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조무위키
일본의 역사 | |||
선사 | 죠몬 시대(縄文時代) 야요이 시대(弥生時代) 고훈 시대(古墳時代) | ||
고대 |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나라 시대(奈良時代)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 ||
중세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安土桃山時代) | ||
근세 | 에도 시대(江戸時代) 세키가하라 전투 | ||
근대 | 일본 제국(大日本帝国) 메이지 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
메이지 시대 (明治時代) 다이쇼 시대 (大正時代) 쇼와 시대 (昭和時代) | |
현대 | 현대 일본(日本国) 군정기 |
쇼와 시대 (昭和時代) 헤이세이 시대 (平成時代) 레이와 시대 (令和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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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개요[편집]
일본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시대구분[편집]
일본의 시대구분은 유적, 수도, 막부 소재지, 연호 등으로 이름을 정한다.
보통 선사-고대 시대는 유적→수도 순서, 중세-근세(막부시대)는 막부 소재지, 근대(일본제국)와 현대 일본은 연호로 정해진다.
특이하게도 3개씩 나누어떨어진다. 선사시대는 조몬 야요이 고훈, 고대는 아스카 나라 헤이안, 중근세는 가마쿠라 무로마치 에도, 근대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 현대는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
- 선사 시대(유적) - 중앙집권이 안 되었기 때문에 기록도 매우 부족하고 고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적 이름을 가지고 온다.
- 조몬 시대: 죠몬은 새끼줄 문양이라는 뜻으로, 새끼줄 문양이 새겨진 유적이 많이 출토되어서 조몬이라고 부른다.
- 야요이 시대: 야요이는 지역 이름이지만 야요이에서 유적이 많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
- 고훈 시대: 전방후원분이라는 고분(무덤)이 많이 발굴되어서 붙은 이름.
- 고대 시대(수도) - 율령체제를 도입하며 일본이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통합되었고, 천황이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던 시기이기에 천황의 소재지를 중심으로 시대구분을 한다.
- 아스카 시대: 실질적 수도가 아스카라서 붙은 이름이다. 실제로는 아스카 말고도 여러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긴 했지만. 이때부터 일본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되며, 중국과 백제를 벤치마킹하여 중앙집권된 국가가 형성된다.
- 나라 시대: 수도가 지금의 간사이 나라 현에 있었던 시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율령 체제가 최전성기를 맞았다.
- 헤이안 시대: 수도가 지금의 간사이 교토부에 있었던 시대. 천황의 권위의 절정이자 동시에 추락하기 시작한 건 이 시점부터.
- 중세 시대+근세 시대(막부 소재지) - 중세는 천황의 중앙집권이 붕괴하고 중앙에는 막부가, 지방은 슈고 다이묘가 다스리며 지방분권화가 이루어진 시대이고, 근세는 다이묘가 몰락하고 막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다시 시작된 시대이다. 여러모로 막부가 중심이었기에 막부 소재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참고로 천황 소재지는 헤이안 시대와 마찬가지로 계속 교토였다.
- 가마쿠라 시대: 막부의 소재지가 가마쿠라이던 시대.
- 무로마치 시대: 막부의 소재지가 무로마치이던 시대. 남북조 시대와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시대에 포함된다.
- 에도 시대(근세 시대): 막부의 소재지가 에도이던 시대. 다이묘의 권한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고 중앙집권이 다시 가속화되기 때문에 에도 시대는 따로 근세라고 부른다.
- 근대 시대(연호) - 일본 제국. 다시 천황과 신정부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진 시대. 천황이 다시 대중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천황의 재위기간과 연호 사용 기간을 일치시키는 '일세일원제'가 도입됨에 따라 연호를 통해 시대를 구분한다.
- 메이지 시대: 무츠히토의 재위기간=메이지 연호의 사용기간을 일컫는 말
- 다이쇼 시대: 요시히토의 재위기간=다이쇼 연호의 사용 기간을 일컫는 말
- 쇼와 시대: 히로히토의 재위기간=쇼와 연호의 사용 기간을 일컫는 말. 근대로 한정하면 2차대전 종전까지만. 쇼와 시대는 근대와 현대로 쪼개진다.
- 현대 시대(연호) - 일본국.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 돌아가고, 내각이 일본을 다스리는 현대 민주 국가 시대. 하지만 시대구분은 여전히 연호를 사용한다.
- 쇼와 시대: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 현대로 한정하면 2차대전 종전 직후부터 1989년 1월 히로히토의 사망까지.
- 헤이세이 시대: 아키히토의 재위기간=헤이세이 연호의 사용 기간을 일컫는 말.
- 레이와 시대: 나루히토의 재위기간=레이와 연호의 사용 기간을 일컫는 말.
