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910년대

조무위키

개요[편집]

1910년부터 1919년까지의 연대.

현대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한 연대다.

강대국끼리 충돌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많은 강대국들이 좆밥이 되고 세계질서가 바뀐다.

일본령 조선[편집]

일본의 식민지가 되다[편집]

대한제국의 모든 이권을 전부 뜯어낸 일본은 한일약정각서 체결을 강요해 경찰권까지 빼앗았으며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을 포함한 경술국적 8인방이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하면서 길고 길었던 매국노들의 매국이 성사되었다.

이 조약은 일주일 후인 8월 29일에 발표되었으며 국새조차 찍히지 않은 한일합방조약을 근거로 일본은 한국을 강제병합하게 되고 이로 인해 35년 간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무단통치[편집]

일본령이 된 이후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로 개편되었으며 초대 총독으로는 기존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했다. 그는 조선 내의 모든 사회집단을 강제해산시켰으며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던 최대 단체 중 하나인 신민회를 1911년에 105인 사건을 일으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양기탁, 윤치호, 이승훈, 김구 등이 체포되었으며 이승만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일제는 헌병을 이용해 조선을 통치했으며 치안, 행정과 관련된 모든 분야가 헌병의 관할이 되었다. 교육도 제복을 입은 군인 교사들이 가르쳤다. 그리고 제1차 조선 교육령을 통해 조선인들의 고등교육 기회를 차단했다.

또한 일본의 중국 진출을 위해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이용해 조선 땅에서 수탈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철도를 부설했다.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많은 농민들의 땅을 강탈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지주들에게 넘겨주었고, 회사령을 실시해 조선인들의 기업 설립을 제한했다.

1912년에는 조선 태형령을 제정해 일본인이 마음껏 조선인을 흠씬 팰 수 있도록 했고, 1914년에는 부군면 통폐합을 통해 조선을 수탈하기 쉽도록 했으며 1915년에는 마지막 조선의 의병을 토벌해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다.

해외에서 싸우는 독립군과 일제 무단통치 체제의 쇠퇴[편집]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해외로 나간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중국이나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했는데 이회영과 6형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붇고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했으며, 191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일제라는 가장 큰 적이 있었던 데다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많은 왕정 국가들이 몰락하고 공화정으로 바뀌어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수는 급격히 줄었고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공화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1916년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되자 차기 총독으로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부임했는데, 그는 적어도 강경하기라도 했던 전임과 다르게 너무 무능한 통치를 벌였다.

3.1 운동의 발발[편집]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주의가 조선에도 확산되고 독립운동가들도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로 조금씩 나뉘기 시작했다. 1918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세계에 새로운 질서가 성립되었고,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이듬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조선 내에서도 스스로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당시 조선 내에서는 스페인 독감이 심각하게 유행하고 있었으며 무능한 총독을 가진 총독부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많은 사망자를 냈다. 이 독감은 조선을 크게 흔들었으며 독립 여론은 더욱 고취되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독감이 종식되어가던 1919년 1월 21일, 우리나라를 말아드셨던 고재앙이 마침내 사망했다.

당시 고종 독살설이 조선 전역에 퍼지고 있었고, 조선 백성들은 일제에 대해 분노해 먼저 일본 도쿄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런 상황을 대처할 능력이 없었단 총독부는 단순무식하게 강경진압을 지시했고 이 과정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황은 점차 격화되었고 결국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일본 내에서까지 큰 질타를 받으며 총독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타로 사이토 마코토가 총독으로 부임했으며 총독부는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와 민족 분열으로 노선을 바꾼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 국민 의회, 상하이 임시정부, 한성 임시정부 등이 생겼는데 이들은 1919년 9월 상하이에 집결해 통합 임시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은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전신이다.

