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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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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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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중 칼이 없는 자는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그러자 제자들이 칼을 꺼내어 "주여 여기 칼이 두 자루 있습니다."라고 하니 주께서 보시고 "아주 좋아, 충분해!"
이 문서는 역사 속의 인물을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역사 속의 네임드 급 인물들입니다. 이 틀은 고인이 된 대상에게 사용하십시오.
이 문서의 대상은 전설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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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의 대상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0년 5월 24일(1980-05-24)부로 고인이 되었습니다.
주의. 이 문서는 눈부실 정도로 매우 밝습니다.
이 문서를 읽다가 부디 너의 눈이 실명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늦은 것 같네요...이미 이 글을 보는 너는 실명이 되었습니다. 아니 이 글도 보지 못합니다......
이 문서는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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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그 누구도 깔 수 없는 평화주의자를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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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에서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다룹니다.
쓸데없이 토달거나 음모론 제기하다가 일베충(으)로 몰리지 말고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잠시 묵념합시다.
이 문서는 금손에 대해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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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특정 분야에서 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으신 분에 대해 다룹니다.
이 분야에서 이분만큼이나 도를 닦고 수련하여 통달하신 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의 말씀은 진리이자 불변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디시위키 이용자들은 이분의 말씀에 반박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이 문서는 잘생기고 매력적이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에 대해 다룹니다.
순간 설레서 동인녀가 될 지도 모르니 열람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는 잘생기고 매력적이며,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에 대해 다룹니다.
순간 설레서 동인남이 될 지도 모르니 열람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는 명사수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파리 날개도 맞힐 명사수입니다. 모두 헤드샷 맞지 않길 바랍시다.
주의. 이 문서는 눈부실 정도로 매우 밝습니다.
이 문서를 읽다가 부디 너의 눈이 실명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늦은거같네요...아마 이글을 보는 너는 실명이 되었습니다. 아니 이글도 보지 못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

이 문서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문서는 갓한민국의 자랑거리를 다룹니다.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 - !!!!!

이러한 갓-한민국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전 세계와 우주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키아~ 주모오오!!

주의! 이 문서에서 서술되는 인물은 존나 똑똑하면서 존나 셉니다.

이 문서는 천재적인 두뇌와 초인적인 전투능력을 동시에 가진 인물에 대하여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 인물을 상대로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습니다. 박통의 띵복을 액션빔.
파일:재규어 신사정장 모드.PNG
이 문서에서는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영웅을 다룹니다.

이 사람은 재평가 되어야 하는 영웅입니다. 모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위해 잠시 묵념합시다.
이 분은 진짜 개씹사기라 정치를 대국적으로 만듭니다.

이 문서는 심하게 대국적인 포스를 풍기시는 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분이 살아계시다면 다른 들이 하야를 하거나 발터를 맞거나 할 것입니다.
이 문서에서 서술하는 캐릭터는 사기캐를 넘어선 궁극의 강캐입니다!
이 문서는 디시위키 공식 사기캐 벌쳐, 한카리아스보다 훨씬 더 강한 궁극의 강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강해서 사기캐를 뛰어넘는 위엄이 돋보입니다. 만약 이 캐릭터를 픽하시면 그냥 마음껏 하십시오!
하지만 남이 쓰면 궁극강캐지만 당신이 쓰면 이길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정의가 구현되었습니다!!
이 문서에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정의를 존나 드물게도 헬조선에 구현해낸 보람찬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 문서는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는 대한민국을 유신 속에서 구출한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영웅을 향해 무례한 말은 삼가도록 합시다.
이 문서는 성인(聖人)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그 누구도 깔 수 없는 인물을 묘사합니다.
성인을 욕보이게 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이 문서는 너를 울게 만듭니다.
이 문서는 너를 울릴 수 있는 감성팔이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문서를 읽기 전에 눈물부터 쏟으시길 바랍니다.
아 잠깐 눈물 좀 닦고 ㅠㅠ 이 문서를 보고 광광 우럮따 8ㅅ8
이 문서는 대국적 그 자체에 대해 다룹니다.
대국적이지 못하면 당신도 재규어에게 벌집핏자가 될 수... 당신 누구야?! 탕탕!!
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대한민국의 위인입니다.

이 문서가 다루는 대상은 일생에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민주주의를 남기고 유신과 함께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파일:끌려가는김재규.png
이 문서는 애국지사를 다룹니다.
이 문서는 국위선양을 한 애국지사를 다룹니다
지사니뮤ㅠㅠㅠ
이 문서는 참교육에 관련된 것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참교육의 은혜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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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누구도 흉내내고 따라잡을 수 없는 인성갓입니다.
그러므로 인성드립이나 비방은 삼가도록 합시다.
이 문서는 요리를 존나 잘하는 마스터 셰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부디 이 요리사의 심기를 건드려 요리사분의 식재료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군요 윾신의 띵복을 액션빔!

이 문서에서 가리키는 대상은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인물입니다.
자유민주주의만세. 유신 독재 AUT!!!
이 문서는 놀랍게도 디시위키 것 치고는 괜찮은 문서입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 문서는 디시위키 문서임에도 의외로 정밀하고, 적당한 양식을 갖추었습니다.
또 고급스러운 언어유희와 필력까지 겸한 상질의 문서라 읽는 이로 하여금 뜨거운 감동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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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나면 이 문서를 끝까지 정독해 보십시오.
이 문서는 숨은 영웅에 대해 다룹니다.
이 문서는 헬조선을 유신 속에서 구출한 다크, 안티 히어로에 대해 다룹니다.
다크, 안티 히어로를 향해 무례한 말은 삼가도록 합시다.
이 문서의 인물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 입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고 있는 인물은 자유민주주의의 대국적 영웅입니다.
놀랍게도 김재규 묘소에선 그/그녀를 보기 위한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곤 합니다.
본 인물을 욕보일시 수많은 국민들의 저주로 제명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注意. 文書國父니다
默念부터 시다... 리...
最小限 文書만은 國蜂(지는 國蜂)을 쳐 시길 니다.
萬若 國父侮辱하는 四肢切斷되고 屍體廢棄物 燒却場에서 廢棄 處分입니다.
파일:임시.png 이분을 깔 이유가 없습니다!
경고. 이 문서는 명탐정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에선 명탐정이 네가 이 문서에 이상한 걸 적거나 반달하지 않는 지 24시간 다 감시하고 있습니다.
허튼 수작 부릴 생각 마십시오.
진실은 언제나 하나!!!!!
이 문서는 암살단이 감시하고 있는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다룹니다.
유비소프트가 만들고 출시하는 잠입 액션 어드벤처 게임 및 등장인물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만민의 평등을 주장하고, 인류의 자유라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암살자들이 감시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암살검에 찔려 골로 가게 되도 디시위키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본 픽션 작품은 다양한 종교적 신앙과 신념을 가진 다문화 구성원으로 이뤄진 팀에 의해 기획, 개발 및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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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간흉기
냉병기 해전 사이비 테러 드럼통
척준경 이성계 이순신 이만희 할카스 찢재명
첩보전 고자샷 발터 나이프 글록 정의봉
모전구렴야 상하이 조 재규어 지라툴 제너럴 조 박기서
盧래 K2소총 쌍권총 백린탄 야구빠따
MC무현 임 레이너 코서인 김상옥 박정인 死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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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갓재규 중장

Jae-gyu "The Parkjeonghee Slayer" Kim

자신이 암살한 대통령의 딸 덕분에 재평가되다.

민주주의의 수호자 또는 민주주의 혁명가

맨 오브 밀리언(Man of Million)[1]

인물 정보
출생 1924년 3월 6일(양력 4월 9일)
별명 갓슬레이어, 재규어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 79[2]
(現 구미시 선산읍 선산중앙로7길 9-10)
군복무 제6사단 사단장
국군기무사령부 기무사령관
제3군단 군단장
최종계급 대한민국 육군 중장
직업 민주주의 혁명가
前 중앙정보부장, 現 벌집핏자 전문 요리사
순국일 1980년 5월 24일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
서대문구치소內 사형집행장
안장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4-1 삼성개발공원묘원
국적 대한민국 갓한민국
종교 불교
사상 자유민주주의, 반공주의
활동 분야 10.26 사태
업적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 암살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 1980년 5월 23일, 사형 집행 전날 유서에서


최태민은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

 
— 10.26 혁명 이후 합수부 조사에서 나온 김재규의 말

김재규(金載圭, 1924년 4월 9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이며 박정희 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였지만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하여 암살했다. 그후 1980년 사형에 처해졌다. 이전까지는 테러범이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닭대가리 병신년이 아주 그냥 최악의 개지랄을 떨면서 안 그래도 썩 좋지 않은 아버지의 평판에 개똥칠을 한 덕분에 지금은 영웅으로 재평가를 받는다.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암살한 것처럼,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알을 박아넣었고 결국 사로잡혀서 사형당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 이후 정확히 70년 후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민주주의를 위했던 영웅인지, 단지 홧김에 일 저지른 테러범인지 평가가 엇갈렸는데 탄핵 이후 정권이 뒤집힌 지금 시점에서는 재평가를 해야하는 영웅으로 여겨진다. 사실 재평가는 꾸준히 검토되어 왔다고 한다. 이러한 업적으로 현재 주갤의 갤주를 담당하고 계신다.

사실 김재규는 육군사관학교 2기로, 박정희와 동년에 장교 임관을 한 군대 동기이고 박정희에게는 사적으로 친한 친구였는데 박정희가 대국적이지 못해 절친에게까지 버림받은 것일 뿐이다.

여기서 잠깐 의사와 열사의 정의를 보도록 하자. 출처 국가보훈처에서는 열사는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으로, 의사는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발터는 당연히 무력에 속하므로, 김재규는 의사라고 불러야 한다. 주변에서 열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고쳐주도록 하자.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의 차이를 들어 설명하면 잘 이해할 것이다.

성격[편집]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사람에 따르면, 청와대와 중정 통틀어 모든 고위직 중 유일한 정상인이었다고 한다. 행동에 절도가 있고 기품이 있으며 성실하고 아랫사람들도 늘 존중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반면 다른 이들, 특히 차지철 같은 이들은 왕정시대에도 이랬을까 싶을 정도의 특권의식과 안하무인으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한다. 김재규와 함께 일한 정보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재규는 평소에는 온화하며 아랫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주지만 부당한 일이 있으면 온화한 성격과 정반대가 되어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업적과 행보[편집]

역사 배울 때 선생들이 안기부와 중정을 비교하며 중정도 살인적인 짓거리 많이 했지만 안기부는 아주 미쳐돌아갔네, 중정 시절이 엄한 군주라면 안기부는 폭군이었네 하고 비교하곤 하는데 이건 박정희와 전두환의 차이라기보다는 김재규가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보는게 더 올바르다. 중앙정보부장으로써 김재규는 독재 체제의 권력유지기구로만 이용되는 중정을 개혁하고 개편하여 국가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기구로 정상화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사적인 권한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방면해주고 민주 인사들을 지원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구명하는 등 중정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많은 시도를 했다. 그가 중정부장이기 때문에 정권의 부역자라는 폄하는, 이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잦아들고 재평가론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한홍구 교수는 김재규를 '안중근, 윤봉길, 김구의 계보를 잇는 보수 우익의 마지막 의사'라고 평가했는데, 그의 행적이나 신분은 분명 정통적인 좌파와는 궤가 달랐지만 수구 세력과는 거리를 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대강 이러했다. 강직한 군인, 유능한 건설부장관, 그리고 무능하고 물러터진 중앙정보부장

남산 고문실 폐지 및 기구개편[편집]

알려진 김재규의 업적 중 하나는 남산의 대고문실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정의 고문실은 남산뿐 아니라 도심 곳곳에 존재했다. 남산 고문실을 없앤 것은 가장 큰 고문실을 없앴던 것일 뿐 중정의 고문실을 전부 없앤 것이 아니다. 김재규는 고문과 강압수사가 열등한 후진국의 방식이라 보았으며 결국 총체적으로는 나라에 도움이 하등 안되고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우등한 선진국의 방식인 법치주의의 근간과 멀어지며 국민들에게 피해가 될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3공화국 후반부의 박정희는 유신 선포 및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이런 김재규의 사상과 대립되었고 김재규를 좋지 않게 보았다. 김재규가 폐지한 남산의 고문실은 안타깝게도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다시 생겨난다. 물론 나중에 노태우가 집권하면서 없어졌지만.또한 김재규는 이와 더불어 중정을 해외정보업무 위주로 개편하려 했다. 만일 이게 성공했다면 중정이 더러운 일은 안 해도 됐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일은 전두환 집권 후에 중단된다. 바꿔 말하면 김재규 지휘하의 중정도 전임자 시절에 비해 자제하려 했을 뿐 더러운 일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명백히 간첩이 아니고 신분이 뚜렷한 교수, 정치인, 학생 등을 멋대로 잡아다가 고문하는 정치 고문을 없앤거고 간첩 고문은 하던 대로 계속 했다. 이 과정에서 간첩이라고 오인한 경우 애꿎은 희생자가 생기기도 한 것. 김재규는 혐의 없음이 명백한 사람들 빨갱이라며 잡아다 고문하고 괴롭혀 오히려 더 반국가적인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 즉 '자생적 빨갱이'를 자꾸만 만들어내는 고문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고 이것이 북한에서 넘어오는 간첩보다 더 정권 존립을 위협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민주화 인사라는 데는 이견이 있으나 최소한 그는 차지철 박종규 같은 미친 간신이 판치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그나마 정신 박힌 인사였고 박정희가 김재규 말만 어떻게 좀 들었어도 총 맞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첩 조작 중단(?)[편집]

중앙정보부에 의한 간첩 조작은 그의 부임 이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전임자 시절에 비교하면 그 수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일반적으로 간첩 조작은 일선 공안검사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재임 시기에 있던 건도 전임자의 영향으로 간첩 조작에 익숙했던 중정 직원들이 독단적으로 이행한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김재규의 도의적 책임도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김재규가 무능한 중정부장이라는 평을 들은 이유 중 하나가 전임자에 비해 간첩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거였던 것을 보면 간첩 조작에 적극적이었던 전임자와는 달리 그가 그런 행위를 적극적으로 방조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유신 철폐 요청[편집]

1977년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게 어떻냐고 제안한 적이 있고 1979년에는 집회, 시위, 출판, 언론의 자유를 제거하는 조치인 긴급조치 9호를 폐지하자고 주장했으나 박정희는 이 말을 씹었다. 김재규가 더 심한 조항인 긴급조치 10호를 제시한 다음 대신 9호를 폐지하려고 했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는데 본인 진술에 따르면 '아무리 9호를 폐기하자고 해도 말을 안 듣길래, 일단 더 강해보이는 조항인 10호를 신설한 다음 내 권한을 이용해서 실무에서 재량껏 적용을 안 하는 방법으로 완화하려 들었다. 그 분(박정희)께는 '그런 식으로 말해야 된다'라고 한다. 정확한 내용은 아무도 증언을 못 해서 10호를 발의했다는 사실만 남아있지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저런 정권 내에서 온건파로 활동하기 위한 처세술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싶음. 그 전까지 긴급조치 9호로 잡혀들어온 학생들 및 정치범을 감면, 방면을 숱하게 해 왔던 김재규의 행동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뭐가 더 신빙성이 있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자.

직원 퇴직기금 마련 외 등등[편집]

위의 남산 고문실 폐지와 함께 김재규가 시행한 업적이다. 그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에 의하면 그는 부장이 되자마자 당시 부장 판공비로 나온 8억원을 이용해 직원 퇴직기금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퇴직하더라도 퇴직금은 받아가길 원한 그의 행적이었다. 정말 헬조센에서 찾아보기 힘든 리더다운 상사였다. 이 외에도 평소 늘 아랫사람이 더 좋은 근무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랐고, 중정을 단순한 독재 체제의 유지기구에서 탈피하고 CIA와 같은 현대적인 정보기구로 만들고자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했으며 직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개혁들은 전두환 시절에 싹 다 무위로 돌아갔다.