고대를 헤이안 중기까지, 중세를 헤이안 말기부터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근세의 경우 무로마치와 에도 사이에 끼어있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쇼쿠호 시대)를 포함하기도 한다.
황위 계승자가 2명이므로 현재로서는 레이와 다음의 이름을 알 수 없는 2개의 시대가 확정되어 있다. 하나는 후미히토의 재위기간이고, 하나는 히사히토의 재위기간이다. 연호가 어떻게 결정될지는 알 수 없다.
고대[편집]
선사시대 일본 열도에는 죠몬인들이 살고 있었다. 죠몬인들은 수렵, 채집과 조잡한 농업을 경제기반으로 하여 살아가던 종족이었다. 이후 북방계 야요이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기원전 7~8세기경 국가가 성립되었으며 이 때 최초로 천황(덴노)라는 것이 등장했다. 첫 덴노는 진무(神武) 덴노라고는 하지만 사실 일본 내에서도 일본의 첫 덴노로 알려져 있는 진무 덴노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 많다. 일본 역사학자 대다수도 10대 덴노인 스진 덴노(BC 148~AD 29 : 그나마 역사적으로 실존했다는 스진 덴노조차 180년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게 일본의 고대사이다)로 보는 것이 주류이고, 1~9대 덴노는 이주갑인상등을 하기 위한 주작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
ㄴ 는 건 완벽한 개소리 of 개소리이고, 실제로 일본에서 천황(덴노)이 등장한 건 중국(당나라)으로부터 천황 칭호를 수입해서 본격적으로 쓴 게 정설이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닥치고 대왕(大王 - おおきみ, 오오키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ㄴ 알았으니까 출처좀. 개소리 of 개소리라고 할만큼 확신에 찬 반박을 한다면 출처 정도는 껌이겠지? 그럼 출처 내놔바바.
ㄴㄴ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하늘의 '황제'라는 칭호가 처음 나온 국가가 중궈니 일본이 천황이란 칭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본이 중궈애들 왕 칭호를 배껴 썼다는 걸 여실히 증명하는 팩트지
ㄴㄴ 천황이란 단어는 40대 덴무 덴노가 첫 사용했다. 당시 중국은 측천무후 치세였고 674년에 측천무후가 자기를 황제가 아닌 천황이라고 칭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덜도 함 해보장께! 하면서 자기를 천황이라고 선언했다. 그 이전에는 어디에서도 천황이라는 단어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황제 칭호를 전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쓴 나라는 중국 진시황때부터이지 절대로 일본이 아님을 밝혀둔다.
문명 성립 시기만 보면 중국은 당연하고 한반도보다도 짧은 역사를 지녔지만 이에 대해서 이상한 자부심을 갖지 말도록하자. 기원전 4400년에 파라오가 출현한 이집트와 기원전 7000년 경부터 문명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크 지역)이 현대에 어떤지를 생각해보면 국가의 잘 나가고 못 나가고와 그 지역의 역사의 길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당장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미국의 역사가 워싱턴 때부터 겨우 240년이다.
죠몬인들은 일본 열도에서 1만년 이상 주류종족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기원전 4~3세기경에 한반도와 중국에서 넘어온 야요이인들에게 숫적, 기술적으로 압도당하여 주류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야요이인들은 일본 열도에 선진화된 기술들을 이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쌀 농사와 청동기 등이 있다. 이같은 문명의 전파는 일본 열도에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고대 부족국가가 형성될 환경을 조성하였다.
초기의 일본 역사는 큐슈 및 혼슈 서쪽에서 서서히 혼슈 동북부로 영향력을 넓혀간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왜국(倭國)은 이미 기원전 중국의 '한서'에서 그 국명이 등판하지만, 최초로 중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일본의 왕국은 야마타이국이었다. 야마타이의 여왕인 히미코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던 위(魏)나라의 천황인 조비에게 사절단을 보내 후한 대접을 받고 왜왕으로 책봉받았다. 이 야마타이국은 큐슈에 위치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큐슈 야마토론 떡밥의 주 소재가 됐으나, 지금은 혼슈의 키나이 지방에서 야마토가 출발했다는게 다수론이다.
키나이의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수립된 일본 최초의 고대 국가인 야마토는 주변의 잡부족국가들을 쓸어담아 세력을 확장한 후, 지옥불반도의 백제와 친교 관계를 맺고 긴밀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 우호적인 외교적 관계를 토대로 양국 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백제로부터 대륙의 선진화 된 문화를 전수 받기에 이른다.