국제[편집]

협상국[편집]

일본 제국[편집]

1910년 8월 29일 한국까지 강제병합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써 전성기를 맞이했다. 옆나라인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라는 공화국이 되어서 군부는 중국 침략을 준비했는데,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반대하자 우에하라 유사쿠가에 의해 실각당했다. 이후 가쓰라 다로 내각이 출범했으나 여론이 나빠졌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호헌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독일의 식민지들을 빼앗기도 했다. 얼마 후 데라우치 내각이 출범했고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시베리아 파병을 결의했는데 이때 미곡상들이 쌀을 대대적으로 사재기해 쌀 가격이 폭등해버렸고, 결국 이에 반발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쌀 소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데라우치 내각이 실각하고 하라 내각이 출범했다. 하라 다카시 총리는 온건한 정책들을 펼쳤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불리는 민주주의, 자유주의 운동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마침 3.1 운동으로 폭발한 조선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식민지 통치 방식도 문화통치로 바꿨으나 이를 통해 은근슬쩍 친일파를 양성하는 노선을 걸었다.

청→중화민국[편집]

청나라는 헌법을 도입했으나 여전히 열강들은 이권을 침탈하고 있었고 청나라 내부도 수구주의자, 입헌주의자, 공화주의자, 민족주의자 등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 내각은 철도가 상당히 부실한 상황이라서 이를 보수해야 했는데,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각이 철도를 강제 국유화시키면서 군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대대적인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청군이 총을 발사하면서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후난성과 산시성을 시작으로 혁명이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고 우창에서 중화민국 건국이 선포되면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청군은 위안스카이를 파견해 진압토록 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청나라를 배신하고 마침 홍콩으로 귀국해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된 쑨원과 협상해 혁명군 편에 붙었다. 결국 혁명군과 위안스카이의 압박으로 청나라는 공화정을 수용했고 북양군벌이 베이징에 입성했으며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써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기존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 안에서 소조정으로써 명맥만 이어나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되었지만 위안스카이가 집권한 중국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청나라보다 더한 독재를 벌였으며 혁명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한 혁명파와 그 지도자인 쑨원은 국민당을 창당해 북양정부의 만행에 맞섰다. 국민당을 이끌던 쑹자오런이 암살당하자 결국 국민당은 들고일어나 일명 2차 혁명으로 불리는 계축전쟁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국민당을 진압한 위안스카이는 총통직에서 그만두지 못하고 황제가 되려는 시도까지 했는데, 이때 위안스카이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21개조 요구를 수용하면서 매국 행위를 했고 결국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해 중화제국을 세웠으며 위안스카이는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만행을 보다못한 국민들은 호국군을 일으켜 호국전쟁이 발발했다. 위안스카이는 서구 열강들에게 배신당했고 결국 자신이 벌인 꼬라지를 지켜만 보다가 조용히 뒈졌고 제국은 다시 중화민국으로 환원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황제 푸이를 복위시키려다 실패한 장훈복벽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돤치루이가 독재를 벌였고 남쪽의 쑨원을 비롯한 남부 세력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로 인해 호법전쟁이 발발했으나 남북 화의가 결렬되고 남북 모두 서로 분열이 일어나면서 종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독일의 중국령을 모두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하자 중국 전역에서 5.4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이 창당되었다.

러시아 제국→러시아 공화국[편집]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이어나가며 슬라브 국가들을 지원해주고 있었으며 특히 세르비아와 친하게 지내 발칸 반도로 진출하려던 오스트리아를 자극했는데,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암살하며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전면 침공하자 1914년 8월 2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

이에 질세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했고 삼국 협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한편 당시 러시아의 국력은 상당히 소모된 상태였고 독일군이 꽤나 강력해 러시아의 영토까지 뜯기자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러시아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화폐를 양산했고 덕분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러시아의 경제는 그야말로 개작살이 났다.

러시아 곳곳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그를 진압해야 할 군인들마저도 열악한 경제 상황에 못 이겨 같이 파업을 할 정도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결국 1917년 3월 8일 군경, 시위대 모두가 들고일어나면서 2월(또는 3월) 혁명이 일어나 3월 12일 노동자 소비에트가 결성되고 3월 17일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러시아 제국이 멸망했다.

