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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지금 문프(쑻)의 반일선동과는 비교도 안 되는 반일감정이 만연해있었다. 온갖 친일파들이 관공서에 숨어있다 끌려나와 맞아뒈지는 등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무조건 일본 관련된 것만 패면 그만이었다.

본래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대한민국이 정치를 이끌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 서울로 진주하였다.

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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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엔 샘 아재의 은총과 자유의 향기가 가득합니다. 'MURICA!!!! Fuck Yeah!!!'

군정 초기

서울을 점령한 미군은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을 설치해 3년 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한국민주당 등의 정당들이 창당되어 오늘날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머한민국이 올 거라는 환상이 존재하던 시기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끈 미국은 민족, 공산 할 것 없이 이육사의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탄 초인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신탁통치에 반대해 잘 될 것만 같았다.

좌우익의 충돌

하지만 12월에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좌우익이 각각 찬탁과 반탁으로 갈리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1946년은 좌우익의 갈등이 가장 심했던 시기다. 온갖 백색테러가 만연하고 길 가다가 운 나쁜 놈은 총 맞아 죽을 정도로 아주 피터지게 싸웠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때 공산주의자들의 이미지가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9월 노동자 총파업, 대구 10.1 사건을 통해 판도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돌아갔다.

집권 중이던 미 육군과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으니 여러모로 민족주의 측을 밀어줬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이 은근슬쩍 정계에 돌아오기도 했다.

1947년이 되자 미국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존나게 쳐맞았던 공산주의자들은 스카이랜드로 관광을 보내졌거나 북으로 빤쓰런했다. 그리고 이때 이승만이 본격적으로 정부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백성 또는 국민들 사이에서 '새 나라의 국부'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다.

정부 수립

1948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보기 힘들어지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이 더 현실적이게 되어서 국민들의 호응을 잘 받았다.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해서 이승만에 반발하는 여론이 4.3 사건, 여순사태 등을 불러일으키는 등 충돌도 잦았다.

한 술 더 떠서 김구의 총선 불참으로 인해 총선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이겼고 여기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헌법 제정,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뽑아줬다. 이때는 간접 선거를 실시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전쟁 이전

1949년에는 안 그래도 반짝 스타였던 이승만이 농지개혁법까지 가져오면서 중도좌익 성향의 사람들까지 이승만의 편이 되었다. 이때까지는 승승장구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해체라는 엄청난 병신짓을 저질러버리고 안두희 씹새기가 김구를 암살하면서 이승만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1950년으로 들어오며 제헌 국회가 끝나고 2대 국회의원들을 선출할 시기가 왔는데 하필 반민특위 사건이 런승만에게 빅 엿을 선물해서 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이겨버린다. 이대로라면 1952년 대선신익희조봉암이 선출될 것이고 런승만은 조금씩 쫄리기 시작한다.

이때 미국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해 머한민국을 제외했다. 또한 북한에서도 김일성이라는 악마가 군권을 장악하고 중국과 소련을 돌아다니며 남쪽을 침공할 떡밥도 뿌리고 있었다. 장도영, 김종필, 박정희 등이 미리 북괴의 심상치 않은 행보를 발견하고 수뇌부에 보고했으나 윗물은 놀기 바빴다.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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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그 자체라 사는 게 곶통이며 뒤지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은하의 외계인들이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이런 좆같은 것들과 살아가는 당신에게 탈지옥을 권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야...

북한의 남침

결국 6월 25일에 북한의 대대적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은 중국과 소련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강려크한 무기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3일 만에 털고 국군은 수뇌부부터 꽝이라 계속 밀렸다.

대한민국 정부도 부산을 임시 수도로 하고 부산으로 이전했으며 대량의 피난민들이 발생했다. 또한 북한군 점령지에서는 인민재판 등의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하지만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이 북괴군을 막아내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경기도를 탈환하면서 38선 이남 영역을 모두 되찾았으며 38선 이북까지 진출해 평양, 원산을 털고 중국 국경까지 치고 올라갔다.

여기서 북한의 김일성이 뒈지기 두려웠는지 몰래 중국군을 끌어들이려 했고 정말로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인해전술로 이북 영토를 다시 빼앗겼다.

1951년 1월 4일에는 1.4 후퇴로 서울을 또 뺏겼다. 이 해에 이승만 정권의 부역자들이 자유당을 창당했다.

휴전 회담과 발췌 개헌

다시 서울이 탈환된 후부터 슬슬 양쪽 모두 현타가 왔는지 휴전 회담이 개시되었고 남한 정부는 휴전회담에 반대했다.

1952년에도 휴전 회담은 지속되었고 양측의 포로교환 문제가 길어지면서 쓸데없는 시간만 낭비하던 중 다음 대선 기간이 되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간접선거제를 실시하던 당시 국회는 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장악했고 당연히 신익희가 차기 머통령이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자유당이 권세를 누리려면 이승만이 당선되었어야 하는데 당시 국민들의 정치 의식이 꽝이었고 전쟁 기간임을 고려해서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전쟁 기간에 대통령을 바꾸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 하고 이승만에게 몰표를 몰아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국회에 출석하던 국회의원들을 버스 채로 연행해서 국회에 못 가도록 방해했고 개헌 투표에서 '좋은 것만 발췌했다'를 내세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인 발췌 개헌에 성공했다.

얼마 후 대통령 선거에서는 예상대로 국민들이 이승만에게 몰표를 줬고 이승만은 4년 더 집권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휴전 회담도 드디어 답이 보였는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닌 무기한 정전 상태에 돌입했다.

자유당 독재

막상 전쟁이 휴전에 들어갔지만 그 고통은 상당히 심각해서 갑오개혁으로 폐지된 지 60년 가까이 되어갔지만 기존에 만연했던 신분제는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신분 확인이 문제가 아니라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또한 미국의 원조경제 체제가 시작되어 미군에게 쪼꼬릿을 얻어먹으며 살아가는 등 그나마 최소한의 희망만 남겨두었다.

사사오입 개헌

1954년이 되고 총선이 열렸으며 전쟁으로 북한에 대한 감정이 최악임을 이용하고 천재적인 후보 공천으로 압승했다. 참고로 이때 자유당에서 선출된 국회의원 중 한 명이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이다.

