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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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부산과 광주의 운명도 이날 뒤바뀌어서 부산으로 향하던 죽음의 사신이 광주로 향하게 된다.
개요[편집]
파일:재규어가 반신께 발터에 사랑과 대국을 담아.gif
(당시 상황을 재현한 움짤)
김재규장군이 경제를 살리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한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박정희의 두부를 날린 민주 혁명이다.
혁명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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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규: 국가정보원장, 전 중앙정보부장으로 사건 당시 독재자와 간신배 사살
- 박선호: 의전과장, 김재규가 고등학교 체육교사 시절 제자로 예비역 해병대 대령. 사건 당시 동료 경호원 살해
- 박흥주: 수행비서, 김재규가 군단장이었을 당시 전속부관으로 현역 육군 포병 대령. 사건 당시 식당에서 동료 경호원 살해
- 유성옥 - 운전기사. 사건 당시 식당에서 동료 경호원 살해
- 이기주 - 경비과장. 사건 당시 식당에서 동료 경호원 살해
- 김태원 - 경비원. 사건 당시 확인사살
- 유석술 - 경비원. 권총을 땅에 묻었고 징역형을 받았다.
- 서영준 - 경비원. 박정희 시체를 병원으로 옳길때 같이 간뒤 징역형를 받았다.
사용 무기[편집]
적폐군[편집]
- 박정희: 503 애비. 오른쪽 가슴과 오른쪽 귀 바로 위쪽에 2개의 구멍이 송송 뚫림. 즉, 대가리가 깨져서 뒤졌다.
- 차지철: 건방진 경호실장. 오른팔목과 배때기에 수차례의 구멍이 송송 뚫림.
목격자[편집]
- 심수봉: 가수. 김재규의 의거에 협력함.
- 신재순: 모델. 김재규의 의거에 협력함.
-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가 암살을 미리 예고했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음. 10.26 당시 박정희를 살리려고 응급실까지 호송했지만 끝내 살리지 못했고 이후에는 최규하와 정승화에게 꼬지르는 등 보신주의적 행보를 보임.
당시 상황[편집]
1979년 당시, 유신 선포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외적으로는 코리아게이트 등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2차 오일 쇼크, 부가가치세 제도 실시 등으로 인한 경제 사정과 민심 악화,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야당의 지속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여기에 육영수의 피살, 노쇠 등으로 인한 박정희의 판단력 쇠퇴 때문에 경호실장 차지철은 지나친 월권 행위를 저지르면서 박정희의 측근들 내에서도 불화가 일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바로 당시 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이런 내외적 상황이 악화될수록 박정희 정권은 유화적 수단보다는 더 치밀한 정치공작을 동반한 폭력적 수단을 위주로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이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 제명으로 이어졌고 동시에 김영삼 총재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을 해당 지역 계엄사령관에게 통보하고 현지 시찰을 위해 내려온 김재규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10월 18일, 박정희에게 이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도리어 "서울에서도 부산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라고 응수했고, 동석해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도 2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냐?"라고 맞장구쳤다.
앞서 설명한 차지철과의 불화, 부마항쟁의 심각성 파악, 미국과의 관계 악화, 박 대통령의 자녀 문제 등으로 김재규의 반감은 고조되고 있었고 이는 10.26을 일으키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운명의 1979년 10월 26일 아침, 김재규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중정시설) 준공식에 박정희와 함께하기 위해 차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시국 상황을 운운하며 김재규의 요청을 거부했고 이는 김재규의 부아를 더 돋우고 말았다.
오후 4시 경,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대행사를 열기로 하자 차지철은 이를 김재규에게 통보했다. 그와 동시에 김재규는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며 궁정동 안가 내 자신의 집무 건물로 초대하였다.