아랫사람을 끔찍이 아꼈던 김재규의 개인적 인품 덕분에 10.26은 박정희 저격 이후의 청사진이 극히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김재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 부하들의 구명을 요청했고, 개인적인 회고록에서는 처음에는 독재 철폐라는 이상에 젖어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나 박흥주와 박선호가 전대갈의 군사정권 하에서 단심에 바로 사형을 선고받는 걸 보고 처음으로 죽고 싶을만큼 죄책감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자신은 자결할테니 부하들은 살려달라고 탄원했고, 모두를 쏴 죽인다면 국민들이 저항할 것이라고 울어도 보았지만 10.26 의거 6인의 의사들은 전대갈에 의해서 모두 처형당하고 말았다. 또 사형당하는 부하들의 가족의 생계까지 걱정했다. 때문에 자신이 죽고 나서 재산을 모두 부하들의 가족과, 억울하게 희생당한 10.26에 휘말린 희생자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물론 박정희의 원수를 갚고자 혈안이 된 전대갈에 의해서 모조리 무산되었다.

시위 국민 보호[편집]

말년의 박정희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 헌법을 개정하자 군중들은 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대학생은 걍 대학만 나오면 엘리트 소리 듣는 시대였는데 박정희가 지시한 사항 땜에 시위하면 무조건 영구제적에 앰생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그런거 좆까라고 하며 시위를 일으켰고 긴급조치 9호땜에 수천 명이 감옥에 가게 됐다. 김재규는 이에 안타까워하며 당시 문교부 장관인 박찬현에게 "먼 훗날 우리가 어떤 심판을 받겠나", "국민이 백번을 잘못해도 백한번을 용서해야 되는게 정부인데 제발 학생들을 복교시키자"고 3번이나 간청했지만 학생들 복교시키고 시위 일어나면 자기가 책임져야 된다고 거절당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중정부장으로 조사를 시행한 김재규는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민간인이 시위대와 의기투합해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주었으며 배후세력 없는 일반의 사람들이 항쟁을 일으켰고 그 분노가 엄청나 수십개소의 파출소가 파괴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항쟁 참여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재규가 최루탄 속에서 어린 소년을 보호하려 드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다고 하는데 그 혼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청와대로 입성한다.

이 시위가 부마에서 끝나지 않고 전국 5대도시로 확대될거란 정보와 판단을 내린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대책 강구를 요청했으나 어이없게도 박정희는 "앞으로 부산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내가 총을 쓰도록 허가하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버럭 화를 내었고 김재규와 대립관계였던 차지철은 박정희를 옹호하며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시위는 김재규가 발터 PPKM36 치프 스페셜을 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ㄴ여기까지의 내용은 김재규 회고록 아니면 항소진술문에만 적혀있는 내용이다. 진위여부는 김재규 혼자만이 앎. 상식적으로 자기를 변호하는 글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적을리가 없잖아?

최태민 문제에 관한 대립[편집]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문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언이 적중되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육영수의 사망은 박정희 일가를 정신적으로 붕괴시켰다. 초기의 박정희는 본인이 이미지 전략을 취했던 것과 그렇게까지 동떨어진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채홍사를 시켜 대행사 소행사를 하는 봉건적인 짓거리를 하지는 않았고, 비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으며, 수려한 인품을 바탕으로 인재들을 포섭해 산업 기반을 착실히 세워나갔다. 박정희가 청렴한 독재자라는 평가는 대부분 이러한 시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육영수 피격 이후, 박정희는 말 그대로 돌변했다. 그는 가장으로써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으며, 이 죄책감은 자식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싸기와 도덕적 방기로 표면화되었다. 박지만이 무슨 짓을 하건 내버려뒀고, 가정사에 관해서 간언을 올리면 버럭 화를 내곤 했다. 철권정치를 펼치던 박정희가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해졌으니 주변 사람들이 그대로 놔둘리가 없었다. 곧 그들은 박정희의 자식들에게 들러붙어 엄청난 비리를 저질렀고, 무조건적으로 자식을 감싸기만 했던 박정희는 그 모든 비리를 묵인했다.박근혜에게 접근하여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 최태민은 그런 사람들 중 가장 성공한 비리 사범 중 하나였다.

사이비 영세교의 교주 최태민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에게 접근해 '고 육영수(죽은 박근혜 엄마)가 꿈에 나타났으니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나를 통하라'라며 현혹한다. 최는 6명의 부인에 7개의 가명을 둔 문란하고 사이한 인물로 난치병을 치료한다며 사이비 행각을 벌이고 사기, 배임, 강간, 성매매, 뇌물, 융자 알선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김재규는 이런 최가 박근혜를 통해 국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큰 우려를 갖고 최의 비리와 인생을 조사해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처음엔 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박근혜가 거듭된 탄원과 설득을 하면서 최를 인정하고 최가 대한구국선교단이란 단체의 총재, 박근혜가 부총재가 되는걸 허가했다. 때문에 김재규가 최에 대한 자료를 보고했을때 "요즘 중앙정보부에선 이런일도 하냐"라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김재규의 정치적 라이벌인 차지철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옹호하면서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2006년 중앙정보부 수사부 국장이었던 K국장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재규는 박정희가 어디서 굴러먹은지도 모를 개뼉다구 같은 사이비 놈이 박근혜를 등에 업고 있는데 놈에게 처벌은 안할망정 그걸 보고한 자신에게 오히려 치욕을 준 것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계원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와 최태민을 옹호한 차지철이 그때부터 박정희에게 큰 신임을 받기 시작했고 차지철은 김재규를 엄청나게 견제해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청와대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김재규는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갈 때도 김계원을 보려고 한다고 둘러대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 대해 김재규가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지는 10월 26일만이 알 일이다.

K국장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가 박근혜와 최태민의 편을 들어주고 시비를 종결지은 이후로도 김재규는 자신에게 최태민의 비리와 과거에 대해 계속해서 조사하고 보고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자식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패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는걸 극히 우려했다. 때문에 박정희 본인의 역린임에도 불구하고 거듭해서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며 처단을 요구했고 교통사고를 내서라도 죽여버리고자 했으며 10.26실현 후 사형을 기다리며 쓴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특별히 박근혜와 박지만을 일일히 지목해 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했는데 씨발 최순실 사태로 이건 현실이 되고 말았다.

[1] 자세한 근거.

민주화 운동 지원[편집]

장준하가 죽었을때 그의 자식에게 장준하가 사고사가 아닌 정부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귀띰해주었으며 그의 남은 식솔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김영삼을 구속시키려는 박정희를 간곡히 만류하였으며 김대중에게도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상태에서 병원에서 지내게해주거나 가택연금을 해제시켜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학총장들에게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고 구속되어있는 대학생들을 풀어주고 문교부장관에게 학생들에 대한 대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김수환 추기경과도 안면을 트고 지냈는데 김수환은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김재규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김수환은 10.26이후 강신옥 변호사에게 김재규의 변호를 부탁하였으며 그는 김재규 사후 그의 식솔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민주인사들이 김재규의 도움을 받았다.

중정부장이었음에도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며 이러한 일들은 김재규의 민주주의에 대한 발언을 단순한 변명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든다.

정치범 처벌 완화[편집]

항소심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심리할 것이 없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9년 형을 2년 6월 징역형으로 줄였다. 정치범들에 대한 형의 선고에 중앙정보부의 개입 조정이 있었던 것은 이제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로부터 김재규로 바뀐 것이 정치범의 형량이 대폭 줄어든 원인이었다. 보안법이나 긴급조치로 정치범을 될수록 잡아들이지도 않았다. 1976년 중반 이후의 추세였다. 반성문만 쓰면 웬만하면 석방했던 것도 김재규의 방침이었다.

 
— 이부영 의원

중앙정보부장에 오른 후 박정희의 공포정치에 가장 큰 반감을 가지고 일상화된 공포정치 및 정치범 양산에 반대하는 정책을 여러모로 폈다. 유신 말기 전제적인 공포정치와 강경책을 선호하던 박정희와 김재규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차지철은 경호실의 권력을 남용해서 전근대적인 전제정치 수단들을 마구 사용해서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이 따위로 굴었던 이유는 간단한데, 박정희는 김재규와 차지철 시대 이전까지는 자신에게 찬동하는 가림막이 되어주는 2인자를 가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지철과 김재규는 박정희의 권위를 받아 권력을 얻은 2인자인 반면, 그 이전까지 김종필 등은 전부 박정희와는 독립된 원인으로부터 권력을 가진 2인자였다. 즉 1인자와 대립하는 2인자였다.

5.16은 4.19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그다지 높은 위치가 아니었던 박정희가 국민의 지지를 얻어 성립되었다. 이를 고깝게 여기는 세력 역시 내부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박정희는 전제적 권력을 가진 구조가 아니었고 민중의 눈치를 봐야 했으며 이는 유신체제가 공고화되기 전까지 쭉 이어진다.

유신이 전체적으로 독재정임에도 불구하고 신민당 등에게 어느 정도 정치영역을 허락할수밖에 없었던 것,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척은 해야 했던 것, 그로부터 김영삼 김대중 등이 활동할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결과 완전히 폭압적인 독재로는 나아가지 않았던 것 등등은 전부 이런 구조에서 기인한다.

유신 이후 이러한 내부의 견제가 무너지고, 김종필이 2인자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박정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찬동하는 2인자를 갖게 되어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김재규 역시 그 전까지의 2인자들처럼 사사건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며 박정희를 견제하는 역할로 행동하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한테는 이것이 굉장히 불쾌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보면 기이하게까지 여겨지는 차지철에 대한 의존은 이 사실을 배경으로 접근하면 이해할 수 있다.

유신이, 그 이전에 존재했던 이승만이나, 전두환보다 더 깨끗했던 것은 사실이다. 최소한 그들처럼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박정희 개인이 매우 도덕적으로 깨끗한 인물이어서 그랬던 걸까? 어떤 역사과정의 결과를 개인의 미덕이나 탁월함 덕분으로 돌리고 영웅으로 추앙하는 역사관은 물론 감동적이고 대중들은 그렇게 평가하기를 즐기지만, 전혀 합리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으며, 당연히 역사적이지도 않다.

박정희는 광장에서 살인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사조직과 중정, 보안사를 동원해서 지속적으로 밀실에서의 살인은 저질렀다. 인혁당 사건 같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폭압적인 제재로 나아서지 않았었던 이유는, 그의 권력 기반 자체가 어쨌든 대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그렇게 어느정도 허용된 민주적 영역에서, 정치적 동기로 박정희를 견제했던 김종필 같은 사람이나, 개인적인 동기로 박정희를 견제했던 김재규 같은 사람이나, 민주정부의 수립을 목적으로 대립했던 민주화 세력의 견제 같은 게 있어 박정희가 폭압적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예방하고 있었던 덕분이라고 보는게 더 올바르다.

실제로, 그런 견제 세력이 가라앉고 자신의 권력이 확립되자마자 박정희는 발포 명령 운운하며 차지철의 200만 학살 발언을 묵인함으로써 곧바로 다른 독재정이 저질렀던 짓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려고 들었다. 목줄에 묶여 있고 재갈을 물린 개는 물론 사람을 물지 않을 거다. 그런데 그게 그 개의 착함을 증명하나?

김재규를 재평가하는 의의는 여기에도 있다. 개발독재 시대는 분명히 공과 과가 있다. 그러나 그 공이 박정희에게 전적으로 돌아가는 것의 허구성을 널리 알리는 의미다.

10.26 사태[편집]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유신이...진다...

참고로 위 짤은 현장검증 사진인데, 아따 맥크리 합성 잘 했다~

현재 김재규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이론들은 거의 대부분이 박정희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 이상의 폄하를 수반하고 있는데 김재규가 10.26을 통해 우리에게 선물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박정희가 카이사르적 지도자였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브루투스적 암살자였던 김재규의 대의에 대한 투명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초기의 박정희는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면모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액튼 경이 제시한 절대 권력의 절대부패론대로 집권이 길어지며 점점 부패하고 망가지기 시작한다. 한 정권이 10년 이상 지속되면 그때부터 제도나 정치환경의 중립성이 점점 무너지고 붕괴하며, 20년 정도 장기집권이 계속되면 전체적인 균형능력 자체가 상실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에서 정조의 집권 20년 후 합리적으로 돌아가던 조선의 정치체계가 붕괴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액튼 경은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는 이유로 독재자가 합리적인 국정 운영 능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적으며, 설사 합리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장기간 유지될 리가 없다고 제시했는데, 박정희는 전형적인 후자에 해당하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후자에 해당하는 독재자가 가장 무서운 유형의 독재자다. 초기에 쌓아놓은 치적과 권위를 바탕으로 대중을 마비시키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정치 체제에서 이탈해 유신으로 치달으며 개인사적으로는 육영수 암살 등의 사건을 겪고 박정희는 점점 독재 말기적 징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ㄴ 애초에 5.16 당시 미국의 협박때문에 총통제를 못한거다.

차지철의 전횡을 방기한 것, 대행사 소행사 등의 행위, 최태민의 비리를 고발한 김재규를 오히려 꾸짖은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후에 문서화된 사건만 이 정도고 증언으로 남아 있으나 신빙성이 없어 증명되지 못한 것 중에는 더한 것도 널려 있으니, 김재규가 직접 보고 겪었으나 말하지 못한 말기적 병폐는 수도 없이 더 많을 것이다.

박정희의 가장 절친한 후배로서, 2인자였던 김재규는, 유신 초기부터 유신 정권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곧 자신의 직위를 활용해 박정희를 잘 보필하여 박정희가 스스로 정권을 이양하고 자유민주주의로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겠다는 사상으로 7년간 폭주하려는 유신의 고삐를 붙잡고 유일한 온건파로 행동했다.

절대 왕정 급의 체제를 갖춘 독재체제에서 체제의 정당성과 반대되는 입장을 견지한 채 맞선 것, 그러한 2인자를 가진 것이 유신이 집권 초기부터 바로 5.18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일으킨 5공과 차별화될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김재규는 중정부장으로서 박정희 옆에 머무르며 유신정권이 점점 더 썩어들어가는 것을 목격하며 이 정권의 긍정적 면모, 시대적 효용이 다하였음을 점점 확신하고 있었다. 그 예후가 여실히 드러난 절정은 부마항쟁 때의 박정희의 반응으로, 김재규에 따르면 박정희는 그것을 보고받자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고 차지철은 그 유명한 300만 명 학살 얘기를 내세우며 찬동을 했는데 대놓고 반기를 드러내는 사람 하나 없었던 사건이다.

어떤 이들은 차지철과의 권력 다툼 때문에 김재규가 밀려나 그 울분으로 박정희를 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김재규에 대해 박정희가 가지고 있었던 호감과 친교를 생각해 보면 정권의 정당성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의견을 여러 차례 표명하고 박정희를 통제하고자 하는 입장을 취하지만 않았더라면 김재규가 애초에 2인자의 자리를 위협받을 일도 없었다.

김재규는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기도 했고, 긴급조치 9호를 폐지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10.26 직전에는 부마 항쟁의 의의를 굉장히 확대하여 제시함으로써 박정희에게 사임을 간접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독재자의 입장에선 입에 매우 쓴 말일 뿐이었다. 이러한 피로감이 누적되어 김재규의 위치가 위협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권력 다툼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는 비합리적이다.

즉, 유신이 독재정이면서도 폭정이 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통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김재규가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0.26이 가까워짐에 따라 김재규는 스스로가 그 조정 능력을 상실했고 박정희의 폭주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여 물리적 혁명을 결심한 것이다.

