 밟으면 땡인지라 별 문제는 없었다. 그거까지는 조선이 알 턱이 없었다는 게 문제지. 다 기리시탄이라고 묶어서 호칭하는 걸 보면 당시 일본도 가톨릭, 신교도 구분은 못했던 거 같고. 거기다 표류한 상선에서 득템한거 돌려주기 싫었던 거도 한 몫 한걸로 보인다.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국왕인 효종이 북벌을 위해서 화포, 총포 기술이 능숙한 하멜 일행을 붙잡아 두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효종은 하멜 일행을 훈련도감에 편입시켰고 월급도 꼬박꼬박 주면서 정착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하멜이 타고 있던 상선의 선원들 중 기술자들은 조선에 오기 전에 고기밥이 되어버려서 무의미해짐.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탈출 소동[편집]
한창 지옥의 군사로써 노동하던 중...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대접받은 모양이지만...조선이 형님형님 하며 받들어 모시던 타타르(청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당시 하멜의 일행이자 스페르버르 호에서 함께 항해하던 '핸드릭 얀스', '핸드릭 얀스 보스'는 지나가던 사신들을 보자마자 부대를 이탈하고 달려가서는 네덜란드로 제발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했지만 재수없게도 타타르 사신들은 네덜란드어를 몰라 소 닭 보듯이 멀뚱 멀뚱 있었다고 한다.
멘탈이 깨질대로 깨져가는 와중에 본능적으로 좆됐다고 판단한 핸드릭 얀스는 죽기 살기로 도망쳤으나 추노 끝에 결국 붙잡혔으며, 핸드릭 얀스 보스 역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여기서 조선식 외교와 판단 클라스가 나오는데, 당시 타타르 사신들이 네덜란드인을 보고 좌초된 스페르버르 호에서 취한 30만 냥에 달하는 재물을 요구해올까봐 사신들에게 막대한 양의 뇌물을 쥐어주어 사건을 은폐시킨 후 붙잡은 두 명을 감옥에 투옥시켰다 한다. 역시 조선 특유의 무마시키는 스킬은 예로부터 되물림 되어 내려오는 것이었다. 조선측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인 보고 몰래 교역해서 무기 만들고 있는거 아닌가 의심할까봐 난리가 났다고 한다. 사실 이 뒤 네덜란드인 처우가 단체로 개차반이 된 걸 보면 이 쪽이 더 설득력 있다.
어떡게 무마된 듯 하였으나 조선 사신들은 연대 책임이라는 명목 하에 하멜을 포함한, 탈출 소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33명의 네덜란드인들 전부를 위험 분자로 간주한 채 곤장 50대[3] 를 치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효종은 도둑질하려 온 것도 아니고 표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있는거니깐 그러지 말자며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탈출의 꿈이 무너져 좌절한 채 감옥에 투옥되었던 핸드릭 얀스와 핸드릭 얀스 보스는 음식을 먹길 거부하다가 결국 죽었다고 하며, 결국 이 사건은 무고한 네덜란드인 2명의 희생으로 마무리 지어지는 듯 했다.
이때부터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처우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다.
타타르(청나라) 사신의 재차 방문으로 인한 두 번째 위기, 우리는 왜 죽어야 하는가[편집]
그 해 8월, 타타르 사신이 다시 왔다.
나름 전과 아닌 전과가 있다고 판단했던 조정 측은 당시 군졸이었으며 조선말을 잘 하는 네덜란드인 3명에게 남만인들이 재차 상륙했으니 가서 지원하라 라는 거짓말을 한 후 강제로 전라도 해안에 보내 버려 그나마 하멜 일행들이 타타르 사신들과 대화할 수 있는 연결 수단이 사라졌다.
심지어 네덜란드인들을 전부 죽여야한다는 소리도 거세지고 있었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조선 장병과 죽을 때 까지 싸우게 만들자' 라는 조선식 콜로세움을 열자는 애미 디진 발상을 내놓았는데 충격적인건 조선 관료들이 이 의견에 대해 명예로운 죽음이라며 되도 않는 논리와 함께 대부분 찬성했다는 것이다. 씨발 극혐..