오후 5시 20분 경, 김재규는 친분이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부마항쟁의 심각성, 차지철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고, 김계원 또한 이에 맞장구쳤다. 나아가 김재규는 "이 새끼 오늘 해치워버릴까요?"라고 발언하면서 살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오후 6시, 박정희와 차지철이 안가에 도착하고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만찬 도중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의 부실함을 힐난하고 나아가 김영삼을 구속했어야 했다고까지 발언했다. 이때 김재규가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박정희는 도리어 정보부가 유약하다며 다시 힐난했고 차지철이 이에 계속 맞장구치면서 김재규의 속은 더욱 들끓어갔다. 뒤에 섭외되어온 신재순과 심수봉이 들어와서 분위기는 다소 전환되었으나 김재규의 속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후 7시 10분, 김재규는 자신의 부하들인 의전과장 박선호와 수행비서 박흥주에게 거사를 통보했다. 박선호는 거사를 미루자고 했지만 김재규는 보안 누설을 이유로 거부했고, 이어서 박선호는 박정희의 포함 여부 질문에 대해서 박정희도 포함된다고 발언하였다. 결국 거사가 결정되자 박흥주는 유성옥, 이기주와 함께 안가 안의 청와대 경호원 사살을 담당했고 박선호는 만찬장 옆방에 배석 중이었던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의 사살을 담당하게 되었다.
운명의 오후 7시 45분, 신재순이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후렴구를 노래하던 도중, 김재규가 차지철의 팔목을 향해 "이 새끼 너 건방져!"라고 하며 발터 PPK로 1발을 발사하였다. 이에 박정희가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자 김재규는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2발을 발사하였다. 그리고 다시 총을 차지철에게 발사하려던 도중에 격발 불량이 나자 김재규는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가버렸고 김계원 또한 몸을 숨겨 버리면서 상황을 뒤바꿀 수도 있었던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당시 김재규는 간경화를 앓고 있었기에 몸이 좋지 않았다.)
같은 시간 청와대 경호원들 또한 대부분 사살당하거나 무력화되었다. 안가는 본래 중정 요원들이 관리하던 곳이었기에 청와대 경호원들은 포위 당한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만찬장 옆방에 배석했던 정인형과 안재송 또한 박선호에게 살해당했다.
잠시 뒤, 화장실로 도망갔던 차지철이 다시 나와 박정희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박정희는 살아있었지만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고 차지철은 연신 경호원을 외치며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이때 박선호에게서 M36 치프 스페셜을 받아 든 김재규가 들어왔고, 차지철이 저항하려고 했지만 복부에 2발을 맞고 쓰러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공황에 빠진 신재순이 화장실로 도망가고, 심수봉 또한 병풍 뒤로 숨은 사이에 김재규는 박정희의 오른쪽 귀 위에 2발을 발사함으로서 확인사살을 마쳤다. 이때 박정희 머리에 터널을 깊게 뚫어 박정희를 골로 보낸 제2탄은 아직도 박정희 시신에 박혀있고 지금도 구멍 뚫린 머갈통 속에 같이 묻혀 있다.
사살 직후 김재규는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로 달려가서 정승화와 김정섭에게 급한 상황이 발생했으니까 함께 가줘야겠다며 반강제로 자신의 차에 태웠고, 궁정동 안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김재규는 3.1 고가도로 (현재는 철거)에서 정승화의 제안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육군 본부로 향했고, 경황이 없던 나머지 국무회의가 소집된 다음에도 미숙한 대응으로 사태의 주도권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사건의 목격자였던 김계원이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와 정승화,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범인이 김재규라고 실토했고, 김재규가 체포,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면서 10.26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사건 배경[편집]
부마항쟁으로 인한 김재규의 회의감[편집]
유신체제를 거부하는 대규모 민중시위인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평소에도 현 체제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꼈던 김재규의 회의감은 더욱 커져만 갔고 이를 궁정동에서 보고하며 대안을 요구했으나 적반하장으로 박정희는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김재규가 발터 PPK와 M38 치프 스페셜을 드는데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한다.