자유당이 국회도 장악했겠다, 자기들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현재 대통령인 이승만도 평생 대통령을 해야만 했다고 판단, 이승만이 영원히 대통령을 할 수 있게 '초대 대통령 한정 무제한 출마'라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리고 자유당 114석 빨로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재적 의원의 2/3이 찬성하는 조건을 채우지 못해서 실패했다. 하지만 헬조선의 전통이 바로 안 되면 되게 하라! 였다.

자유당은 바로 어용 수학자를 고용해서 '135.3333...석 미만이면 개헌이 안 된다라니 이게 뭔 개소리냐! 이 세상에 135.3333...석이 어딨냐! 사람이 소수점으로 표기할 수 있는 것이냐! .3333...은 사람이 아니니 반올림해서 135석 미만이어야만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딱! 135를 채웠으니 개헌도 가능한 것이다!'를 외쳤다.

그리고 이 논리를 최순주 국회의장에게 내밀어 '우리 이렇게 개헌하는 게 어떻겠나요~' 하며 후장을 핥아줬고, 민주국민당은 이게 뭔 개소리냐 하며 반발했지만 최순주도 자유당 편인 덕에 '거 그럴듯 하구만 기래~ 개헌안이 의결되었읍니다 땅땅땅!'을 외치며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국민들 반응은 의외로 난리가 나지 않고 그럭저럭이었는데, 당시가 1954년으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잇대는 모두 일제강점기를 겪고 체험했기에 민주주의 의식이 없었고 학력도 최악이었다. 그런데 수학이라는 것은 당대에 지식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아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다. 확실한 건 이때부터 자유당이 선을 넘는다.

또한 민주국민당도 친일파 일색인데다 뚜렷한 정체성도 없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955년에 대대적인 개선에 들어가고 독립운동가 출신 신익희를 중심으로 하여 반자유당을 내세우는 새 정당 민주당을 창당했다.

제3대 대통령 선거

1956년이 되고 대통령 선거가 또 다가오자 자유당의 목표는 출마권이 무제한으로 늘어난 이승만을 또 당선시키는 일이었다. 민주당도 철저한 준비로 신익희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한때 농지개혁법을 이끌었던 조봉암진보당이 새로운 변수로 작용했다.

자유당 vs 민주당 판국으로 보였던 선거에 이런 변수가 등장해버렸고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조봉암이 농지개혁법 때의 일로 지지기반을 만들어 민주당의 입지를 위협했고 하필 이때 신익희가 선거유세 중 병으로 죽으면서 상황은 더 꼬였다. 역시 막장 드라마도 현실은 못 이기는 모양이댜.

결국 민주당 지지 표는 민주당의 신익희 추모표로 들어가거나 진보당의 조봉암에게 돌아가 갈려버렸고 자유당은 무난하게 대선에서 우승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이 우승했다.

비록 선거에서 이겼지만 조봉암이라는 인물이 자유당을 매섭게 위협했기 때문에 자유당의 다음 처리대상은 조봉암이 되었다.

진보당 사건

민주당에서는 신익희가 죽자 조병옥이 당대표가 되었고 개편된 체제로 1957년에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장충단 집회를 열었으나 자유당의 어용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와해당했다.

하지만 3년 전과 다르게 1957년은 세대가 많이 바뀐 시기였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자란 세대가 늘어나면서 자유당의 이런 횡포에 반발하는 국민들이 늘었고 자유당의 예상과 다르게 민심이 민주당에 돌아갔다.

1958년부터 이전 해의 소련의 스푸트니크호 발사 성공과 함께 미국이 우주개발에 돈을 쏟아붇기 위해 미국의 원조경제가 차관 지원 경제로 전환되면서 대한민국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 당연히 자유당 지지율도 떡락했다.

그런데 4대 총선에서도 진보당과 민주당이 자기들을 쳐바를 것이 쫄렸고 특히 조봉암이 거슬렸기에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을 조지고 진보당도 강제 해산시켰다.

드디어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국민 수준이 늘어난 게 불안불안했지만 진보당 강제해산 두 스푼에 게리맨더링 한 컵을 타고 닭죽 부정선거 몇 스푼을 탄 끝에 또 이기긴 이겼다. 그런데 민주당이 또 치고올라왔다.

신국가보안법 파동

막상 이겼는데 4년 전과 다르게 자유당 개샊끼를 외치는 학생들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서 이기붕이 장악한 자유당 놈들은 이 시츄에이숑이 안 되겠다 싶었다.

이 문제는 1959년에 신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을 제정해 해결했다. 이제 자유당을 욕하면 바로 공짜로 물 마시러 끌려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여론을 완전히 통제하고 언론까지 장악했지만 자유당의 븅신들은 1절이란 것을 몰랐던 것 같다.

3.15 부정선거

1960년이 되며 4대 대선이 다가왔고 자유당은 또 런승만을 내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하필 1875년생이라 85세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무리 무지한 국민들이라지만 대통령 나이가 저 정도면 슬슬 안 뽑으려고 한다는 걸 자유당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임기 중 죽으면 부통령에게 권력이 넘어가는데 부통령이라도 장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단 이승만을 당선시키되 자유당의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에 부딪치는데 부통령을 이기붕으로 내세워야만 자유당이 살 수 있지만 4년 전에 부통령으로 장면이 당선된 상태라서 이번에도 망할 게 뻔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는데 마침 민주당 후보 조병옥도 죽으면서 후보는 이승만만 남았고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이승만 100% 확정이었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이다. 신익희도 대선 전에 갑자기 죽었지 조봉암은 사형당했지 거기에 조병옥도 느닷없이 죽어버리니 국민들이 자유당에 아주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유당은 이제 헌법을 바꾸거나 악법을 만들거나 하는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사상 최악의 위기에 몰렸고 결국에는 부정선거를 저지르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였다.

여기서 투표함 바꿔치기, 3~5인조 투표, 완장 감독관 배치 등 별의 별 괴상망측한 방법을 부정선거 하는 데 쏟아부었고 자유당은 '부정선거 좀 한다고 저 멍청한 개돼지 국민놈들이 난리가 나겠어? ㅋㅋㅋㅋㅋ' 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이 때가 1960년이었다. 이놈들이 횡포를 저지르던 1950년대와 다르게 민주주의를 배우고 자란 학생들이 투표권까지 얻은 어른이 되면서 부산과 마산 등을 중심으로 항쟁이 일어났다.

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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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토달거나 음모론 제기하다가 일베충(으)로 몰리지 말고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잠시 묵념합시다.

이승만 정권은 총과 칼을 학생들에게 내밀며 항쟁을 진압했다.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자유당은 대놓고 선을 넘었다.

