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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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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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1930년부터 1939년까지의 연대.

광기와 별 미친 사상들이 세계를 뒤덮던 시기. 실제로 만화 북두의권의 모델이 된 시기라고 하며 북두의 권 과거 시점인 창천의권의 배경이다. 농담이 아니라 이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몸을 오체분시하는 극악살인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고 한다.

일본령 조선[편집]

문화 통치의 종식과 조선 병참기지화의 시작[편집]

일본 내부적으로 정치적 혼란기가 찾아오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도 사그라들고 슬슬 사회분위기가 경직되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 사변으로 본격적 중국 침공이 시작되자 조선 반도를 중국 침공을 위한 병참 기지로써 활용하고자 했고 조선자치론자들을 포섭해 친일파로 만들었다. 이후 조선 내에서 활동하던 신간회도 일제의 압력과 내부 갈등으로 해체되었다.

동아일보 측에서는 브나로드 운동을 개시해 농촌을 개혁하려고 시도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이 역시 중단되었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편집]

한편 이 시기 임시정부는 쇠퇴기를 걷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구가 한인 애국단을 결성해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열사가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쇼와 덴노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미수로 끝나고 자수하였으며, 4월 29일 윤봉길 열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물병 폭탄을 던져 쪽발이들을 노릇노릇 구운 후 체포되어 두 분 다 순국하셨다. 이를 보고 감명을 받은 중화민국의 장제스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 지원하게 된다.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가 일본에게 넘어가자 소재지를 항저우, 전장, 우한,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을 거치며 옮기다가 1940년 충칭에 정착했다.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은 보수주의 성향의 지청천 장군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으로 나뉘었고, 기타 사회주의 만주 독립군들은 짱깨 공산당에 합류해 일본과 싸웠는데 이때 훗날 한국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가 되는 김일성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북괴 건국 이후 이것을 과장하고 포장하면서 북괴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써먹게 된다.

일제의 중국 침략[편집]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허수아비 황제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옹립한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노구교(마르코폴로 다리) 사건으로 중국을 전면 침공하면서 식민지 조선을 전시 태세에 돌입시켰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면서 강제 징병 및 강제 노동 징용, 위안부 징집 등의 만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추축국에 가입한 상태였고 군국주의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내선일체 드립을 쳤으며, 한국어 교육을 금지시키고 아이들에게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게 하면서 한국인을 완전히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국제[편집]

미국[편집]

대공황이 터진 이후 실업자들이 수없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이 모인 단체 보너스 군대의 시위를 더글라스 맥아더를 보내 유혈진압했다. 후버 대통령은 유혈진압까지는 바라지 않았으나 맥아더는 대통령의 명령을 쌩까고 유혈진압을 이어나가자 결국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후버의 임기 종료 이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공공사업 확대 및 금융 개혁을 골자로 한 뉴딜 정책을 개시해 실업률이 조금씩 줄어들었고, 그는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론조사를 잘못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신뢰성 하락으로 얼마 안 가 폐간되고 대신 이때 정확한 예측을 했던 조지 갤럽은 여론조사 기업 갤럽을 설립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재선된 루스벨트는 1937년부터 일어난 재차 불황을 맞이했고 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이 퍼지자 이번에도 무기를 팔면서 전쟁 특수를 보기로 했다. 1939년 불황을 극복한 후 주당 44시간 노동을 확립했다.

사회적으로는 금주법이 폐지되었으며 대공황으로 인해 상당히 살기 힘들었던 한편 미국 뉴욕에 수많은 마천루들이 들어서는데, 대표적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 완공 이후 장장 40년 동안 세계 최고층 건물로 군림했다.

중화민국[편집]

국민정부[편집]

반장전쟁 도중 옌시산 등이 장제스에 대항해 초대형 반란을 일으켜 중원대전이 일어났으나 국민당은 군벌들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장쉐량처럼 장제스의 편에 서거나 리쭝런, 옌시산처럼 장제스와 화해한 군벌들만 그나마 살아남게 되었다. 이후 국민당은 초공작전을 통해 공산당 토벌을 개시했다.

