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로 몽고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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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로 몽고메리 경
Sir Bernard Law Montgomery
1887.11.17~1976.3.24
영국의 장군. 2차 세계대전 당시 롬멜에게 승리한 걸로 유명한 장군이다. 그 다음은 마켓가든 작전에서 패전한 것.
처칠이 "성격 고약한 영감탱이"라고 뒷담을 깔 정도로 성격이 드러웠다고 한다. 실제로 잘되면 내덕 안되면 니탓하는 상개새끼다.
일례로 완전 자기 책임으로 발터 모델한테 털린걸 부하 탓으로 돌리고 퇴직금도 안 주고 불명예제대 시킨 후에 죽을 때까지 공장에서 막노동이나 하게 시켰다.
이런 식으로 패전 책임을 세탁한 후에 영국군 총사령관, NATO 사령관까지 승진했다.
이 인간이 쓴 책에 이순신 언급이 있다고 빨아주는 인간들이 가끔 보인다. 그러지 말자. 이 인간과 이순신 장군님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장군님께 실례다.
제1차 세계대전[편집]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 달에 몽고메리는 자기 대대와 함께 통째로 프랑스에 배치됐다. 4사단 10여단 예하로.
직후 카투 전투에 투입됐는데 몬스 지역에서 런한다.
1914년 10월 13일 몽고메리는 벨기에 국경 근처의 메테렌에서 연합 반격 작전 중이었는데 저격수에게 총알을 맞고 우측 폐를 관통당한다. 몽고메리가 안 죽은걸 본 저격수는 총알을 한 발 더 쏘는데 이번엔 무릎을 맞았다. 쇼크로 죽을 법도 한데 허파에 바람구멍 나고도 살은걸 보면 명줄이 질기긴 질기다.
1914년 12월. 리더쉽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무공 훈장을 받았다.
전간기[편집]
1919년 독일에 남은 몽고메리는 소령으로 명예진급해 라인 강에 주둔한 제 17 영국 왕실 총사대대를 맡았다.[1]
몽고메리는 당연히 장군은 달고 예편하고 싶었고 캠벌리에 있는 참모대학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쾰른의 테니스 파티에 참석해서 영국군 제국 참모총장[2] 윌리엄 로버트슨과 좆목질을 비볐다. 어찌나 좆목을 잘 비볐는지 낙하산으로 참모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21년 1월에 참모대학을 졸업하고 제17 여단 부관으로 임명된다. 이때 제17 여단은 아일랜드에 있었다. 그 때문에 1922년 5월에 아일랜드 내전이 발발했을 때 자연스럽게 반란군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3년에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가 승리하는데 몽고메리는 내전 기간 동안 공화국군이 계속해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을 보고 폭도들은 싹 다 죽이고 건물을 태우고 하는 식의 강경진압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화책으로 평화롭게 간다면 영국군이 철수하자마자 전쟁이 재발할 것이라고. 실제로 공화국군 수괴들은 합법적인 투쟁을 하겠다며 정계에 진출했고 몽고메리의 예언대로 정권을 잡은 뒤 독립국 지위로 영연방에서 탈퇴한다.
1929년 1월 몽고메리는 거의 10년만에 소령으로 돌아왔고 로얄 워릭셔 연대의 제1대대 참모로 부임했다.
1931년엔 중령으로 진급하며 로얄 워릭셔 연대 제1대대 대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934년 6월에 대령을 단다.
로얄 워릭셔 연대는 파키스탄, 인도쪽에 있는 부대였는데 1937년에 교대기간이 되어서 영국 본토로 귀환한다.
영국에선 제9 보병여단을 맡았는데 대령이 여단장을 달 수는 없기 때문에 임시준장으로 승진했다.
1938년에 수륙양용 복합훈련을 만드는데 이를 본 퍼시발 웨이벌 장군이 몽고메리를 소장으로 특진시켜줬다.
소장이니까 사단장이겠지? 팔레스타인에 배치된 제8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39년까지 아랍 반란을 진압한다. 그런데 몸이 아파서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해 4월에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소식을 듣자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을 참 즐겼는데 떠나게 되어 유감입니다."라고 개싸이코나 할 법한 말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편집]
영국에선 제3 사단을 맡은 몽고메리. 독일이 한창 폴란드를 쳐부수고 있을 때 제3 사단은 영국 해외원정군(BEF)에 편성되어 유럽으로 향했다.
