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군
조무위키
황해도의 행정구역 | ||
자치시 | 해주시 · 사리원시 · 송림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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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참고: 한국의 행정구역·밑줄: 도청소재지 |
개요[편집]
황해도의 군 중 하나. 황해도의 '황'자가 이곳 황주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황해도가 새로 설치되었을 때 주요 도시가 되었지만 황해도 전체가 듣보잡이 되면서 인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황주는 평양권에 속하는 깡촌으로 전락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 사리원이 개발되고 황주 송림역에 겸이포 제철소가 개발되면서 황해도의 '황'자를 상징하는 대도시로 부활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 때문에 예전과 같은 듣보 시골로 전락한다.
연혁[편집]
고려이전[편집]
지금은 제철소와 공단으로 뒤덮인 겸이포읍에서 신석기유물이 발굴되었다. 이후 심촌리, 고연리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5곳이 발견되었고, 정방산에서 탁상식+기반식이 스까된 200기이상의 지석묘군에서 간석기, 세형동검, 오수전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유물이 출토되었고 이때부터 주요 청동기문화 중심지가 되었고 고조선의 땅이 되었다.
고조선멸망이후 한나라는 지금의 흑교면지역에 둔유현(屯有縣)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황주군 남쪽에 있는 고개인 자비령(慈悲嶺)이 평양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가 되서 그런가 공손강시기 대방군을 신설할 때, 이 현이남의 7개현지역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분리했다.
미천왕시기 고구려를 점령하면서 고구려땅이 되었다. 한동안 둔유현이라고 불렸겠지만 시간이 지난 뒤 우동어홀(于冬於忽), 동홀(冬忽)이라고도 불렀다. 나당전쟁승리이후 대동강남쪽에 속하여 신라의 땅이 되었고 경덕왕시기 취성군(取城郡)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군이 설치된 것은 아무리 잘쳐줘도 헌덕왕시기였다.
후삼국시대가 한창인 905년, 황주(黃州)로 개편되었고 황보제공의 땅이 되었지만 패서호족들이 궁예와 함께 활동하면서 후고구려땅이 되었다가 궁예띨망이후 고려로 편입되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황보씨가 이지역의 머튽으로 군림했다.
983년 최승로의 건의로 전국 12목이 파견될 때 본주에 황주목이 파견되었고 993년 절도사가 파견되면서 천덕군절도사(天德軍節度使)가 파견되었고, 관내도에 편입되었다. 1012년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가 파견되었다가 1018년 목이 파견되었다. 이후 5도 양계로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서해도에 속했고 황주자체는 봉주, 신주, 토산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1217년 거란군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고 고령군(固寧郡)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황주목으로 복귀되었다. 이때 잠깐 서북면에 속했다 말았다.
조선이후[편집]
조선시대 황주군 남쪽 봉산과의 경계에 극성진(棘城鎭)이 설치되었고 1449년 황해도병마도절제사영을 재설치하면서 이곳에 관찰사가 설치되었다. 이후 1593년 황해도병영이 재설치되면서 1601년부터 황주가 병영소재지로 정착되었다. 정묘호란이후 정방산성을 개수,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했지만 병자호란시기 김자점씨발새끼때문에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청나라시기엔 짱깨사신들의 주요 방문지로 속했다. 순조시기 황강현(黃岡縣)으로 강등먹었다가 황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895년 황주군으로 개편, 평양부에 속했다가 갑오개혁이후 황해도에 속하게 되었다. 송림면이 겸이포면으로 개명, 이후 분단이전 한국의 핵심 제철소였던 겸이포제철소가 건설되었다.
8.15 광복이후 38선이북에 속했기 때문에 소련군정, 북괴에 속했다. 공산치하에서 겸이포읍이 송림면에 편입되고 1947년 송림시로 독립했다. 6.25 전쟁중 1.4 후퇴후 국군이 수복하는데 실패하면서 그대로 북괴땅이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인교면, 도치면, 구락면이 서흥군 도면, 소사면, 세평면, 수안군 율계면 6개리와 함께 연탄군으로 분리되었고 천주면 1개리가 상원군으로 넘어갔으며 나머지는 그래도 황주군에 남았다.
행정구역[편집]
現 북괴령 황주군[편집]
황주읍[편집]
黃州邑
現 북괴령 황해북도 황주군 황주읍, 운성리 대부분, 신상리.
면적 41.26㎢. 읍 소재지는 황강리.