장제스는 후한민과 갈등을 빚었고 탕산 사건을 일으켜 그를 감금했다. 결국 국민당의 반장세력들이 다시 결집해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장제스와 충돌했다. 이 때문에 또 전운이 감돌았고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에 대해 여러 번 북벌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의 나카무라 중위가 봉천군벌에 의해 피살당하고 일본은 류타오후에서 철로 폭파 자작극을 벌여 만주 침공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를 침공해 점령하고 청나라 최후의 황제 선통제를 만주국 집정관으로 취임시켜 만주국을 건국했다.

분열되었던 난징과 광저우의 국민정부는 일본의 만행에 분노하며 합작을 이루었고, 이후 일본군은 만주의 진저우까지 점령하면서 만주 전체를 장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과 윤봉길 등이 항일 의거를 이루면서 국민당은 한국 임시정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인 승려가 상하이에서 쳐맞자 상하이의 쪽바리들이 욷눞을 일으켰고 얼마 후 일본은 상하이를 침공해 점령했다. 1933년에는 열하사변이 일어나 봉천군벌이 궤멸되고 장쉐량은 낭인이 된다.

이후 중국은 화폐 개혁을 단행해 화폐 주조권을 국민정부가 독점하고 은량을 폐기해 은원만 통용되도록 했다. 2년 후인 1935년에는 은본위제를 완전히 폐기한 후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천밍수와 차이팅카이, 장광나이가 일본 제국, 중국 공산당과 동맹해 제3의 세력을 자칭하며 복건사변을 일으키고 장제스에게 개겼으나 처참하게 짓밟혔다.

일본은 허잉친-우메즈 협정과 친더춘-도이하라 협정을 비공식적으로 맺어놓고 이를 이용해 짱깨들을 협박했고, 중국 내부에서는 왕징웨이 저격 사건이 일어나 장제스-왕징웨이 합작이 결렬되었다. 전국적으로 반일 감정이 확산되어 12.9 운동 등이 일어났고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시원치 못한 태도를 보이자 몇몇 세력은 독단적으로 항일을 표방하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과정에 국민당이 상하이 구국회의 지도자 7인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반일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장쉐량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 사건이 터지면서 장제스는 어쩔 수 없이 저우언라이와 협상을 해 제2차 국공합작을 맺게 된다.

공산당[편집]

국민당은 초공작전을 벌이며 중공을 압박했고 쩌둥이는 부전사변을 일으켜 공산당 지도부를 대거 처형하는 자살골을 넣었고 이후 빤쓰런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복건사변 때 줄을 잘못 서다가 수도가 점령당해버리자 중공은 홍군대장정으로 알려진 대대적 빤쓰런을 벌이게 되는데, 그 결과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홍군의 90% 이상이 싹 다 날라가서 공산당은 궤멸 직전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공이 갈수록 강해졌고, 이때 장쉐량이 뜬금없이 장제스에게 어차피 망해가던 공산당과 손을 잡으라며 그를 감금해버리는 시안 사건이 터지자 공산당은 얼떨결에 국민당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편집]

중국은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상태였고 1937년 7월 6일 느닷없이 일본군들이 루거오차오 다리를 넘어 군사훈련을 했고 중국군은 이를 저지하며 일본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7월 7일 첫 총소리가 울리며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났고, 협상을 이어나가다가 어둠의 독립군 모전구렴야 선생께서 협상을 무시하고 중국군을 공격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상하이에 대대적인 군대를 파견했고 중국군이 이를 막으려 했으나 되려 격파당했다. 일본군은 난징까지 진격했고 중국군 대부분이 난징을 포기해야 한다며 튄 반면에 탕성즈는 끝까지 난징을 수호하다가 결국 이들도 패배하고 도주했다. 일본군은 난징에서 난징 대학살이라는 희대의 만행을 벌였다. 이때 100인 참수 경쟁 같은 만행들도 있었다.