7세기 후반 일명 당나라 따라하기 유행의 영향을 받은 쇼토쿠 태자에 의해 다이카 개신이 단행되어 대거 수입한 중국의 제도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국가가 완성된다. 당시 일본은 수차례 수도를 바꾸다 결국 오늘날의 교토인 헤이안(平安)에 안착하게 되었는데, 헤이안은 당시 일본의 권력이 집중된 정치도시로 리즈시절 인구가 약 20만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따라하기 운동은 헤이안 시대 일본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국뽕적인 조류인 국풍(國風) 운동에 의해 사그러들고, 9세기 말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과 안록사의 난이 일어나 중국 상황이 개막장이 되자 견수사, 견당사와 같은 견중국사절단 제도가 영구히 폐지됨으로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본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력이 축소됨으로 인해 그 반동으로 고유 문화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헤이안 시대는 일본 문화가 그 아이덴티티를 확립한 시기이다. 일본의 고유문자인 가나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고,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인 '겐지 모노가타리'가 이 시대에 집필되었다.
헤이안 시대의 주역은 경쟁 가문들을 박살낸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을 사실상의 바지사장으로 만들고, 중앙의 막강한 정치권력을 기반으로 전국에 '장원'이라 불리는 가문 사유지를 두고 이를 확장하였다.
이 장원제도는 일본이 대륙국가와 다른 길을 걸어가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장원들은 물리적 거리, 그리고 교통상의 문제로 인해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그 관리권이 위임되었고 장원을 위임경영하면서 부를 획득한 지방 유력자들이 호위무사를 고용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사무라이의 기원이 된다. 또한 일본은 중국의 제도를 카피하면서 중국의 고유 사회제도인 양천제(良賤制)를 도입했지만 장원제도의 영향으로 양천제(그리고 노비제도)가 일본의 인문환경에 맞지않아 폐기되었는데 이 또한 지방권력의 강화에 그 원인이 있다.
중세[편집]
국가의 중앙집권체제와 강력한 지방세력의 공존이라는 모순적인 권력구조 상황은 헤이안 시대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심화시켰고, 결국 장원체제 하에서 발달한 무사 계층이 12세기에 왕과 중앙귀족을 나가리로 만들고 지들끼리 나라를 해쳐먹게 되었다. 일본의 권력을 차지한 무사들은 천황과 중앙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헤이안의 기존 조정을 폐지하지 않고 존속시키는대신 무사들을 축으로 하는 또 다른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는데 그 군사정부를 '막부'라고 부른다.
최초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로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의해 설립되였다. 미나모토 가문은 절치부심 끝에 다이라 가문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일본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그 권력이 미약하였다. 가마쿠라 막부의 실질통치력이 미쳤던 지역은 일본 동부의 일부 지역들뿐이었고, 대부분의 지역은 사실상 막부의 통치권력 바깥에 있는 지역유지들의 소왕국들이었다. 결정적으로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카마쿠라 막부의 재정이 소진되어 쇠퇴해버렸다.
가마쿠라 막부의 세력 약화를 감지한 조정의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앞세워 막부에 황금 죽창을 선사하여 이를 멸망시켰으나, 죽창질의 선봉장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통수를 쳐서 결국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 막부와 함께 사이좋게 망하게 된다.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고다이고 천황이 수도인 교토를 버리고 교토 남쪽의 요시노에 분조를 수립함에 따라 일본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조정이 둘로 나뉘게 되지만, 고다이고 천황의 분조인 남조는 얼마 가지 않아 아시카가에 의해 멸망 당하였다.
일본의 새로운 집권자가 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의 '무로마치'라는 금수저 동네에 막부를 차리는데, 이 막부가 '무로마치 막부'이다.
무로막치 막부는 일본 역대 막부들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정권에 속하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를 창업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나 에도 막부를 창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달리 막부 설립자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자체세력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토대로 다른 지방충들에게 강제력을 동반한 영향력을 행사한 미나모토나 도쿠가와와는 달리 아시카가는 지방세력에 강제력을 행사할 능력이 종범이었기 때문에 지방세력과의 친밀도를 올리는 친목좆목질로 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이 취약한 중앙권력 자체가 훗날 센고쿠 시대 도래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들어선 이래로 일본은 왜구문제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가 조공무역제도를 도입함으로 인해 명나라와의 무역로가 막히는 사태가 일어난다. 중국의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타격을 받은 일본의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명나라에 조공을 하여 책봉까지 받고 감합무역을 하려고 굽신거렸으나 명나라의 일본 취급은 여전히 안습했고 중국에서 왜구활동은 지속되었다.
외교상황도 좋지 않았지만, 내부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상기한 대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구조는 매우 취약하였고 결국 오닌의 난이라 불리는 지방충들의 세력다툼을 막부가 중재하는데 실패하여 국가는 사실상의 무정부상태에 빠졌고 이로 인해 전국에서 다이묘들이 미쳐날뛰게 된다. 이 각지에서 소규모 다이묘들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였던 시대를 전국(戰國) 시대, 일본어로 센고쿠 시대라고 부른다.