공화국이 된 러시아는 소비에트가 이끌었는데 초기에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볼셰비키보다 온건파인 멘셰비키가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사회적으로는 차르 전제주의에 억압되어오던 것이 한순간에 자유를 얻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고 전쟁, 기아, 노동자 착취 등 해결할 일들은 산더미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정부는 끝까지 독일과 전쟁을 이어나가자는 주장을 했고, 이 틈을 탄 볼셰비키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귀국해 4월 테제를 선포했다. 그의 발언은 지나치게 극좌적이라서 같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케렌스키 내각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 때문에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극단적인 볼셰비키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트로츠키가 10월(또는 11월) 혁명을 일으키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했고, 이에 반발한 멘셰비키들과 볼셰비키의 독단적 조치에 반발한 사회주의자들까지 전부 백군을 창설해 볼셰비키와 맞서 싸우면서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적군은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녹군 등의 멘셰비키 좌파들까지 포섭했으며 백군은 협상국, 동맹국 상관없이 적군에 반발하는 세력, 러시아에 반감을 갖고 있던 폴란드, 핀란드 등을 포섭했다. 내전 초기에는 적군이 백군에게 밀렸으나 적군이 동맹국과 휴전을 맺었고 레프 트로츠키가 군제를 재편하고 반격하면서 백군이 역관광당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왕국[편집]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원래 동맹국이었으나 식민지 운용을 위해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과 프랑스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었던 이탈리아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중립 여론을 무시하고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협상국 편에 참전했고, 바보병신 이탈리아 아니랄까봐 오스트리아에게 여러번 발렸다.

물론 이탈리아는 승전국으로써 이기기는 했으나 피로스의 승리로 끝났고 실제로 얻어먹은 콩고물은 거의 없었다. 되려 전쟁 동안 얻은 손실만 훨씬 막대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서는 전체주의가 퍼지게 된다.

프랑스[편집]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럽던 도중 1914년 8월 3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프랑스도 제1차 세계 대전에 끼어들게 되었다. 1914년 12월 25일 기적적으로 크리스마스 휴전을 이끄는 데 성공했으나 평화는 얼마 후에 다시 깨졌고 프랑스 전선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가장 치열한 곳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프랑스 동맹은 솜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크게 패배했으나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전황은 완전히 뒤바뀌었고, 결국 독일의 국력이 소모되어 패전하자 프랑스는 자연스레 승전국이 되었다.

종전 이후 1919년 1월 4일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고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독일에게는 가혹한 조건이었으나 당시 프랑스가 입은 손실도 막대했기에 이와 같은 결론이 났다. 하지만 이 가혹한 조약은 훗날 독일이 나치로 역변하는 계기를 만들어놓는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 볼셰비키 배척을 강령으로 내세운 알렉상드르 밀랑의 블록 나쇼날이 정권을 잡았다.

영국[편집]

에드워드 7세 사후 조지 5세가 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이 무지막지한 산업력으로 영국의 해군력을 추월할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 법에 따라 영국 해군력은 세계 2위와 3위 해군력의 합보다 더 강해야 했고 독일에 의해 밸런스가 작살나려 하자 영국은 해군 양성을 더 많이 하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독일도 해군을 양성하면서 영국과 독일 간의 군함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영국의 해군력이 강해지면서도 대신 국력은 줄어들고 있었고, 그러던 와중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자 영국도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끼어들었다. 이때 일본이나 아라비아 반도 토후국들처럼 영국과 동맹이나 전쟁 관련 조약을 맺은 나라들은 영국을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

초기 영국은 동맹국의 지나치게 강력한 방어를 뚫지 못하고 갈리폴리 전투, 솜 전투 등에서 여러 차례 패했다. 독일군은 무제한 잠수함 공격과 체펠린 공격으로 영국을 괴롭혔지만, 탱크까지 개발해 독일을 쳐들어온 영국의 강력함이 드러나 결국 독일이 패배했다.

한편 승전국이 된 영국은 이미 아랍인들과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기로 했는데, 당시 유럽에서 드레퓌스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반유대감정이 극에 달해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발 붙이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영국의 부유층을 차지하던 유대인들은 유럽을 떠나야겠다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결국 영국 정부의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를 세우기로 결정되자 아랍인들의 반발이 매우 커졌다.

