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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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편집]
제2의 로마. 과거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현재 튀르키예의 영토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엔 코스탄티니에(kostantiniye)로 불렸으며 터키가 건국된 이후로 이스탄불이라고 불린다.
동방의 로마라고 불리는데 사실 여기가 정통 로마제국의 수도이고 이탈리아에 있는게 자칭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게르만 오랑캐놈들의 짭이다.
삼면이 바다라서 한 면만 방어하면 되는 군사적 요충지에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는 3중 성벽까지 쌓아서 대포의 등장 이전까지 토나오는 방어도를 자랑했다.
ㄴ 토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말그대로 무적이었다. 마지막 공방전 때 메흐메트2세가 우르반 대포 끌고오고 15만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8천명의 수비대가 1달 이상을 버텼다. 인류가 만든 수많은 성벽의 끝판왕이다.
거기에 금각만에 죠오오온나 크고 아름다운 쇠사슬을 풀어서 배의 진입을 막아 해상을 통한 진입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걸 돌파한게 그 유명한 메흐메트2세의 배를 끌고 산을 넘어와 금각만에 띄워버린 정신나간 작전.
군사적인 면 이외에도 존나 명당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수도를 구상할 때 내걸었던 조건이 문화적중심지인 그리스지역과 경제적중심지인 이집트, 그리고 성지인 예루살렘과 가까워야하며
당시 자꾸 로마를 괴롭히던 고트족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폭동을 일으킬 때 이를 아-주 빠르게 진압 할 수 있는 위치를 원했는데 원래 대제의 선택은 세르디카(현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였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라는 자칭 짭황제와 내전중에
비잔티움이 존나 명당이라는걸 알고 바로 여기로 갈아탐 ㅇㅇ 이름도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지었다. 구글 맵을 펴보면 알겠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구상했던 조건에 가장 걸맞는 자리에 위치해있다.
유럽 끄트머리에 걸쳐있고 배타고 10분만 가면 바로 아시아임.
역사[편집]
동로마 제국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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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더럽고 냄새나는 도시가 된 로마를 버리고 새 수도로 정한 곳이 여기이다. 저 옛날 알렉산드로스가 말타고 다니던 시절부터 비잔티온, 비잔티움으로 불리던 도시를 자기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개칭했다.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 수도로 번영하였다가 제 4차 십자군 때 동맹 걸고 들어온 십자군에게 철저히 약탈당하고 나서는 이전에 비해 빛이 많이 바랬다.
이슬람교를 숭상하는 애들에게는 메카만큼이나 성지순례하는 장소였는데 이는 일반적인 성지가 아니라 과거 지배민족인 저주받은 로마 제국의 후예가 있는 수도이기에 반드시 파괴해야할 대상이어서 정복하고 싸그리 불태울려고 틈날때마다 성지순례랍시고 대량으로 군사몰고 왔는데 성공할 뻔한 적이 몇번이나 있었으나 3중성벽때문에 실패만 하고 돌아갔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침공한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이라지만 고작 8천 명의 수비대로 10만이 넘는 오스만군을 막아낼 수는 없었고 결국 함락되었다. 심지어 오스만군의 경우 최정예병인 예니체리만으로도 수비군의 수를 넘길 정도였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참조.
테오도시우스 성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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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틴타노플은 육로로 되어있는 부분이 약 6km정도되는데 이곳을 둘러친 성벽이 3개로 되어있어 3중성벽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해안가지방은 1개로만 되어있지만 비잔틴 제국은 이곳에 상시 재해권을 유지했기에 문제는 없었다.
성벽의 평균 두께는 5m가넘고 가장높은부분은 20m가 넘으면서 물이지나가는 해자부터 3번째 성벽과 사이의 거리는 최대 60m가 넘어서 공격자가 함부로 공격할수가 없었다. 공격하는 적국의 군대는 대학살 정도의 큰 피해를 보았다.
평화시 배치되는 수비대는 적었으나 군 관구제로 군대를 유지하던 제국에게 큰 문제는 없었고 전시에 수도가 위험할시 대량배치했다.