코리아 게이트로 인한 미국과의 사이 악화[편집]
코리아게이트란 박정희가 미국에서 자기에 대한 좋은 여론을 만들려고 미국 국회의원, 언론인들한테 뇌물을 뿌린게 뽀록난 사건이다. 그때의 천조국 대통은 지미 카터였는데 카터는 흑인인권과 도덕을 중시하던 전형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형 인간인데다 설상가상으로 카터가 이 사건땜에 주최한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가 지 할 말만 몇십 분 하고 끝내버려서 카터는 완전히 빡돌아버렸다.
당시 전 최고실세였던 김형욱은 박정희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사악한 일을 많이 해서 적이 많았는데 박정희가 자신을 권력에서 축출하자 정적들한테 살해당할거란 공포감에 이 사건 직후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박정희의 비리를 폭로한다. 그러나 중정차장 윤일균에 의해 프랑스로 간 후 실종되었으며 김형욱의 최후는 1년간 텔아비브에서 암살준비를 했던 한국의 킬러들에게 납치된 후 산채로 해머밀에 갈려져 동물용 모이가 되었다는 것이 유력하다.
어쨌건 핵무기 개발시도와 코리아 게이트로 박정희 말년에 한국과 미국과 사이가 병신이 되었던 것은 사실으로 김재규는 이러한 것에서 한미동맹 악화로 인한 안보적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한다고 말한 바 있다.
최태민의 권력 남용과 박근혜의 옹호[편집]
사이비 교주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접근해 "육영수(죽은 박근혜 엄마)가 내 꿈에 나타났으니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면 나를 통하라"라고 하며 세뇌하였다. 최태민은 박근혜를 이용해 정치,경제,언론 등 대한민국 국정 전반에 막대한 비리를 저질렀고 최의 존재가 나라에 백해무익하다고 본 김재규는 최태민의 비리에 대한 자료를 만들어 박정희에게 보고한다. 박정희는 처음엔 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박근혜의 끈질긴 호소(눈물 어린 호소)와 함께 최태민의 세뇌에 박정희 본인도 말려들어, 김재규가 보고서를 제출했을 땐 "요즘 중앙정보부에선 이런 일도 하냐?"라고 오히려 역정을 내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김재규와 정치적 숙적인 차지철도 최태민을 옹호하며 김재규의 말을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최태민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였고 79년에 "최태민 같은 쓰레기는 교통사고라도 나 죽어 없어져야 된다"고 말한다. 최태민에 대한 김재규의 증오는 곧 박정희와 차지철에 대한 증오로 이어졌으며 이것이 거사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대한예수장로회 부회장이었던 전기영 목사의 폭로에 따르면 최태민이 권력을 휘두른 단체인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드는 것을 지시한 인물이 박정희 본인이었다고 한다. 즉, 딸이 어찌되던 말던 권력 강화에 최태민을 이용한 것이다.
차지철과의 대립[편집]
차지철은 엄청난 권력애를 지닌 사람으로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차지철은 자기 직책인 경호실장을 차장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켰으며 현역 3성 장군들을 상대로 경호실장에게 거수경례를 하도록 시켰다. 대통령 최측근인 대통령비서실의 권한까지 얻으려 했으며 경호실 내에 경찰 군부대를 만든 뒤 히틀러 친위대와 흡사한 대통령 친위대를 만들었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동네 사람들이 자고 있는데 서울 일대에서 탱크와 장갑차를 몰고다니며 "각하를 보호하려는 우리의 충심이 이렇다"는 의미로 탱크 유세를 하고 다니는 등 비상식적인 행보를 걸었다.
후일 김계원의 회고에 따르면 차지철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옹호한 이후 차지철에 대한 박정희의 신뢰도는 더욱 커졌으며 차지철은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함부로 청와대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김재규가 이러한 차지철의 횡포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10월 26일만이 알 일이다.
참고로 차지철에게 염증을 느낀 사람은 김재규뿐이 아니었다. 전두환 역시 차지철에 대해 상당히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특전사 내부에서 전두환은 여단장까지 한 반면 차지철은 지역대장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지역대장 새끼가 자꾸 여단장한테 엥긴다면 기분이 어떨까?
