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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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7월 20일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출생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한국에서 이분만한 명성을 얻은 예술가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다.
후대로 가면 피카소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거라고 한다. 크
빌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물건 자랑도 하신 윾쾌한 분이시다.
ㄴ클린턴 앞에선 누구나 바지가 자동으로 내려간다 카더라
존나 금수저였다. 그래서 6.25터지자 일본으로 독일으로 유학을 가셨다.
ㄴ금수저였던 터라 좌익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전쟁 터지고 가족들은 다 피난갔을때 자기는 서울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빨갱이 새끼들이 자기집 개 잡아먹는거 보고 충격먹어서 탈공산주의화 된다.
하지만 죽창틀을 달기에는 이분이 너무 머단하시기때문에 삼가는 게 좋다.
당시 엄청나게 세계적이고 참신하고 신박한 예술양식인 비디오아트에 크게 기여하셨다.
대표작은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이다. 텔레비전으로 산을 쌓고 각 화면마다 다른 것을 틀어준다. 다른 작품들도 텔레비전같은 비디오를 많이 활용했다.
왜 대단한지 모르겠는 예알못에게 설명하자면, 그때 틀딱들의 예술관념은 그림,오페라,시,조각 같은 틀에 박히고 정해져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최신기술과 융합시키면서도 일상과 고오급 예술과의 경계를 허문 첫 시도였다고 대충 생각하면 된다.
비디오아트 이전에도 오브제중심의 예술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전위예술을 행하는 집단, 플럭서스(Fluxus)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다.[1] 그 만큼 백남준의 영향력은 엄청나서 가히 진정한 탈조선을 이뤄낸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현재까지도 백남준의 명성을 뛰어넘는 한국 예술가는 아직도 없다.
생활양식이 다양해지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비디오말고도 새로운 미디어가 많이 등장하면서 비디오아트는 미디어아트란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이 미디어아트는 1984년부터 시작된 위성방송을 이용한 예술작품 "굿모닝 미스터오웰"로 3단원의 막을 열었다. 연도와 작품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이 보여주는 과학이 인류를 지배한다는 억압적인 내용을 부정하고 오히려 이 과학기술을 이용해 윾쾌하게, 그야말로 전위적으로 풀어냈다. 결국 오웰은 1패 추가.
두 번째 단원으로 1986년 10월 6일 다시 한 번 위성방송을 이용한 작품으로 "바이 바이 키플링"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키플링이 누구냐면 러디어드 키플링이라는 문학가다. 작품 이름답게 키플링의 사상을 구닥다리로 치부해버리는 대담한 작품인데, 그 사상이 뭔고 하니 이 작가가 집필한 작품 중 "동과 서의 발라드"라는 책의 내용 중 "동은 동이요, 서는 서이다. 이 둘은 절대 서로 만날 수 없으리라."라는 구절인데 이 작품을 보면 서울을 비롯한 동양의 모습과 서양의 모습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는 인종이나 사는 곳은 다를지언정 결국 서로 다를 바 없는 인류일뿐이라고 다시 한 번 전면부정하는 내용이다. 엔딩곡으로 비틀즈의 "come together"로 쐐기를 박은건 덤.
마지막 단원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1주일전 "손에 손잡고"[2] 라는 작품으로 냉전의 최대 피해국이었던 한국에서 스스로 냉전의 종말을 고하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작품의 탄생과 대단원의 막을 동시에 내렸다. 그야말로 가히 탈조선인에 버금가는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이 분의 전시관이 있다. 심심하면 놀러가 보던지. 독특하게도 애기들을 동반한 부모님들이 많이 온다.
2006년 1월 29일에 노환이 왔는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