일본군은 중화민국 임시정부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중국 침공에 이용했다. 일본은 중국의 막대한 인력과 영토에 밀려서 바로 중국을 밀어붙이지는 못했으나 선전하고 있었고 우한, 광저우 등이 일본에 의해 넘어갔다. 결국 왕징웨이가 중국을 배신하고 일본 편에 붙으면서 일본은 중국을 더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소련[편집]

독재자 스탈린이 집권한 소련은 유물론에 따라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5개년 계획을 통해 과학자들에 대한 대우를 '그나마' 보장하고 나머지 농민들을 수탈하고 농밀레 공밀레 인밀레를 돌리며 엄청난 공업화를 이루고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으나 사람들은 당연히 죽어가고 있었다.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은 우크라이나의 대기근과 맞물려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후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스탈린은 반스탈린파 숙청을 시작으로 자신의 동료들까지 남김없이 숙청하는 대숙청을 벌이게 되는데, 간부를 시작으로 해서 언론, 학계, 예술, 문화, 군대, 민간인까지 가차없이 숙청하고 학살당했다. 스탈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모가지 따이고 굴라그나 천국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유럽에서 파시즘이 등장하자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파시즘과 다를 바 없는 독재를 벌이는 소련의 입지는 불안해졌고 결국 소련은 유럽을 쌩까고 나치같은 또라이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불가침 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침공해 영토를 점령했다.

연합국[편집]

프랑스[편집]

극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좌파 정당 역시 급속하게 커졌고 좌파정당이 재집권했고, 1934년에 극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이후 우파가 재집권해 중도우파와의 연정을 2년간 이뤘다.

파시스트 국가들의 도발이 심해지자 좌파 정당이 통합되고 좌파 통합정당인 인민전선이 결성되어 총선 승리 후 집권했다. 이때 레옹 블룸 총리가 취임했으나 급진주의적인 사회주의 정책 때문에 붕괴되었다.

초기 프랑스는 식민지 교역과 노인들이 많은 인구구조 때문에 경제적 타격을 덜 받았지만 이것이 역으로 작용해 회복에는 실패하고 되려 침체되었다. 그러던 도중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등을 흡수하면서도 프랑스는 독일의 행보에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결국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나 선전포고만 하고 역시나 프랑스 정부의 무능으로 어떤 전투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편집]

영국 또한 세계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힘든 상황이었으며 램지 맥도널드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기용된 네빌 체임벌린이 금융개혁을 통해 영국의 경제를 되살려놓았다. 하지만 그는 외교적 능력이 떨어졌고 총리가 된 후부터 끔찍한 행보를 보여주게 된다.

독일을 하루빨리 견제해야 했는데, 독일과 이탈리아를 분리시킨답시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을 방관하거나 스페인 내전 방관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당시 이탈리아는 명색은 협상국 출신이라 독일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갈수록 세를 불렸고, 이탈리아 및 일본과 방공 협정을 맺었으며 뮌헨 협정이라는 희대의 미친 협정을 맺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째로 독일에게 넘겨줘놓고는 우리 시대의 평화 드립을 쳤다. 결국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영국은 뒤늦게서야 참전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한편 왕실에서는 조지 5세 별세 이후 나치즘 신봉자 에드워드 8세가 왕으로 즉위했는데, 갑자기 미국의 월리스 심프슨이라는 여자한테 빠져가지고는 왕위를 내팽개치고 미국으로 튀어버렸다. 결국 영국의 혼란스러운 정국은 애꿎은 조지 6세가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영화 킹스 스피치에 나왔던 것처럼 너같은 말더듬이였고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말하는 법을 제대로 익혀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해외 영토에 있어서는 아일랜드를 독립시켜줬으며 인도 제국에서는 영국이 소금세를 제정하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소금 행진을 하며 저항했고 감옥에서도 공장제 수공업에 대항해 물레 돌리기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아일랜드도 이맘때에 독립했다.

추축국[편집]

일본 제국[편집]

일본 제국은 대만에서 원주민 차별에 항의해 들고 일어나며 터진 우서 사건 당시 원주민들을 진압하고 대만 통치 방식을 변경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가 종식되자 일본은 중국에서의 혼란을 틈타 섹 아니 만주를 침공하며 만주사변을 벌였다.

이후 일본은 만주국을 건국했으며 1932년 극우주의자들이 일본 주요 인사들을 테러해 죽인 5.15 사건을 일으켰는데도 대부분이 가벼운 형벌만 갖고 풀려나는 등 나라가 슬슬 미쳐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 군부의 인사들이 4명이나 죽임당하고 쇼와 덴노에 대한 충성을 참칭하며 반역을 일으킨 2.26 사건의 경우에는 얄짤없었지만 군부의 폭주는 더 강화되었다.