결국 1960년 4월 19일 전국적으로 반자유당 시위와 항쟁이 일어나며 4.19 혁명이 개시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 위주로만 진행되었으나 추후에 국민학생들과 대학 교수들, 일반 시민들까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의거를 벌였다.

결국 4월 26일 상황을 더 질질 끌기 싫었던 이승만이 하야 선언과 함께 내각책임제 실시, 선거 무효화를 알리며 항복했다.

4월 28일에는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이 이기붕 일가를 몰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후 대한민국에는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섰다. 그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로 빤쓰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의 수립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 정부는 3.15 부정선거범들에 대한 공판을 개시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다.

내각책임제 아래에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완전히 새 국회의원들을 선출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대표인 장면이 행정부 수반인 국무총리가 되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도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접 선거로 전환되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직함뿐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장면 내각은 주체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려고 했고 1961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다. 이 의지는 훗날 박정희가 물려받게 된다.

5.16 군사정변

1961년부터 장면 내각은 2대 악법으로 불리는 반공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했고 4.19 혁명의 주역들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이 악법에 반대해 시위를 열었다.

나라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졌고 윤보선과 장면 간의 사이까지 나빠졌다. 또한 군에 대한 대우도 나빠져 김종필과 박정희 등이 반발하게 된다. 군부는 4.19 혁명 1주년이 되는 날 학생들을 선동해 정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선동이 실패해 묻혔다.

하지만 이 사건이 묻힌 지 한 달이 지난 5월 16일에 군부는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한 다음 행정부를 장악해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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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공존합니다.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군사정부의 집권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8일에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변경했으며 장도영이 의장으로 취임했고 얼마 뒤 의장이 박정희로 교체된다.

사람들은 살면서 현재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이라는 양대 정당이 하는 꼬라지가 하나같이 정상이 없는 븅신들이라 차라리 누군가가 모조리 갈아엎고 두 당을 쓸어버린 다음 나라의 기강을 잡고 싶은 생각을 하곤 한다.

당시 국민들은 병신같은 자유당을 몰아내고 민주당이 들어섰지만 민주당도 막상 집권하니 자유당이나 다를 게 없다는 감정이었다. 십몇년 후쯤이면 박정희라는 인간이 미쳐돌아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위에서 설명했듯이 사람들이 양비론적으로 변하고 갈아엎을 구원자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군부가 짜잔~ 하고 들어선데다가 정책들이 이전 정권들의 병신들을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모조리 때려잡고 경제 개발같이 좋은 정책들은 계승하는 식이었다. 쿠데타가 잘한 일은 아니다만 합법적으로 개판인 정치보단 불법이지만 빠꾸없는 정치라는 것이 국민 감정과 딱 맞아떨어졌고 당연히 국민들은 군부에 대해서 엄청난 지지와 러브콜을 날렸다.

또한 혁명재판으로 3.15 부정선거범들의 모가지가 모조리 잘려나가자 민주당보다 군부가 훨 낫네! 하는 반응이 더 쏟아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62년에 들어서면서 만 나이, 서력기원, SI 단위 등의 도입으로 나라 자체를 뜯어고치고 정치활동정화법으로 껍데기만 남은 2공 잔재들을 쓸었다.

그 다음에는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해 대통령제 임기 4년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민정이양

1963년부터 민간인 정치참여 허용 등 군정을 완화시키고 박정희도 김종필과 함께 새 정당인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군부에서 물러나고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인간성 하나는 쩔었던 윤보선과 맞장을 깠다. 윤보선은 박정희의 친일 및 친북 전적을 들어 '빨갱이에게 나라를 맡겨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박정희는 역으로 윤보선을 수구꼴통이라며 깠다. 뭔가 포지션이 바뀐 것 같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한국 내에 암암리에 숨어있던 빨갱이들은 박정희가 자기네 편인 줄 알고 박정희를 지지했다. 또한 기존의 빨갱이몰이 이념 탄압에 지친 사람들이 윤보선을 이승만의 재림으로 보고 박정희에게 표를 줬다. 결과는 박정희가 근소한 차로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또한 윤보선의 민정당도 같이 욕을 얻어먹으면서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압승을 이끌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 정부가 들어섰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

1963년 12월 17일에 박정희가 취임하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7일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체되어 군정이 종식되었다. 물론 민주공화당이 군부놈들 넘어온 거긴 하다만...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 한일기본조약

이 문서는 친일파 또는 친일파 의혹을 받는 새끼들을 다루는 문서이무니다.
이 새끼는 옛날 또는 현재진행형으로 일제를 찬양하는 놈이무니다.
헬조선이 강림한 원인이기도 하며, 아직까지도 금수저의 대부분을 대대손손 차지하고 이쓰무니다.
다행히 이들도 죽창과 발터에는 한방이무니다. 죽창...죽창을 가져와라데스...

1964년 당시에는 슬슬 일제강점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한일 수교를 의해 한일회담이 활발하게 열렸으나 여러 트러블로 계속 결렬되었다.

학생들은 한일회담을 또다시 매국하는 행위로 여겨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이것이 절정에 달한 사건이 바로 6.3 한일회담 반대 항쟁이다. 이 당시에 학생 시위자 중 한 명이 훗날 17대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이다.

한편 중앙정보부의 또라이 김형욱인민혁명당 사건과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 등을 조작하며 관종짓을 하려고 했지만 믿고 있던 민주공화당에게까지 씹히며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다.

결국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항쟁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경제 개발

1962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개시했으며 이때 경공업 부문이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민주공화당에서 4대 비리 축출이라는 것을 내세웠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1966년에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비리는 느그들 아니냐? 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박정희에 대한 인식은 극도로 나빠졌다.

결국 한국독립당의 김두한 의원이 정일권 국무총리와 떨거지들에게 똥을 뿌리는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조폭과 정치인생을 끝내고 중정에서 뒈지게 쳐맞으며 반병신이 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성공적인 경제개발은 그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 1967년에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개시하였다.

한편 1967년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다시 돌아왔는데, 민주당계는 흩어져 있어서 윤보선이 신민당을 창당하며 모조리 집합시켰다.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과 박정희가 맞붙었으나 윤보선은 막상 내세울 것이 없는 데다가 매카시즘 때문에 인식이 나빠졌고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잘해서 박정희가 더 낫다는 국민들의 선택으로 윤보선이 전보다 더 심하게 쳐발리고 박정희가 압승했다.