ㄴ정확히 말하자면 명예로운 죽음으로 위장하려는 의도였다
ㄴㄴ 체격차이가 난다고 2 : 1로 싸우게 하려고 했다 하는데 이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음
당시 조선 관직을 가지고 있었던 벨테 브레이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하멜 일행에게 조정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전달하여 위기 의식을 심어주었는데(앞으로 3일만 버티면 살것이라고 말했는데, 뒤집어서 말하면 그 시점부터 3일간이 너님들 처분 논의하는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이다.) 때마침 운 좋게도 네덜란드인의 숙소를 지나가던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에게 살려 달라 애원했다고 한다.
이에 동정심을 느낀 인평대군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였으며 이를 본 효종 역시 하멜 일행을 동조하기에 이르러 결국 전라도의 유배 지역으로 보내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사스가 배우신 효갓종 인평갓군 ㄷㄷ
'그냥 일본으로 탈출해~', '그럴까?'[편집]
유배지여서 이들은 약 7년 정도 지냈으나 효종이 붕어한 후 현종 시대 때 흉년[4]으로 인하여 하멜을 포함한 33명의 네덜란드인들은 다수의 그룹으로 나뉘어 여수, 순천, 남원 등 서로 다른 지역에 이배되었다.
이배되기 전까지 같은 유배지에 머물렀던 네덜란드인들 중 몇몇은 조선 여자랑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는데, 16세기 이후 일본이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다수의 유럽인들을 남만인이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인이 그대로 따라 부르기 시작하여 네덜란드인들의 성은 모두 남씨가 되었으니 만약 본인이 남쪽 남씨라면 우월한 갓양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 하다.
물론 조선이 부르는 남만인은 말 그대로 그냥 '따라 부르는' 것이었을 뿐, 이들이 정확하게 어떤 사람인지, 동양인과 정신적, 신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며 그 근거는 아래 '여담' 단락에 나온다.
하멜이 간 곳은 전라 좌수영으로 그 곳의 좌수사들은 하멜이 탈출할 때 까지 총 4번 교체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이도빈과 정영 2명의 좌수사들은 네덜란드인들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이도빈은 술자리에서 그냥 일본으로 확 탈출하라는 이야기까지 듣기도 하여, 후에 실제로 하멜이 일본으로 탈출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밑에 나오지만 얘들 탈출한 뒤 조선 대응 보면 그냥 '탈출하든지 말든지' 한 것 같다. 대기근이라 먹일 돈은없고, 골칫거리인데 그렇다고 애먼 애들 처형해서 손이랑 명예 더럽히기는 싫고, 일본으로 탈출했더니 크리스찬이라고 죽여버리면 니들 운명인거고, 안죽고 본국 돌아가면 그냥 땡이고.
14년만의 탈출, 고향으로![편집]
좌수사가 바뀌기 시작하자 네덜란드인들에게 점점 적대적으로 대하고 새끼줄을 꼬지 못하는데도 계속 시키는 등 더더욱 노동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네덜란드인들을 착취하려고 작정을 먹은 사람이라 판단한 하멜과 그의 일행들은 1666년, 마침내 탈출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 동안 조정에서 주던 몇 푼 안되는 급료를 모으고 모아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산 후 하멜과 함께 한 8명의 일행들과 함께 드디어 탈출에 성공, 13년 전 목적지로 삼았던 쪽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보통 이렇게 되면 송환을 요청하는게 자연스럽겠지만 조선은 오히려 골칫거리를 해결했다는 식으로 책임자 몇 명을 문책하고는 끝냈다. 이후에 일본과 마찰이 생기자 이제 우리하고는 끝났고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이 후 일본에서 갖가지 신상과 조사를 받으며 1년을 더 지낸 후, 배를 얻어 그의 나이 36살, 내일 모레 40줄인 꼬추가 잘 서지 않는 아재가 다 되어서야 드디어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멜이 조선에서 탈주한 후에 일본이 하멜과 관련해서 왜 네덜란드인들을 계속 억류하고 있었냐면서 조선 측을 압박하는데, 조선 측에서 '얘네들 그리스도교도라 니네 나라 가면 죽을 거 같아 그랬어요'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씨알도 안먹히다가 대신에 일본에서 벨테브레이(박연)의 인도를 거부했던 사례를 들어서 역관광시킴.
