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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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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近現代

1840년 또는 1912년 ~ 현재

말 그대로 중국의 근현대사.

특징[편집]

중국의 전통적 정치 체제였던 3성 6부제, 조공책봉관계, 율령 등이 완전히 붕괴하고 현대 국가의 형태로 바뀌는 시대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의 새로운 이념들이 기존의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대체했다.

신사층도 중국의 다사다난한 근현대 시대를 거치면서 붕괴했다. 문화대혁명 때 최종적 결정타를 맞아버린 것.

구분[편집]

청말 (1840년 ~ 1912년)[편집]

개항기 (1840년 ~ 1861년)[편집]

아편전쟁으로 공행 무역이 붕괴하고 서양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 시기.

1842년 난징 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 넘어갔으며 상하이, 닝보, 푸저우, 샤먼, 광저우 5개의 항구를 열었다. 서양과의 조공책봉관계도 붕괴되었다.

1843년 후먼 조약에서는 영국에 대한 영사 재판권최혜국 대우를 인정했으며, 1844년에는 미국과 왕샤 조약을, 프랑스와 황푸 조약을 체결했다.

아편 전쟁 이후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하게 된 청나라는 세금을 올렸고, 물가가 오르면서 다시금 반란의 조짐을 보였는데, 꿈에서 형(?) 예수를 영접하고 온 홍수전이라는 사이비 지도자가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면서 1850년대의 중국은 또 혼란에 빠지게 된다.

1856년 애로호 사건으로 촉발된 2차 아편전쟁으로 인해 1858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은 청나라에게 톈진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에 따르면 베이징에 외교관이 주재하며 외국인의 중국 여행을 가능케 하며 선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10개의 항구를 추가로 열어야 했다. 같은 해 러시아와 아이훈 조약을 맺어서 연해주 북쪽의 시베리아 지역을 러시아에게 내놓았다.

하지만 청나라는 거절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가 베이징을 탈탈 털면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베이징 조약에 나온 내용은 기존 톈진 조약의 요구사항에 톈진시를 개항하게 하고, 영국에게 홍콩 북쪽의 구룡반도를 추가로 할양해서 영국이 중국 내륙에 영토를 갖게 만들고, 러시아에게는 연해주를 바치는 것이었다.

조공책봉관계의 붕괴는 중국의 화이론중화사상을 흔들고, 이제는 중국이 서양을 따라가야 한다는 근대화 의식이 생겨나게 했다.

양무운동 시기 (1861년 ~ 1895년)[편집]

베이징 조약 이후 중국에서는 서양을 따라가야 한다는 여론이 등장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마인드는 유지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이면서 중화의 질서는 유지하자'라는 중체서용 마인드였다. 중체서용 마인드를 기반으로 양무운동이 전개되었다.

양무운동으로 군사력을 기른 청나라는 태평천국 운동부터 밟아버렸고, 다른 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등 서양의 테크를 밟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중화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집착하는 바람에 서양 테크를 밟는 것에 애로사항이 생겼다. 그리고 정부에서 계속 시장에 개입하고, 제대로 된 계획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부 모순이 있었다.

청프전쟁에서 쳐발리고 청일전쟁에서 또 쳐발리며 양무운동은 끝났다.

시모노세키 조약~중화민국 수립 (1895년 ~ 1912년)[편집]

청일전쟁 이후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중국은 일본에 대만 섬과 요동반도를 할양했고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며 조선과의 조공책봉관계를 끝냈다. 주나라 때부터 이어져내려온 조공책봉관계가 영구 소멸한 것이다.

이후 양무운동만으로는 답이 없다고 느낀 광서제와 따까리들이 1898년변법자강운동을 시작했으나, 같은 해 무술정변으로 서태후와 위안스카이가 광서제의 따까리들을 싹 다 밟아버리고 광서제도 궁에 감금했다.

그리고 백련교도들이 청나라를 부흥시키고 서양 세력을 소멸시키자면서(부청멸양) 의화단이라는 폭도를 조직해서 의화단의 난을 일으켰다. 얘네는 서양인들을 찢어죽이고 강간했으며 서양 문물들도 파괴하고 다녔다. 그런데 서태후가 의화단의 난을 지원해버리는 바람에 서양 국가의 분노를 샀고,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 8개국 연합군이 중국을 쳐들어가 의화단을 싹 다 죽여버리고 1901년 신축조약을 체결했다. 신축조약에 따라 베이징의 성벽은 파괴되었고 서양의 군대가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서태후도 좆됐다 싶었는지 다시 광서제를 데리고 나와 광서신정이라는 것을 실행에 옮겼다. 신식 군대를 만들었고 과거제를 폐지했으며 흠정 헌법 대강이라는 헌법을 만들어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고 의회도 설립했다. 1908년 광서제가 쓸모없어지자 서태후는 광서제를 죽였고, 그 바로 다음날 서태후 본인도 뒤졌다. 이후 2살배기 아기가 청나라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선통제 푸이였다.

