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부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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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대첩을 이끌었거나, 그에 준하는 쾌거를 이룬 세계 각국의 명장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인물은 의로움과 지혜, 문무까지도 겸비하여 진정한 군인, 무인(武人)이라 할 만한 인물이기에 가히 본받을 만한 행적은 본받는 게 좋습니다. |
“ | 전술적 탁월함에 있어서는 한니발과 스키피오에 버금가며 책략가로서는 알렉산더,카이사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 ” |
— 리처드 A.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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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은 수부타이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 까지“32개의 민족을 정복했고 65차례의 대격전에서 승리했다”고말한다 . | ” |
— 리처드 A.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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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한 원정 범위를 자랑하는 몽골제국 최고의 지휘관 중 하나
개요[편집]
몽골제국의 개국공신 사준사구(四駿四狗) 중 한 명이며 세계사에서 손꼽을 만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명 그가 정복,원정,격파,공격 한 네임드 부족,나라,기사단은 대략 몽골의 수많은 부족들,금나라,송나라,서하,고려,서요,호라즘,쿠만족,조지아,알란족,러시아의 수많은 공국들,헝가리,폴란드,템플 기사단 등이다
생애[편집]
우랑카이족 출신으로 1175년에 태어나 1187년쯤 형젤메와 함께 테무친 진영에 합류하며 1197년에 100명가량의 소규모 백호를 지휘했으며 메르키트족을 공격했다.
1204년에 나이만족과의 전투에서 천호를 맡았으며 차키르마우트전투에서 큰공을 세운다.
금나라 정벌[편집]
1211년 칭기즈칸의 금나라정벌군 9만~12만 중에서 1만 명을 맡게 되며 1214년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만주를 급습하는 도중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 서경 변두리까지 도달했다가 물러간다.
서 정복~호라즘 정벌[편집]
1217년 칭기즈칸은 무칼리에게 금과의 전쟁을 맡겨두고 몽골로 돌아와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각각 2만명의 군사를 주고 서요정복을 명령한다.결국 1218년 제베는 서요의 왕 쿠츨루크를 참수한다.
1218년에 칭기즈칸은 호라즘의 모욕적인 행위와 한영주에 많은 상인들의 처형에 분노하여 약 7.5~20만명(10~15만이 현실성 있다)에 군사를 이끌고 호라즘 정벌에 나선다.
참고로 호라즘의 병력은 약 40만명이다.
1220년 칭기즈칸은 제베,수부타이,토쿠차르에게 각각 1만명의 병사를 맡기고 샤를 추격하라 했다.
그러면서 수부타이에게“그를 생포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마라.그대 앞에서 달아난다면 그가 갔을 만한 곳을 모두 뒤져 끝까지 쫓아가라.그대에게 항복한 마을은 그대로 두되,가는 길을 방해하거나 저항한다면 가차 없이 파괴하라”라는 말을 덧붙였다.참고로 토쿠차르는 칭기즈칸의 명을 어기고 항복한 마을을 약탈했다가 사병으로 강등 당하고 지휘권은 수부타이에게 간다.
샤는 결국 카스피 해 외딴섬까지 도망가 배고픔에 죽는다.칭기즈칸은 호라즘의 나머지 땅을 정복을 위해 수부타이와 상의가 필요하다 생각하여 수부타이를 부른다.수부타이는 칭기즈칸가 상의를 한 후 다시 카스피 해 야영지로 돌아가기전 수부타이는 그 주위를 정찰한 후 몽골로 돌아올때 킵차크로 온다고 칭기즈칸에게 제안한다. 칭기즈칸은 괜찮은 의견이라 생각하여 출정을 허락한다.
조지아 침공~몽골 귀환[편집]
1220년 여름 수부타이의 군대는 2.5~3만명 정도의 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부타이는 군사들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으로 진입 수도인 타브리즈로 향해 총독에게 많은 양에 공물,군수품,말을 바치지 않으면 도시를 불태우겠다고 협박을 해 총독은 순순히 따르며 공물,군수품 등을 바쳤다.그리고 쿠르드족을 수천명 모집한다.
