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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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번 薩摩藩 / Satsuma Domain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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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카고시마 |
국가 | 일본 |
대륙 | 아시아 |
인종 | 일본인(큐슈인) |
추가 정보 | |
지도자 | 초대: 시마즈 이에히사 / 11대: 시마즈 타다요시 |
언어 | 일본어(큐슈어) |
종교 | 불교, 신토 |
개요[편집]
센고쿠시대 일본 큐슈 남부의 세력가였던 시마즈 가문이 건설한 웅번 중 하나이다.
일본의 천손이 강림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터라, 메이지 유신 때는 진무천황의 동진을 예를 들어 정통성 입증의 '이미지 마케팅'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사천전투에서 명과 조선의 연합대군을 사츠마군 단독으로 쳐바르는 위엄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류큐를 정벌하고 개화기에는 일본의 토막전쟁의 주역이 되어 근대화의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던 번이다.
이 지역 출신들은 폐번치현 이후에도 일본 제국의 주요 요직을 꿰차 사실상 없어진 후에도 제국의 실세역할을 계속한 번이기도 하다.
역사[편집]
전근대시대[편집]
센고쿠시대 시마즈 세력은 큐슈 남단에서 일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북큐슈까지 노릴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렸다.
이에 당시 북큐슈의 지방 중 하나인 분고의 다이묘인 오토모 가문은 시마즈 가문의 이러한 기세에 오줌을 지리고 본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SOS를 치게 되는데, 당시 본토를 거의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기회에 큐슈의 지방충들을
제압하기 위해 SOS요청에 호응한다.
따라서 시마즈는 도요토미와 대결하게 되는데, 시마즈는 분전했지만 도요토미의 크고 아름다운 물량을 막아내지 못하고 GG치게 된다.
도요토미는 시마즈를 쳐바르긴 했지만, 시마즈 가문의 포텐을 알아보고 시마즈 가문에 사츠마와 오오시마의 두개 국의 통치권을 주고
자신의 측근으로 영입한다. 그에 따라 시마즈 가문은 도요토미의 측근들만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임진왜란에 4군 선봉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도요토미님의 응딩이맛을 잊지 못하고 서군으로 참여했지만 소극적으로 참여한 덕에 원래 영지의 통치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그대로 인정받는다.
사실 이를 두고 도쿠가와는 내심 뒷통수가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뒈질때도 사츠마 쪽을 향하게 묻어달라고 했다.
아무튼 그 덕분에 사츠마는 에도시대에도 강력한 번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사츠마는 17세기 초반에 석고가 60만석(1석=1인으로 치므로 인구도 대략 그정도이다.)이었으나
류큐를 정벌하고 류큐를 속국으로 삼음에 따라 류큐의 석고 12만석을 추가하며 72만석의 국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18세기 전성기에는 석고가 86만석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에도시대의 거품경제가 꺼지자 사츠마도 상태가 병신이 된다. 오죽하면 덕정령까지 발동했다. 덕정령이 뭐냐면 마을 한복판에서 상인들이 구매한 사츠마 채권을 회수하여 그 채권을 보유했던 상인들이
보는 앞에서 채권을 불로 태워버리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은 꺼지지 않았는데 이는 사츠마 지역에 유난히 식충이 사무라이들이 많았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이러한 병신같은 상태는 19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나 11대 번주인 시마즈 타다요시가 번주가 되어 재정개혁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다시 막강한 번으로 날아오르게 된다.
시마즈 타다요시는 갓양의 우수성을 일찌기 깨닫고 서양식 공장을 사츠마에 건설하였다. 그리고 견사산업을 육성하여 이를 재정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츠마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특산품 중 하나인 설탕 시장
에서 일본 국내유통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오사카 상인들을 내쫓고 번의 전매화를 추진하면서 여기서 또 막대한 돈을 얻어내게 된다. 이러한 개혁으로 빚을 거의 털어내고 재정자립을 이루게 된다.
근대시대[편집]
이렇게 사츠마가 다시 날아오르자 에도 막부의 취급 클라스도 올라가게 된다. 에도 막부는 사츠마의 공주를 정실로 맞아들였고 이로 인해 사츠마는 에도 막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흑선의 내항이후 일본 내에서 번진 '쇼군빠 VS 천황빠'대전에서 사츠마는 쇼군 편을 들게되고 개항을 제한적으로 하자는 화혼양재론을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사츠마의 사무라이(라 쓰고 산적수괴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산적수하들이라고 읽는다)가 영국상인을 일본도로 쳐죽이(고 물건까지 훔쳐감)는 나마무기(절도 및 살인) 사건이 발생, 영국과 트러블이 생기면서 발생한 사츠마-영국전쟁(사츠에이 전쟁)에서 사츠마가 영국함대와 대결하면서 사츠마의 정치이념 또한
바뀌게 된다. 사실 사츠마-영국 전쟁에서 사츠마가 결과론적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포격으로 마을과 서양식 공장이 타버리자 갓양의 우월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화혼양재론을 폐기하고 근대화를
추구하게 되며, 막부 지지파에서 천황 지지파로 돌아서게 된다. 이에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던 쵸슈, 토사, 히젠 등의 번과 동맹관계(삿쵸동맹)를 구축하여 막부 토벌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가 무진전쟁(보신전쟁)이
다.
이 전쟁에서 사츠마와 동맹군이 승리하면서 에도 막부는 멸망하고 일본 제국이 새로이 등판하여 일본을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사츠마를 비롯한 번들은 일본 제국의 폐번치현 정책으로 통수를 맞고
폐지된다. 사실 막부 토벌을 주도한 집단이 막부체제를 극혐하는 하급 사무라이들이었고(그와중에도 사이고 다카모리는 도적질만 해댐), 사츠마 같은 번들이 이들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었다. 대신 일본 정부는 사츠마 번을 뺐는대신
울지마라고 시마즈 가문을 오등작의 공작 작위에 봉한다.
이에 승복한 시마즈 가문과는 달리 위에 언급했듯 사무라이와 병졸 계층이 인구의 25%를 점할 정도로 이들 계층이 많았던 사츠마에서는 일본 제국의 근대개혁에 대한 불만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ㄴ 는 지들이 무기뺏겨서 도적질 못하게 되니까 땡깡부리는거지.
결국 사이고 타카모리 산적수괴새끼를 수장으로 한 산적떼와 그들과 손잡은 헬조선 민씨일가와 로스케들이 일어섰다. 일본 제국 수립후 최초의 내전이었는데 이를 일본의 서남부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서남 전쟁(세이난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에서 사이고의
산적떼들은 큐슈 남부를 장악하고 북부로 진공했는데, 과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2군 수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건축한 일본의 3대 성인 쿠마모토 성의 어마무시한 방어력에 막혀서 결국 와해되고
진압된다. 이로 인해 사츠마 번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여담[편집]
- 일본에서는 고구마를 '사츠마이모'(줄여서 '오사츠')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가 전통적으로 사츠마에서 고구마를 많이 먹었고 그래서 고구마로는 이 지방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 귤을 영문으로 사츠마(Satsuma)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도 귤이 이 지역의 산물인 것과 관계가 있다.