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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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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광 우럭따 8ㅅ8
당시 희생자들과 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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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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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反攻!反攻!反攻大陸去!
미군정의 과잉 진압도 문제지만, 원인은 남로당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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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뒤졌을 서북청년단 개새끼들 + 일 저지르고 나 몰라라 튄 남로당원 씨발놈들
서북청년단, 남로당 둘 다 ㅈ같지만 특히 남로당새끼들은 시발점도 지들이고 학살까지 했으면서 튀어버린 개 병신들이다.
만약 당신이 4.3 사건 일으켜 어그로 제대로 끈 남로당 빨갱이 새끼들, 그걸 진압한다고 온갖 트롤링 쳐한 서북청년단과 그 외 토벌대 새끼들, 희생자들 추모한답시고 남로당 새끼들 끼워 파는 좌빨새끼들, 4.3 사건을 폭동이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 존재를 부정하는 수꼴새끼들(이)거나 4.3 사건 일으켜 어그로 제대로 끈 남로당 빨갱이 새끼들, 그걸 진압한다고 온갖 트롤링 쳐한 서북청년단과 그 외 토벌대 새끼들, 희생자들 추모한답시고 남로당 새끼들 끼워 파는 좌빨새끼들, 4.3 사건을 폭동이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 존재를 부정하는 수꼴새끼들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문서에서 탈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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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이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하든, 미군정의 대학살로 표현하든 거기에서 죄없고 선량한 제주도민이 희생 당했음을 잊지 마라.

개요[편집]

6·25 전쟁 축소판이자 이념 대립으로 만들어진 비극이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련의 아수라장을 가리킨다. 이념 전쟁으로 시작하여 참극으로 끝난 사건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눈에 보이는 사람이 맘에 안 들면 죽이는 수준에 이르렀다.

좌파는 운동, 항쟁이라고 하고, 우파는 반란, 폭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4.3 사건에 무관하게 희생된 제주도 일반인의 입장이나 희생 당한 과정을 보자면 사건이라고 칭하는 게 가장 그들의 입장에 가까운 서술이 아닌가 싶다. 희생당한 제주도민 입장에서 보자면 사건 수준이 아니라 대학살이지.

씨발 항쟁이다 폭동이다 말이 많은데, 하나의 사건이 아닌 것을 전부 총칭해서 4.3 사건이라고 일축해버리니 양쪽에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이건 걍 일련의 사건으로 빚어진 참극이다.

  • 좌빨들이 폭동을 일으켜 무고한 제주도민들 사망
  •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과잉 진압으로 무고한 제주도민들 사망
  • 결국 제주도민들만 피해를 봄

이거다.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는데 서로 탓이라며 돌리는 꼬라지를 보면 이 나라는 과연 역사교육 수준이 얼마나 한심한 건지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배경[편집]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체제 경쟁이 끝나가던 때로, 6.25보다 훨씬 이전, 막 독립했을 때 남한 자유진영의 단독 선거를 치르려는 상황에서 정계는 물론이고 남한 사회 전반에서 단독 선거를 둘러싸고 틈만 나면 갈등이 빚어졌다. 매우 예민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제주도는 1947년 3.1운동 기념 집회에서 기마 경찰의 말 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여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이 경찰서에 찾아가서 항의하자 이에 경찰이 총을 발포하는 일이 발생하여 민심은 매우 들떠있었다. 사태는 제주도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집단 파업을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에 경찰관들은 해임되지만 미군정은 제주도는 좌익의 성지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서북청년회를 내려보내고 파업을 와해하는데에 주력하려고만 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무장대를 조직하여 몇몇 동조자와 함께 반미, 반정부 무력 투쟁을 시작했다. 이윽고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군대까지 파견하였고, 남로당 무장대와 정부 진압군, 양쪽 진영 사이에서 결백한 민간인들이 사살되기 시작하였다.

의외로 빨리 해결될 수 있었다. 4월 말, 남로당과 정부가 72시간 휴전하고 나중에 더 협상하기로 합의했는데 72시간 끝나기도 전에 서북청년회로 추정되는 세력이 오라리(오라동)에 불을 지르면서 협상이 파투가 났다. 이거 때문에 정부가 강경 노선을 결정했다.

즉, 시작은 이념에 의한 정치적 항쟁 or 반란의 성격이 강했다. 근데 이걸 정부에서 진압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반공에 대한 이념이 몹시 강했던 때인데, 남로당원들이 버티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가자 그냥 산에 있는 사람이면 빨갱이라고 잡아죽이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참고로 누가 국민방위군 사건 일으키는 새끼들 아니랄까봐 서북청년회 보내면서 보급도 없이 보냈다. 괜히 헬게이트가 열렸던 게 아니다. 통제도 안 되는 놈들을 보급도 안 챙겨주고 자율권에 멋대로 할 명분까지 줬다.

