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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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Antonius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2차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의 대권을 노렸으나 자신의 능력 한계로 인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 인물이다.
안토니우스 가문은 영향력은 작았지만 역사는 긴 가문으로, 공화정 초기 이후로 기록이 남지 않은 귀족집안 친척들과 달리 평민 출신들은 호민관 재임 등으로 꾸준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다가,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건 마르쿠스의 할아버지가 집정관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어머니는 카이사르 가문 출신으로 외삼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6촌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라 카이사르와는 매우 먼 친척관계다. 친아버지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젊은 시절에 매우 방황했다고 한다. 계집질에 도박, 술먹고 패싸움은 기본이었고 호민관에 선출되기 위해 귀족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의 양자로 들어갔던 클로디우스의 정치깡패로도 활동하는가 하면 전설상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젖을 먹였다는 암늑대를 숭배하는 컬트의 사제 노릇도 했다.
그러다가 양아버지인 렌툴루스 수라가 카틸리나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판국이 되자 공부도 할겸 20살 때 그리스로 건너갔다. 동방에 있던 시절에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게 되는데 첫 상관은 폼페이우스의 막료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였다. (가비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내전 때는 카이사르 편으로 종군했으며 병사했다) 유대 왕국과 이집트에서 기병 대장으로 복무하면서 간덩이를 전당포에 맡겨놓은 듯한 용맹을 떨쳐 이름을 높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일으키자 이쪽이 전도유망하다고 판단했는지 전출을 신청해 카이사르 밑으로 들어갔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승승장구했다. 다만,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군단장으로는 차고 넘치지만 총사령관으로는 부족하다.'는 평을 남겼다. 훗날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노릴 때 벌인 뻘짓들을 생각하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트레보니우스나 데키무스 브루투스 등과 달리 갈리아 전쟁 막바지에 들어왔기 때문에 군단장급 인재들 중에선 막내의 처지였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내전 때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를 점령하기 위해 책무를 맡겼던 쿠리오가 아프리카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고 클로디우스의 아내인 풀비아와 결혼하여 그의 세력도 손에 넣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어쨌든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기원전 52년에는 재무관, 49년에는 호민관으로 선출된다. 호민관 재임 시절에는 원로원파들을 상대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버텼으나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자 로마를 떠나 카이사르에게 합류했다.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계속해서 카이사르 쪽에서 싸웠고(파르살루스 전투 때는 좌익을 맡았다) 폼페이우스 암살 후에는 부독재관으로서 로마의 통치를 맡았다. 하지만 이 때 뇌물과 여색을 너무 밝혀서, 어느 정도는 봐주는 경향이 있던 고대에도 욕먹을 정도라 카이사르에게 실망을 샀고 한동안 정치쪽에서는 중용되지 않았다.
이후 2년 간 조용히 지내다가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는데, 그에게 왕관을 바친 에피소드가 이 때 있었고 사람들의 싸한 분위기를 읽은 카이사르가 왕관을 다시 돌려줬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에는 삼두정을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를 만난 뒤 이집트를 위하겠다는 얼탱이없는 짓을 했다가 민심을 다 잃고 전쟁에서도 졌고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오보를 듣고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