1221년 수부타이의 군대는 쿠라 강과 캅카스 산맥을 정찰하는 중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조지아의 왕 게오르그 4세는 언젠가 타브리즈 총독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 생각하여 약 6~7만명의 기사단을 이끌고 이를 저지하러 간다. 두 군대는 쿠라 평원에서 맞붙지만 게오르그 4세는 대패하여 달아났고 제베는 티플리스로 가 성으로 도망가지 못한 기사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수부타이는 아제르바이잔으로 군대를 철수시킨다. 늦가을 전투태세를 취하는 군대가 거의 없어졌을 때 데르벤트로 향한다. 이 소식을 들은 게오르그 4세는 대군을 이끌고 몽골군의 진군을 막으로 나선다. 하지만 게오르그 4세는 패배하여 호위병만 이끌고 탈출하였으며 나머지 군대는 전멸하였다. 이 두 전투로 조지아는 약 10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한동안 산적과 강도에 시달린다.
수부타이와 그의 군대는 시르반의 샤 라시드가 있는 성을 포위한다. 라시드는 수부타이와 협상하여 보급물자,식량,산악 안내인을 제공하기로 하고 침략을 막아낸다. 수부타이가 안내인들에 안내를 받아 테레크 강에 도착했을 때 그 아래 평원에서는 약 5만 명의 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 군사연합을 주도한 것은 쿠만족으로 호라즘과에 전투에서 학살당한 캉글리와 혈족이자 조지아 왕실 기사단이다. 즉,쿠만족은 몽골에게 복수하기 위해 수많은 부족과 연합을 하여 몽골군을 막기 위해 출정했다. 하지만 수부타이는 꾀를 내어 이 위기를 타파했는데 쿠만족에게 밀사를 보내 쿠만과 몽골은 초원의 형제임을 강조하고 우리의 진정한 적은 무슬림과 기독교인임을 강조한다. 쿠만의 파견대는 몽골의 말과 뇌물에 설득되어 떠나가려 하지만 수부타이와 제베는 그들을 쫓아가 괴멸시켜버리며 포로들을 모조리 처형시키고 뇌물들을 되찾는다.
아스트라한에 도착한 몽골군은 아스트라한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그리고 나서 수부타이는 군사들을 쉬게 하며 보급 물자를 보충하였다.
1222년 가을과 초겨울 쿠만족의 족장 쿠텐은 러시아에 가 힘을 합쳐 몽골군을 물리쳐야 한다며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호소는 1년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하지만 몽골군이 드네스트르 강 을 따라 행군하고 있으며 그곳의 민가를 초토화 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갈리치아의 대공 므스티슬라프 흐라브리가 다른 대공들을 설득하여 몽골군을 차단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볼리니아,쿠르스크,키예프,체르니고프,수즈달,로스토프의 대공들이 군사를 보내 연합하였고 이 군대는 약 7~8만에 육박했다. 몽골군을 후퇴하였고 연합군을 추격하였다.추격을 하며 러시아군은 허약해져 같고 몽골군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지형으로 진입하면서 수부타이가 우세해지고 있었다.
1223년 5월 31일 칼카 강 서쪽 기슭에 강을 등진 채 전투태세를 취한 몽골군 앞에 러시아 선봉부대가 좁은 골안으로 들어와 나타났다. 선봉대는 나머지 분견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정면공격을 지시했다.이때 진이 빠진 쿠르스크,볼리니아 군사들이 도착해 공격에 가담했다.몽골의 경기병대는 화살 공세를 퍼푸었고 쿠만군과 갈리치아군 사이에 빈틈이 생겼다.몽골군은 화로를 던졌고 연기가 드리우자 경기병대는 공격을 중단했다.혼란에 빠져있는 두 분견대 사이에 벌어진 빈틈으로 몽골의 중기병대가 돌진했다.쿠만군은 공포에 질려 후방으로 도망갔고 그때 뒤늦게 공격에 가담한 쿠르스크와 볼리니아 분견대는 틈을 벌려 쿠만군을 지나갈 수 있게 했지만 몽골의 중기병대가 그 틈으로 돌진에 세 분견대를 공격한다.