1936년 파시즘이 전 세계에 확산되던 시기 대표적인 파시즘 국가였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방공 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난징 대학살과 같은 학살을 벌였다. 조선 반도는 전쟁을 위해 전시 태세에 돌입시켜 국민을 총동원시켰으며 이와 같은 행보 때문에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경제 협력을 중단했다. 또한 중일 전쟁 때문에 기존 도쿄에서 개최해야 했던 1940 도쿄 올림픽의 개최도 금지되었다.

나치 독일[편집]

독일에서는 의회정치가 점차 붕괴되고 극단주의자들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연정을 거부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치당과 독일 공산당이 상당히 약진했다. 반공 중도우파 하인리히 브뤼닝은 나치당과 공산당에 맞섰지만 경제실적은 세계 대공황으로 더욱 악화되어갔고 결국 이들은 물러났다. 이후 군부와 귀족들이 자리를 채웠으나 이들도 인기가 없어 연정에 실패하고 정권을 잃었다.

이제 나치당과 공산당을 뽑지 않는 이상 연정을 이루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해졌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주범이 공산당원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공산당 또한 민심을 잃어 독일은 군부의 지지를 통해 권력을 얻은 나치당이 점차 장악해나갔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를 포섭해 의회를 해산시켰고 프란츠 폰 파펜과 연정을 이뤄 수상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는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나치 독일이 되었다.

나치는 군중의 저항심리와 지배를 받고 싶어하는 심리의 이중성을 교묘하게 공략해 극단주의를 내세움으로써 독일인들의 저항심리를 충족시켜주었고 철권통치를 통해 혼란스런 정국을 바로잡은 것처럼 보이면서 독일인들은 점차 그러한 체제에 순응했다. 나치당은 얼마 후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금지했으며 복지 정책을 여럿 만들고 경제상황을 안정시켜 독일인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렇게 체제를 고착시킨 나치는 슬슬 팽창 정책을 펴기 시작하는데, 먼저 국제연맹이 관할하던 중립지대 루르에 국방군을 진군시켰고, 당시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가 방관하면서 루르 점령에 성공했다.

한편 독일 밑에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기독사회당이 나치를 견제하고 파시즘을 내세워 오스트리아 연방국을 세웠는데. 나치당 지지자가 오스트리아 독재자 돌푸스를 암살하면서 나치의 손아귀에 넘어갈 뻔 했으나 쿠르트 슈슈니크가 재빨리 대처하고 이탈리아 또한 독일을 견제하면서 실패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이미 같은 민족인 독일과 나라를 합치자는 사람들이 나치즘에 빠져들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의 뒤를 봐주던 이탈리아마저도 독일의 친구가 되자 결국 정권은 나치당에게 넘어갔다. 이후 독일은 안슐루스를 통해 오스트리아 나치당과 지들 멋대로 합의하며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독일은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에아게 주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했고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이 이를 방관하다 못해 아예 뮌헨 협정까지 맺어주면서 주데텐란트는 독일에게 넘어갔다. 나치는 자기들이 아무리 똥을 싸도 영국과 프랑스가 방관해주자 이번에는 아예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점령했고, 다음에는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며 방송국에 폴란드 군복을 입은 나치군이 진군하는 주작 사건을 통해 아니꼬왔던 폴란드 침공 명분을 내세웠다.

결국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적으로 침공했으며 소련 또한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이에 참전해 폴란드를 분할해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에는 방관하지 않겠다며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이는 사실상 방관이나 다를 게 없어서 서부전선은 가짜 전쟁만 이어졌다.

이탈리아 왕국[편집]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 제국의 후예를 표방하며 팽창 정책을 펼쳤으나 이탈리아답게 빠른 속도로 팽창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파시즘의 중심 국가로 올라서며 오히려 독일의 나치를 자신의 짭으로 볼 정도로 영향력은 강한 편이었다. 1934년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도하자 무솔리니가 직접 독일에 경고해 오스트리아 합병을 막은 적도 있었다. 자기가 먹을려고 ㅇㅇ

이후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드디어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독일, 일본과 방공 협정을 체결해 추축국을 결성했다.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원했으며 독일과 친해진 후에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하였고 1939년 알바니아를 점령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끼어들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에스파냐 왕국→스페인국[편집]

프리모 데 리베라는 1930년 1월에 실각해 망명을 떠났고 공화제 여론이 강해졌다. 왕실은 끝까지 왕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결국 1931년에 지자체 선거 실시에 동의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알폰소 13세 역시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 이후 헌법이 제정되어 표현과 결사의 자유, 여성 참정권이 부여되었으며 귀족들의 특권은 철폐되었다. 정교분리를 위해 가톨릭 탄압이 시작되었으며 국유화 정책이 펼쳐졌다.