10.26 사후에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자료가 확보되기 전까지, 박정희의 가장 큰 적이었던 정치인사들조차도 유신 말기의 내부적 병폐가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김재규는 그 당시 상황에서 유일하게 유신 내부의 상황을 꿰뚫고 있었으며, 또 고결한 양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부마항쟁에서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가는 시민들을 보았던 그가 파악하기에 차지철의 300만 학살 발언은 추임새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이뤄질 수도 있는 사건으로 보였다. 이제 최루탄 대신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시민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선했다. 동남아의 독재정권에서 흔히 일어났던 대학살이 눈앞에 현실로 닥쳤음을 그 혼자만은 깨닫고 있었다. 그 학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 이전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현 유신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여러 차례 사석에서 드러냈던 김재규는, 마침내 그 사건을 계기로 결심을 끝마치고 조용히 장롱에서 총 한 자루를 꺼내 가슴에 품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차지철, 김계원(비서실장), 김재규가 심수봉, 신재순을 데리고 술을 마시던 중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처치한 사건이다. 당일 박정희는 안중근 기념관 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원래 예정을 취소하고 술잔치를 벌이러 간 것이었다. 재규어는 발터 PPK로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쏜 뒤 박정희의 우측 가슴을 쏘았다. 같은 시간대 김재규와 뜻을 같이한 김흥주, 박선호 등의 부하들은 경호처장과 경호부 차장 등 박정희 측 심복들을 사살했다. 박정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고 김재규는 차지철에게 한 발을 더 쏘려고 했으나 이때 발터 PPK의 총알이 걸려버리고 만다. 당황한 김재규는 회식장 밖으로 달려나가 박선호에게 M36 치프 스페셜을 넘겨받아 회식장으로 돌아왔다. 손목에 총을 맞은 차지철은 죽어가는 박정희를 방치하고 화장실로 숨었는데, 김재규가 도망친 줄 알고 화장실에서 나왔다가 때마침 다시 돌아온 김재규에게 사살된다. 그리고 김재규는 박정희의 머리를 쏘아서 확인 사살, 이렇게 유신정권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 살해를 미리 예고해줬던 김계원이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에게 범인이 김재규라고 말하고 김재규가 육본으로 가면서 김재규는 붙잡히게 되었다. 최규하는 김재규의 체포를 명령했으며 군대가 나섰고 김재규는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사형을 선고 받는다. 김재규는 마지막까지 10.26은 권력획책이 목적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깨끗한 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

거기서 최태민도 있었더라면 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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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그리고 도주하면서 무고한 종업원이랑 경호원들 죄다 쏘고 나온 건 왜 쏙 빼놓지?

ㄴ종업원이야 그렇다 치고 경호원 드립은...총 든 적도 생각해주는 성인군자ㅠ

ㄴㄴ 야 ㅋㅋㅋ 만약에 윤봉길 의사 상하이 도시락 폭탄 의거 때 어떻게 해서 쪽바리 시중들던 무고한 조선인 한 명이라도 죽었으면 윤봉길 의사도 살인마 새끼냐고? ㅋㅋㅋ

ㄴㄴㄴ훙커우 공원 사건이랑은 다르지 병신아 훙커우 공원 사건은 애초에 특정 인물을 겨냥해서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당시 조선인들의 기개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만방에 알리며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존재한다는 걸 전세계에 퍼져있는 한민족들에게 알리고 응원과 지원을 받기 위한 의거였으며 윤봉길은 사건 직후 또 다른 폭탄으로 바로 자결하려고 했는데 붙잡혀서 실패했는데 김재규는 사건 직후 바로 도주하면서 정승화를 꼬드겨서 계엄령 내려서 지가 정권 잡으려고 한 새끼인데 훙커우 의거를 여기에 비비네 ㅋㅋㅋ 그리고 실제로도 훙커우 공원 의거에서도 조선인이 죽지도 않았어 병신아 ㅋㅋㅋㅋ 그리고 윤봉길은 그때 조선인을 죽이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던 반면 김재규는 고의적으로 도주하기 위해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쏴죽였는데 윤봉길 의사가 어쩌고 어째? ㅋㅋㅋ 니 말대로면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사람을 마구 죽여도 되는 게 정당하다면 4.3사건도 비난하면 안되겠네? ㅋㅋㅋㅋ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말인 줄 알지 ㅋㅋㅋㅋ

ㄴㄴ 이 새끼 아직도 분탕질이네 ㅋㅋㅋㅋ 그러니까 계엄령 선포하려고 했다가 중간에 실패로 끝났는데 왜 니혼자 뇌피셜로 싸지르면서 김재규가 자기 멋대로 계엄령 후에 정권 잡니 마니 지랄 염병을 하냐 ㅋㅋㅋㅋ 어차피 끝나버렸는데 ㅋㅋㅋㅋㅋ 그러면서 다른 새끼가 말한 만약 윤봉길 의사 의거 때 무고한 조선인 한 명이라도 죽었다면 윤봉길 의사도 살인마 새끼냐고 하는 질문에 만약은 없다면서 일축했으면서 지는 왜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을 이후까지 생각하면서 지랄 발광을 하냐 ㅋㅋㅋㅋ 니 새끼야 말로 내로남불 아니냐? ㅋㅋㅋㅋ 그리고 김재규도 박정희 죽이는 거만 생각했지 그 후에 어떻게 할지 대책은 생각 안 했어. 박정희 죽이지 못하고 경호원에게 자신만 제압 당하고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컸고 또한 박정희랑 차지철 죽인다고 나라가 금방 바뀔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어. 어쨌든 계획만 만들고 실행은 뒤로 미루고 있었지. 그러다가 부마사태 터지니까 박정희가 전국에 계엄령 내려서 시위 제압하려고 하니까 유혈 진압 있을 걸 생각하니까 박정희를 구슬려보려고 하는데 좆도 안 쳐듣고 차지철 씹새끼는 자꾸 성질 건드리니까 미루면 안되겠다 싶어서 빡쳐서 급하게 실행한 거지. 그리고 예상치는 못했는데 박정희 죽이는 거는 성공하니까 그 이후의 박정희 잔당들까지 잡는 계획은 치밀하게 생각을 안 해서 중정으로 안 가고 육본으로 가서 정승화한테 계엄령 내리려다가 김계원이 꼬질러서 실패로 끝난 거잖아. 처음부터 쿠데타 생각했으면 후속 대책 그딴식으로 안 짰어. 쿠데타를 생각했으면 거사 당일 우선 군부의 자기편들부터 모이게 한 다음 박정희 쏴버린 동시에 하나회 쳐버리고 중정으로 가서 여론통제 한 뒤 정승화한테 계엄령 선포하라고 했을 거야. 그리고 김재규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건 장준하 아들과 김영삼, 김영삼 보좌관, 미국대사 그리고 부하들의 증언으로 인해 밝혀진 사실인데 왜 니새끼 혼자 부정하냐 ㅋㅋㅋㅋ 그리고 YH여공 사건은 김재규가 직접적으로 개입 안 했는데 그냥 정부 고위 관료로서 거기 있었던 거 뿐이야 또한 선친 묫자리는 윤관도사 손석우란 사람이 써준 건데 선친 묫자리 제왕지운이 타고난 자리라고 좋은데 써줬다고 했는데 그 선의를 거절하냐? 그걸 까네 ㅋㅋㅋㅋ 어쨌든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건 10.26 사태의 의의인데 박정희랑 차지철 그리고 호위무사인 경호원들 잘 쳐죽여서 박정희 종신독제 막아서 더 이상의 부마사태 희생자 막고 10.26 여파로 전두환도 박정희처럼 되지않기 위해 종신독재 안하고 물러갔으니까 그 당시로 보면 병신 짓이었지만 지금으로 보면 잘한 짓이지 안 그러냐? 그리고 김재규가 독재 정권에 부역했었던 거는 욕먹어야 할 짓이지만 그 욕에 비해 종신 독재정권 종결 낸 것의 공이 훨씬 큰데 ㅋㅋㅋㅋㅋ 그래서 그 공 때문에 깨시민 새끼들이 열사라고 빨면서 좋아하는 건데 결국 적폐가 회심해서 더 큰 적폐 막은 건 잘 한 짓이야. 그리고 10.26은 좋은 의도로 시작했고 경호원들 잘 쳐죽여서 박정희, 차지철도 확인사살까지 시켜가며 잘 쳐죽였고 당시 부마사태 시위 진압으로 인한 더 큰 민간인 희생을 막을 수 있었고 또한 전두환 독재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10.26이 있기에 전두환이 영구독재까지는 안 했으며 부마사태 이후 탄압으로 일관해서 어쩌면 현재까지도 갈 수도 있었던 박정희 영구독재를 끝냈기에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좋은 결과가 나온 거 아니냐 좋게 생각하자

ㄴㄴㄴ김재규가 계엄령 내리려고 한 건 내 뇌피셜이 아니라 실제로 김재규가 끊임없이 정승화 부추기면서 하려고 했던 거야 임마 ㅋㅋㅋ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아무 죄가 없으면 미수죄는 왜 있냐 ㅋㅋㅋㅋ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어서 미화된 거라면 김재규 역시 계엄령 때려서 나라 뒤흔들기 전에 실패하고 붙잡혔기에 미화가 된 거야 병신아 ㅋㅋㅋㅋ 그대로 김재규가 계획한 대로 계엄령 내려서 혁명위원회 만들어서 박정희정권 심판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 잡아 죽였으면 그 새끼도 평가가 전두환이랑 다를 바 없어 병신아 ㅋㅋㅋ 그리고 윤봉길은 조선인을 죽일 생각조차 없었고 실제로 죽이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윤봉길을 들먹이냐고 ㅋㅋㅋㅋ 당시 한인애국단은 침체된 임정 살리고 국내외의 조선인들 지지와 지원 받으려고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로 조선인은 아직 죽지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폭탄 투척한 거고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하고 자기가 박정희 죽였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계엄령 때리려고 했다니깐? 두 사건은 원인, 과정, 결과부터 전혀 다른데 그놈의 훙커우공원 타령 좀 작작해 ㅋㅋㅋ 그리고 전두환 영구독재를 막은 건 6월항쟁이지 뭔 김재규 타령이야 ㅋㅋㅋ 김재규는 오히려 전두환이 정권 잡는 빌미만 제공했지 신군부 퇴진과는 좆도 상관없는데 10.26이 왜 나와 ㅋㅋㅋ 오히려 김재규가 정승화 꼬드겨서 계엄령만 때리려고 안 했으면 전두환이 12.12 일으키는 일도 없었지 병신아 ㅋㅋㅋ

ㄴㄴ ㅋㅋㅋㅋ 누가 계엄령이 뇌피셜이래? 난 계엄령 뇌피셜이라고 쓴 적 없는데? 난 단지 니 새끼가 자꾸 계엄령 일으킨 후에 김재규가 정권을 잡니마니 해서 쓴 거지 병신아 자꾸 왜 원론을 비껴나갈려고만하냐 그리고 전두환이 영구 독재 안하고 사임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라도 간접적인 원인은 됐을 탠데? 난 니 새끼 말 반박하는 이유가 10.26를 저지른 이유가 민주주의 회복이 아니라 단순 권력 욕심이라는 것과 계엄령 일으키고 박정희 잔당 청소 후에 지가 정권을 잡니마니 증거도 없이 뇌피셜로 지 꼴리는 대로 지껄이는 걸 반박하는 거야 ㅋㅋㅋㅋ 그동안 토론하면서 니 새끼가 10.26 일으킨 이유가 권력 욕심 때문에 일으켰다는 김재규 녹취록이나 부하들 증언 같은 직접적인 증언 갖고 왔냐 ㅋㅋㅋㅋㅋ 그리고 김재규가 계엄령 일으킨 거 성공해서 박정희 잔당 청소 후에 자기가 권력 잡는 평행 세계라도 다녀왔냐 ㅋㅋㅋㅋㅋ 딴 거 다 좆까고 그 두 가지 증거나 가져와라 병신아

ㄴ왜 경호원을 쏴죽였냐니...그야 당연히 경호원들이 살아있으면 거사가 실패하니까 그렇지 병신아. 당장 다키키는 발터 한방으로 죽지 않았고 차지철조차 부상만 약간 입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호원을 미리 없애놓지 않는다? 총소리 울리자마자 바로 옆 방에서 튀어와서 김재규 쏴버리고 다카키 응급조치부터 했을 텐데 상식이 있는 놈이면 당연히 경호원부터 처리하지. 안타깝지만 대의를 위한 거사를 계획한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진짜 별 걸 다 트집 잡네. 안중근 의사가 이토 저격하면서 옆에 있던 일본인들도 다같이 쐈다고 안중근 의사도 테러리스트라고 할 거냐.

ㄴ 정작 경비원이 아닌 자신이 살려 둔 김계원에게 통수를 맞고 만다. 김계원까지 죽였으면 정말 목격자는 아무도 없게되고 (심수봉 심재선 제외)어떻게 됬을지 아무도 모른다.

왜 거사를 일으켰는가?[편집]

원래 김재규는 박정희의 친구였다.

같이 장교로 군복무도 했고 그래서 이후락윤필용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에서 보직 해임되자[3] 그 후후임[4]으로 김재규를 임명했고 김재규는 박정희의 친구라서 박정희가 어떻게 행동하든 박정희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했다. 최악의 경우라도 딴지를 거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유신 헌법에 반발하는 부마항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박정희는 부마항쟁에 대해 이렇게 반응했다.

김재규는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박정희와 죽을 때까지 함께 가면서 충성을 보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부산, 마산에서 대학살을 일으킬 판이었다. 김재규는 부산 시민들과 마산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김재규의 이 결단은 부산과 마산 시민들을 살리게 된다.

ㄴ 학살 발언은 김재규가 "차지철이 이러이러했다"는 항소 보충서 내용에만 나온 내용이고 실제로 한 발언이었는지는 김재규 혼자만이 알겠지. 게다가 김재규가 꾸며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몇백만을 학살하면 미국과 유엔이 가만히 안 있는다.

