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대구 10.1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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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1946년 10월 대구에서 일어난 대규모 공산 무력 항쟁이다. 정확히는 그 해에 기근이 심각했는데, 경찰 놈들이 하도 부려 먹으려고 드니까 일어난 사건이다.

실제로 머구는 해방 직후만 해도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새빨간 동네였다. 그와 반대로 김씨 반란군 새끼들이 점거한 평양은 당시 예수쟁이들이 넘친다고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것과는 대비된다.

사실 머구가 좀 특별할 뿐이었지, 다른 지역도 이 시절에는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예시로 1947년 미군정에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사회주의자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응답이 70%를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 이유는 당시 남한은 지주제가 폐지되지 않고 500~600년 동안 유지되어왔는데 국가 경제의 80%가 농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탁통치 오보사건과 1949년 토지개혁,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여론이 거의 사라졌다. 전쟁 직전 남로당의 박헌영이 "남한을 침공했을 시에는 남한에 숨어있던 남로당 당원들이 우리를 반길 것이다."라고 말한 게 완전 개소리는 아니고 이런 상황을 토대로 말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항쟁이나 사건이라고 지칭한다. 지만원 + 일베에서 인정 드립 친 좆병신 새끼야, 지만원이 폭동이라고 했으니까 폭동이라고? 아따 고럼 5.18도 폭동이라고 해보시지? 그건 못 하겠지?

대구 10월 사건이 맞는 표현으로, 2007년 재조사가 이루어져서 2010년부터는 항쟁이나 사건으로 표기하도록 권고하는 사항이다. 미군정이 한알못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다.

이후[편집]

비슷한 시기 구미 일대에서도 봉기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박상희가 총탄에 맞고 사망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그의 동생은 우익 세력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커지게 되는데, 이재복의 권유와 황태성의 신원 보증 등을 통해서 결국 남로당에 입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