하지만 청나라 정부는 1910년 철도를 국유화한다는 병신같은 발상을 실행에 옮겨버렸고, 빡친 군중들은 우한을 시작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것을 쑨원이 이끌어서 신해혁명으로 발전했고 1912년에는 중화민국이 선포되면서 청나라는 끝났다.

중화민국 (1912년 ~ 1949년)[편집]

중국 최초의 공화국이다.

북양정부 (1912년 ~ 1928년)[편집]

1912년 쑨원이 중화민국 초대 임시 총통으로 취임한 후 청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진시황 때부터 2000년 가까이 이어져내려온 중화제국이 막을 내렸다.

그런데 신해혁명을 도와줬던 위안스카이가 총통으로 취임한 다음 빅 통수를 때려버렸다. 총통 취임 직후 독재를 벌여서 혁명을 처음 일으킨 동맹회 세력을 탄압했고 이것 때문에 쑨원이 2차 혁명과 3차 혁명을 해야 했으며, 1915년에는 홍헌제제를 선포하면서 중화제국을 세우고 본인이 황제를 해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중화제국을 반대하자 결국 제정을 취소했고, 얼마 뒤 위안스카이 본인도 뒤졌다.

이후 중국에서는 북양군벌 등의 수많은 군벌들이 설쳤다. 수도인 베이핑(베이징)을 장악한 것이 북양군벌이었기 때문이 이 시기를 북양정부 시기라고 부른다.

1915년에는 과거의 유교 문화를 타파하기 위한 신문화 운동이 있었다.

1915년 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요구라는 것을 해 왔다. 당시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는데, 협상국인 일본 제국이 동맹국인 독일 제국의 식민지 산동 반도를 점령하면서 독일의 이권을 일본이 계승해도 되냐고 물어본 것. 그리고 철도 부설권과 일본인 고문 파견에 대한 요구도 있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의 21개조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중국에서는 난리가 났고, 사람들은 정부를 매국노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마침 옆동네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3.1 운동을 모티브로 해서 5.4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는 중국국민당이 창당되었다. 1921년에는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던 천두슈가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초기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국민당 내의 사회주의 색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고 소련과 교류도 했다. 1924년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을 이루었고, 1925년 상해에서 일어난 영국 경찰의 노동자에 대한 발포 사건이 5.30 운동으로 번지면서 외세에 대한 반발이 심해졌다. 그리고 군벌들도 외세를 돕는 세력으로 인식되어 많은 욕을 먹었다.

그래서 국민당은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1926년 광저우를 시작으로 베이징으로 진격해 군벌들을 모조리 토벌하는 북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북벌이 진행되던 1927년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 세력을 모조리 쳐내고 공산당과도 손절했다. 1928년 북양정부의 실세 장쭤린이 일본 관동군에 의해 폭사해서 죽은 후 국민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고 수도를 난징으로 옮기면서 북양정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국민정부 (1928년 ~ 1949년)[편집]

군벌들을 제압하고 국민정부를 세우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공산당과 일본이 문제가 되었다. 1931년 중공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웠고,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면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1932년에는 만주 땅에 만주국이 세워졌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 리튼 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1934년에는 국가 체제를 제국으로 바꿔서 푸이가 강덕제로 즉위했다.

이렇게 일본과 중국의 전쟁 각이 보이던 도중 장쉐량시안에서 장제스를 통수치고 감금하는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장쉐량과 장제스가 타협하면서 공산당과 어쩔 수 없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937년 7월 7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무타구치 렌야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키면서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이후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2차 국공합작을 했다.

중일 전쟁은 1945년 8월 15일 쇼와 덴노옥음방송을 내보내면서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다.