그런데 독일군은 졸라 쌨고 영국군은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가 삭제당하는 참사를 피하기 위해 됭게르크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이때 제3사단은 다일 강 쪽으로 우회해 피해를 최소화하며 탈출할 수 있었다.
북 아프리카 전역[편집]
1942년 북아프리카는 롬멜이 휩쓸고 있었다. 이때 롬멜을 막고있던 영국군 중동지역 사령관은 오친렉이란 장군인데 이름 들어본 적 있는가? 없지? 그렇다. 잡장이라 롬멜에게 온 몸의 모든 구멍을 겁탈당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부하들까지 무능해서 휘하부대인 제8군은 사령관을 갈았는데 그 바꾼 사령관도 무능해서 오친렉 본인이 8군까지 지휘하고 있는 참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8월에 처칠이 중동사령부를 방문하는데 오친렉이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해롤드 알렉산더를 중동지역 사령관으로 윌리엄 고트를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었다.
그런데 고트가 카이로로 돌아가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었다.
처칠은 후임으로 누구를 임명할까 하다가 몽고메리를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었다.
몽고메리는 즉시 10군단을 재편하고 항상 30군단과 함께 싸우라고 명령했는데 10군단은 전부 기갑부대였고 30군단은 전부 보병부대였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편제였다. 독일군이나 어디 다른 군대나 보통 사단이나 군단정도 되면 자체적으로 포병부대, 기갑부대, 보병부대 등등등을 가지고 병력을 조합해서 싸우지 않는가? 그런데 영국군은 포병 따로 보병 따로 전차 따로 딱딱딱 맞춰서 부대를 짜뒀다. 그렇게 해서 보병이 포병이나 기갑에게 절대로 명령할 수 없는 체계를 만들어 뒀는데 예외가 하나 있었다. 몽고메리 본인은 모든 부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몽고메리만이 병력을 조합하고 싸우라고 시킬 수도 있었던 것.
여태껏 영국군은 육해공의 알력다툼이 너무 심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없는 전투력을 더 깎아먹었는데 몽고메리는 육해공을 전부 자신의 통제 하에 둠으로써 전투력 상승을 노렸다.
그러면서도 자주 병사들을 만나 상담도 해 주고 담배도 나눠주고 하는 식으로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데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영국군은 몽고메리가 부임한지 일주일만에 독일군에 비벼볼 수 있는 군대가 됐다.
알람 할파 전투[편집]
1942년 8월 31일 롬멜은 알람 할파에 있는 제8군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영국군은 대격전끝에 독일군을 막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은 돌아갔다. 영국군 상층부에선 빨리 독일군을 추격하여 공격하라고 닦달했지만 몽고메리는 가지 않았다. 아직 영국군의 전투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
어쨌든 몽고메리는 롬멜과의 첫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편집]
몽고메리는 모든 작전을 치밀하게 세웠다. 20만명 이상의 병력, 1,000대 이상의 전차, 빈틈없는 작전, 롬멜이 자리를 비운다는 완벽한 타이밍까지 모두 갖춰 공격을 개시했다.
1942년 10월 23일 영국군의 야포 사격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하지만 독일군 진지 앞에는 지뢰와 폭탄이 수십만발 박혀 있었고 이 지뢰밭을 포격으로 전부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뢰밭 뒤엔 대포까지 준비한 독일군이어서 더 그랬다.
10월 25일까지 병사가 6,000명, 전차가 100대 이상 파괴됐다. 이미 주공을 갈아야 할 수준의 피해였지만 몽고메리는 공격을 강행했다.
11월 2일 영국군의 제9 기계화여단이 방어선을 뚫다가 부대가 전부 갈렸다. 몽고메리는 전차 100여대를 더 꼴아박았고 롬멜은 2개 기갑사단으로 반격했다.
롬멜은 반격을 서둘렀고 이는 전차 vs 대전차포여야 할 싸움이 전차 vs 전차로 바뀌어버리는 참사가 일어났다.