센고쿠 시대에 영지 내 군소세력들을 잘 수습하고 두각을 드러낸 다이묘로는 오다 노부나가, 타케다 신겐, 우에스기 켄신이 있었다. 하지만 타케다와 우에스기가 사이좋게 병걸려 뒤진 덕분에 라이벌이 사라진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할 뻔했다. 하지만 심복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혼노지에서 통수를 맞고 구워졌고 일본의 통일은 노부나가의 밥상에 가장 먼저 숟가락을 얹은 오다 노부나가의 심복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달성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저를 빠르게 얹기는 했지만 근본없는 똥수저 출신이었고, 라이벌인 은수저 출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빵셔틀 경력이 더 길다는 점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를 계승할 명분이 취약했었다. 실제로 도요토미가 노부나가가 남겨놓은 세력을 장악하자 동쪽의 도쿠가와는 딥빡했고 결국 양측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노부카츠와 팀먹었기 때문에 명분론적 우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지의 규모도 도요토미 직할령보다 도쿠가와의 직할령이 더 컸었고 실제로 도요토미 군과 도쿠가와 군이 맞붙은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군이 우세를 점하였다. 하지만 오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고 도쿠가와의 통수를 치는 트롤링을 선사하자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에 대항할 명분을 상실하고 이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최대의 라이벌을 격퇴한 도요토미는 최후의 반항세력인 시마즈 세력과 후 호죠 세력을 정리하여 일본을 완전통일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세력권을 일본 열도를 넘어 대륙까지 확장하고자 본인의 최측근 다이묘들을 앞세워 조선과 명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이에 실패하고 본인은 병사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자 도요토미 가문은 그 세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는데, 이는 무로막치 막부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의 통치기반이 취약했고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요시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기회를 엿보며 칼을 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통수를 세키가하라에서 멋드러지게 치고 일본 동부의 칸토 평야에 위치한 도시인 에도에 막부를 건설하였다.
근세[편집]
- 관련문서 : 에도 막부
에도 막부는 이전 일본 군벌정권들에 비해 훨씬 더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갖췄다. 우선 일본 영토의 약 1/4이 도쿠가와 가문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통치가문의 자체권력이 막강했을 뿐만이 아니라, 오랜 군벌통치의 전통과 경험에서 유래한 정교한 제도들이 등판했기 때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산킨코타이 제도가 있었는데, 산킨코타이 제도는 지방충들의 세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막부거점도시인 에도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수 있는 제도였다. 여하튼 이러한 안정적인 통치기반 하에 250년간 평화가 이어졌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 일본의 주력수출품이었던 미네랄이 고갈되고 이로 인해 나타난 사무라이 계층의 몰락문제나 기후변화로 인한 기근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막부의 위신은 추락하게 된다.
결국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 군대를 끌고 강제로 문을 열어버리게 되자 천황파와 막부파의 내전을 거쳐 에도 막부는 망하고,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어 드디어 천황이 다시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사실 일본인들은 천년동안의 막부 지배에 익숙했던지라 한동안 천황이 뭔지도 몰랐다.
근대[편집]
페리에 의한 개국으로 인해, 일본은 중화의 사대교린질서에서 벗어나 서양근대국제법질서로 편입하게 된다. 그 이후 메이지 유신을 통해 내부구조 개편을 성공적으로 단행,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하게 된 일본이었지만 1868년 당시 일본은 삼류 후진농업국가에 불과했고 대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노무노무 많았다.
당시 일본엔 충분한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자본이 축적되어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간이 자체적으로 산업을 육성하기 힘들었고 이에 정부가 나서서 국영 산업을 육성하여 모범을 보인 후 국영기업들을 헐값에 (정부와 커넥션이 있는) 기업가들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산업을 육성하였다. 또한 오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해외로 사절단을 대거 보내 구미국가의 기술과 제도를 배우고 들어왔다. 당시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세력은 조슈번과 사츠마번 출신의 무사들이였다고 한다.
최초로 일본의 주력 수출품이 된 아이템은 실크였다. 1870년경 일본의 실크 생산량은 연 1000톤 수준이었지만, 40년 후에는 약 연 12,000톤을 생산하게 되면서 세계 1위 실크 수출국가가 된다. 일본의 상사들은 점차 영국과 미국 선사들을 따돌리고 대중국 무역에서 우위를 점해갔고, 산업의 쌀인 석탄생산량 증가도 연 두자릿수를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눈부신 국력의 신장을 근거로 일본 제국은 국제적인 세력권 다툼의 장에 뛰어들게 된다.