ㄴ 그래도 정황상 현실 가능성은 충분했다. 부마 지역에 계엄령, 위수령이 떨어졌고 탱크가 들어왔으며 사격이 5.18처럼 언제 개시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던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심지어 부마항쟁이 일어난 1979년,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과 미국 국무부가 기타 대사관들에 보낸 문건에 따르면 서울 등 기타 지역에도 시위가 벌어졌기에 다른 지역에도 계엄령을 발동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바보가 아니면 알겠지만 지금 시위한다고 계엄령 내리고 군대로 시내 장악하는 짓거리를 한다면 그대로 탄핵이다. 그걸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는 것부터 애초에 당시 시대 상황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최악의 경우 시민이 죽든 군인이 죽든 둘 중 하난 피를 봤을 것이고... 또 미국, 유엔 드립은 순진한 희망 사항일 수 있는 게, 당시 미국 카터 정권이 인권 개선을 내세우며 주한미군 철수론 등으로 박정희와 사이가 나빴던 건 사실이지만 이후 레이건 정권까지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 잡고 5.18 학살한 전두환 정권을 잘만 인정해줬다. 유엔은 지금도 내전이나 북한 수용소를 비롯한 각국 내정에 별 힘을 못쓰는 실정이고... 미국이 이후 6월 항쟁에서 전두환 정권에 압박을 넣으며 도움 주기도 하지만, 결국 당시 미국에게 중요한 건 일단 한국의 정치적인 안정이었기 때문에 내정 간섭 수준으로 깊숙이 개입하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ㄴ 그러니까 미국 원하는 게 한국의 안정인데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걸 방관만 한다고? ㅋㅋㅋㅋ 5.18때는 시민군이 무기고 털어서 똑같이 폭력적으로 대응을 하니까 니가 위에서 총 든 경호원 이야기하듯이 총 든 놈을 방관만 할 수는 없으니 똑같이 총으로 대응한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 부마항쟁 때는 아직 폭력시위로 변질되기 전이었는데 무슨 명분으로 수백만 명을 사살해 ㅋㅋㅋㅋㅋ

ㄴㄴ 5.18때 첫 발포는 계엄군 쪽에서 이뤄졌다. 무기고를 턴 건 그 이후다. 최초 발포한 시점 이전에도 계엄군은 진압봉, 착검한 M16 소총으로 민간인과 학생들을 개 패듯이 패고 찔러대느라 이미 광주에서는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런 무자비한 놈들에게 돌 던진 게 과도한 폭력 시위라고 생각한다면 당장 혀 깨물고 자살하자. 그리고 부산, 마산에서 수백만 명이 실제로 죽는 일은 니 말대로 없었지만 현장은 5.18 수준으로 거칠었다.출처

10월 17일 시위대는 오후 7시 25분경 충무파출소를 부수고, 서부경찰서에 돌을 던진 다음에 동대신파출소를 또 파괴했다. 그런 식으로 서구 지역을 휩쓸었다. 오후 8시 20분경 부산역 방면에서는 초량1파출소를 습격하고 부산진역 쪽으로 올라갔는데, 부산진역 앞에 있는 동부경찰서에서 경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고 나서 2500명 정도 되는 시위대가 부산역, 시청 쪽으로 진출했다. 또한 중부세무서, 서대신3동사무소를 습격했다. 경찰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3400여 명을 투입했지만 항쟁의 불길을 잡지는 못했다. 밤 10시경 육군 2관구 사령관 정상만 소장이 이끄는 지역 부대를 투입하기로 했지만, 그것으로도 시위대를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때쯤부터는 시위가 좀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18일 새벽 1시 30분까지 항쟁이 계속됐는데, 이날 시위로 모두 21개소의 파출소가 파손되거나 불탔다. 경찰 차량 6대가 다 타고 12대가 파손됐다. 경남도청과 중부세무서, MBC, KBS, 부산일보, 일부 동사무소 등이 파괴되고 돌팔매질을 당했다. 파출소, 경찰서라든가 관공서, 언론 기관들이 전날보다 더 많이 공격당한 것이다. 그런 속에서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 계엄이 선포됐다.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2개 여단의 공수 부대 등이 투입됐다. (공수 부대와 더불어, 포항에 있던 해병대도 일부 동원됐다. '편집자') 그러면서 당국은 대학을 휴교시키고, 집회와 시위 등 모든 단체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과 출판을 검열하고, 사업장 이탈이라든가 태업을 금지하고,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연장하고,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고 알리는 포고문을 시내 곳곳에 붙였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각 대학, 관공서에 들어왔다.

이때 여단장 박희도 준장이 이끌고 온 공수 부대가 부산 시민들한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얼굴에 시커먼 위장 크림을 바른 공수 부대는 참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을 마구 폭행했다. 예컨대 '건방지다'면서 시민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려 뇌 수술을 받게 하고 그랬다. 공수 부대의 폭행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백번 양보해서 곤봉으로 때릴 때에도 어깨 밑을 갈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공수 부대원들은 머리를 주로 때렸다. 다친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 경찰조차 군인들한테 맞았다. 동부경찰서의 한 경위는 공수 부대원들이 시민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걸 말리다가, 다른 형사 2명과 함께 10여 명의 공수 부대원한테 몰매를 맞았다.

 
— 내용 일부

그리고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인정해준 이유는 전두환이 박정희 시절에 꾸준히 개발 중이었던 핵무기, 미사일 등 미국에 위협이 될 무기들을 전면적으로 개발 중단하기로 약속해서 인정받은 건 알지? 그리고 시위한다고 군대 투입하면 탄핵이라고? 노무현은 대추리 시위에 군대 투입하고도 대통령 잘만 했다 븅신아. 물론 지금은 시위대를 계엄군으로 대응하면 탄핵이겠지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야지. 한국 역사상 "민주주의"라는 게 들어온 지 30년도 안 됐던 시절을 지금의 가치관으로 평가하면 쓰냐?

ㄴㄴ 시위 진압이 탄핵 사유가 안 된다는 건 맞는 말이다. 전두환은 광주 사태 일으키고도 7년 동안 대통령 임기 채움 ㅇㅇ 참고로 대추리 시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평택 미군 기지 건설에 반대했던 당시 마을 사람들이 철조망으로 둘러싼 군사 보호 구역으로 멋대로 들어오고 폭력 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안에 있던 비무장 상태의 공병, 경찰들과 충돌이 발생했던 거다. 그걸 일방적으로 군인이 민간인 진압했다는 식으로 말하면 좀 곤란하지. (물론 충돌 이후에 무장 군인 투입을 검토한 정황은 있었다.[2])

그리고 5.18때 공식 민간인 사망자 수는 166명이야. 166명으로도 그 정도로 파급력을 내는데 수백만 명이 죽는데 미국이 가만히 있었을 거라고? 100~200만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현실 감각이 안 오냐? 6.25 당시 사망자 수가 137만인데 100~200만을 죽인다는 건 거의 전쟁 수준인데 미국과 유엔이 가만히 있으면 유엔의 존재 이유가 없는데? 이 새끼들은 최순실 300조 드립처럼 왜 이렇게 숫자에 대한 현실 감각이 없냐?

ㄴㄴ 우리나라가 UN에 가입한 건 노태우 정부 시기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한 지 6년도 안 된 시기였고 국제적 영향력이 그에 따라서 대폭 줄어든 상태였다. 베트남 파병 때문에 국제 사회로부터 욕 먹던 게 당시 미국이라는 건 너도 알 거다. 근데 그랬던 미국에게 뭘 기대하냐? 학살극이 일어났다면 미국이 규탄 성명 내고 주한미군이 박정희 대가리라도 날렸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세계의 여러 개도국에서는 지금도 독재와 반대파 학살, 숙청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미국이 일일이 뭐라고 간섭하는 거 봤냐? 박정희 정부 시절의 대한민국 경제는 현재 아프리카와 사실상 동급이었다. 너야말로 지금의 가치관으로 당시 상황을 보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냐? 그리고 당장 7개월 뒤에 있었던 5.18 때도 너도 알다시피 미국이 전낙지에게 아무런 터치를 안 했어요 등신아. 대체 뭔 자신감으로 7개월 전의 미국은 박정희를 반드시 저지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고작 7개월 차이인데? 그 사이에 대통령이 레이건으로 바뀌어서?

ㄴ진짜 근첩새끼가 개병신같은 소리 써놨네 미국이 전두환한테 아무 터치를 안했다고? 당장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했을때 CIA가 직접 중앙정보부에 전화걸어서 압박넣어서 두번 다시는 김대중 건들지 말라고 했고 전두환이 김대중 내란음모로 죽이려고 했을때도 미국이 압박넣어서 사형 못시키고 미국으로 망명까지 시켜줬는데? 민간인 1~200만명을 죽이는걸 미국이 눈감아준다고? 그 어떤 개도국 중에 한꺼번에 수백만명을 죽이고도 미국이 눈감아준 나라가 있음? 우리나라가 UN가입했건 말건은 중요한게 아니지 물론 당시 우리나라가 아프리카랑 비비던 좆밥국가는 맞지만 냉전의 한복판에 위치한만큼 아프리카처럼 제3세계의 세계의 변방은 아니었단다 ㅂㅅ아 1~200만명은 개뿔 수천명만 학살해도 당장 UN을 비롯해서 전세계적으로 규탄을 받을 짓이고 수출로 먹고살던 나라가 세계 압박을 무시한다? 이건 말도안되는 개소리지 ㅋㅋㅋㅋ 진짜 1~200만명 대학살 드립은 다시봐도 레전드네 ㅋㅋㅋ

ㄴ박정희가 그 때 열린 한미정상회담 때 계엄령 해제를 촉구하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면전에다 대놓고 "인권 좋아하시네"라고 말하며 카터 앞에서 40분간 안보 훈시를 해댈 정도로 미친놈에 권력욕이 ㅈㄴ게 높아서 미국이고 나발이고 다 쌩 까고 걍 밀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음. 또 미국이 5.18도 묵인한 거 보면 그렇게 심하게 터치 안 할 확률도 높음. 그리고 위에도 나와 있듯이 계엄령도 선포했고,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의 제7연대와 2연대의 일부 병력이 탱크까지 끌고 나오기도 했고, 자기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인 자치절이 옆에서 다 밀라고 꼬드기고 있고, 거기에 당시 보안사령관은 우리가 잘 아는 전두환인지라 밀 확률이 결코 낮지 않음. 다만 200만명이 보통 숫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거를 다 밀진 않았겠지만 만약에 밀었다면 최소한 5.18보다는 많은 희생자가 나올 거임

김재규의 실수[편집]

거사 후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간 것[편집]

이 행동 하나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꿔놓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힘은 막강해 중정부장인 김재규는 경호실장인 차지철과 함께 2인자 3인자 얘기를 듣고 있던 상황이다. 김재규가 김계원 등까지 살해한 뒤 중정으로 간다음 최규하를 체포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박정희 관련 측근들을 모조리 숙청한다면 김재규가 정권을 잡는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 너무나 간단한게, 김계원까지 죽여버렸으면 총성을 바로 들었던 경호원들은 사살당하였고 연회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중 사살된 김계원과 차지철을 제외한다면 남는 사람은 겨우 두 여자가수 두명인데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권력으로 겨우 이 두사람 입못막을까? 그러나 김재규는 이 혁명에 대해 굉장히 떳떳하단 생각이 있었던 듯 하고 숙적 투성이인 육군본부에 제발로 들어간다. 특히나 전두환이라는 우주괴수가 두눈 똑바로 뜨고 멀쩡히 살아있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숨겨진 오른팔로 군대 내부에서 병권을 장악한 채 박정희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다. 박정희를 골로 보낸 순간 전두환과는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는 거다. 또, 동시에 너무나 투철했던 그의 안보정신이 발목을 잡았다. 원래 중정으로 향하던 김재규는 '북한의 동향을 파악해야 하지 않느냐'는 비서의 한 마디에 바로 육본으로 차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북한은 우리나라에 도움되는 게 하나도 없다.

12.12 쿠테타로 물거품[편집]

김재규 본인도 박정희 차지철을 몰아낸다고 이미 독재체제로 완벽히 탈바꿈되어버린 한국이 정상화될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술된 가족들의 인터뷰나 회고록 등을 보면 김재규의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박정희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그렇게 달라질 것 같냐며 거사를 만류했고, 김재규 본인도 그 사실에는 동의했던 듯 하다. 이는 그가 남긴 유언에도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행동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최소한 긍정적인 영향은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행한 것이다.

실제로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덕분에 부산과 마산에서 공수여단이 철수하고 긴급조치와 유신체제가 해제되었으며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주의 초석을 깔아놨지만 김재규가 사망한 뒤 최규하와 정승화가 좆병신이라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못 막고 당하게 된다.

ㄴ 당시 한국은 광복한지 30년 조금 넘은 신생국가였고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도 아닌걸 초석으로 깔고 가야 한다. 실제로 박정희가 하나 죽었지만 그 아래 박정희 심복이었던 전두환이랑 안기부 자체가 멀정히 살아있었고 당시 박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권한이 당시 전두환한테 넘어가서 전두환과 하나회에 권한이 급격히 세지고 만다. 하필이면 경찰 또한 그 권한에 접근하는 걸 막아버렸다. 이해가 안되면 전두환이 지 맘에 안들면 그냥 군이고 안기부가 조사해서 체포하면 되었다. 전두환은 이 수사권한으로 주요 직책에 하나회를 꼽으면서 정승화를 압박했고 전두환에 권한이 쌔지자 결국 정승화는 전두환을 지방으로 좌천 시켰지만 전두환 세력들은 멀쩡했다. 결국 따지자면 지지 세력 없던 대통령인 최규하랑 계급만 높았던 정승화 와 기타 세력이 주요 직책을 다 쳐먹은 전두환과 하나회를 이길수 있었을까?

게다가 전두환은 계급만 소장이지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이 삼인방은 셋 다 중장인데도 불구하고 계급 무시하고 전두환의 부하였다. 그러니까 자기보다 계급 높은 놈들을 부하로 두고 있는 게 전두환이었다. 상대가 안 되는 게 당연하다. 특히 장군들이라고는 최규하 편에 서 준 장군들이라고는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가 고작이고 그나마 정병주의 부하 장군들도 그렇게나 정병주 장군이 애지중지 키워주고 대령에서 짤릴거 1공수여단장 시켜주면서까지 장군 만들어주고 위수지역 공비 못잡았어도[5] 그것때문에 대신 빌어서 어찌어찌 군대에서 대성하게 만들어줬는데도 불구하고 배신한 박희도같은 쓰레기가 전두환에게 붙었다.

또한 박정희가 죽고 나서는 권력의 원천이 사라졌으니 권력에서 벌레컷 당할거라고 봤던 최태민은 40년간 박근혜 옆에서 꿀을 빨며 밝혀진 것만 수천억원을 횡령했으며 단순히 사이비 종교인에 현혹된 전 대통령 일가의 딸로 남을거라 보았던 박근혜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르신들과 모 애국보수 지방 분들의 힘을 받아 5선의원에 대통령까지 하게 된다.

박근혜는 최태민이 죽은 뒤에도 최태민의 5번째 부인이 낳은 딸 최순실과도 밀접한 교류를 가져 장차관 및 고위공무원단 인사권, 행정회의 내용, 정부예산 사용권, 경제정책, 각종 안보정보, 북한과의 기밀등을 일개 아줌마인 최순실에게 다 넘겨줘 한국은 헬조선이 아닌 고조선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김재규가 완전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바가 있는데 사실이기는 하나 김재규가 능력적으로 부족했다기 보단 너무 모질지 못하고 인간적이었던 것이 문제이며 당시에 한국이 이 지랄까지 날꺼라고 예상하기엔 점쟁이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서 저질렀더라면, 그 연장선상에 집권욕이 있었더라면 일처리를 이렇게 어설프게 했을 수가 없는게 집권을 하기 위해서였다면, 확고한 지지세력 일부를 뺴고 죄다 죽여버리는게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신재순 심수봉 등은 물론이고 김계원 등등까지 모두다 죽여버리고 폭탄으로 안가를 날려버리는 식으로 최소의 목격자를 남기는 식으로 사건을 실행했더라며 과연 어땠을 것인가? 또, 집권을 꾀했다면 5.16 12.12처럼 사전에 김재규에게 내응하거나 동조하여 새롭게 정권을 구성하자고 포섭된 누군가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사람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적인 모질지 못함이 그의 일종의 비극적 결함이었다.

당장 최순실 게이트를 뉴스로 보고 살아가는 2016년의 우리도 ㅅㅂ 막장 드라마도 이 지랄로 짜면 욕먹는다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이니까 말이다. 또한 최규하가 병신이라 밑밥 다 깔아줬는데도 군대새끼들한테 대통령자리 먹힌건 김재규의 예상범위 밖 상황이었다.

ㄴ 근데 애초에 우연적 범위 내였다 박정희가 유신 헌법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자 지지세력이 충분하던 김종필이 입자차이로 총리직을 사퇴하고 관료 출신이었던 최규하한테 넘겼다. 문제는 최규하 자체가 지지세력이 없었고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을꺼라고는 당시 정치 군인과 안기부 또한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만약 김종필이 총리직을 그대로 갔고 가서 대통령으로 올랐으면 아마 전두환이 쿠테타 모의를 포기하던가, 아님 김종필을 끌어내려 자기가 대통령을 될려는 야심을 품었으면 대한민국 헌정상 최악에 블러드 콥스 파티가 일어났을 거다. 또한 최규하 자신도 오래 버티지 못할꺼 아니까 당시 서울의 봄 분위기를 이용해 민정으로 정권을 넘길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여기서 욕 쳐먹어야 하는건 당시 최규하도 김종필도 아닌 12.12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이다.