다만 전두환은 그 추녀로 악명높은 이순자를, 이규동 장군 라인을 타기 위해서(이순자가 이규동 장군의 딸이다.) 결혼했을 정도로 일생의 목표가 오직 출세 하나뿐인 사람이다. 그 때문에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차지철에게는 겉으로나마 알랑방구를 껴줬다. 그리고 이는 노태우도 비슷하고 여튼 박정희 측근들 사이에서 차지철의 평가는 곽영주보다 더 심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거의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연상될 정도로 두목에게만 인정받고 나머지 동료들에게는 죄다 버림받은 상태였다.
박지만 문제[편집]
사형 전 김재규가 밝힌 10.26의 이유중에서는 박정희의 장남인 박지만의 대학진학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김재규가 말하는 내용인즉 육군사관학교에는 전통적으로 honor system(기강)이 있는데 박지만은 육사 2학년때부터 여의도의 호텔에서 육사생도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오입을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때문에 김재규는 박지만 개인의 인생이나 육사의 기강이나 어디로 보든간에 타학교의 전입이나 외국 유학을 하는게 낫다고 보고 박정희에게 말한 바가 있는데 박정희는 개인의 욕심 때문에 씹었다고 한다. 김재규는 이에 대해 비록 이게 애들 일이긴 하지만 박 대통령(박정희)의 집권욕과 이기심을 알 수 있으며 국민을 우매하게 보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박지만은 박정희 사망 이후 필로폰 투약 혐의로 수 차례 구속된 바가 있으며 각종 성추문에 휘말렸다.
10.26이 일어나지 않았다면?[편집]
인정합니다. ^^乃 이 문서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내용만을 담은 문서입니다.
문서를 읽기 전에 모니터 앞에서 따봉각을 치켜 세웁시다. |
한때 시민들의 손으로 민주화를 이뤄낼 기회를 10.26이 뺏어갔다고 주장하는 깨시민 새끼들이 많았다. 물론 10.26이 없었다면 민주화는 개뿔, 붓싼과 마싼에서 킬링필드가 개최된 뒤 부카니스탄의 김퇘지 왕조와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누가 더 나라를 조지나 천하제일 독재대회를 열었을 것이다. 게다가 초중고에서는 매일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어버이 박정희 수령님이나 외쳤을 것이다. 너희들은 건물마다 닭이나 박지만 사진 걸어놓고 매일 절하면서 은혜를 구걸 중일 거고.
아닐 것 같지? 비록 3년 만에 반인반신 죽으면서 나가리 되어서 그렇지, '유신사무관' 같이 대놓고 군바리들이 행정에도 간섭하는 제도를 만들고 판을 깔아놓았던 와중이었다. 마침 박지만도 사관학교 출신이니, 장교 임관 후 유신사무관으로 특채되고 행정부에 끼여든 군바리들 수장이 되어서 기존 공무원들 찍어누르며 행정 경험을 쌓다가 체육관 선거로 공화당 총재 단독 출마 → 당선으로 세습하는 시나리오가 충분히 가능했다. 엥? 이거 완전...
조금만 반박: 박정희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편집]
인정합니다. ^^乃 이 문서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내용만을 담은 문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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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아니었어도 박정희는 부마항쟁이 일어난 이상 뭘해도 사망은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재규 덕분에 학살당하는 사람의 숫자가 아예 줄어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박정희는 총칼로 부산과 마산을 학살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투입되는 부대가 특전사라는 것에 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전두환이라는 인간의 존재 때문이다. 사실 전두환이 박정희의 따까리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것도 이것저것 재보고 존나게 저울질을 한 끝에 얻은 결론일 뿐 차지철마냥 무조건적인 박정희 만세인 인간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애초에, 전두환은 추녀로 악명높은 이순자가 이규동 장군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쯤 데릴사위로 결혼한 인간으로 오직 출세 하나밖에 머릿속에 든 게 없는 인물이다.