일본 제국의 전비지출 | |||||||||||
전쟁 | 총 전비지출[1] (A) |
1년 세금수입[2] (B) |
A/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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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 2억 3240만엔 | 1억 1843만엔 (1895년) |
1.96 | ||||||||
러일전쟁 | 18억 2629만엔 | 5억 3525만엔 (1905년) |
3.41 | ||||||||
1차대전 및 시베리아 출병 |
15억 5368만엔 | ||||||||||
만주사변 | 18억 8338만엔 | ||||||||||
2차대전(중일전쟁 포함) | 2036억 3634만엔 |
류큐[편집]
류큐 왕국은 1609년 사츠마 번에 의해 복속된 이후로 줄곧 일본의 속국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류큐는 청나라의 속국이기도 하였다. 새로이 출범한 일본 제국은 류큐의 왕을 류큐의 다이묘로 격하시키고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에 청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발생하였으나, 대만 원주민에 의해 류큐 어민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일본 본국이 이에 시비를 틀고 대만에 출병하자 쓸데없는 외교문제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았던 청나라가 귀차니즘에 일본의 류큐지배를 용인해버린다. 이에 분개한 류쿠는 독립을 선언하고 죽창을 들었으나 일본에게 진압당하고 결국 류큐를 둘러싸고 대결할 라이벌이 사라진 일본 제국에 의해 류큐 왕실은 후작으로 봉해지고, 류큐 왕국은 폐지되어 오키나와 현이 된다.
조선[편집]
쇄국체제를 굳게 유지하던 중국과 일본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는 중국과 일본의 개방에도 불구하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반서양정책에 의해 쇄국화된 상태였고, 일본은 페리 제독에 의해 개방된 후 한창 근대화되고 있었다.
일본은 C급전함인 운요호를 보내 조선과 의도적으로 시비를 틀게 한 후 이를 빌미로 강화도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조선을 강제로 개항하였고, 강화도조약을 맺음으로서 조선을 자주지방인 독립국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중국과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조선은 류큐와는 달리 청나라로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선이 자주지방이 된다는 뜻은, 사대교린질서의 청 속방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므로 청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조선을 잃은 것이다. 반면 일본도 조선을 일본의 세력권에 편입시켜야 일본 본토의 안보를 확신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중국과 일본의 대결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청은 사대교린질서에 입각해 덩저우에 주둔하고 있던 화이군 육영 3,000명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청은 나약한 조선군대를 쉽게 진압하고, 대원군과 회담을 벌였는데, 회담을 벌이던 도중 우장칭은 대원군 납치계획을 완료하였고, 마젠종은 명령조로 사대교린질서를 들먹이며 대원군을 납치하게된다.
그리고 이후에 청이 조선을 보는 시각은 코메디스럽게도 근대 국제법질서에서 보는 종속국의 위치를 강요했다. 슈펠트 주청미국대사가 하도 사대교린같은 서양에 씨알도 안먹히는 개념을 조약에 삽입하지 말라해서 기존의 사대교린 질서가 아닌 근대 국제법질서에서 말하는 종속국(식민지)의 위치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후에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가 조선의 자국 주둔군 3000명 중 1500명을 차출해갔다. 이를 호기라고 생각한 일본은 조선의 개화파 일당을 사주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종-민비세력의 카운터에 의해 조선의 개화파는 쫓겨나고 일본에도 그 불씨가 떨어져 일본 공사관이 반달당하는 사건을 겪게된다.
하지만 일본은 이 사건을 외교 테이블로 끌고가 조선으로부터 배상금을 뜯어내고 상시주둔군을 배치할 권리를 획득하는 등 단단히 호구를 잡는 한편, 조선에서 문제를 확장시키길 원치않던 청나라와도 텐진 조약을 체결해 중일간 대결모드는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10년 후 조선에서 동학당이 대거 죽창을 들고 일어나자 버틸수가 없던 고종-민비정권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에 대규모 군세를 파병하였고 조선에 파병된 이들 양국군간 충돌이 일어나 결국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에서 근대국가 일본은 전근대국가인 청나라를 원사이드로 쳐발랐다. 심지어 일본 해군과 전력이 엇비슷했던 청국 해군도 일본 해군에 대패하고 청나라의 주력전함 중 하나였던 진원함은 일본 해군에 나포되어 버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조선간의 주종관계를 청산시키고 청나라로부터 2억냥의 배상금과 청의 영토였던 대만, 요동반도, 팽호열도를 삥뜯었다. 이 중 요동반도는 중국에 눈독을 들이던 러시아가 칭구인 독일,프랑스를 꼬드겨 일본에 압력을 행사해 반강제적으로 중국에 반환시켰고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하는대신 3000만냥의 배상금을 추가로 획득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요동의 남만주철도가 호시이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적대관계가 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때 일본은 러시아에 비해 국력에서 열세였고, 러시아도 쓸데없이 동아시아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기에 양측은 조약을 통해 충돌을 완화하고자 했으나 양측간 의견차이로 번번히 키배가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조선왕조의 정치판에서는 일본과 손을 잡은 대원군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민비 라인이 친러노선을 밟았는데, 일본은 후자 파벌이 러시아 세력을 조선에 끌여들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조선 내 친러파의 주축인 민비를 제거하였다.