또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압승했다. 그런데 자신을 싫어하는 호남 표가 두려워서 7대 총선에서는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북한의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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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련하겠지만 람조선레서 북괴롬덜를 찬량하른 것른 명백한 불법립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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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략 디시뤼키 래레서 를 찬량하른 글를 찾랐다면 국번 럾리 릴릴릴레 전화해서 절대시계를 받르시길 바랍레다!!!
만략 람조선리라 렛상레서 저 돼지롬덜를 찬량하다가 코렁탕를 먹더라도 디시뤼키른 책림지지 랂습레다.

김릴성, 김정릴, 김정른 개돼지씹새끼!!! 김정른 래미래비 처뒤진 개씨발새끼!!!

박정희가 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당시 북괴의 군부는 잠시나마 박정희에게 가졌던 호감이 각종 반공 정책들을 지켜보며 비호감으로 바뀌었다. 결국 북괴 군부는 박정희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68년 1월 21일, 간첩 김신조 등이 서울로 침투해 박정희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는 1.21 사태가 일어났다. 박정희가 이때 존나 빡돌아서 684부대를 창단하는 등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되고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까지 갔다.

여기서 북괴는 한 술을 더 떠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을 일으켜 민간인까지 살해했다. 이때 전 국민들은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 분노했으며 이때 김일성놈도 전쟁 터질까봐 쫄아서 부랴부랴 개짓거리 철회하려고 했다.

3선 개헌

이제 박정희도 단순히 민주적으로만 집권하면 신변이 불안해질 것 같아서 이승만의 독재 방법을 따라한다. 바로 선거 출마 기회를 늘린 다음 또 당선돼서 독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마침 국회는 민주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1969년에 3선 개헌안을 내놓고 신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켜 대통령을 3번씩 할 수 있게 하는 3선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때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등을 일으켜 신민당 당원들을 계속 방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이 되자 산업화의 부작용(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남영호 침몰사건 등)이 조금씩 터져나왔지만 경부고속도로 완공 등 여전히 국가산업 발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낙후된 지방에 산업화의 기반을 깔기 위해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새벽좆이 울렸네 새아침이 발기했네~

박정희 VS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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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이 되어 대선과 총선이 모두 다가왔다. 애초에 3선 개헌을 한 목적이 71년 대선에서 박정희가 또 이기려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박정희가 출마했고, 신민당에서는 새로 뜬 루키 스타인 김대중김영삼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이때 김대중이 처음으로 지역감정 조장을 이용해 표를 얻으려는 시도를 했다. 원래 전라도는 경상도와 함께 박정희에게 몰표를 몰아주던 지방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이 전라도 출신임을 내세워 전라도 사람이면 신민당 찍읍시다! 한 끝에 전라도가 김대중 편이 되었다.

하지만 호남이 자기를 따르면 영남 지역도 따를 것이라고 오해한 모양인지 영남에서는 대국적인 선거운동을 하지 못했고 결국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승리했다.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이 또 승리했다. 그리고 국가보위법을 제정하며 곧 있을 유신 헌법의 모태를 깔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7.4 남북 공동 성명

3번씩이나 대통령을 해먹게 된 박정희는 제대로 삘 받았는지 1972년부터 종신집권의 토대를 다졌고 내적으로는 강압통치를 하고 대외적으로는 친절한 척 하는 천재적인 독재 수법을 사용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자기를 죽이려 했던 북괴 김일성에게 갑자기 손을 내밀더니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 원래 친구였음! 한민족이라면 사상에 관계없이 친구 먹어야지~' 똥꼬쇼 퍼포먼스를 부리며 자기 이미지를 개선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박정희도 전쟁 분위기만 조성하면 지 목숨이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법은 평화를 가장한 쌩쇼뿐이었다고 판단, 북괴가 자기 목을 따러 올 여지를 완전히 끊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국민 지지도 얻고. 이제 대외관계까지 정리했으니 남은 건 하나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

이 문서가 다루는 대상은 인권을 밥말아먹은 독재자입니다.
저게 사람이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좆병신이니 이놈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십시오.

10월 유신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대놓고 독재를 시작하며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 들어섰다. 동시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의 체육관 ㅂㅅ ㅅㅂ ㅉㅉㅉ 파티를 하나 마련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선포하면 뭐하니 교묘하게 부정선거 좀 섞어서 유신 헌법 찬반투표를 실시했고 강압적인 분위기 조성 덕을 봤는지 압도적인 찬성 표가 나왔고 유신 헌법이 통과되었다.

직선제는 폐지되었고 대통령은 무제한 출마 가능에 박정희의 어용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으니 박정희만 영원히 100%로 당선될 것이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를 국민회의에서 치뤄 100% 표를 받고 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에는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뤄졌지만 선거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대통령이 직접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수 있었기에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1/6만 확보해도 원내 제1당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됐고.

대한민국 전체를 장악한 박정희는 유신 반대 운동을 펼치고 다니던 김대중을 조지려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대중은 천조국과 일본의 자유민주당 정치인들과 인맥이 있었고 김대중을 건드린 박정희는 당시 경제강국 탑에 들던 미국과 일본의 합동 공격을 받았고 결국 gg쳤다. 어쨌든 평소부터 박정희를 고깝게 보던 미국은 이 사건으로 박정희를 압박했다.

긴급조치

하지만 박정희도 한 가지 쫄리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운동권 세력이었다. 김대중을 조지는 것이 실패했으니 운동권 세력과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또 공격을 당했고 이들을 찍어누르기 위해 긴급조치라는 카드를 꺼낸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가 발령되어 개헌 논의를 완전히 금지시켰다. 그리고 10년 전에 물거품이 됐던 중앙정보부의 작품 인민혁명당 사건을 한 번 더 꺼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가짜 사건을 만들어내고 긴급조치 제4호를 발령시켜 민주계 인사들을 모조리 민주청년학생연합이라는 가상의 종북단체로 분류해 잡아넣었다.

하지만 문세광이라는 빨갱이가 반인반신 박정희의 와이후 육영수를 골로 보냈다. 그리고 빡친 반인반신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긴급조치 제9호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제9호가 발령되며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 금지'라는 사상 최악의 악법이 탄생했다. 그러니까 '반신욕'을 하면 남산으로 보내진다. 1975년부터 반 박정희 인사들은 쥐도반신도 모르게 사라졌다.

