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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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문재앙의 부모가 탑승함.
6.25 전쟁 중 장진호 전투로 피똥 싸면서 간신히 중공군 포위망을 탈출한 유엔군이 흥남 항구를 통해 10만여 명의 민간인과 함께 남한으로 철수한 사건.
중공군이 남쪽의 원산을 먼저 점령하는 바람에 육로가 사실상 막혀서 흥남 항구가 유일한 탈출로가 됐다.
이때 대한민국 육군, 미국 육군, 피난민을 후퇴시키기 위해서 흥남 항구로 가는 길목의 뒤를 미국 해병대가 아주 피똥을 싸가면서 막고 있었다. 북괴 치하에 들어가면 좆되는 피난민들도 필사적으로 여길 통해 빠져나가려고 하여 아수라장이었지만, 유엔군이 머국적으로 피난민들도 같이 살리자고 말하면서 무기보다 사람 수송을 먼저 중시하며 태웠다.
ㄴ 사실 현봉학 성님이 살려야 한다고 드러누웠던 것도 한몫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피난민들을 태우느라 선박에 싣지 못한 장비들을 원산항에 가지런히 모아놓은 다음 함포 사격으로 전부 박살냈다. 저 장비들이 중공군의 손에 넘어가면 안되기 때문에 다 때려 부순 거다. 피난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유엔군 선박 외에도 민간 선박들 역시 피난민들을 대거 태워 대피 시켰다.
대부분의 선박들이 사람을 마구 쑤셔넣은 탓에 대부분 정원 초과가 되었으며 특히 선박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기네스북에도 '단일 선박 최다 인원 탑승'으로 기록된 '메러디스 빅토리' 호. 1만 4천 명이 탔다고 한다. 이 선박에 탑승한 피난민 중 한 쌍이 문재앙의 부모 되시는 분들이다.
항해 도중에 아기 다섯 명이 태어났는데 천조국 군인들은 그 아기들에게 이름을 직접 지어줬다 카더라. 각각 '김치 원', '김치 투', 쓰리, 포, 파이브... 작명 센스 오진다.
신원이 확실한 10만여 명의 인원만 들여보냈고 나머진 공산 프락치일 수도 있다고 고려하여 안 들여보냈다.
민간인과 유엔군 탑승 및 수송이 종료된 직후 중공군이 쫓아오지 못하게 진지에 대규모 폭격 한 차례 때린 뒤 마지막엔 흥남 항구를 폭약으로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피니쉬.
이때 이산가족이 많이 생겨서 여기서 모티브를 딴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가 나왔다.
선안나 작가의 온양이가 바로 흥남 철수를 배경으로 했다.
흥남 외 다른 지역에서는?[편집]
중공군의 대공세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측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급히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상 흥남 외의 지역(주로 항만도시)에서도 철수 작전이 진행되었다.
- 함경남도 원산시: 레인 빅토리(SS Lane Victory) 호가 피난민 7,009명을 태우고 철수하였다. 안타깝게도 원산이 너무 일찍 함락되어 피난민을 더 태우고 가지 못하였다.
- 함경북도 성진시: 12월 9일 13시에 3사단 22,23연대가 미군 수송선편으로 철수하면서 작전이 종료되었다. LST 및 미군 수송선에 피난민이 12,000여 명이 탑승하여 피난 성공.
- 기타 서해안 일대: 대부분 황해도 출신들로 구성된 피난민 62,082명이 1951년 2월까지 군용선으로 피난하였다.
출처: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2.
해당 통계에 잡히는 인원들은 모두 국군, 유엔군 군용선편으로 피난하였으며 대부분 피난민 수용지에 하선하자마자 집단 수용되어 출신 시, 도, 군별로 신분 조사를 받고 방역을 거쳤기 때문에 그 수치는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1]
그리고 이들만이 아닌, 어선[2] 등 중소형 민간 선박 편으로 철수한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1] - 범선으로 진남포항에서 해주, 인천을 거쳐 군산까지 피난한 사례.
특히 국군 및 유엔군이 해공군으로 제해권을 장악한 황해도, 평안북도 서해안 일대에서는 국군 및 반공 유격대, 유엔군이 장악한 도서로 피난해 오는 일이 1953년 정전협정 이전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