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3선 개헌

조무위키


2015 개정 교육과정 동아시아사
4단원 V. 오늘날의 동아시아
전후 처리 국제 회담
카이로 회담 · 얄타 회담 · 포츠담 회담(포츠담 선언) · 무조건 항복 · 유엔
일본
극동국제군사재판 · 평화 헌법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미일안전보장조약
남한북한
38선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냉전 국공내전
중국국민당 · 중국공산당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국부천대
6.25 전쟁
애치슨 라인 · 인천상륙작전 · 정전 협정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미일안전보장조약 · 자위대
베트남 전쟁
호찌민 · 베트남 민주 공화국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제네바 협정 · 응오딘지엠 · 베트남 공화국 · 베트콩 · 통킹만 사건 · 닉슨 독트린 · 파리 평화 협정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교 수립 일화평화조약 · 한일기본조약 · 닉슨 독트린 · 미중공동성명 · 중일공동성명 ·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경제 일본
고도 성장기 · 오일 쇼크 · 플라자 합의 · 거품 경제 · 잃어버린 10년
대한민국
삼백 산업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 오일 쇼크 · 3저호황 · 아시아의 네 마리 용 · 1997년 IMF 외환 위기
중국
마오쩌둥 · 대약진운동(인민공사 · 토법고로) · 류사오치 · 덩샤오핑 · 남순강화 · 흑묘백묘론
북한
천리마 운동 · 합영법 · 고난의 행군 · 개성공단
베트남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 중월전쟁 · 도이머이
정치 일본
자유민주당 · 55년 체제 · 안보투쟁 · 록히드 사건(다나카 가쿠에이) · 호소카와 모리히로 · 아베 신조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이승만) · 4.19 혁명 · 장면 내각(장면) · 5.16 군사정변 · 박정희 정권(박정희) · 3선 개헌 · 유신 헌법 · 유신 체제 · 10.26 사태 · 전두환 정부(전두환) · 5.18 민주화 운동 · 6월 민주 항쟁 · 개헌 이후(김대중)
타이완
중국국민당 · 장제스 · 메이리다오 사건 · 민주진보당 · 천수이볜
중국
중국공산당 · 마오쩌둥 · 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홍위병) · 덩샤오핑(천안문 6.4 항쟁)
북한
조선로동당 · 주체사상 · 사회주의 헌법 ·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갈등과 화해 쿠릴 열도 · 센카쿠 열도 · 파라셀 군도 · 스프래틀리 군도 · 일본군 위안부(고노 담화 · 아베 신조) · 야스쿠니 신사 · 동북공정

개요[편집]

1969년 10월 17일, 재선을 하고 있던 각하께서 대통령 한 번 더 해보겠다고 헌법을 갈아엎어버린 사건.

'3선'은 그냥 명분일 뿐이고 사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 하고 싶어했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전개[편집]

1967년에 치러진 6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상대로 약 116만 표 차이로 낙승했다.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 선거 못지 않게 곧 이어 있을 7대 총선에서도 사력을 다하였다. 분명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1회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는데, 여당 민주공화당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개헌이 가능한 2/3 이상의 의석(전체 의석 수 175석, 3분의 2이라면 최소 117석 필요)을 선거에서 차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한다. 물론 이를 저지하려던 신민당도 부정에 손을 댔다. 결과는 민주공화당의 129석 획득으로 승리.

그 과정에서 여당 민주공화당 내의 JP계 의원들의 반발을 부르게 되었다. JP계의 경우 4.8 항명 파동을 일으키면서까지 3선 개헌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중정의 탄압과 박정희김종필에 대한 설득 끝에 당시 여당 의원이었던 이만섭은 개헌에 찬성해주는 조건으로 남산 멧돼지제갈조조의 경질을 요구했고 박정희는 그 조건을 들어줘서 3선 개헌에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렇게 되자 개헌안의 의회 투표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신민당 의원들은 투표가 시작되려는 동시에 국회 단상을 점거하는 무리수까지 두며 개헌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들은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 의원들의 참가 없이 개헌안을 9월 14일 새벽 2시에 날치기로 통과시켜버리면서 개헌안의 의회투표 통과를 성사시키고 만다. 이때 망치가 아니라 냄비뚜껑으로 3번 내리쳤다 카더라.

워낙 억지로 통과시켰기에 의회 투표로 안 끝나고 국민투표까지 갔으나 한창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주작이란 주작을 잔뜩 했던 터라서 10월 17일에 치러진 국민투표에서도 3선 개헌 찬성 쪽이 승리했다.

결국 박정희는 일단 3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당시 선거 자금으로 6~700억을 사용했음에도 경쟁 후보였던 김대중과 불과 95만 표 차이로 겨우 승리하자 박정희는 분노하였고 자신의 안정적 장기 집권을 위한 선거제 개편과 체제 변동을 획책하게 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10월 유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