하지만 민비가 죽자 후덜덜해진 고종이 아라사(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역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고종은 러시아를 새로운 천조국으로 떠받들고 러시아에 온갖 이권을 퍼주며 러브콜을 열렬히 보내어 일본의 심기를 자극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러한 고종의 러브콜을 쌩까고 고종이 퍼준 이권만 호구잡은채 일본과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하여 대조선외교에서 일본과 조정모드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된 고종이 씩씩거리며 러시아 공사관을 나와 자신이 조선의 황제임을 선포함으로 인해 일본과 고종과의 관계도 완화되게 된다.
그러나 대한제국 고종정권의 일관되지 못한 외교정책(박쥐외교)은 일본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에서 온건파가 강경파에 의해 실각하고, 실권을 장악하자, 그들은 어전회의를 열어 만주와 조선을 점령해야 된다는 모험주의적 노선을 주장했고, 그 노선의 일환으로 일본이 탐내고 있던 만주를 군사력으로 점거하고 조선의 용암포를 점령하자 일본은 안보에 중대한 위기가 도래했음을 통감했으나,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고자 만한교환론을 근거로 러일교섭을 벌이게 된다.
일본은 조선을 먹고, 러시아는 만주를 먹는다는 구상을 일본측에서 제시했으나, 러시아에서 "좆까, 다쳐먹을거야"하는 바람에 무산이되고, 결국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완공이전에 동아시아의 러시아 세력을 분쇄하기로 결의하였다. 따라서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뤼순 항에 있던 극동함대를 선제공격함으로 인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러시아와 불화관계였던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밀어주었다. 왜냐하면 영국은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으로 근동에서는 흑해에서 일어난 크리미아 전쟁, 중동에서는 영국식민지를 통한 중동방어, 극동에서는 일본을 통한 러일전쟁을 지원하고 있었고, 미국의 경우 만주철도를 얻고싶어했으나, 러시아가 무작정 만주를 쳐먹는 바람에 그것이 무산될 판이었다. 그래서 일본을 적극 밀어줬다.
일본은 전비의 약 70%를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융자받았다. 반면 러시아는 전비의 약 60%를 독일과 프랑스의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았다.
당시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언론 및 여론은 일본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뒤집고 일본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자 점점 러시아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의 금융기관들이 러시아에 대한 대출을 거절하자 러시아는 전쟁 자금줄이 막혀버렸다.
결정적인 사건은 러시아 발트함대의 전멸인데, 이는 영국의 공작이 꽤나 먹혀들었다. 영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에 자금지원을 해주었고, 극동에 함대가 없던 러시아가 발트함대를 동아시아로 파견하는 동안 러시아에서 요청한 영국항구에서 석탄공급(아마 인도, 중동쯤이라 생각된다.)을 요구했다. 영국은 좆까라고 했고, 발트함대는 마다가스카르까지 가서 석탄을 공급받고 오는동안, 일본은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아르헨티나 소유 군함 두 척을 매입하여 영국 해군의 보호로 대러함대의 전력으로 포함시켰다. 그 이후 지칠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똥송한 동해(혹은 일본해)에서 전멸당한다.
그러나 일본 또한 전비지출을 심각하게 한건 마찬가지라 일본은 봉천 전투와 츠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군을 패퇴시킨 후 포츠머스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지었다.
이 조약으로 배상금을 뜯어내지 못한덕에 협상단이 일본 국내에서 쌍욕을 먹었지만 그 대신 일본이 원했던 남만주철도를 확보하게 되었고, 부가적으로 남사할린과 조선에서의 세력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러일전쟁 승전 전리품 중 하나인 조선은 1905년 일본의 보호령이 된후(사실 보호는 개뿔), 1910년 일본에 합병되었다.
세계대전[편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사실 일본이 우겨댔는데, 초기에는 영국은 웨이하이와 홍콩을 지키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을 필요로 하여 참전을 독려했고, 실제 독일에 선전포고한 8월 4일에 일본에 이러한 사실을 전달했고, 8월 7일에는 일본해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에 준비했다는 듯이 물자, 영국은 일본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었고, 일본의 참전을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중국도 중립을 선언하고, 독일도 자오저우만을 일단 중국에 반환할 것을 밝혔는데, 이렇게 되자 가토 외상은 전쟁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영국에 요청한다. 이에 영국은 전투 지역을 일본의 해상무역 보호에 필요한 지역에 국한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의 참전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제한을 수용할리가 없었다.[3]
독일령 칭다오를 점령하고 중국에 21개조를 요구하여 1개조를 제외한 나머지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제국령 태평양 군도들을 할양받고 적백내전에 그 어떤 국가보다 길고 굵게 개입하였다. 그러나 별 소득없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였고, 칭다오도 곧 반환되었다.
