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켄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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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대 덴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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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대 쇼무 덴노 | → | 46대 고켄 덴노 | → | 47대 준닌 덴노 | |
47대 준닌 덴노 | → | 48대 쇼토쿠 덴노 | → | 49대 고닌 덴노 |
일본 46, 48대 덴노 | |
시호 | 孝謙天皇(1차) 쇼토쿠 천황/칭덕천황(2차) 称徳天皇(2차) |
존호 | 보자칭덕효겸황제(宝字称徳孝謙皇帝) |
재위기간 | 749년 8월 19일 ~ 758년 9월 7일(고켄) 764년 11월 6일 ~ 770년 8월 28일(쇼토쿠) |
궁호 | 없음 |
휘 | 아베(阿倍) |
성별 | 여성 |
출생일 | 718년 |
사망일 | 770년 8월 28일 |
황배 | 없음 |
능호 | 다카노능(高野陵) |
연호 | 덴표쇼호(天平勝宝/천평승보) 덴표호지(天平宝字/천평보자) 덴표진고(天平神護/천평신호) 진고케이운(神護景雲/신호경운) |
황거 | 평성궁(平城宮) |
개요[편집]
일본의 46, 48대 천황이자 6번째 여성천황이다. 그리고 고교쿠 천황처럼 천황을 두 번 한 사람이다.
1차 재위기(고켄 천황)[편집]
아버지 쇼무 천황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며, 자신을 후원한 고묘 황태후(光明皇太后)를 위해 자미중대(紫微中台/황태후의 가정기관)를 설치하며, 자미중대의 장관으로 후지와라씨인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를 임명하면서 다시 후지와라씨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한다.
749년 덴표쇼호(天平勝宝/천평승보)로 개원하였으며, 757년 누에가 오월팔일개하제석표지천황명백년식(五月八日開下帝釋標知天皇命百年息)이라는 글자를 그리면서 지나갔다는 이유로 덴표호지(天平宝字/천평보자)로 개원한다.
이후 힘이 강해지는 후지와라씨를 경계한 다치바나씨의 수장 다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가 난을 일으키는 계획을 세우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에 의해 실패하고 난에 가담한 자 들은 전부 제거된다.
760년에는 화폐인 만년통보(万年通宝)를 주조한다.
이후 고묘 황태후를 보살피기 위해 황위를 오이(大炊) 왕에게 양위하고 퇴위한다.
상황시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준닌 천황과 함께 난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조정 대신은 후지와라노 도요나리(藤原豊成)로 교체됨과 동시에 준닌 천황을 폐위하고 764년에 다시 즉위한다.
2차 재위기(쇼토쿠 천황)[편집]
준닌 천황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으며,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을 신의 힘으로 막았다고 해석하면서 덴표진고(天平神護/천평신호)로 개원한다. 이후 도쿄(道鏡)를 태정대신으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2차 재위기는 도쿄와 쇼토쿠의 공동통치기로 이어진다.
765년, 수도의 해룡왕사(海龍王寺)에서 부처의 사리가 출현한 일을 계기로 도쿄를 법왕(法王)으로 삼는다. 그리고 동년에 화폐인 신공개보(神功開宝)를 주조한다.
이후 도쿄의 동생인 유게노 기요히토(弓削浄人)가 중납언(中納言)이 되면서 도쿄의 힘이 조정에서 더욱 강해진다.
쇼토쿠 천황은 이후 서대사(西大寺)를 증축하고 서륭사(西隆寺)를 축조하였으며, 수많은 불탑을 제작하는 등의 불교주의적 정책을 펼쳤으며, 신사 내에 사찰을 짓는 등의 신불습합 정책도 이어졌다.
767년,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진고케이운(神護景雲/신호경운)으로 개원한다.
이후 군사 조직인 내수성(内豎省)을 설치하고 장관급인 경(卿), 경 밑에 대보(大輔)와 소보(少輔) 각 한 명, 대승(大丞)과 소승(少丞) 각 두 명, 대록(大録) 한 명에 소록(少録)이 세 명을 두었다.
769년에는 이복 여동생 후와(不破) 내친왕과 히카미노 시케시마로(氷上志計志麻呂)가 천황을 저주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시라카베(白壁) 왕은 술에 빠진 척을 하면서 이를 피하였다.
이 무렵, 다자이후의 책임자였던 유게노 기요히토와 우사 하치만궁의 주신(主神)인 나카토미노스게노 아소마로(中臣習宜阿曾麻呂)가 "도쿄를 황위에 앉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라는 우사 하치만궁의 신탁을 알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사 하치만궁의 법균(法均) 와케노 히로무시(和気広虫)의 남동생인 와케노 기요마로(和気清麻呂)를 우사하치만구에 보내는데, 8월에 우사하치만구에 참배하고 보물을 바친 뒤 선명의 문장을 읽으려는 칙사 앞에 신이 신관 가라시마노 스구리요소메(辛嶋勝与曾女)에게 내려 선명을 선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에 의심을 품은 그는 재차 스구리요소메에게 선명을 청했고, 스구리요소메가 다시 신에게 현신을 청하자 키가 석 장(대략 9m)이나 되는 승려의 모습을 한 하치만신이 기요마로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재차 선명을 내리기를 거절했고, 기요마로는 이를 "하늘로부터 이어진 천황가의 자리는 반드시 미카도의 일족에게만 잇게 하라는 계시다!"라는 대신의 신탁을 갖고 돌아가 아뢴 다음 "앞서의 신탁은 허위"라고 복명했다.
이에 빡친 천황과 도쿄는 기요마로의 이름을 강제로 고치게 한 다음 인번원외개(因幡員外介)로서 좌천시켰다가 다시 이름을 와케베노 게가레마로(別部穢麻呂)로 강제개명시킨 뒤 오스미국에 유배해버렸다. 비구니였던 기요마로의 누나 히로무시도 강제로 환속당하고 와케베노 히로무시메(別部広虫売)'라고 이름이 고쳐진 채 빈고국으로 유배되었다.
동년 10월 1일에 쇼토쿠는 조를 내려 멋대로 황위를 구하려 하지 말 것이며, 차기 계승자는 여제 자신이 결정할 것임을 재차 표명했다.
이수 770년에 병이 악화되면서 붕어한다.
연호[편집]
연호 이름 | 사용 시기 | 년수 | 개원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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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쇼호(天平勝宝/천평승보) | 749년 8월 19일 | 757년 9월 5일 | 9년 | - |
덴표호지(天平宝字/천평보자) | 757년 9월 6일 | 765년 1월 6일 | 9년 | 누에가 오월팔일개하제석표지천황명백년식(五月八日開下帝釋標知天皇命百年息)이라는 글자를 그리면서 지나갔다는 이유로 개원 |
덴표진고(天平神護/천평신호) | 765년 2월 7일 | 767년 9월 12일 | 3년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을 신의 힘으로 막았다고 해석하면서 개원 |
진고케이운(神護景雲/신호경운) | 767년 9월 13일 | 770년 10월 22일 | 4년 |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