상황을 모르고 전장으로 오던 체르니고프군은 도망가던 쿠만군과 정면으로 충돌하자마자 몽골군에 공격을 받게 되었다. 후퇴하던 군대들은 나중에 오던 키예프 대공의 군대 사이로 뛰어갔으며 수즈달의 군사들은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끝나였다. 약 2만3천의 몽골군의 의해 약 4만 명의 러시아군을 괴멸된다. 그리고 후퇴하는 연합군의 후방을 지키던 키예프의 분견대를 전멸시킨다. 결국 연합군은 약 5~7만5천명의 전사자를 낸다. 몽골군은 드네프르 강 근처 마을을 약탈 및 학살하고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주치의 군대와 연합하여 불가르족 공격하고 우랄 산맥 부근에 있던 캉글리칸과 그에 군대를 공격하여 전사 시킨다.그 후 몽골로 돌아온다.
금나라 정복[편집]
수부타이는 오고타이를 설득하여 금나라 정복을 개시한다.
1232년 카이펑부를 공격하여 1233년 함락시킨다.
근데 여기서 유일한 패배를 당하는데 금나라 마지막 불꽃 완안진화상이 지키는 도화곡을 공격했다가 발리고 역으로 추격까지 당해 빤쓰런 쳤다.
가끔 몽뽕들이 '도화곡 지휘관이 수부타이였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며 수부타이를 불패명장으로 믿고싶어 하는데, 미안하지만 금사/원사/송사 무려 3개의 1차 사료를 통해 수부타이가 도화곡 지휘한게 맞고, 빤쓰런 쳤고, 그 일로 오고타이한테 갈굼먹고, 옆에 있던 툴루이가 애 기죽이지 말라며 실드쳐준 기록까지 싹다 확인된다.
러시아 정벌~헝가리와의 전쟁[편집]
1236년 바투와 수부타이의 원정대는 약 3만5천 또는 15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한여 우선 불가르 왕국을 파멸시키고 쿠만족을 공격하였으며 그 후 그곳에서 군사를 모아 7~8만 또는 약 20만명으로 늘렸다.
1237년 랴잔을 급습하여 초토화 시켰고 콜롬나,로스토프,야로슬라블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1238년 블라디미르를 공격했다. 바투는 수부타이의 지시로 노브고로드로 향하는 중에 드미트로프와 트베리를 파괴했으며 노브고로드를 공격하고 북부 러시아 공국들은 무력하되었다. 1240년 군사를 보충한 수부타이는 남부 공국으로 쳐들어가 체르니고프,페레야슬라프를 멸망시켰으며 11월~12월 키예프를 함락시키고 볼리니아와 갈리치아를 초토화시킨다.결국 귀족들은 폴란드와 헝가리로 달아난다.
수부타이와 바투는 3만또는 7~7만5천 또는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헝가리 침공에 나선다. 1241년 3월 헝가리 정벌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몇만 명의 군사들을 보내 폴란드를 침공시킨다. 1241년 3월초 헝가리의 왕 벨라 4세는 2만5천 또는 8~10만의 병사를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하러 행군을 시작한다.
4월 11일 셔요강에서 두군은 맞붙는다.몽골군은 이때 2.5~3만 또는 약 7만 정도로 추정된다. 수부타이는 야간에 강을 도하하여 측면을 공격하였다. 수부타이는 거짓 활로를 만들어 두었고 헝가리군은 그곳으로 도망가였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몽골군은 추격하였으며 기병 부대들이 임무를 완수하였다. 그 후 몽골군이 빈을 정찰하고 있을 때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수부타이는 쿠릴타이를 위해 카라코룸으로 돌아간다.
죽음[편집]
몽골로 돌아온 후 바투와 귀위크의 권략 다툼에 진저리가 나 톨강(다뉴브 강이라는 소리도 있다)에서 여생을 보냈다.
평가[편집]
리델 하트는 나폴레옹의 병참술을 세계 최고라고 했으며 수부타이가 그에게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은 32개의 민족을 정복했고 65차례의 대격전에서 승리했다고 말했다.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수부타이가 유럽을 정복했을 거라는 건 논쟁 거리다.
몽골비사에서는 용맹한 수부타이라고 부른다.
65번의 전투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은 진짜 굇수이다는 몽뽕 망상이고 완안진화상한테 졌고 볼가 불가르 왕국에게도 진적 있는데 볼가 불가르는 좀 논쟁거리고 완안진화상에겐 빼박으로 발렸다. 그래도 전쟁사 역대급 명장인건 맞긴하다.
아씨발 내용추가하려했는데 다써놓고 실수로 새로고침 눌러서 ㅈ망했네 엠창
참고[편집]
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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