황강(黃崗), 덕월(德月), 적벽(赤壁), 성남(城南), 벽성(碧城), 제안(齊安), 예동(禮洞), 동천(東天), 신상(新上), 성북(城北), 운봉(雲峰)의 11개리를 관할했다.
1914년 제안면(齊安面)이라 칭했다가 이후 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북쪽에 천주산이 솟아있고 그 여맥이 읍 서남으로 뻗어내려 200m 이하의 구릉이 기복되어 있고 나머지는 평지를 이룬다. 황주천(黃州川)이 면 남부를 북서류하다 여러 작은 개울이 합류해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사과와 같은 과일재배가 활발히 이뤄졌다고 한다.
황주읍성, 덕월산성, 월파루, 태허루 등이 있었는데.... 알지? 어쩔 수 없어.
소련군정이 모든 읍을 면으로 강등시키면서 황주면으로 강등되었고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황주읍(덕월리 + 적벽리 + 예동리 일부 + 황강리 + 제안리 + 성남리 + 벽성리), 운성리(운봉리 + 성북리), 신상리(신상리 + 동천리 + 예동리 일부)로 개편되었다. 1961년 연탄군 능산리의 일부지역이 운성리에 편입되었다.
주남면[편집]
州南面
現 북괴령 황해북도 황주군 산봉리, 순천리, 침촌리 일부, 대동리 일부.
면적 55.31㎢. 면 소재지는 내함리.
내함리(內咸里), 소선리(小仙里), 정방리(正方里), 순천리(順天里), 대세리(大稅里), 율목리(栗木里), 이우리(梨隅里), 금산리(金山里)의 8개리를 관할했다.
말 그래도 주의 남쪽(황주군 남부)에 있다고 하여 주남면이라 불렸고 1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이중 창촌리와 함께 정방리로 스까된 극성리엔 군사요새인 극성진(棘城鎭)이 있었다.
면 동쪽에 삼봉산, 남쪽 봉산군과의 경계에 정방산등이 솟아있어 남부는 산악지대를 이루고 북쪽은 증산(甑山, 145m)등 일부 구릉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지였다. 면동부에 황주천의 지류가 흘렀기 때문에 곡창지대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극성진이 있었던 정방리에 정방산성, 극성진터, 정방산에 있는 성불사, 지석묘등이 있었다. 군면리 대폐합때 산봉리(금산리 + 내함리 + 소선리)[1], 순천리(순천리 + 이우리 + 율목리), 침촌리(정방리 + 청룡면 화산리 + 소곶리), 대동리 일부(대열리 + 삼전면 용전리 + 영풍면 동산리)로 개편되었다. 전쟁이후 1954년 침촌리 일부가 봉산군 용림리로 편입되었다.
천주면[편집]
天柱面
면적 101.11㎢. 면 소재지는 내동리.
내동(內東), 장좌(長佐), 용계(龍溪), 봉진(鳳進), 구이(九伊), 경천(敬天), 이동(梨洞), 내교(內橋), 와동(瓦洞), 외두(外斗), 외하(外下), 외상(外上)의 12개리를 관할했다.
1914년 경천면(敬天面)을 통폐합했다. 면 남쪽에는 천주산, 삼봉산등이 솟아있으며, 중앙에 상마산(上馬山, 308m)이 동서로 뻗어내려 북부 매상천과 남부 영풍천이 분수령을 이뤘다. 이 하천연안에 대규모 평야가 형성되었다.
군면리 대폐합 때 고연리 일부(용계리 + 흑교면 고정리 + 용연리 + 원동리), 내외리(외상리 + 외하리 + 내동리), 삼훈리(봉진리 + 경천리 + 장좌리)[2], 천주리(이동리 + 내교리 + 와동리), 장리 일부(구이리)로 개편되어 장리는 상원군, 나머지는 황주군에 편입되었다. 1965년 외상리가 복구되었다.
청룡면[편집]
靑龍面
現 북괴령 황해북도 황주군 침촌리 대부분, 구포리, 청룡리, 철도리 일부, 포남리
면적 57.72㎢. 면 소재지는 소관리.
소관리(小串里), 포남리(浦南里), 포북리(浦北里), 구로리(九老里), 화산리(華山里), 상비리(上比里), 인덕리(仁德里), 청룡리(靑龍里)의 8개리를 관할했다.
동북쪽 100m 이하 구릉지역을 빼면 전지역이 평지인데 서강, 수합천에 물을 받은 재령강이 면 서남부를 북류하다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재령평야의 북부를 이루기 때문에 북괴가 말아먹기 전엔 주요 곡창지대로 통했다고 한다.