안중근이 이토를 쐈어도 식민지화를 막지 못한거랑 똑같다

ㄴ 키야 인정.

ㄴ 씹인정.

ㄴ비유... ㄹㅇ;; ㄷㄷ

최씨일가를 처리하지 못하신 것[편집]

이거 진짜 실수다 ㅜㅜ 거사 당일밤 1개소대 만이라도ㅠ동원해서 동시에 그놈들도 없앴어야 했다

ㄴ 지는 그렇게 정신없는 상황에서 처리할 수 있었을 것 같냐? 병신 하나 없애준 거 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씨발련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만 ㅋㅋ

ㄴㄴ이새낀 왜 또 혼자 급발진이냐

ㄴㄴ혼자 불타고 있네 ㅋㅋ 아이 따숩다

ㄴㄴ씨발 어디서 타는냄새 나네

솔직히 반인반신 죽은 상황에서 정박아 닭대가리가 설마 그 머가리로 국회의원에 대통령까지 할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건 박정희가 지 딸년 관련돼있다고 처리하지 못하게 한거지 김재규의 실수가 아니다. 최태민을 총재로 앉힌 박정희 개새끼.

나라 전체가 뒤집힐 큰 거사가 일어났는데, 당연히 최태민같은 잔챙이는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자연스레 권력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라 예상하는 게 가장 타당했다. 애초에 그런 급박한 상황에 김재규의 사고범위에 최태민이 들어가 있었을까? 택도 없었으리라 본다.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간 누군가가 장군님한테 '최태민도 죽여버리는게 낫지 않을까요?' 하더라도 그 의견이 수용될 확률은 낮다. 우리가 집안 대청소할 때 뒷마당 창고의 너덜너덜한 문짝의 경첩에 쌓인 먼지까지 깨끗하게 닦지는 않잖아? 그 경첩의 자그마한 먼지가 초가삼간 다 태워버릴 발화원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게 최순실 게이트 터지고 근혜 탄핵되고 하니 '그 때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잠깐 상상하고 마는 것이다.

만약 최태민을 위시한 최씨일가가 싸지를 거대한 똥을 예측하고 1개 소대를 동원해 그 놈팽이를 처단할 정도의 초월적 예지력을 가졌더라면 전두환이 쿠데타 일으킬 일도 없었다. 아마 하나회고 뭐고 대한민국의 모든게 죄다 김재규 장군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을 듯. 그게 인간으로서 가능할 것이라 보는가? 스카이넷이나 데려와라. 최가놈을 처리 못한건 그냥 아쉬운 점 정도로 남기는게 맞다고 본다. 이게 실수면 사람이 하는 모든게 다 실수다.

ㄴ ㅆㅇㅈ

옹호하기 힘든 보안사령관 시절의 흑역사[편집]

그가 유신 정권 내의 권력자들 중에서는 가장 인권을 챙기고 민주주의적 신념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의 직위가 직위인 만큼 당시 중정 및 각종 기관이 직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여겨지는 의문사, 조작 등의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아예 뚜렷하게 밝혀진 것으로는, 보안사령관 시절 재일교포 서승 형제 간첩단 사건에 개입한 흑역사가 있다. 서승 형제는 한국에 유학을 온 재일교포였는데, 방한 전 북한에 방문하고 선물까지 받아왔던 전력이 문제가 되어 보안사에 체포된다. 이들은 보안사에서 고강도의 조사를 받고 간첩 혐의를 시인하게 되는데, 이는 훗날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이었음이 밝혀진다.

반공사상이 투철했던[6] 보안사령관 김재규는 서승 형제가 과거 북한에 다녀오고 운동권 학생들과 접촉하는 등의 행적을 보인 것을 통해 이들이 간첩이 틀림없다고 확신한 모양인데,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질 않자[7] 이를 보완하고자 고문을 동반한 강제자백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정황이 어찌되었든 현대사회에서 이는 옹호하기 힘든 일이다.

김재규 중정부장 부임 초기에 있었던 간첩조작이야 부하들 독단이었을 거라 짐작할 수도 있는데, 보안사 시절 있었던 이 사건은 빼박 그가 직접 개입한 사례라 쉴드치기가 힘들다. 김재규를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이 사건은 그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성장기에는 자유민주주의의 요람 미국에서조차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적 성장배경을 안고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던 만큼 이러한 과도한 안보의식으로 방어적 수단을 남용하여 애꿎은 희생자을 낳게 만든 사건은 이 사건이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억울한 희생자가 있기는 할 것이다. 박정희의 탈 영웅화로 인한 김재규의 영웅화에 대해선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김재규라는 인물이 가진 시대적 인간적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부정론에 대한 반박[편집]

주의! 이 문서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문서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공존합니다.
그 2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10.26 사태는 그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떡밥이다. 2016년에 들어 최순실 게이트, 최태민박근혜의 문란한 관계가 밝혀지며 김재규 또한 끝없는 재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지만 그에 대한 부정론은 여전히 존재하며 부정론도 그에 대한 자료이기에 디시위키에 서술한다.

차지철만 죽이려 했고 박정희는 우발적이었다 설[편집]

이는 재고할 가치도 없이 사실이 아니며 10.26 직전에 김재규의 부하들이 "각하도 포함됩니까?"라는 질문을 했을때 김재규는 "물론이다"라고 답했다. 중정 부하들에게 강력한 화력을 가진 소총을 사용하라고 시켰고, 경호차장 등 박정희 측 심복들을 모조리 살해한 당시 상황을 봤을때 김재규의 목적이 대의였든 아니었든간에 사전에 박정희를 죽이려는 계획이 있던것은 확실하다.

또, 김재규 장군의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10.26 결행 이틀 전 이미 동생에게 은밀히 박정희를 쏴야겠다는 결심을 전달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박정희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그렇게 크게 바뀌고 모든 게 되돌아갈 것 같냐고 말리자, 그래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는 살리고 차지철만 살해할거였다면 중정의 공작원들을 이용해 차지철 혼자만 독살, 암살, 저격하는게 더 쉽고 뒤를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거사를 예고한 10월 26일 저녁까지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인다는 계획을 완성했다.

김재규는 옥중에서 7년 만의 과업을 이룬 것이라고 적었다. 최초에 그가 이런 물리적 혁명을 계획한 것은 유신이 반포된 직후였다. 그 때 김재규는 박정희를 연금하고 강제로 하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망설임 끝에 그만둔 후 노선을 바꾸어 어떻게든 박정희가 사임하고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이룰 수 있도록, 유신 내부의 양심이자 온건파로 활동하며 박정희에게 수 많은 직언을 올렸다.

당장 부마 항쟁 당시만 하더라도 김재규 외의 누구도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그토록 진지하고 크게 해석하지 않았다. 왕과 같은 권위를 가진 대통령에게 직접 당신의 장기 집권 때문에 5대 도시로 퍼져나갈 민란이 터진 것이다,라고 직언을 올릴 수 있는 담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은 사실상 박정희에게 사임을 직접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유혈을 피하고 박정희의 평화로운 사임을 바랬던 김재규의 노력에 박정희는 발포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는 호통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박정희에게는 10.26을 피할 수 있는 많은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장기집권으로 인해 그는 이미 피를 보지 않고 정권에서 내려올 방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차지철은 물론 10.26을 결심하게 만든 원흉 중 하나이겠으나 궁극적인 목적은 역시 유신의 제거였다.

민주 회복 이후에 10.26이 계획되었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서 너무 쏟아져나와서 여기 다 적기도 힘들 정도다. 거꾸로 이정도까지 자주 계획을 노출했는데 용케 안 들켰네, 김재규가 인품이 좋긴 했나보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 아예 10월 23일부터 마음을 다잡기 위한 재계 행사 같은 일정에 들어선다

10월 23일: '위민주정도(爲民主正道)', '자유민주주의', '위대의(爲大義)',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 그리고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이라는 자기가 썼던 서예들을 모아 친척에게 전달함. "이 말들을 후손에게 잘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함.

10월 24일: "신문에서는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 총무뿐입니다." 신민당 황낙천 총무를 만나 이런 말을 함. 그리고 난국을 수습할 테니 총무와 김영삼 총재가 잠깐 물러나라고 함. 아마 후폭풍 터져서 신민당 숙청당할 것을 염려한 조치로 짐작됨.

10월 25일: 유정회에 억지로 앉은 이종찬 장군에게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당부함. 저녁에 자신이 존경하던 선조인 김문기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함. 김문기는 사육신에 들어야 한다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 충신임.

ㄴ 사육신 말고 삼중신도 있으며 김문기는 거기에 속해있음 2017년 들어와서 그 분의 고향인 옥천에 사당 지어지고 있다.

우발적이라는 설은 이제 거의 완전히 폐기된 설에 가깝다.

차지철과의 권력암투 때문에 그런 것이지 자유민주주의와는 관계없다[편집]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이 있는데 김재규는 부마사태가 터지기 몇 달 전 박정희에게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사의를 표명했다가 당장은 후임자 물색과 인수인계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과거가 있다. 권력암투설은 김재규가 권력욕에 불타는 인물이라는 전제를 달아 두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전제는 이 사실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2017191

다만 차지철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는 게, 김재규도 사람이니까 차지철의 권력견제에 영향을 단 1도 안받았을리는 없을 것이다. 당시 차지철은 권력에 미쳐 마구잡이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간단한 예를 들자면 최초의 육본은 박정희 살해를 차지철이 한 줄 알고 있었다. 당시 참모총장이던 정승화는 차지철이 대통령 경호실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생각해 수도경비사령부를 집결시켜 청와대를 둘러싼 뒤 포격명령을 대기하라는 지시를 했으며 법무장관인 김치열은 소식을 듣자마자 "차지철 그놈 새끼가 기고만장해 까불더니 일을 저질렀구나!"하고 욕지거리를 한 것이다. 또한 김재규도 박정희를 정말 죽여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건 78년 12월부터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차지철에게 영향을 받았단 것 만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다는 판단은 심각한 비약으로, 일단

1. 차지철이 박정희의 신임을 독차지 한 것은 자유,민주와는 정 반대에 선 최태민과 박근혜를 옹호한 이후부터이며,

2. 최태민을 보호해주고 차지철을 신임한 것은 박정희 본인이며

3. 차지철이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고 중정부장의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을 불허하는 등 월권하는 상황 자체가 정의나 공화주의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4. 추가로 김재규는 10.26이나 차지철의 공격 전에도 유신헌법에 부정적이었고

5. 시대적으로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부마항쟁이 일어난 상태였으며 차지철과 박정희는 강경진압을 논하고 있었다.

또한 차지철 하나 뿐만이 아니라 시대상황, 박정희, 유신에 대한 비판적 판단 등 김재규의 살해 동기에는 여러가지가 혼재되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면 김재규 입장에서 차지철 하나가 문제였다면 위에 서술했듯 차지철만 따로 죽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김재규는 "어떠한 감정도 없는 깨끗한 혁명"임을 죽을때까지 강조했으며 그것을 최대한 지키고자 박정희의 혈육적으로 심각한 치부인 육사생도로서의 박지만이 일으킨 도덕적 해이나 박근혜-최태민 문제는 공개된 재판에선 말하지 않고 항소 이유 보충서에서만 밝힌다. 또한 변호사가 박정희의 추악한 면을 폭로하고 김재규를 옹호하기 위해 연예인 술접대에 대해 언급하려고 할 때는 제지한 바 있다.

또 후대에 발굴된 사료들을 바탕으로 파악해보면, 김재규는 군인적인 안보 의식과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양립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그는 유신 내부에서 유신정권을 보다 덜 독재적인 정권이 되게 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왔고, 당시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열렬히 원하고 신봉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런 그의 개인사를 고려할 때 그의 행동 원리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신념을 배제하고 해석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72년 유신 헌법이 제정되고 반포되자, 개인적으로 유신 헌법을 세 번 읽어본 끝에 이게 무슨 헌법인가! 독재하자는 것이지! 라고 외치며 내던졌다는 증언이 있으며, 당시 부하가 유신 이후 군인들이 어꺠 좀 피겠다고 아부를 하자 박정희가 모든 걸 다 망쳐버렸다고 뇌까렸다고 한다. 또, 물증으로 확인되는 증거로는 당시 그가 근무하던 제 3군단의 철조망을 교체하고 안으로 꺾은 것인데, 그의 당시 부하들과 그 본인은 그것이 3군단에 시찰온 박정희를 연금한 뒤 강제로 하야선언을 시키도록 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 그 유명한 박정희의 불출마 선언을 이끌어 낸 것이 김재규라는 증언도 다수 확보되어 있다. 박정희가 연설에서 불출마 선언을 한 날, 김재규는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그는 중정부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수 많은 재야 민주 인사들과 만나며 개인적인 신념을 자주 표출해왔다.

민주 회복 이후 하나 하나 모인 그러한 증언들은 모이자 방대한 양이 되어, 10.26이 계획된 혁명임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다만, 10.26 자체가 계획되었다는 것은 공통된 의견이나 구체적인 실행 시기는 합의 없이 우발적으로 실행되었을 확률도 점쳐지고 있다. 애초에 김재규의 의도가 그저 권력암투때문에 박정희랑 차지철을 쏴죽였고 재판에서 발언한것이 거짓이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매우좋은 결과이다.

중정에 가지 않고 육본으로 간 것에 관한 문제[편집]

위에 서술했듯 이것이야말로 김재규의 가장 큰 실책인데, 김재규는 10.26 이후 48시간 이내에 비상계엄령을 일으킨 뒤 5개월 안에 소위 '유신의 잔재'를 설거지하고 한국에 민주주의를 놓는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육본에 있던 장군들은 박정희의 사망과정에 대해 더 크게 생각했고 현장수습을 완벽하게 해놓지 않고 육본에 온 김재규는 당황했다. 설상가상으로 김재규가 살해를 미리 예고해줬던 김계원이 통수를 까면서 김재규는 막장으로 몰아진다. 김재규가 권력이라는 왕좌가 목적이었든, 민주주의가 목적이었든 비상계엄령을 일으키기 위해선 중앙정보부로 입성한 후 차지철의 쿠데타 시도에 대항해 중정부장인 본인이 차지철을 사살했지만 박정희는 총격에 사망하였다 이런 식으로 공작했어야 됐는 것은 자명하다. 차후조사를 할 수 없도록 안가에 불을 질러버린다거나...

중정 수사부의 K국장은 평소 김재규가 최태민과 차지철로 인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고 설명했는데 아마 이러한 스트레스에 더불어 부마사태와 박정희 차지철의 발언등으로 여러가지 문제점을 동시에 겪고 있던 김재규가 10.26 다음의 플랜을 더 확고하게 짜지 못했고, 대통령을 포함 십수명을 살해한 10.26후의 상태에선 피로와 충격을 겪으며 명쾌한 판단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교수에 의하면, 흔히 암살을 준비하고 거기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그 후는 대비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로마의 카이사르의 암살이다. 그 후에 우왕자왕하다 제 2차 삼두정치 후 제정이 들어서게 된다.