대중가요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고 수많은 노래들이 금지곡 처리를 받았다. 이제 노래만 불러도 남산을 방문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박정희에게 껄끄러운 존재인 장준하도 등산하다가 쥐도반신도 모르게 사라지면서 독재 분위기는 더욱 세졌다.

하지만 유신으로 북괴와 사이가 또 나빠진 데다 북은 남보다 더 심한 사회주의 헌법이라는 빅똥을 메인카드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더 미친놈인 덕에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벌였다. 참고로 이때 북괴의 만행을 방어하기 위해 투입된 병사 중 한 놈이 현재 청와대의 빅 적폐이신 디재스터 문프시다...

적폐 토왜 일베충 박사모 틀딱이누 이니야!

훠훠훠 작성자가 좌빨 (자칭) 깨시민들과 (쩝쩝)
양념장과 좌덜식 적폐청산을 (쩝) 당했누 이니야.

하지만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고리 원전이 세워지는 등 꾸준히 성장했다.

1978년에는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지만 뻔하지 뭐. 다들 알잖냐? 또 박정희가 이긴다.

유신 정권의 몰락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 망하는 것은 쌤통입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놈들입니다. 그렇기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따잇^

한편 1973년 중동에서 욤 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이 터져 석유 수출이 중단되어서 세계 경제가 흔들린 적이 있었다. 1978년에는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가 축출되고 1979년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원리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또 석유가 막히고 세계경제가 침체되었다. 이 사건을 오일 쇼크라고 부른다.

박정희의 집권은 지속되었지만 세계 경제가 흔들리면서 국내 경제도 침체되었다. 마침 1979년에 오원춘 농민 납치 사건이 터져 민심이 나빠지고 국내 경제 침체는 YH무역 농성 사건을 일으켰다.

유신 정권의 한계가 전국적으로 터져나오자 김영삼이 유신을 디스했다. 그리고 헬조선도 이란 꼬라지가 난다고 또 깠다. 노발대발한 반인반신은 사상 최초로 김영삼 국회의원을 제명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터져나왔고 먼저 반발한 곳은 공교롭게도 박정희의 지지기반인 경상도의 부산과 마산이었다. 정확히는 들고일어난 곳은 PK이고 박정희 지지기반은 TK라는 차이기 있긴 하지만 믿었던 경상도에 발등 찍혔다고 생각한 반인반신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을 무력진압하기로 했다.

역사가 아이러니한 것은 분명히 20년 전만 해도 자유당 떨거지들을 쓸어버리고 찬사를 받았던 박정희가 이승만과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승만과 다른 최후를 맞이했다.

10.26 사태

이 문서는 대국적인 것에 대해 다룹니다.
대국적이지 못하면 당신도 재규어에게 벌집핏자가 될 수... 당신 누구야?! 탕탕!!

이때 정부의 관료들과 박정희가 부마민주항쟁을 처리하기 위해 의논했으나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 박정희를 애널써킹하던 차지철이 탱크를 들고 모조리 찍어누른 다음 절대독재체제로 가자는 헛소리를 하자 김재규가 반사적으로 차지철의 대가리를 총으로 날리고, 뒤이어 박정희까지 쏴서 죽였으니 바로 10.26 사태이다.

멀쩡하던 머통령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나라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고 최규하가 권한대행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등 민주화 세력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0.26으로 긴급조치들이 전부 해제되었으며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가 국민회의에서 개최되어 최규하가 당선되며 나라가 안정을 되찾는 듯 했다.

12.12 군사반란

폭동이다!
이 문서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장태완 장군님의 마음가짐으로 반란군노무새끼들의 머리통을 전차로 날려버립시다.

1979년 12월 12일, 박정희의 군 내 애널써킹 좆목회인 하나회의 주역들 전두환, 노태우 등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2.12는... 그 하나의 탱크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야.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래서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장태완이 반란군노무 쉐끼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군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은 5.16처럼 확실한 명분도 없어서 정권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다.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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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토달거나 음모론 제기하다가 일베충(으)로 몰리지 말고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잠시 묵념합시다.

1980년 상반기, 박정희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유신 체제 아래서 민주화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니 바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우는 민주화운동 정국이었다.

하지만 신군부가 권력을 거의 장악하기 시작한 5월,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철이 신군부 폭주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회군을 선언하면서 서울의 봄은 종식되었다. 이에 대해 말이 많은데, 민주화가 코앞인데 수포로 돌아갔다는 말과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논란이 있다. 지금은 박사모 엑윽보수가 된 심재철 본인이 알겠지.

5.17 내란과 5.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7일 밤 12시, 신군부가 기존 정부를 무시하고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으니 이것이 5.17 내란이다. 이제 정부고 뭐고 조때로를 시전하는 것이다.

5월 18일에 광주에서 5.17 내란에 반대하는 투석전이 일어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개시되었다.

5월 20일 계엄군이 시위대에 총기를 난사하며 항쟁은 격화되었고 계엄군끼리 서로 사격하거나 시위대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등 상황은 심각해졌다. 결국 5월 27일에 계엄군이 광주 시내를 전부 장악하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무력진압당했다.

하지만 독일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호텔 택시 기사 김사복의 도움을 받아 광주의 상황을 취재하여 그 진상을 전세계에 알렸고, 신군부는 미국, 일본 등의 당대 제1세계 선진국들에게 지탄받았다. 이로 결국 신군부의 강경책은 수포로 돌아갔기에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히지만 신군부는 정신 못 차리고 김종필과 김영삼을 강제로 정계 은퇴 시켰으며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을 만들어 김대중을 또다시 조지려고 했다.

그리고 전두환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수 갈채로 당선됐다. 그리고 유신 철폐와 분위기 완화를 내세운 제5공화국 헌법을 발의했으며 10월 23일 국민투표에서 가결되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전두환의 집권

제5공화국이 수립되자 기존 정당들과 국회가 전부 해산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도 해산되었다. 또한 1981년 1월 1일 4공의 잔재인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되었다.

정치를 완전히 새로 시작하기 위해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새 체제에서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고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신군부와 하나회 출신 중심으로 민주정의당이 창당되었으며 대한민국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이 압승하며 민정당 시대가 열렸다.

또한 1988 서울 올림픽도 이 시기에 유치되었다.

문화 진흥과 우민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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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부터 우민화 정책을 개시했다. 먼저 야간통행금지를 폐지시키고 교복 및 두발을 자율화시켰으며 3S 정책(스크린, 스포츠, 섹스) 실시와 동시에 프로 선수들의 야구 리그인 KBO 리그가 출범했다.