군면리 대폐합때 침촌리 일부(화산리 + 소관리 + 주남면 정방리), 구포리(구로리 + 포북리 + 포남리), 청룡리(청룡리 + 인덕리 + 상비리 일부), 철도리 일부(상비리 일부 + 삼전면 내송리 일부 + 철도리)로 개편되었다. 1954년 침촘리의 일부가 봉산군 용림리로 편입되었고 1956년 구포리에서 폐지된 포남리가 복구되었다. 남은 구포리는 봉산군 봉의리에게 땅을 조금 떼줬다.
청수면[편집]
淸水面
現 북괴령 황해북도 황주군 청운리 일부, 인포리, 광천리, 석정리.
면적 54.59㎢. 면 소재지는 금광리.
금광리(金光里), 묵천리(默川里), 토정리(土井里), 진교리(榛橋里), 원정리(遠井里), 청원리(淸源里), 석평리(石坪里), 인포리(仁浦里)의 8개리를 관할했다.
1914년 구림면(九林面)과 청원면(淸源面)일부를 합하여 만들어졌다. 매상천이 면내에서 발원한 개울들과 합류해 곡류하다 대동강으로 유입된다. 하천유역에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었다.
군면리 대폐합 때 청운리 일부(청원리 + 구성면 용두리 + 죽대리 + 청운리), 삼가포리(인포리 + 금광리 + 묵천리), 석정리(토정리 + 진교리 + 원정리 + 석평리)로 개편되었다. 1953년 삼가포리가 복구된 임ㄴ포리, 광천리로 분리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영풍면[편집]
永豊面
現 북괴령 황해북도 황주군 장천리, 삼정리, 대동리 일부.
면적 38.13㎢. 면 소재지는 냉정리.
냉정리(冷井里), 이정리(梨井里), 신정리(新井里), 동산리(東山里), 영풍리(永豊里), 성재리(成財里), 냉천리(冷泉里)의 7개리를 관할했다.
일부 100m 이하 구릉지대를 빼면 전지역이 평지인데 황주천이 면 남부를 곡류하다 대동강으로 유입되었고 그 하천을 따라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었다. 냉정리에 광조사가 있었다.
군면리 대폐합 때 장천리(영풍리 + 성재리 + 냉천리), 삼정리(이정리 + 신정리 + 냉정리), 대동리 일부(영풍면 동산리 + 삼전면 용전리 + 주남면 대열리)로 개편되었다.
구성면[편집]
九聖面
現 북괴령 황해북도 황주군 석산리, 용궁리, 청운리 대부분.
면적 50.69㎢. 면 소재지는 석산리.
석산리(石山里), 용궁리(龍宮里), 화동리(和洞里), 구림리(九林里), 용두리(龍頭里), 죽대리(竹垈里), 청운리(靑雲里), 서정리(西井里)의 8개리를 관할했다.
본래 모성면(慕聖面)이었는데, 부군면 통폐합 때 구성면으로 개명되었다. 동쪽에 침산(砧山, 80m), 서쪽에 금산(金山, 148m)등의 낮은 구릉을 빼면 대부분이 평지였다. 황주천이 면 서남부를 서류하다 대동강으로 유입되었고 그 일대에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었다.
북부 모성방과 금산 북쪽 사면에선 철광석이 채굴되었는데, 이곳의 철광석이 송림시에 있던 겸이포제철소에서 강철이 되었다고 한다.
군면리 대폐합 때 석산리(석산리 + 구림리 + 서정리), 용궁리(용궁리 + 화동리), 청운리 대부분(용두리 + 죽대리 + 청운리 + 청수면 청원리)으로 개편되었다.
흑교면[편집]
黑橋面
면적 87.94㎢. 면 소재지는 흑교리.
흑교(黑橋), 정수(淨水), 내로(內蘆), 정자(亭子), 원동(院洞), 고정(高井), 용연(龍淵), 용정(龍井), 청천(淸川), 흑천(黑川), 금석(金石), 빙량(氷梁), 장사(長沙)의 13개리를 관할했다.
한군현중 하나였던 둔유현(屯有縣)이 있었던 곳이다. 고려이후 '흑교역(黑橋驛)'이 설치되었다. 부군면 통폐합 때 고정면(高井面)과 목곡면(木谷面)이 스까되었고 흑교역에서 아이디어를 따와 흑교면이 되었다.
