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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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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해전에는 인천상륙작전이 있다면 지상전에서는 이 전투가 있다. 북괴 주력군 대부분을 궤멸시켜 국군과 미군이 북괴군을 평양까지 털어버리는 기반을 마련해준 전투

전투 전개[편집]

배경[편집]

국군은 해방직후 미국의 원조도 제대로 못받고, 군수공장도 종범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원조를 존나게 받고 군수공장이 드럽게 많았던 북한에게 너무나도 밀렸다. 거기에 좆성모, 좆재흥같은 똥별들이 군부를 쥐고 있었던 상황이라 국군은 북괴군에게 밀리고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남에서 개쳐맞고 온 마산 인근 북괴군은 미군성님들의 참교육으로 완전히 뒤져버리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온 북괴군의 경우는 갓원일니뮤가 백두산함으로 참교육을 시전하셔서 해군전멸, 포항 시가지를 겨우 뺏었지만 포항 전투에 투입된 3개사단이 시망상태에 이르면서 육군들이 개병신이 되었다. 그 결과 북괴새끼들은 남은 주력군을 대구로 쒜리붓게 된다.

게다가 천하의 악당 좆일성 돼지새끼는 8월 15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며 북괴군을 닦달하였고 이에 북괴군은 8월 총공세를 실시하였다.

다부동 전선 구축[편집]

구미-왜관에서 북괴군을 존나게 두들겨 패던 1사단과 구미-의성에서 북괴군과 싸우던 6사단은 8월 11일, 국군 사령부의 지령을 받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왜관 융단폭격 작전[편집]

1950년 8월 16일, 미군B-29 폭격기 98대가 대구로 밀고들어오는 인민군을 막기 위해 왜관 일대를 융단폭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군들은 가산으로 침투하기 위해 기를쓰고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쪽에있는 466고지를 공격함으로써 1사단은 인민군에 의해 돌파되느냐 다부동을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여 있었다.

따라서 미 8군은 1사단 병력만으로는 도저히 다부동 고수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서 8월 17일 예비병력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8월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인민군이 발포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는 등 대구는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

위기에 처한 다부동[편집]

백선엽 장군은 이러한 전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적진으로 정면돌파작전을 선택했고 미 27연대와 함께 적진으로 돌파작전을 실시했다. 제15연대 또한 328고지에서 수류탄 공방전을 벌여가며 필사적으로 쟁탈전을 벌였으며 제12연대는 8월 19일 수암산을 적에게 피탈당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적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이날 미군 제8군 명령에 따라 미군 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으며 국군 육군본부에서도 8사단 제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처럼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대가 추가지원될 만큼 바람앞의 등불과도 같았고 미군과 국군은 필사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막고 있었다.

국군의 역습[편집]

8월 20일, 인민군이 1사단과 미군의 필사적인 저항때문에 다부동 전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인민군 15사단을 의성쪽으로 이동시켰고 여기서 국군 8사단을 공격하여 영천쪽으로 돌파 시도를 하였다. 이로써 인민군은 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사단에게 이는 기회였다.

다음날인 8월 21일 새벽에는 한국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다부동 계곡에서 벌어졌다. 이날 인민군의 T-34와 미군의 M26 퍼싱이 다부동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 포탄을 주고받는 모습이 마치 볼링경기를 보는 것 같다고 하여 이 전투를 볼링장(Bowling Alley) 전투라고 불렀다.

게다가 이날 오전에는 인민군 13사단의 정봉욱 중좌가 11연대 지역의 작전지도를 갖고 국군으로 귀순하여 적의 사기가 꺾였고 이 지도에 따라 인민군의 포진지를 유엔군 전폭기들이 융단폭격하여 적의 화력을 무력화시켰다.

이 폭격으로 인민군의 화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으며 마침내 8월 28일 국군은 다시 수암산을 탈환하였고 끝내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이처럼 1사단은 인민군의 8월 대공세를 끝끝내 막아내며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다부동 전투의 의의[편집]

다부동 전투는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이 미 8군과 육군본부에게 병력 지원을 받아가며 밤낮없이 싸워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한 전투다.

결국 열심이 싸운 백선엽의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은 북괴군을 몰아내고 낙동강 전선을 지키는데 성공하였다.

북괴군은 이 전투에서 다량의 병력과 화력을 잃고 사기가 꺾였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완전히 박살나게 된다.

이전까지는 계속 밀리기만 했던 국군이 이 다부동 전투에서 북괴군의 남하를 저지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 덕분에 6.25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백선엽 장군은 살아생전에 미군에서 생일 잔치를 자주 열어주고, 존경한다고 할 정도로 미군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