한편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은 미국과 일본의 압력으로 사실상 실패했고 김대중이 앙망문을 써서 풀려나고 천조국으로 Run했다.

1983년에는 북한과 이산가족 찾기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때 수만 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으며 몇십 일에 달하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유네스코 기록유산에도 등재되었다.

하지만 1983년 말에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이 일어나며 남북관계는 다시 파탄이 났다.

1984년에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MBC 대학가요제와 같은 가요제를 통해 가수들을 발굴하기도 했으며 80년대에 대한민국 가요계가 급성장하며 조용필, 이선희, 산울림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전두환 정권의 쇠락

1985년이 되고 총선이 눈앞에 다가오자 와해됐었던 민주당계도 신한민주당을 창당해 결집했다. 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은 과반 이상을 획득할 것을 예상했지만 실패했다. 자유당이나 민주공화당 시절처럼 국민들이 느그들 또 개헌하게 안 놔둘 거라는 것이었다.

1986년 5월 3일, 신한민주당의 김영삼과 운동권이 충돌하면서 민정당과 신민당을 모두까기하는 인천 5.3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우리나라 반미 감정이 격화된 사건이었다.

같은 해에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일어나면서 전두환 정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어쨌든 1986 서울 아시안게임을 무사 개최하면서 대충 넘어가나 싶었다.

6월 민주 항쟁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남긴 대사가 일품인데,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 치안본부장 강모씨

이딴 걸 변명이라고 하고 자빠졌으니 국민들은 전두환에게서 돌아섰다.

마침 형제복지원 사건과 성지원 사건 등이 터지면서 '정의 사회 구현'을 모토로 내세우던 민주정의당과 전두환에 대한 민심은 더욱 추락했다.

안 그래도 이미지 안 좋은데 꼭 그 상황에 기름을 끼얹는 새끼가 있었으니 전두환 자신이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현행 헌법(7년 단임 간선제)을 고수하겠다고 씨부린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음 대통령이 노태우가 돼서 1995년까지 집권 가능하고 자기가 실세를 부릴 수 있거든.

이맘때쯤 신한민주당이 분열되면서 김대중과 김영삼의 동교동계상도동계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러던 중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중 최루탄을 맞으면서 다음 날인 6월 10일 예정된 호헌조치 철폐 시위와 얽혀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나왔고 6월 민주 항쟁이 개시되었다.

6월 18일에는 시위 규모가 일반인들에게까지 커지면서 전두환 정권의 입지가 더 불리해졌다. 결국 6월 29일 직선제 개헌,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이 발표되어 전두환 정권이 국민에게 항복했다.

노태우의 집권

10월 29일에는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제10호 헌법이 공포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제 토대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지만 '통일' 민주당은 대선후보를 단일화시키지 못하고 분열했으며 김대중이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평화민주당 창당하러 빤스런하자 3김끼리 분열한 꼴이 됐고 민주정의당노태우가 손쉽게 당선되었다.

으잉? 이러면 민주화고 뭐고 망한 거 아니냐? 할 텐데, 노태우는 그럴 힘이 없어서 눈치를 뒈지도록 많이 봐야 했으니 안심해도 된다. 물론 공안정국은 여러 번 있긴 했다.

그리고 1988년 2월 25일 전두환의 임기가 종료됨과 동시에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제10호 헌법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1988년

5년 단임 직선제가 고착된 이후 5.18이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되는 등 독재 정권 시절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사실들이 널리 알려지고 범죄자로 규정당했던 투사들은 복권되었다. 전두환은 백담사로 자의 반 타의 반 유배당했다.

하지만 민주정의당이 여전히 여당인 만큼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125석으로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여소야대 정국이 정착되었다.

또한 이 선거에서 노무현 등이 김영삼에 의해 발굴되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당시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소속이었다.

대북관계도 개선되어 노태우가 7.7 선언을 발표하고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정부의 친중정책도 이 시기부터 개시되었다.

1988년 9월 17일, 1988 서울 올림픽이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되었고 폐막 당시에도 종합 4위를 달성하여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1989년

1989년에는 남북관계 개선을 기대한 많은 사람들이 김칫국부터 마시며 무단 방북했던 시기인데, 문익환 목사는 북괴 독재의 문제점을 알고 김일성 면전에서 북을 민주화시키러 갔다 왔다가 연행당했지만 임수경은 종북짓 하러 갔다오고 연행당했다.

5.3 동의대 사태가 일어나 무고한 경찰들이 운동권에게 살해당하면서 운동권에 대한 인식도 나빠졌다.

당시 동유럽에서는 공산독재 정권이 붕괴하고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였고, 이 시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여러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했다.

제5공화국 청문회가 개최되어 노무현 등이 활약했다. 노태우는 자기 편인 하나회를 더 이상 지켜줄 힘이 없었다.

1990년

그러던 중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 3자가 김대중을 아주 고깝게 보는 공통점이 있었고 결국 3당 합당을 결정해 '우리는 이제 한 식구임돠' 하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당연히 운동권 좌좀들은 난리가 났고 김영삼을 배신자라며 저주했다. 이땐 YS가 사자굴에 들어가서 사자를 잡을 줄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했겠지...

또한 국군보안사령부가 청명계획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당계는 물론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간부들까지 무단 시찰하는 사건이 밝혀졌다. 이것이 금방 진압됨으로써 나라가 또 군부에 넘어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1991년

1991년부터 공안정국이 강화되면서 여러 운동권 머학생들이 연행되었고 몇몇 운동권 멤버들이 분신자살로 항쟁하는 분신정국이 형성되었고 김지하 작가까지 이런 분신행위를 비판하다가 변절자로 매도당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변했다.

그리고 31년만에 지방자치제도가 일부 부활해서 광역의회 의원을 선출했다. 민주자유당의 정원식 국무총리가 연설 중 계란을 맞는 파동이 오히려 민주자유당을 1991년 지방선거에서 압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며 남한은 남한끼리 북좆선은 북좆선끼리 체제를 존중하자는 약속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화해무드라며 설레발을 열심히 떨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 세상에 폭로되어 일본의 전쟁범죄 행위 배상 문제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마지막 거대공산국가인 중국과도 수교를 맺었고 헬조선의 본격적인 친중 줄타기가 시작된다.