롬멜은 영국군의 전차를 전부 갈아마시고 방어선의 약점을 찾으려고 계속 들이박았다. 그러나 낄끼빠빠를 실현하지 못 한 댓가로 교전이 끝났을 때 독일군의 전차는 35대 뿐이었다.
몽고메리는 전투의 길이와 사상자가 13,000명이 넘을 것이라는 점까지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추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독일군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었고 추격할 타이밍을 놓친 영국군은 오히려 독일군에게 반격까지 허용했다.
이 추격 실패는 두고두고 회자되며 몽고메리의 흑역사 생성에 일조했다.
메데닌 전투[편집]
몽고메리는 이 승리로 2등급 기사 훈장을 받고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3년 3월 초. 몽고메리는 메데닌에 주둔중이었다. 이 때 롬멜이 메데닌에 직접 공격을 가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몽고메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기지를 요새화하고 대전차포를 깔아 공격에 대비했다.
3월 6일 롬멜이 공격했고 영국군은 독일군 전차가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대기했다가 사격했다. 안 그래도 모자란 독일군 전차는 큰 타격을 입었고 야포 때문에 보병도 진격할 수가 없었다. 오후 5시 30분경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롬멜은 철수했다.
마레트선[편집]
롬멜은 마레트선 뒤에 숨어서 방어에만 집중했다. 당연히 몽고메리는 마레트선을 뚫을 작전을 세웠고.
몽고메리는 3월 20일에 제10군단, 30군단을 정렬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연합군은 방어진지를 집중공격했지만 3월 22일까지도 방어선에 유효타를 가하진 못 했다. 뉴질랜드군단이 엘 함마 방면으로 우회하려 했으나 독일군 제21 기갑사단이 증원되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해안가 방어선에 타격을 입히지 못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몽고메리는 뉴질랜드군단이 진격하던 방향을 뚫는다는 작전을 입안했다.
3월 26일 제1 기갑사단이 엘 함마에 도착했고 추축군 부대는 와디 아카리트로 후퇴했다.
이후 공격을 위해 1주일간 휴식을 취한 영국군은 4월 5일 저녁에 독일군을 정면공격하여 승기를 잡았다. 제51 사단이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했는데 이때 제10군단 기갑전력이 지원됐다면 완승을 거둘 수 있었겠지만 이동속도가 너무 느려서 그러진 못 했다.
몽고메리는 최대한 빨리 전차를 이동시켜 독일군을 공격했으나 독일군은 이미 싹 빠져나간 뒤였다.
추축군이 와디 아카리트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모든 부대가 마지막 방어선이 있는 엔피다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튀니지 전역[편집]
연합군과 추축군의 전력 차이는 심각했다. 추축군은 사실상 연대, 여단급인 사단 13개와 전차 130대밖에 없었지만 연합군은 완편된 19개 사단과 전차 1.100대를 보유했다.
중동지역 사령관 알렉산더는 메제즈다 계곡을 돌파해 튀니지의 항구들을 점령한다는 작전을 수립했다. 튀니지의 항구를 점령하면 북아프리카에 있는 군대로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 있기 때문.
알렉산더는 4월 22일 패튼의 제1군에게 메제즈 엘 바브와 부 아라디 사이에 있는 추축군 병력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 사이 몽고메리의 제8군은 엔피다 주변에서 추축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몽고메리의 정신병이 도졌다. 몽고메리는 이 작전이 미군이 독일군 막타를 낼름 먹게 하는 작전이라고 생각해서 생 지랄을 피웠다.
몽고메리는 제8군 병력으로 적진을 30 km 돌파하는 작전을 세웠다. 알렉산더는 몽고메리의 작전을 써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몽고메리의 생각대로 하게 해 줬다.
몽고메리는 기세등등한 영국군의 전투력을 믿고 작전을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느리더라도 제대로 긴장하고 전투에 임하길 바랬다.
안 됐지만 휘하 부대들에게 이런 몽고메리의 바람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영국군의 선봉장 브라이언 호럭스 제10군단 군단장은 부하들에게 적은 고작 연대~여단급 병력이니까 선빵필승이라는 것을 톡톡히 일러뒀다.
하지만 실제 방어전력은 사단 2개 분량이었고 4월 19일 선빵을 갈겼지만 독일군 방어선은 스크래치도 안 났다.