전개[편집]

48년 10월 중순 경에 이르러, 이승만 정부의 진압군은 해안선에서 5km 너머에 있는 모든 주민들에게 소거령을 내리고, 해안으로 내려오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빨갱이 취급하여 학살을 시작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40년대는 아직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 기반 사회였으며 그만큼 주민들이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살던 땅에서 쉽게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이윽고 서북청년회가 증원 되고, 해안선 5Km 바깥을 '적지'로 판단하게 된다.(서북청년회나 군경들 입장에선 적지로 판단한 지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남로당무장대에게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간주했다.) 1949년 봄까지 '적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여 작전을 벌였는데, 말 그대로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간과할 수 없지만, 무장대를 진압하는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전체 희생자의 80%이며 이중 대다수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남로당 쪽 주동자가 김달삼이라는 놈인데 이 새끼는 대구에서 10.1 사건에 참가하고 이것 때문에 제주도로 다시 들어왔다가 4.3 사건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경찰서 습격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태 수습이 안 되어서 북한으로 도망갔다가 6.25때 정선군 여량면(아우라지 있는 곳)에서 목 잘리고 뒤진다. 이 새끼 때문에 4.3 사건이 일어났고 참혹한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김달삼 이새끼가 아니었으면 단순한 민간인 시위사건으로 일단락되어 무고한 산간지대 양민들까지 피해볼일도 없었을것이다)

이후[편집]

사건이 있은 뒤로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공직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자세한 사항은 현기영의 〈순이 삼춘〉을 읽어봐라. 참고로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소설 출판 이후 남산에 끌려가서 고문 받았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기억 안 나지만 2000년대에 국정원장이었나? 그 사람이 제주 4.3 사건에 대해 정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다가 불이익을 받았던 것을 보면 그 이전 시대에 한낱 소설가가 4.3 사건을 까발리는 소설을 썼다가 끌려간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ㄴ 경무대 똥통사건, 견통령사건보면 당연히 무리가 아니다. 이승만의 통치방식은 미국뽕먹은 황제의 마인드니까

반공 정권의 칼날에 의해 피해자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인 '용서'마저도 금지되어, 끔찍한 사건을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채로 50~70년이 지나간 것이다.(제주도에선 4.3사건의 흔적을 정부차원에서 지워버리기위해 그들을 위로해주는척하면서 516도로를 깔아준다던가 제주도 순환도로를 포장도로로 바꿔주고 관광지로 개발하는등 제주도발전에 따라 4.3사건은 잊혀져갔다.)

다행히 2000년대 이후 늦었지만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결국 2000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노무현 정권 때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사과하였으며 몇 년에 걸친 조사로 진상 보고서도 만들어졌다. 4.3 추모 행사에 대통령이 참여하기도 했다. 그 뒤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대통령이 직접 4.3 추모식에 오지는 않아서 제주 도민 중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그래도 국무총리 등 고위 공직자들이 대신 행사에 오는 것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때 4월 3일을 국가 추모일로 지정된 것은 개인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남로당이 뒤에 있는 무장대의 희생도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정부도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4년에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독립영화 《지슬》이 개봉되었다. 애초에 오락성과 상업성 혹은 감성팔이를 노리고 만든 영화가 아니기에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당시 시대가 얼마나 미쳐 돌아갔는지 알 수 있는 가치 있는 영화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대한민국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과 일부 주민들이 무장대를 조직하고, 그 무장대를 정부가 보낸 토벌대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 희생이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부에 의한 민간인 희생을 부정하고, 4.3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당시 희생자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인권 의식 및 윤리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극좌들도 일베와 함께 대가리 박아라. 니들도 잘한 거 없다. 미군정이 빌미를 줬든 뭐든지 떠나서 처음 시작한 것은 남로당이고, 좌익 무장대의 희생을 민간인의 희생과 동급으로 두는 것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억울하게 죽은 제주 도민들에 대한 모욕이다.