이러한 정책들은 기득권들의 반발을 샀고 정작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에게도 보수적이라며 반발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 내부적으로 이념 갈등이 매우 심해졌고 제2공화국 정부는 이들을 중재하는 데 실패했다. 1933년 보수주의자들이 결성한 스페인 자치 우익연합(CEDA)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토지 개혁을 보류하고 지방자치를 축소했다. 이에 반발해 카탈루냐인들과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한 후 정부는 아예 지방자치제를 폐지해버리고 토지개혁도 폐기해버렸다.

1936년 총선 때 좌파들은 좌파 간 내부분열에 대한 자성 여론이 커지면서 인민전선을 결성해 단결했으며 반대로 CEDA는 왕정파와 공화파가 충돌하면서 해산되었다. 결국 총선에서 좌파가 승리했고 다시 개혁을 개시했으나, 우파들은 백색테러를 일으키며 반발했고 돌격 경찰대 대원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모로코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좌파 정권은 전쟁에 있어서 무능했고 반군은 왕당파와 가톨릭 세력 등이 우연히 몰락한 틈을 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단결하면서 공화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여러 나라가 개입했으며 소련은 제2공화국을,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군을 지원했다. 반군은 게르니카에서 대학살을 벌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역시나 방관했다.

공화국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들과 공화파, 공산주의자들 간의 갈등이 재점화되면서 패색이 짙어졌고 1939년 2월에는 좌파의 중심지 카탈루냐가 함락되었으며 결국 마드리드까지 반군에게 점령당하면서 내전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팔랑헤와 우파 반군인 스페인 국민전선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스페인은 방공 협정에 가담하면서 친나치적 행보를 보인다.

문화[편집]

일본령 조선에서는 본격적으로 서양 문물이 신세대들에게 수용되면서 신여성, 신남성 등이 등장했다. 심훈, 이육사, 한용운 등의 저항시인들이 문학을 이용해 항일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스포츠의 경우 농구와 축구 대신 야구가 급속도로 발전해 루 게릭, 베이브 루스 등이 활약했다. 물론 축구도 1930 FIFA 우루과이 월드컵이 개최되면서 월드컵의 시작을 알렸다. 스포츠는 나치즘에 악용되기도 했는데 1934 FIFA 이탈리아 월드컵베니토 무솔리니가 체제 선전을 위해 결과를 조작한 월드컵으로 영원히 흑역사로 남게 되었으며 1936 베를린 올림픽 또한 나치즘 선동의 장이 되었다. 한편 한국의 손기정 선수가 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우리나라의 올림픽 역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전 세계가 경제적으로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극단주의가 유행하면서 공산주의나 나치즘 등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예술들도 늘어났다. 피카소의 경우 게르니카 학살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노래[편집]

경제 공황으로 인해 음반시장이 위축되고 잠시 암흑기를 맞았다. 재즈의 경우 초기 재즈를 벗어나 스윙재즈로 발전했으며 컨트리 장르가 유행했다. 한편 유럽에서 들어온 오페레타와 미국의 재즈가 섞여 스탠다드 팝, 뮤지컬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영화[편집]

영화계는 이때 첫 황금기를 맞이했으며 여러 시상식과 영화제가 등장해 영화 예술에 족적을 남겼다. 본격적으로 컬러 영화화 유성 영화들이 등장했으며 1933년 킹콩의 개봉으로 괴수물의 시초가 된 시기이기도 하다. 1937년에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서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개봉하면서 애니메이션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급성장으로 인해 찰리 채플린과 같은 희극 배우들의 시대에서 점차 외모와 비주얼, 연기력을 우선시하는 영화배우의 시대로 넘어왔으며 이런 황금기 도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환율까지 고려해 아직까지도 가장 많은 수익을 벌어들인 영화로 기록되고 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1930년대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