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1870년대

조무위키

개요[편집]

1870년부터 1879년까지의 연대.

조선[편집]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1871년 미군이 신미양요를 일으켜 헬조선에 따끔한 불맛을 보여주며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으나 얻을 게 없어서 걍 돌아갔다. 하지만 고종이 나이를 먹으면서 최익현의 상소에 따라 흥선대원군은 쫓겨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민자영이라는 희대의 개씨발년이 나타나면서 다 된 밥에 설사를 싸버리는데, 개화할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1875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을 때 일본측이 "조센군이 감히 닛뽄제국의 배를 공격했스므니까!?"를 시전하며 호구를 잡혔으며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일본과 체결하며 조선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일본은 이 조약으로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여하튼 민비의 집권으로 여흥 민씨의 새로운 세도 정치가 열려 많은 여흥 민씨들이 실권을 잡았고, 이맘때부터 개화파들이 조선 조정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시아[편집]

일본 제국[편집]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 제국을 수립한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을 위해 폐번치현을 실시하여 자치권을 가진 을 폐지하고 대신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을 설치했다. 또한 시나가와와 요코하마 사이에 일본 최초의 열차가 개통되었으며 치안을 위해 사무라이를 비롯한 민간인들이 칼을 차는 것도 금지시켰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정한론자들이 조선 정벌을 외치고 다녔으나 당시 나라 내부의 개혁도 끝마치지 못한 메이지 정부에서는 반대 의사를 표했다. 결국 다카모리는 정권 다툼에서 패했으며 사쓰마 현으로 내려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세이난 전쟁이 발발했다.

사쓰마 현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전쟁에서 패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자살을 택했다. 사후 그의 이념은 일본 좌익과 우익 모두의 이념적 근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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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교육을 도입했으며 기술자를 선발했고 해군을 양성했다. 또한 민간 자본을 길러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잠식당하지 않게 했다. 동치제 사후 서태후광서제를 옹립하면서 제국의 실권은 서태후가 장악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편집]

탄지마트를 이어나갔으나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에게 개작살이 나고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세르비아, 루마니아, 보스니아를 뱉어냈으며 불가리아를 오스만 본토에서 속국으로 반쯤 독립시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스만의 시대는 완전히 끝장이 났으며 결국 술탄 압뒬하미트 2세는 탄지마트를 중지하고 의회 해산, 헌법 정지로 전제 군주제를 부활시켰다.

유럽[편집]

토후국이나 제후국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민족국가로 통일됨으로써 유럽 역사상 지도가 가장 깔끔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제국[편집]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오스만 제국을 격파해 발칸 반도로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한편 보수주의 정책이 이어져나가는 와중 러시아 내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유입되어 공산주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이어지며 산업화의 장점과 폐단 모두가 나타났다.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편집]

프로이센이 북독일의 패자가 되었으며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호구 짓으로 프랑스와 관계가 나빠졌고 결국 엠스 전보 사건으로 보불전쟁이 발발했으며 결국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에게 쳐발렸다. 이후 프로이센은 파리를 점령한 상태로 당시 왕이었던 빌헬름 1세가 대관식을 통해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독일이 통일되었다.

이후 비스마르크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베를린 회의를 개최해 프랑스를 왕따시켰으며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고 영국과도 적당히 친하게 지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편집]

베를린 회의를 통해 보스니아를 오스만으로부터 뺏어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적이었던 독일과도 화해했다.

이탈리아 왕국[편집]

보불전쟁 도중 교황령에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교황령을 침공해 이탈리아의 영토로 편입하면서 1100년 간 이어져 내려오던 교황령이 완전히 멸망했다. 교황 비오 9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이탈리아 국왕을 파문했으나 이탈리아 왕국 측은 교황에게 매년마다 생활비를 보내주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반을 다지며 1878년 사망, 이때가 되어서야 교황이 파문을 풀고 성찬례를 해 주었다.

이후 이탈리아 국왕으로 움베르토 1세가 즉위했다.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제3공화국[편집]

프로이센과의 관계가 나빠져 엠스 전보 사건이 터졌으며 결국 국민들의 항의를 이기지 못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며 보불전쟁이 터졌으나 쳐발리고 파리를 점령당했으며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황제로써 즉위했다.

