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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드립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나으니 괜히 드립 쳤다가 평생 까임권을 얻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형법 제308조에 의거, 죽은 사람에 대한 디스를 할 때 허위사실이 아닌 진실만 사용하여 공격할 경우 명예훼손죄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한 조무위키에서는 고인의 생전 업적이나 평가에 상관없이 무고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고인드립을 제외하고는 디스를 허용합니다.
다만 너무 막 치다가 고인의 유가족 혹은 위키 이용자들과 분쟁이 일어난다면 그건 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ㄴ제7대 대통령 선거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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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2.23~2009.10.31)

제갈조조(제갈량 + 조조)라고 불리던 인물

대한민국군인, 외교관, 정치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주 일본 대사, 중앙정보부장,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본관은 학성(鶴城)이다. 고려울산이 잠깐 학성이라고 불린 적이 있다. 고향에 대한 깊은 애향심 때문에 이를 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락 외에 자기 고향을 호로 삼은 사람으론 유진산, 정주영이 있다. 호는 우석, 약칭 HR.

1924년 2월 23일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1961년 최초로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이후 활용도가 있다며 쫓겨나지 않고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주 일본 대사, 중앙정보부장 등 핫-라인들을 역임한다.

1963년 12월 박정희가 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됬다. 1969년 3선 개헌 당시 민주공화당 이만섭 의원이 박정희에게 개헌에 찬성해주는 조건으로 자신과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남산 멧돼지" 김형욱을 경질하라고 요구했고 김형욱은 해임되고 이후락은 주 일본 대사로 가게 된다.

1970년 주 일본 대사 시절에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박정희의 가슴 속을 귀신같이 파고들어 읽어내면서 좋아하는 음식이 일본 초밥이라며 청와대로 종종 배달을 보내기도 했다. 중정부장 시절 같이 근무했던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정말 샤프하고 컴퓨터 같은 사람이라며 상대방의 생각을 미리 정확히 읽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 vs 김대중 대결에서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 당시 김대중의 선거 전략가 참모 엄창록을 잠시 몇일 동안 실종되게 하기도 했다. 초대 김종필부터 5대 김계원까지 역대 자신의 전임 중정부장들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때 김대중

나는 박정희 대통령 후보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후락 부장에게 졌소.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2일, 당시 내무부 장관 오치성의 해임 결의안을 저지하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항명한 민주공화당 의원들을 고문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10.2 항명파동이라고 한다. 그들 중엔 박정희에게 처남이자 영부인 육영수의 친오빠인 육인수도 끌려갔고, 셋째형 박상희의 친구 김성곤은 그 고문 후유증으로 4년 뒤에 사망했다.

1972년 5월 초에는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최초 대북밀사로 북한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 회담을 가졌다. 그때 죽기를 각오해서 청산가리 캡슐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두 달 뒤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또 약 3개월 뒤 이 사람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전제주의로 본격적으로 바뀌니, 이 사람의 영향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당시 유신 벽보를 뜯고 다니던 일명 조선의 주먹황제, 잇뽕이라고 불리던 김두한을 여러 차례 테러해서 고문 후유증으로 죽게 하기도 했다.

이후 수경사령관으로 있던 윤필용과 술을 먹다가 후계 문제를 꺼낸 것 때문에 중심에서 멀어진다. 윤필용 이 좆병신 새끼가

각하께서 노쇠하셨으니 중정부장님께서 후계자가 되십시오.

이런 소리를 하는 걸 이후락이 흐뭇하게 웃은 게 원인이었다. 이럴 때 이후락이 정치력을 발휘해서 윤필용을 조낸 패버렸으면 이후락은 반인반신에게 귀여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여튼 윤필용이 저 소리를 까댄 걸 반인반신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윤필용은 숙청되었고 이 일로 인해 반인반신의 눈 밖에 나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수를 저지르다가 1973년 12월 중정부장직에서 쫓겨난다. 이후 다다음으로 들어온 인물 덕분에 대한민국의 역사가 매우 크게 바뀌게 된다.

그 시점 김대중에게 가해진 주요 테러들을 뒤에서 조종하기도 하였다.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고향인 경남 울산울주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투표율 1위로 당선되었다.

10.26 사태로 박씨 제1왕조가 무너진 후 미쿸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JP를 공격하면 비리 문제를 크게 건드리지 않겠다는 전두환의 조건으로 잠시 귀국하기도... 그리고 그렇게 귀국한 뒤 기자회견에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에 대한 질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을 만지다 보니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다.

이후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굽는 등 은둔 생활을 하고 사망할 때까지 10월 유신을 비롯한 박정희 정권의 모든 비밀에 대한 인터뷰를 거절하고 회피했다. 2009년 10월 31일까지 살았으니 박정희 정권의 2인자들 중에선 친인척 지간이기도 한 JP를 제외하곤 가장 장수한 셈이다.그리고 JP를 포함해서 가장 나이가 연상이다.

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을 때 전두환의 경호실장 출신인 안현태가 안장 될 때와는 달리 시민 단체의 반대 시위가 거의 없었다.

지금의 울산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울산공업단지와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 조선소를 비롯해서 학성고, 우석고,(현 신정고) 울산여상, 언양여상, 그리고 울산전문대학(현 울산과학대학), 울산공대(현 울산대)를 설립하는 등 열악했던 울산의 교육계와 경제를 발전시켰다. 2005년 울산시민들 상대로 해방 이후 울산을 빛낸 인물 설문조사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하자 울산 남구 달동문화공원에서 그의 종친(울산 학성이씨)들에 의해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500여 명의 시민들이 조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