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영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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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발생했던 사건/사고
1864년 흥선대원군 집권, 고종 즉위
1865년 경복궁 중건
1866년 병인박해 · 명성황후 간택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당백전 발행 · 병인양요
1868년 일본 제국 선포 · 메이지 유신 · 오페르트 도굴사건
1871년 서원 철폐 · 신미양요 · 척화비 설립
1874년 흥선대원군 실각 · 순종 탄생
1875년 운요호 사건
1876년 강화도 조약 · 쇄국정책 종료 · 개항 · 제1차 수신사 파견(김기수)
1880년 제2차 수신사 파견(김홍집) · 통리기무아문 설치
1881년 조사 시찰단 파견 · 별기군 설치 · 영선사 파견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 태극기 제작 · 임오군란 ·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 흥선대원군 납치 · 제물포 조약
1883년 태극기 국기 지정 · 보빙사 파견 · 조일통상장정 · 서기 최초 소개
1884년 조로수호통상조약 · 갑신정변
1885년 한성조약 · 거문도 사건 · 배재학당 설립 · 이토 히로부미 취임
1886년 이화학당 설립 · 조불수호통상조약 · 가톨릭 허용 · 육영공원 설립
1887년 경복궁 전등 설치
1889년 조병식, 방곡령 시행
1892년 교조신원운동
1893년 보은집회 · 조병갑 취임
1894년 동학농민운동 · 일본군 경복궁 점령 · 청일전쟁 · 갑오개혁
1895년 을미사변 · 을미개혁 · 태양력 도입 · 춘생문 사건
1896년 건양 연호 개원 · 아관파천 · 독립협회 창설 · 덕수궁에 최초의 전화기 설치
1897년 고종 환궁 · 숭실학당 설립 · 광무개혁 · 대한제국 선포
1898년 황국협회 설립 · 관민공동회 · 만민공동회(헌의 6조) · 독립협회 강제해산
1899년 경인선 개통 · 대한국 국제 반포
1900년 만국우편연합 가입 · 서울-인천 전화 개통
1901년 신축민란
1902년 제1차 영일동맹 · 최초의 미국 이민
1904년 러일전쟁 · 한일의정서 · 제1차 한일 협약 · 일진회 설립
1905년 보성전문학교 개교 · 가쓰라 태프트 밀약 · 제2차 영일동맹 · 포츠머스 조약 · 경의선 개통 · 을사늑약
1906년 조선통감부 설치
1907년 국채보상운동 · 이완용 취임 · 헤이그 특사 · 고종 강제폐위 · 순종 즉위 · 정미조약(군대해산)
1908년 더럼 스티븐스 암살
1909년 기유각서 · 남한 대토벌 · 이토 히로부미 사살 · 이완용 암살미수
1910년 한일합방(경술국치) · 조선총독부 설치

개요[편집]

1881년 조선이 근대화의 일환으로 청나라의 근대식 무기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파견했던 유학생 사절단

배경[편집]

아편전쟁애로호 사건으로 청나라는 더이상 과거딸치며 천하의 중심이니 뭐니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무기의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러다 1861년 신유정변으로 서태후가 집권하면서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양무운동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제도는 과거의 봉건사회를 유지하면서도 무기만 발전시키는 온건적 개화를 하게 된다.

그걸 본 조선의 온건 개화파들은 청나라를 배워서 무기를 발전시키자는 주장을 하게 되고 마침 이홍장도 "ㅇㅋ 알겠음 조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요청하면 톈진의 기기국으로 유학할 수 있게 해주겠음"이라는 화답을 보내왔고 1880년 조선 조정에서 회의 끝에 유학생들을 톈진으로 보내게 된다. 이홍장 역시 광서제의 재가를 받아서 그렇게 조선은 청나라를 통해 근대식 무기를 배우기로 결정한다.

상세[편집]

물론 위정척사파들의 반대가 존나게 심했지만 고종은 "그래도 코쟁이들이나 왜놈보다는 중국몽이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통리기무아문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맡겼고 그렇게 사신인 김윤식과 중인 이상의 유학생인 학도 20명과 천인 신분의 공돌이인 공장 18명을 포함한 69명의 사절단이 9월 26일 톈진으로 향한다.

그리고 11월 17일 베이징에 도착해서 김윤식은 이홍장과 회담하고 밑에 있던 유학생과 공돌이들은 30일 톈진에 도착해서 화약, 탄약 제조법과 전기, 화학, 제련, 기계학 등 다양한 근대식 무기 제조법을 배우게 된다. 물론 외국어도 같이 배웠다고 한다.

한계 및 의의[편집]

하지만 재정문제로 유학생들은 그리 오랫동안 유학을 하지 못하고 대부분 중도귀국을 하게 되고 결정적으로 임오군란이 터지자 15명을 제외하고 모두 귀국하게 된다.

그래도 이때 무기 제조법을 배운걸 바탕으로 1883년 영선사 출신 유학생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무기공장이자 최초의 근대식 공장인 기기창을 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