매우크고 단단했기에 공성전의 최종무기 '화약 대포'를 사용해도 재 장전시간에 모조리 수리할수있어서 개씹사기였다.
총 21번의 공선전이 있었으며 건설후 1000년동안 무너지지 않았다가 21번째 공성전인 1453년 콘스틴타노플 공성전에서 오스만제국이 15만대군을 이끌고 6주 동안 벌인 공성전에서 승리해 무너지게된다.
뚫린 이유도 귀가막히는데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벽이 1개밖에 없었고 높이가 낮았으며 고지대라 구조적으로 약한 북부지역을 담당하던 용병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다쳐서 그의 수행원들의 설득으로 비밀통로로 도시를 빠져나가자 용병들이 동요했고 그결과 용병들도 퇴각하자 이를본 오스만의 술탄이 북부지역으로 병사들을 몰아넣어 성벽에 깃발을 꽂자 비잔틴 병사들은 도심으로 런닝맨을 시작했다. 병사들과 뒤통수를친 용병들도 예니치리에게 모조리 학살당하고 1000년 우주방어 요새의 전설은 무너졌고 비잔티움 제국도 멸망한다. 도망친 용병대장은 부상으로 일주일뒤 뒤졌다.
오스만 제국 시절[편집]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사실상 학살과 약탈을 묵인했으나 비잔틴 교회 등은 파괴하지 않고 이슬람식으로 개조해서 잘 써먹었다. 대표적인게 최대 규모의 모스크가 된 성 소피아 성당. 이 도시를 따먹어서 로마 제국의 막타를 낸 기념으로 오스만 투르크는 로마의 황제를 자칭했다. (룸 카이사르). 또한 이스탄불로 개칭이 된 것도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의 일로, 오스만 제국이 망할 때까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잔존했다.
그래서 현재도 이스탄불의 이슬람 사원들 중에는 벽 칠을 벗겨보면 크리스트교 벽화가 나오는 곳도 있다.
동로마 제국 막타 낸 기념으로 오스만 제국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버렸는데 다른 데 놔두고 한참전에 망조가 들어서 지네들이 막타처서 망해버린 나라의 수도로 자기네 수도를 옮긴데서 얘내들은 머가리가 없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 진담이냐? <- 어그로를 이렇게 끄는 넘은 없을테고 그냥 자기 대가리가 장식인데 모르는듯 콘스탄티노플의 엄청난 지리적 이점에 대해서 모르는넘 있을까봐 설명해줌 일단은 러시아나 조지아같이 흑해에 접한 나라들은 흑해의 통러가 보스포루스 해협밖에 없기 때문에 지중해로 나가려면 무조건 여기를 지나 가야된다 다시말해서 통행세만 받아먹어도 엄청난 이득을 볼수 있는 영토이다 같은 이유로 영국이 지브롤터하고 수에즈운하를 꼭 지키려했던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후 쭉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자 수도의 지위를 앙카라에게 빼앗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터키에서 가장 인지도가 큰 도시이다 원래 여기 수도로 하려다가 국경이라 위험하지 않나? 싶어서 물렀다고 한다.
그리스 공화국 입장에서는 수복해야할 고토라서 이스탄불이 아닌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른다. 비행기도 이스탄불 행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행 비행기가 있다. 그리스 극우들은 아테네는 임시수도이고 이곳이 진짜 수도라고 주장한다. (근데 되찾더라도 국경 지방이라 수도로 삼긴 힘들듯)
현재[편집]
현재도 1천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터키의 제1도시이다.
애초에 인지도가 넘사라 터키의 수도를 이곳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키 수도는 앙카라니까 헷갈리지 말자. 앙카라는 터키 공화국의 건립을 선언하고 혁명전쟁을 시작한 곳이다.
근데 애초에 수도인데도 앙카라는 인구가 400만남짓한 곳이라 헷갈릴 만도 하다.
감히 여기를 사칭하는 깡촌으로 유명한 곳이 블라디보스토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