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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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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초대 아우구스투스 2대 티베리우스 3대 칼리굴라

제정 로마의 2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로서 휘는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양자로 들어가기 전의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제정 로마의 기틀을 잡은 업적을 남겼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연거나 다를 게 없는 근위대를 이용한 통치, 델라토르(고발관) 제도를 활용한 정적 색출 및 숙청의 나쁜 선례를 남겨 야누스 같은 황제라는 평가를 받는다. (칼을 칼집에 꽂아두고 은근히 위협을 가하는 것과 실제로 그 칼을 빼서 휘두르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를 본국에 두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정도로 끝냈지만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이를 이용했다)

로마 황제들 중에서 집요할 정도로 자신의 신격화를 거부한 황제로도 유명하다.

친아버지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티베리우스로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 사후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자 옥타비아누스 대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선택했다.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와 그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이탈리아 본토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페루지아 전쟁을 일으키자 아버지 티베리우스는 여기에 호응했고 1년 뒤에 루키우스가 항복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네아폴리스(나폴리)에서 노예 반란을 꾀하는 등 옥타비아누스에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고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를 찾아갔으나 그에게 거부당하자 마르쿠스를 찾아간다.

어린 시절의 티베리우스는 이 때문에 죽을 고생을 다 했다. 네아폴리스에서 도망칠 때는 아기였던 티베리우스가 2번 울음을 터뜨려 일행이 전부 죽을 뻔하기도 했고 숲에서 산불이 나는 바람에 어머니 리비아와 티베리우스는 머리와 옷만 그을리고 살아남았는가 하면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인들의 공동 탁아소에 맡겨질 때도 있었다. (스파르타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다)

브룬디시움 협약으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상호 우애를 재다짐하면서 티베리우스 일가는 사면령을 받아 로마로 귀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리비아한테 푹 빠지고 말았다. 리비아는 상당한 미인으로 유명했고 교양도 풍부했으며 자신의 출신가문에 자부심이 대단한 여장부였다. 따라서 집안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리비아는 훌륭한 아내감이었는데 거기다가 예쁘기까지 했고 교양도 풍부했으니 옥타비아누스가 한 분에 뿅 갈만도 했다.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화약을 맺는 조건으로 그의 누나인 스크리보니아와 정략결혼을 했다가 섹스투스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첫 자식이 태어나자 자신의 딸이라는 인지 결정만 내린 후 이혼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최고 권력자로서 '내가 리비아와 결혼해야 겠으니 티베리우스는 이혼을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아버지 티베리우스는 장남 티베리우스와 곧 태어날 대 드루수스의 친권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받아들였고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아내가 되었다. 이후 대 드루수스가 태어나자 티베리우스는 동생과 함께 친아버지에게 가서 자랐다. 아버지 티베리우스는 재혼하지 않고 홀아비로 티베리우스 형제를 키우다 티베리우스가 9살 되던 해에 실의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두 형제의 법적인 보호자는 아우구스투스 부부가 되었고 형제는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두 양아들에겐 유독 따뜻하게 대했는데 자신과 닮은 점이 많았던 티베리우스보다는 쾌활한 드루수스를 더 이뻐했다. 물론 이는 그냥 정도의 차이였으며, 그 증거로서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편지에서 항상 티베리우스를 '나의 사랑하는 티베리우스',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 '내 아들 티베리우스'라고 언급하고 있고 티베리우스가 성인식을 치른 후에는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그와 의논해서 처리했을 정도였다.