또한 전쟁 도중 영국은 막대한 국력 소모를 겪은 한편 세계대전 특수로 급성장한 미국이 영국을 따라잡으면서 영국의 세계 최강국의 지위가 조금씩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미국[편집]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이 공화당의 의원들과 사사건건 충돌해서 정책을 밀어붙이지 못했고, 결국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공화당 내 자기 파벌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선거에 출마하며 대통령 출마는 2번만 해야 한다는 '국룰'을 깼다며 루스벨트는 루스벨트대로 욕먹고 태프트는 무능하다고 욕먹으며 어부지리 효과를 본 민주당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재임 도중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미국은 참전하지 않고 협상국에 무기를 팔면서 전쟁 특수를 보고 있었고, 이로 인해 미국 산업은 영국을 조금씩 추월해가고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군이 미국 여객선을 침몰시키면서 미국 전역에서 반독일 여론이 형성되었고, 결국 미군이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압도적인 산업력으로 독일을 작살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후에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으며, 이는 비록 승전국 식민지에게 적용되지 않기는 했지만 세계적인 독립운동의 물결을 이루어내 훗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들이 연달아 독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의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해 울워스 빌딩과 같은 초고층 마천루들이 잇따라 들어섰고 대중문화 또한 발전하면서 네온싸인의 시대, 즉 광란의 20년대가 열렸다.

동맹국[편집]

오스만 제국[편집]

메흐메트 5세가 술탄으로 즉위했지만 실권은 청년 튀르크당이 쥐고 있었고, 이들은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그 좆병신인 이탈리아에게도 쳐발리자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이 단단히 병신이 되었다고 판단,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군은 힘도 못 쓰고 연패했으며 결국 휴전 협상에 들어갔으나, 이를 틈타 오스만 내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이스마일 엔베르가 집권했다. 이를 빌미로 발칸 국가들은 다시 오스만을 털었고, 결국 런던 조약을 통해 오스만은 이스탄불 부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발칸 반도 영토를 상실했다.

하지만 승전국인 발칸 국가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는 결국 불가리아가 발칸 국가 중에서 왕따가 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결국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하며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났으나 되려 발칸 국가들은 오스만까지 끌어들여 불가리아를 두들겨 팼으며, 부쿠레슈티 회담을 통해 불가리아 영토는 심각하게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오스만과 두번이나 맞장을 떴던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적이 되었고 동시의 러시아의 적이 되었다. 당시 오스만은 러시아를 싫어했고 이 때문에 오스만과 불가리아가 공동의 적을 두게 되었고 마침 오스만의 동맹인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오스만 제국도 덩달아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 편으로 참전했고, 이듬해 불가리아가 오스만의 편을 들어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 중에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벌이며 잔혹한 전쟁범죄를 많이 저질렀다.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해왔으나 오스만 군은 의외로 이들을 잘 막아냈는데, 갈리폴리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활약한 덕에 영국과 프랑스군을 처참하게 격파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친구를 잘못 뒀다는 데에 있었고 결국 독일과 오스트리아라는 최악의 친구를 만난 오스만은 영국군이 이집트를 통해서 오스만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가자 결국 항복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독일도 연달아 항복했고 넷 다 패전국이 되었다.

독일 제국[편집]

독일은 세계 정책을 표방하며 갈수록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국의 반발을 사 영국과 독일 간의 해군력 군비 경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자 독일은 삼국 동맹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러시아와 그 동맹인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해 점령했으며 이는 영국이 독일을 침공하게 만드는 명분이 되었다. 이후 독일은 양면 전선에 놓였으며 초기에는 독일이 양 전선에서 모두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진격이 막히자 독일군은 참호를 파서 참호전을 시작했다. 협상국도 참호를 파서 아주 긴 기간 동안 대치했다.

중간에 크리스마스 정전 같은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잠시뿐이었고 서부전선에서의 정체되어가는 전쟁은 많은 손실을 낳았다. 하지만 독일이 미국인이 탑승한 민간 여객선들을 여러 번 침몰시킨 데다 멕시코에 미국을 침공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가 미국에게 들켜버리는 바람에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미국은 전쟁 특수를 통해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미국을 건드린 죄로 엄청난 양질의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러시아가 혁명으로 나가떨어지자 한숨 돌리고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결국 협상국의 맹공을 버티지 못한 동맹국들은 대부분 떨어져 나갔으며 독일 내에서도 반전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러던 와중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독일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11월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빌헬름 2세는 퇴위 후 네덜란드로 망명, 제정이 붕괴하면서 독일 제국이 멸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당시 독일군은 독일 영토 내에 협상국의 군대를 전혀 들이고 있지 않았는데도 항복 선언을 하며 패전하자 독일 전역에서 분노와 의심을 샀다.