19일 하루종일 공격한 결과 제50 사단이 엔피다를 점령했지만 다른 부대들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 했다. 호럭스는 눈 앞의 독일군과 아군 병력을 1:1로 교환하고 방어선을 부술 수야 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피해가 컸다. 결국 10군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딴딴한 독일군 방어선을 둘러싸고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배로 몽고메리는 주공을 1군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1군은 4월 30일까지 독일군을 끝없이 밀어붙였다. 그런데 밀어붙이다보니 공세는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고 소규모 부대들의 싸움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됐다.
알렉산더는 공세가 중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8군에서 정예부대를 차출해서 1군을 도우려고 했다.
몽고메리가 개꼰대긴 하지만 상병신은 아닌지라 순순히 사단3개와 여단 하나를 내 주었다.
5월 6일 제7기갑사단의 선봉대가 튀니스를 뚫었고 미군 제2 군단은 비제르테를 점령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추축군 병력들이 항복하기 시작했다. 아르님은 5월 12일 제4 인도사단에 항복했고 다음 날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메세 원수가 항복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역이 끝났다.
시칠리아[편집]
연합군은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시칠리아 침공은 7월 10일 전후로 정해졌고 몽고메리의 제8군은 시칠리아 남동쪽 끝에 상륙해서 북동쪽에 있는 메시나로 진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즉 몽고메리의 부대가 주공을 맡았다.
몽고메리는 자기가 전공을 독차지하려고 미군 부대에겐 측면보호같은 임무나 주고 자신은 주공을 맡기 위해 오만가지 지랄을 다 떨어댔다.
7월 내내 연합국 군대는 독일군을 밀어붙였다. 군대가 북상하면서 몽고메리의 싸이코 또라이 기질은 누구도 범접 불가능한 포스를 풍기는데 사건이 하나 있다.
몽고메리는 메시나를 서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제30군단을 렌티나에서 에트나로 우회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이동하려면 124번 국도를 타고 가야 했다. 124번 국도는 미군이 쓰기로 한 도로였는데 몽고메리는 패튼에게 영국군이 124번 국도를 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쪼끄마난 국도에 양국 군대가 엉켰다. 몽고메리가 주공을 서쪽으로 틀었기 때문에 측면을 지키는 미군도 방향을 맞춰줘야 했다.
하지만 패튼은 그닥 화를 내지 않았다. 이미 섬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팔레르모를 점령하게 해달라고 알렉산더에게 요구했기 때문. 나흘 뒤 패튼은 팔레르모를 땄다.
팔레르모에서도 메시나를 공격하는 길이 있긴 하다. 그래서 패튼은 무조건 몽고메리보다 먼저 메시나를 따기로 했다.
메시나로 가는 길은 산악지형이라 뚫기가 어려웠다. 8월 6일부터 시작된 길뚫기는 8월 17일이 되어서야 끝났다.
패튼이 산을 청소하는 사이 몽고메리도 부하들을 재촉했다.
둘의 레이스는 1943년 8월 17일 미군 정찰대가 먼저 메시나에 진입하면서 패튼의 승리로 끝났다.
이탈리아 전역[편집]
시칠리아에서 이탈리아군이 항복한 날 아침 제8군은 이탈리아의 끝자락에 상륙했다. 이후 연합군은 쭉쭉쭉 밀고 올라가지만 몽고메리는 노르망디 상륙을 위해 빠진다.
유럽 전선[편집]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 연합군은 교두보에서 벗어나 빌레르 보카주로 진격했다.
몽고메리는 사막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제7 기갑사단을 동원해서 빌레르 보카주를 뚫고 제51 하일렌드사단과 합류시켜서 캉을 포위하려고 했다.
6월 10일 제7 기갑사단이 빌레르보카주에 도착은 했지만 이 마을은 독일군의 기갑교도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영국군은 마을에 들어가는 데에만 사흘을 썼다. 게다가 미하엘 비트만의 공격을 받고 시간이 또 지체됐다.
이날 오후 기갑교도사단은 반격했고 제7 기갑사단은 틸리까지 후퇴했다. 독일군이 굉장히 잘 싸웠기 때문에 밀고 당기는 싸움이 계속됐다.