티베리우스 형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지원으로 공적을 쌓기 시작했고,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인 아그리파의 딸인 빕사니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이 결혼은 고대 로마의 상류층에서는 매우 드물었던 연애결혼이었다. 혼전순결을 지킬 정도로 애처가에 일편단심이었던 티베리우스를 두고 동료들이나 부하들이 베스타 여사제 같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고대 로마에서 베스타를 모시는 여사제들은 성스러운 불을 관리하는 중요한 책임을 졌다. 이들은 은퇴할 때까지는 순결을 유지해야 했고 만약 이를 어기면 생매장되었다. 단 이런 생활은 사제로서 생활할 때만 한정이라 보통 40대에 은퇴했고 그 후로는 원하면 결혼할 수도 있엇다.) 이 때까지만 해도 티베리우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이자 황제의 친족으로서 활약했고 개인 생활도 아내 빕사니아, 친동생 대 드루수스 부부와 함께 보내는 정도로 소박했다. (티베리우스는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훗날 카프리 섬에 은둔한 것도 성격 탓이 컸다)

그러나 연이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티베리우스 본인의 개인사는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만다. 우선 장인인 아그리파가 급사했다. 잔병치레가 많았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강건한 군인이었던 아그리파가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건강을 관리할 틈이 없었는지 심장질환으로 덜컥 세상을 떠났다. 그 다음에는 게르마니아 전선에 나가있던 친동생 대 드루수스가 낙마사고로 인해 중태에 빠졌다. 급히 말을 몰고 달려간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품에서 진심으로 사랑했던 친동생을 떠나보내야 했고,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옮겨오는 동안 말을 타지 않고 관 앞에서 걸었을 정도로 큰 슬픔에 빠졌다.

그리고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생각하고 있던 후계자 구도가 대차게 꼬여버리는 원인이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와 재혼한 후 아기를 가지려고 했으나 전부 유산해 새로 얻은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친딸 율리아의 사위를 후계자로 삼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차기 황제로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율리아의 첫 남편인 조카 마르켈루스는 당시 로마에 퍼졌던 전염병으로 일쩍 죽어버렸다. 이에 둘째 남편으로 아그리파를 지명했는데 아그리파도 역시 급사했다. 여기에 '진심으로 내 후계짜로 고려중이다'고 말을 남긴 대 드루수스마저 낙마사고로 또 급사했다. 다행히 율리아는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남겼고 아우구스투스는 두 손자인 가이우스, 루키우스 형제를 양자로 들인 후 온갖 교육을 시켰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둘은 아직 어린애였고 후견인이 필요했다. 그럴 역할을 해줄 사람은 티베리우스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적시켜 후계자 자리를 준다. 이 과정에서 잘 살고 있던 빕사니아와 이혼한 후 친딸 율리아와 재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는 친어머니 리비아가 개입한 게 컸다. 권력욕이 대단했던 리비아는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이 후계자가 되길 바랬고, 드루수스가 급사하자 남은 아들인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마침 율리아의 새 신랑감을 찾던 아우구스투스를 설득해 율리아의 재혼상대로 티베리우스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날벼락이었다. 아내 빕사니아와 그 드물다는 연애결혼을 했고 슬하에는 아들 소 드루수스까지 있었던데다가, 빕사니아는 아그리파가 율리아와 재혼하기 전에 결혼한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본 딸이기 때문에 형식상 장인의 딸과 이혼하고 장모랑 결혼한다는 개족보가 되어버린다. 죽어도 이 결정만은 받아들일 수 없는 티베리우스는 유일하게 양아버지의 결정을 물려줄 수 있는 친어머니를 찾아가 울며불며 매달렸으나 정작 이 사태의 흑막이 리비아였기에 그 결정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 버틴다면 빕사니아와 아들 소 드루수스에게도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혼한 뒤에 훗날 로마의 거리에서 빕사니아를 다시 만났는데, 티베리우스를 알아본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떠나가자 큰 충격을 받은 티베리우스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빕사니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슬픈 에피소드도 있다.

원하지 않은 이혼과 재혼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그래도 결혼생활을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율리아와 티베리우스 간의 성격 문제, 율리아의 품행 문제에 고부갈등까지 터지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티베릴루스가 유아기 때 병으로 요절하자 결혼생활은 파탄나고 말았다. 유일한 안식처를 잃어버린 티베리우스는 격무에 자신을 파묻으며 잊어버리려 애썼고, 율리아는 수도 로마의 신전에서 공개 섹스를 한다거나 여러 남자들과 불륜을 하는 등의 사건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이 정도라면 가부장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해 이혼할 수도 있었고 직접 처벌할 수도 있었지만 상황이 도저히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기원전 6년이 되자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에 질려버렸다는 듯이 다 내던져버리고 로도스 섬으로 가서 자연인으로서 은퇴선언을 해버린다.

