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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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881년 조선이 근대화의 일환으로 청나라의 근대식 무기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파견했던 유학생 사절단
배경[편집]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으로 청나라는 더이상 과거딸치며 천하의 중심이니 뭐니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무기의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러다 1861년 신유정변으로 서태후가 집권하면서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양무운동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제도는 과거의 봉건사회를 유지하면서도 무기만 발전시키는 온건적 개화를 하게 된다.
그걸 본 조선의 온건 개화파들은 청나라를 배워서 무기를 발전시키자는 주장을 하게 되고 마침 이홍장도 "ㅇㅋ 알겠음 조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요청하면 톈진의 기기국으로 유학할 수 있게 해주겠음"이라는 화답을 보내왔고 1880년 조선 조정에서 회의 끝에 유학생들을 톈진으로 보내게 된다. 이홍장 역시 광서제의 재가를 받아서 그렇게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 근대식 무기를 배우기로 결정한다.
상세[편집]
물론 위정척사파들의 반대가 존나게 심했지만 고종은 "그래도 코쟁이들이나 왜놈보다는 중국몽이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통리기무아문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맡겼고 그렇게 사신인 김윤식과 중인 이상의 유학생인 학도 20명과 천인 신분의 공돌이인 공장 18명을 포함한 69명의 사절단이 9월 26일 톈진으로 향한다.
그리고 11월 17일 베이징에 도착해서 김윤식은 이홍장과 회담하고 밑에 있던 유학생과 공돌이들은 30일 톈진에 도착해서 화약, 탄약 제조법과 전기, 화학, 제련, 기계학 등 다양한 근대식 무기 제조법을 배우게 된다. 물론 외국어도 같이 배웠다고 한다.
한계 및 의의[편집]
하지만 재정문제로 유학생들은 그리 오랫동안 유학을 하지 못하고 대부분 중도귀국을 하게 되고 결정적으로 임오군란이 터지자 15명을 제외하고 모두 귀국하게 된다.
그래도 이때 무기 제조법을 배운걸 바탕으로 1883년 영선사 출신 유학생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무기공장이자 최초의 근대식 공장인 기기창을 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