대학에서 이거 배우는데 진짜 토할 뻔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 하는지;; 예를 들면 아들 죽이고 간을 꺼내서 엄마 입에 물리고 어린 손자와 할아버지가 뺨 때리게 하다가 죽이고 장모와 그거 시키고 죽인다.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일제강점기와 6.25도 겪으신 증조 할머니가 치를 떠는 게 4.3사건이다. 좆만한 섬에서 왜 그렇게 죽은 사람이 많은지. 집집마다 대가 끊겨서 제사라도 하게 하려고 밭뙈기 주면서 다른 집 아들들을 호적상으로 받아주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일본으로 가면서 조상님 제사 걱정되어서 있는 밭 제사 지내주는 조건으로 물려주고 건너갔다고 하더라. 헬 국방부 클라스 어디 안 가는지 4.3사건을 폭동이라고 쓴 책도 보이던데 대가리에 뇌 대신 순두부가 들어있는 게 틀림없다.

제주도 사람들 특히 시골 사는 분들 대부분은 4.3사건 유공자들이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렇다.

우리 큰할아버지도 피해자이시다. 나도 유족임

2023년 4월 3일 자로 75주년을 맞았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역시나 유튜브의 4.3사건 추모댓글 창은 좌빨과 엑윽보수들의 병림픽으로 뒤덮였다. 진짜 반공 반북의식을 가지고있는 사람이라면 근본적으로 남로당의 뻘짓 때문에 희생된 제주 시민들을 누구보다 추모해야 하는데 자칭 반공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저딴건 피해자도 아니다'라고 표적을 이상한 곳에 돌리고 있다. 누가 서북청년단 남로당 빨갱이새끼들 추모한댔냐 병신들아?

여담[편집]

이때 희생된 인원이 최소 3만여 명이고 최대 8만여 명, 미국에서 조사하기로는 6만여 명인데 당시 제주도의 전체 인구가 30만 명이었다. 대량 살상용 화학 무기도 없고, 전염병도 없었으며, 흉년이나 기근이 들지도 않은 채로 인구의 10~25%가 증발한 것이다. 참혹하기 그지없다.

오로지 인간의 주먹, 인간이 휘두른 칼, 인간이 발포한 탄환에 의해서 인구의 10~25%가 희생된 거다. 말 그대로 6.25전쟁의 축소 버전이다. 희생자들 명단에는 2 ~ 5살짜리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극우들은 이런 애기들도 빨갱이라고 얘기한다. 개소리.

이 참혹한 사건은 당시의 지역사회의 이웃 문화, 그리고 섬의 특징을 고려해보면 더욱 가슴이 아픈데, 이 사람들은 내 할아버지를 내 친구의 아버지가 죽이고 내 아버지가 친구의 어머니를 죽이는 그런 광경을 목격한 거다.

시간이 지나서 체제 경쟁이 자유주의 진영의 승리로 사실상 끝났지만 이 사건은 누가 더 잘못했고, 누가 더 가해자고, 누가 더 피해자고, 손익을 계산하는 그런 논리로 풀 수 있는 형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이 사건을 명명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한다. 말에는 상황을 정의하는 힘이 있다. 4.3 사건, 4.3 항쟁, 4.3 반란, 4.3 사태. 전부 어감이 다르다. 지금 이 사건을 평가하기에는 너무 가슴 아프기 때문에 4.3 사건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건에 대한 평가를 후대로 보류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주 방언이 이때부터 빨갱이말이란 이유로 빠르게 쇠퇴하였다. 학교선생님들 경험담으로는 학창시절 사투리 쓰면 맞았다더라.. 오늘날에는 제주어 말하기 대회 등등해서 제주 방언을 보존하려고 노력중이다.

제주 도민들을 혹시 만날 일이 있다면 인터넷으로 주워들은 지식으로 4.3 반란이나 사태라고 쉽게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농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척을 질 수도 있다. 90년대생 이후의 젊은 세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 젊은 세대도 4.3 사건에 대해 모를 리가 없고 가족들(증조 할머니, 할머니 등)이나 친척들이 4.3 사건 때 희생된 경우가 대다수라서 여전히 민감한 사항이다. 함부로 선동 자료에 낚이지 말자. 〈순이 삼촌〉이나 《지슬》을 보면 제주도민에게 주워들은 지식으로 나불댈 일은 없을 것이다.

ㄴㄹㅇ 진짜 하지마라. 이건 00년생 이후 세대한테도 하면 욕 오지게 먹음.

ㄴ99년생이고, 13년정도 제주에서 산 학식이다. 초중고에서 각각 한번씩 현장학습으로 평화공원 갔었는데, 갈 때마다 평화공원에서 대성통곡하는 친구들 많이 있었다.

사건과 무관해 보이는 이 사람들도, 제주도 토박이라면 아직도 마음 아파하고 역린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제주 4.3 사건의 참상은 인간이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눈이 돌아가버리면 얼마나 끔찍한일을 일으키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잘못된 이념싸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았는지 반드시 역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한국이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고 증오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제주 4.3 사건의 그림자를 보고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