실제로 전두환은 박정희뒤지고나서 1980년 광주찍어누르고 유신선거로 대통령취임하자마자 1년만에 유신독재의 잔재인 체육관선거 폐지하고 다시 간접선거치뤄서 7년단임의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했다. 그리고 유신독재의 단점을 홍보하며 3s정책시행과 야간자율통행 실시등 반인반신의 잔재청산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긴했다. 또한 박씨집안은 개무시하듯이 홀대하고 박근혜한테 돈 7억정도 던져주고 박가놈들이랑 손절했다. 이런 정황으로 볼때 전두환은 충분히 박정희를 통수칠만한 역량과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특전사는 전두환 사람들로 그득하다. 본인부터도 특전사에서도 여단장을 했고 친구인 노태우 역시 특전여단장을 했고 1기수 후배들이자 자기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장기오(5여단), 최세창(3여단), 박희도(1여단) 이 사람들 모두가 이 당시 특전여단장으로 재직중이었다. 이 때 계속 시민들이 반 박정희를 외치며 들고 일어나는데 진압하다 보니 전두환은 저울질을 할 것이 뻔했다. 시민쪽이 언젠가는 이길 거라 확신한 전두환은 되려 시민쪽에 붙어서 박정희를 체포하는 초강수를 둬버린다. 그렇게 해서 독재자 박정희를 처단한 공로로 전두환은 마치 박정희가 이승만을 몰아내고 그랬듯 자신도 박정희를 몰아내고 열화와 같은 뜨거운 국민들의 성원 속에 대통령에 취임했을 것이다.
차지철? 차지철도 특전사 커리어가 있긴 하지만 차지철은 고작 지역대장이 끝이었고 중령은 제대와 동시에 진급한 것이다. 반면 전두환은 여단장까지 했으니 그 둘의 특전사 짬밥은 비교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차지철이 김재규 뿐만 아니라 전두환과 노태우도 너무 업신여겼기 때문에 전두환은 차지철만 귀여워하는 박정희에 대한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따라서 전두환은 판도가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돌아가 준다면 충분히 박정희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건 전두환이 배신했을 때의 얘기인데 만약 배신하지 않을 경우도 별반 다를 건 없다. 부산과 마산을 피바다로 만든 박정희는 이후 전주와 익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이게 계속 반복되다 보면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나서 박정희 정권을 전복은 시키지만...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박정희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걸 박정희가 다 때려잡았다? 그 다음에 기다리는 게 다름아닌 미국이다. 미국은 이런 꼴 못 보는 나라다. 그렇게 되어 미국은 마치 2003년 당시의 사담 후세인 마냥 박정희 군대를 그린베레로 쳐잡은 뒤 박정희를 체포해서 교수형에 처하고 대한민국은 지금의 이라크 마냥 여러 조각으로 분할 통치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에 의해 억지로 전선에 투입된 박지만 등은 미군과 교전중에 전사해서 마치 우다이 후세인, 쿠사이 후세인 형제들처럼 시체가 되어 미군에 의해 박제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박정희는 병력들을 고기방패로 삼아 중국으로 튈 궁리를 하다가 미군에게 딱 잡혀서 미국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한다.
이런 상황이면 적어도 국민들은 절대로 박정희의 편을 들지 않을 것이고 재야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일찌기 재야인사들은 김대중 납치사건과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등으로 인해 박정희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상태지만 손에 병력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부마항쟁 등으로 인해 그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병력이 생겨버리면 바로 박정희와 맞붙어버릴 것이다.이러면 시민군의 지휘관이 된 재야인사들은 외신을 최대한 끌어들여서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상을 최대한 널리 알릴 것이다. 쓰고나서 보니까 이거 딱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최후랑 비슷하다.
박정희가 하야한다? 그럼 새로 취임한 대통령은 바로 박정희 체포령을 때려버린다. 특히 그게 김영삼일 경우 박정희의 현상수배는 사살해도 좋다는 조건이 붙어버린다. 근데 문제는 총칼로 제압하겠다는 박정희가 하야할 확률은 1도 없다는 거다. 하야할 생각이 눈꼽만큼이라도 있었더라면 총칼 소리 따위 언급조차 안했을 것이다.