당시 일본은 온건적인 민주주의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관계도 일방주의보다는 협력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가 일본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민권운동가들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민권운동은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되어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그 결실을 맺었고 이로 인해 일본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들어선 민주주의 내각은 그 권위가 취약하여 꼰대들의 무시를 한몸에 받았고, 결국 시퍼런 관동군 장교들이 본국 의회를 쌩까고 자기네들끼리 중화민국의 만주를 침략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내각의 사태를 확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명령과 3개 사단의 증원부대 파병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의 정부지시없이 한 행동이 너무 성공적이었다는데 있다. 관동군은 병력규모상으로 만주의 중국군에 비해 열위에 있었지만 중국군을 영혼까지 털어버리고 1년 만에 만주를 장악하였다.
결국 일본 내각은 불가침, 주권존중의 협정을 중국과 맺게된다. 그 이후 장악한 만주에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었다. 어쨌든 이들이 한 행동이 너무 성공적이라 정부를 무시하고 군이 지멋대로 움직이는, 군의 민관통제가 안되는 것이 일본제국의 전통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그 입지가 불안불안하던 민주주의 정부는 결국 1936년 청년장교들의 대규모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천황의 거부로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영향은 군부에 큰 인식변화를 일으켜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는데 한몫하게 된다. 의회는 비록 존속되긴 했지만, 사실상 군부정권의 들러리가 되고 만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중일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패망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에게 장제스 루트를 끊을 것을 약속받았고, 마쓰오카-앙리 협정으로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군 통행이 가능했으나, 군부 병신들이 통킹지역의 진주를 단행한다.
그리고 일본 내각은 제국정책요강에서 소련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미국 역시 마찬가지지만, 미국이 참전하는 경우 추축국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이었고, 인도차이나를 계속 쳐먹는다는 것을 결의했다. 그것이 실행되자, 미국은 미국내 일본자산을 동결하기에 이르렀고, 2차 고노에 내각은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고자 친미파인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대장을 미국대사로 임명했으며, 헐 국무장관과 교섭을 시작한다.
그러나 유럽 순방에서 돌아온 마쓰오카 외상은 지랄하고, 수정안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미국과의 협의를 무효화시키고, 소련과 맞짱까자는 나찌적 주장을 했다. 이런 미친놈을 해고하고자 고노에 수상은 총사직하고 3차 고노에 내각을 출범시켰다.
3차 고노에 내각은 도요다 데이지로 해군대장을 외상으로 임명했고, 통제불능한 군부의 남 인도차이나 진주가 결정되자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직접회담을 제의하게 이른다. 한편 히틀러는 일본이 미국과 짝짝꿍하는 것에 항의하였고, 독일이 계속 연합군을 좆바르자 교섭을 중지하였다.
이에 미국은 석유수출 중단과 루즈벨트 직접교섭을 사실상 거부했으며, 이에 일본은 제국국책수행요강을 9월 6일에 발표해 미,영국과의 전쟁준비 및 외교수단으로서 일본의 요구관철에 노력, 그 노력이 무산될 경우 개전을 결정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이에 고노에 내각은 일본정부의 방침을 미 정부에 제시했고, 미국은 헐노트를 전달했다.
“ |
1.모든 국가의 영토보전 및 주권존중 2.타국의 내정불간섭 3.통상기회균등 4.비평화적 방법에 의한 태평양 지역에서의 현상변경의 반대 그리고 일본군의 중국주둔이 불법적인 것이라고 인정할 것. |
” |
이 점에 관해 일본 육군은 존나 빡쳤고, 도조 히데키 육상과 고노에 수상, 도요다 데이지로 외상이 설전을 펼치다가 지친 고노에는 사표를 제출했다. 고노에와 도조는 황족을 수상으로 천거했으나 황족내각 형성에 반대로 도조 히데키가 수상이 된다.
이윽고 군부정권은 구체적인 제국국책수행요령을 결정했고, 그 내용은 추축국과의 제휴강화, 인도차이나는 중일문제 해결시 철병, 미국의 인도차이나 진출 저지 및 미국의 일본 석유공급, 중일문제 불가침을 미국에게 요구한다는 상당히 정신병자적 내용을 결의했다. 그걸 받아든 헐 국무장관은 노무라 대사에게 추축국 탈퇴, 인도차이나 철병안하면 뒈진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당연히 도조는 이를 거부하고 진주만을 공격한다.
사실 기습이라고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1941년 12월 6일 시게노리 외상이 7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진주만 폭격을 미국에 전달하라는 전문을 주미대사관에 발송했는데, 노무라 대사가 그 문서를 받은 것은 미국시간으로 2시 20분이었다. 그래서 진주만이 기습공격이 된 것이다. 하긴 30분 전에 선전포고하는 병신이 어디 있냐?