굿우드 작전[편집]
7월 초 무렵 연합군의 점령지는 노르망디 해안가에서 24km정도 뿐이었다. 이러다간 참호전이 될 것 같았지만 몽고메리는 그 전에 지역을 돌파해버릴 생각이었다.
7월 18일 몽고메리는 휘하 부대에게 노르망디 돌파 지시를 내렸다. 이 작전이 굿우드 작전.[3]
영국군이 생 로를 점령해야 미군이 나갈 수 있는데 점령이 늦어져서 7월 19일 아침에야 생 로를 점령했고 코브라 작전은 24일로 미뤄졌다.
7월 19일 기갑부대는 생 로를 점령하고 진격하다 부르게뷔스 능선에서 반격을 당해 멈춰섰다.
작전이 실패한 것 같지만 몽고메리는 독일군 주력부대를 영국군 쪽으로 유인해서 미군의 돌파작전을 지원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어그로를 잘 끈 덕에 가드인 영국군은 독일군 13개 사단을 주공인 미군은 9개 사단을 상대하게 됐다.
이때쯤 몽고메리가 원수로 승진한다.
마켓가든 작전[편집]
자신이 지휘하는 제21 집단군이 주인공이 되길 원한 몽고메리는 평소 그답지 않은 과감한 작전 수립도 마다하지 않았다.
몽고메리는 영국군과 미군 공수부대 3만명을 주요 하천 교량에 공수시키고 그 사이에 호럭스의 제30군단이 마지막 공수부대가 있는 지점까지 약 100km를 진격한다는 내용의 마켓가든 작전을 수립했다.[4]
몽고메리는 이 작전으로 독일군의 전투 의지를 꺾고 지크프리트선 앞에 교두보를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교두보 구축은 가능했고 작전지 맨 끝에 투입될 부대도 영국군이 맡겠다며 작전을 강하게 밀었다.
아이젠하워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작전을 승인했다. 아이젠하워의 승인이 난 작전은 1944년 9월 17일로 정해졌다.
9월 17일 연합군 수송기들이 기지를 출발해 날아올랐다.
미군의 제82 공수사단과 제101 공수사단은 그나마 원활하게 임무를 완수했지만 영국군의 제 1공수사단은 만만치 않았다.
작전의 끝자락에 있는 목표지점 아른헴을 지키는 수비대는 예상 외로 탄탄했다. 여기에 발터 모델 원수가 공수부대의 침투를 눈치깠기 때문에 제9 친위대 호엔슈타우펜 사단이 아른헴으로 제10 친위대 프룬츠베르크가 네이메겐으로 투입됐다.
영국군의 제30 군단 전차들은 당연히 도로로 이동했는데 도로가 1차선이라 지뢰 하나로도 길을 봉쇄할 수가 있었다. 결국 독일군 대전차포와 온갖 이상한 공격을 얻어맞은 30군단은 19일이 되어서야 네이메겐을 지났고 목적지인 아른헴에서 16 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다.
제1 공수사단은 사흘간 아른헴에서 포위된 채 싸웠고 9월 21일 아른헴 다리를 뺏겼다.
아른헴에서 제1 공수가 싸우는 동안 공수로 물자를 보급하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날씨까지 작전을 도와주지 않았다.
30군단은 이번에도 온갖 독일군을 맞아 싸우며 9월 23일에야 라인 강 남쪽에 도착했다. 하지만 강을 건너진 못 했다. 몽고메리는 작전이 실패했기 때문에 부대를 빼야 한다고 판단했다. 9월 25일 밤사이에 제1 공수사단 병력이 탈출하며 작전은 끝났다.
안트베르펜[편집]
이때쯤 연합군의 보급선은 너무 늘어져 있었다. 언제까지고 노르망디에서 보급품을 수송할 순 없었기에 안트베르펜 항을 점령해서 보급로를 터야 했다.
안트베르펜은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진입로를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어서 항구를 쓸 수 없었다.
마켓가든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캐나다 제1군에게 알아서 진입로를 치우라고 시킨 몽고메리에게 안트베르펜은 시선에서 AUT인 상황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에게 최대한 빨리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라고 시켰고 여길 점령하지 못하면 작전이 중단된다고 얘기했다.