김재규의 일련의 행동은 무의미하다 설[편집]

주의. 이 문서는 헬조선 깨시민들이 좋아하는 것을 다룹니다.
오직 자신들만 깨어있다고 좆망상하면서 보수 정권은 무조건 까내리고 핵뒈중, 뇌물현, 문크 예거, 찢칠라를 신격화하면서 남을 토착왜구로 모함하지만 아랫도리는 친일파인 자칭 중도 40대 진보대학생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무니다 해.
우리 잼파파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더 깊은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당신이 금수저이거나 취업을 포기한 좆수 히키코모리라면 안심하고 읽어도 됩니다.
?????: 비겁한 팩트말고 정정당당하게 날조와 선동으로 승부하자 이기야!!

이 때문에 김재규의 일련의 행동들이 자유민주주의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무의미했다는 부정론인데 이건 사실상 물에 빠진 새끼 구해놨더니 지갑을 요구하는 정도의 경우없는 소리로 김재규가 발터 PPKM36 치프 스페셜을 들기전까지 아무도 박정희 상대로 반역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군부는 박정희에 대해 매우 충성적이었으며 유신헌법은 선거인단과 의회 멤버, 의회 해산권, 계엄권을 전부 대통령이 조종하기 때문에 뒤질때까지 박정희가 종신대통령을 할 수 있었다. 시민혁명으로 정권 쟁취? 헌법이 개정되었으며 대학생 천여명이 제적당해 한순간에 앰생이 되는 극한의 공포정치와 시위대가 공수여단한테 존나 쳐맞는 상황까지 온 독재국가에서 어떻게 시민들이 100% 이길거란 장담을 한단 말인가? 완벽한 독재국가에서 시민들이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선 정규군과 비슷한 무력을 가지거나 하나도 빠짐없이 죽을생각을 하고 국민 전부가 참여해야하며, 혁명과정에서 비극적이고 심각한 출혈을 각오해야 한다. 비폭력주의로 무장하고 천안문에서 탱크에 대가리 으깨진 중국의 청년들을 생각해보자.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그들의 희생은 숭고했었지만 작금의 중국은 일당독재국가이며 중국인들의 국민성은 개씨발이다.

또한 전두환에게 쿠데타를 당한 것은, 하나회의 실체를 파악치 못하고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한 정승화, 그리고 무능하기 그지없던 최규하가 병신인 것으로 김재규를 탓하기엔 어렵다. 가끔씩 10.26을 폄하하는 좌파성향쪽 인간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10.26을 일으키지 않아도 국민이 알아서 박정희를 몰아내고 시대적 평가를 바꾸어놓았을 텐데 괜히 개인적으로 처단해서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하게 했다고. 이건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민의 힘을 추승하고 절대화하여 세력적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김재규에게 민주화의 공을 넘겨주기 싫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주장이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 문학이나 찬가에서 이상화되어 표현되는 민중과는 달리현실적인 정치적 변수로서의 민중은 절대선으로 사회를 견인하는 절대적인 추동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며, 다른 현실적 변수들에 굴복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전 세계사적으로 보았을때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는 매우 특이하게 두 번이나 (이제 세 번이다) 국민들이 시위로 독재자를 몰아낸 경험이 있어 시위하면 무조건 국민이 승리한다 이런 망상에 젖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 세계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박정희 수준으로 권력이 공고한 독재자와의 투쟁에서 저항하는 국민이 패배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서 박정희 같은 독자재를 몰아낸 경우는 없다.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죽였잖아여 크헤헿 같은 개소리를 괜히 지껄인 게 아니다.

유신 시점의 박정희는 이승만, 전두환 따위와는 그냥 궤 자체가 다른 최강의 독재자다. 유신이 한창이던 시절에조차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도 국민 중 많았다. 국민장 열리고 국민들이 떼거지로 펑펑 울면서 수십만 운집한 거 보면 몰라? 지금도 틀딱들은 박정희를 반인반신에 세종대왕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는 오죽할까?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독재자라는 평가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전두환, 이승만 때 수준의 저항이 일어났을까? 당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붕괴 상태였기 때문에 유신은 자연적으로 소멸할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식의 분석은, 어째서인지 독재정에 민주정의 성립 전제를 달아 분석하고 있다. 그 모든 실정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에게는 군대가 있었으며 침묵하는 동조자들이 매우 널려 있었다. 당시의 시민 사회는 전혀 결집된 상태가 아니었고 언론 및 제반환경 역시 박정희의 손 안에 떨어져 있었다.

오일쇼크 등의 외부적 변수로 인한 충격은, 그런 힘을 바탕으로 민중의 저항을 2~3년만 막았더라면, 또 다른 외부적 변수의 공급으로 인해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장 그 시대 이후 80년대에 바로 들이닥친것이 그 유명한 '3저 호황'이고 이 3저 호황의 덕으로 대한민국은 90년대 말 IMF가 올 때까지 내외부적으로 보이는 수치가 상승일로였다. 이거 하나 때문에 전두환이 구제불능의 살인마임에도 경제를 살렸다고 운운하는 틀딱들과 베츙이들이 있는데 이게 지금도 호불호가 극명한 박정희한테 후광이 되었다고 생각해봐라. 지금 박근혜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 소위 '박정희 신화'는 정말 반석위에 올랐을것이다. 그 시대의 술회를 살펴보면, 당시 항쟁에 참여하던 부마 시민들조차 박정희가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증오 섞인 말이 맴돌지도 않았으며, 이승만 시절처럼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는 위협도 그렇게 심각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시위 참가자이면서도 박정희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던 사람조차 있었다.

대중은 어째서인지 영웅적 지도자를 스스로의 대변자라고 생각한다. 이 괴상한 사회적 신뢰인지 무엇인지 모를 기운은 문서화되지 않아 후대에는 정확하게 악하기 어려운 것이나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정확히 고증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한국 민주화의 역사에서 정말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 수준으로 공고했던 독재정부는 유신 정부밖에 없었다. 유신 정부 이전까지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정권만을 낳았기 때문에, 막연한 사상적 대의로 무장한 민주주의는 실제적 치적으로 무장한 유신 정부와 맞서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박정희를 욕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심정적 장벽이나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검토하고도 민중적 저항과 봉기로 유신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 것 같은가? 당시의 지식인들 중에는 겉으로는 시민 사회의 역량 결집과 민주화를 주장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양심적인 군인의 쿠데타'를 통하여 우선 유신체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절대로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조차 많았다. 그런데 그냥 막연하게 "시민이 처단했을 거다"라고 소리치는 것은 너무 순진하며 선동적인 주장이다.

또 결국 전두환이 집권하여 독재를 이어갔으므로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단기적으로 역사를 파악하여 나온 의견이다. 박정희가 쌓아놓은 유신체제라는 괴물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유신을 경험한 대한민국은 그 이전과는 단절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치지형이 달라졌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유신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박근혜를 통해 이 반도에서 날뛰고 있었다. 민의의 결집을 통해 권위에 저항하며 모범적인 민주체제로의 이행은, 유신체제를 경험한 세대에게는 절대 불가능했다는 것.

독재는 미발달한 사회의 민중과 굉장히 친화성이 큰 제도이다. 개인들은 본능적으로 역사를 위인들의 전기의 연속으로 파악하며, 특정한 개인사적 차원에서 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면서도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승인하는 인물을 권좌에 옹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이 본능, 이것이 현실적으로 민주주의는 왕 후보자를 고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대중은 세습된 왕정에는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나 영웅적 지도자에게는 매우, 굉장히, 치명적으로 취약하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기치로 일어섰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휩쓸려 황제로 옹립하는 코미디를 찍고 3대에 걸친 세습이 끝난 후에야 나폴레옹의 잔재를 몰아낼 수 있었다.

초기의 박정희는 분명히 시대적 영웅이었다. 자유주의적 무정부 하에 활력을 낭비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어느 정도는 독재는 사회적 활력의 결집을 위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제도의 시대적 효용이 다하고 정권의 교체가 일어나야 할 시점에 무리하게 체제를 유지 했던 박정희는, 지금의 가치관으로는 청산되어야 마땅하지만 초기의 업적만으로도 대중은 이미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박정희를 대중들이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나폴레옹처럼 3대를 세습한 후에나 해체되면 다행일 것이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을 거쳐 결국 민주화가 이루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절대왕정 수준의 권위를 가진 독재자인 박정희 체제 → 보다 정당하지 못한 권위를 가진 전두환 체제 → 민주체제로 이행된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의 방아쇠를 당긴 10.26이 어떻게 민주화에 있어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초보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대개 '착한 독재자 박정희 → 김재규 → 나쁜 독재자 전두환'으로 이어졌으므로 결국 김재규는 전두환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라는 정도 수준의 주장을 하고 있는데, 같은 독재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사실을 편집하고 이해하던 상황에서 기존의 이해와 독재에의 정당화를 그만두고, 비판적 맥락으로 다시 한 번 정권을 재검토하게 만든 것이 바로 김재규에 의한 단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즉 전두환이 등장한 상황에서 '이 정부는 나쁘다'라는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근거 자체가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시대와의 절단이라는 것, 그 사실이 프레임을 짜게 도와주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시대안이 없는 것이다. 결국 한국에 자유민주주의가 곧바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김재규는 'ㅇ신'이라는 존재만은 확실하게 해체시켰다. 박정희 사후, 그 전에는 그렇게 유신 체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부르짖던 모든 이들은 입들 닫고 순식간에 유신 체제를 해산했다. 유신의 심장이라는 김재규의 표현처럼 박정희 개인이 유신의 핵심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실이다.

개인들의 역사관은 대개 인간을 평가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대 중심적, 사회 중심적인 해석을 하지 못하고 한 개인의 치세를 일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어한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그 시대의 지도자에 대한 심정적 동감이나 또는 공격으로 표출된다. 이것이 본능적 역사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박정희의 치세가 계속되는 한, 초기에 시작된 그에 대한 긍정적인 호감에서 비롯하여 그가 독재 말기적 징후를 겪건 병폐로 썩어들어가건 계속해서 사실을 선택적으로 편집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옹호하고 유지시켜주었을 것이다. 박정희라는 개인이 소멸한 후에야 그러한 해석의 맥락이 중단될 수 있다. 정말 양보하고 양보하고 양보해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어도 국민들이 저항해서 박정희를 몰아냈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치자,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박정희에게 항거하다 수천 수만의 국민들이 개죽음을 당했을 거다. 그걸 미연에 방지했는데 무가치하냐? 문제는 반인반신을 몰아내려면 적어도 미국의 지원을 얻어야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는데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방지를 원했지 독재를 견제하지는 않았다는거다.

ㄴ 이는 전두환 새끼가 쿠테타를 일으켰어도 방관했단 점에서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미친 놈들 이거 쓴 새끼들이 전두환 드립치다 빨아제끼는 일베랑 다를게 뭐냐?[편집]

완전히 다르다. 이것만 알아두자. 김재규는 독재자를 죽였고, 전두환은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들을 죽였다. 이 차이를 좀더 중립적으로 보고싶다면 루마니아 국민들을 죽인 차우셰스쿠와 차우셰스쿠를 죽인 루마니아 국민들 중 누가 옳고 누가 나쁜새끼인지 생각해보면 된다.

박제란[편집]

어떤 역알못 새끼가 싸지른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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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잼파파 하고 싶은 거 다 해~!

ㄴ 중립충도 진보도 보수도 이런 주장이 나오지 않는데 어디서 굴러나온 새끼인지 모르겠다.

ㄴㄴ 지금은 좀 덜한데 순실이 게이트 전만 해도 깨시민들이 김재규 얘기 나올때마다 하는 소리 1번 레파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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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안 쏴죽였으면 신격화 선에서 안 끝났다 병신아ㅋㅋㅋㅋㅋㅋㅋ여기서 안 끝났으면 박정희가 탱크로 사람들을 밀어버렸을 걸? 하나도 모르는 새끼가 꼴에 둘을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이열ㅋㅋㅋㅋㅋㅋ

ㄴ 박정희가 탱크로 밀어 붙인다면 우리 힘으로 저항권을 행사해서 무력으로라도 권좌에서 끌어내려야지. 만약 그렇게 민중 혁명이 성공했으면 박정희라는 인간은 피노체트급 상종 못 할 독재자로만 기억되지 산업화 신화의 살아있는 반인반신 취급은 안 받았다. 왜, 내 말이 틀리냐? 김재규가 지멋대로 저새끼를 쏴죽이는 바람에 우리 국민들은 유신을 심판할 자격도 박탈당해 버렸고, 우매한 인간들은 대한민국을 반만 년 가난에서 구한 성인 취급을 하는 거지. 유신의 과오를 재대로 단죄하지 못한 결과가 결국 박근혜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거

ㄴ 그러니까 위에서 계속 설명한 게 그게 불가능하단 거였잖아. 차지철이 "캄보디아급 학살 가능함 ㅎㅎ"이란 식으로 발언하고 박정희도 비슷한 "곽영주처럼 독단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발포명령 내리면 누가 처벌할래?" 소리 씨부리고 있었는데, 아닌 말로 당장 5.18부터가 시민들이 총 들고 계엄군과 맞짱 뜬 사건이야.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냐? 독재 반대에 대한 인식도 훨씬 강했던 시대에 벌어진 5.18도 그 정도였는데 유신 시대라면 정말로 탱크로 시민들을 밀어버려도 이상할 거 없었다고. 그걸 지금 이 문서 윗부분에서 설명했는데 안 읽었냐.

ㄴ 진짜 중국 천안문 사태 보고도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ㄴ 모택동은 자연사해서 지금 중국이 그 꼬라지라고 생각하는 병신이다.

ㄴ 3차 천안문 말하는 거. 등소평이 흑묘백묘하며 풀어주다가 더 풀어달라고 시위한 거 탱크로 깔아뭉갠 거 말하는 거임.

ㄴ 김일성은 총 맞고 대국적으로 뒤져서 북한에서 찬양 받는 줄 아냐? 유신 수준의 독재 체제에선 박정희가 늙어서 자연사했어도 신격화 됐을 걸

정치, 역사에 관심없던 병신의 참회[편집]

이 문서는 좆같은 짓을 한 또라이새끼들이 고해성사하는 회개의 문서입니다.
여기로 와서 회개하십시오! 당신의 잘못을 낱낱히 고백하십시오! 당신의 고해성사가 이 문서에 기여됩니다.
이번 기회에 과거의 행실을 돌아보도록 하세요!

어릴 땐 어른 새끼들이 그냥 박정희 찬양하고 육영수 찬양하길래 둘 다 ㅈㄴ훌륭한 갓통령이고 정의로운 인간인 줄 알았다.

대통령을 죽인 장군님을 개씨발 쓰레기 병신 빨갱이로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근데 철들고 나니까 이젠 뭐가 정의인지, 훌륭한 분인지 알겠더라. 나라를 살리신 분인 것도 알겠고.

장군님 덕분에 나라가 산걸 이제 알았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이 나라를 헤븐조선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런 위대한 분인 줄 몰랐다... 진정 열사이자 장군이다 국립 현충원에 모셔야 한다

명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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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으로 자신의 병신력을 뽐내는 명언충 놈들과 관련된 문서입니다.
링컨 대통령께서는 인터넷에 떠도는 명언 대다수가 사실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명인의 명언을 인용할 때는 해당인이 실제로 그 말을 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법정 최후진술 전문

차지철 이 새끼 너 Gun Bang져!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 거사 당일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5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2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3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4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5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한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고 이를 유지하여 온 장본인입니다. 박대통령이 바로 유신체제라고 보아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신체제를 깨기 위하여는 그 심장을 멈추게 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보전할 책임은 있을지언정 이를 말살할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1980년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본인이 결행한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은 완전히 성공한 것입니다. 10·26 이후 유신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습니다. 다만 본인이 혁명 후에 완수하려던 혁명과업, 즉 유신기간 동안 사회에 쌓여온 많은 쓰레기들을 설거지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지켜주는 일은 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고 이 점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1980년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 1979년 10.26을 요약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일으킨 혁명이며 이에는 어떠한 사리사욕도 존재하지 않는다.