1992년은 문화계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세대가 교체되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싶어하는 X세대들이 문화의 중심을 잡게 되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는 믿었던 김영삼을 후보로 내세웠고 민주당의 김대중과 붙었으나 김영삼이 3당 합당빨과 김대중의 배신자 이미지 버프를 받아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문민정부

1993년

마침내 정권을 잡은 민주자유당 내 상도동계는 민자당 내의 신군부 및 하나회의 븅신들의 재산내역을 공개하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진행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부패한 재계를 대대적으로 조졌다.

그리고 대전에서 엑스포가 개최되어 자기부상열차 등 과학기술들을 선보였고 우리나라도 과학 부분에 있어서는 밀리지 않는 나라임을 보여줬다.

1994년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관계도 갑분싸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를 틈타 종북샊이들이 김일성 조문을 가는 미친 짓거리들을 벌이면서 신공안정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사건 등 온갖가지 사건사고가 터져나오면서 사고공화국이라는 단어까지 돌았다.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지방 행정을 그 지방이 알아서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와 함께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산업화의 단점이 폭발하듯이 터져나오기는 했지만 전-노 심판, 조선총독부 철거 등의 퍼포먼스로 김대중이 압도적인 지지율을 유지했다.

민주자유당은 군부와 하나회 청산을 기점으로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했다.

1996년

이때도 역사 바로잡기는 지속되었고 대표적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로 명칭 변경한 사건 등이 있다.

가요계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되고 H.O.T.가 데뷔해 기획사 아이돌 시대를 열었다.

연세대 사태로 운동권의 추악한 실태가 전국에 드러났고 운동권은 완전히 지지를 잃고 몰락했다. 그리고 이들은 PC통신으로 이동해 '깨시민'이라고 불리게 될 인터넷 좌좀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영동 지방에 공비가 침투해서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군부를 쓸어버린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압승했다.

1997년

이전 해부터 무리하게 시장을 개방하는 등 여러 실책이 있었고 그 여파로 한보그룹이 부도가 나는 등 외화 부족의 문제점이 터져나왔다.

PC통신이 많이 보급되면서 'ㅋㅋ'를 필두로 한 인터넷 유행어들이 대거 등장했다.

결국 동아시아 전체에서 불어오던 외환위기 여파를 무시하던 대한민국은 1997년 말 직격탄을 아주 세게 후려맞았고 1997년 IMF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결국에는 IMF에게 외채를 빌리고 IMF 관리체계가 시작되었다.

김영삼의 자폭으로 신한국당도 사실상 자폭했고 이회창을 중심으로 한나라당이 새로 창당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김종필과 손을 잡아 DJP연합을 형성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으나 보수에 대한 이미지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 김대중이 압승했다.

국민의 정부

1998년

김대중 취임 이후 첫 진보정권이 들어서자 북한과 금강산 관광을 개시하고 반공반북태세를 지워버리고 햇볕정책이라는 핵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정보통신부가 새로운 컴퓨터 회선으로 ADSL을 채택하면서 가정의 컴퓨터에 인터넷이 아주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1999년

빠른 인터넷 보급과 함께 거의 모든 가정에 인터넷이 정착하면서 최초의 인터넷 문화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디시인사이드아햏햏. 동시에 깨시민들도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넘어왔다.

영화산업도 1999년부터 급성장하는데 쉬리가 큰 히트를 치며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개인극장이 줄어들고 멀티플렉스가 한국 전역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8년 한 해를 미치게 힘들게 했던 외환위기는 이 시기부터 다시 안정세를 찾았다.

대북도발 문제가 화근으로 떠오르기도 했는데 연평해전이 발발하면서 사람들은 햇볕정책 뭔가 문재 있구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은 새천년뽕만 맞고 잠만 자다가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에게 개쳐맞았다.

연핵술사가 뽀그리우스와 만나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남북관계가 허울만 좋아졌고 무식한 개돼지들은 천조국을 탓하며 벌써부터 북한만세를 외치다가 국정원에 물마시러 가기도 했다.

그리고 평택 미군기지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사고들로 개돼지들 사이에 반미감정이 형성되었다.

2001년

드디어 대한민국이 IMF 관리 체제를 졸업했다. 그리고 인천 영종도에 새로운 하늘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했다.

2002년

2002 FIFA 한일 월드컵이 개최되어 사상 최초로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월드컵뽕 때문에 사회적으로 여러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월드컵 때문에 새천년민주당이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쳐발렸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주한미군 반대 시위가 급증했고 국내의 반미감정도 급상승했다. 물론 제2연평해전 같은 일로 반북감정도 같이 올라갔다.

김대중 정부의 레임덕이 시작되면서 자식 비리가 터져나왔고 민심이 한나라당 쪽으로 돌아갈 뻔 했으나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전 정몽준이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의 뒤통수를 후린 것이 민심을 자극해 노무현을 당선시켰다.

참여정부

2003년 2월 25일 들어선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시작부터 많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NEIS 파동, 불법 대북송금 사건, 갖가지 측근비리가 터져 취임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노무현은 열린우리당이라는 친노 정당에 합류했고,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 3당은 진보 보수 안 가리고 손을 잡아 열린우리당을 조지기 위해 노무현의 행적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 2004년 3월 12일 노무현의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하지만 국민들은 노무현의 편을 들었고,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에 몰표를 몰아줘 152석을 획득했다. 반면 노무현을 조지려 했던 3당은 한나라당을 제외하고 모조리 몰락했다. 새천년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했고 자유민주연합 대표 김종필은 그냥 허무하게 정계를 은퇴해버렸다. 정작 김종필은 노무현을 지지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노무현은 아직 행정 부분에서 미숙한 점이 많았고 막상 열린우리당이 원내 제1당과 여당 자리를 모두 먹은 탓에 친일대첩 같은 븅신짓들을 벌이다가 역으로 조져지기도 했다.

2005년에는 한나라당의 홍준표가 과거 병역비리를 저지른 스티브 유와 같은 사례를 막기 위해 국적법 개정을 이끌면서 다시 지지율을 회복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2006년부터 바다이야기 사태와 북 핵실험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국민들을 돌아서게 만들었으며 농민 무력진압은 진보 지지층을 버렸고 한미 FTA와 전시작전통제권 회수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는 되려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버림받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이 되어 결국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으로 넘어갔고 뒤늦게 지지율을 회복하려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같은 쌩쇼를 벌였지만 이미 국민들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며 자신을 저주의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02년부터 06년까지 서울시장 직을 지내던 이명박이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끝에 박근혜를 누르고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노무현은 임기 말년에도 수능 등급제와 태안 기름유출 사건 같은 빅 똥을 싸놓으면서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일단 정동영을 대선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이 당선되었다.

