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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피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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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 역시 카이사르와 인척관계이고 카이사르의 부장 출신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편집]

젊은 시절에 관한 기록은 적으나, 조폐 관련 업무를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버지도 이름이 똑같은데, 로마 권력의 핵심인 집정관을 지냈으니 옵티마테스 파벌이었겠지만 당대의 민중파 호민관인 사투르니누스의 딸과 결혼하는 등 민중파 성향을 숨기고 있다가 술라가 죽은 후 반란을 일으킨 에트루리아 인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반란군에 합세한다. 하지만 반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폼페이우스에게 진압되어 사르디니아 섬으로 유배되어 거기서 사망했다. 마르쿠스와 형 파울루스는 큰 처벌 없이 가산을 그대로 보유하면서 원로원 의원 자리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원로원의 주요 파벌에 반기를 든 사람의 아들이니 이미 가세는 기울었다.

이에 레피두스는 다른 명문가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행동을 하게 되는데 한창 기세를 올리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게 된다. 아예 지지하는 정도를 넘어 카이사르와 클리엔테-파트로누스 관계를 맺어(고대 로마에서 클리엔테-파트로누스, 즉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한 번 이 관계를 맺으면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평생토록 봉사할 의무가 있었다. 카이사르 암살자들이 암살 직후에 민중들에게 아버지를 죽인 놈들이라고 냉랭한 대우를 받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카이사르의 후원에 의해 출세한 이들이 뒤통수를 갈긴 격이니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행위가 아니었다)지원을 받아 조상들이 세운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전당을 재건하고 형 파울루스는 집정관에 당선되었고 레피두스는 카이사르 파의 측근이 된다. 아이밀리우스 가문은 로마에서 내노라하는 귀족들 중 명문 가문에 속했고, 이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기에 카이사르가 후원을 해준 것이다.

카이사르 암살 당시에는 부독재관 자리에 있었는데, 암살 소식을 듣자 바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입해 암살자들을 죽이려 했으나 안토니우스가 제동을 걸어 무위로 돌아간다. 대신 카이사르의 후임으로 종신 대신관 직위에 오르고, 히스파니아로 가서 폼페이우스 아들내미인 섹스투스와 협상해 내전의 격화를 저지했다. 이 때 생긴 섹스투스와 친분 때문에 훗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걸고 넘어지는 약점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43년, 레피두스의 주선 아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까지 모였고 이들은 보노니아 협정을 맺는다. 여기서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회'가 출범하고 2차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일단 이들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살생부를 작성하는 한편(살생부 작성 목적이 군자금 조달이었기 때문에 암살에 가담한 핵심인물이 아니라면, 몸값을 내고 사면을 받을 수 있었기에 원로원 의원 130명과 기사계급 2천여명의 추방으로 끝났다), 이 동맹이 소중하다는 증표로서 제일 가까운 이 한 명을 희생제물로 내놓기로 한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지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지목했고 레피두스는 자신들을 적대하고 키케로를 지지했던 형 파울루스를 내놓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던 키케로를 희생제물로 내놓았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이틀간 키케로의 사형에 반대했으나 3일째 되는 날에 묵인했다고 전하는데,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도 키케로를 죽이는 데 찬성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계에 발을 들였을 당시, 정국은 안토니우스를 중심으로 아슬아슬한 균형이 잡힌 상태였는데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키케로가 나서서 옥타비아누스를 밀어줬다. 물론 그의 속셈은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후 기회를 봐서 옥타비아누스도 제거할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옥타비아누스는 나이만 어렸을 뿐이지 정치력으로는 이미 만렙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따른 이유는 '카이사르가 지명한 정식 후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었고 키케로가 자기 속셈을 대놓고 까발리고 다녔기 때문에 이미 옥타비아누스의 귀에도 저 술책이 다 들어갔다. 그리고 양아버지가 관용을 베풀었다가 통수를 맞을 건 본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는 무조건 숙청으로 대답해줬다.

