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클로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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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주인들이 농경지 확대하고 울타리를 박아놓은 다음 농사꾼들을 내쫓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백수가 될 줄 알았으나 때마침 공장들이 막 세워지기 시작했고 산업혁명에 기여하는 노예로 종사하게 된다.
갑부들의 토지소유권이 보장되니 개돼지들을 먹일 식료품들이 증가되었으며 그걸 먹고 자라며 개떼같이 일하니 경기가 활성화 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물론 빈부격차 문제도 인클로저가 한목했다는 건 간과할 수 없다.
1차 인클로저[편집]
15세기 말 16세기초 영국에 시작되었다. 딱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형성 되기 시작할 무렵.
영국 영토 전반에 걸쳐서 이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이 시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신항로 개척으로 넓어진 시장과 서유럽의 중상주의의 자국 수출로 인한 모직물의 수요 증가 때문이었다.
사실 영국이 지금과 같은 강국이 될 수 있게 된 시초와도 같은 사건이다. 이로 인해 다른 서유럽보다 한 100년 정도 근대화가 일찍 시작했다.[1]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이것은 결과적으로 영국의 농노해방을 이뤄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동유럽 제외하고 이 시기 프랑스나 프로이센 절대 왕정의 봉건귀족의 아래에 있던 농노들이 시민혁명 때가지 잔재했던 것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음. 농노해방이 중요한 이유는 산업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 나라의 통치자가 근대화 개혁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
가령 엘리자베스 1세가 왕권 강화를 위해 통일법을 제정 할 때에도 농민에서 상공시민층이 된 사람들이 많이 옹호 했고, 18세기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2세가 당시 크림전쟁 패배 이후로 낙후 되었던 지역들에 근대화를 하기 위해서 농노해방(1861)을 우선적으로 시행한 것도 바로 그 이유임.
요약하자면 근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위해 영국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일련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여담으로 이때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토마스 모어가 저서 유토피아에서 ‘양들이 사람을 먹는다’ 라고 언급하며 인클로저 운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건이 현재 상업혁명을 통한 산업화에 기여 했다고 좋게 평가 되기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실업자들이 너무 많이 생겼기 때문에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득 보다 폐해가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2]
2차 인클로저[편집]
18세기 후반 무렵 발생한 인클로저 운동.
그러나 1차 인클과는 양상이 달라졌는데 먼저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을 통해 정치가 안정화되었다는 사회적인 배경과 인도의 식민지 개척으로 면직물이 수입이 되기 시작한 경제적 배경을 살펴봐야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양모보다 목화로 만든 면이 더 싸고 유용했기 때문에 매우 인기였다. 그러나 영국의회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면 수입을 자제시켰고 이에 대항해3 면직물 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는 모습으로 2차 인클로저 운동이 시작되었다.[3] 또 다른 이유로는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곡물가격이 증가해서 안정화 시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시행한 것이기도 했다.
방직기와 같은 동력원을 사용하고 공장제 기계 공업위주의 생산이 가속화 되었다.
산업혁명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18세기 부터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쪽으로 퍼지더니 19세기에는 미국까지 퍼져 자본주의 확산에 기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