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시
조무위키
이 문서는 석기시대에 대해 다루거나 석기시대가 될 대상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커티스 르메이 성님께서 나서야 할 문서이거나 좋아하실지도 모르는 문서입니다. 일단 선사시대로 갈 타임머신을 준비해 주세요. |
주의!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망했습니다. 이 문서와 상관있는 분들은 벌써 망했거나 곧 망합니다. 벌써 망해서 더럽게 재미없거나 매우 혐오스러운 내용을 담습니다. 이 문서와 관련되어 인생 망치기 싫으면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
이 문서에는 바다 냄새가 납니다. 또한 바다는 모든 걸 바다줍니다. 파닥! 파닥! |
함경도의 행정구역 | ||||||||||
함경북도 |
자치시 | 청진시 · 나진시 · 성진시 | ||||||||
자치군 | 경성군 · 명천군 · 길주군 · 학성군 · 부령군 · 무산군 · 회령군 · 종성군 | |||||||||
경흥군 · 경원군 · 온성군 | ||||||||||
함경남도 |
자치시 | 함흥시 · 원산시 · 흥남시 | ||||||||
자치군 | 함주군 · 정평군 · 영흥군 · 고원군 · 문천군 · 안변군 · 홍원군 · 북청군 | |||||||||
이원군 · 단천군 · 신흥군 · 장진군 · 풍산군 · 삼수군 · 갑산군 · 혜산군 | ||||||||||
참고 | 참고: 한국의 행정구역·밑줄: 도청소재지 |
개요[편집]
ㄴ 씨발 존나 칙칙하네
ㄴ 저거 죄다 1955년 이후에 건설된 건물들이라는데 페인트칠을 하나도 안 해놔서 존나 칙칙하다.
연혁[편집]
1878년 개항 이전까지의 역사는 덕원군을 참조.
1878년 4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군은 부산, 인천과 함께 이곳을 개항장으로 설정했고, 1880년 7월 정식으로 개항되어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인이 살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이후 원산에 이사청(理事廳)이 설치되고 일본인 거류민단이 조직되면서 일본인 거주지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원산에 살던 한국인들이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원산학사를 세웠다.
본래 원산 일대 개항장만 원산부로 분리되었던 모양새였는데, 모종의 사건으로 덕원군 전체가 원산부에 통폐합되었다. 이후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는 다시 개항장 지역만 원산부로 분리하고 덕원군이 부활했다. 1914년 8월, 경원선이 개통되어 동해안의 풍부한 수산물, 농산물, 광산물이 서울로 빠르게 운송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고 이후 1927년 동해북부선, 1928년 함경선, 1941년 평원선이 순서대로 개통되면서 관북 지역 최대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본래 지금의 옥천군과 같은 물류 창고가 가득한 운송도시였지만 만주사변 이후 원산에 수없이 많은 공장이 세워지면서 당대 노동자와 자본가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일부 친일 자본가들 중엔 원산의 공장을 소유하여 떼돈을 버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온통 공장 천지였으며 그 방대한 공업단지 덕분에 초창기 북한이 잘 살 수 있었다. 김씹새가 이렇게 쩔어주는 공업단지만 똑바로 굴렸으면 북한은 아마 못살아도 동유럽 수준으로 ㅍㅌ치는 동네가 됐을지도... 그리고 공장이 깔리면서 도시가 커짐에 따라 1942년, 덕원군이 폐지되고 적일면, 현면이 원산부에 흡수되었다.
소련군정이 수립되면서 공산군 치하로 넘어갔는데 당시 분계선이었던 38선 이북에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였던 철원이 전방으로 변하자 강원도의 병신화를 막기 위해 원산을 필두로 하여 고원군 이남의 3군이 강원도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김씹새는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욕심에만 눈이 멀어서 6.25 전쟁을 일으켰고 이때부터 공업단지였던 원산은 미군의 잇따른 네이팜탄 폭격으로 인해 불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초창기엔 정유공장과 같은 공단만 불태웠기 때문에 피해는 덜했다는듯?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했을 때, 상륙작전뽕이 치사량에 달했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로 갔던 10군단을 다시 배에 태워 남해안 찍고 원산까지 재상륙시킨다!는, 보통 지휘관이었으면 바로 총살당했을 막장스런 북진안을 내놨다. 때문에 서울에서 먼저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북진한 국군 1군단은 1950년 10월 14일 원산을 수복한 뒤 10월 29일까지 금 같은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암튼 10월 29일 원산에 상륙한 미 10군단과 함께 국군 1군단은 원산을 넘어 문천, 고원, 수동, 영흥, 정평 찍고 함흥을 넘어 함경도로 진격했다.
하지만 청천강 전투에서 국군 2군단과 미군 8군단이 참패하면서 생긴 공백을 따라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했고 결국 이때부터 다시 빨갱이 치하로 넘어갔다. 결국 함흥과 장진에서 고립된 국군과 미군은 수만 명의 피난민과 함께 배를 타고 철수했다.
배를 타고 철수한 유엔군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원산을 향한 무차별 폭격을 진행했다. 이 무차별 폭격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1953년 7월까지 이뤄졌는데 이 폭격으로 인해 원산은 피지 뽑고 난 뒤 구멍 난 코처럼 삭제당했다. 얼마나 폭격이 대단했는지, 1951년 기준으로 이곳에 12시간 이상 머무르거나 잠을 자는 것은 사망을 의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가 살아남은 덕원신학교 같은 극히 일부의 건물을 제외하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북괴 수립 이후[편집]
1955년부터 원산은 재건을 시작했는데, 이때 북괴는 공산권의 지원을 받아서 원래보다 더 큰 규모의 공업 단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1980년대 말까지 원산은 호황을 누렸지만 전기 수급이 본격적으로 파탄 난 80년대 말부터는 장마당밖에 남지 않은 병신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현재 원산에서 예전처럼 잘 돌아가는 시설은 돼정은이 딜도 발사장으로 쓰고 있는 갈마반도의 갈마비행장밖에 없다.
기후[편집]
냉대기후일거 같지만 기후 데이터를 보면 1월의 평균기온이 -3℃를 넘는다. 따라서 원산은 온대기후이다. Cfa인지 Cwa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쪽으로 분류가 되든 어차피 여름에 비 많이오고 겨울이 건조하기 때문이다.
겨울은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고 여름은 서울보다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