삼두정치를 주선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의외로 초반의 레피두스는 세력이 가장 강했다. 자신의 임지였던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 있는 현역병/퇴역병 군단이 7개나 되었기 때문.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겨우 4개 군단(사재를 털어모은 퇴역병 2개 군단에 돈으로 낚은 안토니우스계 2개 군단)이 전부였고 안토니우스는 친위군단마저 뺏길 뻔 했다 겨우 지켜냈으며 그나마도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했기 때문에 세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삼두정치 결성 직후의 영역 배분에서도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차지하여 옥타비아누스를 크게 앞섰고 안토니우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필리피 전투를 기점으로 레피두스의 세력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야금야금 먹히기 시작한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막대한 보상금과 카이사르의 복수(당시 로마군은 거진 다 카이사르파였다)를 미끼로 레피두스의 군단을 차지했고 필리피 전투 당시 로마에 남아 본국 수비를 하고 있던 레피두스는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 되었다. 끈 떨어진 신세로 있던 레피두스에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항복해 온 안토니우스계 6개 군단을 보내 이 둘의 연대를 막는 한편으로, 충성심을 담보할 수 없는 군단의 관리를 레피두스에게 떠맡기고 나중에 섹스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시칠리아 공략에 그대로 이용한다는 꼼수를 부린다.

기원전 40년 브룬디시움 협정이 이루어져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상호우호를 재다짐할 때 겨우 북아프리카를 넘겨받는데 그쳤고(당시 북아프리카 지역은 포에니 전쟁 이후 복구하지 않았다가 카이사르 시절에 들어서야 겨우 복구를 시작했다) 37년 타렌툼 협정으로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회'의 지위는 5년 연장되었으나 레피두스는 여기에 끼지도 못했다.

그 다음해인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세력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레피두스는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의욕적으로 참전해 옥타비아누스가 고전하는 사이 섹스투스 최후의 거점이었던 메사나를 함락시키고 8개 군단을 접수하는 공을 세웠다. (섹스투스 상대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는데 위에서 서술한 미세눔 조약 때 섹스투스가 레피두스를 빼고 그 자리에 자신을 넣어달라는 요구를 했다)이에 레피두스는 자신이 처음에 요구했던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의 지배권을 내놓으라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으나, 제대로 된 싸움 하나 없이 군대가 통째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가는 사태가 터져(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로마군은 카이사르파가 대다수였다. 아무리 레피두스가 카이사르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측근이었다고 해도, 직접적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나 카이사르 부장 출신인 안토니우스와 달리 군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만한 기회가 없었고, 그 문제가 터진 것이다) 종신 대신관을 뺀 모든 관직을 빼앗겼다.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키르케이로 유배를 보냈으나 원로원 의원 자격으로 로마를 방문하는 것은 허락해 주었다. 이후 기원전 13년(혹은 12년) 사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공석이 된 대신관 직위는 아우구스투스가 가져갔다.

평가[편집]

흔히 제2차 삼두정치의 들러리로 알려져 있고, 그만큼 대중매체에서의 평가도 병풍이나 무능력의 화신 정도로 묘사되는데 이건 불공평한 평가다. 레피두스가 그렇게 능력이 없는 인물이었다면 애당초 삼두의 일원으로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른 명문귀족가문들이 다 쓸려나가는 와중에 카이사르를 선택해서 2인자 위치에 올라온 안목은 보통 사람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능력이었다. 크라수스와 달리, 시칠리아 전투에서의 모습을 보면 장군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명문 귀족가문 출신이고 유력한 정치인이라는 점이 군대 내 카이사르 파의 지지를 얻는 데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고, 카이사르 밑에서 직접 종군한 적이 없다보니 군단병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레피두스가 수동적이고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던 건 능력 부족이나 비겁했다가 보다는 명분과 세력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상대가 정계 입문 전부터 정치력으로 만렙을 찍은 옥타비아누스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천수를 누렸고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후손이 황가의 일원이 되기도 했으니 비참한 결말을 맞은 안토니우스나 키케로 같은 다른 거물들에 비하면 더 낫다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