여튼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시점으로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여준 덕분에 부산과 마산이 안전했던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전국을 피바다로 만드는 것을 틀어막은 것이다. 시민들의 손으로 민주화를 이뤄낼 기회를 10.26이 뺏어간 게 아니라 10.26은 그 시민들의 목숨을 구한 의거이다.
결론: 박정희는 어차피 뒈진다. 그런데 김재규 덕분에 박정희의 최후의 발악이 일어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살아난 것이다.
비록 전술한 내용을 반박한 거라고는 하나 약간만 반박한 거고 결국 둘 다 김재규의 의거는 숭고함이 극에 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가지 치명적 오점이 생겼다면 그건 다름 아닌 박정희가 오지게 미화 됐다는거다.
김재규 덕에 피를 아꼈지만 그 피들이 과거미화를 하면서 각하깨선 핵무기를 공개하며 대통령직을 내려놓으려 했다느니 아버지같은 분이 어떻게 자기 아들딸들을 죽였겠냐느니 하는데.
물론 박정희가 일구어낸 경제성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국민을 쥐어짜내는건 다른거다. 조조가 한나라를 집어 삼키고 서주대학살을 벌였어도 통치 무력 안목 등 모든 벨런스가 삼국지 정사/연희 양쪽에서 최고를 찍는 인물 중 하나인데도 아직까지 간웅이고 학살자라 욕쳠는걸 보면 알거다. 제 아무리 잘난 능력이 있어도 작은 문제가 아닌 학살 인권유린같은 문제는 독재국가가 아닌 이상 절대 옹호받지 못한다.
그리고 위에 글을 쭉 보고 내려 왔으면 알겠지만 박정희는 절대 핵무기 공개 동시에 대통령을 내려놓을 큰그릇이 아니다. 누가 살려낸 무고한 목숨들인데 그 무고한 것들이 무지해서 대가리가 깨지는 바람에 자기 한 몸 희생하신 분들을 욕하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선호와 박흥주[편집]
박선호[편집]
김재규와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해병대 대령으로 전역했던 박선호는 상명하복 스타일의 군대와 전혀 다른 사회의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김재규의 도움을 받아서 중앙정보부에 들어온다. 평소 김재규가 "거만하게 행동치 말라.", "책을 많이 읽어라." 등 따뜻한 조언을 해주었기에 김재규에게 큰 존경심을 가졌다.
하지만 의전 과장이란 자리가 박정희의 술 시중을 드는 여자나 섭외하는 소위 채홍사 같은 자리라는 걸 겪게 되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사퇴를 고민하였지만 김재규가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겠나."라고 간곡히 만류하여 재규어 때문에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후 진술에서 박선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저로 하여금 항상 인간으로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될 수 있도록 길러 주신 데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
” |
박흥주[편집]
당시 국내 최고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였던 서울고를 최고 수준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학비를 댈 형편이 안 되어서 서울대가 아닌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육사에서도 공부벌레란 말을 들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여 18기 생도 중 최우수로 졸업하며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흥주가 전속 부관이 되었을 때 사단장이 재규어였는데 이때부터 박흥주는 재규어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굉장히 유능했기 때문에 39세에 대령을 다는 초고속 승진을 했으며 엄청난 권력을 가진 중앙정보부장의 수행 비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동구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사는 등 군인으로서 흠잡을 곳이 없는 청렴함과 인간성을 보였다.
10.26 이후 사형을 선고 받았을 때는 김재규를 원망키는커녕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글을 적었다고 한다.