나폴레옹 3세의 병신짓과 독일의 만행에 부들댄 국민들은 들고일어났고 나폴레옹 3세는 폐위당하며 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한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맘에 안 들었던 국민들은 다시 들고일어났고 그 중 빨갱이들이 파리를 장악해 파리 코뮌을 세웠다. 파리 코뮌은 좌익 정부로써 노동자의 인권 향상과 종교-교육 분리, 여성인권 신장 등을 했으나 그 정도가 급진적인 탓에 오히려 혼란만 일으켰으며 많은 문화재들이 공산주의 정책 아래에 파괴되었다.

결국 이는 프랑스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코뮌 내의 급진파들은 반대파들에 대한 학살을 벌였으며 프랑스군도 코뮌 지지자들을 학살하는 등 개판이 났다. 하지만 파리 코뮌 사건은 빨갱이들에게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운동의 모티브로 받아들여져 많은 빨갱이들을 양성했다.

영국[편집]

영국 동인도 회사가 공식적으로 해산되며 영국의 인도 제국 직접통치가 고착되었으며 영국의 인도에 대한 지배가 더욱 견고해졌다. 또한 산 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조약으로 키프로스 식민지를 얻으면서 중동 식민화의 서막을 알렸다. 당연하지만 이 때의 영국은 세계 최강국으로써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보호령으로 만들었으며 남아프리카의 줄루를 침공했는데, 원주민들과의 싸움인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되려 영국군이 크게 쳐발리기도 했다. 하지만 뒤늦게 군사력을 증원해서 줄루를 녹여버렸으며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에스파냐 왕국[편집]

당시 스페인을 장악한 급진주의자들은 새 국왕으로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의 왕자 아마데오 1세를 찾아 즉위시켰다. 하지만 하도 나라 상황이 개판인데다가 아마데오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냥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왕을 해먹을 놈이 없어지자 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공화국은 내부의 문제가 너무 많이 쌓여있었고 국민들의 반발을 산 정부가 많아 여러 대통령들이 하야하거나 탄핵당했다. 결국 세라노 장군이 독재를 시작하려 했으나 군부의 쿠데타로 군부 측에서 알폰소를 왕위에 올리자는 의견을 내자 이를 받아들여 제1공화국은 사라지고 보르본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새 국왕으로는 알폰소 12세가 즉위했다. 이번에는 진짜 입헌군주 국가가 되었다.

미국[편집]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사실상 개작살이 난 상태였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이어나가 금수저들이 부를 쌓았으며 거대 기업과 재벌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앤드루 카네기, 존 데이비슨 록펠러 등이 있었다. 또한 아메리칸 드림을 내세우며 전 세계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펼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개발이 덜 된 서부도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제국주의 행보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도 이때 신미양요로 미국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남북전쟁 영웅인 공화당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이 1877년까지 대통령으로 있었다. 하지만 정치는 그닥 잘하지 못한 듯하며 임기 종료 이후에 치뤄진 다음 대선에서 또 공화당 후보인 러더퍼드 B. 헤이스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남부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자 폭동이 일어났고 결국 남부의 군정을 종식시키는 것으로 합의한다. 그리고 작살났던 남부의 경제기반 시설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생[편집]

우리나라 털리던 시절을 살아와서 대부분 일제시대에 돌아가셨다.

일부는 광복까지 맞이하신 분들도 계신다.

조선최후의 군주 순종(1874-1926), 세계 최장수 할머니 잔루이즈 칼망(1875-1997), 런승만(1875-1965), 김구(1876-1949), 안창호(1878-1938), 안중근(1879-1909) 등이 있다.

1950년 기준 한국에 214,120명이 살아있었다. 1960년에 64,024명으로 줄어들고, 1970년에 3,179명으로 줄어들었다. 1980년에는 약 66명가량으로 줄었다.(영상 참조하면서 작성했다. 1860년대생이나 1880년대생이 포함되어있을 수도 있다.) 이 66명은 초가집에서 양반보면 절하던 신분제 시대부터 대한제국, 일제시대, 광복과 6.25,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모두 겪고 타꼬야끼의 쿠데타까지 지켜본 한국 근현대사 그자체이다. 사실 이분들이 제일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