북쪽에는 삼봉산(三峰山, 112m), 정수봉(淨水峰, 186m), 고정산(高井山, 296m)등이 솟아 있지만 동남쪽은 평지에 해당한다. 그리고 면내에서 발원한 작은 지류가 흑교천이 되어 대동강으로 들어갔는데, 흑교천 유역에 넓고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었다.
군면리 대폐합 때 흑교리(흑교리 + 정수리 + 내로리), 고연리(고정리 + 용연리 + 원동리 + 천주면 용계리), 용천리(정자리 + 용정리 + 흑천리), 금사리(금석리 + 장사리 + 빙량리 + 중화면 신유리 일부)로 개편되었다. 1953년 금사리에서 금석리, 장사리가 복구되었고 금사리 일부가 중화군 관봉리로 편입되었다.
現 북괴령 연탄군[편집]
구락면[편집]
龜洛面
면적 92.230㎢. 면 소재지는 덕우리.
덕우리(德隅里), 구락리(龜洛里), 미산리(眉山里), 박산리(朴山里), 인훈리(仁訓里), 장평리(長坪里), 영암리(靈巖里), 월이리(月移里), 구룡리(龜龍里)의 9개리를 관할했다.
면 남쪽에 그 유명한 자비령, 그리고 금수산(金水山, 598m), 군장산(軍將山, 534m)등이 솟은 산악지대이며 북쪽엔 월이산(月移山, 203m)등 낮은 구릉이 기복되어 있다. 황주천이 이러한 남북산지 사이를 흘러가는데, 박산, 영암, 구락등지에 평지가 형성되었다. 덕우리에 농기구 공장이 있었다.
덕우리에 지석묘, 남점산성지(南岾山城址), 여계산성지(餘界山城址), 심원사(心源寺), 강선대(降仙臺), 왕림천(王臨泉), 소식현(少息峴)등이 있었다.
군면리 대폐합 때 연탄읍(덕우리 + 구락리 + 미산리), 월룡리(구룡리 + 월이리 + 영암리), 금봉리(박산리 + 인훈리 + 장평리)로 개편되어 연탄군에 편입되었다.
1953년 송죽리의 일부가 연탄읍에 편입되었고 연탄읍과 금봉리 일부에서 미산리가 복구되었다. 그리고 금봉리는 성산리 일부를 흡수했다. 1967년 여이리, 봉재리의 일부가 월룡리에 편입되었다. 1981년 월룡리와 풍답리의 일부를 편입했다.
도치면[편집]
都峙面
면적 81.80㎢. 면 소재지는 도치리.
도치리(都峙里), 노동리(蘆洞里), 성동리(城洞里), 상산리(商山里), 가와리(加瓦里), 대송리(大松里), 금송리(金松里)의 7개리를 관할했다.
언진산맥의 여맥이 뻗어내려 남쪽에 보명산, 약수산(藥水山, 541m), 횡기산(橫氣山, 595m), 가마봉 등이 동서로 연이어 솟아 있는데, 그 여세가 서북으로 뻗어 군장산을 이루고 면내로 뻗어내려 무설산(舞雪山, 461m)이 솟아 남부는 대체로 산악지대를 이룬다. 북부지역은 황주천수계의 평야지역이다.
군면리 대폐합 때 봉산군 오봉리에 편입된 성동리 일부, 봉산군 독정리에 편입된 상산리 일부를 제외하면 성산리(노동리 + 임산리 + 성동리 일부 + 상산리 일부), 칠봉리(도치리 + 가와리 + 금송리 + 대송리)로 개편되었다.
칠봉리와 성산리의 일부에서 도치리가 복구되었고 남은 칠봉리가 성산리와 금봉리에 분할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인교면[편집]
仁橋面
면적 113.09㎢. 면 소재지는 소매리.
소매리(小梅里), 창대리(昌垈里), 인제리(仁濟里), 묵치리(墨峙里), 상매리(上梅里), 여이리(汝伊里), 천파리(川波里), 문수리(文秀里), 능산리(陵山里)의 9개리를 관할했다.
북쪽에는 장군산(將軍山, 272m), 삼봉산 등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이 면내로 뻗어내려 대부분지역이 200m 내외의 구릉지대를 이뤘다. 구릉 사이를 소매천이 지류로 합류, 동북부에서 내려오는 북지천과 합류해 황주천으로 들어갔다.
군면리 대폐합 때 창매리(소매리 + 창대리 + 인제리), 봉재리(묵치리 + 상매리 + 여이리), 능산리(문수리 + 천파리 + 능산리)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