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조무위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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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의거 1960년 |
4.19 혁명 1960년 | |||
제2공화국 | 2대 악법 반대 시위 1961년 | |||||
제3공화국 | 6.3 항쟁 1964년 |
3선 개헌 반대 운동 1969년 | ||||
제4공화국 | 부마민주항쟁 1979년 |
서울의 봄 1980년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 |||
제5공화국 | 6월 민주 항쟁 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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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이 사건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로 의미 있는 정의 구현의 혁명이다.
1960년 4월, 이승만의 독재에 분노하던 시민들이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 죽창을 들고 일어나 이승만 정부에게 참교육을 선사한 사건이다. 이승만은 여기에 놀라서 하와이로 도망갔다가 박정희의 반대로 한반도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에서 늙어 죽었다. 물론 사후 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먹고 똥싸는 일만 생각하지 말고 4.19 혁명 한 번쯤은 돌아보자.
'혁명'이라는 명칭 탓에 피 한 방울 안 흘린 무혈 혁명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사람이 많은데 4.19의 별명이 '피의 화요일'이라는 걸 상기하면서 반성해라. 정말 많은 민주열사들이 순국했다.
ㄴ 한국에서 발생한 대통령 몰아내는 시위 중에 피 한 방울 안 흘린 순수무혈시위는 현재까진 박근혜 탄핵뿐이다.
노무현 탄핵이랑 이명박 광우뻥은 뭐냐. 할 수도 있는데.
노무현은 국민들이 탄핵을 방어하는 입장이었고 이명박은 정치가 아니라 광우뻥이랑 FTA같은 경제 수출/수입 문제라 뺐다.
배경[편집]
씨앗은 1950년대 초반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법 때 뿌려졌다. 1946년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형식의 농지 개혁이 이루어지자 남한 농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미군정은 이 틈을 좌익 세력이 파고들 것을 우려해 소작료를 낮추는 등 갈등의 불씨를 잠재우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1948년 제헌 의회 수립 후 이승만 정권은 대지주들의 주된 지지 세력이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누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미군정은 소수 대지주들의 이득보다는 소작농을 지원해 정국을 안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농지 개혁에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이런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이승만은 강력한 농지 개혁 추진자였던 조봉암 선생을 농림부 장관에 앉히고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를 건다.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으로 1950년 4월부터 농지 개혁이 시작되었고, 1농가당 3정보(9천 평) 이상의 땅은 소유할 수 없도록 했으며 나머지는 국가가 유상으로 매입해 소작농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지주들에게는 지가 증권을 대신 지급했다. 그런데 1967년까지 액면가대로 돈이 지급되긴 했는데 그만 1950년 6월에 전쟁이 터져버린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전쟁통에 증권을 멸실하는 등 증권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전통적인 지주 계층이 폭망했다. 봉건적 계급제가 무너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당장 전쟁이 나서 필요한 건 자기 생명을 유지할 식량과 옷가지인데 증권 종이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 팔고 논 팔아' 자식 공부 시키고 도시로 떠나는 농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환경의 혜택을 본 집안의 장남들이 고등학교, 대학으로 진학하여 4.19 혁명의 주역이 된다.
상세[편집]
[1] 4.19 혁명 유공자 중 한 사람인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4.19 참여자들이 박정희에 동조했다는 것은 그저 단면일 뿐이고 다른 면은 박정희 반대에 동조하거나 찬성하기도 했고 안동일 변호사가 그 예다.
남한이 유상몰수 유상분배 정책 시행하는 동안 정작 북한은 무상으로 몰수하고 분배 하나도 안 했다. 덕분에 혹부리우스에게 땅 뺏긴 이북의 지주들은 시팔조팔 하면서 전쟁 기간 중에 남쪽으로 내려왔다.
몇몇 급식충들과 역알못 새끼들이 착각하는 게, 3.15 부정선거는 대통령 선거의 부정 선거가 아니라 부통령 선거의 부정선거였다. 당시 이승만은 조병옥이 위장 수술 받고서 사망하는 바람에 단독 후보 출마로 이미 당선됐고 자유당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앉히기 위해 각종 수법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치른 것이다.
이승만이 부정 선거가 일어난 걸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고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3.15 부정선거를 계획한 게 자유당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각종 시위는 있어왔지만 헬조선답게 그런 일 없고 두들겨 패잡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왔다.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밑밥을 설명한다면 이렇다. 우선 대구 2.28 민주운동이 있다. 이건 대구 지역의 고딩들이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구 내려가서 선거 유세 연설하는 걸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한창 봄방학이었던 2월 28일 일요일에 임시 등교를 시키자 빡쳐서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근데 그게 전국적으로 유행이 되어서 몇천 명이나 시위로 몰려들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빨갱이의 선동이라고 잡혔지만 대부분 풀려난다.