일본은 사라졌으나 마지막 적 공산당이 남아있었다. 바로 국공내전이 개시되었고, 국민당의 삽질로 민심이 공산당에게 넘어가면서 국민정부는 1949년 대만으로 국부천대를 했다.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화민국 (1949년 ~ 현재)[편집]

중화인민공화국[편집]

마오쩌둥 체제 (1949년 ~ 1976년)[편집]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몰아내고 새로운 공산 정권을 세운 마오쩌둥은 토지 개혁을 통해서 기존의 신사층이 갖고 있던 토지를 싹 다 빼앗았고, 잘못된 토지 정책으로 많은 중국인을 굶어죽게 만들었다. 전쟁의 후유증이 수습되지도 않았는데 1950년 티베트를 침공해 강제 합병했으며 같은 해 일어난 6.25 전쟁에 중국군을 보냈고, 중국 사람들의 삶은 더 나아진 것이 없었다.

1957년 반우파 투쟁1958년 대약진운동의 처참한 실패로 중국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쩌둥이의 병신짓을 수습하기 위해 류샤오치덩샤오핑이 들어왔으나, 쩌둥이는 얘네가 권력을 잡은 것이 아니꼬와서 얘네를 자본주의 반동으로 몰아버리는데 그게 바로 1966년 일어난 문화대혁명이다.

문혁으로 기존 중국의 토호인 신사층은 붕괴했고, 많은 문화재와 전통이 파괴되었다.

1972년에는 미국과 관계 회복을 도모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가 사망하면서 제1차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얼마 뒤 마오쩌둥도 뒤졌다.

덩샤오핑 체제 (1976년 ~ 2012년)[편집]

마오쩌둥이 뒤지면서 문화대혁명은 일단락되었다. 새 지도자는 화궈펑이라는 듣보 인물이 되었으나 얼마 뒤 자리를 덩샤오핑에게 내줬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4인방은 새로운 권력자인 덩샤오핑에 의해 숙청당했다.

흑묘백묘론이라는 실용주의 사상을 내세우면서 강남 지방의 도시들을 현대화시켰고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였다. 1979년에는 미국과 공식 수교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 불평등이 심해지자 1983년 엄타 운동과 1989년 천안문 6.4 항쟁 등이 일어났다.

천안문 사건 이후 자본주의 체제는 다시 위기에 직면했으나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유용성이 입증되면서 덩샤오핑의 시장 경제 시스템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덩샤오핑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가 이어서 주석을 했고, 덩샤오핑 체제에 큰 변화는 없었다. 1997년 홍콩이 반환되었고, 1999년 마카오가 반환되었으며 2001년 WTO에 가입한 것에 이어 2008년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했다.

시진핑 체제 (2012년 ~ 현재)[편집]

덩샤오핑 체제를 처음으로 흔든 것은 2012년 집권한 시진핑이다. 중국몽공동부유를 내세운 시진핑 정권은 시진핑 개인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하고 북한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기까지가 2020년대까지의 중국 현대사였다. 이제 아래서는 대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중화민국[편집]

국민당 일당독재 시대 (1949년 ~ 1987년)[편집]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튄 국민당의 장제스는 대만 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조차 치뤄지지 않았다. 경제 개발 정책으로 대만은 급속도로 성장했고, 한때 대한민국보다 더 잘나가는 나라가 대만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1971년 UN에서 쫓겨나고, 1972년에는 일본과, 1979년에는 미국과, 1992년에는 한국과 단교했다.

1975년 장제스 사망 이후 장징궈가 아버지 장제스의 자리를 계승했다.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 이후 민주화 요구가 강해지면서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시작했다. 1986년 민주진보당 창당을 허용했고, 1987년 계엄령을 해제하면서 민주화되었다.

민주화 이후 (1987년 ~ 현재)[편집]

1988년 장징궈 사망 이후 리덩후이가 총통이 되었다.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를 실시했으며 총통 임기는 4년 연임으로 고정했다.

2000년에는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당선되었고, 2008년에는 중국국민당마잉주가, 2016년에는 다시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이 총통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대만은 중국과 통일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1995년 대만 해협 위기를 겪는 등 갈등도 겪었다. 2020년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을 기점으로 중국과 대만의 위기가 다시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중국과 대만은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고, 중국의 산업이 대만 기업 없이는 돌아가기 힘들고 대만 또한 중국의 노동력이 매우 필요하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듯이 함부로 중국이 대만을 쳐들어가기는 힘든 상황이다.

2024년 차이잉원 총통의 임기가 끝나면 선거를 통해 새로운 총통이 들어서게 된다. 앞으로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는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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