최고사령관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도 몽고메리의 싸이코 또라이 기질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영국군에게 안 중요한 임무를 주고 미군이 공을 다 가로채게 하려 한다고 생각한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의 명령을 무시했다.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에게 말을 듣지 않는다면 처칠에게 꼰지르겠다고 협박했고 몽고메리는 동맹관계 유지를 위해 꼬리를 내렸다.
몽고메리가 주공을 돌리기 전부터 캐나다군이 이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독일군도 멍청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 지역이 아주 중요한 지역임을 깨달았고 방어를 증강시킨 상태였다. 특히 발헤렌 섬은 섬 하나를 통째로 요새로 만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영국군은 발헤렌 섬을 점령하려면 강둑을 터트려 물로 공격해야 한다고 결론내렸고 폭격기를 이용해서 강둑을 터트렸다.
11월 1일 영국군은 물이 찬 섬에 진입할 수 있었고 11월 4일까지 교전한 끝에 섬을 점령했다.
베를린 전투[편집]
몽고메리는 베를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베를린 근처에도 안 갔다. 소련이 베를린을 딸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몽고메리는 북독일 평원을 건너 베를린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4월 18일까지 제1군과 제30 군단이 각각 조이데르와 브레멘을 점령했고 제8 군단은 뤼네부르크를 점령하고 엘베 강에 다다랐다.
제21 집단군 본대는 네덜란드와 발트 해 쪽으로 방향을 틀어 4월 18일 제12 군단과 함께 함부르크를 땄다.
4월 마지막 주 동안 소련군이 베를린을 청소했다. 히틀러의 자살이 알려졌고 휴전이 가까워 왔다.
5월 4일 뤼네부르크하이데 평야에 있던 제21 집단군 사령부에서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북부에 주둔한 독일군 부대가 제2차 세계대전 최초의 전체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전후[편집]
몽고메리는 전과를 인정받아 영국군 라인 강 주둔군(BAOR)의 사령관이 됐고 1946년부터 48년까진 영국군 참모총장을 1951년 NATO가 창설되자 유럽사령관을 맡았다.
은퇴 이후엔 잘 먹고 잘 살다가 1976년에 죽는다.
총평[편집]
똑똑한 건 맞는데 인성이 능력의 발끝도 못 따라간 쓰레기
특유의 꼼꼼함과 완벽주의적인 성격은 분명 지휘관으로서 갖춰야 할 완벽한 소양이다. 실제로 그 성격 덕분에 많은 싸움에서 승리했고. 하지만 그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추격을 포기하고 전과를 확대시키지 못한다거나 하는 면도 분명 있다.
게다가 양보를 모르고 미군이 자신의 전과를 뺏어가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미군 장군들과 쓸데없는 갈등을 만들었고 마켓가든 작전을 무리해서 세우다가 역사에 길이 남을 참패를 당한다.
그런데 더 심각한건 사생활이다. 사생활이라도 깨끗하면 "그래 저새낀 재수는 없지만 능력은 있는 놈이야."라고 할 텐데 사생활이나 사상이 어찌나 추악한지 능력을 전부 깎아먹고도 남는다.
쇼타콘이다 전쟁이 끝난지 1년만에 12살 소년과 연애한다는 스캔들이 났다. 같이 목욕도 하고 연애편지도 주고받았다고.
어린 남자랑 연애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분명 있었고 많은 남자애들과 연애편지도 주고받았다. 환갑이 까마득하게 넘은 할배가 10대 초반 남자애를 성적으로 보고 같이 목욕한다니 욕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정작 동성애 합법화엔 반대해서 왜곡되고 억압된 성욕이 아닐까 하고 보는 시선이 있다.
본인의 책을 출판했는데 오친렉이나 아이젠하워를 가루가 되도록 깠다. 뿐만 아니라 그냥 자기랑 관련된 모든 것을 깠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딴 몽고메리 시의 명예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이탈리아 장교에게 결투 신청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인종차별주의자다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아프리카의 원자재를 활용할 방안에 대해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아프리카인들은 자기 나라의 자원을 활용할 줄도 모르는 "완전한 야만인[5]"이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