대전에서도 3월 8일에 비슷한 일이 터졌다. 당시 야당 후보였던 장면의 연설이 이 날 공설운동장에서 계획되어 있었는데 각 고교마다 유세장에 나오지 말도록 훈육하라는 공문이 내려온 것이다. 중간에 거사에 합의한 학생 중 하나가 친형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에 일이 꼬이긴 했지만, 3월 8일 장면의 연설이 끝날 때까지 학교에 묶어두려던 것을 좆까고 많은 대전의 고교생들이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3.15 부정선거에서 1차 마산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상황이 심각하게 격렬했기에 몽둥이로 패고, 최루탄과 실탄까지 쐈다. 시위대에게 총 쏜 사례가 이것이 최초다. 그 결과 8명이 죽고 80명이 다치는데 그중에서 김주열이 있었다.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다. 시신은 왼쪽 눈에 최루탄이 정통으로 박힌 상태였고(사태의 심각성을 말하면 원래 최루탄은 그냥 하늘에 쏴서 광역 스턴을 먹이려고 있는 거지, 직접 조준 사격해서 죽이는 게 아니다. 근데 이걸 써버린 거다) 이 때문에 모친이 시신 인수를 거부할 정도로 충격을 먹었다. 이를 보러 온 사람도 수천 명이었고 다들 화가 나서 죽은 학생 살려내라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게 2차 마산 의거다.
4월 18일 그동안 마산 의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고려대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가장한 집단 시위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유당이 경찰만이 아니라 임화수 등의 정치 깡패까지 동원해서 진압하려고 하니까 시민들까지 시위에 가세하고 말았다. 경찰에 발포 명령에 죽은 대학생도 있었다.
이윽고 4월 19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날만 콕 집어서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에서 100여 명이 죽었고,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이 죽었다.
ㄴ 보면 알겠지만 현재 광주 전라도 욕하는 보수나 부산 경상도 욕하는 진보라는 것들이 얼마나 병신들이고 진보/보수가 아닌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주의를 꿈꾸며 목숨을 거신 분들은 죄다 순국하고 열매만 따먹는 새끼들이 지들 자유민주주의 찾아준 사람들 헐뜯고 지역드립이나 치고 있으니 얼마나 능지가 처참한지 알 수 있다.
이승만에 대해 화가 난 게 아니라 부통령 부정 선거에 대한 시위라는 말도 있다. 근거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자택으로 갈 때 시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연호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승만 동상 끌고 다니는 시위대도 있었는데?
...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여러 불만이 1960년 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해서 모든 게 터진 거라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야당 후보가 변변치 않거나 타이밍 맞게 대선 시즌 때 족족 죽어나가서 자유당이 그렇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거지, 그중에서 여러 변수를 빼면 과연 대선 때 순순히 이어질 지부터 의문이고. 그리고 시위대가 전체주의 집단도 아니고 사상이 다를 수도 있는 건데 그런 게 일반화 근거가 될 리가 있나?
결과[편집]
이승만이 스스로 대통령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대로 하와이에 있다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사망했다. 이때 나이 90세. 엄청 오래 살았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4개월 후인 1960년 8월 12일 제2공화국이 성립됐고 민주당이 집권하여 대통령엔 윤보선, 국무총리엔 장면이 임명됐다.
정치는 대통령중심제에서 영국, 일본처럼 내각책임제로 바뀌었다. 실질적으로 윤보선은 얼굴 마담인 셈이 됐다.
근데 4.19로 시민들이 데모를 해보니 자신감이 충만한 건지 재미가 들린 건지 전국에선 1960년 4월 26일에 4.19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을 부르짖으며 끊임없이 데모가 일어났다. 심지어 데모하지 말자고 데모를 할 정도였고 이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좋은 계기가 된다. 물론 이에 대해 박정희가 자기 집권을 정당화하려고 부풀렸다는 주장도 있다. 당장 1960년 5월부터 장면이 경호원도 없이 농촌 순시 돌고 했는데도 별다른 일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1960년 3, 4월에는 무정부 상태에 빠져있었던 건 맞는 말이다. 이건 아래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승만의 반공 정책이 무너지자 시민들 사이에서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그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단체다. 그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남북학생회담을 준비하는 등 급진적인 민족주의의 시초가 된다. 이들은 NL의 조상이 되어서 나중에 통합진보당이라는 거대한 똥의 조상님이 되고 현재의 종북 세력의 시초다. 이 조직은 1961년 초에는 김일성을 찬양하고, 북괴에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해서 당시 장면, 윤보선을 포함한 국내의 모든 주민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가져다 주었고 이 꼴을 보고 박정희가 부들부들해서 군사정변을 일으켜서 이들을 전부 체포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북괴로 도망치거나(이들은 후일 처형되었다고 한다.) 일부는 지하화하여서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한다.
4.19 당시에는 일부 정체불명의 무장한 범죄자들이 교도소를 습격하고 군대를 습격해서 국경 지역을 제외한 일부 지역은 무정부 상태가 된 적이 있다. 그래서 당시 사적 제재가 빈번했는데 그 일화로 경상남도 지역에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국군의 보도연맹의 일환으로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로 희생 당할 당시 일부 극소수의 생존자들이 자신들에게 그런 짓을 하게 한 그 마을의 면장을 4.19가 한창이던 때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든지 등 일종의 비질란테가 많이 일어났다. 이러한 무의미한 비질란테 역시 박정희가 정권 잡는 도구로 쓰이게 된다. 그래서 1960년 4월의 국내 기록은 현재 많이 유실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