10.26 사태를 배경으로 한 영상물들[편집]
여담[편집]
그 당시 궁정동 요리사의 증언으로는 그때 연회 메뉴는 식사로 비빔밥, 떡만둣국, 칼국수, 그리고 술안주로 잡곡무침, 전복무침, 송이버섯 구이, 장어구이, 불갈비였고 술은 막걸리와 위스키 등이 나왔다고 한다. 술은 단골 막걸리 양조장에서 받아왔고 위스키는 잘 알려지다시피 시바스 리갈[1]이었다. 이거 준비하는데 그 당시 돈으로 6만 원 정도 들었다고 하는데, 70년대 말에 6만 원이면 얼마나 하나? 1980년대 초반 대기업 과장 월급이 50만 원 정도 했다고 하고 70년대 후반 강남 아파트가 2000만원이었으니 존나 비싸게 먹은거다.
ㄹ혜를 정의구현하신 이정미 재판관님이 이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백괴사전에서 당시 상황을 잘 정리했으니 한번 쯤 읽어봐도 나쁘지 않다. https://uncyclopedia.kr/wiki/10%C2%B726_%EC%82%AC%EA%B1%B4
이 사건을 바탕으로 각색되어 만든 남산의 부장들이란 영화가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40일부터 사건 직후까지 다루니까 관심있는 사람은 보길 바란다.
어차피 사람의 수(壽)는 그 사람의 인격과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수'라 함은 그 나이에 근접해서 사망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경우 수(壽)가 65이다. 즉, 절대 70살 넘는 박정희를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도 박정희가 부마항쟁이 일어난 그 해 안에 사망했으니 맞아들어간 것이다. 참고로 전두환의 수는 100, 노태우의 수는 95, 이승만의 수는 90인데 이승만은 진짜로 수(壽)에 딱맞게 살다 갔다. 전두환은 91, 노태우는 90살에 갔으니 전두환은 좀 차이가 있지만 노태우는 비슷하게 갔다. 김대중은 태어날 때의 수는 100이었는데 워낙 고통을 받다보니 수가 85로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경우 오행이 화(火)이다. 이 '화'라 함은 성정이 불같거나 성욕이 강하거나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인데 이런 사람들은 수가 줄어든다. 손책의 수가 고작 30밖에 안 되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손책이 실제로는 25살때 죽었다.) 구봉서의 경우 오행이 목(木)인데 수(壽)가 90이며 실제로 89살까지 살았다. 한마디로 박정희는 온순하고 얌전하고 소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으며(박정희가 온순하고 얌전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으면 부마항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그게 많은 대인관계를 유발시켰는데 뭐든지 많다 보면 나쁜 게 섞이기 마련이다. 박정희는 달려라 하니의 하니 같은 그런 스타일의 인간군상이다. 적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다.
참고로 노무현의 수(壽) 역시 박정희와 동일한 65인데 이유는 노무현이 워낙 뱃심 없는 인물이라서다. 노무현은 성격이 소심하고 윤리 의식이 강하다. 이놈 저놈 어울려서 이리저리 뒹굴며 온갖 찌든 때를 머금은 박정희 전두환과는 정반대로 존나 순수한 사람이다. 그런 양반이 경찰의 수사를 받는다고 하니 경찰에게 수사 받는 게 일상다반사인 전두환과는 느낌이 절대 같지 않을 것이다. 만약 노무현이 좆이나 까라 개씨발놈의 호로새끼들아!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그의 수(壽)가 이렇게 짧지 않았을 것이다. 노무현과 박정희는 성향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되려 수(壽)는 동일한 65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정해진 수순대로 진행되었을 뿐이며 박정희는 어차피 1980년 이후에는 살 수 없는 운명이었다. 김재규가 아니어도 무슨 수를 쓰든 1980년 이후까지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되려 김재규 덕분에 조용히 죽은 편에 속한다. 김재규 덕분에 박정희와 차지철 단 둘만 죽은 것으로 끝난 것이고 김재규 아니었으면 마치 1989년의 루마니아 마냥 온 나라가 난리가 났을 것이고 광주 민주화 운동 같은 건 명함도 못 내밀 대학살이 벌어졌을 것이다.
매년 10월 26일에는 식당이나 술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마피아 게임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