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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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심각한 한알못이라 여러가지 문제를 불러왔다. 일본에서 하던 거 반만큼이라도 하지 ㅉㅉ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 |
기본 정보 | |
---|---|
수도 | 서울 |
국가 | 한국 |
대륙 | 아시아 |
인구 | 약 2000만명 |
인종 | 한민족 |
추가 정보 | |
지도자 | 존 하지(집권방식: 사령관) |
언어 | 한국어, 영어 |
개요[편집]
8.15 광복 시점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미국이 한반도 중부 및 남부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잠시 갖고 있었던 시기에 세워진 정부.
당시 조선은 패전국의 식민지였기에 마치 독일이 사정없이 쪼개지던 것처럼 일본이 항복하기도 전에 이미 소련이 한반도 북부를 집어삼킴으로서(이때 미국은 일본 본토 진입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한반도의 분단이 시작되었다.
안타까운 점은 미국이 한국사에 대해서 관심이 ㅈ도 없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인정되지 않았고 (거칠게 말하면 괴뢰 단체에 준하는 취급을 받고) 미군정이 실시된 것이었는데 그 와중에 친일파 새끼들까지 등용하여 헬조선의 밑바탕을 깔았다는 것이다.
미국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형님 빽만 믿고 가겠다
그래선 안 된다 이거요!
상세[편집]
태평양 전쟁 시기 우리의 주인님 천조국은 국민정부와 연대해서 쪽바리스탄을 조지려고 했는데, 좆틸웰 씹새가 대륙타통작전 방어를 못하고 대륙의 공군 기지들을 다 쪽바리들 손에 두게 되면서 노선을 바꿨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필리핀+괌라인으로 조진 다음 쪽국 본진을 때리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다. 여기서 천조국이 힘에 부치니까 쏘오련 빨갱이들에게 손을 벌리게 되었다.
소련이 참전한 지 1개월도 되지 않아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였고, 소련은 청진 등에서 일본 제국과 전쟁을 계속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은 자신들의 몫으로 한반도를 요구했다. 이에 미국은 소련 세력의 팽창과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스탈린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은 자신들도 엄연한 참전국이며 소련군 사상자와 부상자의 존재를 내세워 한반도 통치를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 25일 북위 38°선 분할 점령을 발표하고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결정한다.
9월에 더글라스 맥아더의 부하인 존 하지 중장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미군정 시대가 시작되었다. 근데 명령만 잘 따르는, 정치는 눈곱만큼도 몰랐던 존 하지가 온 게 실수. 그리고 존 하지는 이승만과 동창이다.
게다가 존 하지 대신 올 가능성이 높았던 양반이 희대의 씨발롬 조지프 스틸웰이었기에...
좌우 간의 테러가 가장 많이 발생하던 때가 이때였다. 이북은 이미 김일성이 꽉 잡고 있어서 가만있어도 공산화 확정이라서 평화로웠지만[1] 남쪽에는 박헌영이 주축이 된 남로당, 그리고 김구와 이승만 등의 우익 간의 피 터지는 세력 다툼이 발생하던 때다. 미국 입장에서는 우익을 밀어주고 좌익을 족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자비로우신 미군정니뮤께서는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시어 공산주의든 민족주의든 법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였다. 근데 좌익 계열이 예술 분야로 공산주의를 집요하게 선전하고 우익도 이를 막기 위해 테러를 가하는 폐해가 심해지자 예술 매체를 빙자한 사상 선전을 막아버렸다. 이게 다 심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배경[편집]
원래 한반도에 먼저 진입하려고 한 건 소련이었는데 미국 입장에서는 '어... 이러다가는 한반도 전부 소련에게 내주게 생겼네? 우리 아시아 진출할 수 있겠냐?'라는 불안감이 생겼고 급하게 소련에게 제안을 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소련이 이 제안을 거절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유럽을 공산화하는 게 1순위였던 소련은 주도권이 본인들에게 있었음에도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38선을 기준으로 땅을 휙 그어버린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싹 다 무시하고 "미군정이 남조선 지역의 유일한 정권이다 ㅇㅋ?"라고 공표한다.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에 참가했던 인물들은 당을 설립하는 목표로 전환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또한 한국독립당, 혹은 개인 자격으로 귀환한다.
행정 구역[편집]
지금 한국 행정구역과 조금 다르다. 사실 38선 때문에 인접한 해주시, 옹진군, 벽성군, 연백군, 연천군, 파주시 일대의 행정이 개판이 되어서 소련, 갓조국 사이에서 행정구역을 통째로 딜하자는 협정이 있었는데, 시도만 했고 완전히 무산되었다.
강원도: 38선 이남 자투리 지역만 남은 군을 폐지한다(화천[2], 양구[3], 양양[4], 인제[5])
경기도: 연천군을 폐지하며 이남 지역이 파주군 양주군 편입, 벽성군를 폐지하며 남부 4면 연백군, 옹진군에 편입, 장연군 일부 지역(백령면, 대청리, 소청리) 옹진군 편입(연백군 총면적 935.61 km2, 옹진군 대략 950 km2) 이렇게 개편된 연백군은 황해도가 아닌 경기도로 편입.
정치[편집]
대통령 대신 총독이 다스리고 그 휘하에 국회의원이 선출되는 방식의 구조를 갖고 있다. 총독 역할은 존 리드 하지이다.
참고로 이승만이 이 시기에 잠깐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에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식 정부가 출범하자 첫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된 후 대통령에 취임했다.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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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미군정이 정치를 못했더라도 좆본 36년 지배 기간보다 미군정 3년 통치 기간이 훨씬 낫다. 이건 미뽕 걸러도 맞는 말이다. 참고로 이 시기가 대한민국에서 정말 짧았던 모병제를 하던 시기였다. 대한민국은 1949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했다.
그리고 정치 구조를 보면 이승만이 이 시기에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했으며 김형민이 서울특별시장을 했었는데, 총독만 미군이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인으로 채워 넣었을 만큼, 미군은 이 당시 한국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민주주의 국가로서 하나하나 가르쳐주던 시기였다.
가장 좋은 예로, 식민 지배하면서 초등학교조차 의무 교육을 안 시켜주고 기초 교육만 시키는 것도 안 된다고 빼애액대서 광복 직후에는 78%의 문맹률을 찍으며 까막눈 나라를 만들어놨던 좆본 새끼들과는 달리, 천조국 성님들은 강력한 문맹퇴치 사업을 벌여 단 3년 만에 문맹률을 78%에서 41%(1948년)로 절반 가까이 뚝 떨어뜨린다.
가장 중요한 건,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더라도 미군정이 없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당과 친소련 세력에 넘어가서 지금쯤 남북한 그런 거 없이 모두가 부카니스탄 수준이고 동아시아 정세도 남한 + 일본 vs 북한 + 중공이 아니라 일본 vs 한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중공이었을 것이다. 일본이 아무리 싫다고 이런 상황이 되는 게 더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 좌빨 병신은 여기 없겠지? 다시 설명하지만 원래 한반도에 먼저 진입하려고 한 건 소련이었다.
물론 실책도 있는데, 당시 국민들이 미군정 정책에 불만이 있어서 시위할 때마다 과잉진압을 했다가 일이 커지는 경우가 있었다. 4.3 사건과 대구10월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물론 좌파 세력과 얽히는 바람에 그런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심했다. 다만 이건 적화방지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데 대구의 예를 들더라도 그 사람의 형 단 한 명 때문에 조선의 모스크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순식간에 적화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을 너무 죽인 건 비판이 아닐 수 없는 게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