 
— 대법원 최후 진술에서


국가의 안보란 무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독재체제로 북괴를 닮아서는 절대로 적을 이길 수 없다. 이념적으로도 우월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강한 국민의 의지만이 적을 이길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독재체제가 계속되어 국민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식어간다고 할 때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 옥중 쓴 글에서 발췌


최(태민)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

 
— 79년 11월의 합수본부기록에서


국민은 우매하게 보일는지 몰라도 결코 우매하지 않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다. 국민이 우매하다면 하늘이 우매하다는 것이다. 하늘이 우매한가. 하늘을 우매하다고 보는 사람이 우매하지.

 
— 옥중수양록


쓰레기가 많아서 쓰레기를 치우고 자결하려 했다.

 
— 전두환이 왜 자결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자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 사형집행 직전


유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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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깐 눈물좀 닦고 ㅠㅠ 이 문서를 보고 광광 우럮따 8ㅅ8

오늘이 5월 23일, 이른 아침이군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길 말을 남기고 갈 수 있는 최후의 날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내 소회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나는 금번 1심 2심 3심, 즉 보통군법회의 고등군법회의 대법원 재판까지 3심까지를 거칠 예정이었는데 난 또 한차례의 재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제4심인데, 제4심은 바로 하늘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호사도 필요없고 판사도 필요없어요. 사람이 하는 재판은 오판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늘이 하는 재판은 절대 오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재판만이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명확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나는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목격했던 민주혁명은 완전히 성공을 했다, 그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회복이 되고 그것이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들 이렇게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미 자유민주주의의 물결은 세차게 흐르기 시작해서 이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있다, 이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어서 순조롭게 민주회복이 돼나가지 못하고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며 천하의 대세는 사람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기서 이런 비유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던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겠느냐.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회복에 있어서도 나의 희생없이 이 나라의 민주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보장되었다고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의 고마움을 애절하게 느끼는 부류의 국민들도 있고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자유민주주의가) 필요하지만 (그 필요성을)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부류도 없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죽음, 즉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절대 필요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절대 회복돼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전체 국민이 아주 확실히 깨닫게 되고 또 그것을 확실히 자기 몸에다가, 목에, 자기 가슴에다가 못박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번에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한 민주주의 나무의 거름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시간이 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또 보람으로 생각하고 매우 즐겁습니다. 나의 심정을 바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바로 나의 뜻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중략)[8]

그리고 내가 명확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집권욕을 가지고 10·26 혁명을 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사를 담당했던 분들이라든가 혹은 재판을 담당했던 분들, 또 일부 유신체제의 중요한 위치에 밀착되어 있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만 (내가) 집권욕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직 대통령을 희생시키는 일을 하면서 그 국가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 집권이라는 문제는 내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특히 나는 10·26 혁명을 사실은 1973년 10월, 즉 10월유신이 반포되고 헌법이 반포된 직후에 그 헌법을 보고 그때부터 안 되겠다, 이 유신체제는 독재체제인데 이것을 깨야 되겠다고 이미 발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나는 네 차례에 걸쳐서 여러 번 이 혁명을 구상했었고, 또 이런 물리적인 혁명에 의한 방법이 아닌 그야말로 박대통령 스스로가 이것을 시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기 위해 수백번 건의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러나 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는 부득이 내 목숨 하나를 바치고 그렇게 해서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추호도 집권욕을 가지고, 집권을 하기 위해서 나의 가장 가까웠던 대통령을 희생시켜 가면서 (10.26 혁명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나의 진의를 그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간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백 번 죽어가도, 내가 집권을 하기 위해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혁명을 했다는 것은, 내가 하늘에 맹세하고 말하건대,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모든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고마움, 민주주의의 귀중함 또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지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또 우리가 민주주의를 등한히 하면 꼭 민주주의는 우리 몸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는 것 그런 경우에는 또다시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우리 국민들이 이해를 해주셔야 됩니다. 나는 국민들에게 이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이 대세가 어떤 일부세력에 의해 가로막힌다는 것 이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국민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분(국민)들이 빨리 눈을 떠서 감정을 초월하고 정말로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을 해서 자기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어떤 길이 정도이고 어떤 길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 하는 것을 빨리 깨달아서 국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빨리 바로 잡아줘야 합니다. 만일 이것이 흔들리게 되면 정치적으로 혼란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모든 발전이 저해가 되고 또 국민의 마음은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어떤 불행한 결과를 자아낼는지 누구도 예측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자유민주회복을 위한 우리의 대혁명을 가로막는 이러한 세력들에 대해 진심으로 마지막 진심으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개인의 감정을 초월하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욱 튼튼한 국기(國基)를 위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똑바로 파악을 하고 판단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안 되기를 희망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희생이 후에 또다른 희생으로 파생될지 모릅니다. 그러한 불행이 제발 없어지기를 나는 진실로 바랍니다. 소위 민주회복을 하고 난 이후 이 나라의 민주회복이 무엇 때문에 이리 늦어졌느냐, 또 무엇 때문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병들었느냐 우리 국민들은 민주회복이 되고난 후에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심판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나는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번에 이 재판의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참고적으로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일본에 과거 5·26 사태니 2·26 사태니 하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때 그 사람들은 장교들만 책임을 지웠지 하사관과 병(兵)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잘하고 잘못하고 하는 문제를 초월해서 군대라고 하는 조직이 유지되는 데 있어서는 그 역경에서 전쟁을 수행할 적에 부하들이 명령을 선택적으로 받아서 수행한다고 하면 만일 이러한 기풍이 있다고 하면 군대는 존립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부하라고 하는 것은, 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관계가 아니면, 군대의 명령계통이라는 것은 존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상관이 명령을 했을 때에 이것이 정당한 명령인가 아닌가 판단을 해서 정당할 적에만 내가 이행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전쟁에서 만일 어떠한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적을 보고 총을 쏘라고 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정신에 입각을 하면 나는 총을 쏠 수가 없다고 해서 거절했다고 합시다.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조그마한 비유에 불과합니다만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권을 가진 것이지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안 받아들여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는 요번에 이 혁명을 결행하기 위해 내 부하 6명에 대해 강력한 명령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의 명령을 100%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가지고 아주 완전히 자기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나는 이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재판과정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대해 명령을 한 나와 명령을 받아 가지고 이행한 이 사람들의 관계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돼 판결이 됐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금요일입니다만 내 영감으로 마음에 잡히는 것은 내일 토요일, 내일이 오전밖에 일이 없으니까 내일 오전중에 나의 형을 집행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내 영감으로 잡히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염려없이 아주 유쾌하고 명예스럽게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자부와, 내가 이렇게 감으로써 자유민주주의는 확실히 보장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즐겁게 갑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발전과 10·26 민주회복 혁명 이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을 저는 믿고 또 빌면서 갑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묘소에 참배하러 가보자[편집]

정리해놓은 블로그. 날이 좋으면 시바스리갈 한병 들고 찾아뵈러 가자.

애창곡[편집]

[https://www.youtube.com/watch?v=

  1. redirect 틀:Trim Video] on YouTube

[3]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올라온 영상인데 실제로 생전에 <사나이 결심>을 즐겨불렀다고 한다.

흑역사[편집]

중정부장이 되기 전에 자기 조상인 김문기를 무리하게 사육신에 끼워넣으려고 했다. 김문기가 비록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미 사육신이 아닐 뿐 삼중신에는 포함되어 있었다는게 문제다. 몇 안되는 흑역사라고 봐도 좋을듯.

부하와 관련된 트리비아[편집]

이 분들 역시 10.26의 주역들로 잊어서는 안 되는 분들이다. 김재규는 마지막 유언에서까지 부하들은 그저 자신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극형을 면해달라고 탄원했지만 묵살되었다. 오히려 그저 자신의 명령을 따랐다고 말하는 김재규의 옆에서 아래와 같이 꿋꿋하게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자신들도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 것임을 증명하려고 들었다.

참고로 당시 10.26에 참여한 이들은 아래와 같다. 보직은 사건 당시 기준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박흥주,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운전기사 유성옥,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김태원

여기에 사형당하지 않았지만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유석술과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서영준이 징역을 살았다. 여기는 김재규 장군의 가장 가까운 부하였던 박선호, 박흥주를 소개한다.

박선호[편집]

1934년 경북 청도 출신, 박선호는 김재규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다. 현재의 해병대 대령에 해당되는 해군 보병 대령으로 전역했던 박선호는 상명하복식의 군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의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나 김재규의 도움을 받아 중앙정보부에 들어왔고 평소 김재규가 "거만하게 행동치 말라", "책을 많이 읽어라"등 따뜻한 조언을 해주었기에 김재규에게 큰 존경심을 가졌다.

하지만 의전과장이란 자리가 박정희의 술시중을 드는 여자나 섭외하는 소위 채홍사 같은 자리라는걸 겪게 되고 독실한 크리스챤인 그는 사퇴를 고민하였으나 김재규가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겠나"하고 간곡히 만류하여 10.26 직전까지도 재규어 때문에 일을 하고 있었다 한다.

최후 진술에서 박선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저로 하여금 항상 인간으로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될 수 있도록 길러 주신 데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 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박흥주[편집]

1939년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 박흥주는 당시 국내 최고 명문 고등학교중 하나였던 서울고를 최고 수준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집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학비를 댈 형편이 안되어 서울대가 아닌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육사에서도 공부벌레란 말을 들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여 18기 생도 중 최우수로 졸업하며 포병소위로 임관하였다. 박흥주가 전속부관이 되었을 때 사단장이 재규어였는데 이때부터 박흥주는 재규어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굉장히 유능했기 때문에 39세에 대령을 다는 초고속승진을 했으며 엄청난 권력을 가진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동구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사는등 군인으로서 흠잡을데 없는 청렴함과 인간성을 보였다.

10.26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을때는 김재규를 원망키는 커녕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글을 적었다고 한다.

다음은 비운의 현역 육군대령 박흥주 수행비서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유서의 일부이다.

-부인에게-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를 위해 할 말은 못하고 말았지만 세상이 다 알게 될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게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의연하게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두 딸에게-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 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자라나는동안 어머니와 친척어른들의 지도를 받고 양육되겠지만 결국 너희 자신은 커서 독립하여 살아야 하는것이다. 독립정신을 굳게 가져야한다. 조금 더 철이 들 무렵이나 어른이 된 후에도 공연히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죽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나가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한다.'

참고로 이분이 김재규의 업적을 알린 분이다. 1심 재판 중 면회온 태윤기 변호사에게 업적 몇가지를 알려주셨다. 김재규 장군님께서 재평가를 받으신 후, 반드시 재조명받고 특진되셔야 하는 참군인 중 한 명.

부록: 김재규와의 비화[편집]

아무래도 김영삼 총재에게 있어서 운명적 라이벌이었던 이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었다. 朴正熙와 얽힌 이야기를 할 때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기억도 생생했다. 金 총재는, 1979년 5·30 전당대회 직전에 정보부가 자신을 탄압한 일에서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김재규가 한 건 아니지만 국장, 차장보 이런 사람들이 내 측근 사람들을 전부 다 만나서 총재 절대 출마하지 말게 하라, 절대 안되게 한다고 말했다더군요. 
정보정치에 (야당인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얼마 안 남았는데도 우리측 사람들이 총재 자신 있으니까 나보고 나가라고 얘기할 때입니다. 
(1979년 봄) 김재규가 롯데에서 한 번 만나자고 해서 저녁에 만났어요. 그때 얘기 다 기억은 못하겠지만, 이건 일반에게 안한 얘기입니다. 정보부장과 만난 거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 말도 안하고 그대로 있는 것은 좋은 방법 아니다, 직접 만나는 게 좋겠다 하는 생각에서 만났어요. 얘기가 상당히 길었어요. 이런 얘기였죠. 

'박정희 대통령이 김 총재를 기어이 총재 안 시키려 한다. 정부의 최종 방침이다. 우리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고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일만은 김 총재가 들어주면 좋겠다. 그 외에는 총재가 원하는 무엇이든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시대에 박정희라는 사람이 강력한 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김 총재가 이렇게 하려고 하면 희생된다'고 얘기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절대로 총재가 탐이 나서 입후보하려는 것 아니다'라고 얘기했죠. 신민당 총재로 나오려고 할 때죠."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 훨씬 전입니까.

'그렇죠. 공작을 시작하려고 할 때니까. 천하를 다 준다 해도 타협은 안합니다. 그따위 얘기를 할 수 있습니까.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정보부 국장 차장보가 만나서 나에게 출마 포기를 권유하도록 했다는 걸 그때 다 들었습니다. 
3국장이 설치고 다닐 때인데 3국장이면 정치국장입니다. 3국장에게 내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누가 누구 만나고 누가 누구 만나는 거 다 들었는데 계속 이런 짓을 하면 신문에 제대로 안 나가지만 다 폭로하겠다. 지금 살아 있어서 이름을 대지 않겠지만 (김재규가) 누구를 도와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제의하더군요.
그러면서 마치 나를 위하는 것 같은 말투로 '박정희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예봉을 잠시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고 얘기하더군요. 기억나는 건 이 정도입니다.'

―김재규가 세 시간쯤 얘기하고 朴대통령께 보고했다 하더군요.

'맞을 겁니다.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장시간이었습니다.' 

―朴대통령 반응은, '김총재 만날 필요 없다. 정보를 보니까 떨어지게 되어 있는데 왜 만났느냐'면서 오히려 역정을 냈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그때는 총재 안되도록 하는 일에 정보부만 개입한 게 아니고 청와대에서도 했습니다. 정권 전체가 개입했죠. 나도 그때 보면 강단 있었습니다. 그 정권과 싸울 생각했으니.'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인간 김재규에 대해.

'김재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얘기 사람들에게 안하는데…) 그 사람 김녕 김씨입니다. 그때 연락한 사람도 김녕 김씨 간부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인데 꼭 만나주라 해서 만나게 된 겁니다. 
김재규가 만나서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나는 어찌 됐든 박정희 대통령하고 있지만 김총재가 불행하게 되는 것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일가가 아니었으면 나도 안 만났을 겁니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 정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보통 결심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일가라는 것을 내세워 나를 회유하더군요.' 

―김재규가 속이는 것 같진 않았습니까.

'모르겠어요. 정보부장이 좋은 일 하는 것도 아닌데 칭찬하기는 이상하지만 그런 얘기할 때는 언뜻 듣기에 나를 걱정해서 하는 걸로 들리기는 하더군요. 
그런 얘기를 나에게 했지만 너무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때 굴복했으면 우리나라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거사 이후[편집]

10.26 사건 다음날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1979년 12월 18일 군사재판을 통해 '내란목적살인 밎 내란미수' 죄로 사형이 확정되고 군교도소를 거쳐 사대문형무소로 이전되었다가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부하들과 함께 사형 집행이 내려졌다.

사형장면 나온 자료 : [4]

현재는 지옥에서 벌집핏자 전문 요리사로 활동하고 계신다. 한강에서 떠오를 예정인 주갤럼들은 가서 꼭 맛보도록 하자.

사후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4-1 삼성개발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9] 혹시라도 가고싶으면 1150번, 1500-2, 17번 버스를 타고 '시안공원묘지.주성 엔지니어링' 정류소에서 내리면된다. 참고로 묘지 꼭대기에있어서 버스에서내려서 한참 걸어야한다. 묘지는 반달리즘에 의해 '의사' 단어가 훼손된상태다.


내가 역사배울때 김재규장군님에 관한 내용은 그냥 내부분열로 박정희 총쏴죽였다.라고 한줄로 적혀있었고,역사선생도 "엥?김재규??그놈??차지철이 박정희에게 총애받는 것에 질투를 느껴서 박정희 쏴죽였는 놈 아냐?"라는 식으로 김재규장군님의 거사를 희화화했다. 최순실게이트 터지기 이전까지만해도 그렇게 배웠고,그렇게 기억하고있었다만...