이후 순천, 남원에 머무르고 있던 나머지 일행들은 하멜의 이야기를 들은 막부가 조정을 압박도 하고 데리고 있을 이유도 없고해서 조선에 남겠다고 자원한 요리사 얀 클라에천을 제외하고 얼마후 일본으로 보낸다. 같이 탈출한 동료들을 선발대로 돌려 보낸 후에도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하멜은 조선이 보낸 후발대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돌아가면서 길고긴 탈조센 여행기의 마침표를 찍는다.
여담[편집]
당시 유럽에서 조선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유럽인들만의 갖가지 상상을 비롯하여 아프리카 급의 "환상의 나라"로써 포장될 대로 포장되어지고 있었는데, 하멜의 일지로 인해 그 환상이 산산히 깨져 버렸다. 게다가 이건 쓴 실제 목적이 동인도회사에서 보상금 받으려고 쓴 거라 더더욱 악담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멜 일행은 조선에서 대갓집을 돌아다니며 네덜란드 민요와 춤을 추며 앵벌이를 했는데 이게 ㅆㅅㅌㅊ였는지 머슴 노비 새끼들까지 주인이 시켰다고 구라치고 앵별이를 시켰다고 한다 이런 시발놈들 그래도 나름 짭짤하게 벌었고 그렇게 배를 구해서 탈출을 할수 있었다.
헬조선에서 개같이 살 때 유사인류 취급당하던 스님들이 굉장히 잘해줬다고 한다.
조선 조정은 댕청하게도 약 14년간 하멜을 붙잡아뒀지만 그가 어느 나라 국적이고 어떤 신분이였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벨테브레이와 같은 나라 출신인 것만 알았는데 그 이외에는 없었다.
반대로 옆나라 쪽본의 경우엔 하멜의 신변을 확보한 뒤 단지 며칠도 안 되는 시간에 신상 조사를 낱낱히 파헤쳐 그들이 네덜란드인이며 당시 조선에서 겪었던 사건 사고들을 모두 캐냈었다고 하는데, 일본을 통해 이들이 화란(네덜란드)인이었다는 것을 듣고도 화란이란 나라가 정확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 조차 몰랐다고 한다. 여기에서 조선과 일본의 역량차이는 이미 상당히 오래 전부터 꽤 간격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멜이 놓고온 나머지 일행들은 하멜이 일본 막부를 통해 밝힌 인계 의사를 조정이 수용하면서 감옥에서 죽은 얀스와 얀스 보스 2명, 그리고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서 사망한 다른 네덜란드인들만 손해를 본 것이 되었다.
해외 교과서에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탈탈 털린 뒤 강화도조약까지 250년간 세계와 담을 쌓은 은둔국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어 부들부들하는 자들이 많은데 하멜의 안습한 경험담을 보면 그 표현에 틀림이 없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하멜의 표류기를 보고 조선과 교역을 시도하려 했으나 네덜란드ㅡ조선의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보고 있던 일본이 강하게 반발하여 무산됐다.
각주
- ↑ 원래 처음 도착했을땐 쌀, 밀가루, 소금, 물이 배급받는 식량의 전부였던 하멜 일행에게 이원진은 추가로 반찬을 챙겨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후임으로 온 새끼는 반찬 빼는건 기본이고 쌀대신 보리, 밀가루대신 보리가루로 대체했다고 함.
- ↑ 참고로 이 집은 효종의 숙부, 즉 광해군이 있던 집이다.
- ↑ 곤장이 무서운게 엎드린 채로 엉덩이를 맞는 거라 충격이 고스란히 불알 쪽으로 전달 되어 30대만 맞아도 불알이 다 터져버려 고자가 된다고 한다. 운 좋게 불알은 보존했다 하더라도 당시 상처를 완벽하게 소독할 만한 약품 같은 것이 없었고 대부분 민간 요법을 믿었던 시대라 치료라고 할 수도 없는 어설픈 조치로 인해 상처가 감염되어 더욱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 ↑ 이시기는 소빙하기라 냉해와 흉년이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