이러자 티베리우스가 성인이 된 후로 가문의 큰 일을 그와 의논해서 처리했던 아우구스투스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웠던 아들이었고 아내 리비아의 설득이 이어져 로도스 섬에 은거한 티베리우스에게 황제의 대리인 자격을 하사했고 곧 로마로 귀환하기를 바랬다. 허나 만사에 질릴대로 질려버린 티베리우스는 8년 동안 로도스 섬에서 나오지 않았고 전처인 빕사니아의 사이에서 본 아들 소 드루수스의 성인식을 치를 때가 되서야 로마로 귀환했다. 그러나 성인이 된 가이우스,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자신들의 지위에 위협이 되는 티베리우스의 귀환을 반기지 않았고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였고 티베리우스는 그 조건대로 소 드루수스를 공직으로 인도한 후, 3년 동안 사적인 일과 이사를 하는 걸 빼면 조용히 보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가이우스, 루키우스 형제는 뚜껑을 따고 보니 황제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파르티아로 파견되었으나 중간에 그리스, 이집트 등지를 돌며 놀았고 정작 중요한 일든 수행원들이 다 해치웠다. 그러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외교적인 사고를 쳐 폭동을 야기했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후 할아버지한테 티베리우스처럼 자연인이 되어 은퇴하겠다고 징징거리며 소아시아를 떠돌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루키우스는 군 복무를 위해 히스파니아로 가던 중 엉뚱하게 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였던 마실리아에서 머무르다가 질병에 걸려서 요절했다. 두 형제는 평소에 거만한 성격과 언행에 이들의 어머니인 대 율리아의 행실 문제로 인해 정말 인기가 없어서 줄줄이 죽었는데도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후계자 구도가 또 어그러지자 아우구스투스는 다음 후보로 대 드루수스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를 지명한다. 게르마니쿠스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아우구스투스 가문 출신이어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다. 허나 게르마니쿠스도 이제서야 18살이 되어 성인식을 막 치렀기 때문에 후견인이 필요했고 어쩔 수 없이 또 티베리우스를 징검다리로 지목한다. 이에 따라 티베리우스는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 자리를 클라우디우스에게 넘겨준다. 이후 총사령관 직책과 호민관 특권을 받아 공동황제로 즉위한다.

평가[편집]

겉으로 보기에는 남 부러울 게 없는 인생이었으나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무척이나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친아버지는 양아버지한테 아내를 빼앗겼고, 그 후 다시 결혼하지 않고 자신과 동생을 홀로 키우다가 9살 되던 해에 너무 빨리 세상을 떴다. 그나마 로마 상류층에서 극히 드물었던 연애결혼으로 맺어진 첫 아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헹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인생사에서 가장 밝은 시절을 보냈으나 친동생이 낙마사고로 급사하면서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후계자의 자리에 낙점되면서 그토록 사랑했던 첫 아내 빕사니아와 강제이혼하고, 좋아할만한 구석은 쥐뿔도 없는 대 율리아와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그나마 두 번째 결혼생활이라도 잘 풀렸으면 위로를 받았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메울 수 없었던 성격 차이에 고부갈등까지 터지고,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자식인 티베릴루스가 유아기에 급사하면서 두 번째 결혼생활은 파탄났다. 결국 만사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티베리우스는 은퇴선언을 해서 평범한 자연인이 되어 로도스 섬으로 들어가 8년 동안 로마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이건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가이우스, 루키우스 형제의 압력이 들어간 탓도 있지만) 황제가 된 뒤에도 황실 내에서 잡음이 끊이질 않았고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준동으로 멀쩡한 친족들이 누명을 뒤집어쓰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