죄송합니다 장군님ㅜㅜ 이제서야 진면목을 알게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전땅크 일당은 자신들의 "거어어어어사"를 숭고한걸로 만들기위해 때려죽여야 할 탐욕스러운 개새끼를 창조해내야 했고 검소했던 김재규를 탐욕의 화신으로 만들고저 재산이 얼마니 이런 썰을 유포시켰다. 그중 집에서 비싼 미술품이 수두룩하게 나왔다고 주장 하는데 그중 하나가 아직도 논란을 빚고있는 미인도다.

천경자 미인도 위조 사건과 이래저래 연관이 있다는 썰이 많다. 아직까지는 몇몇 언론사와 재야 인사들의 개인적 노력 말고는 제대로 된 검증이 안 일어나서 애매하긴 하지만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다.

평가받지 못하고 묻힌 이유[편집]

특이한 사람이다. 중정부장이면서도 항상 민주주의에 대해서 얘기하고 다녔다.

 
— 윌리엄 클락, 전 미 대사관 정치참사관

유신 정권을 이어 자기 독재체제를 구축하려고 들었던 전문어에게 있어 김재규는 당연히 족쳐야 되는 대상이었고 유신 권력의 핵심이었던 중정부장이라는 출신 때문에 좌파 인사들은 선뜻 그를 옹호하려고 들지 않았다. 중정부장으로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그가 돌연 민주주의를 외치며 독재자를 암살한다는 것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맞는 일로 여겨졌지 현실적인 추론으로 여겨지질 않았다. 고로 자연스럽게 그가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실패한 암살범의 변명으로 여겨졌고, 집권에 실패한 암살자에게 따라붙는 유서깊은 평가인 '권력욕에 찬 시해범','우발적 살해범' 따위의 모멸적인 낙인이 찍혔다. 그의 원 세력인 유신 세력에게서 그는 등을 돌렸으며, 좌파 진영은 혹 민주화의 공을 빼앗길까봐 그리고 권력을 맛보는 동안 자신들의 지지층이 등돌릴까봐 그가 권력욕과 집권욕 때문에 박정희를 시해한 쿠데타범이라는 우파의 말에 침묵으로 동조해서 죽게 내버려뒀다. 그렇게 김재규는 쓸쓸히, 들어 주는 사람 하나 없는 가운데 '자유 민주주의를 만끽하라'고 외치며 사형대로 홀로 걸어올라갔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뤄진 후 공개된 수많은 기록물,증언들을 살펴보면, 그는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막연해보이는 대의를 위해서 10.26을 결행했음을 의심하기 어렵게 된다. 적어도 그를 접하고 그의 인품을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김재규가 야망이나 야심이 아니라 개인적인 민주화에 대한 신념으로 10.26에 나섰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일례로, 시큰둥해서 그를 변호하러 왔던 인권변호사는, 김재규를 만난 지 30분만에 그에게 감화되어 열과 성을 다해 그를 변호하려 들었다고 한다. 12.12가 터진 이후, 신군부는 대놓고 김재규를 개새끼로 몰아가려고 내란사범은 아니다는 소신을 내비친 판사를 끌고가 고문하는 등 서슬이 퍼렇게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가끔 김재규가 말한 자유민주주의적 철학과 신념은 다 변호사가 써 준거 아니냐? 좌파세력이 써준 걸 읊은 것 뿐 아니냐?고 하는데, 당시 좌파세력은 전술되었다시피 김재규를 덮는게 더 이득이었고 변호사들 역시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를 옹호해서 얻을 이득이 없었다. 정말로 김재규에게 감화되어 변호를 끝까지 시도했다고 보는 게 올바르다. 실제로, 이 때 김재규를 변호한 강신옥 변호사는 재판 후 김재규를 너무 열심히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신군부에 끌려가 2개월간 갖은 고초를 겪는다.

김재규를 재평가하는 의의[편집]

좌측의 경우, 10.26 이전에도 유신은 이미 '자연적으로' '민중에 의하여' 몰락할 정권이었는데 이를 실현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끼어들어 결과적으로 유신을 청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현실성보다는 정치성에 치중하여 쓰여진 주장이다. 박근혜의 집권 이후 박사모 등을 통해 새삼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유신의 힘을 재각하면서 과연 유신이 그렇게 간단하게 무너질 수 있는 적이었는지에 대한 회의가 대중들 사이에 공유되며 이 주장은 설득력과 호소력을 잃었다. 유신의 연장선상에 가상의 몰락을 설정하여 '영원히 번영하는 독재정은 있을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인위적으로 생성하고자 했던 것이 이 주장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의도가 좋다 하더라도, 현실로부터 괴리된 역사관은 반드시 사회에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 이러한 주장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과연 그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유신이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어 그 당시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박정희의 영구집권에 대한 현실적이었던 우려, 박정희의 세습에 대한 우려, 공포정치의 실상 등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10.26은 그러한 지식인 사회의 불안감을 한껏 머금고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주장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거기에, 이 주장의 뒤에 깔린 민중을 민주화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은연중 민중의 희생을 긍정하고 있어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지만 그게 너희 피는 아니지 않느냐?는 물음 역시 직접적인 민주화의 실현 대중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박정희 신드롬이 박정희에 대한 연민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10.26 의거 직후부터 계속 그 신드롬이 이어져왔어야 하지만 주간경향 칼럼에서 보여주듯 박정희 신드롬은 IMF 이후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 운동권의 경우 10.26을 평하는 것이 부마항쟁의 의의를 축소하는 것이라고 두 사건 사이에 그릇된 대립항을 설정하여 10.26을 공격하는 경우가 잦다. 이 역시 개인과 사회 간의 유기적인 영향을 통찰하지 못하여 일어난 소리다. 상술되었다시피 수도 없이 물리적 혁명을 계획했던 김재규가 마침내 그 실현을 하도록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 것이 부마항쟁이었다.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공포 정치 하에 억눌러지던 민의를 김재규에게 전달하지 않았더라면 10.26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부마항쟁이 김재규를 자극했고 또 김재규는 부마 시민을 구원한 것이다. 또 부마항쟁의 성립 배경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위시한 민주화 세력의 결사적인 저항이 있었다. 민주화의 논공행상이라는 정치적 현안에서 벗어나 바라보면 개인과 개인, 사회와 개인간의 관계는 이렇게 긴밀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양측 모두 민주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파악해야지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역사적 의의를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측의 경우, 10.26 때문에 박정희의 치세가 끊어져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잃고 이 나라가 요모양 요꼴이라는 건데 야...이건...솔직히 진지하게 다뤄주기도 싫어서 그냥 생략하겠다. 후대의 사람들이 몸젠의 로마사를 읽고 평하듯이 대중의 독재자에 대한 갈구는 일종의 해소 불가능한 대중적 정서의 하나이지 진지하게 이론화되어 정당성을 얻기에는 신빙성과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지금 한국의 보수 세력은 매우 비정상적이다. 한국 외의 모든 나라,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경험하였으며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나라에서, 어떤 보수당도 그것을 지지하는 게 독재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냉전 시대가 종식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어젠다가 아닌 안보적 어젠다를 제 1의제로 삼아 당론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세계는 이미 21세기에 촛점을 맞추고 당쟁을 구성하고 있는데, 우익 세력의 독재에 대한 향수와 집착으로 인해 구시대적인 독재와 반독재 담론에서 정치 담론이 진보하지 못한 채 발목을 잡혀 있다. 김재규는 안보를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일부는 우익 계열과 사상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었으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뚜렷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정상적인 우익이라면 마땅히 김재규와 같아야 한다.

ㄴ 한국은 보수가 없는 나라다. 한국의 정치성향 구조는 빨갱이 아니면 친일파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독일이 진보 아니면 나치만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오늘날 다시 김재규를 평가하는 것은 친일파로부터 이어지는 수구 세력화된 보수 전체가 반성하고 바라볼 수 있는 전범을 공고히 세우며, 박정희에 길항하는 역사적 대립항을 새로 만들어내는 의의가 있다. 중정부장이라는 그의 형식적 신분 탓에 과거에는 그를 평가하기 꺼려했던 좌파 쪽에서 먼저 재평가의 물결을 일으키고 손을 내밀어 모범적인 우익적 인물상을 제시해준 것은, 독재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후 중립적인 관점에서 과거를 조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역사적 역량을 드디어 한국이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는 날, 김재규는 분명히 재평가받을 것이다' 그 손을 잡고 안 잡고는 아직도 김재규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틀딱 새끼들에게 달렸다.

ㄴ 민중에 의해 자연적으로 몰락할 정권이었으면 북한은 언제 무너지는거냐 현실성 하나도 없는 개소리는 안하는게 답이다

글 개잘썼네 책 내용같은 거 스크랩 해온건가?

박뽕의 참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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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 예전에는 박정희가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고 비극적으로 암살당해서 나라가 이꼴됐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다 읽어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유신 이후 박정희는 죽는게 맞았던 거 같다. 딱 올바른 타이밍에 컷 당했다. 덕분에 나같은 박뽕도 있었던거고 나도 예전에는 박정희가 위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분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ㄴ 디시보고 전향하는거 보니까 전향한 박뽕인척 연기하는것 같노 유신이후부터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봤을수 있는데 당시에는 민주주의보다 잘먹고 잘사는게 우선이였다 민주주의??? 그딴거 그당시 사람들한테는 별로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박정희정권때도 안까불고 가만히만 있었어도 독재자의 탄압같은건 안받고 경제 발전하는꼴 보면서 즐겁게 살수 있었다. 누가보면 그때 존나 암울했는줄 알겠노?? 니들이 말하는 경북괴틀딱충들이 박정희를 왜 지지하겠냐 박정희때 자기는 피해도 안보고 산업화되는꼴 두 눈으로 보고 느껴서 그런거다. 당시 국민들은 그냥 나라 잘사는게 꿈이였고 박정희때 그걸 경험할수 있었다. 민주주의?? 박정희 산업화 전의 개발도상국, 산업화 이후의 신흥개발국 수준의 나라에서 그딴거 있어봤자 뭐하냐? 그러면 니들이 동남아 개발도상국 국민일때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와서 가난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게 낫냐? 아니면 비록 독재정권일지라도 뻘짓만 안하면 피해 안보는 신흥개발국에 사는게 낫냐? 당시에 쳐살지도 못했으면서 전교조새끼들한테 선동당해 박정희때 암울했다라고 내뇌망상 쳐하고 실제로 박정희 정권 살아본 틀딱들을 그냥 틀니 딱딱거린다고 무시하는꼴이 정말 우습다. 민주주의는 경제가 어느정도 좋은 나라에서나 기대해볼만 하지 당시에는 산업화>민주주의였다.

박뽕은 아니지만 장군님이 민주투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좆잡고 반성한다. 빡대가리 개돼지들이 위키 글 하나 읽고 전향하는 장면이다. 이 얼마나 가벼운 신념인가?

ㄴ 일베 접속하며 박사모짓 계속 하라는 허가로 받아들여도 되냐?

ㄴ 그래도 발터가 현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은 부정하지 말자

나도 박정희 자체는 괜찮게 보는데 육영수 죽기전까지는 헬반도에서 나오지 못할 6성급 대통령인데, 육영수 저격사건 이후로 박정희와 자식들이 단체로 맛간게 맞다.

그뒤로 브레이크 잡아줄 사람이 없어서 박정희가 폭주하는데, 차지철이 그위로 기름 붓고있는 상태에서 재규어가 적절한 타이밍에 커트 했다고본다.

ㄴ아직도 뽕이 남아있나보다
ㄴ지랄, 10월 유신을 저지른 그 순간부터 이미 반인반신은 그 클라스의 한계가 드러났다. 걍 권력욕의 화신일 뿐.
ㄴ 그런 식이면 10월 유신(1972)이 아니라 3선 개헌(1969)부터 한계 드러났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ㄴ진짜는 제7대 대통령 선거(1971)부터지. 제갈조조 새끼가 무조건 박정희낙선으로 박정희는 물론 자기도 사형될 상황을 돈 풀어서 억지로 당선시켰지 그때 서울에서도 더블스코어로 김대중한테 발렸는데 뭘, 근데 그렇게 해줘도 90만표로 진땀승을 해버리니, 박정희는 낙선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게 박정희를 흑화시킨 것이다. 박정희는 권력의 욕심 여부를 떠나서 낙선에 대한 공포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승만이야 미국에 연줄이 있는 미국통이니까 미국으로 나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박정희는 낙선된 이후에는 아예 사형당할수도 있거든. 살고 싶어서 발악했던 게 흑화가 된 거고 그 공포 때문에 직접선거를 폐지하고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근데 여기서 박정희는 진짜 헌정사상 최고 수준의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걸 김일성에게 통보한 게 그것이다. 김일성이 그거 받아보고 자기도 벤치마킹해서 사회주의 헌법을 선포했는데 이 놈의 나라가 이것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있다. 천년만년 다스려먹을 거면 지 혼자 하지 왜 김일성이 한테... 스탈린 말도 안듣고 지 고집불통으로 전쟁까지 쳐 일으킨 게 김일성이라서 김일성이 한테는 뭔가 권유하거나 내가 뭐 했다고 통보하는 짓거리 같은 거 하면 안되는 거다. 그런거 권유하거나 알려주면 김일성 이 새끼는 못된 쪽으로 바꿔서 따라하는 미친새끼라서 안되는것이다.

장군님을 필요로 하는 놈년들[편집]

ㄴ 문재앙 적지 마라 문재앙은 탄핵되서 감옥에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야 한다 그 전에 뒤지면 대깨문 새끼들이 그분 죽었을 때처럼 지랄할 테니까.

같이 보기[편집]

각주

  1. 김재규가 일으킨 의거 덕분에 부마민주항쟁 무력진압 계획이 흐지부지되었고 그 덕분에 1백만 명 이상의 부산, 마산의 시민이 살아남게 되었다.
  2. 박정희와 고향이 같다. 그래서 육영수 피살사건 이후 이성을 잃고 있었을 때 입바른 소리를 하던 김재규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기도 하다. 특히 박정희의 상태는 말년으로 갈수록 심해졌는데 부가가치세를 만들어서 하루 만에 물가를 10%를 올리거나, 부산과 마산에서 반정부 시위가 생겼을 때 계엄령을 선포해서 피를 보게 하거나, 친딸사이비 교주 최태민 일가에 농락 당하고 있었을 때도 최태민을 경고한 김재규에게 오히려 화를 내는 등 이성을 잃고 있었다.
  3.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서거하시기만 하면 중앙정보부장님이 그 후임이 되실 겁니다."라는 존나 큰 말 실수를 했는데 이후락이 이걸 듣고 히히덕 거린 게 이유였다.
  4. 이후락의 바로 다음 후임이 신직수다. 참고로 인혁당 사건이 신직수 시절에 터졌다.
  5. 이 사건은 당장 강제예편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육참총장이었던 이세호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당장 짤라버리려 했던 걸 특전사령관 정병주가 애걸복걸해서 겨우 무마한거다.
  6. 김재규가 장준하 선생을 깊이 존경했던 이유도 선생이 민주화 운동가이면서도 동시에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7. 서승 형제는 징역을 마친 뒤에도 줄곧 본인들의 무고함을 주장했으며, 현 시점에선 박정희 정권의 희생자로 간주된다.
  8. 안타깝게도 생략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발견되면 추가바람.
  9. 자동차 네비게이션 검색 시에는 오포읍 능평리 4-1로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며, 실제 지적상 묘소의 정확한 지번은 경기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21-3이다. 다음 지도에 김재규 장군 묘소의 위치가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