패전한 독일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을 협상국과 체결했으며, 이를 통해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게 뜯기고 모든 식민지를 일본, 영국, 프랑스 등에게 빼앗겼으며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이 이외에도 많은 권리들을 강탈당했다. 하지만 당시 피폐해진 독일의 입장에서 배상금을 갚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국 독일에서는 공산주의, 전체주의, 파시즘과 같은 사상들이 퍼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편집]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민족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소하고 오스트리아를 여러 민족의 연방으로 재구성하자는 입장을 보였으나 이는 범슬라브주의 신봉자들에게 좋게 보이지 못했고 결국 범슬라브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며 파국이 일어났다.

분노한 오스트리아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세르비아와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속했던 검은 손 간의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며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세르비아는 그 중 일부만 제외하고 다 수용하기로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전부 수용하지 않으면 세르비아를 침공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최후통첩 기간이 끝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세르비아의 뒤를 봐주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동맹 독일 제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함과 동시에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와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다. 영국은 중립국 벨기에가 침공당한 것을 명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번졌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불가리아, 오스만과 동맹해 협상국과 싸웠지만 삼국 동맹 중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협상국 편에 붙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간에 이손초 전투가 벌어졌다. 한편 세르비아는 국토 전체가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갔다. 전쟁 도중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카를 1세가 카이저로 뒤이어 즉위하자 오스트리아 내의 병폐와 악습들을 처리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친구 독일이 미국에 시비를 털다가 미국을 참전하게 만드는 바람에 미군은 엄청난 물량으로 동맹국을 공격했으며,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자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고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군에게 쳐발리는 사건이 터지자 결국 항복했다.

카를 1세는 1918년 10월 31일 헝가리 황제에서 물러났으며 11월 16일 오스트리아 황제 직까지 내려놓으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스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다민족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또한 생제르맹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정식으로 해체되면서 프랑크 왕국 대에서 이어져내려온 신성 로마의 황제의 직계로써 유럽을 상징하던 제국이 완전히 소멸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알프스 산맥과 빈 일대만 통치하는 소국으로 쪼그라들었으며 공화국이 되었다. 독일과의 동맹이나 병합이 금지되었으며 군비도 축소되었고 신분제가 영구히 폐지되어 황족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했다. 엄청난 혼란을 맞은 독일과 다르게 오스트리아의 경우 기독사회당의 주도로 그나마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이어나갔다.

에스파냐 왕국[편집]

스페인의 의회 제도가 흔들리며 국왕 알폰소 13세의 입지도 불안해졌다. 세계가 제1차 세계 대전을 맞이하자 중립을 선언하고 인도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전쟁 특수를 보고 여론을 무마했지만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해져서 아나키스트들의 파업이 일어나는 등 다시 혼란이 일어났다. 알폰소 13세도 독재를 재개하려 하면서 다시 욕을 먹게 되었다.

문화[편집]

기술적으로는 자동차의 발전이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이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생물학적으로는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에 퍼지며 제1차 세계 대전 종식에 영향을 끼치는 등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세계대전의 여파로 세계 문화의 주도권 또한 피폐해진 유럽에서 급성장하던 미국으로 넘어갔다.

노래[편집]

음악의 주도권은 기존의 유럽과 영국에서 미국으로 점차 넘어가는 추세였고 서양식 멜로디를 흑인풍으로 연주한 래그타임이 유행했다.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초창기 형태의 재즈가 등장했고 컨트리 장르도 성장했다.

영화[편집]

영상매체의 수요가 늘어나며 흑백 무성 영화들이 대폭 성장했고, 파라마운트 픽처스유니버설 픽처스와 같은 영화사들도 등장했다. 찰리 채플린 같은 희극인들이 무성영화판에서 몸짓 연기의 특성을 살려 슬랩스틱 영화가 유행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1910년대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