그리고는 자신들과 비슷한 집단인 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아시아-태평양 곳곳을 휘젓다가 결국 대규모 공습과 원폭투하로 인해 항복하고 몰락한다.
현대[편집]
비록 제국은 처참하게 멸망했지만 일본은 다시 일어섰고, 오히려 이전 시대에 비해 더 선진화된 사회로 진보하였다. 세계대전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기술력과 잘 교육받은 노동력, 1억에 가까운 인구는 일본이 부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빠르게 회복되어 1952년에 전전(戰前) 경제수준을 회복하였다. 50년대의 한국전쟁 연간특수규모는 당시 일본 GDP의 3.5% 규모 선으로 결정적인 요인 수준은 아니었으나, 경기회복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4]와 인도산 저가양품의 철광석 수입특수로 인하여 일본 경제는 빠른 발전을 구가하였고,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연합군 총사령부를 앞세워 전쟁의 원흉인 재벌들을 죄다 철퇴로 찍어버렸으며, 이 덕에 일본의 트러스트 자본주의는 붕괴되고, 새로운 기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 국민들도 전전(戰前)의 파시즘적인 국민에서 전후(戰後)의 보다 평화주의적인 국민으로 바뀌어 갔으나, 7~80년대 이후 2차대전 참전자들이 대부분 죽고 그때 갓난아기였거나 일뽕에 가득 차서 국민의용대에 자원한 입만 살은 틀딱들만 남게 되며 전과 비교해 호전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의 모의 하에 일본군을 부활시키고 핵 무기를 확보 및 미국과 동맹을 체결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분노한 일본 국민들이 1960년에 대대적으로 안보투쟁을 일으켰고 결국 국민의 뜻에 굴복한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총사퇴함에 따라 재무장 계획이 백지화되기에 이르렀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주요국가들 중 유일하게 정식 군사조직이 없는 국가로 남아 있다. 현재 미국과 일본은 상호방위관계에 머무는 중이다.
안보투쟁의 영향으로 일본은 국가의 자원투자를 극단적으로 경제에 배분하게 되었고 이는 다른 분야에서는 문제점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국가의 경제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실보다는 득을 더 많이 가져왔고, 미국의 도움이 많이 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도시란 도시를 폭탄으로 쑥대밭을 만든 미군 덕에 일본에는 개발할 곳이 넘쳐났고, 강제적 재개발이 이루어져 수많은 투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극동 소련 방어선으로 일본을 밀어주기 위하여 유럽에 행해진 마셜플랜과 유사한 자금 지원을 일본에 함으로서, 일본은 그 돈을 투자자금으로 쑥대밭이 된 전국토를 일으키는데 사용하고, 이는 전쟁수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성장에 기여한다.
그리하여 일본경제는 60년대까지 10%대의 고성장을 보였고, 70년대에는 경제가 성숙기로 진입하였다. 선진강대국 클럽인 G7에 창립멤버로 가입하였고 1969년에 서독을 제치고 자본주의 진영의 제2경제대국에 등극하여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제1경제대국 타이틀을 넘볼 정도로 성장하였다.
일본과 독일의 저환율 수출로 인한 급속한 성장은 다른 경쟁국들의 경계심을 환기시켰고 결국 미국 및 기타 주요 경제국들과의 플라자 합의가 체결됨으로 인해 엔화 및 마르크 환율이 떨어졌다. 본래 240엔/달러였던 환율은 하룻밤 사이에 220엔/달러로 20엔이나 떨어졌고 1년 후에는 120엔/달러가 되었다.
이 플라자 합의로 인해서 엔화 가치가 미칠듯이 떡상하자 일본 경제에 엄청난 버블이 끼게 되었고, 비록 그것이 환율 변동에 의한 착시일지라도 일본의 경제력이 몇십% 뻥튀기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때 이 버블에 취해서 환율 변동에 대한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는 커녕 갈라파고스화가 일어나 스스로 몰락하게 되었다. 버블 붕괴로 인해 경제는 침체하고 되었고 부실채권이 급격히 늘어나 많은 은행들이 파산하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단카이 세대의 은퇴라는 인구사이클 폭탄을 맞게 되었으나 일본의 정부와 사회가 이에 대한 대국적인 대처를 제대로 못함에 따라 장기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정권때 고강도의 개혁과 양적완화로 살아나는듯 했으나 리먼 쇼크로 일본은 또 한번 불황에 빠지게 되었고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한때 한물간 국가로 취급받게 된다. 하지만 이후 아베 신조의 집권과 아베노믹스라는 또 한번의 양적완화와 근본적인 구조개혁으로 일본은 장기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반등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의 집권과 함께 극우화도 진행된다는것이 염려스럽다.
현재 역대 최장기간 총리로 지냈던 아베 신조 총리가 사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