이명박 정부

하지만 노무현은 마지막 유산으로 이명박에게 한미 FTA라는 임무를 물려주고 떠났고, 이명박에게 노무현은 정적이었지만 한미 FTA 성사 임무는 계승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사라지고 민주당 역할은 통합민주당이 대신했다. 하지만 이명박의 인기를 막기는 힘들었고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허니문 효과를 툭툭히 봐서 한나라당이 압승했다. 통합민주당은 당명을 또 민주당으로 변경했다.

한미 FTA를 성사시키려고 하자 몇몇 깨시민들은 광우뻥 선동을 퍼뜨렸고 촛불집회를 빙자한 폭동이 일어났다. 그라고 박왕자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다.

쨌든 노무현도 정적은 정적이니 2009년부터 노무현 측근의 비리가 까발려지기 시작했고 박연차 게이트로 노무현이 뇌물 수수 조사를 받던 중 무책임하게 부엉이 바위로 가서 자살했으며, 깨시민들의 트롤 하에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하지 않은 상태로 가버렸다.

그 이후에는 4대강 정비 사업을 개시해 환경단체와 트러블을 빚었다. 이 사업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2010년에는 북한이 연평도 포격 사건천안함 피격 사건을 일으켜 1968년 이후 최악의 남북관계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인터넷의 합성 문화와 얽혀 김정일 관련 풍자 합성물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2011년에는 북괴 수괴 김정일이 뒤지고 김정은이 3대 세습을 했다. 그리고 민주당과 여러 민주당계 정당들이 합당해 민주통합당이 출범했다.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무산됨에 따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했고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2011 하반기 재보궐선거가 치뤄졌으나 박원순이 당선돼버리면서 한나라당이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2년에는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까지 터지면서 친이 세력이 몰락하고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새누리당은 친박 세력의 미래희망연대와 합당하면서 친박세력이 장악했고 민주당계에서 여러 사건사고들이 터지자 그 틈을 타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압승했다.

대통령 선거 기간이 다가왔고 새누리당ㄹ혜민주통합당문재앙이 맞붙은 끝에 박근혜가 당선되었다.

박근혜 정부

2013년 2월 25일 박근혜가 머통령으로 취임하며 창조경제라는 알 수 없는 경제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민주통합당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다가 다시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재결성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ㄹ혜의 지지율은 그럭저럭이었으나 2014년 4월 16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흡한 대처가 큰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모두에게 기회를 줬다.

2015년에 북괴가 지뢰 도발을 저지르면서 또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중동호흡기증후군이 범유행하면서 ㄹ혜의 방역이 욕을 얻어먹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프'가 방역을 더 ㅂㅅ같이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지...

2015년 말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이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갈수록 나빠지는 새누리당의 이미지를 이용해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떡상했다.

그러던 중 2016년박근혜-최순실 게이트최태민-최순실 일가가 국정을 농단하고 무단으로 개입한 사건들이 줄줄이 밝혀지면서 박근혜는 몰락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16년 10월에서 2017년 3월까지에 걸쳐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이 일어났으며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어 업무가 정지되었다. 새누리당의 친박파들도 쫓겨났으며 당명은 자유한국당으로 변경되었다.

결국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직을 파면당했다. 그리고 5월 9일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앙과 자유한국당의 홍준표가 맞붙었지만 보수의 이미지는 씹창난 상태. 문재앙이 이겼다.

문재인 정부

문재앙은 취임하자마자 이명박과 박근혜를 조지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ㄹ혜년은 감빵 갔고 쥐박은 아직도 조사받는 중이다.

하지만 2018년여성가족부워마드 등 페미니스트들이 온갖 물의를 일으키고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재조명되어 다시 보수가 입지를 되찾기 시작했다.

2019년에는 https 검열과 인디게임 규제 등 ㄹ혜나 할 법한 정책들이 나오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문재앙과 아베놈의 정책이 충돌하면서 한일무역분쟁이 일어났고 더불어터진당은 개돼지들을 선동해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조장했다.

2020년 1월 20일, 대한민국에 첫 우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발생했다. 초반에는 어찌저찌 잘 막는가 싶었더니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나며 확진자가 대규모 발생했다.

자유한국당은 총선을 앞두고 여러 보수정당을 결집시켜 미래통합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을 가져갔다.

하지만 2020년 7월 9일 서울시장 박원순이 갑자기 운지했고 훗날 박원순이 벌인 사탄적 만행들이 드러나면서 민주당이 민심을 잃기 시작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K-방역이라는 선전물을 SNS 등에 업로드했지만 국민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러던 중 2020년 8월 15일 몇몇 친박세력과 원리주의 기독교 신자들이 2020년 광복절 서울 광화문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가 제2차 범유행을 일으키면서 보수계가 타격을 입었다. 그 중 미래통합당의 당원들도 많이 참가했고 결국 미래통합당은 창당 후 몇 달만에 당명을 국민의힘으로 변경했다.

2020년 9월 21일, 연평도 공무원 피격 사건으로 10년만에 북한군이 대한민국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남북관계는 재차 악화되었다.

2021년 2월부터 시작된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 부동산 투기 의혹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비리 또한 재차 조명되었으며 결국 이는 4월 7일 2021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국민의힘이 압승하면서 민주당이 힘을 잃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얼마 후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이준석이 당선되고 그 다음 윤석열이 입당하면서 국민의힘은 한순간에 신병 윤석열-ask 이준석 체제로 변해버렸다.

아무튼 문재인은 계속 죽을 쑤다가 2021년 말 대선후보가 이재명, 윤석열로 결정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낙연이 뇌절한다든지 윤석열이랑 이준석이랑 신경전을 벌인다든지 갖가지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윤석열 이재명 둘 다 비리 사건이 있었다.

윤석열은 이 때문에 이재명에게 질 수도 있었으나, 안철수와 현관합체하며 결국 2022년 3월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이 당선됐다.

윤석열 정부

2022년

집권하자마자 청와대 집무실부터 용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재명 대장동 수사를 하고 있다.

6월 치뤄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많은 자리를 차지했으나, 경기도는 민주당에게 넘어갔다.

그 다음에는 윤석열의 너무너무 적극적인 당무개입을 통해 이준석을 당대표 자리에서 쳐냈다.

2023년

윤석열의 당무개입은 계속되어 이제는 나경원과 안철수까지 건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